평범한 공간이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추억을 간직할 때 그러하다. 매일 지나치면서 마주하는 꽃집, 카페, 슈퍼가 이전과 다른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장미 한 송이를 사러 간 꽃집에서 주인과 나눈 작은 대화로 기분이 좋아졌을 때 세상의 모든 꽃집이 아닌 그 꽃집에서 나의 꽃 이야기는 시작된다. 카페도 마찬가지다. 업무상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며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던 카페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한다면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얼마나 충만할까. 나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카페, 그리고 하나의 테이블만이 들을 수 있는 사연들. 김종관의 『더 테이블』을 읽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그 카페를 상상한다. 누군가는 영화로 만났을 이야기.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오롯이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같은 공간, 같은 테이블에서 마주한 네 커플. 서로에 대한 감정을 서툴게 말하며 서로에게 대해 다가가는 예쁜 커플(경진, 민호), 유명 여배우와 예전 남자친구의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남녀(유진, 창석), 상견례 대행을 부탁하는 자리로 만난 가짜 모녀(은희, 숙자), 서로가 사랑하면서도 결혼을 선택할 수 없는 커플(혜경, 운철)의 사연을 차례로 들여주는 이야기. 순간순간 나는 테이블이 된다. 상대가 모르게 조금씩 마음을 다스리는 감정을 읽는다. 에피소드 중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알려주는 은희와 자신의 딸이 결혼했던 날짜와 같다며 웃는 숙자. 가짜 모녀 사이를 연기하는 이들이지만 어느덧 진짜처럼 마음을 전하고 나누는 그들의 이야기는 먹먹하면서도 따뜻하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랑하면서 서로를 선택하지 못하는 혜경와 운절의 대화가 맴돈다.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 아픈 이별인데도 담담하면서도 차분하게 한 컷 한 컷 찍었을 것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의 분위기,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어떤 느낌으로 이 책을 읽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감각적이면서도 섬세한 연출로 담아냈을 인물의 내면. 그리고 테이블에서 벗어난 그들의 다른 이야기는 어땠을까. 그런 이야기가 이 책에 있다.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치 어딘가에서 그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이미지와는 다른 감각의 글들이다. 영화 「더 테이블」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공간에 대한 이야기들. 감독 김종관의 만들고 싶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김종관 감독의 팬이라면 이 책을 통해 더욱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간 텅 빈 공간에 이야기들이 남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도, 창밖 거리에도, 내가 보았던 것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203쪽)

 

 인생의 중요한 일은 그곳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어느 테이블 어느 의장에 앉은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다. (206쪽)

 

 아주 짧게 머문 그 공간에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을 그들. 어쩌면 그 공간이었기에 가능했을 마음은 아니었을까.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순간을 담아두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단 하루 동안 그 테이블에서 벌어진 일들, 단 하루 동안 그 테이블이 듣고 느꼈을 감정들. 만남 혹은 헤어짐이 있는 공간, 더 테이블이다. 따뜻한 온도가 필요한 시기, 당신과 마주하고 싶은 공간, 더 테이블이다. 

 

 그런 공간을 생각하자니 저절로 추억에 빠져든다. 한 바퀴를 도는 게 정말 힘들었던 학교 운동장은 이제 너무 작은 놀이터로 변해버렸다. 시험 때마다 자리를 잡겠다고 줄을 섰던 대학 도서관에서 빈둥거리던 시절도 그립다. 그 도서관은 학교가 이전했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공간과 후배가 아는 공간은 다른 것이다. 봄이면 벚꽃이 예뻐서 사진 찍으러 오는 외부인이 정말 많았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언제나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소중하고 아름답다. 윤대녕의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속 공간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사라진 공간과 여전히 우리 곁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의 추억도 들려주고 싶다. 카페과 같은 역할을 했겠지만, 나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다방, 그리운 주황색 공중전화기, 한때 열심히 다녔던 노래방, 말만 들어도 괜히 설레는 공항과 말하는 것으로도 마음이 아픈 병원. 김종관의 책에서 만난 이들과 달리 윤대녕의 책에서 마주하는 이야기는 모두 자신과 친구와 연인, 그리고 가족이라서 그런지 공간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기억하고 묘사하는 공간은 왜 이리 멋지고 매력적이란 말인가.

 

 어둠이 내리면 도서관 내부는 조용히 웅성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만의 자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즈음이 바로 유령들이 깨어나는 시각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돌연 긴장한 상태가 되어 사위를 두리번거리거나 거역하기 힘든 호기심에 이끌려 어두운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말해 무엇하랴만 도서관은 죽은 말들의 세계였고 그러므로 밤마다 유령들이 출몰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사실상 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책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고 혹은 저자가 살아 있다고 해도 글쓰기를 마치는 순간 필연적으로 유물로 변하게 마련이었다. (205쪽) 

 

 우리가 기억하고 우리를 기억할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 온기를 만들어 준 사람들도. 그냥 밥 한 끼가 아니었던 식당, 수많은 사람들의 들고나는 보통의 영화관이 아니었던 그 공간, 우리들의 약속 장소였던 그 카페.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 그곳에서 매만졌던 커피 잔.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내 표정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만의 더 테이블은 여전히 그곳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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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에는, 그래도 좀 걸었다. 내 기준의 걷기로 제법 걸었다. 목 디스크로 언니가 입원한 6월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더위가 몰려오고 비가 오기 시작하니 점점 꾀가 났다. 징검다리처럼 걷다가 결국엔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신발을 신는 현관까지 나가지를 못했다. 나갔다 하더라도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도는 게 아니라 잠깐 바람만 쐬다가 들어오고 말았다. 그리고 가을이 되었다. 걷는 즐거움을 그리워하는 계절이 되었다. 적당한 바람과 적당한 햇빛이 나를 유혹하는 계절. 장석주의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을 읽으면서 천천히 걷고 싶어졌다. 아주 천천히 걷다가, 앉을 만한 곳이 있으면 그냥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싶어졌다.

 

 걷기의 즐거움은 풍부한 감각적 경험을 낳는다는 데서 비롯한다. 나는 풍경을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며 걷는다. 걷기는 저 바깥에서 내 안으로 전달되는 소리와 냄새와 시각적 자국들을 바탕으로 한 사유와 상상력의 촉매제다. 걷기에 몰입하는 사람은 시공간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열어젖힌 채 세상의 풍경들을 제 안으로 받아들인다. 걷기는 이것들을 모아 스스로를 빚는 성분으로 삼는 것이다. 또한 걷기는 관능적 기쁨을 되살리고, 건강에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나를 오롯이 나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수단이다. (233쪽)

 

 장석주가 들려주는 그의 삶은 단순하고 평안한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자유로움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의 삶에 정착할 때까지 그 과정은 단순하고 평온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의 평정과 고요가 찾아오기까지 수많은 파도가 일렁이며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을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달래려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는 장석주의 그 어느 시절처럼, 출판사를 접고 시골로 내려와 살기로 한 결정한 그 시절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힘든 시기를 견뎌냈기에 이렇게 편안하고 빛나는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그가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건 특별하지 않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미 겪어온 그 계절의 변화를 마주할 때마다 놀랍고 감격스럽다. 그러니 봄이 되면 어김없이 모란과 작약의 황홀함에 빠져들고 여름의 건강한 초록에 반하는 것이다. 이건 내가 시골에 살아서 잘 안다. 장석주의 글에는 자연, 걷기, 글쓰기,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것이 그를 이루고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 글을 쓰는 일. 한눈을 팔지 않고 오롯하게 그것을 해내는 일. 누군가는 그게 직업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고 한 손에 책을 들고 숲을 걷는 장석주의 삶은 그에게 최고다. 문득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나이만큼 먹었을 때 나는 그처럼 살 수 있을까, 생각했다. 걷고, 읽고, 사랑하고, 쓰고 단순하게 사는 삶. 복잡하지 않고 여유가 있는 삶.

 

 장석주의 시골 생활과 서재는 이미 잘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는 건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아들은 유유자적 책을 읽고 어머니는 갖가지 채소를 심었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과 된장찌개를 먹는 단순한 일상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리움이 되었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일상의 적막함이라니. 농담처럼 결국엔 다 혼자라고 말하지만 정작 혼자가 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미 책에서 배웠다 하더라도, 안다고 생각해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 그것이 인생이다.

 

 단 일 회의 편도여행, 그것이 인생이다. 지도 없이 떠난 편도여행에서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을 헤매고, 구렁텅이에 빠져 벗어나려고 고단하게 허우적이며 안간힘을 쓰는 사람도 어딘가에는 있는 법이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절경을 만나 뜻밖에 횡재한 기분인 적도 있었다. 인생이라는 편도여행은 우연과 불운들, 기이한 행운과 엇갈림의 연속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편도여행은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음, 그 불가피성으로 이 여행은 슬픔과 아쉬움, 그리고 덧없음과 감미로움이라는 긴 여운을 남긴다. (119~120쪽)

 

 인생의 오후를 가장 빛나게 살고 있기에 아름다운 것일까. 문장을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을 얻는다. 이처럼 편안한 시인의 산문집을 읽다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책이 있는데 바로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이다. 아마 나 아닌 누군가도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일상과 사유, 그리고 자연을 노래한 점에서 정말 닮았다. 눈에 보이는 자연, 피부에 닿는 계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그대로의 기록이다.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글을 읽는 우리는 이미 잘 안다.

 

 노란 은행잎을 주워 담으며 알록달록 단풍을 즐기는 사이 ‘가을이 되었다’는 말은 곧 과거가 될 것이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자주 깨던 지난여름이 그러하듯. 우리는 그 계절을 그리워한다. 지겨워하고 그리워한다. 겨울이 시작되는 날, 이런 문장을 다시 읽으리라.

 

 겨울 아침의 서리 사이로 반갑기 그지없는 소문이 들려온다. 미美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그걸 직감하는 게 평생, 계절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고 기쁨이다. 우리가 그런 욕구를 느끼는 건 우리 외부의 것들 때문이 아니다. 질문들과 그 답을 얻으려는 노력은 우리 내부에서 나온다. (중략) 햇살은 언 풀잎들에 고루 닿고, 일방적인 광경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특별한 광경으로 불타오른다. 아직 똑바로 선 잡초들은 순간적으로 얼음과 빛의 셔츠를 입고 마법의 지팡이가 된다. 이 첫 빛은 작은 연못과 소나무 숲의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 이제 은빛은 그만, 분홍을 보라. 더할 나위 없는 은은한 연초록의 분출을 보라. 오직 이 시간만이, 늘 새롭고 신선한 새벽만이 연출할 수 있는 광경이다. (『완벽한 날들』,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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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7-10-19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지금도 나름 <완벽한 날들>로 살고 있는걸지도 몰라요.. 그저 조금 더 나아진 모습으로 나이들길 바라는게지요^^

자목련 2017-10-20 15:34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 그게 가장 완벽한 게 아닐까 싶어요.

2017-10-19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0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통의 연인은 종종 다툰다. 사소한 싸움으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사랑이 더욱 단단해지기도 한다. 보통의 연인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쪽에서 지나치게 사소한 것에 자주 화를 내고 집착이 심해지면 둘의 관계는 어긋날 수밖에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감싸 안아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한 짓이다. 그러니까 내가 더 많이 사랑하면 괜찮을 거야, 내가 더 이해하면 괜찮을 거야 믿으며 만남을 지속해서는 안 된다. 쉽지 않겠지만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강화길의 소설을 읽고 확신했다. 강화길의 단편집 『괜찮은 사람』과 장편소설『다른 사람』은 폭력(데이트 폭력, 왕따, 온라인 댓글 폭력)을 다룬다. 

 

 강화길의 단편에서 공포는 부드럽게 조성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남자친구(「호수-다른 사람」), 모두가 선망하는 유치원(「니꼴라 유치원- 귀한 사람」, 완벽한 연인(「괜찮은 사람)」가 만들어내는 공포는 처음엔 그들의 삶에 합류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들과 교류하여 그들과 같은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면 제법 괜찮은 사람처럼 보일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호수-다른 사람」속 민영을 끔찍하게 챙기며 사랑하는 그의 남자친구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호숫가에서 민영이를 해친 범인이 남긴 단서를 함께 찾아보자고 진영에게 그곳에 가자고 했을 때 진영은 완강히 거부해야만 했다. 그에게 전해지는 섬뜩함과 두려움을 그대로 밀고 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건 진영에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진영뿐 아니라 강화길의 소설 인물이 대체로 그러했다. 답답할 정도로 상대의 말을 믿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생각한 것이다. 타인의 평판이 중요하기도 했다. 매일 만나는 사랑하는 이가 한순간 공포의 존재가 된다는 걸 믿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것이 나름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 이야기할 때면 몸의 어딘가에 난 깊고 붉은 상처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쓰리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묵직하게 몸을 짓누르는 느낌. 하지만 언제 어디서 다쳤는지는 모르는, 나도 모르게 몸에 박힌 상처를 발견하는 기분. 그래서였다. 나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털어놓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호수 - 다른 사람」, 19쪽)

 

 그래서 진영은 말을 아꼈던 건 아닐까.「니꼴라 유치원- 귀한 사람」속 나도 그랬을 것이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지만 유치원 원장에게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유치원만 졸업하면 아이의 미래가 밝고도 환한데, 대기자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가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했으니까. 

 

 뒤늦은 후회를 했을 때 우리는 되돌릴 수 있는 기회라는 걸 놓치고 만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면서 스스로 괜찮다고 다독인다. 결혼 예정인 「괜찮은 사람」의 ‘나’처럼 말이다. ​약혼자와 함께 그가 사 둔 집을 보러 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 소설에서 민주는 내세울 게 없는 존재다. 약혼자에게 비하면 그렇다. 그래서 그와 결혼을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의 폭력과 공격은 감싸 안아야 할 것이었다.

 

 나는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 빈약하고 허름한 트랙에서조차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불안은 순식간에 번지는 곰팡이와 같아서 쉽게 눈에 띄었고, 그러면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느끼는 것과 정말로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건, 굉장한 차이였으니까. (「괜찮은 사람」, 88쪽)

 

 그 집을 찾아가는 과정은 괴기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 내부도 그렇다. 불편하고 거북하지만 그가 설명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면 별일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다. 더럽고 흉물스러운 풍경, 고약한 냄새, 어느 하나 산뜻하지 않다. 정말 그가 그토록 바랐던 집이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돌아가자고 말해야 했지만, 말하지 못한다. 알면서도 여기서 끝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민주는 계속해서 괜찮은 척한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소설 속 인물은 뻔히 보이는 결말을 향해 걸어간다. 두렵다고, 싫다고,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다른 길을 찾으려 하지 않거나 그곳에 계속 머문다. 어쩌면 그건 강화길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폭력, 일상이 된 불안과 공포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려는 의도는 아닐까. 괜찮다고 말하는 목소리의 떨림을 알아채야 한다고. 더이상 괜찮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그에 비하면 장편소설 『다른 사람』에서 강화길은 작정하고 끔찍한 폭력을 들려준다. 직장 상사인 남자친구에게 다섯 번째 폭력을 당하고 경찰에 신고한 진아. 사건이 언론이 알려지고 회사를 관둔 진아의 삶은 온전할 리 없었다. 피해자인 진아가 설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진아가 온라인 댓글을 보고 과거 누군가를 떠올리고 소설은 확장된다. 그러니까 진아 혼자만이 아닌 단아, 유리, 수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강화길은 진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회 전반의 폭력을 다룬다.

 

 서울의 대학으로 편입을 하기 전 진아가 다녔던 지방의 대학교, 그리고 진아의 친구들. 그들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잊고 있었다고 믿었던 상처, 시간이 지났으니까 괜찮아졌을 거라고 믿고 싶었던 시절. 폭력을 행사하며 피해의식이 있다고 말하는 나쁜 남자. 아무렇지 않게 성공가도를 달리는 남자.피해자였음에도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진아, 유리, 수진의 고통.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호감을 갖고 만나 사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교류가 아닌 일방적인 폭력,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 예상했지만 폭력을 묘사하고 고통받은 일상을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소설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자애들이었다. 해도 되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더 많이 배운 여자애들. 된다는 말보다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란 여자애들. (59쪽)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지? 혼란스러울 때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228쪽)

 

 그렇지 않은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 그렇게 대단하지도 엄청나지도 않는 사건. 그러나 어넺나 존재해왔던 살마. 이것이 나의 방법이다. 누군가에게 끝없이 편지를 쓰는 것, 혼자 책 속에 파묻히는 것,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것. 그러나 때때로 그 모든 것은 날조된 기록이 되기도 한다. 내가 당신 일을 서술할 때가 아니다. 내가 저지른 일을 적어나갈 때다. 나는 여러 버전의 기억들을 쓰고 또 쓴다. 왜냐면 클리세는 문을 닫고 나오는 것까지만 나올 뿐이니까. 닫힌 문을 열기 위해서, 혹은 문들 다시 닫아버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너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쓰기도 한다. (332~333쪽)

 

 나는 어떻게 자랐는가. 지금의 나는 조카나, 후배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가슴이 답답했지만 『다른 사람』속 진아, 단아, 수진은 더이상 수동적 삶에서 벗어나려 한다. 리베카 솔닛의 글을 빌리자면 침묵하지 않는다. 두렵고 무서워서 스스로를 가둔 방에서 무수한 질타와 시선을 감내하며 나오는 중이다. 리베카 솔닛의 문장에서 언어 대신 소설을 넣어 읽어보았다. 강화길의 소설을 통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언어가 추구할 가장 진실 되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세상을 또렷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잘 보도록 돕는 것이다. 언어와 그가 반대로 쓰였을 때, 우리는 우리가 곤란에 처했고 어쩌면 무언가 은폐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중에서)

 

 강한 흡입력으로 끝까지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구성과 전개, 앞으로 어떤 결말이 나올까 기대하게 만들었다. 어떤 결말을 만들어야 할까. 피해자가 숨지 않는, 혼자만의 방법으로 고통과 싸우지 않는, 따뜻한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그런 결말은 과연 올까. 그들이 원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대답할 수 없다. 선뜻 어떤 말도 꺼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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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사이 비가 내렸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그저 비가 오는구나, 생각하며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부산에 폭우로 많은 피해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밤이 지나는 사이,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사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집을 떠나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다. 먼지를 제거하고 주인을 잃은 이불을 빨고 시들어가는 나무에 물을 주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동생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보내온 사진에는 너무도 마른 그녀가 있었다. 왜 이렇게 말랐냐며 나는 많이 먹고 많이 자라고 했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니까, 살이 쪄야 한다고. 동생은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  8월의 어영부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가 감사하면서도 하루하루가 어렵고 힘들다고 답했다.
 
 가을이 시작되었고, 등에 조급함이 매달리기 시작한다. 하고 싶은 일이 할 수 있는 일과 같은 확률은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오후가 되니 아이들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온다. 소리를 듣노라면 달리고 싶어진다. 즐거움에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최선을 다해 노는 아이들. 건강한 웃음소리.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있었던가. 그동안 올 때마다 문을 닫고 살았던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자라는 선인장(화분의 나무들도 다르지 않다)을 보는 일은 어떤 시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아주 미세하게 자신을 단련시키는 어떤 것.

 

 

 

 

 

 

 황정은의 인터뷰가 궁금해서 『악스트』를, 조해진과 정용준의 단편이 궁금해서 『이해 없이 당분간』을 구매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쓴 소설들 『빛 혹은 그림자』도 관심이 간다. 그런데 지금 읽고 싶은 책은 그 책이 아니다. 어제 방송에서 타일러가 추천한 작가의 책을 검색했다. 『푸른 밤』이라는 제목이 자꾸 나를 유혹한다. 여름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다. 가을밤에 여름밤을 불러올 것 같다. 왠지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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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 읽었을 때 더 좋은 소설이 있다. 기세를 몰아 그 소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정용준의 「선릉 산책」이 그랬다. 그러니까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애정으로 작성된 것이다. 물론 제16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선릉 산책』에는 좋은 소설이 많았다. 김애란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정미경의 「새벽까지 희미하게」가 특히 그렇다. 권여선, 김숨, 최은영, 최진영의 소설을 뒤로하고 정미경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정용준의 「선릉 산책」은 제목 그대로 선릉 산책이다. 스무 살 자폐아 한두운과 함께 선릉을 산책하는 하루에 대한 이야기다. 머리에 헤드기어를 쓰고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나타난 한두운. 침을 뱉는 습관이 있고 식탐이 많은 어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아니고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그저 주어진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선릉이었다. 선릉역에 선릉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곳에 선릉이 있었고 한두운과 하루를 보낼 수 없을 듯했지만 그와 하루를 보냈다. (쓰고 나니 이상하고, 내가 쓰려고 했던 게 이게 아닌데 싶다.)

 

 ‘숲 속으로 낮이 사라지고 있다. 그늘이 넓어지고 대기가 희뿌옇게 변했다. 한여름 늦은 오후가 이렇게 어두워질 수도 있나. 구름도 바람도 없는데, 태양은 저리도 맹렬한데 왜 숲은 어둡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한두운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윤곽선도 없고 희미한 얼룩 같은 것도 없었다. 곰곰 생각하니 걷는 내내 그림자를 본 기억이 없다. 같은 길을 돌고 또 돌았다. 선릉에서 정릉으로 정릉에서 다시 선릉으로. 한두운은 중력 없이 저항 없이 허공에 한 뼘 떠서 쭉 미끄러지듯 걸었다.’  (「선릉 산책」, 32~33쪽) 

 

 한두운은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것들을 이름을 호명하고 나무 각각의 이름을 말한다. 나무의 이름을 모두 알다니, 그것이 나에게는 신기한 광경으로 보인다. 일당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에게 한두운은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존재이다. 한두운은 혼잣말을 하거나 침을 뱉는 행동으로 인해 시비가 붙기도 한다. 나는 그저 정해진 시간이 빨리 흘러 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러다 그가 맨 가방을 메보고, 헤드기어를 벗은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견디는 하루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실감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두운을 돌봐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나와는 다른 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건 무엇일까. 나 외의 다른 이들은 모두 나와 다르다. 그러니 한두운에게 특별한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된다. 타인에 대해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짦은 하루 동안 내가 한두운을 이해할 수도 없고 나와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와의 산책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나란하게 선릉을 걷고 걷는 모습을 상상하는 네게도 말이다.

 

 정미경의 「희미하게 새벽까지」는 송이를 기억하는 유석의 이야기다. 유석의 사무실에 정수기를 팔러 왔다가 일을 하게 된 송이. 다른 직원들에 비해 내세울 게 없어 무시당하고 잔심부름 만 하던 송이.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고 지내던 송이가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는 걸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유석은 송이를 떠올린다.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 그녀가 했던 말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들. 그리고 늦은 밤 사무실 근처 놀이터에서 모과나무를 안고 충전하는 중이라던 송이, 떨어진 모과를 주어오자 안고 자겠다며 달라고 했던 송이. 함께 살지 않는 어머니와 장애인 동생에 대해 송이는 말한다. 유석도 아픈 아버지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가족 이야기를 서로에게 쏟아놓았던 새벽. 그 밤을 이어준 건 무엇이었을까. 그 밤이 그들에게 무엇이 되었을까.

 

 ‘매정하게도 송이는 나무를 끌어안고는 맞장구 한번 쳐주는 법이 없었고 유석은 미끄럼틀 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또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밤이 몇 번이었더라. 송이는 그 나무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직 그 나무였다. 나무를 껴안고 잠든 듯 가만히 있을 때도, 웃음 명상이라도 하듯 혼자서 하하 웃고 있을 때도 있었다. 자꾸 보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열시나 나갔더니 선글라스를 끼고는 나무를 안고 있었다. 꺼멓긴 한데 렌즈가 크진 않아 어찌 보면 맹인용 안경 같았다. 그런 심오하게 웃기는 광경이었는데 왜 그걸 쓰고 있는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359쪽)

 

 ‘그러니까 선글라스를 낀 채로 모과나무를 안고 있던 송이. 기억의 멀고 가까움이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강렬함으로 정해지는 거라면 그건 아마도 가장 가까운 기억이겠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달이 더 있던 놀이터는 줄이 한량없이 긴 괘종시계의 추처럼 예고 없이 스윽 나타나곤 했다. 날것의 밑바닥을 누군가에게 들켰다고 느끼는 순간, 무릎이 꺾일 만큼 힘든 순간, 어떤 석연치 않은 순간, 그리고 또……. 그 새벽에 송이는 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은?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새벽에 유석이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새벽까지 희미하게」, 378쪽)

 

 어떤 시간은 당시에는 소중함을 모른다. 나중에라도 그 소중함을 알면 다행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절에 만났던 사람, 어느 시절에 잠시 잠깐 스쳐 지났던 사람이 얼마나 든든한 존재였는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다. 미련하게도 우리는 그렇다. 정미경의 소설이 내게 그러한 소설이었음을 고백한다. 그의 문장에 반했고 문장을 흠모하고 흠모했던 시절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내 일부가 되었고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걸. 정미경의 소설은 언제나 나를 다른 곳으로 초대했다. 그곳은 내게 소설에서만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특별했고 소중했다. 아프리카의 붉은 분홍 사막을 상상하게 만들고 발칸반도(『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를 찾게 만들었다. 나를 능동적으로 이끄는 힘이었다. 쓰고 싶게 만들었다. 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안다. 그것이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것에 충만했다. 쓴다는 행위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았다. 쓴다는 것의 숭고함에 대해 배운 것이다.


  정오의 사막은 붉은 분홍이다.

 이 시간엔 부러 그렇지 않아도 눈을 가늘게 뜨게 된다.

 천지는 고요하고도 소란하다.

 와랑와랑.

 햇빛은 빛나는 동시에 속삭이며 부서진다.

 모래가 잔뜩 삼킨 열기운을 붉게 토해내면 대기는 부옇게 산란하며 뒤챈다.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아프리카의 별』, 7쪽)

 

 오래 기억하고 싶은 소설을 만나는 건 쉽고도 어렵다. 정용준의 『가나』, 정미경의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를 읽고 내 안에 스며든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힘들도 고통스러운 일상, 속물적으로 변해가는 나를 모른 척 외면하고 싶은 시간의 연속. 그럼에도 우리는 살고 있다. 결핍을 채우며 저마다 닿고자 하는 그곳을 향해 나간다.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인 삶, 변화를 꿈꾸는 날들. 때로 그 위대한 것들이 소설에서 파생되기도 한다. 정미경의 유작 장편소설『가수는 입을 다무네』 에서 만날 그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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