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내린 눈은 아직 다 녹지 않았다. 아파트 출입구는 여전히 눈을 밟고 오간 흔적이 남아 있다. 신문지를 깔아 두었던 현관도 마찬가지다. 눈 닿는 곳마다 눈이 그곳에 있다. 드나들 때마다 눈을 의식하고 조심조심 걸었다. 고개를 수굿하여 눈을 바라본다. 거기 눈이 있다는 걸 기억하면서 말이다. 거기 있는 존재, 그대로 인식하지 않은 채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많은 눈이 내리니 나는 그것을 분명하게 의식한다. 지난 1월 9일 밤에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침대에 눕지 전 내리는 눈을 보면서 핸드폰을 이용해 이런 글을 끄적이기도 했다.

 

 ‘눈이 창문으로 달려든다. 집 안으로 들어오고 싶은 모양이다. 전부를 다 잃고 사라져버릴 것을 알면서도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안쓰럽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밖이 환하다. 달빛이 아닌 눈빛이다. ’ (1월 9일 23시 47분)

 

 1월 10일 아침에는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비탈에 서 있는 나무는 한쪽으로만 눈을 맞고 있었다. 그 뒤쪽에는 눈을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한 몸이지만 각기 다른 곳을 보며 서로 다른 것을 생각하며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

 

 


 

 남아 있는 겨울날은 얼마나 될까. 대한(大寒)이 지나면 입춘이 올 것이고 또 봄의 전령사라면서 이곳저곳에서 꽃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항상 우리는 다음 계절을 꿈꾸는 것 같다. 어서 빨리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꽃 피는 봄에는 휴가가 있는 여름을 기다리고 무더운 날들에는 서늘한 가을이 갈망하고 낙엽 지는 가을에는 첫눈의 겨울이 오기를 말이다. 기다린다는 건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설사 그것이 언제 올지 몰라 무작정 기다린다 해도 기다리는 동안 그것만 생각하게 되니까.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지금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건 故 정미경의 소설이다. 벌써 1주년이 되었고 정미경의 단편과 미발표 장편이 나왔다. 단편집 『새벽까지 희미하게』에는 정미경의 근작 단편 5편과 그를 추모하는 작가의 산문이 있고 장편 『당신의 아주 먼 섬』에는 남편 김병종 화가의 글이 있다. 민음사에서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 새롭게 나올 거라고 한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가장 애틋한 기다림이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올 때가지 그것으로 충분한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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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8-01-29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까지 희미하게ㅡ이 단편은 벌써 읽어버렸지만.. 느낌은 넘 좋았죠. ^^ 그녀의 책들이 그림움으로 묶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자목련 2018-01-31 17:12   좋아요 1 | URL
<새벽까지 희미하게>를 읽고 있어요. 소설을 읽으니 더욱 그녀가 떠났다는 게 실감이 나요. 그리고 우리 곁에는 그리움이 차곡차곡 쌓여가겠지요.

[그장소] 2018-01-31 19:59   좋아요 0 | URL
네~이 때쯤 들어야할거 같죠?
ㅡ 그리움만 쌓이네~ !!^^
 

 

 제법 평온한 날들이라고 생각했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내년에는 올해보다 조금 더 건강해지고 조금 더 많이 읽고 조금 더 많이 쓰면 좋겠다고 혼자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게 무엇이든 더 많이 읽고 그게 무엇이든 더 많이 쓰고 싶었다.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닌 기록 같은 것. 내게 소중한 이들과 더 자주 연락하고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명 아이돌의 죽음과 화재 소식이 들려왔다. 뉴스를 보면서 큰 화재가 아니기를 바랐고 숫자가 늘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무섭고 처참한 현장의 공포는 꿈이 아니었고 현실이었다. 춥고 쓸쓸한 겨울만 쌓여간다.

 

 며칠 만에 돌아온 집에는 누군가 보낸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고 고마운 소식이었다.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사이, 고민과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이. 소식을 받는다는 건 전한 이의 마음 조각이 내게로 온다는 것이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처럼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그렇다. 또 한 해를 살았구나 생각하다 멈칫하게 된다. 삶을 안다는 건, 삶을 산다는 건 정말 어렵고도 어렵다.

 

 내년에는 어떻게 살 거냐고 물었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잘 모르겠다, 잘 모르는 것 투성이다.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면서 살고 있는가. 해보지도 않고 할 수 없다고 단정 짓는다면 어리석은 일이겠지. 그럼 내년에는 해보지 않은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해야 하나. 연말이라서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고마운 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 미안한 이들에게 미안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좀 더 다정하지 못해서 좀 더 다가가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런 나를 여전히 지켜봐 주고 여전히 사랑해주는 이들에게 고맙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인사를 건네고 싶다.

 

 연말 책 리스트는 오정희 컬렉션이다. 소장하고 있는 책은 제외하고 나머지를 살까, 말까 고민 중이다. 양장본이나 박스 구매에 대해 큰 욕심이 없는데 오정희 작가라서 자꾸만 눈이 간다. 산타 할아버지라도 만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올해 많이 울었고 착한 일도 많이 하지 않았으니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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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12-23 18: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좀더 다정하지 못해서,
좀더 다가가지 못해서,
미안하다.

앞으로도 이렇게 나이먹어가는게
인생인가 봅니다.~
서재의달인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17-12-26 10:33   좋아요 2 | URL
북프리쿠키 님,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좀 더 다정한 이웃이 되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건강하고 포근한 한 주 시작하세요^^

서니데이 2017-12-23 18: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금 더 기쁘고 좋은 일들이 앞으로는 많았으면 좋겠어요.
자목련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메리크리스마스.^^

자목련 2017-12-26 10:34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활기찬 한 주 시작하셨나요?
남은 날들 소중하게 채워요, 우리^^

수이 2017-12-23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연말 다정하게 보내시기를요.

자목련 2017-12-26 10:34   좋아요 1 | URL
다정하고 포근한 야나 님의 댓글로 따뜻한 하루 시작합니다.
야냐 님도 남은 날들 잘 보내시고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그장소] 2017-12-24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서재의 달인 소식 기쁘고 , 축하드려요 . ^^

자목련 2017-12-26 10:35   좋아요 1 | URL
반갑고, 기쁜 댓글입니다.
부족한 이웃이지만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희선 2017-12-24 0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해가 얼마 남지 않은 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다니... 피해가 적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도 않은 듯하더군요

해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지요 그런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겠지만, 거의 비슷할 것 같아요 그렇게 사는 거죠 그때 그때 일이 생기면 그걸 견디고 지내겠지요 그렇게 지낼 수 있기라도 하면 괜찮은 거겠습니다 무엇보다 건강 잘 챙기세요


희선

자목련 2017-12-26 10:36   좋아요 2 | URL
견디고 보듬고 그렇게 지내길 노력하고 바라는 것이겠지요. 희선 님도 건강하고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언제나 감사해요^^

깐도리 2017-12-30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천 화재를 보면서, 내가 사는 곳도 제천 소방서랑 발반 다르지 않ㄴ느데, 여기서 화재가 나면 어뜩하나 그 생각이 먼저 을더군요...공교롭게도 예전에 철물점에 화재가 크게 나서 소방차가 출동하고, 난리 났던 기억 나네요...소방관 징계먹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시의원 출동에서 소방헬기 부르고 말이죠 ㅠㅠ

자목련 2018-01-02 08:49   좋아요 0 | URL
네, 이곳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 더 마음이 아파요. 규정을 지키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겠지 싶어요. 깐도리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한 날들로 채워가세요^^
 

 

 재검을 받아야 한다고 연락이 왔다. 보통의 기본적인 건강 검진이었다. 채혈을 하고 혈압을 재고 간단한 문진을 했다. 위내시경 검사를 할 때도 의사가 뭔가를 검사한다고 말했지만 감았던 눈을 뜨고 그 실체를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일주일 뒤 걸려온 안내 전화에서 직원은 상냥한 목소리로 위는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검사를 하셔야 한다고 말했다. 예측할 수 있는 결과였지만 다른 과에서 재검을 받으라는 연락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검사 날짜를 잡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힘들었다. 검사를 받고 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의 시간은 기다림이었다. 일주일 동안 좋지 않은 결과를 대비해 마음을 다잡기도 했고 통장 잔고를 헤아려 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나의 몸은 자꾸만 점검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2년 전에 큰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 작은언니와 나는 스스로를 챙기려 노력한다. 때로 그런 노력은 고통을 참아내는 미련함으로 이어져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올해 작은언니는 목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이쯤이야 괜찮겠지 하고 미루다가 심각한 수준이라 입원을 했고 여전히 물리치료를 받으며 생활한다.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더 이상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고 장기 운전도 힘들어한다. 건강 보조 식품을 챙기기 시작했고 잘 마시지 않았던 우유도 꼬박꼬박 먹으려 한다. 몸이 아프다는 건 속상하고 서러운 일이다. 빠른 회복이 어려운 몸이 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일도 그러하다.

 

 내가 사는 인생의 계절은 봄과 여름이 아니다. 매일 젊음과 이별하면서도 그 젊음이 부럽지 않다고 자부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과 조금씩 늙어가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시간의 흐름을 나름 잘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건강 검진 재검 후 불쑥 불쑥 늙는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해 빠져들곤 한다.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무한대가 아니라 유한하며 줄어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시골에 살다 보니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면 만나는 분들이 모두 노인들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친구이자 이웃이었기에 언제나 나를 반기시고 예뻐해 주신다. 그분들과 함께 있는 동안 나는 활발함과 생기발랄한 청년이 되는 것이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 때 모습이 보이지 않는 분들은 요양원에 계시거나 갑자기 돌아가신 경우가 많다.

 

 늙음과 죽음은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켄트 하루프의 축복을 자꾸 떠올린다. 죽음을 앞둔 삶을 이미 지켜보았다. 때문에 주인공 대드 루이스와 그의 가족과 이웃들의 일상은 소설 그 이상의 것으로 다가왔다. 준비할 수 없는 죽음과 이별, 그리고 지난 삶을 돌아보는 시간. 그 시간이 산다는 것에 있어 무엇이 축복인지 자꾸만 생각하게 만들었다. 대드 루이스와 아내, 그들의 딸과 이웃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간다. 때로 다투고 사소한 갈등을 끝내 풀지 못하고 서로의 삶에 깊게 개입하지 못한다. 그들 중 하나는 과거의 나였으며 현재의 나였고 미래의 나였다.

 

“8월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대드 루이스는 그날 새벽 세상을 떠났고 이웃집 어린 소녀 앨리스는 저녁에 길을 잃었다가 어둠 속에서 마을의 가로등 불빛을 보고 집을 찾았다. 그렇게 그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서 날씨는 차가워지고 나뭇잎이 졌으며, 겨울이 되자 산맥에서 바람이 불어왔고 홀트 카운티의 고원지대에는 폭풍이 불고 사흘 내리 눈보라가 쳤다.” (462~463)

 

 늙는다는 건 가장 위대한 축복은 아닐까. 하지만 제 기능을 다한 육체를 받아들이는 일도 축복이라 할 수 있을까. 백세 시대를 살면서 노후에 대한 두려움은 하루가 다르게 증폭한다. 발생하지 않은 일까지 대비하면서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니까. 어떻게 늙어야 할까. 어른들 말씀이 곱게 늙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늙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럼에도 나로 존재하고 싶은 갈망을 지울 수 없다. 아름다운 노년, 당당한 노년을 살고 싶다. 김탁환의 엄마의 골목의 엄마처럼 말이다. 그저 함께 산책하는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산문집이었는데 노년의 삶이 거기 있었다. 같은 시각에 일어나 새벽마다 기도를 드리는 모습, 일흔의 나이에도 무언가를 배우는 열정은 나도 그런 할머니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키운다. 그러다가도 너무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엄마가 살지 못한 삶을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나는 어디쯤 걷고 있는 것일까. 한때는 빨리 뛰어갈 수 있기를 바랐지만 요즘은 천천히 산책하듯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는 그 길에서 멈추어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뭔지 아니? 일흔 살을 넘기며 늙어간다는 게 뭔지 아느냐고.”

   “……

   “이야기가 많아진다는 거야. 차곡차곡 이 가슴에 쌓이지. 그렇다고 그걸 전부 누군가에게 말해야겠단 생각은 안 들어. 다만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찾아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야. 네가 와서 이렇게 함께 걸으니, 네게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 것이고.” (156)

 

 그러다 보니 노년의 삶을 기록한 소설을 예전보다 더 많이 읽는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으로 등장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하루하루가 허투루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혼자 고독한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과거에 매몰된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여전히 고된 노동자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정은의 소설집아무도 아닌속 인물들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고추밭에 고추를 따러 간 하루의 일상을 담은上行에서 고추를 따고 돌아가는 이들에게 다음에 또 오라며,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 테냐, 묻는 노부인이나 채무자에게 전화를 걸어 연체금 독촉을 하는 여자가 얻은 집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상황을 들려주는 누가에선 전에 혼자 조용히 살았던 노인은 쓸쓸하고 외로운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명실속 명실의 삶은 어떠한가. 그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고독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그를 추억하며 사는 동안 그를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 정작 자신의 기억은 놓아버리고 마는 명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이제 기억뿐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억. 가지고 있다고 믿는 기억. 그러나 이것들은 다 없어진다. 나와 더불어서. 나의 죽음과 더불어서 조만간, 아마도 곧…… 아무도 실리를 모르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고 실리는 영원히 잠길 것이다. 망각으로.” (106)

 

 이렇게 앉아서 몇 번의 겨울을 더 맞게 될까. 몇 번의 봄과 몇 번의 여름을. 그녀는 생각했다. 죽은 뒤에도 실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난처한 상상인가.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노트에 만년필을 대고 잉크가 흐르기를 기다렸다. 제목을 적고 쉼표를 그리고 그 이름을 적었다.” (110 ~ 111)

 

 작은언니와 나는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요양원에 보내라며 농담처럼 진심을 서로에게 건넨다. 아마도 늙는다는 것에 대해 가장 무서운 건 몹쓸 병에 걸리는 것이리라. 아무도 알 수 없는 시간들을 살아내는 것 말이다. 기미는 짙어지고 주름은 늘어나고 꼬박꼬박 삼시 세 끼를 챙기며 늙고 있다. 병원에 가는 게 싫으면서도 조금이라도 아프면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는 날들이 많아진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힘들 지도 모른다.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할 곳이 늘었고 때때로 늙는다는 것에 마음이 요동칠지도 모르니까. 어떤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나 계획을 세우는 대신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감사를 빼먹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기를 소망한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고 기록하며 살고 싶다.

 

 늙어간다는 건, 어느 계절쯤에 살고 있다는 걸까? 젊지도 않은 나이, 그렇다고 늙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나이, 하지만 점점 여기저기 아파오는 나이쯤에 살고 있다는 건 봄·여름·가을·겨울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만이 느끼는 계절감은 있다. 계절이 바꾸는 걸 마주하면서 사랑하는 이들과 싸우고 화해하며 매일매일 늙고 있는 삶이 축복이라는 걸 먼 훗날 나의 실리로 만날 수 있다는 것. 아마도 이것이 내가 사는 계절, 그 어디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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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3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5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나루 2017-12-13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자를 추천해드려요 나이듦어 슬퍼하기보다는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해하길....

자목련 2017-12-15 12:03   좋아요 1 | URL
주어진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각합니다. 강나루 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곳곳에 눈이 내렸다. 폭설이 내린 곳도 있고 눈이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곳도 있다. 11월인데 겨울의 절정에 다다른 것처럼 세상이 하얗다. 겨울과 눈은 잘 어울리는 조합니다. 그러나 사고 소식도 들려서 걱정은 커진다. 첫눈이 내릴 때 지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을 거라고 말했었다. 이 계절에 가장 적절한 선택이다. 첫 문장으로 잘 알려진 소설이지만 때로 그 소설을 추천한 작가로 기억하기도 한다. 내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김연수. 그는 이런 글을 썼다. 사랑과 소설이라니. 사랑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사랑을 꿈꾸게 만든다.

 

 사랑이란 두 사람이 어떤 나라를 함께 여행하는 일과 비슷해요. 두 사람만이 가본 이상한 나라. 그러다가 헤어진다면 그 나라에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혼자서 국경선을 넘는 일. 출국심사를 받기 전, 그가 동고동락했던 현지인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헤어질 때가 되어 “당신은 좋은 여자”라고 말하는 건 남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지요. 그건 예의상 하는 말에 불과해요. 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별사도 있었잖아요.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며 허둥지둥 출국 심사장을 빠져나와 그 나라의 국경을 넘어가자마자, 그들은 알게 되죠. 이제 자신이 다시는 그 나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자신은 영원한 입국거부자의 신세가 되었다는 걸.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사랑했던 기억은 상투적으로 회고됩니다. 모든 여행의 기억이 낭만적으로 떠오르듯이. 그때가 되면 다들 알게 될 거예요. 상투적으로 회고되는 그 모든 기억 속에서 가장 낯선 말이 그 말이었다는 걸. 당신은 좋은 여자야.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왜 헤어진 것인지. 모두지 이해되지 않는 그 말. 당신은 좋은 여자야.

 

 김연수가 읽고 선택한 문장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가 읽은 소설과 시를 계속 말하고 있다. 소설가가 선택한 시라면 어떨까. 그의 소설과 그의 산문집은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책이다. 뭐랄까, 김연수만의 고요하고도 활동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해야 할까. 김연수가 고른 시, 그리고 시에 따른 그의 느낌. 『우리가 보낸 순간- 시』는 날마다 시를 읽는 마음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렇게 눈으로 시작된 하루는 더욱 그렇다.

 

 어떤 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고 어떤 시는 첫사랑의 아픈 기억을 꺼내온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어려운 시도 있다. 내가 읽은 시와 그가 읽은 시의 접점을 찾는 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고 이야기하는 시. 하나의 시를 통해 우리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아무 때나 꺼내 읽어도 좋은 아름다운 시. 아름답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 시가 있어 시를 통해 새롭게 만나는 세상, 그리고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장. 그리고 11월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이런 글들. 안현미의 시 「시간들」에 대한 김연수의 글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안현미의 시보다 김연수의 글이 좋아서 계속 이 글만 읽고 싶어진다. 매년 십일월이 되면 펼치고 싶다.

 

 십일월은 온몸으로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달이랄까요. 어느 밤, 무심결에 창문을 열고 집 앞 골목을 바라보노라니 작은 정원의 나무에서 숨을 쉴 때마다 한 장씩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더군요. 멀리서 아이가 달려가는 듯한 그 소리. 떨어지는 잎들을 보며 도루왕보다 더 빨리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더라면 그 희미한 소리, 하지만 마치 온 세상이 떨어져 내리는 듯 내 마음을 장중하게 울리던 그 소리를 듣지 못했겠죠. 그리고 몇 개의 낮과 몇 개의 밤이 다시 지나가고 난 뒤, 나뭇잎들은 모두 떨어져 내렸어요. 청소부는 나무의 발치에 떨어진 잎들을 한데 모아 자루에 넣었죠. 그 자루에 나무의 한 해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 소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잎이 떨어지는 소리들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 목소리들, 당신이 내게 들려준 수많은 말들도 거기에 있는 걸까요? 지나간 날의 소리들은 어떤 귀로 들어야만 하는 걸까요?

 

 11월은 유독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올해도 그렇게 지나간다. 짧은 것보다 긴 게 낫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12월에 대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올해는 11월을 견디기 힘들 뿐이다. 그래서 황현산의 산문집 속 이런 문장을 찾아 읽었다. 오직 11월을 위한 문장처럼 다가온다. 차갑고 선명한 공기를 건넨다고 할까. 11월을 향한 애정이 기지개를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  

 

 11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마른 잎사귀들이 떨어지고 나면 감춰져 있던 나무들의 깨끗한 등허리가 드러난다. 꽃 피고 녹음 우거졌던 지난 계절이 오히려 혼란스러웠다고, 어쩌면 음란하게 보이기까지 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 시절의 영화는 사라졌어도 세상을 지탱하는 곧은 형식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 남아 있다. 마른 석류보다 더 작은 새들이 주목의 붉은 열매를 쪼다가 돌배나무의 앙상한 가지로 날아올라간다. 높은 가지에서 관목 숲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져내릴 때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이제 겨울이 오면 저것들은 어디에 몸 붙이고 살아갈까. 그러나 새들은 욕망도 불안도 떨어져 쌓인 나뭇잎들 속에서 벗어두고 한 알의 맑은 생명으로만 남은 듯하다. (240, 241쪽)

 

 한 계절을 산다는 것, 한 계절을 보낸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는 11월이다. 어제 수능을 마친 아이를 둔 지인에게 고생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들에게 11월은 얼마나 힘들고 버거웠을까. 우리는 모두 11월을 산다. 아니다. 우리는 11월을 사는 게 아니라 오늘을 사는 것이다. 11월이 아니라 그저 오늘을 견디는 것. 나는 내 감정에 취해 11월이라는 달에 너무 많은 것을 주렁주렁 달아놓으려 하고 있다. 아직 11월은 끝나지 않았다. 11월의 문장도 계속되겠지만 김상혁의 시로 마무리해도 괜찮겠지. 모두의 11월을 위해, 11월의 안녕을 바라며.

 

 십일월은 내년을 기대하기에도 한 해를 돌아보기에도 좀 이르다. 자동차 정비를 핑계로 부모에게 꾼 돈으로 아이를 지우거나 그런 일을 겪고 내가 개종을 해도 지인들은, 십일월은 참 조용한 달이야, 하고 낮게 중얼거리고는 차를 따뜻하게 끓이기 시작할 만큼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애인과 모텔 전기장판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아버지를 잃게 된 어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십일월 우기에 태어났다는 신에 대해 생각하면서. (「십일월」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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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엔 오늘 첫눈이 내렸지만 이곳엔 어제 첫눈이 내렸다. 첫눈이라는 것 외에는 큰 감흥이 없다. 다만 여느 해와 다르게 첫눈이 내리는 광경을 다른 이들과 함께 보았다는 점이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첫눈을 보았다. 확인할 수 없는 크기의 첫눈이 아니라 제법 눈송이가 큰 눈이었다. 우리는 저마다 첫눈이 온다고 말했다. 교회에 도착하기 전까지 첫눈에 대해 추위와 김장에 대해 말하였다. 말을 하는 이는 노부부였고 나머지는 추임새를 거들기도 했고 웃음으로 답하기도 했다. 언제 김장을 해야 하는지, 배추 값은 어떤지, 추워서 큰일이라는 둥 소소한 일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다시 겨울을 맞고 첫눈을 보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교회에 들어서면서 나누는 인사는 역시 첫눈이 온다는 것이었다.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도 첫눈은 계속 내렸다.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눈발이 참 고왔다. 쌓일 정도는 아니라 곧 그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가을은 없다.

 

 겨울이 온 것이다. 첫눈이 내렸고 따뜻한 내의를 입을까 고민하는 날들이 되었다. 장갑은 꺼냈고 덧신을 챙겼다. 더위보다는 추위를 덜 타는 편이지만 추운 겨울은 싫다. 더운 여름은 쓸쓸하지 않지만 추운 겨울은 왜 쓸쓸한 것일까. 사람과 사람의 온도가 더해져야 겨울을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주 지진 소식은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포항에 지인이 살고 있기에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안전지역이라는 건 없다는 생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사는 게 뭔지. 마음이 계속 어지럽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할 수 있는 동력과 함께 그곳이야말로 사람의 온도가 필요하겠다 싶다. 얇지 않은 겨울이 지속되길. 적당히 두툼한 옷과 적당히 두툼한 마음, 적당히 두툼한 하루가 쌓이기를.

 

 내게도 적당히 두툼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 책에서 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두툼함을 기대한다. 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이 참여한 페미니즘 소설 『현남 오빠에게』와 최근에 배수아의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을 읽은 탓일까. 신간 소설집 『뱀과 물』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수아는 여전히 도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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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1-20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긴 오늘 비처럼 날리는 눈이 내렸어요. 처음에는 비가 오는 줄 알았어요.
자목련님이 계신 곳에서는 어제 눈이 내렸네요. 어제는 추수감사절이었다고 하는데, 좋은 시간 보내셨는지요.
저도 얼마전에 배수아 신작 소식 들었어요.
자목련님, 따뜻한 밤 되세요.^^

자목련 2017-11-22 12:37   좋아요 2 | URL
오늘은, 아침에 비가 조금 내렸어요. 완연한 겨울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서니데이 님, 감기 조심하시고 따듯한 오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