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러 간다는 건 어떤 볼 일을 보러 나가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설레는 일이고 나는 꽃이 아님에도 꽃단장을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꽃을 피운다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과 지는 꽃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여유로움, 그리고 마주한 꽃터널. 가까운 곳에 이렇게 멋진 장소가 있었는데 나는 왜 이제야 이 꽃들을 만나러 왔을까. 사진을 잘 찍고 싶다는 마음이 든 순간이다. 늦은 오후에 누리는 호사였다.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고 이렇게 귀한 것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게으름과 우울, 무기력으로 봄을 앓던 나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꽃이 지고 초록의 옷을 입은 터널을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다짐했다. 꽃 피는 봄이 아니라 사계절 내내 그곳에 있을 나무를 보러 오겠다고. 집으로 돌아와 아파트 단지를 보니 자목련도 활짝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니 더욱 우아해 보였다. 거기 있다는 게, 정말 고마웠다.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주말에는 비가 오고 꽃비가 내릴 것이다. 그리고 봄은 급하게 떠날지도 모른다. 붙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니데이 2018-04-1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벚꽃과 자목련이네요. 여긴 목련이 이제 피는 중이고, 아직 자목련은 조금 분홍빛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번주도 벌써 금요일, 자목련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8-04-16 14:26   좋아요 0 | URL
주말에 내린 비로 꽃이 지고 연두 잎사귀가 환해요. 새로운 한 주 활기차게 보내세요^^

붕붕툐툐 2018-04-1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이 찍으신 자목련 사진. 우힛~^^

자목련 2018-04-16 14:25   좋아요 0 | URL
^^*
붕붕툐툐 님, 평온한 오후 보내세요^^

2018-04-13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6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고 감동하는 건 쉽다. 그 뒤에 감춰진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이기에 섣불리 안다고 할 수 없고 안다고 해서도 안된다.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읽은 경우 특히 그러하다.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우리는 이미 그 전쟁을 알고 있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일상과 광기의 역사를 글로 읽어내는 일은 힘겹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거기 있기에 말이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주인공 도리고가 최초의 기억 속 빛을 떠올리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전쟁과 함께 살아가는 지독히 아픈 삶을 들려준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생생한 전쟁의 현장을 중계하는가 하면 전쟁의 모든 기억은 잊은 듯 살아가는 전후 생존자의 현재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마치 전쟁은 꿈이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도리고를 비롯한 모두는 자신의 몸과 영혼이 기억하는 전쟁이라는 꿈을 꾸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도리고 앞에 나타난 동백꽃의 여인 에이미와의 만남만이 꿈이 아닌 현실은 아니었을까. 도리고에게는 약혼자 엘라가 있었고 에이미에게는 남편 키스가 있었다. 비밀스럽게 만남을 유지하는 도리고와 에이미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배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죽음으로 채워진 전쟁터였다.

 

 도리고의 부대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타이-미얀마 간의 철도 건설의 노역에 투입되었다. 의사였던 그는 직접 노역 현장에 동원되지 않았고 환자를 돌봤다. 콜레라와 괴질과 각기병으로 죽음의 사투를 벌이는 병사를 살리기 위해 그들을 현장으로 내모는 일본 장교 나카무라와 대치한다. 무조건 철도(라인)를 건설해야 한다는 일본군에게 폭력은 의지와 실천이었다. 다치고 병든 포로를 철로로 이끌어내야만 했다. 포로들에게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며 동료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은 삶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도 동료의 죽음이었다. 함께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한 이들의 환영이 그들 곁을 맴돌았다.  

 

 인간은 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 모든 것이 살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삶의 가장 고귀한 형태는 자유다. 인간이 인간답게, 구름이 구름답게, 대나무가 대나무답게 사는 것. (375쪽)


 라인은 망가졌다. 모든 선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모든 노고가 허사로 돌아갔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 의미와 희망을 갈망했지만, 과거 기록은 오로지 혼란만이 가득한 흐릿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375쪽)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의 삶을 어떻게 지속되었을까. 도리고를 비롯한 포로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물과 진흙탕에서 어떻게 견뎌냈는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동료의 죽음에 나팔을 부는 것으로 애도하며 지낸 시절은 절대 기억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었다. 일본인 나카무라는 전범 재판에 회부될까 두려워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착한 아내를 만나 딸을 낳고 좋은 아빠가 되기로 한다. 고타 대령을 만나 도움을 받았지만 가족에게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일본 장교로 포로를 학대하던 그 시절은 그게 선(善)이었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것만이 나카무라를 살 수 있게 만든 힘이었을 것이다.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한 것이 바로 시詩인데, 천황 폐하는 그 자체로서 시였다. 어쩌면 가장 위대한 시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는 우주를 모두 포함했으며, 모든 도덕과 고통을 초월했다. 위대한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천황 폐하라는 시 또한 선과 악 너머에 있었다. (478쪽)


 나카무라가 그렇게 자신을 지키며 살았듯 도리고 역시 그러했다. 완벽한 아내와 가정, 성공한 외과의사이자 전쟁영웅으로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며 살았다. 에이미를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아닌 척 연기했다.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났지만 사랑이 아닌 단순한 유희였다고 자신했다. 현재의 고독과 허무의 허기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은 지난 삶을 회상하는 것뿐이었다.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라니 이 얼마나 잔인한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생각한다. 전쟁에 휩싸인 삶, 전쟁이라는 감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으면서 앤서니 도어의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과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모두 문학상 수상작이다. 풀리처 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전쟁, 언제 폐허가 될지 모르는 순간을 견디는 인물을 그렸다. 리처드 플래너건과 헤르타 뮐러의 소설에는 포로의 시간이 겹친다. 앤서니 도어와 헤르타 뮐러의 소설에는 소년과 소녀가 등장한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속 도리고에 비하면 아이들이 감당할 공포는 우주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속 주인공은 눈먼 소녀 마리로르와 고아 소년 베르너다.


 전쟁이라는 가장 참혹함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들을 위로할 누군가(무엇)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리고에게는 병사들이, 마리로르에게는 라디오(소리)였고 레오에게는 손수건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일. 도리고가 가슴에 품은 여인 에이미, 눈이 보이지 않는 딸을 위해 집과 거리를 모형으로 만든 아버지, 레오를 기다리는 가족. 세 권의 소설 모두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하다. 너무도 섬세하고 생생하게 담아냈다. 아름답지만 너무도 아픈 소설들이다. 소설이면서도 소설이 아니라서 독자는 읽으면서 고통을 느낀다. 누군가의 가족이 전쟁의 현장에 있었다는 걸 알기에.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음악이 라디오에서 나선을 그리며 흘러나온다. 침대 겸용 소파에서 꾸벅꾸벅 조는 것, 따뜻하게 있으면서 배불리 먹는 것,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는 문장들을 만끽하는 기분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권, 207쪽)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숨그네』, 17쪽)

 

 전쟁은 끝났다고 이제는 그저 과거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일상을 지배한다. 피할 수 있었으면 피하고 싶었을 삶이었을 것이다. 숨 막힐 듯 호흡을 흔드는 문장 속으로 빠져들다가도 문득 그들을 생각한다. 내가 누리는 이 안온함, 내가 보는 세상의 빛, 깊게 잠드는 밤을 알지 못하는 그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에는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떡국을 먹었다. 굴을 넣고 끓인 시원한 떡국이었다. 굴을 좋아하지 않은 나는 굴을 골라내어 동생의 그릇에 옮겼다. 점심은 먹은 후 근처에 사시는 고모 댁으로 향했다. 신선하고 큼직한 굴을 전해드리기 위함이다. 언제나 그렇듯 집안은 정결했고 기어코 깍두기를 담가 주시겠다는 고모의 말씀에 저녁까지 먹고 돌아왔다. 작년과 다르지 않았다. 평창 동계 올림픽 경기를 시청하는 것으로 밤은 채워졌다.


 낮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생과 나누는 대화와 고모 댁에서 사촌 오빠와 나누는 이야기는 모두 과거의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를 이야기하는 나이가 되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달랐다. 언니와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한 번도 욕을 하거나 매를 들지 않았는데 남동생은 엄마한테 많이 혼나고 매도 맞았다고 기억했다. 딸 셋을 낳고 얻은 막내아들이라서(오빠가 있지만 아들을 하나 더 원했기에)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했지만 그래서 떼도 많이 부렸다. 우리는 자주 울었던 동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엄마 살아 계실 때는 하지 않았던 말들을 엄마가 돌아가시니 하고 있네, 엄마 보고 싶네”로 끝이 났다. 엄마의 삶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시간, 명절이라 그랬을까.


 ‘엄마’라는 말 때문인지 잠깐 시청한 드라마 <마더>속 엄마들이 생각난다. 딸을 살리기 위해 딸을 버려야만 했던 엄마, 정성을 다해 딸을 키운 엄마, 엄마가 되지 않겠다던 다짐을 깨고 엄마가 된 엄마까지. 엄마를 닮은 시라고 하면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김소연의 「너를 이루는 말들」을 옮기고 읽는다.

 


 

한숨이라고 하자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할 재간이 없어

지구 바깥으로 맴돌며 평생토록 야간 노동을 하는

달빛의 오래된 근육


약속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한 번을 잘 감추기 위해서 아흔아홉을 들키는

구름의 한심한 눈물


약속이 범람하자 눈물이 고인다 눈물은 통곡이 된다

통곡으로 우리의 간격을 메우려는 너를 위해

벼락보다 먼저 천둥이 도착하고 있다

나는 이 별의 첫번째 귀머거리가 된다

한 도시가 우리의 손끝에 빠르게 녹슬어간다


너의 선물이라도 해두자

그것은 상아에게 물어뜯긴 인어의 따끔따끔한 걸음걸이

반짝이는 비늘을 번번이 바닷가에 흘리고야 마는

너의 오래된 실수


기어이

서글픔이 다정을 닮아간다

피곤함이 평화를 닮아간다


고통은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난다


소원이라고 하자

그것은 두 발 없는 짐승으로 태어나 울울대는

발 대신 팔로써 가 닿는 나무의 유일한 전술

나무들의 앙상한 포옹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처

나무 밑둥을 깨문 독사의 이빨 자국이라 하자

동면에서 깨어나 허기진 첫 식사라 하자

우리 발목이 그래서 이토록 욱신욱신한 거라 해두자



 

 어제 통화를 한 친구와는 건강과 나잇살이 붙는다고 말하면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다가도 알 수 없으니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말고 그저 오늘을 잘 살자고 웃으며 안부를 나눴다. 반가운 한귀은의 『오늘의 나이, 대체로 맑음』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나는 건 당연하다. 이상하게 이원의 『최소의 발견』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이원의 산문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단정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고 할까. 어쩌면 밤에 읽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좋다는 말이다. 한귀은의 에세이도 그럴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녀의 문장을 나는 기대하고 흠모하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18-02-1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글도 읽으면 늘 마음이 정리정돈 되는 느낌인데 고모님댁도 정결하단 문장이 퍽 와닿습니다^^
형제분이 많으시네요?
전 제 밑으로 두 남동생만 있어 늘 엄마 대행을 해야만 하는 심적 의무감이 생기곤 하더라구요.
그래서 늘 잔소리만 해대곤 합니다.
나이가 잔소리를 늘게 하는건지,
원래 그랬었던 건지......
암튼, 올 한 해는 더 멋지게 살아볼 일입니다.^^

자목련 2018-02-20 11:21   좋아요 0 | URL
5남매라서 어린 시절에는 정말 싫었어요. 근데 자라고 보니 다섯도 많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큰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니 더욱 그러해요.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어서 저도 종종 잔소리를 해요, ㅎ
책읽는나무 님의 멋진 한 해 응원할게요, 더불어 저도 멋지게 살고 싶어요!!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우리가 어떻게 가까워졌을까. 아니,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안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니고 모른다고 모르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한 사람과의 사귐, 그리고 그것을 오래 지속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도 되는 게 아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이 같은 듯 다르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알고 있기에 때로 조심하고 알고 있기에 때로 기다린다.

 

 ‘너를 좋아하고 있어, 너를 사랑하고 있어.’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이다. 우리는 그 말에 담긴 사랑을 그 말의 무게를 재려 하지 않는다.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게 너를 생각한다. ​너를 생각하면 그림자가 생각나고 너를 생각하면 공기가 떠올라. 우리가 서로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라. 너를 좋아하고 있어, 온전히 너를 사랑하기를 바라.

 

 하나의 대상을 향한 마음이 커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사물이 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되는 일,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마음이 장착되는 일.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사랑받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어떤 빛이 될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일,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 그 사랑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걸 생각한다. 그 사랑이 나를 완전하게 만들고 있다는걸, 기억해 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8-01-29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렇게 좋은거죠^^? 흐흐흐~ 좋아서 혼자 웃네요. 글이 너무 너무 다정해서 ...

자목련 2018-01-31 17:10   좋아요 1 | URL
그장소 님의 다정한 웃음이 저는 더 좋아요^^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세상의 소음은 사라진다.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더라도 그렇다. 나는 책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간을 읽으며 인물의 표정을 상상하고 그의 내면에 닿고자 애쓴다. 설령 그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도 말이다. 그뿐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를 발견하면 이 단어를 사용한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아름다운 문구에는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부러움에 고민한다. 배혜경의 『고마워, 영화』를 읽으면서 그것은 더욱 커졌다. 문장을 읽고 있었지만 나는 장면을 읽고 있었고 영화 속 풍경을 읽고 있었다. 다채로운 질료로 한 편의 영화를 들려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귀를 기울인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게 영화는 일상이 아니다. 영화감독이나 배우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다. 그러니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래서 영화를 읽어주는 이 책은 친밀한 접근이면서도 낯선 접근이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51편의 영화를 읽는 건 아니다. 우선 끌리는 영화를 부분을 먼저 읽었다. 위안을 주는 소중한 것들, 삶이 예술이 된다면, 의 영화를 먼저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 천천히 영화를 만났다.

 

 그녀와 내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함께 본 영화는 많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한 권의 책에 수많은 느낌과 리뷰가 있듯 한 편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리뷰를 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여전히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한석규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런 아름다운 글은 나를 자꾸만 빠져들게 만들었다. 살짝 고백하자면 우산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런 글은 마약과도 같다.

 

 “한 우산을 받고 빗속을 걷는 일은 사람의 거리를 최대한 좁혀 준다. 우산 안은 숨소리를 나누고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열린 공간이자 반쯤 닫힌 공간이다. 정원에게는 끝사랑, 다림에게는 첫사랑의 설렘이 우산 안으로 들이치는 빗줄기처럼 두 사람을 적시고 파고든다. 길을 걸으며 점점 반쪽 어깨와 등짝이 젖고 머리카락과 빰이 빗물로 얼룩져도 두 사람은 개의치 않는다. 비 비린내 밴 일상의 거리를 그렇게 걷는다. 사랑이란 대개 한쪽 어깨는 기꺼이 차가운 빗속에 내어두는 일이 아닌가.” (8월의 크리스마스, 252쪽)

 

 영화에서 정원과 다림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다. 서로에게 스며든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함께 공유할 수 없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다 알고 싶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아, 그냥 그렇다는 거다. <미술관 옆 동물원>과 함께 읽어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분명한 건, 단순히 영화를 소개하는 책은 아니다. 그러니까 정성을 다해 길어올린 문장으로 영화를 향한 애정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들려주는 책이다. 51편의 영화는 주연이자 도구인 것이다.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녀는 삶을 이야기하고 나누고자 한다. 모든 걸 갖춘 듯 보이는 50대 여교사 나칼리의 일상을 통해 우리의 그것과 마주한다.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려 애쓰려 노력하지만 때때로 욕망을 숨기는 스스로에게 좌절하는 게 인생 아니던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들 중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단 한 가지는 죽음이다. 가족의 죽음, 친구의 죽음, 나의 죽음. 나의 죽음은 인식의 대상이 못되고 그저 타인의 죽음만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것일 뿐, 타인의 죽음에 이해와 동행은 불가하다. 그렇게 다가오는 것들에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행복은 행복을 가지기 전까지의 것이며 행복을 얻는 순간 기쁨은 달아난다는 말은 나탈리가 귀착하는 진리가 된다.” (다가오는 것들, 23쪽)

 

 보지 못했던 홍상수의 영화들, 그녀의 말처럼 <밀양>과 겹쳐지는 <오늘>, 꼼꼼하게 보고 싶은 <파니 핑크>, 거절할 수 없는 제목의 <낮술>, 윤계상의 연기를 확인하고 싶은 <풍산개>. 좋았던 영화가 많지만 특히 이런 부분이 좋았다. 네 남녀의 사랑과 관계, 그리고 사진이라는 장치와 떠오르는 음악으로 잘 알려진 영화 <클로저>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까. 우리가 마주하는 게 내부가 아닌 외부이며 내부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선택의 몫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 기억하라는 조언 같았다. 

 

 “우리가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 그 관계는 낯선 사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길을 가다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거나, 내게 길을 물어봤던 어떤 사람이었다거나, 우연히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내가 받았거나. 하지만 모든 우연한 만남이 관계의 친밀함으로 진전하지는 않는다. 관계가 친밀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선택의 순간이 있어야 하고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그 친밀함이 왜곡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클로저, 102쪽)

 

 특별한 영화와 아름다운 문장을 공통점으로 꼽자니 한귀은의 『이토록 영화같은 당신』을 거들고 싶다. 인문학을 일상에 스며들게 하는 그녀만의 시선으로 만나는 영화 이야기. 차례에 구애받지 않고 눈길 가는 영화부터 펼치게 된다. 거리를 걷던 남녀 주⁠인공과 흘러나오던 음악. 화려하고 눈부신 계절보다는 조금 쓸쓸한 기운이 가득한 가을과 겨울에 더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누군가는 음악이 전부라고 말했던 영화 <원스>에서는 그녀는 사랑과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과 음악이 함께 있다면 비등점에 오르기도 전에 사랑은 이미 끓어 넘쳐 있을 것이고, 따라서 시작하지 않은 사랑은 이미 지나간 것이 되어 있어 사랑의 서사 속에서만 과잉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음악의 여분으로만 사랑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대한 조망권을 읽어버린 채로 과거 속에서 자신도 연인도 소외시키면서 단지 얼룩 같은 음악의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원스, 141쪽)

 

 나를 이끈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과 비교하면서 보고 싶은 영화 <디 아워스>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도 읽지 못했고 영화도 보지 못했다. 그저 영화 음악인 Morning Passages를 즐겨 들을 뿐이다. 그러니 내게 아직 닿지 않은 영화이며 소설이다.

 

 “소설을 쓴 작가가 소설 속 인물의 분신들과 함께 등장함으로써 어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녹이게 되는 것이다. 현실의 인물인 버지니아는 어떤 허구 속 인물보다 허구적이며, 허구적 인물인 클라리사는 어떤 현실적 인물보다도 현실적이다. 이러한 역적은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소설의 등장인물이 가상일 수도 있다면 우리도 또한 가상인물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들처럼 때때로 지나치게 극적인 것이다.” (디 아워스, 231쪽)

 

 따뜻하고 정확한 눈으로 영화를 읽어주는 그녀 덕분에 보고 싶은 영화가 점점 쌓여간다. 책만큼 영화가 나의 일상으로 가까이 다가옴을 느낀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고마워, 영화』를 마주 하길. 영화에 대한 사랑과 감성이 한층 더 풍부해질 것이다. 놓치면 후회할 영화와 글을 기대해도 좋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뒷북소녀 2018-01-16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좋아요.^^ 리뷰가요.

자목련 2018-01-17 11:39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뒷북소녀 님^^
꾸준하게 독서모임을 이끌고 열심히 활동하시는 모습 언제나 보기 좋아요.
올해도 책과 함께 건강한 시간으로 채우세요^^

2018-01-16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7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