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기다렸던 건 비였다. 그러니까 첫눈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내린 오후에 나는 기쁘지 않았다. 설레지도 않았다. 그건 그것들의 형태 때문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 쌓일 수 있는 형질의 것이 아니라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 그래도 분명 눈이었다. 내가 사는 이곳엔 소설(小雪)에 첫눈이 내린 것이다. 어쨌든 첫눈은 내렸고 바람은 날카로웠다.   
 
 나른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청소기를 돌렸고 보기에 더러운 곳만 대충 걸레질을 했다. 점심엔 계란을 넣은 라면을 먹었고 천정명이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잠깐 보았다. 아파트 관리비와 각종 요금 고지서가 담긴 우편물과 함께 『창작과 비평 겨울호를 받았다. 그러니까 이제 더이상 가을이 아니라 겨울인 것이다. 저녁 밥을 위해 쌀을 씻고 전화를 받지 않은 나 때문에 세 번이나 전화를 한 친구와 통화를 했다. 친구가 사는 곳엔 눈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미용실에 다녀온 일과 김장과 감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문득, 나도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어졌다. 목을 드러낸 아주 짧은 단발 머리를 하면 어떨까.  

 관심 있는 작가의 첫 소설집이 나왔다. 정용준의 『가나』다. 책에 수록된 두 편의 단편은 이미 만났다. 첫눈 내리는 날과 잘 어울리는 표지가 아닌가.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깊은 밤에 마주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괜히 그런 생각이 든다. 『여섯 살』낸시 휴스턴의 작품으로 2006년 페미나수상작이다. 여섯 살의 나를 기억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읽고 있는 셰프의 딸』은 요리에 담긴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책이다.    

 

 

   

 

 

  

 

 

 

 

  

 

 어린 시절 겨울밤엔 광(요즘으로 말하면 다용도실)에 보관해 둔 홍시를 꺼내 먹었다. 가끔 피곤에 찌든 엄마를 졸라 매운 떡볶이를 먹기도 했다. 찐 고구마를 물김치와 함께 먹었고 부엌을 드나들 때마다 차가운 마루 바닥이 싫어 까치발을 들고 큰 걸음으로 다녔다. 밤 하늘엔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별들이 가득했다. 그 시절엔 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도 많았다. 집 뒤 대숲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싶다. 이제 그 시절, 그 대숲을 다시 만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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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이 되면서, 나는 피곤에 둘러쌓였다. 특히 지난 주엔 유독 피곤했다. 많은 시간을 잠으로 채웠고 모든 일에 대해 관심도 의욕도 사라졌다. 그 와중에 친구의 수술 소식까지 접했다. 내 나이를 생각했다. 그마나 하루 걸러 여름 이불을 세탁하는 일만 할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내게 두 계절이 흐르는 시간이라서 그렇다고 친구는 말했다. 단 음식을 먹어보라고 했다. 이를테면 젤리나 다디단 과자같은 것 말이다. 많은 시간을 잠으로 채웠고 모든 일에 대해 관심이 사라졌다.  

 나를 짓누르는 무게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우선 일상의 변화를 떠올렸다. 그 즈음 어떤 약을 먹고 있었고, 그 약은 간 기능 저하라는 부작용이 있었다. 부쩍 피곤하고 무기력한 날들 뒤에 당뇨를 진단 받은 오빠가 생각났다. 해서, 병원을 찾았다. 피를 뽑았고, 오랜만에 지인도 만났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으면 먹던 약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병원에 다녀온 후로도 피곤하다는 말은 멈추지 않았다. 침대가 아닌 쇼파에서도 여전하게 나는 잠을 자고 있었다. 

 어제 오전에 검사 결과를 받았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소식을 전한 지인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심지어 영양 상태도 좋다고 했다. 먹고 있는 약도 계속 먹어도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나는 피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 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스트레스와 환절기라는 결론을 내 놓았고, 내 정신에 이상이 있나 보라고 웃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부에 있었던 것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 말이다. 끝내지 못한 어떤 일에 대해 편한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걸까. 오랜시간 9월에 고여 있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것일까. 여튼 나는 외부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그러니 내부적으로 건강해지면 되는 것이다.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부담을 덜어내려 하지 말고 해내야 하는 것이다. 

 지난 주, 침대에서 졸다 자면서 곁에 둔 책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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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장고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어쩌면 냉장고를 가장 많은 시간 바라보는 이는 나일 수 있는데 말이다. 하루 종일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반찬을 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고 중간 중간 물을 마시거나 과일이 들어 있는 날엔 과일을 꺼내고,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이나 얼려 둔 초코하임 같은 과자를 먹느라 열어보는 데도 나는 냉장고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확인하고 보니 단단하게 얼어있던 것들이 녹고 있었다. 끓여놓은 삼계탕, 종종 썰어서 락앤락 통에 담아둔 파는 흐물흐물해졌다. 우선 세기를 강으로 돌려 놓았다. 그러고 나니 언제 얼려놓은지 모르는 꽃게랑 떡들이 괜시리 안쓰럽게 여겨졌다. 살림 잘하는 주인을 만났다면, 이렇게 냉장고를 방치하지는 않았을 터.   

 어제는 오전 내내 곰국을 끓였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꼬리곰탕이다. 핏물을 빼고 한소끔 끓였다가 한 번 물을 버리고 강한 불에서 약한 불로 조절하며 끓였다. 집 안에 건강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곰탕을 끓이면서 이런 책들을 뒤적였다. 읽다 만 한차현의 소설을 다 읽었고,  조경란의 단편 <밤이 깊었네>, 정이현의 <어금니>, 박완서님의 <티타임의 모녀>란 단편을 읽었다. 조경란과 정이현의 소설은 재독이었다. 그러나 새로웠다.  


    

 

 

 

 

 

 

 

 

 세 작가들의 소설엔 모두 엄마가 등장한다. 알츠 하이머를 앓는 엄마, 젊고 세련된 엄마, 악착같은 삶을 살아온 엄마들을 차례로 읽었다.  박완서님의 <티타임의 모녀>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머니는 스쳐 지나가듯 부엌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가스불에다 삐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삐삐 소리가 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고 청소기를 끌고 나왔다. 보라색 바탕에 노란 꽃 무늬가 있는 어머니의 고무줄 바지는 뭉치면 한줌밖에 안 되게 하늘하늘한 천이다. 어머니는 아마 손지갑에다 그걸 숨겨가지고 왔을 것이다. 어머니의 손지갑은 그래서 보통 지갑보다는 크고 핸드백보다는 작다. 

 뭉치면 한줌밖에 안되는 고무줄바지가 엄마들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시집간 딸의 아파트에 다니러 온 엄마는 우아한 옷 매무새가 아닌 딸을 대신해 살림을 봐주기 위해 일하기 편한 옷을 챙겨온 것이다. 엄마들은 대체로 그런 걸까.   

 점심부터 계속 곰탕을 먹고 있다. 어제 저녁과 아침엔 앓고 있는 냉장고를 옆에 두고 먹었다. 냉장고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은 오늘 서비스센터 수리 기사분이 다녀가고서 금세 사라졌다. 수리한 냉장고는 다시 얼음을 얼리고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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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9-08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장고가 젊음을 되찾은 건가요? ^^
냉장고를 떠올리면 엄마가 같이 떠오르고, 맛있는 요리 생각이 떠오르는 건, 고무줄바지 같은 엄마들의 상징 때문일까요. 저 책들이 모두 궁금해집니다!

자목련 2011-09-14 11:17   좋아요 0 | URL
명절, 잘 보내셨나요?
냉장고는 젊음을 찾은 건 아니지만, 잘 돌아가요.
단편의 내용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제겐 엄마가 먼저 보였네요.
덧글, 고맙습니다.^^*
 

 9월이 되었다. 바람은 달라졌고 내 입술은 덥다라는 말을 삼켜버렸다. 몸은 가을이라는 걸 느끼고 있으나 아직 가을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가을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계절이 가을이다. 맛있는 바람이 불고 생명을 잉태하기 적절한 계절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나는 가을을 좋아하지 않는다. 9월로 시작하여 10월, 11월, 그리고 겨울까지 때때로 우울하고 때때로 쓸데없이 감정을 소모한다. 가을을 앓기 시작한 뒤로 나는 가을이 두렵다. 매년 다른 색으로 다른 속도로 다가오며 곧 사라질 가을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애매모호한 사랑 고백같은 게 봄이라면,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주저하는 마음은 가을이라고 해야 할까.   

  

 

 

 

 

 

 

 

 

  

 여튼 9월과 가을은 왔고 책도 왔다. 좋아하는 동생의 선물로 창작과 비평이 여름호에 이어 가을호가 도착했다. 백가흠의 소설집 <힌트는 도련님>, 김선재의 첫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심보선의 두 번째 시집 <눈 앞에 없는 사람>, 90년대 학번을 추억에 빠지게 할 한차현의 <사랑, 그 녀석>, 섹스를 테마로 쓴 <남의 속도 모르면서>까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걸 확인시키려는 듯 말이다. 

 작년 9월엔 곤파스의 손길로 유리가 사라진 채로 보냈다. 유리가 사라진 베란다 창틀에 기대어 같은 모양새의 여러 집들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올 해 9월은 아늑하다. 9월을 맞이해 내가 한 일은 방의 구조를 변경한 것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9월이 되서 한 일은 아니다.

 내 방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방이다. 침대 옆에 있던 컴퓨터 책상을 침대 아래쪽으로 옮겼고 작은 책장의 위치도 바꿨다. 아직은 이 위치가 낯설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다. 책들을 정리해야 한다. 소유해야 할 책들과 그렇지 않은 책들, 읽어야 할 책들과 그렇지 않은 책들, 당장 읽어야 할 책들과 조금 미뤄 읽어도 될 책들,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 리뷰를 써야 할 책들.

 9월엔 추석도 있다.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송편을 먹게 될 것이고, 마음이 분주할 것이다. 도로를 메우는 차들을 보면서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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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9-08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들을 정리하실 생각이시군요. 책장 위치를 바꾸시기도 하셨구요.
가구들의 위치를 바꾸고 나서 한동안 느껴지는 낯설음이 전 왠지 좋더라구요. 그러다 또 어느날 다시 원래대로 복귀를 해놓게 되면 다시 약간의 낯설음이 느껴지기도 하구요. 원래대로 돌아왔는데도 느껴지는 그 낯설음 또한 재미난 감정이더라구요.

자목련 2011-09-14 11:18   좋아요 0 | URL
방 안에 간이 책장과 책상의 위치를 바꾸었어요.
제대로 된 책장이 없기도 하고, 공간에 비해 책이 많아서 정리해야 하는데,
여전하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답니다.
바람이 좋은 오전입니다. 평온한 하루 이어가세요.^^
 

  

  

 

 허전함이 무언가를 잡았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손이라면, 공허함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써보았던 손이다. 더 나아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후회’ 같은 것이다. 휘둘렀던 무수한 손들이, 그 에너지들이, 공허함의 배후에 후광처럼 있다. 애쓴 흔적이 썰물처럼 쏴, 하고  빠져나가면서 무늬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애써 잡아보려고 마음을 크게 먹었던 모든 손아귀에는 공허함이 묻어 있다. 허탕이 되었든, 무언가 잡히긴 했으나 바라던 것은 아니었든, 원하던 걸 잡긴 잡았는데 꼭 쥔 손을 펴보았을 때에 그것이 초라해 보였든, 잡아챈 그것이 원하고 원하던 바로 그것이든, 그 모든 손 안에 공허함은 존재한다. 공허함은 휘둘러보았던 마음의 손, 그 손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매복해 있다. 그런 점 때문에 공허함은 허전함보다는 훨씬 절대적이며, 훨씬 철학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도달해 있다.   김소연의 <마음사전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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