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엄마는 말이 많지 않으셨다. 그건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말을 참고 사셨다는 거다. 그러니 내 기억에는 누구와 말싸움을 하지도 않으셨고 이웃 아주머니의 통박스러운 말투도 그냥 듣기만 하셨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웃 아주머니는 말이 참 많으셨고 말도 빠르셨다. 해서 좋은 소리도 때로는 무섭게 들리기도 했다. 이제는 곧 여든을 바라보고 있지만 현재도 아주머니는 걱정도 많이 하고 싫은 소리도 많이 하고 다정한 말도 많이 하신다. 김종관의 『놀러 가자고요』를 읽으면서 내 고향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일손이 모자라 품앗이로는 절대 농사일을 할 수 없는 현실, 논과 밭을 모두 팔아 자식들 보태주고 노인네만 남은 모습, 누구 자식이 무슨 자동차를 몰고 왔더라, 누구 자신이 사업을 망했더라, 누가 아프다더라. 한데 모여 점심을 먹고 소리 없는 말들이 넘치는 마을회관까지. 어쩌면 내가 시골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면 김종관 소설 속 인물이 쏟아내는 걸쭉한 사투리로 이어나가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리면서 뵙는 어르신들의 바로 그들이었다. 여전히 농사를 지으시고 만나면 마늘 값을 걱정하고, 아직 끝내지 못한 모내기며 요양원에 계신 이들의 안부를 묻는 익숙하고 친근한 모습 말이다.

 

 때문에 ‘장기호랑이’란 아이디로 온라인에서 장기를 배우며 오프라인에서 마주한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장기호랑이」와 한 숨 쉬는 아홉 살 아이를 걱정해서 병원을 전전하며 어머니를 생각하는 「아홉 살배기의 한숨」을 제외한 7편의 단편은 범골이라는 동네를 배경으로 한 하나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특히 범골 마을 역사책을 만들기 위해 자료 조사격인 「『범골사』해설」이나 범골 동네 인물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범골 달인 열전」을 읽다보면 누구라도 범골이라는 마을을 아는 것마냥 느껴질 정도다. 한 동네 사람만 알 수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을 들은 것처럼.

 

 여전히 농사를 짓는 오빠와 한때 1가구 1소를 키우던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구제역 때문에 외부와의 소통도 어렵던 때 곧 새끼를 낳을 어미소의 장기가 먼저 나와 죽을지 살지 모를 소를 지켜보는 「산후조리」는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쏟아진 장기도 걱정인데 새끼를 낳으니 어미소와 송아지를 챙기느라 어머니는 말 그대로 소 산후조리를 한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소를 키우던 외양간을 떠올렸다. 정성껏 소죽을 쑤고 새끼를 낳을라치면 전선을 이어 환하게 불을 밝히던 밤. 그때는 요즘처럼 심각한 구제역도 조류독감도 없었다.

 

 그런가 하면 노인회장의 아내와 통화로 시작하는「놀러 가자고요」는 고령화된 농촌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방송을 통해 공지했지만 참여율이 낮아 직접 전화를 걸 수밖에 없다. 노인회장을 대신해 마을 사람들과 일일이 상황을 전달하는 노인회장의 아내는 같이 놀러 가자고 말하면서 안부도 묻고 각 가정의 속 사정도 듣는다. 정작 전화를 한 노인회장의 아내는 몸이 아파서 놀러 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젊어서는 일하느라 바빠서, 늙어서는 몸이 따라주지 못해 놀 수가 없으니. 거기다 자식들이 온다고 하면 자식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가정을 꾸린 자식에게 부모는 뒷전이다. 남들 다 사서 효과를 보는 욕조기를 하나 샀으면 싶은데 선뜻 사주지 않는 아들 내외에게 속상한 어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만병통치 욕조기」는 씁쓸하다. 필요할 때만 전화하고 찾아오는 자식과 다르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살뜰하게 챙겨주니 노인들이 정을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상술을 부리는 판매원이 밉기까지 할 정도다. 호기롭게 4백만 원을 할부 결제할 수 없는 아들 내외의 심정은 곧 우리의 그것과 같다.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는 광고로 노인들을 불러 모으고 결국엔 안마기나 온열기를 결제하게 만드는 이들이 이곳에도 많아 소설 속 이야기로만 여길 수 없다. 이제 이 모두가 김종광의 고향 이야기며 가족 이야기라는 걸 눈치챈다. 도시가 아닌 시골의 일상,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낯설고 생경하고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친근해서 소설 같지 않은 이야기. 한가하고 여유로운 농촌이 아닌 누구보다도 바쁘고 치열한 삶의 현장.

 

 유쾌한 김종관의 농촌소설을 읽노라니 떠오르는 이가 있다. 누군가는 이문구를 생각하겠지만 내게는 한창훈이다. 우리 동네 어르신들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면서도 바다에서 바지락과 굴을 채취하기 때문이다. 바다를 상대로 싸우기도 하고 바다의 품에 안겨 살아가기도 하는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나는 여기가 좋다』. 드세고 투박한 사투리로 섬의 하루하루를 들려준다. 비릿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을 안겨주는 글들이 참 좋았다. 술 한 잔 걸치고 걸쭉하게 내뱉는 정겨운 육과 아무도 모르게 가슴 깊은 자리에 숨겨두었던 사연을 끌어올리는 힘에서 섬사람의 애정을 본다.

 

 많은 이들이 힘들고 지쳤을 때 마지막 보루인 농촌으로 돌아오듯 『나는 여기가 좋다』속 누군가도 그러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오는 이도 있었지만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섬은 가장 안전하고 가장 평온한 삶 그 자체였다.  재미있는 건 김종관은 「놀러 가자고요」를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놀러 가자고 독려하는 에피소드를 그렸고 한창훈은 삼도노인회 제주 여행기」를 통해 섬에서 섬으로 여행을 떠난 노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어르신을 모시고 여행을 떠나는 건 어디나 쉽지 않은 법. 그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살아온 작가라서 현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고향을 기록하는 김종광과 섬과 바다를 떠날 수 없는 한창훈, 그들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은 건 사람 사는 이야기, 삶이었다.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난다. 맨발로 흙을 밝았을 때, 너른 갯벌을 걷을 때 발가락 사이로 간지럼을 태우듯 파고드는 감각.

 

 누군가는 잠시 머물고 놀다가는 농촌이나 바다가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그 터전의 본 모습을 기억하고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 하나하나, 그 모든 걸 소설로 쓰는 김종광과 한창훈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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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는 지난주에 사전투표를 했다. 이른 시각에도 많은 이들이 있었다. 분주하게 준비하는 사람들, 여섯 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뽑아야 할 사람은 많고 어느 부분에서는 결정을 하는 게 어려웠다. 과연 내가 지지하고 내가 선택한 이가 당선이 될까. 대부분 선택한 이가 당선이 되었다. 그들이 제대로 일을 해주기를 바란다. 

 사전투표일 하루 전에는 귀한 친구를 만났다. 그러니까 지난주 목요일에 친구가 내가 사는 곳으로 왔다. 서로 시간을 맞추는 일도 힘들지만 그래서 더 반갑고 즐겁다. 6월에는 사람을 만나는 달인가 싶다. 다음 주에는 고모와 사촌동생도 만날 예정이다. 친구는 오기 전부터 내게 즐거운 요구를 했다. 아무래도 내가 사는 곳이 바닷가 근처라서 맛있는 식당이나 분위기 좋은 카페를 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곳을 잘 모른다. 가본 곳만 가는 게 편하니까. 결국엔 식당은 친구가 검색했고 카페는 내가 선택했다. 가격 대비 맛은 보통인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바닷가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 시간 서로를 지켜보고 알아주는 우리의 이야기는 샘물처럼 달콤했고 기뻤다.

 

 돌아가기 전 이른 저녁을 집에서 먹었다. 대접하거나 부담스러운 사이가 아니라서 있는 반찬만 가지고도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는 처음 온 친구는 선물을 한 보따리 가져왔다. 정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챙겨온 것이다. 나도 친구에게 몇 가지 챙겨주었다. 줄 수 있는 건 뭐든 주고 싶었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주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받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친구는 내게 주고 싶은 걸 너무 많이 챙겨왔고 나는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미안했다. 친구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책은 줄 수 없었다. ㅎ

 

 좋아하는 마음일까, 사랑하는 마음일까. 어떤 마음이든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니까. 친구가 필요한 건 나와의 시간이었고 우리는 그것으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알라딘의 다정한 이웃님에게도 매번 받기만 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그렇지만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은 안다고 할 수 있다. 그저 글로 이어진 인연, 신기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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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한주 동안엔 새벽 기도에 참석했다. 미세먼지로 가득한 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날씨가 좋아지자 보이기 시작했다. 막 피기 시작한 매화가 교교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새벽과 달빛, 그리고 매화는 참 아름다웠다. 피고 지는 게 당연하듯 매화는 꽃잎을 떨구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 붉은 동백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목련은 맨 마지막에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에서 마주하는 봄이지만 매년 꽃들을 볼 때마다 대견한 생각이 든다. 친구가 보내온 살구꽃 사진을 보면서는 사과꽃과 배꽃을 맘껏 볼 수 있는 과수원 집 딸이었으면 좋았겠다 생각도 했다. 실은 봄마다 하는 생각이다. 수고로움보다는 예쁜 꽃을 즐길 생각에 말이다.

 

 올 듯 말 듯 줄다리기를 하는 듯했던 봄이 와 있었다. 그리고 벌써 4월이다. 봄이 되면 기다려지는 책도 있다. 젊은작가상, 이번에는 박민정 작가가 수상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작가와 소설을 읽는 일, 봄이 주는 즐거움이다. 테마 소설 시리즈 바통의 두 번째 이야기도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음식과 요리를 테마로 했으니 맛있는 소설을 기대한다. 개정판에는 의미를 두려 하지 않는데 김이설의 『나쁜 피』가 개정판으로 나왔다. 아직 알라딘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9년 전에 만났던 소설인데 다시 읽어도 좋을 소설이다.

 

 

 

 

 

 

 

 

 

 

 

 

 

 

 

 

 

 

 

 

 

 

 

 밭에서 흙은 만지는 이들의 모습이 보이고 쑥과 봄나물을 캐는 할머니를 발견하고 이사를 위한 사다리차를 자주 만나는 봄이다. 안에서 밖으로 이동하는 봄이다. 삶이 움직이는 봄이다. 옷 정리를 해야 하고 올봄에는 거실 커튼도 빨아야 한다. 더불어 묵혔던 어떤 마음도 시원하게 빨아야지. 마음을 헹구는 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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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4-01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물이 소생하는 봄, 나이를 먹어보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우리의 몸도 그 섭리에 반응하는 걸 보면 신기해요..^^

자목련 2018-04-02 16:09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 참 놀라워요^^

프레이야 2018-04-01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헹구는 봄이길 저도 바래봅니다. 화사하고 온화한 봄날 맞이하세요^^

자목련 2018-04-02 16:08   좋아요 0 | URL
헹구고 헹궈서 깨끗해진 봄이면 좋겠어요, ㅎ 오늘은 살짝 덥기까지 해요. 이러다 꽃이 지기도 전에 여름이 올까 걱정이에요.
 

 

 소설을 읽다 보면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읽지 않았던가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소재가 비슷했던 소설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야기는 많고 많으니까.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할 수 있는 전생에 관한 이야기도 그러하다. 내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호기심으로 전생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었던 시절도 있었다. 전생이 있다면, 혹은 환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전의 나를 알아보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랄까? 사토 쇼고 장편소설 『달의 영휴』를 읽은 후의 생각이다.


 소설은 기이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화자라 할 수 있는 오사나이 앞에 죽은 딸의 기억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아이와 어머니가 있다. 과연 그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본격적인 이야기는 오사나이의 과거로 이어진다. 학교 선후배로 만난 아내 고즈에와 딸 ‘루리​’의 이야기. 평범했던 일상이 흔들린 건 루리가 일곱 살 되던 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 후 건강을 찾는 루리는 점점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인형에게 남자 이름을 붙여주고 동요가 아닌 이상한 노래를 부른다. 가장 중요한 것 딸의 눈빛이다. 아내는 딸을 걱정했지만 오사나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돌아보면 모든 시작은 그때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고즈에가 딸에 대해 걱정할 때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했더라면 딸과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혼자 남은 오사나이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어머니와 지내던 중 딸이 남긴 그림을 발견한다. 딸이 그린 그림을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온 모녀가 바로 또 다른 루리와 어머니다.

 

 같은 이름은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딸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여자아이와 그림 속 남자의 이야기는 너무도 놀라웠다. ​소설은 이제 더욱 흥미롭게 흘러간다. 그림 속 남자 미스미의 사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작소설인 것처럼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집중시킨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미스미와 유부녀 루리의 만남은 사랑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 미스미와 루리는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무기력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의 루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묘한 말을 남긴다. 달처럼 죽었다가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방법을 택할 거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미스미 앞에 나타날 거라고. 그리고 마치 그것을 증명하듯 갑자기 사고로 죽는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죽은 루리가 환생하여 미스미를 그리워하며 어떻게든 그와 닿기를 원했던 안타까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환생한 루리는 모두 오사나이의 딸이 겪은 과정을 겪는다. 일곱 살에 열병을 앓고 다른 아이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차례대로 청의 미스미, 중년의 미스미를 만나기를 원한다. 만약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죽은 가족이나 연인이 다른 몸으로 환생하여 내 앞에 나타나 있다면 말이다.

 

 처음엔 그저 단순한 환생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 소설은 지독한 사랑 이야기이며 나와 연결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운명으로 이어진 끊을 수 없는 고리 같은 것. ​지극히 뻔한 소재와 진부한 결말이 아닌 놀라운 감동을 선물한다. 애틋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이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게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루리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서.

 

 “나한테 선택권이 있다면, 난 달처럼 죽는 쪽을 택할 거야.”
 “달이 차고 기울 듯이.”
 “그래. 달이 차고 기울듯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거야.” (182쪽)

 

 사토 쇼고 장편소설 『달의 영휴』를 읽고 난 후 누군가는 주변을 둘러볼지도 모른다. 영원한 이별을 한 누군가가 다시 내 곁을 맴도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달의 영휴』에서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면 이꽃님의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에서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두렵지 않는 사랑을 만난다.  미리 살짝 힌트를 주자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달의 영휴』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도 판타지적 요소가 가득하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바로 편지다.

 1년 후의 나에게 보낸 편지가 엉뚱한 곳에 배달되었다. 재혼을 앞두고 친한 아빠 연습을 하는 아빠의 제안으로 쓴 편지가 현재가 아닌 과거 1982년 은유에게 배달된 것이다. 2016년, 미래에서 보낸 편지를 받은 은유는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열다섯 은유에게 답장을 한다. 마법처럼 과거에서 온 편지는 아빠의 재혼 후 독립을 꿈꾸는 언니 은유에게 도착한다. 신기한 건 과거의 은유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고 현재의 은유의 것은 천천히 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미래의 은유가 언니였지만 나중에는 과거의 은유가 언니가 되는 것이다. 편지로 인해 미래의 은유는 과거의 은유가 알지 못하는 사건을 알려주고 아빠의 재혼으로 인해 복잡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미래의 은유는 엄마의 존재를 모르며 아무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아빠는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처음에 사춘기 소녀의 반항 비슷한 것으로 이해한 과거의 은유는 어린 은유를 달래며 자신도 항상 언니와 비교당하며 산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점차 은유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한다.

 과거에서 할 수 있는 방법, 바로 은유의 엄마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것. 은유 아빠의 인적 사항을 통해 과거의 은유가 아빠를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드디어 만난 은유의 아빠는 자신과 동갑이었고 어린 은유의 말처럼 무뚝뚝하고 무서운 사람이 아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과거의 은유는 적극적으로 은유 아빠의 주변을 맴돌며 은유의 엄마가 될 것 같은 여자를 주시한다. 그리고 과거의 은유를 통해 은유는 조금씩 아빠를 알아가고 아빠도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빠랑 내가 같은 일직선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 양 끝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데, 내가 달리기를 멈춰 버린 거야. 그러곤 투덜거리는 거지. 아빠는 왜 더 빨리 달려오지 않는 거야. 왜 이렇게 멀리 있는 거야. 나는 투덜대기만 하고 달리기를 멈춰 버렸어. 아빠는 내가 달리지 않는 만큼 더 많이 달려와야 했어. 길이 그렇게 멀어졌는데 한 번도 투덜대지 않고 나만 보면서 묵묵히. (219쪽)

 

 편지가 오가면서 더욱 궁금해진다. 정말 은유의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아빠가 왜 엄마의 이야기를 함구하는지 알 수 있을까. 누가 은유의 엄마일까, 미래의 은유와 과거의 은유는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이꽃님의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가 진한 여운을 남기는 건 편지라는 아날로그의 소통 방식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진심을 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빠가 은유에게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것도 역시나 편지였으니까. 사랑의 힘을 막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자신이 죽음과 맞바꾼 귀한 생명, 엄마와 딸.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맹세를 한 적이 있었던가. 그 맹세가 얼마나 연약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오직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바란다. 그것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 소설에 끌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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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린 탓에 한낮의 이 시각이 저녁의 어스름 같다. 비는 그쳤지만 비는 우리 곁에 머문다. 봄이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아직 패딩 조끼를 벗지 못하고 겨울 이불을 빨면서도 잠 잘 때마다 수면 양말을 챙긴다. 내일 오후에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게 맞나? 이곳에 올 때는 돌아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곳이 중심이다. 이곳에 있을 때도 나의 모든 것은 그곳을 향하고 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에게 집중하기 위한 리스트를 작성하지만 이번에는 꽝이다. 챙겨온 책은 정직한 자세로 소파를 지키고 컴퓨터를 켜고도 메일 확인만 할 뿐이다. 생각 가운데 잡념을 걸러내는 시간, 설명할 수 없는 다짐을 다지는 시간이라고 해두자.

 

 그렇다고 내일 이후의 시간이 무언가로 촘촘히 채워지는 건 아니다. 다시 어떤 흐름을 찾는 것,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 다시 산책으로 계획하는 것, 그뿐이다. 이곳으로 오기 전 신발장에서 꺼 내놓은 신발을 신고 아파트를 한 바퀴 도는 것. 그 사이 달라진 주변처럼 나도 달라졌기를 바란다.

 

 비가 그쳤고 조금 서늘하다. 그러니 달고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택배 상자 속 이런 책을 기대한다. 신간 구매를 자제하는데 표지 분위기만 보고도 그 작가라는 걸 알아버려서 이곳으로 주문했어야 했다고 자책한 책과 모르는 분야에 대한 무모한 호기심으로 궁금한 책, 두 권이다. 신간 광고메일을 과감히 삭제하고 책장에 있는 책만 생각하기로 한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지 않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해, 현 상태를 지속해야 해, 중얼거리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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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3-1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는 그쳤지만 비는 우리 곁에 머문다. 이 문장, 여운이 있네요.

자목련 2018-03-21 11:14   좋아요 0 | URL
지금 살포시 내리는 봄눈도 그러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