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째 새벽예배를 드린다. 고난주간 특별 새벽 기도다. 특별이라는 말이 붙으면 뭔가 비장한 기분마저 든다. 그냥 새벽에 일어나는 일의 귀찮음을 이겨내는 중이다. 예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각엔 주위가 환해지는데 점자 그 환함이 커진다. 하루하루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 나의 피곤함도 변화한다. 첫날에는 너무 힘들어서 하루가 몽롱하고 기운도 없었는데 둘째, 셋째, 오늘은 점점 나아진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사진도 찍었다.

 

교회 예배실 입구에 있는 벚나무다. 제법 큰 나무라서 가지가 많고 꽃도 풍성하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바람이 불 때면 춤추는 봄을 만날 수 있다. 사진에 담아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오늘 새벽에 찍었다. 제법 바람이 불었고 쌀쌀했지만 꽃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아한 춤을 보여준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꽃과 사진으로 보는 꽃은 이렇게 달랐다. 새벽이라서 그 차이가 큰 것 같다. 보정을 할까 하다 말았다. 내가 본 벚꽃은 이 모습이니까.

 

 

 

 


 

내일 새벽에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차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조금씩 달라지는 나무. 살아있는 나무의 오늘을 보면서 대견하고 기특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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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친한 동생과 통화를 하면서 겨울에 눈이 몇 번이나 왔는지 이야기를 했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점차 그것이 당연한 게 아닐 수도 있다고 느낀다. 앞으로 눈이 더 내릴지도 모르지만.

 1월에는 왼손 손등에 화상을 입어 고생했는데 2월에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베었다. 살짝이 아니고, 제법 깊게 베였다. 붉고 선명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다. 덜컥 겁이 났다. 엄지손가락은 상처를 내고서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켰다. 치약의 뚜껑을 여는 일, 참치 캔을 따기도 어려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불편함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니 보통의 일상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손을 연이어 다치다 보니 손을 사용하는 일에 소심해졌다. 칼, 가위를 이용할 때는 속도가 느려졌다. 어이없게도 그렇다. ​한 번씩 자꾸 그것들을 보게 된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없는 손등, 손이 되었다. 사소함, 부주의함, 그리고 위축되는 일상.

 3월에는 겨울이라는 말을 얼마나 쓸까. 우리는 이제 봄을 말하겠지. 봄이니까, 봄이 왔으니까, 하면서 안부를 물을 것이다. 계절에 따라 살가운 인사를 전하는 일, 당연한 즐거움을 누려야지. 당연한 것들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까. 봄맞이 책으론 이런 책이 어떨까? 이리도 다정한 제목이라니. 백수린의 『친애하고, 친애하는』, 세계 고전 속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궁금증을 더하는 『책이나 읽을걸』, 추리와 심리로 교묘하게 독자를 유혹할 것 같은 『퍼스트 러브』. 한결같이 재미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 하지만 정작 요즘 내가 가장 읽고 싶은 건 한정현의 『줄리아나 도쿄』인데 주저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여느 해와 다르게 맞이할 3월 1일. 100년이라는 시간이 갖는 의미에 대해 섣불리 말할 수 없지만 거룩한 뜻을 경건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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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8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3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당연한 말이다. 작가의 자리가 일상과 동떨어진 곳이 아니기에 그가 발을 담은 그곳은 소설이 탄생하는 곳이자 그의 일상이 이어지는 곳이다. 뜬금없는 생각을 전하는 건 고 박완서 작가의 짧은 소설집『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70년대의 문화, 사회의 흐름, 작가의 공간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족, 이웃, 그리고 그가 바라본 세상을 말이다. 그 시대의 실상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의 부모와 친척이 살아왔을 그 시간을 조금은 들을 수 있었기에 48편의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그들이 내게 들려주는 옛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박완서 작가가 방 안에 들어앉아 창호지에 바늘구멍으로 내고 바깥세상을 엿보는 재미로 쓴 소설을 통해 나는 그 세상을 본다. 쉽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문장 안에는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너도 나도 아파트를 선호하고 어떻게든 성공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겼다. 열심히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작가의 대단한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 마음이 포근해졌다. 추운 겨울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거실 창에서 퍼지는 환한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48편의 짧은 소설은 마치 거울 같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 한 권으로 1970년대의 연애와 결혼, 고부갈등, 여성의 사회 진출, 아파트 열풍으로 인한 단절을 고스란히 마주할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건 「아파트 부부」, 「열쇠 소년」, 「열쇠 가장」, 「열쇠 부부」, 「아파트 열쇠」로 이어지는 아파트에 대한 고상하면서도 우아한 풍자였다. 주택에서 아파트로 생활공간이 바뀌면서 열쇠만 있으면 집을 비워도 걱정 없었고 가족 구성원 없이 혼자서도 편안하게 살아가는 그 시대의 모습은 어쩐지 웃음이 나면서도 쓸쓸했다. 아파트 창으로 비친 옆 동에 사는 이들의 모습도 똑같이 닮았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열쇠 대신 도어록과 번호키라 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시작되면서 늦어지는 결혼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 여전히 남아 있는 남아선호사상, 집안일은 모두 여성의 몫으로 정한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결혼 적령기가 사라지고 비혼이 늘어가고 있지만 자녀가 가정을 꾸리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 간절하고 직장에서의 남녀 불평등과 육아와 가사노동의 분담도 그렇다. 더 좋은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만 때로 건조한 모래바람이 가득한 사막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성공을 위해 살아온 이들, 성공하면 행복할 거라 맹신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현실은 너무도 메마르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쑥버무리 받아먹은 이웃이 틀림이 없는데도, 슈퍼마켓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서 모른 척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잘 닫히지 않아 늘 입을 벌리고 있는 공동 쓰레기통에 곰팡이 난 쑥버무리가 한 무더기 버려진 걸 봉례는 보고 말았다. 그날 봉례는 퇴근한 남편에게 왈칵 안겨 가슴을 쾅쾅 치면서 울부짖었다.

“여보, 고작 이게 성공이란 말에요? 난 싫여, 성공 물려줘! 물려줘!” (「성공 물려줘」중에서)

 

 이웃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보건복지부의 우편물을 받는 날에는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렵다. 다정한 인사는커녕 짧은 눈 맞춤을 거부하는 일상, 마우스 클릭으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가족 간의 대화도 줄어드니 사소한 고부 갈등이나 말다툼을 통해 애정을 나누기도 어렵고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는 일도 어렵게 돼버렸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기에 이사를 오면서 마주한 이웃에 대한 인상과 아픈 이웃이 빨리 낫기를 바라는 화자의 간절함은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이사 오는 날이었다. 옆집에 산다는 여자가 인사를 왔다. 나는 반갑고 한편 놀라웠다. 아파트에도 이웃이란 관념이 남아 있다는 게 반가웠고, 그 여자의 미모가 놀라웠다. 중학교 다이는 자녀가 있는 그 여자의 미모는 싱싱 하달 수 없었지만 유달리 착하고 밝은 표정 때문에 눈부시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여자가 내 이웃이라는 게 예기치 않은 행운처럼 즐거웠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중에서)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나누기도 어려운 각박한 세상,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었을까? 박완서 작가가 짧은 소설을 쓰면서 내다본 미래의 풍경은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다가오는 명절에 우리는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누군가의 결혼, 누군가의 취업, 누군가의 입시를 걱정할지도 모른다. 고단한 하루하루를 토로하고 잔소리로 투닥거리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저마다 스마트폰의 세상에 빠져 외딴섬이 되는 것보다 살맛 나는 풍경이 될 테니까. 그래서 우리가 잃어버린 풍경, 우리가 놓친 소중한 것들에 대해 돌아보게 만드는 이런 소설이 더욱 귀하고 아름답다. 이토록 보석 같은 글을 故 박완서 작가님 8주기를 맞아 29명의 작가가 쓴 『멜랑콜리 해피엔딩』과 함께 읽으면 더 완벽한 독서가 될 것이다. 물론 박완서 작가의 다른 글과 읽어도 좋다. 겨울의 끝자락이 지나고 봄이 오는 시기, 질곡의 삶을 반죽하여 빚은 튼튼하고 빛나는 그릇에 담긴 따뜻한 글밥을 먹는다면 얼마나 배부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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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02-01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권의 책 모두 표지도 너무 예쁜 것 같아요.
언니도, 명절 즐겁게 보내시구요. 설 전날이 입춘이라는데, 우린 따뜻한 봄의 길목에서 다시 만나요.^^

자목련 2019-02-03 16:15   좋아요 0 | URL
출판사에서 특별판으로 신경을 꽤 쓴 것 같아.
그러게, 내일이 입춘이니.
봄 인사를 전해야 할 것 같아^^

서니데이 2019-02-0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휴 전에 박완서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살 지 망설이다 금요일이 되었어요.
이 소설의 배경이 1970년대인가요. 그 시기가 벌써 50여년 전이 되었다니, 지금과는 조금 다른, 그 때의 느낌이 남겠네요.
자목련님, 오늘부터 설연휴가 시작인 것 같아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자목련 2019-02-03 16:17   좋아요 1 | URL
박완서 작가가 보낸 시절과 지금 우리의 시절이 다르면서도 같은 게 많아요.
서니데이 님, 편안하고 건강한 연휴 보내세요.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고요^^

카알벨루치 2019-02-01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명절연휴 잘 보내시고 늘 건강하게 일상에 감사가 넘치시길 소망합니다^^

자목련 2019-02-03 16:17   좋아요 1 | URL
감사가 넘치는 일상, 참 좋은 말이네요. 카알벨루치 님도 평온한 명절 보내세요^^

희선 2019-02-02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70년대 모습이라니... 오래전 같기도 하고 그렇게 오래전이 아닌 것 같기도 하네요 그때부터 사람과 사람이 더 멀어지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지금은 더하군요 다들 스마트폰 보기 바쁠지도 모르니... 저는 그게 아니어도 다른 사람과 말을 잘 못하지만...

명절에는 식구가 한자리에 둘러앉아 조금이라도 이야기 나누면 좋겠네요

자목련 님 명절 편안하게 보내시고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희선

자목련 2019-02-03 16:23   좋아요 1 | URL
숫자로 떠올리면 무척 먼 시간인데 막상 소설 속에서 보면 아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해요.
가까이 있어도 명절이 아니면 만나기 쉽지 않은 일상으 사는 것 같아요.
희선 님도 즐겁고 기쁜 시간 보내세요. 떡국도 드시고 새해 복도 드시구요^^

프레이야 2019-02-07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봄이 성큼 온 거 같아요. 입춘도 지나고 매화는 벌써 벙글었구요.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꽤 포근하게 느껴져요. 건강은 많이 회복된 거죠. 페이퍼의 마지막 문장에서 따듯한 글밥 한 그릇 다 먹고 배부른 느낌이에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9-02-08 10:34   좋아요 0 | URL
어제 오늘 쌀쌀하지만 봄의 기운이 아닐까 싶어요.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박완서 님의 좋은 글을 다시 읽으니 참 좋았어요. 프레이야 님, 건강하고 즐거운 날들 이어가세요^^
 

 

 한 권의 책을 몇 번이나 재독할 수 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누군가에게 운명의 책이라면 항상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줄 테니까. 장석주에게는 노자의『도덕경』이 그런 책이라 한다. 인생의 바닥보다 깊은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깊은 울림을 안겨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책 말이다. 『태양은 아침에 뜨는 별이다』엔 그런 책들을 쓴 이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 책은 책이 아닌 책의 저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작가, 성자, 혁명가, 사상가, 정치가, 화가 등 장석주가 선택한 15명이 인생을 압축해서 만날 수 있다. 내 책장에서도 만날 수 있는 인물(알베르 카뮈, 프란츠 카프카, 허먼 멜빌, 헨리 데이비드 소로 프리다 칼로)이 있어 반가웠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프란츠 카프카와 프리다 칼로를 먼저 읽었다. ​사랑했던 이와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약혼과 파혼을 반복한 카프카와 단 한 사람의 연인인 디에고와 이혼했지만 다시 재결합한 프리다의 마음은 무엇일까 잠깐 헤아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시몬 드 보부아르(이 책에 등장한다)에 대해서도. 그리고 한 사람이 생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일까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들의 책을 읽고 그들과 만났던 시점의 장석주는 어떤 시절을 견디고 있었을까.

 

 그 답은 노자와 공자에 대한 글에서 찾을 수 있었다. 거대한 풍랑에서도 흔들림 없이 잔잔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 복잡한 욕망의 내면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향기로운 모습으로 살 수 있는 힘을 말이다. 장석주는 여러 차례 다른 글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모든 걸 포기하는 심경으로 시골로 내려와 집을 짓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하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이 책에서도 자연스럽게 그 시기가 등장한다. 사업에 실패하기 전 불안과 방랑의 20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자신감의 30대. 그는 하얀 고래를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 하멘 멜빌의 『모비딕』을 사십 대에 만났는데 20대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거라 말한다. 20대를 저 멀리 두고 온 나는 아직 읽지 못한 채 책장에만 고이 모셔둔 책이다. 그는『모비딕』과 하멘 멜빌에 대해 쓴 글에서 시간에 대해 언급한다.

 

 인간은 시간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의 일부이며 시간 그 자체다.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우리 존재의 중심을 꿰뚫고 지나간다.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타협함 그것을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우리의 운명은 시간에 조금의 행운과 우연을 더 보태서 반죽하고 발효시킨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272쪽)

 

 점점 나이를 먹고 시간이 정말 빨리 흐른다고 느낀다. 그것은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남아 그럴 것이다. 내 나이로 살고 있는지, 어른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산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힘들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가에 사상가의 글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장석주가 들려주는 공자의 가르침처럼 군자는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른스러운 어른으로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갖는다.

 

 어른은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다. 더 나아가서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한다. 어른 되기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뜻이다. 앎과 생활이 어긋난 것은 어른답지 못하다. 그러므로 어른-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미더운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다.(74쪽)

 

 누구에게나 불행과 불운이 한꺼번에 달려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분노를 쏟아낸다.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무엇을 붙잡고 빠져나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 과연 우리는 프리다처럼 살아낼 수 있을까.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활자를 통해 그녀의 인생을 읽어가는 일은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의지를 배운다. 장석주가 이 책에서 언급한 뇌성마비 철학자 알렉상드르 졸리앵의 그것에서도 말이다. 실존은 투쟁에서 나온다는 졸리앵의 말은 프리다 칼로의 의지와 통한다. 때로 산다는 건 세상의 모든 것이 적이라고 느껴질 순간에도 앞으로 나가야만 하는 것이므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투쟁, 곧 타자들의 지평이라는 전장에 내던져진 자들이 치르는 전부다.(105쪽)

 

 프리다는 “비극은 사람이 가진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하며, 파도처럼 연이어 닥쳐오는 불운과 불행에 맞서 아마존의 여전사같이 싸운다. 그녀는 쇠막대가​ 뼈들을 으깨고 자궁을 뚫고 지나가도 불행의 바다에서 거꾸러진 제 삶을 기어코 일으켜 세웠다. (145쪽)

 

 책과의 인연에도 타이밍이 있다고 믿는다. 장석주가 그랬듯 어떤 책은 이미 읽었지만 깊은 울림이 나중에 다시 펼쳤을 때 밀려오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내게 필요한 책이 무엇인가 가늠해본다. ​우리는 책과의 만남에 있어 짧은 리뷰를 쓰거나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메모하는 것으로 책 읽기를 마친다.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기다리기도 하고 그에 대한 기사나 SNS를 종종 둘러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작가의 삶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가는 일은 드물다. 장석주의 책을 읽으면서 내게 영향력을 미친 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느꼈던 내밀한 기쁨에 대해서. 좀 더 그들에 대해 알고 싶다는 욕심과 함께 나만의 리스트에 대해서 구상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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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0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자꾸만 읽게
되더라구요.

얼마나 더 읽을 진 모르겠습니다.

책과의 타이밍, 정말 격하게 공감합니다.
어쩔 땐 정말 진도가 나가지 않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좍좍 진도가 나가더라구요 :>

자목련 2019-01-04 16:24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향수>와 <칠레의 밤>을 저는 아직 읽지 못했어요. 심지어 <칠레의 밤>은 몇 년 전에 중고로 넘긴 슬픈 기억이. 레삭매냐 님의 서재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정체지는 없으신 것 같은데 아니었군요. ㅎ
주말, 즐거운 책읽기 이어가세요^^

뒷북소녀 2019-01-07 12:49   좋아요 0 | URL
이제 <모비딕>을 읽을 타이밍인 것 같습니다.^^

자목련 2019-01-07 15:50   좋아요 0 | URL
응, <모디빅>을 마주할 때가 되었어!!

AgalmA 2019-01-0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비 딕>과 <필경사 바틀비>의 간극이 저는 매우 크게 느껴져서 허만 멜빌에 대해서 탐구해 볼 게 많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두 작품 외의 것을 아직 읽지 못해서 현재로선 많이 아쉽죠.
가도 가도 끝없는 책의 히말라야를 다 넘지 못하고 산책자로만 걸어다니다 끝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ㅎ;;

자목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19-01-04 16:22   좋아요 0 | URL
역시 아갈마 님은 벌써 만나셨군요. 저는 책만 구매하고 읽지는 못했어요. 저 만치 앞선 그곳에 산책자 아갈마 님이 계셔서 아마 많은 알라디어들에게 도움을 주고 계신 걸요. 저도 그 도움을 받고 있고요. 2019년 책과 함께 즐겁게 보내세요^^

잠자냥 2019-01-0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비딕>을 이제서야 읽어볼 마음이 들어서 최근 김석희 번역본으로 사두었는데요, 올해는 자목련 님과 연말 베스트 목록에 <모비딕>이 겹칠지 궁금해지네요. ㅎㅎ

자목련 2019-01-04 16:19   좋아요 0 | URL
저도 같은 책을 곁에 두었어요. (꽤 오래전에, ㅎ) 올해에 모비딕을 만날 수 있기를. 우선은 책장에서 꺼내 눈앞에 두어야겠습니다. ㅎ

뒷북소녀 2019-01-0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루키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몰라요.
읽을 때마다 <위대한 개츠비>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있어서 다행이긴 해요.

이 책 제목도 멋지네요...
태양은 아침에 뜨는 별이라니...

자목련 2019-01-07 15:47   좋아요 0 | URL
하루키를 생각하면 <위대한 개츠비>와 함께 뒷북소녀가 생각날 듯^^
 

 

 어린 시절에는 교회에 간 기억이 없다. 종교를 물으면 불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고 주변에 교회를 다니는 친구도 없었다. 기억의 오류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 학창시절에는 막내 고모가 교회에 다니면 좋겠다고 말했다. 집을 떠나 자취를 하면서 나는 교회에 처음 나갔다. 믿음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도 나의 믿음은 연약하고 부족하다. 내가 자취를 하던 집에는 셋방을 사는 이들이 많았고 신기하게도 그 가운데 목사님 댁이 두 가정이나 있었다. 함께 자취를 하던 친구와 나는 각각 다른 교회에 다녔다. 당시를 떠올리면 웃음만 난다. 찬송을 잘 부르던 교회 오빠가 있었고 기도를 잘 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냥 그들이 부러웠다. 성탄 축하 연극을 했고 새벽 송을 부르며 늦은 시각까지 그들과 어울렸다. 그 후로 다시 교회에 가고 예배를 드리기까지 많은 공백이 있었다. 올해, 문득 그 시절의 내가 보고 싶다. 선물 교환의 시간도 있었다. 작고 소소한 물건을 교환하고 카드를 전하던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던 나는 이제 없다. 성탄 예배를 드리고 특선 영화를 보는 정도다.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떠올린다. 어린 시절 동생들의 산타 할아버지가 되었던 큰언니.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많지 않은 용돈을 모아서 동생들의 선물을 준비했던 마음 말이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그 시절이 몹시 그립다. 추억을 먹는 나이가 된 것일까. 

 사랑을 나누고 평화를 전하는 성탄절. 모두 건강하고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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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2-25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보니 저는 어렸을 때 아이들과 교회 다니기는 했는데, 지금은 다니지 않는군요 성탄절이라고 다를 것 없는 날이지만, 어제 라디오 방송에서 캐럴을 듣고 영화 이야기 들으니 조금 그 분위기가 나기도 하더군요 아이들은 성탄절 좋아하겠지요 산타할아버지가 올지도 모른다 생각하기도 할 테고... 자목련 님, 성탄절 편안하고 따스하게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18-12-26 16:20   좋아요 1 | URL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함께 나눌 수 있어 반갑고 즐겁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던 시절도 문득 떠오르네요. ㅎ 희선 님도 건강하고 평온한 연말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18-12-25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린시절 옆집 친구가 자꾸 교회 나가자고 꼬드기는 바람에 중학교때까지 열심히 다녔었던 것같아요.
지금은 신랑의 영향으로 절에 다니고 있네요??? 불교신자는 아닌데..
종교가 늘 뒤죽박죽이라^^
그래도 어린시절 교회에서 배웠던 찬송가 몇 구절들이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늘 성탄절만 되면 흥얼거려 지더라구요.
그래서 이맘때면 나홀로 조용히 흥겹더군요.아마도 캐롤송에 속한 찬송가 덕분이지 싶어요.. 절실한 기독교 신자는 아녔지만,그래도 성인이 되어도 캐롤송에 아련해지고 흥분되는 감동의 추억을 담아 주어 감사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막 들떠지진 않아도 그래도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이 전해지는 캐롤송처럼 예쁜 크리스마스가 되길 기원합니다^^

자목련 2018-12-26 16:23   좋아요 1 | URL
저도 고등학교 시절 제 친구를 교회에 초대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 친구는 지금 성당에 다니고 있어요. 어른이 되고서는 어렸을 때만큼 캐롤을 따라 부르지 않는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님, 포근하고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