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자란다. 푸성귀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한다. 그 안에서 아이들도 자란다. 아파트 복도와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정겹다. 때로 엄마의 화난 목소리와 이중주를 이룬다. 여름은 무르던 열매를 단단하게 채운다.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모습을 바꾼다. 여름 바람은 가장 멀리 달린다. 태풍을 몰고 오고 장마와 함께 한다. 여름은 무더위와 장마를 무기로 일상을 삼킨다.


여름의 하루, 냉동실에는 얼음이 늘어나고 뜨거운 커피와는 이별을 고한다. 피어오르는 짜증을 확인한다. 나의 짜증과 당신의 짜증이 합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도 여름은 싱그럽다. 그래서 여름은 빛난다. 단단해진 열매를 맛보기 시작하는 계절. 이토록 정갈하고 고운 빛깔은 어디서 왔을까. 볼 때마다 감탄한다.




앵두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담장 아래로 앵두나무가 있었다. 비탈이라서 알이 굵은 열매를 찾으려 아래로 내려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그 맛은 아닌 것 같다. 할머니는 외지에서 공부하는 큰언니의 몫을 남겨두라 호통을 쳤지만 그건 너무 서운한 말이었다. 그 반짝이는 알들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완두 콩의 연두는 또 어떤가. 꼬투리를 열자 가지런하게 잠든 완두 콩이 인사를 한다. 수고한 이의 마음을 생각하며 한 알도 놓치지 않는다. 이 콩으로 밥을 하면 얼마나 맛있을까. 이러니 식탐이 줄어들지 않는다. 여름은 이렇게 나를 살찌운다. 여름은 이렇게 나를 웃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책들이 나를 웃게 한다. 생각은 던진다. 다양한 삶의 풍경과 그 안에서 놓치는 것들을 주워 담는다. 『내 인생은 열린 책』이라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영롱하고 다채로운 단편들이 가득하다. 『배려의 말들』은 우리 주변을 돌보게 한다. 배려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었던가. 나와 당신의 배려가 진정한 배렸는지, 어쩌면 가짜는 아니었는지.


이른 장마는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더위에 지치지 않는 그런 여름을 기대한다. 여름을 살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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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미뤘던 일을 했다. 일이라고 표현하니 거창한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거창한 일이다. 겨울이불을 세탁했다. 이불솜과 커버를 분리하고 햇볕에 말렸다. 깨끗해지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의자를 이용해서 욕실의 천장을 닦았다. 식탁 의자를 옮겨서 욕실에 두고 조심조심 올라갔다. 언제부터였을까. 욕실의 천장을 닦아내고 싶은 마음이 자랐던 건. 깨끗하게 닦아내지 못했는데도 나름 만족했다. 의자는 언제나 훌륭한 도구가 된다. 나는 여러 의미로 의자를 몹시 좋아하는데 이번 경험으로 의자에게 고마움이 하나 더 생겼다. 사실 가장 하고 싶은 건 거실 창문을 닦는 일인데, 그건 내가 아무리 방법을 강구해도 당장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손 닿는 곳만 닦았다가 정말 보기 흉한 흔적만 남겼다. 그래서 거실 창을 볼 때마다 나는 한 번씩 인터넷 청소 업체를 검색한다.

이런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일을 만들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냥 그런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이다.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밝히자면 나는 매일매일 청소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살림을 잘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을 저지르고 나면 나만의 작은 기쁨이 자란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변화, 그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나만의 기쁨이니까.

 

나만의 기쁨은 또 이런 책을 읽고 기다리는 것. 좋은 책은 나만의 기쁨에서 나아가 모두의 기쁨이 된다. ​꽃을 즐기는 봄날을 예년의 봄처럼 기대할 수 없는 날, 꽃 대신 책도 신나는 대안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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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좋다. 봄날이다. 노란 개나리가 핀 것을 보았다. 나른한 고양이가 되어도 좋을 날이다. 마음 편한 소리일까. 하지만 이런 날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생기발랄한 마음인지도 모른다. 생각을 깊게 하지 않고 일상을 유지한다. 해야 할 일들을 향한 집중력이 다소 떨어진다. 안다. 그래도 단순하게 살고 싶다. 코미디 프로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싶고 밥을 먹고 마시는 커피 한 잔의 맛을 기억하고 싶다. 대면할 수 없으니 문자와 목소리를 만나는 시간이 길어진다.

봄은 기어코 도착했는데 봄을 누리는 일이 사치처럼 여겨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3월에 태어난 이들을 위한 선물로 책을 주문했다. 좋아하는 선배 언니에게는 내 취향의 책들이, 아는 동생에게는 동생이 고른 시집이 도착할 것이다. 조금은 무기력한 일상에 끼어드는 색다른 즐거움이면 좋겠다.

매일 확진자를 확인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이들의 개학은 다시 연기가 되었고 주변에는 일을 쉬는 친구들이 늘고 있다. 모든 건 지나간다. 다 알고 있는 분명하고도 정확한 사실. 그러니 조금 더 기운을 내자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생기발랄한 딸기처럼, 입맛을 되찾아 주는 노오란 카레처럼,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당신이 나에게 그런 사람이라는 게 참 좋다. 당신은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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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3-1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딸기 한 알 집어먹고 갑니다 ~^^

자목련 2020-03-24 17:56   좋아요 0 | URL
^^*
봄꽃이 하나 둘 기지개를 폅니다. 프레이야 님, 그 안에서 평온하시길 바라요.

희선 2020-03-19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어지러워도 봄은 오는군요 왔다가 빨리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야 봄이 왔는데 벌써 갈 걸 생각했네요 사월에는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면 좋을 텐데... 오늘은 바람이 세게 분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목련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0-03-24 17:57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이 봄이 곧 달아나겠지요. 4월은, 제가 좋아하는 4월에는 모두가 편안하면 좋겠어요.
희선 님, 건강 잘 챙기세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지 선택할 때 최소 칼로리로 배를 채워줄 음식을 찾는다. 그 음식이 운동과 업무에 도움이 되기를, 쉽게 들고 다닐 수 있기를, 먹기 위해 자리에 앉을 필요가 없기를 바란다. 또한 몸에 ‘나쁜 것’이 들어 있지 않길 바란다. (360쪽)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지 않는다. 아침 한 끼는 커피로 때우고 빵을 먹을 먹거나 더 간편한 음식을 찾는다. 그러니 요리를 하는 경우도 매우 적다. 언제부터였을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다. 패스트푸드와 배달음식이 편리하지만 자주 이용하지 않으니까. 과식을 부추기는 광고나 동영상의 유혹에 빠지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제철 요리를 즐기고 간식을 최대한 줄이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과연 나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건강검진의 결과를 보면 위태한 경계 수준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건강이고 그것을 위해 운동이 가장 필수적이라 여긴다.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과도한 칼로리를 섭취하면서도 단백질 부족으로 인한 영양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비만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음식이 아니라 단백질 바를 먹는 건 동의하고 싶지 않다.

월스트리트 저널 칼럼니스트 비 윌슨의 『식사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식사에 대해 말한다. 총 9장으로 구성하여 식사를 말한다. 다방면으로 취재를 하고 세계 각국의 식사 형태와 음식에 대한 생각을 들려준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지, 어떻게 먹는지, 어디서 먹는지, 무엇으로 먹는지, 누구와 먹는지. 먹거리가 풍성한데 여전히 음식이 없어 힘들어하는 이들, 전통 요리가 사라지는 안타까움, 소비자를 유혹하는 광고, 비만으로 인한 제2형 당뇨병, 정크푸드를 규제하지 않는 정부. 바쁜 현대인에게 식사는 어떤 의미일까. 책은 식사에 관한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한 편의 보고서라고 할까.

단지 한 끼를 먹는 일에 어떤 의미가 담겼을까 싶지만 책에서 식사에 대한 역사와 음식과 건강과의 관계, 산업의 발달이 식사에 미치는 영향, 다이어트까지 다방면의 연구자를 만나 그들의 연구를 공유한다. 지금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구하고 먹을 수 있다. 편의점에서 간편식을 구매할 수 있고 대형마트에서는 세계 곳곳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요리를 하는 일은 점점 멀어진다. 내가 하는 대신 방송을 통해 대리만족을 할 수 있고 그들의 레시피로 언제든 요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요즘엔 잘 손질된 재료와 요리방법까지 배송받을 수 있는 시대니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배달음식은 도착하는 일이 언제부터 일상이 되었을까. 시스템과 식품 산업의 발전, 빅데이터로 내가 먹고 싶은 게 무언인지 알려주는 세상이라니.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의 한국의 김치, 길거리 음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채소를 먹지 않는 현대인과 다르게 여전히 김치 섭취를 통해 채소를 먹는 한국인의 모습이나 한국의 먹방 열풍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놀라웠다.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은 가장 중요한 시간이지만 현대인은 그 한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기 못하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과중한 업무 때문에 간편한 음식을 선택하거나 먹는 일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한다. 환자를 돌보기 위해 점심시간을 줄이는 간호사나 야간 근무를 하는 소방관이 초콜릿이나 설탕 가득한 비스킷을 먹는 일상. 책 속의 사례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택배 업무를 하는 이들과 자영업자가 식사 시간을 챙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낵이 어떻게 일상을 지배하는지도 놀라웠다. 엄마의 입장에서 집에서 요리한 균형 잡힌 음식보다 영양이 훨씬 적다는 걸 알면서도 스낵을 소비한다. 아이의 감정 상태를 관리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뜨끔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원의 대기실에 비치된 사탕을 떠올릴 수 있다. 저소득층의 경우 아이가 원하는 다른 것들(신발, 의류, 놀이공원 등)을 해 줄 수 없지만 스낵은 사줄 수 있다. 과거보다 더 풍성한 요리가 가득한데 정작 우리가 먹고 선택하는 음식은 한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식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시대가 된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건강을 위해 비건이 되고 저탄수화물 식단을 고집하고 유기농 식품만 먹고 가공식품은 먹지 않는 섭식 행위인 클린 이팅이 유행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연예인의 식단 관리나 유명 셰프의 추천 요리는 음식에 대한 고민과 선택을 줄여준다. 이런 현대인에게 저자는 현명하고 건강한 식사를 위한 13가지 전략을 소개하는데 그 가운데 새로운 음식을 오래된 접시에 담아 먹자, 물이 아닌 것을 ‘물’처럼 마시지 말자, 간식보다는 식사에 집중하자, 음식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자,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요리하는 법을 배우자, 유행에 뒤처진 입맛을 갖자,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자를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오래된 접시에 담아 먹자란 의도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릇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 인스턴트 음식과 배달 음식도 그릇에 담아 먹으면 느낌이 다르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유행에 뒤처진 입맛을 갖자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우선 유행하는 음식은 가격도 비싸고 나만의 입맛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니까.

언제나 요리는 해야 하는 다른 일들과 몸에 좋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 사이의 거래였다. 오늘날만큼 이 거래가 복잡했던 적은 없었지만, 현재 이 우리의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요리를 하는 것과 달리, 시간과 주의를 기울일 일이 넘쳐나는 가운데 요리를 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훨씬 더 긍정적인 행동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든 다른 살을 위해서든, 요리는 매일 하는 다짐과 사랑의 표현이다. (417~418쪽)

​이 책은 평범한 우리의 식사에 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와 음식에 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우리 일상과 밀접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라 재미있는 부분도 많지만 다양한 통계과 수치의 등장으로 어렵게 다가온다. 그러니 끌리는 주제를 골라 읽어도 괜찮다. 잘 알려진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함께 읽는다면 음식에 대한 생각이 더욱 달라질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할까 한 번 더 고민하고 그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음을 얻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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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3-1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하는 다짐과 사랑의 표현, 요리.
그렇군요 소홀히 했던 거 같아요 전. 반성요^^ 정성껏 준비한 집밥에 고단한 몸이 스르르 녹는 기분. 그건 기분이 아니라 진짜 몸에서 반응하는 건데 말이죠. 자신에게도 그렇게 식사를 차려줘야겠어요. 비오는 날입니다 자목련 님.

자목련 2020-03-12 21:33   좋아요 0 | URL
책에서 배달음식이나 간편요리도 일회용 용기가 아닌 그릇에 옮겨 먹으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도 반성을 불러와요. 먹은 일에 대해서 잊고 있던 감정들을 생각하게 하고요. 코로나 19를 빨리 이겨내고 봄날을 만끽하는 날들이 빨리 오면 좋겠어요. 프레이야 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해가 지는 시각이 점점 늦어진다. 저녁은 천천히 찾아온다. 이렇게 계절이 흐르는구나 생각한다. 아파트 화단에 매화의 꽃봉오리가 보였다. 매화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뭔가 계속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 활짝 터질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절기나 계절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봄이니까 꽃이 피고 겨울이니까 눈이 오는 게 당연했다. 뚜렷했던 계절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몇 해 뒤에는 하나의 계절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가 느끼는 계절의 냄새가 새삼 달콤하다. 고유한 빛과 냄새, 자연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봄의 연못 물은 끊임없이 뒤척이는 푸른 양모 같다. 그 무겁고 차가운 물이 연못의 검은 바닥으로 내려가고, 그 무게에 밀린 바닥의 물이 흔들리며 위로 올라와 연못 분지를 야생의 영양으로 채운다. 그건 연례행사로 한 해의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늦은 봄이 되면 초록 풀과 갈대들이 올라오고, 수련의 첫 잎들도 보인다. 바람은 잠잠해진다. (83쪽)

메리 올리버의 글은 내게 이런 것들을 찾게 만든다. 어둠이 걷히는 새벽의 순간, 풍성한 연두의 풀들이 선사하는 싱그러움, 하루하루 커지는 잎맥을 지켜보고, 어린 새들의 날갯짓을 관찰하고 응원하는 일상을 기록하는 일. 소유하는 게 아니라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 그 안에서 우리는 시인의 거칠고도 부드러운 숨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시인이라는 창조, 창작자보다는 한적한 시골에 사는 자연친화적 생활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산문에서 시나 시론, 혹은 창작의 과정보다는 짧은 메모나 죽은 나방의 날개를 묘사한 글이나 바닷가에서 마주한 생선뼈나 연못에서 겨울을 보내는 오리들의 글에 더 매력을 느낀다. 아마도 시골에서 나고 자랐고 근처에 바다를 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커지기 마련이다. 흙을 만지고 마당에 내린 눈을 치우며 투정을 부리던 순간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으므로.

사실, 그녀의 시나 시론은 보통의 독자인 내게 어렵다. 문학소녀였던 메리 올리버에게 월트 휘트먼이 얼마나 절친한 친구였는지 그녀가 소개한 글이나 시로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시인에게 영감을 주고 감동을 준 이가 시인이었다는 게 당연하면서도 그들이 서로에게 연결된 운명이었구나 싶다. 시의 세계로 인도한 월트 휘트먼에 대해 메리 올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처음 발견한, 그러니까 나 혼자 종이에서 발견하고 놀라움과 기쁨에 차서 읽었던 시들은 휘트먼의 것이었다. 나는 그에 늘 깊이 감사하며 살 것이다. 거기엔 풍성하고 엄선된 언어가, 엄청난 에너지가, 리듬이, 천 가지 방향의 완전한 몰입이 있었다. (126쪽)

 

‘내게 일이라 함은 걷고, 사물들을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작은 공책에 말들을 적는 것이다.’라고 서문에서 시인이 말했듯 시인은 항상 쓴다. 그게 무엇이든 쓰고 또 쓴다. 시인에게 시는 삶의 전부이고 시를 향해 나가는 과정은 삶의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30년 넘게 뒷주머니에 작은 공책을 넣고 다니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으려고 항상 수첩에 기록한다는 김연수의 말이 겹쳐진다. 공책에 직접 시를 쓰는 건 아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시가 된다. 생각나는 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메모를 한다. 그 작은 공책에서 시가 태어나는 것이다. 완성된 글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마구 쓰는 일. 그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 그것이 시인의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에게는 작은 공책이 있듯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공책이 있다. 누군가는 노트북, 누군가는 스마트폰, 누군가는 한글 파일이 그럴 것이다. 책에서 발견한 구절을 옮기거나 그 문장의 단어를 자신만의 언어로 바꾸어 연습하는 것처럼. 메리 올리버의 이런 ‘버지니아 울프가 쓴 많은 글은 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에 쓴 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였기 때문에 쓴 것이었다.’부분에서 버지니아 울프 대신 나의 이름으로 옮겨 읽는 일도 그렇다. 규칙적으로 쓰고 고치고 노력하고 실천했기에 시가 우리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삶을 사랑하고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일, 그 안에서 그녀는 정말 완벽했고 행복했을 것 같다. 그녀의 바람처럼 나의 생도 그렇게 채워질 수 있을까.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나의 삶을 완성하면서 말이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다. 내가 만들었다. 그걸 가지고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다. 내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언젠가 비통한 마음 없이 그걸 야생의 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에 돌려주는 것. (53쪽)

 

이상하게도 나는 메리 올리버의 산문을 읽을 때면 새벽의 기운을 느낀다. 뭐랄까.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선명해지는 순간과 닮았다고 할까. 깊은 잠에 빠져 나는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는 감각들을 모은 것 같다. 천천히 서늘하고 투명한 공기가 사라지고 전해지는 여명의 분위기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튼 그렇다. 메리 올리버의 산문 가운데 나는 『완벽한 날들』을 가장 좋아한다. 딱히 이유는 없다. 그냥 좋을 뿐이다. 좋은 걸 설명하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계절과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 글을 만나는 기쁨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벚꽃이 흐드러지는 환한 봄이 오면 그녀의 문장들이 다시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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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2-1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의 글을 읽으면 새벽의 기운을 느낀다는 글귀에 동감동감 그러네요. 표지도 미명의 그 시간 아주 천천히 깨어나는 하늘을 보여주는 거 같지요. 이른 봄밤이 아직은 추워요. 건강히 지내세요 ^^

자목련 2020-02-20 15:11   좋아요 0 | URL
전체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디선가 ‘쨍‘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아무튼 묘해요. 엊그제까지 많이 추웠는데 우수 지나니 봄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 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