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올린 추석 손님에서 길고양이 세마리가 집에 들렀다고 하였는데, 역시나 추석이 지나고 음식 냄새가 사라지자 그 뒤로는 잠깐 잠깐씩 들린다. 그래도 멀리는 가지 않고 집 주변 어딘가에 기거하는 듯 보인다. 주말 같은 때 음식 냄새가 나면 이 녀석들 몰려 오진 않고 한 마리씩 온다. 그러다 조금 있으면 또 한마리가 오고, 나머지 한마리도 어느샌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온다(물론 세마리가 한꺼번에 몰려 올때도 있긴 하지만 드물다). 음식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주고 있는데(짜거나 매운것은 절대 주지 않는다), 집에 있는 식품을 주기엔 녀석들 건강 위험도 있고 또 많이는 먹지 않아도 이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집 먹을거리가 장난아니게 나가고 해서 마트가서 2kg짜리 사료를 사다놨다. 벌써 한 봉지 다 먹고 얼마 전에 또 사다놨다.

세 녀석 모두 지네들 장난칠 때 빼고는 끽소리 내지 않는다. 자기들끼리는 텔레파시로 말하는 모양. 그런데 얼마 전에 셋째 하록이가 처음 나한테 입을 열었다. 들릴락 말락한 울음소리를 냈는데, 냥~~ 냥~~ 거린다. 소리가 모기 소리이다. 배고픈듯 하여 사료를 주니 눈치를 슬슬 보며 먹는다. 첫째 랑이나 둘째 삼식이는 소리를 낸 적이 없다. 다만 맛있는 거, 특히 냄새가 나는먹을거리를 가져다주면 그르렁거린다. 빨리 주라는 듯, 앞발로 들고있는 든 접시를 치려는듯한 모양새다. 음식을 얘네들 밥그릇에 붓기도 전에 머리 디밀고 먹는데, 특히 랑이가 젤 빠르다. 다음 그릇에 부어주면 삼식이가 낼름 와서 먹고, 하록이는 뒤에서 한참 동안 멀거니 쳐다보고 있다가 내가 그릇을 하록이에게 밀어주면 그제서야 먹는다.

몇번 그런식으로 하록이는 제일 나중에 먹다보니 가장 먼저 먹은 랑이가 항상 하록이의 밥그릇을 노린다. 물론 맛있는 것을 먹을 경우에만. 이 녀석들 조금 관찰을 해보니 각기 성격이 조금씩 드러난다. 랑이가 가장 활발하지만, 먹을 것 주지 않는 이상 꽤 가까이 다가가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데, 이 부분에 있어선 삼식이가 제일 느긋하다. 심하게 가까이 가면 삼식이도 물러나지만, 막내 하록이는 다가갈 기세만 보여도 이미 튈 곳을 알아보느라 두리번 거린다. 요즘은 꽤 많이 나아졌다. 조금 다가가도 움직이진 않지만 항상 나를 주시한다.


* 사진들은 클릭하면 커짐...

아래 사진은 랑이가 발로 목덜미를 긁는 것을 찍은 사진인데, 내가 무슨 순간 포착을 잘하여 이런 그림이 나왔냐하면 그렇지 않고 목덜미를 긁다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잠깐 멈짓 하였다. 옆에 하록이는 먹느라 여념이 없다.
          


나무에 올라가 있는 랑이. 나무를 타고 담장을 오를 수 있고 아무튼 어디를 가든지 나무를 탄다. 새 잡으려고 나무 타는 경우도 있는데 번번히 노려만 보고 끝난다.
           


하록이와 랑이. 서로 냄새를 맡으며 안부를 전함. 마치 뽀뽀 하는 것 같아서 찍었다.
            


앞에는 삼식이, 뒤에는 랑이. 밥 다먹고 난 뒤, 또 주라는 듯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다.
            


삼식이의 경우 밥 먹을때 사진 찍으면 잘 쳐다보지 않는데 한 손에 먹을것 들고 있으면 저렇게 쳐다본다.
            


물 먹을때 얘내들 혀에 적셔서 먹는 것이 아닌 혀로 물을 입안으로 퍼 나르듯 먹는다. 물 먹을때는 혀가 아이스크림 수저같이 좀 넓적하게 펴진다.
            


이 사진을 제일 좋아하는데, 삼식이 뒤에 있는 나뭇잎들이 마치 수채화로 그린듯한 인상을 준다. 삼식이가 나무에 오른 모습을 아래에서 찍었다. 위에서 보면 어떤 모습일까.
            


하록이는 랑이나 삼식이가 있으면 조금은 용감해진다. 가까이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하록이는 얼마전부터 찍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흔들린 사진 뿐이 없었다.
            


랑이가 빠끔히 쳐다보는 장면. 하록이가 잘하는 짓인데...
            


랑이가 물먹고 난 뒤, 찍은 사진.
            


개인적으로 삼식이를 가장 귀여워하는데, 표정도 다른 애들보다 조금 많고, 내가 긴 나뭇가지로 앞에서 알짱 거리면 항상 그거 잡으려고 애를 쓴다. 가끔 재미없는 듯, 뒤를 돌아 물러나가다 갑자기 뒤돌아 나뭇가지를 잡으려고 손살같이 앞으로 쭉 뻗는다.
             


하록이는 새색시 같다.
             
             
             


하록이도 나무를 타긴 하는데, 모험 하듯 타지는 않고, 그냥 두꺼운 나뭇가지에만 앉는다. 랑이와 삼식이는 새 잡으려고 조금 가는 나뭇가지에도 앉는데.
             


하품하는 하록이.
             


ps.
이 글을 올리기 방금 전, 애들 있나 마당에 나가보니, 하록이만 구석에 있다. 나머지는 어디 가고 혼자 있을까. 심심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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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10-17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카오스냥이는 저의 로망냥이.. 세 고양이들이 다 예쁘네요.
길고양이들에게 가장 필요한건 물이라고 이야기해주려고 했더니, 이미 물도 함께 주고 계시군요. 겨울 될 수록 물 구하기가 힘들어져서 물 주는 것이 좋아요. 고양이의 수명이 20년인데, 길고양이의 수명이 4-5년도 안 되는 것은 물 때문에 병에 많이 걸려서래요.

겨울 되니, 저도 집 주변의 고양이들 걱정되네요. 길고양이들 사료도 올 겨울 함께 장만해야겠어요.

쿼크 2010-10-17 18:30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저도 물에 신경쓰고 있었습니다. 근데 가끔 이 녀석들이 제가 놓은 물은 안먹고, 고인 물을 먹더라고요. 그것말고는 특히 신경쓸게 없네요.. 얼마전에 길고양이 로드킬 당한 것을 보고...얘네들 생각이 부쩍 나더라고요. 길가에는 나가지 말아야할텐데... 암튼...들려주셔서 감사~~~ 말로 이야기, 사진 잘 보고 있습니다....
 
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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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 한줄기 새지 않는 캄캄한 밤을 묘사하는 데에는 글로 나타내는 것이 최적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 손짓, 발짓해가며 밤을 표현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른다. 어둠을 표현하기로는 글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 단어의 궤적으로 어둠 안을 비춰가며 샅샅이 훑어내기에 그렇다. 빛도 색깔도 형체도 무엇 하나 분간할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은 에두르는 언어 묘사로 충만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글이라는 것은 결국 작가가 지닌 단어의 나열이다. 즉 단어야말로 작가가 고심하여 고른, 최전선에 투입되는 무기이다. 종종 강력한 단어가 장착된 책을 만나면 뭔가를 발굴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말해 '헤르타 뮐러'의 「마음짐승」은 글보다는 문장, 문장보다는 언어조각(=단어)에 힘을 쏟아내는 책이다.

  작가는 독재시대라는 어둠을 나른하면서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이야기라는 통으로 읽었다기보다는 언어의 조각 엮음으로 읽었다. '헤르타 뮐러'는 자신이 겪었던 어둠의 실체를 보이기 위해, 어둠안에 퍼져있는 공포의 냄새를 알리기 위해 보편적 언어에 숨을 불어넣어 자신만의 언어조각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의 조각 조각을 엮은 글이
「마음짐승」이고
「숨그네」이다(물론 그녀의 다른 작품도 그럴 것이다). 「숨그네」는 몇 달 전에 읽었고, 그녀의 다른 작품들은 읽어보질 않았다.
 

'마음짐승' 첫 페이지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에드가가 말했다."
<p. 7>
그리고 글의 끝, 마지막 페이지의 끝 문장은 이렇게 맺는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에드가가 말했다."
<p. 309>
 
  마치 고리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을 읽고 처음으로 되돌아가 또 한번 읽었다. 다시 읽어야만 첫 페이지의 첫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처음 읽을때에는 무슨 의미인지 새길 필요없이 지나쳤지만, 다시 읽어보니 확연히 작가의 심정이 들어온다.
머릿속에 풀이 자란다. 말을 하면 풀이 잘린다. 침묵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제멋대로 두번째, 세번째 풀이 계속 자란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운이 좋다.
<p. 8>
  여기에서 풀이란 누구나 자유롭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나 사상이다. 생각을 한다는 것을 무성히 자라나는 풀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말을 하면 김매는 것이고, 누군가 사상을 통제하면 그런 풀들이 무참히 짓밣힌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운이 좋다." 이 의미는 자신이 받은 죽음의 번호를 내팽겨쳤다는 뜻이다. 운좋게 망명함으로써 말이다. 그럼에도 지난 과거의 일을 함부로 떠들수 없음을 은연히 내비친다. 그래서 '헤르타 뮐러'는 머릿속 김을 매기 위해 이 소설을 썼나 보다.

  다시 읽음으로써 미안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다시 한번 고통을 받는다. 몇몇은 죽
음을 향해, 몇몇은 망명을 향해 내달린다. 다시 읽어낸 문장 속에선 죽음이, 새로운 삶이 중요하지 않았다. 한 문장 한 문장 안에 들어있는 응축된 감정, 싸늘한 공간, 생생한 인물이 중요했다. 난 그녀가 이 소설을 쓰면서 공포스러웠던 당시 상황에 몸을 움찔거렸다기보다는 아찔한 추억을 더듬어 내려오며 주변 인물들이 그리워 눈물지었을 거로 생각한다.

  「마음짐승」안에 묘사된 독재체제가 공포스러웠냐 하면 솔직히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내가 방금 뱉은 '솔직히'라는 단어는 작가의 의도와 상반될 때야만 그 의미가 유효할 것이다. 따라서, 바로 전에 언급한 문장안에서 '솔직히'라는 단어를 지운다. 재차 언급해본다면, 「마음짐승」 안 에 묘사된 독재국가가 공포스러웠냐 하면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체제와 관련하여 공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체제의 치사함과 얍삽함, 그리고 더러움만을 내비친다. 치사한 놈들이 조종하는 사회를 담담히 써 내려갈 뿐이며, 주인공은 말려 죽이려드는 통제에 순순히 따르지 않을 뿐이다. 기숙사 동료 롤라가 자살하자 국가는 죽은 이의 당원 자격을 박탈하였고,  더불어 대학에서도 제적시켰다. 이 얼마나 치사한 짓인가. 롤라는 성폭행 당하였는데도 말이다. 산 자도 죽은 자도 도구일 뿐. 이런 세상은 공포스러운 세상이 아니라 더럽고 치사한 세상이다. 공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국가 시스템이 사적인 부분을 침범하면서까지 권한을 행사하는 더럽고 치사한 세상 말이다. 한마디로 사적 생활은 없는 세상. 언어유희를 부리자면 정말 '투명한 세상'인 것이다.

  공포스러운 세상은 동시다발적 죽음이 만연한 세상이다. 혐오와 증오의 세계는 주위 사람들의 순차적 죽음이 대기하고 있는 세상이다. 죽음이 누적되어가듯이, 감정의 찌꺼기 또한 가슴 한 켠에 응어리지며 쌓여만 간다. 결국 살아남은 자는 시대를 기억하고, 그 사람들 중 누구는 당시대 사람들의 숨소리를 기록한다. 숨멎음까지도. 이 슬픈 기록은 작가 마음속 짐승을 해소시키려는 작용일 수 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마음속에서 짐승이 자라고 있다는 그 절묘한 표현은 독재시대 누구나 예외일 수 없는 답답하지만 슬픈 침묵의 시대를 대표한다. 속에선 짐승이 울부 짖지만 겉으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일상을 보내야만 하는 침묵과 무덤덤의 시대.

           
<표지를 벗긴 책이 예뻐서 사진을 찍어봤음...>

  작가는 침묵의 시대를 언어의 미끈거림과 아름다움으로 포장한다. 역설적이다. 하지만 침묵을 강요 당할 수록 생각은 복잡해진다. 이 모든 것은 작가의 심리적으로 복잡했던 경험과 관계있다. 스스로에게 무수히 많은 말을 하였지만 밖으로 내뱉는 말은 몇 없다. 그래서 소설「마음짐승」에서는 대화는 있지만 대화체로 표현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러니까 큰 따옴표가 없다. 또 생각을 나타내는 작은 따옴표도 없다. 대화와 생각 모두 같은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이 모든것은 하나의 문장안에 고스란히 숨겨져있다. 읽다보면 대화이고 생각이다. 독재시대를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중인 듯하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최소한의 챕터를 구분하는 숫자 표시마저 없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통짜로 하나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모양새다. 마치 날짜 없는 일기 모음과 같다. 그만큼 소설에서 벗어나 사실적 글쓰기로 보이지만 표현의 유려함으로 인해 사건의 객관적 진술보다는 주관적 색체가 강하다. 그만큼 사물을, 사건을, 인물을 보는 콘트라스트(대비)의 차이가 나타난다. 사실과 은유가 섞여있어 주인공은 마음에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비관적 삶과 그에 대한 저항과 순응이 카드패 섞여 있듯이 교차되어 진행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마음짐승이 커 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마음짐승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콘트라스트이다. 나를 기준으로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 그 콘트라스트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마음속에서 키우는 짐승도 자라난다. 그럼에도 외부로 분출시킬 수 없음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내면의 세계에서는 결코 마음짐승을 죽여낼 수 없다. 머릿속에서 자라는 풀과 가슴 언저리에서 자라는 마음짐승, 이 또한 당시에 견뎌내야만 했던 인생의 무게였으리라.

  이 소설을 읽기도 전에 제목만 보고서 떠오른 또 다른 소설이 하나 있다. 국내 소설이다. 바로 윤대녕의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이다. 여기서 '호랑이'는 헤르타 뮐러의 '마음짐승'과 닮아있다. 두 책의 큰 차이점은 윤대녕의 소설 속 주인공은 '호랑이'를 낚기 위해 낚시질을 하지만, 헤르타 뮐러는 아예 망명의 이름으로 자신의 세계를 떠난다. 시대가 두 소설 속 주인공을 나락으로 몬 것은 분명하지만 윤대녕의 주인공은 여전히 공간 속을 활보하며 (마지막엔 제주도라는 공간에서) 인간관계를 통해 내면에 입은 상처를 어느 순간 치유하지만, 헤르타 뮐러의 주인공은 망명이라는 수동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일탈한다. 따라서 상처는 여전히 내면에 남아 있고, 사실상 극복하기엔 벽이 너무 높다. 작가의 말대로 자신은 운이 좋았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광고와는 달리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정말로 시대의 공포가 만였했을 망정 헤르타 뮐러는 자신의 언어로 중화시켰기 때문일 듯. 지금은 작가에게 한낱 기억 일부로써, 추억의 단편으로써 남아 있을 수 있겠지만, 마음짐승이 할퀸 가슴의 상처는 그녀를 때때로 당시 독재시대로 언제든지 불러들일 수 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도 그녀는 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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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2010년) 추석에는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이 손님들을 본 것은 삼 주 정도 되어가는 듯. 그런데 추석 음식장만 때문에 냄새가 멀리까지 솔솔 퍼졌나보다. 잠시 지나쳐가는 손님들이 아니라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5분 대기조 마냥 기다린다. 보통은 늦은 밤 잠시 보는 것 정도. 그러면 집에 있는 몇 가지 먹을거리를 내놓곤 했다. 이 손님들은 길고양이들이다.

내 얼굴도 익혔나보다. 내가 마당에 나오면 자기들 왔다는 듯 얼굴만 쏙 내밀고 저쪽 구석에 가서 자리 잡는다. 어서 음식 내놓으라는 압박.

뭐 먹고 있으면 5센티미터까지 접근해도 그리 상관하지 않는 듯. 하지만 음식이 없다면 1미터 정도만 접근해도 슬그머니 일어나 뒷걸음친다. 나 도망가는 거 아냐. 그냥 뒷 자리가 더 편해 보여.라는 듯이 군다. 슬그머니 능글맞게 뒤로 물러난다. 내가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면 끄~~악@@. 온 털이 곧추 서고 눈은 뚱그런 해지고, 몸은 각목처럼 순식간에 굳어버리는 듯하지만, 여전히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면 별 일 아니다는 듯이 다른데 쳐다본다. 뭔 일 있었는감ㅡㅡ; . . .

첫 만남은 랑이였다. 마당 한 켠, 쓰레기 봉투 있는 곳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길고양이였다. 흰 바탕에 노랑털로 감싸있는 노란 고양이. 아직 성묘는 아닌 듯 했다. 어린티가 났고, 나 배고파요 라는 애처로운 눈망울에 매혹당했다. 그래서 냉장고에서 마른 포가 있기에 가위로 잘라주었다. 그것을 노랑이는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킁킁거리며. 먹을것에 관심은 가지만 나 때문에 오지 않는 듯 하여 저 멀리 한 7~8미터 떨어져서 쭈그리고 앉았더니 그제야 나와서 온 사방을 경계하며 아작아작 씹는다. 쫑긋한 두 귀는 여전히 레이더 가동 중. 두 귀는 서로 다른 방향의 음파를 경쟁하듯이 잡아내려는 듯, 휙 돌아갔다 멈추고 다시 다른 곳을 향해 쫑긋거렸다.

          

그래 가끔 와라. 가끔 와서 들렀다고 알리면 내 먹을 것을 주마. 하지만 개미들 때문에 먹을 것을 미리 줄 수는 없다. 이렇게 나름 노랑이와 계약을 맺었다. 뭐 노랑이는 내 목소리에 관심도 주지 않았지만...

           

다음날. 오라는 노랑이는 안 오고 더 어려 보이는 검은 색 무늬가 들어간 고양이가 찾아왔다. 오 이런...너무 어리고 말똥말똥 거리는 그 녀석의 눈빛에 또 홀렸다. 그래 너도 챙겨주마. 먹을 것을 내왔다. 이 녀석은 노랑이보다 더 순해보였다. 어느 늦은 밤 담배 피러 마당에 나갔더니 인기척이 났다. 이 녀석 검은 고양이가 저쪽에서 흘끔 나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니...아...부끄럽고만...다시 먹을 것을 주었다. 이번에는 한 3미터쯤 떨어진 거리에 놓았다. 나와 마른 포 사이가 한 3미터, 녀석과 마른 포 사이가 한 2미터 도합 우리 사이의 거리는 5미터쯤. 그렇게 모기에 피 바쳐가며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제야 슬금슬금 먹을 것을 향해 온다. 10여분 되었을 듯. 처음엔 나도 쪼그리고 앉았는데 다리가 저려 그냥 맨 바닥에 철푸덕하고 앉아버렸다.

            

한동안 오질 않았다. 물론 왔을 수도 있다. 녀석들이 온지 어떤지 나만 모를 뿐. 어느날 저녁 두번째 고양이인 검은 고양이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먹을 것을 1미터쯤 떨어쳐 놓았다. 5분 정도 지나니 낮은 포복으로 오다가 잠시 멈추고 그러고 1~2분 얼음장처럼 멈추었다 다시 오기를 몇 번 반복하였다. 결국 나와 1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그 녀석 게걸스럽게 오독오독 씹는다. 모기에 물린 자리가 가려워, 내가 뒤척이면 모든 동작이 올 스톱. 눈은 커진 상태로 나를 주시. 귀는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해 레이더마냥 쫑긋 쫑긋.

후딱 먹어치우더니 휙하고 사라졌다. 그런데 저쪽 마당 구석 나무들 사이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 호.. 거기에 있었군. 플래시를 비쳐보니 어딘가 묘하다. 검은 고양이이긴 한데 표정이 왠지 낯설다.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옆에 방금 그 검은 고양이가 식빵을 굽고 있었다. 그럼 이 고양이는 무엇? 앗!! @.@ 검은 고양이 두 마리다.

            

다시 먹을 것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한참 떨어진 곳에서 역시나 쭈그리고 앉았다. 두번째로 만났던 고양이가 먹을 것 있는 곳으로 오더니 잠시 멈추고 그 옆에 후미진 곳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세번째 검은 고양이는 나와 두번째 고양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지켜보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당연히 그릇은 비어 있었다. 옆에 물그릇도 상당량 줄어있었다. 짜식들~~

             

또 며칠후에 검은 고양이가 찾아왔다. 세번째 고양이였다. 이제는 이름을 지어줄 필요가 있었다. 처음 본 노란 고양이는 처음엔 그냥 길고양이로 불렀다. 그러다 두번째 검은 고양이가 등장하자마자 노랑이로 이름을 바꾸었다. 검은 고양이는 그냥 검은 고양이였다. 세번째로 또 다른 검은 고양이가 등장하자 두번째 검은 고양이 이름이 애매했다. 그래서 이름을 다시 바꿔 주었다. 두번째 만난 검은 고양이는 눈 한쪽이 검은 털로 뒤덮여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하록이로 부르기로 했다. 세번째 고양이는 세번째로 만났다하여 단순하지만 정감어린 그리고 엘레강스한 삼식이로 부르기로 했다. 지금은 첫째 노랑이는 노자를 빼버리고 랑이라 부른다.

             

그 뒤, 가끔 이 고양이들은 우리집을 스쳐 지나갔다. 나와 만나면 먹을 것도 좀 얻어먹고 갔다.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갔다. 내 상상...지금은? 왔다간 표시 확실하게 한다. 마당에 있는 물건들 지네들 취향대로 제정비하고 간다. 나는 밤에 와서 다시 내 취향대로 해놓고. 뭐.. 그렇다고 심하게 어질르는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역시나 거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다만, 누워 있을 뿐.

이렇게 해서 추석날이 왔다. 아니, 녀석들 입장에서는 냄새 풍만한 그런 날이 왔다. 얼마나 냄새가 났는지 바람 통하라고 열어놓은 현관문으로 당당히 들어왔다. 방에 있다 거실로 나갔더니 꺄~~~악...하며 우당탕 묵직하게 소리내며 마당으로 쏜살같이 날랐다. 삼식이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방에서 인터넷하고 있는데 뭔가 뒷목이 써늘한 적이 있었다. 모니터보다가 웬지 섬뜩했다고 할까? 그래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더니 랑이가 당당하게 침대위에까지 올라갔다 막 내려오는 참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이는 눈이 마주쳤다. 나는 머리속이 비었다. 그냥 순간 멍했다. 랑이는? 마찬가지였다. 똥그란 눈만이 내 눈에 들어왔다. 1초 후, 상황파악을 한 뒤에 일어서자마자 안녕~~하시고 자시고도 없이 온 몸의 털을 날리며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밖에 나가보니 어느 틈에 저 담장 위에서 망보고 있었다. 아무튼 친하지도 않을 때 그런 적도 있었다.

            

요즘 삼식이가 제일 많이 들른다. 다음으로 랑이. 하록이는 거의 못본다. 가끔 셋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도 보긴 하지만 그런 장면은 좀체 보기 힘들다. 그런데 추석때는 하루종일 거의 셋이 붙어 다녔다. 냄새가 그들을 묶어준 듯. 처음엔 음식 먹을때 순서가 있는지 차례차례 먹었다. 불고기도 줘보고, 오징어도 줘봤다. 이제는 지들끼리 펀치 날려가며 먹는다. 오..미안... 너희들의 그 얇은 우정을 내가 만들어줬구나.

            

그래도 랑이가 제일 큰 애고, 다음은 삼식이, 막내가 하록이인 듯하다. 그런데 랑이와 삼식이는 한 형제같고, 참... 나는 그들이 암컷인지 수컷인지는 모른다, 하록이는 그냥 동네 꼬마인 듯. 어울릴때 보면 잘 어울리지만 왠지 하록이는 왕따같이 한 쪽 구석에 혼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애는 잘 오지도 않는다. 와도 늦은 밤에서 새벽쯤에 들리는 듯. 먹을 것을 잘게 쪼개어 그릇에 놓지 않고 손에 쥐고 있다가 녀석들이 다가오게끔 앞에 하나씩 던져주면 랑이와 삼식이는 슬금슬금 내 앞으로 전진하는데, 하록이는 멀거니 뒤에서 지켜만본다. 그러다 내가 하록이쪽으로 먹이를 던져주면 랑이는 순식간에 순간이동을 하여 하록이꺼를 빼앗아 먹는다. 불고기의 경우 하록이가 열받았는지 랑이에게 주먹을 날린다. 물론 삼식이도 랑이에게 주먹 날린 것도 봤다.

            

암튼...그렇게 손님들이 왔다 갔다 한다.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것이 인간인 나의 생각이다.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떨어지는 낙엽들좀 운동삼아 모아놨으면 좋겠다. 마당에서 낙엽쓸면 이것들이 슬슬 기어나와 구경만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 지켜본다. 음...

          

ps...

아.. 이것을 포스팅 하기 전에 애들이 있나 하고 마당에 나가봤더니...처음 본 턱시도 고양이가 한마리 있고, 랑이가 몸을 한껏 부풀린채 그 놈 앞에서 하악질 하고 있다. 더 이상은 안돼..... 하록이는 여전히 숨어있고, 삼식이는 고개만 빼꼼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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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호킹이 책 한 권을 냈다. 제목은 『The Grand Design. 우리말로는 '위대한 설계'내지 '대단한 설계'쯤으로부를 수 있겠다. 또는 책 내용에 따라 '위대한 배열'이라 해도 무방할 듯 하다.(물론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사실 호킹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뭐랄까, 좀 가벼워보인다고나 할까. 천 년안에 인류의 문명이 멸망할 개연성이 있으니 서둘러 지구형 행성을 찾아 인류를 이주시킬 수 있는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는 둥, 호전적인 고등생물체가 지구로 쳐들어와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으니 외계인 찾기 노력을 그만두어야한다는 둥 이런 발언을 가끔씩 매체를 통해 듣곤 하였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호킹 박사의 발언을 가볍게 실은 언론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어진다.

 호킹은 외계인은 확실히 존재한다는 발언을 종종 해왔었고, 가끔 내가 헷갈렸던 것은 시간여행에 관한 것인데, 호킹은 시간여행이 불가능하다고 했다가, 언제는 또 가능했다고도 했다가 조금은 애매하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는 물론 내가 대충 기사를 읽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불가능하고, 미래로의 시간여행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아무튼 어떤 과학적 이론에 대한 것보다는 인류나 외계인과 같은 '존재'에 관한 물음을 많이 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설전해 오고 있다. 이 존재는 다름아닌 신이다. 사실 신의 존재보다는 신이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 관여를 해왔느냐 아니었느냐가 주된 논쟁거리이다. 대표적인 것이 진화론과 창조론의 충돌인데, 이 두 이론은 과학과 종교라는 집안의 자식들이지만, 사실 진화론은 생물학에서 주로 거론하는 이론이고, 창조론은 개신교에서 주로 거론하는 이론이다. 즉, 진정으로 과학과 종교의 전방위적인 매치는 사실상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봐도 될 듯 하다. 과학과 종교의 전방위적인 매치가 붙기 어려운 것이 방대한 지식이나 이론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지극히 사소한 것을 다루어야 한다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을 듯 싶다. 그래서 우리들 의식속에서 생물학과 개신교의 다툼이 애써 다른 쪽으로 번지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가령,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을 일상속에서 신이 비를 뿌린다고 하지는 않는다. 태풍도 마찬가지이다. 신이 노여워해서 세찬 비와 바람을 지상에 내려보냈다고 하지 않는다. 아마 종교인들도 마찬가지 일거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의 다툼은 이런것까지도 시비대상이 될 수 있다. 다만 너무나 자명한 현상이기에 종교계든 과학계든 이런 것으로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건들어봤자 손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신은 여전히 하나의 메타포(은유)로서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비가 한 차례 오면 신경 쓰지 않지만, 몇 날 며칠동안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불러온 비가 내렸다면 정치적 문제로, 사회적 문제로 비화시키곤 한다. 정치가 잘못돼서 사회가 썩어빠져서 신이 내린 일침이라는 둥 말이다. 이렇듯 신은 우리 세계에서 항상 결과론적이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인식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거니와 과거의 어떤 사건이 미래에 어떤 사건으로 나타날지 우리는 그리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고 있고, 항상 현재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종교를 흔히들 현세구복 신앙(종교)이라고도 한다. 현세구복 신앙(종교)속에서 일상으로 불러들인 신은 항상 현실에서 결과를 표방하는 일종의 메타포가 된다.

호킹은 『The Grand Design에서 이렇게 말했나보다.

   
  It is not necessary to invoke God to light the blue touch paper and set the universe going. 
  • STEPHEN HAWKING,
  • physicist and author of the new book The Grand Design, saying God wasn't needed for the creation of the universe
Read more: http://www.time.com/time/quotes/0,26174,2015654,00.html#ixzz0zIypnT2h

해석은 대충 이렇다.
 "우주를 진행시키기 위해 심지에 불을 붙였다는 신을 끌어들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좀 애매하다.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린 코드로 태초의 우주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신이 있든 없든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이 우주를 가동시키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학계는 어떨까. 과학계나 종교계 말이다. 일상과는 달리 결과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처음이라는 '태초'라는 단어에 신경을 쓴다. 즉, 세상의 모든 원인을 궁금해한다. 종교계에서는 앞서 말한 창조론을 태초의 원인으로 놓고 싶어하고, 과학계에서는 빅뱅을 태초의 원인으로 놓고 싶어한다(물론 빅뱅 이전은 또 무엇이냐라는 질문도 당연하겠지만).

 태초의 우주에 대해 어느것 하나 진실로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지구는 우리은하(나선형 은하)의 어느 변두리쯤에 위치해있고, 또 태양이 이끄는 일종의 시스템속에서 세번째 위치해있는 행성이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세번째 행성인 지구만이 생명체가 풍부하다. 물도 풍부하고, 산소(공기)도 풍부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또 다시 이런 사실을 선점하기 위한 말장난이 펼쳐진다. 신이 골디락스 존에 지구를 놓았다고 말이다. 지구가 태양쪽으로나 목성쪽으로 조금만 위치 이동을 했더라면 아마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이다. 또 어떤이는 태양계의 절묘한 행성들 궤도가 마치 지구를 위한 배열이라고들 말한다. 가령 목성과 같은 크기의 행성이 태양계에 목성 말고도 하나 더 존재한다면 이 역시 태양계 배열이 흩어질 뿐더러 우리 지구는 태양계 밖으로 튕겨져 나갔을 거라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주가 지금의 구조를 가지게 된 몇가지 이유가 있다고 설명하는 책도 있다. 원서 제목은 『Just Six Numbers』이고. 우리말 번역서 제목은『여섯 개의 수』이다. 그러니까 6가지 숫자가 우주라는 우연, 혹은 위대함을 설명한다. 그 숫자들은변수이지만 거의 고정되어 있는 상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범위안에 수 중에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수, 상수를설명한다.

1. 오메가=1 :  오메가는 중력이나 우주의팽창과 관계있는 수로 그 수가 너무 크면 이미 옛날 옛적에 우리의 우주는 충돌해서 사라졌을 것이며, 만약 작다면 행성들,가스들, 암흑물질들이 산산히 흩어져 은하 조차도 생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 즉, 한마디로 '점성도'와 같은 의미로 생각하면된다.

2. 엡실론=0.007 :엡 실론이 가리키는 것은 핵력이 강하냐 약하냐는 의미이다. 따라서 원소의 구성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물분자는 수소 원소 둘과산소 원소 하나가 뭉친 것인데 약하면 이 역시 흩어질 것이다. 물론 지구와 같은 행성도 이룰 수 없는 것이고. 엡실론이0.006이나 0.008 정도였다면, 이 역시 우주는 없다.

3. D=3 : D는 다름아닌 차원을 의미한다. 우리의 우주는 시간을 포함한 11차원인데,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은 3차원이다. 만약2차원이었다면 우리는 ...음...암튼 재밌을 것이다 다른 사물도 2차원이기에 항상 줄(혹은 '선' line)만 보일것이다(눈이라는 것이 있다면..). 4차원이었다면 잘 모르겠다. 막 왜곡되고 그럴 듯. 얼짱이나 얼꽝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없을듯.

4. N =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  N 이 의미하는 바는 전자기력과 중력의 비율로 생각하면 된다. 그만큼 중력은 전기력보다는 엄청약하다는 의미. 어떻게 보면 크기의 과학을 의미하는 말일 수 있다. 만약 N=0에 근접한다면, 그러니까 중력이 전기력에 비해엄청 크다면 생물체는 곤충보다 훨씬 작을 것이고, 심지어 하루살이의 일생을 가질지도 모른다. 따라서 진화론적 관점에서 진화는엄청 느리게 작동한다. 물론, 우리가 이런 세상에 존재함을 가정했을때.

5. Q = 1/100,000 : Q는 지금의 별들과 은하, 은하군들의 구조를 의미하는데, Q가 가리키는것은 사실상 현재의 우주의 구조가 아니라 빅뱅으로 생겼을 순간 씨앗 상태의 원시 우주의 값을 의미한다. 원시 우주가 이 Q값을가졌기에 지금의 우주와 같은 구조를 유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Q값이 다르다면 현재의 우주의 모습은 상당부분 달라졌을 거라는의미. Q값이 훨씬 작았다면 우주의 요동이 없다라 할까, 아무튼 비활성적인 모습의 우주만을 담았을 것이다. 반대로 컸다면 너무나요동적인, 그래서 서로 집어삼켜버리는, 그런 거대 블랙홀이 지배하는 우주가 되었을 거란 의미. 한마디로 우주의 노령화 현상을얘기하는 듯.

6.  lambda = 0.7 : 람다는 우주 팽창과 관련있는데, 암흑에너지라는 일종의 반중력과 관련한 상수로 우주의 팽창을 가속시키는 작용을 한다. 결국 현재 우주의 크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상수이다. 그러니까 중력이라함은 간단히 말해서 무한히 팽창하는 우주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력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암흑에너지는 우주에 브레이크가 걸렸음에도 척력으로써 우주를 급속히 팽창시키고 있는 것으로 본다.

 마틴 리스의 『여섯 개의 수』는 이런 최종적으로 조율된 숫자를 통해 다중우주를 표현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수많은 법칙이나 규칙으로 우주를 규정지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 과연 우리의 우주가 다중우주속에서 '오아시스'일까라는 질문을.

           
                 출처: http://www.neatorama.com/2010/04/11/seti-turns-50-years-old/

  흔히 말하는 '외계인 찾기 프로젝트'가 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오즈마 계획'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외계인을 찾는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이 '오즈마 계획'의 책임자는 '프랑크 드레이크' 박사였는데 사실 오즈마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일명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프로젝트의 서막이었다. 드레이크 박사는 1960년 미국 동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그린뱅크에서 열렸던 '지구밖 생명체에 관한 그린뱅크 회의'에서 조금은 사이비 같은 공식 하나를 발표한다. 이름하여 <드레이크 방정식>이라 불리는 공식인데, 공식에 여러 숫자들을 대입하면 우리 은하내에서 우리 인류와 동일한 문명의 수는 수개에서 10만개가 넘는 수가 도출된다. 사실 해답은 없다. 몇가지 숫자를 달리하면 터무니없는 수도 나온다. 가령 우리와 같은 문명의 수가 0.00001개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벌써 지구라는 문명을 지닌 행성이 존재하기에 소수점은 말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비율을 조절해서 도출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외계 문명의 수가 0.1개에서 백만개 사이라면, 최소 지구라는 문명이 1개 존재하므로 비율을 조절하여 1개에서 십만개 사이로 그 값의 오차를 줄이는 식이다.

드레이크 방정식 :  N = R* fp ne fl fI fc Lc


Where,

N = number of technical civilizations in the Milky Way Galaxy with whom we might expect to communicate.
(
N은 전파교신능력을 갖춘 혹은 전파를 검출할 수 있는 우리 은하내의 문명체의 수)

R* = average rate of star formation in the Milky Way, in units of stars per year.
(R은 우리은하 내에서 1년에 몇개나 별들이 생성되는지를 나타내는 수)

fp = fraction of stars with planetary systems.
(
fp는 별 중에서 행성을 가지고 있을 확률, p는 planet을 의미)
 

ne= number of planets per system with suitable ecologies (liquid water...)
(
ne는 행성계 내에 생명이 살 수 있는 행성수)

fl = fraction of such planets on which life actually occurs
(
fl은 생명이 탄생할 확률)

fi = fraction on which intelligent life arises
(fi는 생명체가 지적문명체로 진화할 확률)

fc = fraction where intelligent beings develop capability for interstellar communication
(
fc는 지적문명체가 다른 별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통신기술을 가질 확률)

Lc = mean lifetime of such communicating civilizations
(
Lc는 기술문명이 존속하는 기간, 단위 : 년)

* 출처 : http://earthguide.ucsd.edu/virtualmuseum/litu/12_1.shtml

참고로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은 드레이크 방정식을 토대로(자신이 정한 숫자를 방정식에 집어넣어) 지구밖 문명의 수를 백만 개로 발표한 바 있다.

  글을 쓰다보니 길기만 하지 별로 알맹이는 없다. 그래도 새로 나온 스티븐 호킹의 책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글을 적게 되었다. 전반적인 의문은 이런 것들이다. 정말로 신이 이런 저런 숫자들로 우주를 디자인했을까? 일일이 하나하나 목록을 옆에 놓고 입력했을까? 그래도 신이 최소한 어떤 수 하나를 입력해야 한다면 과연 어디에 무슨 숫자를 집어넣었을까? 뭐, 이런 것이 현대 과학의 고민이다.

과연, 질량은 어디서오는 것일까? 랄까...

참고로 질량을 언급하기 위해선 뉴턴과 아인슈타인, 그리고 중력, 에너지, 다시 차원, 끈이론, 초끈이론, M-이론등등을 그에 앞서 언급해야 한다. 후와....

PS.

우주론에 호기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 보기 쉬운 책들을 몇 권 소개해본다.

흔히, 많이들 보는 책으로는 '미치오 가쿠'의 『평행 우주』,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와 『우주의 구조』를 많이 봤겠지만, 좀 쉬운 책(내 생각)도 있다.

'다케우치 가오루'의 『한 권으로 충분한 우주론』, '마커스 초운'의 『현대과학의 열쇠, 퀀텀 유니버스』, '폴 데이비스'의 『코스믹 잭팟등이 있다. 참고로 한 권씩 읽는다기 보다는 이 책 저 책 찾아가며 읽는 것이 더 좋을 듯....
 
            



   
                                     
      
  







덧붙임...2010. 09. 25.

벌써 번역본이 나왔다...역시나 '까치글방'... 번역본도 같이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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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1. 주인공은 '나', 계급은 대위. 다른 이들은 '이 대위'로 부른다. 가진급 상태. 소속은 육군본부 정치졍보국. 상관은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국장을 맡고 있는 '장 대령'.

6.25.전쟁이 터지고 같은 해 9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그 기세를 타고 내륙으로 뚫고 들어가 즉시 서울 점령, 그리고 10월 둘째 주, 평양을 탈환한 상황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장 대령이 정보를 가져왔다. 북한군이 평양을 빠져 나가면서 목사 열네 명 중 열두 명을 총살하고 단 두 명만을 살려 보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국제 뉴스에 올릴 좋은 선전 자료가 된다는 이유로 주인공인 '나'에게 뒷조사를 시킨다. 주인공인 '나', 이 대위는 주변을 탐문하면서 조사를 시작한다. 신을 믿으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살아나온 두 목사는 어떤 사람들일까?

굉장한 정보를 얻었다. 믿을 수 없는 정보. 순교자로 이름을 올린 12명의 목사가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상황에서 목사들은 영혼의 지도자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섰다는 정보. 이 대위는 사건의 바닥에 접근할수록 사건의 정황을 뒤집을 수도 있음을 알아챈다.

2.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려움에 처하면 상황 반전을 모색한다. 그런데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을 때 기적을 갈구한다. 소설 「순교자」는 6.25 전쟁이라는 정치적, 군사적 대립속에서 방황하는 개인과 군중을 그린다. 가장 큰 뼈대는 기적적으로 공산당원에게서 살아난 목사가 어지러운 사회속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아니 어떻게 해석 되어야만 하는지를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전광석화처럼 그려나간다. 소설의 배경은 6.25전쟁 당시이지만 실은 누가 점령하든 점령군에게 환영 일색 박수 갈채를 보내야하는 일률적인 해석만을 강요하는 편향적인 사회이다.

3. 대부분의 목사들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신의 개입'을 바랬다. '신의 개입'은 기적에 대한 직접 진술이다. 신의 손길이 처형장에 미치기를 원했다. 하지만 신이 강림했다는 어떤 낌새도 없었다. 그 순간 목사들은 자신의 알량한 목숨이 신의 것이라고 주일마다 내뱉었던 그 맹세에 허망함을 느꼈을 터. 신이 배반했는지 신을 배신했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죽어가는 그 순간에 신을 더 이상 부르짖지 않았다는 그 사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신을 향한 기도는 공산당들을 향한 애걸로 바뀐다. 더불어 신에 대한 항명으로 침묵하는 목사마저 생긴다.

공산당원에게 애걸하는 그 순간 목사들이 믿고 섬기는 마음속 신의 자리에서 신은 사라지고 총 든 공산당원이 대신 들어선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목사만이 총 든 자를 짐승의 위치에 놓고 호통을 친다. 총구가 어딜 향해 있건 상관치 않았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들에게 애원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신의 자리는 신만이 있을 수 있다. 목사에게 호통을 받은 총을 든 공산당원은 목숨을 애걸한 다른 목사들과는 달리 이 목사의 저항에 흥미를 느끼고 목숨을 살려 준다. 미쳐버린 목사도 살려준다. 정말 신의 개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끝까지 신을 믿은 자는 흔히들 말하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4. 목숨을 잃은 자와 목숨을 구한 자 사이에서 신의 논리를 읽을 순 없다. 아니 신이 애초에 논리를 가질 필요나 있을까. 반대로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논리가 있다. 이제 그 논리 싸움이 후속 이야기로 펼쳐진다. 인간의 논리, 그럴 듯 하지만 결국엔 이득을 많이 가져가는 계산법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는 것, 인간사에서 보편적이고 최상인 논리이다.

5. 평양 신도들은 당연하게도 죽은 열두 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높여 부르기 시작한다. 다만 죽은 목사들이 마지막 자리에서 행했던 믿음에 대한 부정 행위는 숨겨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 돌아온 목사는 걸리적거린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말의 의구심은 없다. 어떻게 선과 악으로 뚜렷이 나눠진 세상에서 복잡다단한 진실이 덩굴처럼 얽혀있단 말인가. 공산당에게 죽은 목사와 그들 손에 살아 돌아온 목사, 이 둘 중 누가 더 신을 진정으로 섬겼다고 보이는가. 누가 더 좋은 목사인가. 답은 뻔하다.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믿지 않겠는가.

6. 군중과 종교, 거기에 이들의 심리를 전쟁에 이용하고자 했던 군대. 각자의 위치에서 최상의 답만을 본다. 인간의 역사를 발전시켜온 동인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이 가진 의심이다. 의심속에는 선과 악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선한 의심이나 악한 의심 그 자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의심 그 자체로는 중립이다. 의심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다. 따라서 의심을 어떻게 일소시키는지도 중요하다. (소설속에서 얘기하는) 관찰만 하는 신의 논리에서 보면 최상의 의심 해소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혹은 시간속에 묻혀두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난다.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동일시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논리에서는 어떻게 의심을 해소하는가. 그것은 바로 정치적 공격과 방어 사이에서 맺은 암묵적인 동의이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7. 이 소설의 특징은 결말이라는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전쟁은 진행중이고 또 급격하게 변해가는 중이다. 다시말해 잠시 전쟁의 포연이 살짝 걷히고 난 뒤, 평양에서 목사들을 총살시키는 이런 사건이 있었고, 다시금 북한군과 중공군이 합세하여 남하하자 목사들의 죽음은 수많은 죽음 속에 묻힌 것이다. 수많은 죽음. 그렇다. 당시 서부전선 또한 여전히 이상 없을 뿐.

8. 앞서 결말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 내가 읽은 이 소설의 결말은 다시금 앞을 가리킨다. 그것은 장대령의 죽음이다. 평양을 탈출한 주인공 '나'는 장대령의 부음을 장대령 친구인, 예전에 '군목(군대목사)'이었던 '고 목사'에게 듣는다. 장 대령의 죽음을 알리는 군대에서 보낸 편지 한 통. 그 속엔 장 대령이 첩보 활동을 하다 장렬히 산화하였다고 쓰여있다. 이렇게 또 인간사에서 또 한 명의 영웅(혹은 순교자)을 알린다.

9. 연극 같은 소설.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에 힘들이 실려있다. 마치 서로 자신의 논리가 맞다는 식으로, 무대 밖 관객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관객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들의 논리는 탄력을 얻는다. 물론 끄덕이는 관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논리를 선택한 관객의 숫자만 늘어갈 뿐 진실 규명과는 관계 없다.

이 소설이 왜 연극 같을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힘이 들어간 소설이기도 하거니와, 소설 속 배경이 평양임에도 북한 사투리, 더 엄밀히 말한다면 평양 사투리가 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흡사 외국 작품의 연극을 국내의 연기자들이 우리말로써 공연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의 마지막 몇 장이 할당된 해설을 읽어보면 된다.
『「순교자」가 'The Martyred'라는 제목으로 뉴욕에서 출판되어 나온 것은 1964년이다.』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출간이, 그것도(물론 당연하게도) 영문으로 먼저 나왔단다. 6.25. 전쟁이 끝난지 10년 조금 지나서 영문으로 책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영문으로 이 책을 냈고, 다시 역자(도정일)가 한글로 번역을 하여 이렇게 번역서를 낸 것이다. 다시금 번역 재판을 냈음에도 북한 사투리를 살리지 못한 것이 좀 아쉬운 부분이다. 북한(평양) 사투리를 어느 정도 살려냈다면 한국 독자들에게 사실적이고 좀 더 실감나는 독서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소설 외적인 부분 또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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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