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부를 위한 신디의 관계 수업 - 서로 다른 너와 나를 위한 9가지 결혼 심리학
신동인(신디) 지음 / 더퀘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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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행복 또는 복잡한 감정


결혼을 하게 되면, 그리고 신혼을 보내고 있다 하면 거의 대부분 행복한 얼굴로 묻는다. "신혼이라 좋지?" 이 말에 항상 웃으면서 좋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그저 '좋다'라고 말하기엔 신혼의 감정이란 꽤 복잡하다. 분명 행복하고 설레고 좋은데, 거쳐가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원가족에서의 독립과 분리, 처음 겪는 중대한 결정 (집, 식 관련 계약 등),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 몇십 년간 다르게 자라온 두 사람이 결합해가는 과정 등, 젋은 부부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다가오는 시기가 바로 신혼이다.


실제로 나는 결혼 직전 메리지 블루를 심하게 겪었다. 메리지 블루는 결혼 전 남녀가 겪는 심리적인 불안, 우울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생전 처음 겪는 오묘한 감정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만약 이전의 나였다면 이 감정을 끙끙 앓고 다른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환시켜 내보내거나 꽤 오랫동안 안고 있다가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약 1년가량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심리 상담을 받았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오랫동안 신랑에게 감정을 솔직하게 나누고 표현하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기도 한 결과, 지금은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물론 티격태격하는 건 당연히 있지만 중요한 건 서로를 믿고 감정을 나눈다는 것이다.


오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국내 최초 온라인 부부 멘탈 케어 플랫폼 '신디 Sindy'를 운영하면서 저자가 쓴 이 책의 초반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저는 감히 우리가 결혼을 공부하지 않는 데서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나는 이 문장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무작정 참고 애써도 해결되지 않는 부부 관계도 분명 존재한다. 만나지 말아야 하는 배우자의 조건도 있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오래 끝까지 행복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의무감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결혼을 공부함으로써 관계가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정말로 공감한다.


첫 페이지 목차만 살펴봐도 「요즘 부부를 위한 신디의 관계 수업」 책 속에는 꽤 상세한 분류를 통해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심리학 지식들이 담겨 있다. 결혼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결혼의 시작과 조건, 갈등과 정서를 다루는 법, 애착 유형, 서로의 상처를 다루는 소통법, 결혼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방법까지 꼼꼼하게 다룬다. 특히 내가 재밌게 읽은 부분은 우리가 믿는 결혼에 대한 신화 (=환상)와 오해를 다룬 부분, 애착 시스템, 부모와 현명하게 거리 두는 법, 부부가 각자 느끼는 사랑의 언어를 다룬 부분이었다.


중요한 건 '나'를 제대로 아는 것


내 친구는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연애를 하면서 내 부정적인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라고. 연애도 마찬가지지만 결혼은 조금 더 가까이 결속된 관계를 통해서 내가 스스로 알지 못했던 다양한 이면들을 목격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결국 결혼 과정에서도,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중요한 건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라 생각된다. 나의 성장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성격과 사고 패턴, 애착 유형과 같은 것들이 '어려운 상황에 닥칠 때'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그리고 배우자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고 다시 어떻게 되돌려 받는지. 「요즘 부부를 위한 신디의 관계 수업」을 통해서 다시금 떠올리고 점검하게 되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 티격태격하면서도 설레는 신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정말로 추천하고 싶어서 진심으로 이 글을 썼다. 


"상처 없는 사람 없고 갈등 없는 부부 없습니다. 상처와 불화야말로 결혼의 필수품이죠. 혼수나 예단은 생략할 수 있지만 상처와 불화는 생략할 수 없어요.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결혼은 부부가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크루즈 여행까진 아니더라도 편안하게 경치 정도는 구경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힘들게 노를 저어야 한다는 것, 결혼은 그런 겁니다. (서문, 12쪽)"


상처도, 불화도 당연히 필수라고, 결혼은 그런 것이라고 솔직하게 전하는 작가의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된다. 부부에게 삶의 전환점이 되는 크고 작은 일이 언제든 다가올 것이다. 가끔가다 이 책의 내용들을 다시금 펼쳐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보다 성숙한 관계를 위하여 계속해서 노력해 보려 한다.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를 무찔러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함께 힘을 합쳐 불화라는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부부가 한편이 되어 불화라는 공공의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불화를 겪는 부부들이 빠져들기 쉬운 오류 중 하나가 잘못된 상대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내 배우자가 더 많이 배운 사람이라면, 사회경제적 지위가 더 높았다면, 돈이 더 많았다면 나는 정말 더 행복했을까요? 그럴 리가요. 그건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착각일 뿐이에요. - P108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이에 따른 정서 반응을 우리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정서 반응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강력한 신호거든요. 지속적으로 그런 정서와 느낌을 받는다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정서 반응에 짓눌려 살지 말고 이를 삶에 이용하는 겁니다. 좀 과장되게 얘기하자면 정서를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삶의 품격이 달라집니다. 정서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될 때 부부 불화를 한결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 P127

여러분은 배우자와 서로 이런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있나요? 여러분은 배우자에게 이런 든든한 땅이 되어주고 있나요? "큰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어떤 시련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 한 드라마에서 나왔던 대사입니다. 이 대사에 애착이론을 적용해보면 큰 사랑은 서로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불안과 외로움은 바로 이 안전기지가 되어줄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생깁니다. - P145

강하게 결합된 커플일수록 서로 떨어져 있어도 괜찮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랑과 결혼이 나를 구속하고 내 자유를 제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건강하게 의존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P171

여러분은 어떤 사랑의 언어로 상대에게 이야기하고 있나요? 부부가 가진 사랑의 언어가 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안타깝게도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와, 역시 맛있네! 당신 요리가 최고야."

남편의 칭찬에 아내는 이렇게 말하죠.

"맘에도 없는 립 서비스는 됐고, 고마우면 이따 빨래나 해."

‘인정하는 말‘이 사랑의 언어인 남편은 자기 방식대로 사랑을 표현했지만, ‘봉사‘가 사랑의 언어인 아내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내가 시큰둥하게 반응함으로써 남편의 접근을 차단하는 일이 반복되면 남편은 점점 사랑의 언어를 표현하기를 꺼리게 됩니다. 결국 서로 친밀감을 쌓는 길은 요원해지죠. 누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사랑의 언어가 다른 것뿐입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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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겨울 헤세 4계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마인드큐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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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스승, 헤르만 헤세

 

이제는 책 없이는 절대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제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는 가벼운 책들이나 만화책만 슉슉 넘기며 읽곤 했었고, 고등학교 때까지도 그렇게 책을 좋아한 사람이 아니었답니다. 하지만 대학 초년생 때 갑자기 삘받은 듯이 문학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렇게 만들어준 '첫' 작가는 '헤르만 헤세'였어요. 청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작가 '헤르만 헤세'. 저는 우연히 만나게 된 「수레바퀴 아래서」를 시작으로 헤세의 문학 세계에 빠져 홀린 듯이 책을 읽게 되었죠.


어쩌면 지금 읽는다면 그때의 감정과는 다른 감정으로 읽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헤세의 책이 굉장히 무겁고 비장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도 저에겐 감사하고 소중한 작가입니다. 정말이지, 청춘의 길목에서 읽는 헤세의 글들은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들었어요. 잠겨 죽을 정도로 빠져 있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아요.


 

 


소설, 그리고 시, 에세이, 그림까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말하자면 당연히 <데미안>이 바로 떠오를 거예요. 하지만 헤세의 삶 속에는 수많은 시와 에세이, 그림도 있었답니다. 저는 헤세의 그림을 정말 좋아했어요. 약간은 바랜듯하면서도 따뜻한 색감의 풍경화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요. "시인이 되든가,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6쪽, 추천의 말 _ 이인웅)" 라고 스스로 고백했던 헤세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시를 잔뜩 써내기도 했어요.


「헤르만 헤세, 겨울」은 헤세의 수많은 시와 에세이 중 '겨울'과 관련된 글들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헤세 4계 시리즈' 중 '겨울' 편인데요. 제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헤세의 소설이 아닌 글들을 오랜만에 다시 가볍게 읽어보고 싶기도 했고, 겨울의 감성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책을 읽다 보니 한 작가의 글을 계절과 관련하여 엮어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만큼 많은 분량의 글이 있어야 하고, 작가 스스로가 계절과 자연에 대하여 심취한 글들이 많다는 뜻이니까요. 


흘러가는 계절과 시간과 삶의 은유


역시나 헤세의 글들은 너무나 좋았답니다. 직접적으로 '겨울'을 지칭하지 않더라도 삶의 끝자락, 또는 죽음, 시간과 후회에 대한 은유나 사유로 채워진 글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잔잔한 풍경 속 눈발이 잘게 요동치는 묘한 분위기의 글도 만났습니다. 정해지지 않은 길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에 대한 회한이 짙게 느껴지는 글은 긴 여운을 남겨 주었어요. 특히나 담백하게 마음을 울리는 헤세의 시가 눈에 많이 띄었죠.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속도감 있게 읽다가 갑자기 오탈자가 눈에 띄게 보인다는 점이었어요. 독일어 번역 자체가 조금 엄숙하고 긴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오탈자는 조금 수정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읽다 보니 익숙한 소설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더라구요. '크눌프', '골드문트', '클링조어' 등, 3인칭으로 등장인물 이름이 등장하길래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 다른 에세이를 쓴 것이 있나 봤더니 소설 작품의 대목을 발췌한 부분도 여럿 보였어요. 너무 짜깁기를 한 건가 싶은 생각도 들면서도 계절의 맞는 헤세의 글들을 그 방대한 소설 속에서 퍼올린 것도 엄청난 수고로움이셨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이 책은 헤세의 문학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헤세를 읽어보고 싶은데 소설은 아직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맛보기로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물론 팬심으로 읽게 된다면 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차가운 안개가 낀 잿빛 날들>

"그럼 더 한탄할 것은 없는가?" 신의 음성이 물었다.

"더 이상 없습니다." 크눌프는 머리를 끄덕이며 부끄러운 듯 미소지었다.

"그럼, 모든 것이 좋은가? 모든 것이 자연스레 되었는가?"

"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되어야 할 대로 되었습니다." - P31

<잿빛 겨울날>

중요하다고 떠벌리는 그 모든

요란함이 그는 우습다.

겨울날은 혼자 하염없이 조금씩 눈을 뿌린다,

어두워질 때까지. - P44

<성탄절 이후에>

행복 역시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다. 즉, 매혹적인 순간이 오지만, 그 찬란함 속에서 곧 다시 창백해져,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숨결에 흩날려 버린다. 숭고한 예술도, 선택된 사람들의 고귀한 지혜도 역시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다. 즉 그것은 심연에 대해 알고 있는 미소, 고뇌에 대한 인정, 대립하는 것들 간의 영원한 필사적 투쟁 너머의 조화로운 유희인 것이다. - P110

<겨울날의 경이로움>

넓은 세상에서 겨울에 고산 위에 내리비치는 햇빛보다 더 경이롭고, 더 고상하고,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눈과 얼음, 그리고 돌 위에 반사된 빛과 온기는 형용할 수 없이 투명한 겨울의 맑은 대기 속에서 유희에 탐닉한다. ― 저지대에서는 아무리 찬란하게 빛나는 날에도 예감조차 할 수 없는 빛과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 건조한 온기가 펼치는 유희인 것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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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손잡기 봄날의 시집
권누리 지음 / 봄날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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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두 얼굴

나는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은 더위를 견뎌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제일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냥 너무 극적인 것은 싫어서 잔잔한 계절을 찾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그러나 다시 여름, 하고 입에 굴려보기로 한다. 여름,이라고 말하자 갑자기 눈부신 추억들이 떠오른다. 찌는듯한 더위의 길을 걷다가 모든 것이 씻겨내려가는 물줄기가 확 뿌려지는 것처럼. 스무 살 때 친구와 여행을 갔다가 너무 더워서 분수대에 그냥 뛰어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의 깔깔대던 웃음은 여름이라는 말과 닮았다.

권누리 시인의 시집 「한여름 손잡기」의 표지를 보고 거의 말을 잇지 못하는 심정이 되었었다. 이렇게 예쁜 표지가 있나? 이렇게 제목과 잘 어울리는 표지가 있을까? 멀리서 언뜻 보면 은은한 그라데이션으로 색상만 뿌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다양한 것이 보인다. 여름의 싱그러움과 뿌연 뜨거움이 함께 있다. 잔해처럼 뿌려진 물줄기는 내가 여름을 입에 굴렸을 때 떠오르는 기억들이 담겨 있을 것만 같다. 한동안 나는 잠깐 표지에 잠겼다가 시를 천천히 읽었다.



여름은 시 속에서 계속해서 언급이 되고, 여름이 들어가는 시는 특히나 더 좋았고, 시인이 쌓아 올린 여름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한낮에는 눈부시게 밝고, 저녁이 되면 모두 캄캄해지는 않은 채 어스름하게 바래지는 여름. 한없이 가볍다가도 물이 내리면 다른 계절보다 한없이 무거워지는 여름. 어쩌면 사랑과 여름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밝음과 어둠 속에서


시인의 언어는 잔잔히 박동하는 듯하면서도 가끔은 어두운 질문들을 던지고, 나는 그 지점들에 멈춰서 생각한다. 오답과 죽음, 불신과 고립... 글의 초반 눈부신 여름의 추억을 상기했지만 시집에서는 꽤나 어두운 시어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왜인지 모르게 아주 깊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다. 이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시를 좋아하게 된 건 시인이 만든 공백으로 ‘열려 있는’ 느낌이 좋아서였는데, 사실 시집 한 편을 읽으면서 모든 행간에 집중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읽기는 조금 버겁긴 하다. 그러나 이렇게 긴 호흡을 다시금 할 수 있게 하는 건 무심코 읽다가 만나는 이런 멋진 문장들 같은 것.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 가 좋았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표지를 닮은 시인의 색채가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어서였다. 한 쪽은 영롱하게 빛나고 한쪽은 바래진 채로 구르는 물방울 같은 시집이었다.


<하트*어택>

미안해하는 나를 상상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니?



물으면 나는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사랑에는 제법 재능이 있습니다

- P15

<한여름 손잡기>

여름이 여름이 아니었더라면.



사랑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무책임했고,

그래서 지난여름 내내 그것만 열심히 했다네요 - P79

<도로시 커버리지>

목적지를 위한 결정은 저 멀리 유리 숲에 유기해두었어요

버려두고 온 단단한 마음이 여기에서도 아주 잘 보이고요.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오답을 어떻게 아니?

- P47

<한철>

죽음이 태어나는 방법에 관해 생각하는 일은 멈출 수 없어 그것의 총량을 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살아 있어요?



사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66

<소유>

끝에서부터 쓰러지고 있는 나의 중간을 재빠르게 쳐내는 일 그거 필요해요.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오래 세워두었네요.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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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채우는 감각들 - 세계시인선 필사책
에밀리 디킨슨 외 지음, 강은교 외 옮김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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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에 민음사 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책 수령 인증샷과 간략한 소개를 남겼었죠. 탄탄한 양장과 깔끔하고 감각적인 디자인, 두터운 내지로 필사하기 좋은 책이라 강력 추천을 남겼는데요! 이제 2주 정도의 시간 동안 직접 필사를 해보며 느꼈던 「밤을 채우는 감각들」 이야기를 전해볼게요.

민음사 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은 에밀리 디킨슨, 페르난두 페소아, 마르셀 프루스트, 조지 고든 바이런 이렇게 네 명의 시인의 시가 순서대로 각 챕터대로 담겨 있어요. 무작정 그들의 좋은 시를 골라 가져온 게 아니라, 민음사에서 출간된 세계시인선에서 시를 발췌하고 제목도 그대로 가져왔어요. 네 명의 시인의 좋은 시가 막 섞여 있는 게 아니라 작가별로 나누어져 있으니

한 작가에 집중해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순서대로.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필사하고 싶다면 자유롭게.

취향에 따라 각자의 방법대로, 좋은 시를 읽으며 필사를 하면 될 것 같아요. 저는 처음부터 이 네 분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 느껴보고 싶었기에 날마다 자유롭게 책장을 넘겨 보면서 골라 필사를 진행했어요. 하지만 편의에 따라 순서대로 정리해서 보여드릴게요.

Chapter 1.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에밀리 디킨슨

책을 사랑하게 되면서 에밀리 디킨슨의 이름은 참 많이 들어서 저의 책장에도 책이 있긴 하는데요. 에밀리 디킨슨은 19세기에 활동한 여성 시인으로 미국 문학계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하죠. 가정적인 배경과 건강, 여러 번의 정서적 위기로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것은 굉장히 상처를 주는데도 - / 상처 자국 하나 없어라. / 그러나 교감이 이는 내면에선 / 천둥같은 변화가-.”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에밀리 디킨슨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골몰했을 에밀리 디킨슨. 이제 우리는 빛나는 언어로 압축된 그의 세계를 볼 수밖에 없어요.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이라는 제목은 참 닮아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필사를 하면서 천천히 글자를 따라가다 보니, 작가의 내면에 깊이 빠져들어가게 되고 수록된 책들을 전체적으로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Chapter 2.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페르난두 페소아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름도 잘 알려져 있죠. <불안의 책> 으로도 유명한 페소아의 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시 뿐만 아니라 철학과 비평으로도 능통했던 페르난두 페소아.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양 떼를 지키는 사람>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는 제목도 담백하지만 강렬한 의미를 주는 것 같아요. 이 말에 정말 공감하는 게, 시를 읽을 때와 쓸 때는 여느 때보다 나만의 세계를 꾸리고 얇은 살을 하나씩 붙여 나가는 느낌이거든요. 페소아의 시구절을 읽다 보면 그에게 '시'를 쓰는 것은 어떤 욕망과 야망에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습관적이고 필수적인 행위인 것처럼 여겨져요.

Chapter 3.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 마르셀 프루스트

제목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요 ㅠㅠ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의 마들렌을 통해 향수를 떠올리는 도입부처럼 이 시집 속에는 오감을 활용한 그림과도 같은 시들이 담겨 있다고 해요. 어둡고 무거워 신비감이나 명확성이 떨어질지라도 꿈은 좋은 것. 삶 자체가 어차피 꿈꾸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마르셀 프루스트

「밤을 채우는 감각들」 필사를 하는 날이면, 저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조금 속도감 있게 펼쳐 보며 바로 눈에 들어오는 시를 골랐는데요. 우연처럼 저 대목이 마음에 들어서 필사를 하게 된 것 같네요. 어쩌다 보니 오감과는 관계 없는 조금 비장한 시를 골랐지만요.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라는 유명한 작품으로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의 첫 작품집에 수록된 산문시들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정말 제목이 다시 보고 다시 봐도 너무 아름다운걸요!

Chapter 4.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 조지 고든 바이런

저는 바이런, 하면 늘 가수 이소라의 노래 가사가 생각나는데요 ㅎㅎ 바이런은 굉장히 혁신적인 시인이었다고 해요. 기존의 전형적인 시 형식을 탈피하면서도 낭만적인 색채를 잃지 않았다고 하죠.

밤은 사랑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 / 그 밤 너무 빨리 샌다 해도 /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 달빛을 받으며" -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조지 고든 바이런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수록된 민음사 세계시인선 중에선 가장 최근작이었네요.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라는 대목에서 약간 청춘의 마음이 연상되기도 하고, 어쩌면 전혀 무관하게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중해서 읽게 되기도 하네요. 언어를 과하게 현란하게 만지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무게감으로 아름다운 선율처럼 느껴지게 하는 바이런의 시 세계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외국 시나 세계시인선을 읽는 데는 소홀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번 민음사 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필사를 하면서 외국 시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책장에 있는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이제는 열심히 꺼내 봐야 할 것 같아요. 리뷰로 마무리하지만 남은 페이지들 필사도 틈틈이 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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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8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김운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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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한 번도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책. 「군주론」은 수백 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악마의 책인가, 리더들의 정치적 교과서인가' 하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분열되어 외세에 침략에도 번번이 속수무책이었던 1500년대 이탈리아의 상황 속에서 '마키아벨리즘'으로 대표되는 이 책이 탄생했고, 혼란스러운 상황은 지금의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장기간으로 지속되는 코로나 시대, 각 정당의 대립, 세계 속 외교적 방향 속에서 우리는 어떤 리더를 뽑아야 할까 하는 의문이 계속되고 있는 중,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읽기 전 생각했던 것보다 「군주론」은 짧고 세분화된 항목으로 글이 구성되어 있었다. 세습, 혼합, 시민, 교회 군주국 등 다양한 국가의 모습을 살폈고, 새 군주국을 어떤 방식으로 획득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리더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군주가 갖추고 있는 한 국가의 군대,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관리들에 대하여도 다방면의 시각으로 설명된 글이 돋보인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이탈리아의 역사 속 인물들을 사례로 들어 자신의 이론을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의 기본적인 토대와 같이 책 속에 표현된 리더의 조건은 '막강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으로 대표된다. 민중과 관리에 대한 시각도 약간은 부정적인 면이 있으며, 여성을 폄하하는 대목도 읽기 편하지는 않았다(시대가 시대인지라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했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특히나 이 책의 집필이 국가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는 '정의'에 따라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 본인이 공직에 복귀하기 위해 헌정한 글이라는 점은 약간의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과거를 넘어 현재에 있어서도 받아들일만한 주장들이 여럿 존재한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군주의 자리는 분명 아슬아슬하기에 굳건한 중심이 필요하다. 이 책의 나온 내용들을 누군가가 악용하진 않길 바란다. 좋은 것은 취하고, 옳지 않은 것은 배제하여 적용하는 지혜를 발휘할 리더가 나타나기를.

군주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군주는 시민이 나라를 필요로 하는 평온한 시기에 보여준 모습만 믿고 그들을 의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현명한 군주는 시민이 어떤 시기에도 자신과 나라를 필요로 하면서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들 방법을 고안해야 합니다. - P78

모든 일을 고려할 때 어떤 것은 미덕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따르면 자신이 파멸할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악덕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따르면 안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112

그렇지만 믿고 행동할 때 신중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신중함과 인간애로 절제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지나치게 믿어 경솔해지지 말고, 과도하게 불신해서 아무도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 P119

군주가 만약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증오를 피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증오를 받지 않으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P120

자신을 다시 일으켜줄 사람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넘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혹시 그렇게 되더라도 당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방어책은 비열할뿐더러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훌륭하고 확실하며 지속적인 유일한 방어책은 발로 자신과 자신의 역량에 의존하는 것뿐입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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