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말에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가 개정판으로 재출간됐다. 초판은 2011년에 나왔고 나도 리뷰까지 썼던 책이다. 저자는 가라타니 고진 번역 전문가로서 고진의 책들뿐 아니라 한국문학과 일본문학, 세계문학을 주제로 한 글들을 여러 권의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보다 오히려 일본에서 더 주목을 받았는데 일어판이 2016년에 나오고 가라타니 고진이 직접 리뷰도 썼다. 개정판에는 일어판 서문과 함께 고진의 리뷰도 수록하고 있다.

내가 특별히 흥미를 가진 것은 이 책(<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의 속편이라고 할 수있는 <세계문학의 구조>(2011)의 번역초고를 읽었을 때였다. 여기서 내 자신이 지난날 어중간하게 내버려둔 근대문학의 문제가 철저하게 사고된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근대문학은 끝나지 않았다는 다수파의 주장에 대해 조영일은 애당초 한국에는 근대문학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근대문학은 내셔널리즘을 경유하여 제국주의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을 경험한 곳에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한국에는 근대문학은 없었다. 애당초 없는 것이 없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이와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책이 한국에서 격한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내게도 생각지 못한 관점이다. 일본의 근대문학에 관해 확실히 나는 그 기원을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의 ‘전후‘에서 발견했다. 하지만 나는 근대문학이 본질적으로 그와 같은 제국주의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점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한편 조영일은 이런 인식을 더욱밀고 나가 서구의 ‘근대문학‘도 나폴레옹에 의한 제국주의적 세계전쟁 이후, 일종의 ‘전후문학‘으로서 성립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문학을 일본이나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문학의 구조‘로서 파악하려고 했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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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자서전(으로 불리는) <말하라, 기억이여>가 다시 나왔다. 초판과 달라진 건 16장이 추가된 점인데, 나보코프가 영어판 초판(<결정적 증거>)의 서평을 직접 쓰고 추가한 장이다. ‘나보코프의 자서전‘이면서 ‘나보코프 씨의 자서전‘인 셈. 이 차이와 유희가 나보코프 문학의 특징이자 비밀이라고도 생각된다...

나보코프 씨의 책은 자서전이라고 보기에는 특이하고 기이한 존재다. 이 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보다 무엇이 아닌지를 설명하는 편이더 쉬울 것이다. 이를테면, 이 책은 다른 예술 분야의 전문가들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흔히 내놓는 수다스럽고 형식 없이 늘어지기만 하는 일기장 메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종류의 회고록이 아니다("수요일밤 열한시 사십분경 아무개 장군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또 문학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섞어 미지근하게 끓인 국물에 특이한 재료 몇 조각을 띄운 전업 작가의 요리도 아니다.
더욱이 통속적이고 번지르르한 추억담, 작가가 스스로를 삼류 소설의 경지에 올려놓으며 밑도 끝도 없는 (엄마와 이웃, 엄마와 아이들, 빌과 아빠, 빌과 피카소의) 대화들을 뻔뻔스러울 정도로 장황하게 늘어놓는 그런 종류도 아니다. 어떤 인간의 뇌로도 그와 같이 특정한 형식으로 기억을 보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서평자가 보기에 <결정적 증거>의 영구적 의의는, 개인적이지 않은 예술 형식과 극히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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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 평전은 아직 못 찾아서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을 먼저 읽는다. 원제는 <지옥에서 꾸며진 책>이고 <신학정치론>(1670)이 가져온 파문을 다룬다(스피노자 자신이 이 파문의 여파로 <윤리학>의 출간을 포기한다). 17세기에는 ‘악마의 책‘으로 비난받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건전한 상식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우리가 스피노자다.˝

<신학정치론>은 근대국가에서의 사고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그 자유를 위한 수단으로 철학과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기 위해 논증을 확대한다. 철학의 목적은 진리와 인식이며, 종교의 목적은 경건한 행위 또는 ‘순종‘이다. 그러므로 이성이 신학의 하녀가 되거나, 거꾸로 신학이 이성의 하녀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종교가 지적인 연구와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들을 제한하는 것은 종교의 범위를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논쟁적이며 매우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스피노자는 종교 당국자의 다양한 교의적 근거를 폭로하는 위험한 일을 해야 한다. 그는 이 근본적인 규범들의 속뜻을 약화시키거나 적어도 설명할 필요를 느끼는데, 이는 공적인 삶과 심지어 개인적인 삶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 (특히 네덜란드 공화국에 있는) 수완 좋은 성직자들이 그 규범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예언과 기적에 대해 김빠지는 이야기를 전개하며, 종파적 종교들을 떠받들어주는 미신적 믿음을 폭로하고, 제의와 의식들이 "참된 신앙심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가장 대담한 것은 성경이 인간의 문학작품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성경은 성직자들이 그들의 양떼를 다스리기 위해 이용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데, 그는 성경이 많은 저자에 의해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더군다나 그 저자들이 종종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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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집령에 바로 응답한 책이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과 진태원의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이다(두 책의 바탕이 되는 <신학정치론>과 <에티카> 새번역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일단 두 권을 출발점 삼아 읽는다. 출발점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혹은 근대철학의 두 갈래 길이다...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에서 진정한 원인으로서의 신과 신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 사이에는 초월적인 간격이 존재합니다. 신은 자연 바깥에서 자연을 창조하고 자연을 계속 움직이는 원인이며, 자연 그 자체는 아무런 내재적 원인으로서의힘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취른하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연적 실재들에 관한 데카르트의 원리는 전혀 부조리한 건 아닐지 몰라도 아무 쓸모도 없다고 주저 없이 주장했던 것입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물질적 자연 또는 물리적 우주를 표현하는 연장을 신의 본질에 포함시킵니다.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에게 연장은 신 바깥에, 그리고 신보다 존재론적으로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곧 스피노자의 자연은 신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연장, 곧 물리적 우주는 데카르트와 달리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생산되는역동적인 자연입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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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1,2부로 구성돼 있는데, 각 부는 성립 시기가 다르다. 1부는 1964년에 발표된 초판을 구성했으며, 1963년 논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통일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들뢰즈의 프루스트 읽기는 1940년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한다). 70년대에, 즉 가타리와의 협업 이후에 추가된 2부는, 프루스트의 통일성을 비틀면서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란 책의 통일성도 무너뜨리고 기형적인 것으로 변형한다(이에 대한 판단과 해석은 별도의 문제다).

아래 인용문은 1부의 결론(‘사유의 이미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프루스트적 기호의 의미를 다시 한번 설명해준다. 한데, ˝명석한 관념들보다 분명한 의미들은 없다˝는 문장은 바로 이어지는 ˝기호들 속에는 내포된 의미들밖에 없다˝는 말과 호응하지 않는 오역이다(영어판으로 확인했는데 불어판이 다를 것 같지 않다). ˝명석한 관념(clear idea)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의미(explicit signification)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호 속에 내포된(implicated) 의미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기호는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이다. 그러나 마주친 것, 즉 사유의 재료의 필연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분명히 기호와의 그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사유 활동은 단지 자연스러운 가능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유 활동은 단하나의 진정한 창조이다. 창조란, 사유 그 자체 속에서의 사유 활동의 발생이다. 그런데 이 발생은 사유에 폭력을 행사하는 어떤 것, 처음의 혼미한 상태, 즉 단지 추상적일 뿐인 가능성들로부터 사유를 벗어나게 하는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사유함이란 언제나 해석함이다. 다시말해 한 기호를 설명하고 전개하고 해독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하고 해독하고 전개시키는 것이 순수한 창조의 형식이다. 명석한 관념들보다 분명한 의미들은 없다. 기호들 속에는 내포된 의미들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사유가 기호를 펼칠 힘, 기호를 하나의 관념 속에서 전개시킬 힘이 있다면 그것은 관념이 감싸여지고 둘둘 말린 상태로 이미 기호 안에 있었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관념은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즉 기호]의 숨겨진 어두운 상태 속에 있기 때문이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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