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것은 없다"

18년 전 페이퍼다. 그사이 테러 시대에서 무법자 시대로 넘어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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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삶에 대해 들뢰즈의 요약으로 다시 읽는다. 오늘은 <신학정치론>에서 계속 멈춘다. 스피노자가 던지는 질문들은 16세기 프랑스의 청년 라 보에시가 <자발적 복종>에서 다루는 질문들과 같다. 인민들은 왜 그토록 비합리적인가? 인민은 왜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까지 수백년이 소요되었다. 아직도 진행중이지만...

따라서 1665년 스피노자가 <윤리학>을 잠시 중단하고 <신학정치론>을 기획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의 주요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인민은 왜 그토록 비합리적인가?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자유를 얻는 것뿐만아니라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왜 그토록 어려운가? 왜 종교는 사랑과 기쁨을 내세우면서 전쟁, 편협, 악의, 증오, 슬픔, 양심의 가책 등을 불러일으키는가? 1670년에 <신학 정치론>은 가상의 독일출판사 이름으로 저자의 이름도 없이 출간된다. 그러나 저자가 누구인지는 곧바로 드러났다. 그렇게 많은 반박과 비난, 경멸과 저주를 불러일으킨 책은 거의 없을 것이다. 유태인들, 가톨릭 교도들, 칼뱅파, 루터파 등 사상계 전체가, 심지어는 데카르트주의자들까지도 다투어서 이 책을 고발하고 나섰다. ‘스피노자주의‘와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말이 모욕과 위협이 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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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잃어버린 표지를 찾아서

10년 전 페이퍼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번역본 두 종이(하나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이지만) 경합하며 나오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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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폴란드 문학기행을 이틀 남겨놓고 있다. 책짐을 챙겨야 하는데(무게를 고려하면 10-15권쯤) 좀 무겁긴 해도 폴란드 민족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남성 이름의 어미가 통일되지 않고 -에비치, -에비츠로 혼용되고 있다. 미츠키에비츠와 미츠키에비치가 같이 쓰이는 것. 폴란드문학자들은 -에비츠를 선호하는 듯하지만, 곰브로비치나 비트키에비치에서 보듯 제각각이다. 거꾸로 -에비치로 통일하는 게 빠를 듯싶다)의 대표 서사시 <판 타데우시>(1834)는 넣기로 했다(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3국의 분할 점령기 폴란드의 고난이 작품 배경이다). 바르샤바의 문학박물관 이름이 미츠키에비치문학관인데서도 시인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헝가리문학의 페퇴피 산도르 같은). 인용한 대목은 시의 에필로그에 나온다.

오, 조국 폴란드여! 너는 그렇게 방금 관 속에 눕혀졌으니
-너에 대해 말할 힘조차 없구나!

아, 지금 누구의 입이 감히,
대리석처럼 무거운 절망감을 누그러뜨리고,
가슴에서 짓누르고 있는 석관을 들어올리고,
가득한 눈물로 퉁퉁 부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추게 할,
위로의 말을 할 수 있다 하겠는가?
오랜 세월 동안, 그런 말은 찾을 수 없을 것 같구나.

언젠가, 복수의 사자들이 포효를 그치고,
나팔소리 멈추고, 군대가 해산되고,
원수가 마지막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숨이 멎으며, 세상에 자유가 선포될 때,
우리의 독수리들이 옛 볼레스와프 용맹왕 시절
우리의 영토로 번개처럼 내려앉아,
원수의 살을 뜯어먹고 피를 마신 다음,
마침내 안식의 날개를 접으리라!
그 때, 참나무 잎 월계관을 쓴 우리의 기사들은,
검을 던지고 무장을 풀고 둘러앉아서
노래를 듣고자 하리니!
세상은 현재의 상황을 부러워할 것이고,
그들은 지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 - P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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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단추 시리즈로 <비교문학>이 출간됐다. 저자는 앞서 <미드라이프 마인드>(창비)로 소개됐던 벤 허친슨 교수. 전공학생들을 염두에 둔 책이지만 저자의 관심을 공유한다면 ˝우리는 모두 비교문학자이다˝(책 표지).

21세기의 비교문학은 문학이론, 문화연구, 탈식민주의, 세계문학, 번역학, 수용 연구 등 이러한 모든 학문 분야와 그이상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교차점들에서 반복되는 여러논쟁이 발생한다. 가령 ‘고급high‘ 문화와 ‘대중popular‘ 문화에 대한 변화하는 개념, ‘원본‘과 번역 텍스트 간의 변화하는 위계 구조, ‘정전‘에 대한 개념과 비판, ‘텍스트‘의 지위와 구성이 그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비교문학을 가장 역동적인 지적분야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 수많은 원천에서 자원을 공급받아, 비교문학은 점점 시각 중심의 세계에서 언어 예술의 역할과목적을 어떻게 구상할지에 관한 발상으로 넘쳐흐른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 비교문학의 주요한 기능일 것이다. 비교적으로 말해서, 학문적 필요성으로서 비교문학은서구의 많은 지역에 만연한, 최근 인문학에 대한 압박 속에서놀랍게도 건강한 상태로 등장했다. 비교문학은 외국 문학과더 넓은 시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열려 있는, 점점 줄어드는 몇 안 되는 학문 분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모국의 전통을 넘어서기를 원하는 야심 찬 독자들에게 비교문학은 자연스러운 고향이다. 동시에 그것은 왜 문학이 - 확장하자면 문화가 - 여전히 중요한지를 묻는 모든 ‘큰‘ 질문들의 자연스러운 고향이기도 하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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