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예술이다>(아카넷, 2006)란 책이 출간됐다. 제목으로나 분량으로나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책인데(이런 류의 책이 이전에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한겨레에는 크지막한 리뷰가 실렸다(책의 수준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좀 호들갑스럽다는 인상을 받는다). 대략 황우석 사건과 '예술로서의 과학'을 연결시켜보려는 듯하다. "예술은 사기다"(백남준)란 명제가 거기에는 깔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 "과학은 예술이다"를 보태면, "과학은 사기다"가 바로 도출돼 나오는 것. 정말 그런가?

한겨레(06. 07. 28) 퀴리부인은 표현파일까 입체파일까

-존재하지 않은 배아줄기세포. 주도권을 둘러싼 추악한 편싸움. 국익이란 이름으로 놀아난 정부와 미디어. ‘빠’와 ‘까’로 분열된 국론…. 까마득하니 잊혀진 황우석 사건, 겨우 일년 전 얘기다. 그 사건은 어려운 생명과학의 개념을 온 나라 사람들한테 가르쳤고, 과학자들의 전유인 실험실 내부와 그 실태를 공개했으며, 연구의 진위를 검사와 판사가 판정하는 코메디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과학은 과학이 아닌 사람임을 보여주었고 나아가 과학이 예술적인 조작일 수 있음을 드러내주었다.

 

 

 



-<과학은 예술이다>(아카넷)는 가슴이 뻥 뚫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가적인 트라우마를 남긴 그 사건, 그 악몽을 떠올리게 만든다. 두 지은이는 과학자가 컴퓨터처럼 차갑고 오차 없으며 아인쉬타인으로 상징되는 천재라는 거품을 거둬내고 과학활동이 지극히 인간적인 작업임을 깨닫게 함으로써 과학 역시 예술처럼 창조적인 인간정신 활동의 한 영역임을 말한다(*이런 걸 주제로 한 <아인슈타인의 공간과 반 고흐의 하늘>(고려원, 1994)란 책이 있었다). 즉, 과학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가까이서 음미할 만한 하나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지은이의 언설이 열을 띠면 띨수록 우상에 큰코를 다친 한국의 읽는이는 처량해진다.

“세잔, 뒤샹, 몬드리안과 보어, 러더퍼드, 하이젠베르크의 공통점은? 볼 수 없는 대상들을 그려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인식 가능한 물체로 실재를 표상하고자 하는 기존의 모든 표현기법을 과감히 포기한 결과다.”


=4년에 걸쳐 나무 한 그루를 대상으로 그린 몬드리안의 연작 그림들. 환원주의적 추상을 향한 진화를 보여주는 이 연작 그림은 과학에서의 환원주의적 과정과 너무도 흡사하다(*이 연작 그림은 예전에 미술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했다).

-예컨대 새로운 원자모델을 고안한 닐스 보어. 그 작업은 흑체복사를 설명하는 막스 플랑크의 공식에 함축된 ‘에너지가 연속적이 아니라 단속적으로 전달된다’는 결과를 근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했다. 그가 플랑크와 다른 점은 에너지의 불연속성이 극미세계의 특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점이다. 러더퍼드는 고전적인 원자모델로는 알파입자의 비정상적인 산란을 설명할 수 없어 질량이 한점에 모여있고 그 주위에 빈 공간이 많은 새로운 모델로 대체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원자를 수학적 대상으로 바꿔 양자이론을 통합하는데 기여했다. 과학은 표현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예술이란 얘기다!

-과학의 발전에는 단순계산이 아닌 인간의 사고기술, 즉 추론이 필요하다. 불확실성과 커다란 견해차로 점철된 과학적 사고는 집단적인 공격과 방어 등 추론 과정을 거쳐 전문가들이 보기에도 문제가 없는 상태에 이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연구는 학술지 등에 논문의 형태로 발표되고 동료 과학자들한테서 검증절차를 거친다. 논문은 테니스경기에서 한쪽 선수의 스트로크를 보는 것처럼 아귀가 척척 맞는다. 하지만 그 논문이 실리기까지는 공동저자의 의견에 따라 수정되었거나 다른 학술지에서 게재를 거절당하고 대폭 수정을 거쳤을 수도 있다. 과학의 뚜껑을 열고 보면 사회적 교류의 흔적이 가득하다.



 

 

 

-17세기 이래 과학이라 함은 곧 실험이다. 자연의 비밀은 스스로 진행되도록 방임했을 때보다 인간이 기술로 조작했을 때 그 정체가 잘 드러나기 때문. 자연상태의 불확실성, 불가측성, 복잡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실험실에서는 실험재료를 정제하고 표준화하고 때로는 감춰진 속성과 면모가 도드라지도록 상황을 조작한다. 또 의미있는 결론을 끄집어내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판단을 추구해야 한다. 과학이 예술이라는 또다른 측면이다.

-그런데 실험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 돈은 과학자의 호주머니가 아니라 대부분 정부 또는 기업에서 나온다. 연구테마가 그들의 입맛에 좌우되기 일쑤다(*문제는 돈인 것). 그나마 연구자들 사이에서 제한된 연구비를 따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자면 연구성과를 높일 수밖에 없는데 그 잣대는 학술지 논문게재가 보편적이다. 논문의 질은 끼리끼리 평가할 수밖에 없는데 얼마나 공정한지는 그들만이 아는 일이다. 돈을 받고 논문을 실어주는 일이 없으란 법도 없다. 돈놓고 돈먹기 세상. 과학자들이 인간인 것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과학은 없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세상 만물을 해명해 줄 하나의 대발견을 고대한다. DNA 구조의 해명, 인간 게놈프로젝트, 배아줄기세포의 배양, 또는 초전도 초대형 입자가속기(SSC) 건설 등이 ‘과학의 종말’ 징조인 듯이 매달린다. 지은이는 이를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을 쌓아올리려다가 실패한 구약의 전설에 비유한다. 아무리 해도 모든 이론을 대체할 수 있는 과학이론은 없다! 과학의 목표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세계에서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그 세계를 멋지게 설명하는 즐거움에 있다. 결론처럼 말하는 것은 “미래는 희망에 가득차 있다. 과학을 인간적인 활동으로 인식한다면 더욱 그렇다. 과학의 종말은 없다.”

-다시 떠오르는 일 년전 악몽. “모든 장기로 분화될 수 있는 배아 줄기세포” “불치병의 완전정복” “아시아 생명과학의 허브로 발돋움하는 한국”…. 우리 역시 표현의 잔치였지만 그것은 과학이 아닌 환각이었다. 결국에는 환멸을 부른…. 황우석 교수의 논문은 단순히 ‘만들었다’는 허위사실이었고 거기에 논문 꼴을 갖춰주고 무임승차를 노린 양인이 개입한 주거니받거니 사기행각이었다.

-어쩌면 그는 아파트 건설업자의 전례를 따랐는지도 모른다. 일단 분양공고를 내어 입주자들의 돈을 그러모은 뒤 공사에 들어가면 아파트는 지어질 것이고 엄청난 이익이 떨어지리라 계산을 하는…. 업자들도 그렇게 손 안대고 코 푸는데, 까짓 거 젓가락질하듯이 쓱 찔러넣으면 안될 거 어딨어? 난자야 돈 주면 지천인데 뭘…. 과학의 종말은 없겠지만 예술과 같았던 사기의 종말은 있었다.(임종업 기자)

06. 07. 30.

P.S. 음, "과학은 예술이다"보다 좀더 흥미로운 방향은 "예술은 과학이다" 쪽이겠다. '과학적인 사기'가 '예술적인 사기'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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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6-07-30 23:56   좋아요 0 | URL
제목을 보고 파이어아벤트가 떠올랐으나 내용을 보니 파이어아벤트와는 별 상관이...

로쟈 2006-07-30 23:58   좋아요 0 | URL
파이어어벤트가 과학이 사기라고 했나요?^^ 그의 입장은 거꾸로 아니었나요? 연금술도 과학이라고 했으니까, 사기도 과학이다...

마태우스 2006-07-31 00:30   좋아요 0 | URL
오오 황우석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군요. 급조된 책들인 것 같아 외면했는데, 요즘 나오는 건 그래도 읽을만 하겠죠? 추천합니다

로쟈 2006-07-31 00:35   좋아요 0 | URL
제가 추천받을 처지는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감사...

yoonta 2006-07-31 00:40   좋아요 0 | URL
연금술은 원래부터 과학입니다. 단 근대적 의미의 과학이 아니었을 뿐이죠. 사기가 아닙니다. 과학이 원래부터 사기가 아닌 한..

로쟈 2006-08-03 16:10   좋아요 0 | URL
답글이 좀 늦었습니다. 어떤 취지의 말씀이신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말씀대로 연금술은 과학이다. 연금술은 근대적 의미의 과학이 아니다. 연금술은 사기가 아니다. ->에서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과학은 원래부터 사기가 아니며) 근대적 의미의 과학이 사기다, 인 건가요?^^

yoonta 2006-08-04 11:19   좋아요 0 | URL
답변안하셔도 되는 글인데..^^ 제 말은 연금술과 근대적 과학 모두 사기라고 불리울수는 없다는 겁니다. <사기>라면 황우석케이스처럼 대중들을 특정의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속이는 행위라고 할때 연금술과 근대적 과학은 그것에 해당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과학은 예술이다라고 한다면 건 또 다른 문제긴 하죠.글고보니 님은 사기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까운 의미로 말씀하신 것 같네요.^^
 

<낭만적 사랑과 사회>(문학과지성사, 2003) 이후에 승승장구하고 있는 작가 정이현의 첫번째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문학과지성사, 2006)가 출간됐다. 공지영에 견줄 만한 여성 베스트셀러 작가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문단에 단비가 되어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국문학에서 단편과 달리 장편소설은 본래 대중적인 장르로 치지만) '대중소설'로 방향을 튼 작가에게 대중의 호응이 없다면 그야말로 '황량한 도시' 아닐까? 한겨레의 리뷰와 조선일보의 인터뷰를 자료로 옮겨놓는다.  

한겨레(06. 07. 28) 서른한 살, 달콤할까?

-젊은 작가 정이현(34)씨의 첫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4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작품을 책으로 묶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직장 생활 7년차인 서른한 살 미혼녀 ‘오은수.’ “옛 애인의 결혼식 날, 사람들은 뭘 할까?”라는 흥미로운 질문으로 소설은 문을 연다. 그 날은 은수의 옛 애인 ‘고릴라’가 결혼을 하는 날. 나름대로 비장한 각오로 출근을 했건만, 결혼식 시각인 정오가 되어도 왠지 아무렇지도 않다. “옛 애인의 결혼식 날 울지 않다니.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12쪽)

-물론, ‘기분’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인공 은수는 백팔십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겠는가.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43쪽)

-‘진짜 어른’과 ‘자발적 미성년’ 사이에 은수는 서 있는 셈인데, 약간 늦은 듯한 결혼 적령기에 아직 미혼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불안정한 처지를 제대로 반영한 결과이겠다(*최근 한국문학/문화의 트렌드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이 이 '자발적 미성년'들의 형상이다). 소설은 은수의 남자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두 여자친구 유희와 재인의, 역시 남자를 둘러싼 고민과 선택이 부주제로 제시되고, 은수의 직장생활과 부모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곁들여진다.

-옛 애인의 결혼으로 꿀꿀해져 있는 은수에게 난데없는 ‘남자 복’이 터진다. 술자리에서 우연찮게 동석하게 된 연하남 ‘태오’를 만나 곧바로 ‘원나잇 스탠드’에 들어가고, 게다가 스테디한 관계로 발전한다. 직장 상사가 소개해 준 연상의 범생이 ‘김영수’가 또 다른 선택지로 제시되는가 하면, 순수한(?) 이성 친구로 지내고 있는 백수 ‘유준’이 프러포즈 비슷한 것을 해 온다. 이게 웬 남란?

“윤태오, 남유준, 김영수. 객관식 선다형 문제를 받아든 것처럼 나는 세 개의 이름들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마음 가는 것과는 별개로, 이 세 개의 보기들에는 각각 잉여와 결핍이 담겨 있다. 나는 몇 번째 답안에 동그라미를 치게 될까. 그것은 정답일까, 오답일까.”(115쪽)

-독자 쪽의 호기심을 잔뜩 부추겨 놓고서 주인공/작가는 짐짓 딴청을 피운다. “결정하지 않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밤, 세상에서 가장 우유부단한 인간 오은수가 내린 중차대한 결정이다.”(116쪽) 그래야 할 것이다. 소설은 이제 겨우 사분의일 정도의 진행을 보였을 뿐, 앞으로 나아갈 길이 한참 남아 있으니.

-대학을 중도 작파하고 영화판을 기웃거리고 있는 태오. 귀엽고 저돌적이긴 하지만, ‘누나’가 보기에는 너무 철이 없다. “짠! 자기 몰랐죠? 오늘 우리 이십 일 기념일”(127쪽)이라며 빨간 장미 두 송이를 내미는 태오에 대한 은수의 답은 이러하다: “자기도 이제 스물다섯 살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156쪽)

-그렇다면 영수는? “개량 옥수수 낱알처럼 가지런한 사람”(77쪽)이긴 하지만, 도무지 낭만적이지도 않고 관능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관능을 자극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기쁘고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지던 남자들하고만 거듭하여 만나온 결과, 현재 나의 모습은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다”(126쪽)고 믿는 은수에게 영수의 안정적인 경제력은 무시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렇다. 은수는 순수와 낭만을 파먹고 사는 철없는 계집애가 아니라 ‘계산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이 '계산하는 인간'이 쿨걸들의 정체이다).

-이 두 남자에 비해 유준의 소설 속 비중은 다소 떨어진다. 만년 백수로 지낼 듯하던 그가 어느 날 문득 잘나가는 학원 강사로 변신해서는 ‘어울리지 않게도’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다는 설정이 뒷얘기처럼 곁들여질 뿐.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라는, 태오를 향한 질책은 사실 은수 자신을 향한 것이었던 것. 감정의 기복과 곡절을 거친 끝에 두 사람이 헤어지는 귀결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영수의 경우는 조금 납득하기 어렵다. 남의 이름을 빌려 써야 했던 그의 ‘어두운’ 과거가 이 소설에서 필연적 맥락을 지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결말은 어찌 보면 다시 그 자리.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을 따름.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440쪽)

-소설은 끝났어도 은수의 고민과 갈등, 방황은 곱다시 시작이다.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완벽한 설계와 구성을 지닌 ‘작품’에는 이르지 못한 느낌이다. 이런 점은 신문 일일연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정이현씨의 문장은 매우 능란하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도 빼어나고, 감각적이며 재기 발랄한 비유들도 일품이다. 가령 이런 것들: “오래 망설이다 마침내 내 손을 떠난 문자메시지는 후라보노 껌처럼, 마블링 잘된 꽃등심처럼, 얄밉게 구는 친구처럼, 그에게 장렬히 ‘씹힌’ 것이다.”(253쪽), “매일을 일요일처럼 보내는 사람에게, 일요일은 탕수육과 자장면을 시키면 함께 따라오는 군만두처럼 느껴진다.”(317쪽)

-“문득 이것이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62쪽)는 구절도 만날 수 있거니와, 이 소설은 일종의 풍속사로서도 유용할 정도로 세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쯤에서 선배 작가인 최인호씨의 경우를 상기해 보고자 한다. 최씨 역시 채 서른이 안 된 젊은 나이에 <별들의 고향>이라는 신문 연재소설로써 일약 인기 작가로 도약했다.

 

 

 

 

-그러나 그가 대중의 환호를 만끽하는 정확히 그만큼, 문학 전문가들은 등을 돌렸다. 그에게 애정을 지니고 있던 평론가들이 고언을 건네자 작가는 오히려 더 엇나갔다. 말하자면 작가는 문학사적 평가 대신 당대 독자 대중의 호응을 택했다(*문학사에 남은 건 '깊고 푸른 밤'이나 '타인의 방' 같은 그의 단편들이다). 정이현씨 역시 지금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달콤한 나의 도시>는 이 재능있는 작가가 선배 작가의 선택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최재봉 기자)

조선일보(06. 07. 29) “쿨 걸들이 말하는 쌉싸름한 도시의 사랑”

-“서른한 살…사랑이 또 올 거 같니?” 성숙한 여인이 되느니 영원히 ‘자발적 미성년’으로 남겠다는 서른한 살 여자 오은수와 그의 친구들이 돌아왔다. 조선일보 독자들을 사로잡은 작가 정이현(34)의 연재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가 드디어 문학과지성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왔다. 문학과 영화 양쪽에서 모두 평론가로 활동 중인 강유정(31)이 작가를 만나 쿨한 대담을 가졌다. 강유정은 2005년 조선일보 등 3개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으로 ‘3관왕’의 위업을 쌓은 평론계의 샛별이다.

▲강유정=일본 소설이 한국의 젊은 독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등장 인물이 쿨하기 때문이라고 봐요. ‘달콤한 나의 도시’는 흡사 일본 소설 같다고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달라요. 이 소설에서 쿨한 것은 등장 인물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이 아닐까요.

▲정이현=그래요. 우리 엄마가 저에게 “차가운 것”이라고 해요. 엄마가 아프면 “병원에 가보세요”라고만 하는 저는 원래 ‘쿨걸’(cool girl)로 태어났어요. 소설 주인공 오은수에 대해 쓰면서도 ‘걔’를 핍박하기 보다는 ‘걔’가 노는대로 내버려두었어요. 진정한 우정이란 친구와 어떤 접점이 있더라도, 때로는 내버려두는 것이에요. 내버려두는 것이 쿨한 것이에요.

▲강=책을 내면서 신문 연재와 달라진 부분이 많은가요?

▲정=큰 틀의 변화는 없어요. 연재 당시 분량이 200자 원고지 1200장이었지만, 책으로 만들기 위해 고치니까 1600장으로 늘어났어요. 중간에 뺀 부분도 있고, 새로 쓴 부분이 있습니다. 주로 디테일이 부족했던 점을 보완했습니다.

▲강=요즘 30대 여성들이 읽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지만, 정작 읽을 게 없다 보니 일본 소설로 빠져나가고 있어요. 이 소설을 쓸 때 처음부터 20~30대를 주독자층으로 염두에 두었나요?

▲정=제가 30대 중반을 통과하고 있는데, 더 늦기 전에 지금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공기(空氣)를 포착하고 싶었어요. 지금 여기에 대한 내 또래 여성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거죠(*물론 이 또래의 공간은 도시이다. 모두가 타인들인 대도시에 사는 30대 초반 오피스걸의 공기). 그런데 연재를 하다 보니 정작 어른들의 반응이 좋아 의외였습니다.

▲강=이 소설에 나오는 두 남자 ‘영수’와 ‘태오’는 서로 상반된 인물입니다. ‘태오’는 모든 여자의 기억 속에 있는 ‘옛날 남자 친구’ 같아요.

▲정=헤어진 남자들에 대한 기억은 쓰라린 것이 아닌가요.

▲강=아니, 헤어지기 바로 직전까지의 스위트한 부분에 대한 기억 말이죠.

▲정=아~하

▲강=‘달콤한 나의 도시’는 도시에서 나고 쭉 자란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서울에서 성장한 저는 도시의 매연 냄새가 반가울 때가 있어요. 대학생 때 농촌에 답사를 다녀와서 서울의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리면 ‘여기가 고향이다’란 반가움이 앞섰어요.

▲정=저는 늘 도시를 떠나고 싶지만, 떠나봤자 다른 도시로 가게 됩니다. 도시라는 곳은 돈을 벌고 써야 돌아가는 곳인데, 도시 아이들에게는 어릴 때 지하 상가의 전자 오락실도 소중한 추억 거리예요. 그리고 도시 아이들에게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던 것과 같은 공통의 경험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소통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그렇다면 이 작품의 의의는 도시생태학에 있지 않을까 싶다).

▲강=정이현 소설에서 결혼과 가족은 늘 키워드예요. 왜 동시대 한국을 말하면서 결혼과 가족이 중요한 것인가요?

▲정=제가 집안에서 장녀지만, 결혼한 남동생이 어른 대접을 받고 미혼인 저는 늘 한 발자국 물러서 있어야 해요. ‘누구나 가족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가치인 양 하는데, 저는 거기에 소설가로서 물음표를 던지고 싶어요.

▲강=정이현 소설은 기존의 편협한 페미니즘 소설과 많이 달라요. 등장 인물 김영수가 그렇듯이 남자도 이 세상에서 속고 당하는 존재로 나옵니다.

▲정=남성과 여성을 하나의 집단으로 말하는 것이 싫어요. 소설은 궁극적으로 약자의 이야기예요. 멀쩡한 중산층 인물 중에도 불쌍한 사람이 있어요. 누구나 불쌍하죠(*물론 이러한 연민이 궁극적으론 자기연민 이상으로 확장되지 않는 것 또한 쿨걸들의 조건이겠다).

▲강=가독성이 높으면 대중성이 농후하다고들 하는데, 소설을 쓸 때 가독성을 염두에 둔 전략이 있나요?

▲정=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대중성과 통속성은 달라요. 제 소설은 로맨스 소설과 TV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런 장르적 관습을 비틀어서 전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소설이 좀 가벼워지면 안 되나요? 소설은 원래 잡스러운 장르인데, 평론가들이 소설을 너무 고급스러운 장르로 만드는 거 아니에요?평론가들이 전부 ‘범생’들이라서 그런가….(*소설은 원래 잡스러운 장르이며 소설가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고귀한 소설들은 드물며 작가들 또한 그러하다.)

06. 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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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7-30 14:57   좋아요 0 | URL
'서른 언저리'만이 문제인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작가 조경란이 얼마전 발표한 소설은 '마흔에 대한 추측'인가 그랬는데.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나이'죠. 작가들도 거기서 못 벗어나고...

로쟈 2006-08-02 15:29   좋아요 0 | URL
고비를 좀 넘기시면 좀 무심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로쟈 2006-08-02 18:03   좋아요 0 | URL
남녀간에 체감 나이는 좀 다른 듯합니다. 여자들은 대개 30세에 좀 민감한 듯하고. 제 경우엔 스무 살이 '충격적인' 나이였습니다. 이젠 핑계댈 게 없구나란 생각에.^^
 

주명철 교수의 노작 <서양 금서의 문화사>(길, 2006)가 출간됐다. 지난주에 구내서점에서 만져본 책은 묵직하고 듬직했다. <바스티유의 금서>(문학과지성사, 1990)에서 시작된 학적 여정을 결산하고 있는 책으로 보였다. 그가 번역한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길, 2003)까기 결들이게 되면, '프랑스 혁명과 책이란 주제에 관한 한 최강의 복식조를 이루겠다. 당장에 구입할 여력도 시간도 없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눈요기나 해두도록 한다. 세 개의 리뷰를 자료로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6. 07. 29) 프랑스혁명 불지핀 힘 ‘금서’

-최근 들어 책과 독서의 역사에 대한 서적들이 활발하게 번역, 저술되고 있다.<책과 혁명>(로버트 단턴), <읽는다는 것의 역사>(카발로/샤르티에),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카사뉴-브루케), <근대의 책읽기>(천정환) 등이 지난 2∼3년 사이에 소개되었다. 인터넷과 하이퍼텍스트, 전자책(e-book) 등의 출현으로 전통적인 책의 종말이 성급히 선언되는 마당에 국내출판계에 불어오는 책과 독서의 역사에 대한 높은 관심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역사학의 대중화를 지향하는 ‘한국사시민강좌’에서 작년에 ‘책의 문화사’를 특집주제로 다룬 것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위 목록에 한 권의 책이 추가되었다. 지난 20여년간 18세기 프랑스의 금서연구에 한 우물을 파온 주명철(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의 <서양금서의 문화사>가 그것이다. 그는 1990년에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바스티유의 금서>라는 제목으로 소개하여 당시로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내학계에서 책의 역사를 외롭게 개척했다. 절판된 <바스티유의 금서>의 대중적인 개정판을 내겠다는 의도로 착수한 작업이 632쪽의 새 책에 가까운 두꺼운 종합개정판으로 결실을 맺었다(*갖고 있는 <바스티유의 금서>도 아직 안 읽었는데...).

-앞 책을 보완하여 각각 머리글과 맺음말 성격에 해당하는 ‘계몽주의 시대의 프랑스 사회와 문화’와 ‘앙시앵 레짐 문화와 금서’라는 소제목의 두 주제를 새로 덧붙인 결과이다. 또한 60여장의 흑백·컬러판 초상화, 풍속화, 정치적 스케치 등으로 고급스럽게 책을 꾸며 독자들을 유혹한다.

-<서양금서의 문화사>는 저자가 오랫동안 프랑스 주요 고문서보관소에서 눈을 혹사시키고 엉덩이를 고생시키면서 잉태시킨 ‘오리지널’ 연구 성과물이다. “모두 나 자신이 원사료를 직접 보고 썼기 때문”에 부끄럼이 없다는 그의 학문적인 자부심이 부러울 뿐이다(*사실 이런 책은 불어나 영어로 번역되어야 학계에 더 도움이 될 텐데) .

-이 책은 양적 팽창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책의 역사와 관련해 주 교수가 이룩한 질적 향상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국내외 역사학계에서 역사서술의 새로운 경향으로 등장한 신문화사, 일상생활사 등의 방법론을 금서연구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금서의 종류와 작가별 분류 등에 대한 통계학적이며 사회경제사적인 분석에 머물지 않고, 금서의 유통과 소비를 통해서 보통사람들의 세계관과 ‘집단적인 정신자세(망탈리테)’가 어떻게 형성·변화되었는지에 새로운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금서읽기와 혁명의 문화적 기원의 연관성을 탐색하는 데까지 문제의식을 확장시켰다.

-앙시앵 레짐 시대의 프랑스 보통사람들이 다양한 경로(밀수입과 서적풍물상인)와 장르(포르노그래피와 정치중상비방문 등)를 통해 은밀히 읽은 금서는 체제비판적인 “다른 문화를 준비하는 온실”이며 “의식의 저장소”로서 궁극적으로는 프랑스혁명을 촉발시킨 “1789년 사람들의 무기고”(381쪽) 역할을 수행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정치문화사적 관점에서 흥미롭게 경청할 만하다(*여담이지만, 영화 <음란서생>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다룰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주 교수는 금서의 역사를 과거 사람들이 공유했던 ‘의사소통의 얼개’를 엿보는 렌즈로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금서는 미풍양속을 해치고, 기존질서를 야유하며, 신성한 정치적 합법성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체포, 감금, 소각되지만, 그것이 창작·전파·소비·전유되는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이 실행했던 일상생활사적 커뮤니케이션 채널에 주파수를 맞출 수 있다고 저자는 확신한다. 금서의 문화사는 낯선 공간과 낯선 시간 속을 살았던 과거 사람들이 교환했던 낯선 의사소통의 매트릭스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인쇄문화와 책의 죽음이 공공연히 선전되는 정보화시대를 사는 우리가 낡은 책의 역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메일, 블로그, 전자카페 등 진보된 정보기술의 혜택을 향유하는 나는 과연 18세기 사람들보다 더 잘, 더 효과적으로 타인과 대화하며 소통하고 있는가? ‘서양금서의 문화사’는 이런 질문을 독자들이 자문해 볼 것을 권한다.(육영수 중앙대 사학과 교수)

경향신문(06. 07. 29) 禁書로 프랑스혁명 다시 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한 바보의 의미 없는 행위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포레스트 검프조차도 역사학을 조금만 배웠다면 틀렸음을 알 수 있는 얘기다. 역사는 단순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경제·정치·문화의 수많은 요인들이 다른 요인들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에게 작용하면서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역사를 보기 위해선 수십개의 필터가 끼워진 렌즈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프랑스 혁명사를 이해하는 한 코드는 ‘모순을 타파하려는 계몽사상에 물든 부르주아 계층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한국교원대 교수·서양사)는 이 같은 시각이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였지만, 반계몽주의자들도 계몽주의자와 공존하던 시대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할 때 ‘비공시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방법론이다.

-책에서 강조되는 건 프랑스 혁명과 ‘금서(禁書)’의 관계다. 20세기의 연구 성과인 정치적, 경제적 설명에서 탈피해 문화적 요인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고 금서가 프랑스 혁명의 직접 요인이었다는 과격한 주장이 나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연구 성과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수십개의 눈을 가질 뿐이다.

-앙시앵 레짐 말기 금서의 세계에서 가장 돋보인 인물은 테브노 드 모랑드(1741∼1806)였다. 싸움, 노름, 도둑질, 사기와 수차례 탈옥을 일삼던 그는 1769년 영국으로 도망쳐 혁명 이후인 1791년 프랑스로 돌아올 때까지 프랑스 정부의 주요 인물을 공격하는 ‘중상비방문’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이용해 고관대작들의 추문을 주워담았고,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망다녔다.

-‘프랄랭 공작은 손톱을 물어뜯다가 공수병에 걸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목을 매거나, 칼이나 총으로 자살한다’ ‘프랑스에서는 성직자들이 근친상간을 범하는 일을 막기 위해, 앞으로는 그들이 누이들 대신 여염집 부인들을 이용하도록 허락했다’.

-이처럼 모랑드는 루이 15세와 그 주위 귀족들, 프랑스 상황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거침없이 퍼뜨렸다. 디드로의 ‘백과사전’, 볼테르의 ‘캉디드’ 등은 지식인에게 계몽주의 세계관을 전파했지만, 파리 국립도서관 사료보관서에서나 찾을 수 있는 무명의 금서들은 민중의 울분을 야기했다.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 할 부분은 이 책이 번역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프랑스의 고문서자료를 마이크로 필름으로 복사하며 직접 참고했다. 사실 금서로 프랑스 혁명기를 읽어낸다는 발상은 저자가 이미 번역한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에서도 시도된 적이 있다. <서양 금서의 문화사>가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시각은 보여주지 못한다하더라도, 우리의 눈으로 프랑스 혁명을 읽어내려는 작고 소중한 노력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백승찬 기자)

세계일보(06. 07. 29) 금서가 프랑스 혁명 불을 질렀다

-18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계몽사상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럼에도 사회적으로는 절대군주제와 신분제도가 엄격하게 유지되는 등 봉건 잔재가 온존했다. 이런 와중에 지배계급인 성직자와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도 세금을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관직을 독점하는 등 온갖 특권을 누렸다. 국가 재정을 전적으로 부담하면서도 정치적 권리를 전혀 보장받지 못한 평민들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사회적 모순이 팽배해 혁명이 배태될 수밖에 없는 토대가 마련 된 셈이다.

-디드로,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프랑스 혁명의 토양을 마련해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다. 이들은 신앙과 진리는 물론 신까지도 인간 사유의 결과물로 끌어내렸으며, 신적 초월성이나 신비감을 자격정지시켰다. 특히 프랑스 계몽주의는 영국의 그것보다 더욱 급진적이었다. 점진적 개선이 아닌 전면적 자유·평등·박애를 위한 혁명을 부르짖었다.

-그들은 마침내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도전을 감행해 끝내 왕정을 무너뜨리고 산업혁명과 더불어 서양 근대사의 2대 근원인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됐다. 프랑스 혁명은 정치·사회적 이념, 즉 개인주의·자유주의·민족주의를 전 세계에 전파했다. 혁명 주체들은 자연권과 사회계약론을 제도화하는 등 오늘날 우리가 만끽하는 민주주의 이념의 씨앗을 심었다. 물론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들의 혁명’이라는 한계로 충분한 자유와 평등을 이룩할 수 없었고, 부의 균등분배까지는 접근하지 못했다.

-주명철 한국교원대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전작인 <바스티유의 금서>(문학과지성사·1990)를 완전 개작한 ‘서양 금서의 문화사’는 계몽주의가 발흥하던 ‘앙시앵 레짐(구제도)’ 시대의 프랑스를 무대로 금서의 역사를 살핀 책이다. 특정한 내용의 출판물 간행을 제한하는 검열과 이를 반영한 금서는 가깝게는 언론의 자유와 연결되고, 나아가서는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연결된다. 따라서 금서들은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이념이 분출하려던 혁명 직전의 프랑스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책은 인쇄물을 제작하고 유통한 사람들의 직업과 사회적 위치, 도서출판법과 검열제도의 자세한 면면, 그리고 이를 위반한 다양한 사례들을 살핀다. 구체적인 금서와 작가들의 사례를 소개하는 가운데, 저자는 글쓰기·읽기·손으로 쓴 글·책을 포함한 인쇄물 등이 당시의 의사소통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하나하나 추적한다. 앙시앵 레짐의 성격과 프랑스 혁명 이후의 일상생활을 정치·경제·사회·문화·국제 등의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고, 계몽주의에 대한 장을 따로 마련하는 등 넓은 맥락에서 금서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이 작업을 위해 매년 프랑스를 직접 방문해 고문서 자료를 마이크로 필름으로 복사해오는 등 공을 많이 들였다. 그는 자신이 찾아낸 원사료를 통해 프랑스 민중들이 왜 ‘금서’를 생산해 내 읽고, 잡혀가고, 못된(?) 사상에 물들어가는지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당시 앙시앵 레짐은 왕권과 교회, 귀족 계층에 대한 풍문과 중상비방문 등이 ‘책’을 통해 민중에게 퍼져가는 것에 대해 극도로 불안해 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출판업자들에게 ‘금서’라는 조치로 책을 생산·유통·보급하지 못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온갖 추문과 교회의 부정 폭로, 귀족층에 대한 혐오 등 당시의 프랑스는 극한의 양극화가 첨예하게 두드러진 사회였다. 혁명 여론은 그런 와중에 형성되었다. 저자는 여기에서 당시 민중은 저명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긴 했지만, 무명인들이 치를 떨며 쓴 수많은 비방문과 금서들이 당시 민중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이다. 대부분이 서구학자 연구서의 번역물 일색뿐인 서양사나 서양문화사 틈에 이 책이 돋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때문이다.(조정진 기자)

06. 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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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작가 아지즈 네신의 소설 <생사불명 야샤르>(푸른숲, 2006)이 출간됐다. 작가의 이름은 처음 들어봤는데, 그간에 동화 두 권만 번역됐었다고 하니까 내가 특별히 과문했던 건 아니겠다. 자료를 검색해보니 터키의 이 저명한 '유머작가'는 100권 이상의 책을 쓴 걸로 돼 있다. 터키의 '국민작가'라고는 하지만,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를 번역하려고 한 탓에 이슬람 과격단체의 타겟이 되었고, 지난 93년엔 이들이 그가 묵고 있던 호텔에 방화함으로써 (작가는 목숨을 건졌지만) 37명의 투숙객이 희생되기도 했었다고. 그의 사후엔 유언에 따라 아무런 장례예식도 치러지지 않았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묻혔다고 한다. 여러 수식어가 필요 없이 그는 한 사람의 '진정한 작가'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소설에 관한 두 개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6. 07. 29) 내가 죽었다고?호적이 사람잡네…‘

 

-“아버지이이이… 제가 죽었대요. 죽었대요.” 열두 살에 날벼락을 맞았다. 호적엔 ‘사망’으로 나온단다. 그것도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 것으로. 야샤르의 인생은 그때부터 꼬여 버렸다.

 

 

 



 

 

 

 

-소설가 아지즈 네신(1915∼1995)의 이름은 낯설게 들린다. 국내에는 아동 도서 두 권만 나와 있어 동화작가로만 인식되기 쉽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구라’가 여간 아니다. 알고 보니 ‘터키의 국민 작가’란다. 터키에선 “완전히 아이즈 네신의 소설이군”이라는 관용어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 책은 실화가 바탕이 됐다. 정부의 검열과 탄압을 비판한 작품을 발표해 유배와 수감생활을 반복했던 작가가 감방 동료에게서 들은 사연이다. 무대는 감방. 야샤르 야샤마즈라는 사내가 새로 들어왔다. 터키어로 야샤르는 ‘살다’, 야샤마즈는 ‘죽다’라는 뜻이다. 황당한 이름에 동료 죄수들은 폭소를 터뜨리는데, 정작 야샤르의 삶의 비극은 이름에 압축돼 있다. 그에게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이 없는 것.

-책은 ‘생사불명 야샤르’가 감방 동료들에게 21개의 경험담을 밤마다 하나씩 풀어놓는 형식이다. 이야기꾼 야사르가 들려주는 얘기는 주민등록증 없이 살아가면서 겪는 황당무계한 사건들이다. 첫날엔 처음으로 동사무소 호적과에 갔던 열두 살의 어느 날. 부모는 1911년 결혼했는데 아들 야샤르는 1915년에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니, 말이 안 된다고 따져 봐도 소용이 없다. “호적 대장에 그렇게 써 있는데 난들 어쩌겠소?” 그렇게 말해 놓곤 공무원은 나 몰라라 한다.

-다음 날 에피소드는 결혼을 앞두고 군대에 끌려간 날. 죽었다던 야샤르가 난데없이 병역기피자로 몰린다. 주민등록증은 나중에 발급해 줄 테니 입대부터 하라는 것이다. 또 그 다음 날 이야기. 제대하고 돌아와서 아버지의 유산을 받으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돈이 들어올 턱이 없다.

-포복절도할 ‘구라’를 통해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는 관료주의의 지독한 횡포다.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주민등록증 하나 발급하지 않으려는 게으름, 정부의 필요에 따라 사람을 살렸다 죽였다 하는 고무줄 원칙. 소설 속 야샤르의 분통 터지는 외침은 우습고도 기막히다. “공공기관이 하는 일이 뭐요? 학교에 입학하려고 할 때는 ‘넌 죽었어’라고 하고, 군대에 끌고 갈 때는 ‘넌 살아 있어’라고 하더니, 또 유산을 받으려고 할 때는 ‘넌 죽었어’라고 하고, 세금을 거두어 갈 때는 다시 또 ‘넌 살아 있어’라고 하는, 도대체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를 해대는 공공기관이라는 곳은 뭘 하는 곳이냐고!”(*이런 게 어디 남의 나라 일만이랴?)

-야샤르뿐 아니다. 자수하러 갔다가 복잡한 절차 때문에 포기하는 스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자가 아들로 호적에 올라왔는데 고치지 못하는 노인처럼 비슷하게 고생한 사람들이 감방엔 적지 않다. 감방뿐일까. 터키뿐일까. 작가의 풍부한 입담과 풍자적인 문체에 배를 잡다가도 읽고 나면 씁쓸해지는 마음, 어느 나라 독자든 마찬가지일 듯하다.(김지영 기자)

 

 

한국일보(06. 07. 29) 웃기지만 웃지 못할 통제 국가의 현실풍자

 

-“풍자는 세계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막아준다”고 말한 터키 작가 아지즈 네신(1915~1995). ‘제이넵의 비밀편지’ ’당나귀는 당나귀답게’ 등의 동화로, 어른들보다 아이들에게 친숙한 그의 장편소설 ‘생사불명 야샤르’(푸른숲)가 출간됐다.

-그는 통쾌한 작가다. 그의 글은 늘 불의와 거짓을 향해 시퍼렇게 날이 서 있기 때문이다. 권위와 권력을 조롱하고, 소수와 약자를, 또 그들의 저항을 흔들림 없이 옹호한다. 그리고 그는 유쾌한 작가다. 문학의 험난한 지향을 그는 웃음의 동력으로 이끌고 간다. 적당한 과장과 넉넉한 재치, 그리고 정곡을 파고드는 냉철한 지성, 그의 글에서는 냉소마저도 따듯하다. 소수와 약자를 향한 사랑이 있어서다. 하지만 그의 문학을, 달리 말해 웃음과 사랑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삶과 그의 조국 터키의 현실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그는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였다. 번역자인 이난아씨의 소갯말을 빌자면 그는 작품을 발표하기 무섭게 내란 선동이나 좌익 활동의 죄목으로 수갑을 찼고, 약 250번 가량의 재판을 받았으며, 유배생활을 제외하고 5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했다. 계엄령 하에서 신문 잡지에 칼럼을 쓸 수 없게 되자 자신이 스스로 신문을 발행하고 출판사를 만들기도 했다(*역자는 오르한 파묵의 소설들을 모두 우리말로 옮긴 바 있는 터기문학 전문번역자이다).

-유럽연합(EU) 회원국 가입을 추진중인 그의 조국 터키는 지금도 국가모독죄 규정(형법 301조)을 두고 있는 드문 국가다. 정부와 사법부, 군부, 보안조직 등에 대한 모욕행위를 하면 처벌 받고, 터키 국민이 국외에서 이를 행했을 때는 가중처벌 된다.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오르한 파묵이 지난해 스위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터키의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 학살사건을 성토했다가 국가모독혐의로 기소된 사례(국제사회의 거센 비난 여론에 밀려 연초에 공소가 기각됐다)가 있었고, 최근에도 터키에 사는 영국인 화가가 터키 총리를 풍자한 그림을 그려 피소 위기에 처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네신의 풍자는 문학 역사의 모든 빛나는 풍자들이 자라난 바로 그 자리, 곧 삼엄한 권력과 참혹한 현실 위에서 나고 자란 저항의 웃음이다(*오르한 파묵과 함께 네신은 우리가 기억해두어야 할 이름이겠다).

 


 

 

 


 

 

 

‘생사불명 야샤르’는 동사무소 직원의 어이없는 실수로 호적에 전사자로 기록된 ‘야샤르’의 이야기다. 주민등록증이 없어 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하고, 군대에도 못 가고, 뒤늦게 입대는 하지만 제대를 못하고, 사랑도 잃고, 부친의 유산마저 상속 받지 못하고…, 급기야 공무원에게 대들다가 정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교도소에 수감되는 남자. 소설은 ‘야샤르’가 감방 ‘형님들’에게 자신이 갇히게 된 연유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주민등록증 없이 살면서 겪은, 우습지만 웃지 못하고 울자니 또 너무 우스운 ‘파란만장 인생역정 스토리’. “그날 가장 큰 실수는 (…)충고를 잊은 거였죠. 욕을 하고 싶을 때는 공공기관의 이름을 바로 대지 말고 ‘세상’으로 바꿔서 욕을 하라고. (…)어쨌든 이렇게 하면 형법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고.”(486쪽)

-재갈 물린 감옥 같은 현실과, 그 현실로부터 격리된 존재들이 나누는 교감의 아이러니. 네신은 소설 결말부에 또 하나의 반전을 묻어두고 독자들을 야릇하게 웃긴다. 그 웃음은 물론 아주 복잡한 감정이 실린 웃음이다(*19세기 러시아 작가 고골을 문득 떠올리게 한다).(최윤필기자)

 

06. 0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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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7-29 21:10   좋아요 0 | URL
아, 빨리 보고 싶어요. 책 올려면 기다려야 하는데 넘 기대되요^^

로쟈 2006-07-29 21:21   좋아요 0 | URL
저도 물만두님의 리뷰가 기대됩니다.^^
 

다소 특이한 제목의 책 <유명짜한 스타와 예술가는 왜 서로를 탐하는가>(현실문화연구, 2006)가 예술분야의 신간으로 나왔다. 저자 존 워커나 이 책에 대해서 아는바 없지만, 관련 리뷰들이 눈길을 끌길래 옮겨놓는다. 관심이 맞으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문화일보(06. 07. 28) 스타와 예술가는 ‘상생의 동지’

-원제는 ‘아트 앤드 설레브리티(Art and Celebrity·예술과 명성)’. 요즘 유행에 따라 제목을 자극적으로 ‘가공’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성을 얻으려 한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5가지로 나눴다. 먹고 입고 자는 본능, 그 다음에 안전에 대한 욕구, 세번째가 존경받는 집단에 속하는 욕구, 네번째가 거기서 존경받는 것이다. 마지막이 이 모든 것을 극복한 자아실현, 동양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매슬로의 주저인 <존재의 심리학>은 두어 종의 번역본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이름은 심리학 개론 시간에 처음 접했었다).

 

 

 



-이 욕망의 단계는 보통 하나를 거쳐 다음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욕망의 사다리’라고도 불린다. 통상 30%에 달하는 사람들이 본능적 욕구충족에 매달리며 ‘남 탓’을 주로 하고, 60%에 달하는 보통 사람들은 욕망의 사다리에 세번째까지 올라 ‘나도 한때 꿈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10% 정도에 달하는 사람이 4단계 ‘존경’의 지점에 올라 부와 명성을 자랑한다. 마지막 단 계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디나 적다.

-명성은 세계 경제의 주요 통화다. 뉴스에서 최고의 가치이고, 자선사업의 주된 추진력이다. 그것은 아이디어와 정보, 즐거움을 받는 유력한 수단이다. 지금 세계에서 명성의 서명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명성’의 대명사인 대중예술 스타와 미술가의 관계를 풍부한 사례를 들며 해부했다.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 어떻게 보면 천격 자본주의의 결과인 이런 ‘명성’들이 어떻게 예술과 ‘악어와 악어 새’의 공생관계를 이루는지 파헤친 시각이 자못 신랄하다. 물론 이런 공생은 미술계에만 있지 않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전 반에 확산돼 있다.



 

 

 

-스타와 예술가는 부단한 노력과 타고난 재능으로 명성을 추구하고 획득한다. 명성은 이들이 살아가는 기반이다. 스타와 예술가 는 자신의 명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지적 관계다. 서로 상호보완적이며, 친구이고, 모델이고, 고객이다. 마돈나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수집하며 팝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뛰어난 예술적 안목을 선전했다. 칼로도 마찬가지다.



-마돈나가 수집하는 그림이라 더욱 유명해졌고, 비싸졌다. 미국 조각가 토머스 숌버그는 실베스터 스탤론이 연기한 영화 ‘록키 ’를 청동조각으로 만들어 유명해졌고, 메릴린 먼로는 앤디 워홀을 비롯해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으로 만들어져 먼로 신화를 강화하고, 또 그것을 만든 작가들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줬다. 스탤론을 비롯, 영화배우 데니스 호퍼 등은 대단한 예술품 수집가다.

-명성의 장점은 대단하다. 우선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후세 사람들에 의해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비평가들과 화랑으로부터 아첨, 칭찬과 찬미를 듣는다. 딜러, 수집가, 큐레이터 등 소비자의 수요가 높아진다. 위임, 사업과 상업적인 선전의 기회, 서훈 및 수상의 기회가 많아지며 티셔츠, 넥타이, 복제품 등 관련 문화상품의 판매액이 높아진다. 언론의 인터뷰와 사진촬영 의뢰가 많아 진다. 음식점과 거리에서 일반사람들이 알아보며 사교적 초대와 국가원수 등 VIP들과 어울릴 기회가 생긴다. 잘 입고, 잘 먹고, 큰 집에서 안정적이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명성의 단점도 만만치 않다. 이런 예술은 대체로 아마추어적이고 모험성이 없다. 스타일 면에서 자연주의적이거나 사진과 같은 사실주의 경향을 띠며 미적인 질에서 수준이 낮다. 키치이거나 키치를 모방한다. 언론의 관심을 탐하는 경향이 있고, 대개 가치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덜 받는다. 보통 사후에 관심이 크게 떨어진다.

-명사들끼리 어울리며 자신의 뿌리와 보통사람들과의 접촉을 잃게 된다.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왜곡된 자아가 기형적으로 커져 극도로 이기적이고, 거만하게 된다. 자기비판능력을 상실하면서 자신의 작품이 형편없을 때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대중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 극단적이 되기도 한다. 마약과 알코올 에 빠져 자살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마지막 명성’이기도 하다(*'명성의 마지막'이기도 하겠다).(김승현 기자)

 한국일보(06. 07. 29) 스타와 예술은 연애 중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 워즈>가 버전업 돼 온 것은 제목 덕도 크다. ‘행성’들의 싸움으로도, ‘영웅’들의 격돌로도 읽힐 수 있는 중의법. 스타 또는 영웅은 시대를 초월해 인간들을 매혹시켜 왔다. 이 시대, 그 존재는 포스트모더니즘 논리와 가상 현실 등 기술력에 힘입어 더욱 막강한 권력이 돼 인간의 의식과 실제 생활을 좌우하고 있다(*사진은 1965년 육체파 여배우 라켈 웰치와 함께 '그녀의 추상' 앞에 자리한 살바도르 달리 - 337쪽).

-이 책은 상품과 작품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들며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 자본주의적 현상에 대한 탐구서다. 스타는 예술을 탐닉하고, 예술은 기꺼이 스타를 위해 복무하는 현실을 파헤친다. 어느 것이 닭이고, 또 달걀인가.

-영국의 미술 비평가인 저자는 자신의 명성을 확대 재생산해 낸다는 목표를 두고 본다면 둘은 윈-윈의 관계라고 규정한다. 마돈나, 실베스타 스탤론, 론 우드(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등 팝스타들이 작품의 모티브로서 등장하는 미술품에서 그들은 미술 작품의 객체다. 그와 반대로 배우 안소니 퀸, 가수 데이비드 보위나 폴 매카트니 등은 직접 작품을 창작해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큰 흐름속에서 스타와 예술은 함께 안주하는 방식을 찾은 것이다.

 

 

 

 

-팝아트에게 스타들의 이미지는 영감의 원천이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뮬라시옹 이론을 만나 진지한 원군을 만난다. 모방이 깊어져 원본, 즉 현실을 앞질러 흉내내게 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엔터테인먼트가 되기도 한다. 오사마 빈 라덴도 일단 그 회로에 들어가면 단단히 망가져야 한다. 세계사는 위인들의 역사가 아니다. 여기서는 역사적 영웅들 역시 단단히 망칠 각오를 해야 한다(*지면기사와는 문장이 약간 다르다).

-그러나 한 사람, 마오도 레닌도 난도질당하는 그 곳에서도 체 게바라만은 영원한 연인이다. 앤디 워홀, 오노 요코, 장 바스키아 등 현재 미술계의 스타들은 누구인지, 각각 상술한 것도 체 게바라의 비범함을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한다. 20세기초의 좌파 혁명에서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성공했더라면 인간적 사회주의가 탄생했을 것이라며 잃어버린 역사를 돌이켜 보게도 한다.

-말미에 저자는 이 시대 예술가들에게 숙제 하나를 던진다. 2001년 세계를 뒤흔든 9ㆍ11 테러는 미술적으로 엄청난 도전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9.11 이후의 예술'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는 것). 돈과 명성, 언론의 관심을 끌고 관람객들에게 충격을 주고 이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욕심에서 예술 스타들을 만든 미술은 진정한 미학적 특성과 지적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충고는 지금 한국 미술계가 새겨 들어야 할 충고이기도 하다.



-‘예술과 명성’(Art And Celebrity)이라는 점잖은 원제에 ‘짜하다’(소문이 왁자하다, 잘 알다)라는 뜻의 시쳇말을 얹어 원저의 하중을 덜고 한국 독자들에게 다가서려 한 편집진의 노력이 전편에 펼쳐져 있다. 예를 들어 ‘마돈나와 침대에서’(*어떤 작품인지?), ‘셰어 게바라’(팝스타 셰어와 체 게바라의 얼굴을 합성한 작품)등 평소 접하기 힘들었던 70여점의 관련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는 분명 이 책이 주는 과외의 소득이다.(장병욱 기자)

06. 07.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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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2006-07-31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이 작품이 아니라 알렉 케시시안 감독의 'In bed with madonna'라는 다큐멘터리의 포스터에 저 사진이 쓰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마돈나의 진실 혹은 대담'이란 제목으로 개봉되고 출시된걸로 기억합니다. 기사대로라면 장병욱 기자가 착각했군요.. 적어도 이 책을 통해 '마돈나와 침대에서'라는(영화의 포스터사진이라면 모를까) 작품을 감상할 기회는 없을것 같은데요. 책의 부록으로 dvd를 딸려 준다면 그럴수도 있겠지만.ㅋ

로쟈 2006-08-02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제가 책을 확인해보지 않아서 그런데(<진실 혹은 대담>을 저는 극장에서 봤었습니다), 'In bed with madonna'라는 작품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