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출간된 <새로운 미술사를 위한 비평용어31>(아트북스, 2006)를 어제 받았다. 며칠 전에 내가 도서관에서 대출한 원서는 1992년에 나온 1판으로 22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2개의 비평용어에 대한 에세이들이 묶여 있다. 지난번에 소개한 대로 국역본은 거기에 9개 장이 증보된 2판을 번역한 것이다.

 

 

 

 

국역본 출간소식을 접하고 바로 원서 2판을 아마존에 주문할까 했었지만 번역상태가 의외로 양호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가능성을 핑계로 미루었었다(도서관에는 2판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본문만 700쪽이 넘는 국역본은 겉보기에 꽤 듬직해보였지만, 몇 쪽 읽어본 바로는 역시나 원서와 대조하지 않으면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수준이란 느낌이다(내가 읽어본 몇 권의 미술이론서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막힘없이 읽을 수 있는 번역이 우리 실정에서는 오히려 '이상한 번역'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책의 경우 미술(사)학 전공자들이 여럿 참여한 공동번역인 만큼 이러한 판단이 무리한 일반화일 수도 있다(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냥 책의 2장 '기호'의 몇 쪽을 들춰보는 정도로 책에 대한 '감식'을 대신하겠다.

이 책에서 '기호'란 말이 뜻하는 것은 물론 '기호로서의 미술작품' 내지는 '기호로서의 오브제'이다. 미술작품은 그냥 '사물'이 아니라 일종의 '기호'로서 작동/기능한다는 게 기본전제이다: "우리가 작품에 부여하는 의미는 문화적인 전통에 의해 성립될 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 그것에 의해 기능하게 된다. 달리 말해 미술작품은 기호와 같이 작동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54쪽) 여기서 '문화적 전통'은 'cultural convention'을 옮긴 것인데, '문화적 관습'이라고 옮기는 게 상식적이다. 여하튼, 작품의 의미는 '물리적 대상' 자체로부터 우리에게 자발적/직접적으로 현시되는 게 아니라 어떤 관습 혹은 코드에 의해 간접적으로 매개된다. 마치 언어처럼.

이 장의 필자인 알렉스 포츠(Alex Potts)는 그러한 기호성을 탐색하는 데 있어서 소쉬르와 퍼스라는 두 가지 기호학 이론/모델 가운데 퍼스의 것을 택하겠노라고 말한다. 왜? "기호에 관한 근대이론의 두 가지 기초 모델 중 퍼스의 이론은 특히, 시각미술작품이 어떤 것을 의미하게 되는 방식에 대해 오늘날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모순을 조명하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그것이 기호에 관한 수많은 근대적인 이해에 만연하고 있는 평이한 인습주의와 반사실주의의 특성에 반하기 때문이다."(55쪽)

대충대충 읽고자 한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문장인데 핀트가 조금씩 안 맞는 것이 아무래도 거슬린다. 원문은 이렇다: "Of the two founding models of the modern theory of signs, Peirce's is particularly illuminating about the discrepancies in our present-day understandings of how works of visual art come to mean something, largely because it goes against the grain of the often easy conventionalism and antirealism that pervade much modern understanding of the sign."(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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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자서전>(우물이있는집, 2006)이 출간된다고 한다. 이관우 교수의 노작이다. 원제가 <시와 진실>인 이 자서전은 연초에 윤용호 교수에 완역본이 출간된 바 있어서 다소 뜻밖이긴 한데, 아마도 각각 독자적으로 번역을 진행한 듯하다. 분량이 각각 830쪽(윤용호판)과 1116쪽(이관우판)이다. 아직 두 권 다 갖고 있지 않아서(내가 갖고 있는 건 예전에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축약본이다) 어느 번역본이 더 나은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역자의 노고만큼은 대등할 듯싶다. <괴테 자서전>에 대한 서평은 아직 올라와 있지 않기에 알라딘의 소개를 잠시 옮겨오며, 윤용호 교수 역 <시와 진실>에 대해선 리뷰 기사 두 편을 옮겨놓는다. 분량상 읽을 시간을 내기가 만만찮지만 소장용 도서 정도로 일단 간주하면 되겠다.

-<괴테 자서전>(독일어판 제목 <내 생애에서: 시와 진실>)의 완역본이 고급 양장본으로 출간되었다. 문학에 대한 괴테의 열정과 노력뿐만 아니라, 그가 성장하면서 품었던 종교, 사상, 과학 등에 대한 방대한 관심과 회의, 철저한 고민이 드러나 있는 책이다. 한 천재 문학가의 전인적인 '교양'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괴테 자서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루소의 <고백록>, 안데르센의 <내 생애의 이야기>, 크로포트킨의 <한 혁명가의 회상>과 더불어 세계 5대 자서전으로 꼽힌다.

 

 

 



-괴테를 안다는 것은 18세기의 유럽문화를 읽는 것과 같다. 괴테는 어린 시절 겪은 7년전쟁으로 인한 시야의 확대, 화려하기 그지없는 요제프 2세의 대관식, 경건파를 통한 열렬한 종교적 체험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당시의 풍속을 엿보게 해준다. 또한 수많은 추종자와 모방작을 탄생시킨 대표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시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게 한다.

-루소, 하만, 셰익스피어라는 쟁쟁한 작가들에게서 받은 영향, 그리고 하만의 제자인 헤르더와의 교류를 통해 괴테가 질풍노도운동을 이끌게 된 과정도 상세히 기술돼 있다. 질풍노도운동의 태동과 전개 과정은 당시 젊은이들이 어떤 것에 환멸을 느꼈고, 어떻게 합리주의 계몽 숭배를 뒤엎고 탈출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괴테 전집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함부르크판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3년 여의 번역과 편집 작업을 거쳤으며, 그간 우리나라에서 중역되어 나오거나, 부실한 판본을 번역하면서 생긴 오류들을 바로잡았다. 표지는 가죽과 종이로 제작하였고, 커버 양쪽에는 자석을 붙였다. 

한국일보(06. 01. 18) 젊은 괴테는 슬펐을까?

-대 문호 괴테(1749~1832)의 자서전(혹은 자전적 소설) <시와 진실>이 고려대 윤용호 교수에 의해 완역됐다. 기왕의 판본이 없지는 않으나 일어판 중역본이거나 중략본이었고, 그나마도 절판 상태였다. 환갑의 괴테(1809년 집필)는 이 책에서 자신의 출생과 청년시절을 대화체 등을 써가며 소설적 기법으로 요약했다. 정확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인 강변에서 태어나서 바이마르공국으로 이주하기까지의 26년간(~1775년)이다.



 

 

 

-이 시점은 법조인으로 양육돼 고향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지만 단 한 건의 수임 실적도 올리지 못하던 청년 괴테가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일약 스타 작가로 부상하면서 유년의 꿈이던 문학으로 인생 항로를 되잡던 시기이며, 외가의 전통을 이어 정치가로서의 야심을 막 펼치려던 때였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올해만 6종의 번역본이 새로 더 나왔다. 카피본도 적지 않을 듯한데, 번역 비판이 시급하게 요청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기까지의 ‘괴테 인생1기’의 기록이자, 지식인으로서 그가 이룩한 웅장한 이력의 뿌리를 드러낸 내면의 고백인 셈이다. 책의 분량은 무려 819쪽에 이른다.

-26살에 초고본 집필을 시작해 82세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다듬었던 역작 <파우스트>가 그의 유년시절 본 인형극이 모태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책에는 어린 괴테를 매료시켰던 그 인형극 이야기가 등장한다. “(할머니는) 낡은 집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면서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24쪽)

-귀족이었던 외할아버지와 평민 출신의 아버지가 ‘7년전쟁’을 두고 각각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편들며 불화하던 모습, 아버지의 공교육에 대한 불신과 종교관 등이 그에게 미친 영향, 연애시나 결혼축시 조시 등을 써주고 돈을 벌던 이야기며, 첫 사랑 소녀(그레첸)와의 이별과 상처, 대학 생활의 권태로움, 독일낭만주의(질풍노도) 문학의 선구자 ‘헤르더’와의 만남, ‘베르테르’에 얽힌 뒷얘기 등도 흥미진진하다.

-짐작컨대 그는 ‘26살 이후’의 자서전 계획이 없었던 듯하다. 이는 그가 책의 4부를 만년(1831년)에 쓴 데서도 엿보인다. 그의 문학이 철저한 체험에 근거한 것이라는 후세 학자들의 평가처럼, 이후의 삶은 작품 속에 충실히 녹여넣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 체험이 곧 ‘시’(내면의 진실)와 체험적 ‘진실’일 것이다.(최윤필 기자)

파이낸셜뉴스(06. 02. 01) 괴테가 말하는 ‘괴테 이야기’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고 또한 나의 삶에서 후회로 남는 것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 삶의 어느 일정한 시점이 되면 가던 길을 멈추고 한번쯤은 자기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게 되고 자기 내면과 조용히 대화를 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살아온 날의 회한과 반성은 찻잔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다 사라져 버리는 김과 마찬가지이지만 작업을 하는 자의 회고는 자기의 독특한 방법과 형식을 통해 세상에 남겨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것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자서전’이고 위대한 사람의 자기 회상은 누구나 한번 경험해 보고 싶어 한다.

-이번에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자서전적 소설인 <시와 진실>(윤용호 옮김)이 완역되어 출간되었다. 괴테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할 필요도 없이 <파우스트>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의 작품을 통해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문호다. <시와 진실>은 작자의 나이 예순이 되던 해에 쓰기 시작하여 3/4은 몇 년 후에 출간되었지만 마지막 부분은 죽기 일 년 전에 써내려가 사후에 빛을 보게 되었다.

 

 

 

 

-<시와 진실>은 괴테의 자서전일 뿐만 아니라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자서전을 염두에 두고 읽다보면 소설로 읽히고, 소설로 읽다보면 자서전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이 작품을 ‘자서전적 소설’이라고 명명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 작품이 200여 년 전에 한 독일작가에 의해 시작된 현대적 의미의 자서전이라는 점에 있다. 뿐만 아니라 괴테 문학 전반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욕구가 발동하는 독자에게는 저자와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작가 개인의 주변상황뿐만 아니라 작가가 ‘하려고 했고 해야만 했던’ 문학 전반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괴테는 “작품들이 확고한 교양의 정도가 빛을 발하고 있으며, 도덕과 미학의 원리와 신념이 어느 정도 들어있기는 하지만 작품을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작품의 소재가 되었던 생활환경과 감정상태, 그리고 영향을 끼쳤던 실례들을 일정한 연관 속에서 제시해 주었으면 한다”는 한 친구의 편지 한통이 <시와 진실>을 집필하게 된 동기라고 밝히고 있다. “만일에 위대한 작가가 이런 수고를 해준다면, 보다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도 편리하고 유익한 그 무엇이 나오게 될 것이고 자신에게 애착을 느끼는 사람들과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친구는 부탁하고 있다.

-괴테는 원래 책의 제목을 <진실과 시>로 정했다가 어조상 마음에 들지 않아 <시와 진실>로 바꾸었다고 밝히고 있다. 머리말의 ‘나의 인생에서. 시와 진실’이라는 제목이 보여 주듯이 괴테는 자기가 살아온 개별적인 상황을 진실로 설정했고 평생의 문학적 작업과 결과를 시로 서술했다. 총 4부20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시와 진실’은 제1부는 ‘벌 없는 교육은 없다’, 제2부는 ‘젊은 시절에 소망했던 것은 노년에 풍족히 이루어진다’, 제3부는 ‘나무들은 하늘까지 자라지 않도록 되어있다’, 제4부는 ‘신을 제외하고는 신에 맞설 자 없다’를 제목으로 하고 있다. 이 번역본을 읽은 독자들은 이 번역서가 국내와 외국에서 정통 코스를 밟은 한 독문학 학문세대 및 번역세대에 의해 완역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서장원 고려대 연구교수)

06. 08. 11.

P.S. '괴테가 말하는 괴테'란 제목으로 놓칠 수 없는 책은 에커만과의 만년의 대화록 <괴테와의 대화>(푸른숲, 2000)이다. 이 책 또한 국내에 여러 판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 푸른숲본이 전부인 듯하다. 

 

 

 

 

 

한편, 내가 갖고 있는 박스도서 가운데 두툼한 괴테 자서전이 <시와 진실>인지 <대화>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국역본이 더 출간됐다). 그나마 기억하는 건 이 <대화>의 러시아어본을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사실이다(아래는 러시아판 <대화>와 <시와 진실>). 언제나 손에 들게 될는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Эккерман И.П. Разговоры с ГетеИоганн Вольфганг Гете Поэзия и правда. Из моей жизн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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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커만의 중에서
    from 하민혁의 민주통신 2009-03-03 01:3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 세상 사람들은 나를 특별한 행운아라고 말한다. 나 역시 거기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지나온 행로를 불평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고난과 노력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75년 동안의 내 삶을 통해 진정으로 즐거웠던 때는 단 한 달도 없었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나를 지탱하게 했던 것은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서 계속하여 밀어 올리려는 시도였다. 1. 우수한 사람이면서도 무슨 일...

금요일자 한겨레 북리뷰를 인터넷에서 미리 훑어보다가 '한국의 책쟁이들' 시리즈에서 미술 저술가 이주헌씨 편을 읽었다. 이 연재물을 즐겨 읽지만 유독 이 글만을 옮겨올 생각을 한 것은 그의 독특한 이력이 눈에 띄어서이고 또 그가 현재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필중이라는 소식이 반가워서이다. 이만한 저술가/책쟁이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역정'을 잠시 따라가본다.

한겨레(06. 08. 11) “나 자신이 미디어라고 생각해요”

-이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이 이주헌(46)씨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어보인다. 대중들에게 쉽고 편안하게 미술을 만나게 안내해주는 필자로 이씨만큼 유명한 이는 아직 없다. 일찌감치 이 분야에 뛰어들어 가장 먼저 이름을 얻은 ‘개척자’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신문사에서 미술담당 기자를 지낸 이력을 보면, 그가 미술 저술가가 된 것은 어찌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변신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씨가 기자를 그만 두고 최고의 미술저술가가 되는 과정이 과연 그렇게 순조로왔던 것일까?

 

 

 

 

-<한겨레>에서 미술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씨는 93년 5년 넘게 몸담았던 신문사에 사표를 낸다. 미술 글쟁이로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열달 남짓 미술잡지 편집장을 지낸 뒤 이씨는 아예 전업 저술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94년 봄, 이씨는 무작정 화랑 겸 출판사인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을 찾아갔다. 이씨는 우 사장에게 유럽 주요 미술관을 가족과 함께 답사해 기행문처럼 들려주는 대중적 미술책을 펴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취재비용으로 1000만원을 먼저 달라고 요청했다(*이게 그림을 보는 안목보다도 더 배울 점이다). 선인세로 받아 책이 나온 뒤 팔리는만큼 갚는 것인데, 한가지 조건을 더 달았다. “책이 안팔려 절판되도 갚을 돈이 없다”고 미리 못박은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배째라’ 수준이지만, 당시 이씨의 형편으로선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씨가 특별한 교분이 없었던 우 사장을 찾아간 것은 학고재의 성격이 책의 성격에 맞아보였고, 그런 지원을 해줄 인식을 지닌 출판사가 학고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 사장은 놀랍게도 그자리에서 흔쾌히 이씨의 조건대로 책을 펴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1100만원을 지원받은 이씨는 저금한 돈 400여만원에서 100만원만 남기고 모두 인출해 여행비에 보탰다. 그해 8월 말, 이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이씨 나이 서른세살, 아이들은 겨우 세돌과 한돌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도착지에서 바로 답사기를 <한겨레>에 송고하기 시작했다. 53일간의 미술관 답사기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기행>이란 제목으로 학고재에서 출간됐다.

-“제 인생의 승부를 건 것이죠. 이게 되면 이걸 통해 살아갈 길이 나올 것이고, 안되면 미술 글쓰기를 접기로 하고 이 책에 제 전부를 던진 겁니다.” <50일간의~>는 미술과 여행 두가지 재미를 함께 지녔다는 평을 들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초의 대중적인 미술 저술가’ 이주헌은 이처럼 더이상 물러날 곳 없는 배수의 진을 친 도전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신문기자를 그만 두고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인 ‘미술 저술가’에 승부를 건 것 역시 당시로선 아무도 하지 않았던 모험이었다. 이후 이씨는 <미술로 보는 20세기>, <신화 그림으로 읽기> 등 내는 책마다 호평을 받았고 당대 최고의 미술 저술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씨의 강점으로는 잘난척하는 법 없이 차분하고 편하게 미술을 설명하는 글솜씨가 맨 먼저 꼽힌다. 이씨 이전에도 미술 글쟁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로 하여금 오히려 미술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관심사를 논할 뿐이었다(*인문학의 다른 분야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저술가로서 가져야 할 문장 구사력, 그리고 작품의 배경과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인문적 소양을 갖춘 필자도 드물었다. 이런 모든 단점을 한꺼번에 극복하고 등장한 저술가가 이씨였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늘 미술을 쉽게 설명하는 훈련을 쌓았던 것이 이씨의 자산이었다. 미술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힌 최초의 저술가가 이씨이고, 대중들에게 감상의 동반자로 나선 저술가도 이씨가 처음이었다.

-이씨의 글은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씨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정보나 지식 등 필요한 것을 전하는 과정에서 일상인의 언어로 길을 터주는 것이다. 이씨 스스로도 항상 ‘나 자신이 미디어다’라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쓴다. 그래서 이씨의 글은 가장 편하게 읽으면서 정보와 감상을 얻을 수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씨 이후 이씨보다 더 학문적 배경을 갖췄거나 이씨처럼 쉽게 글쓰는 이들이 등장했지만 누구도 이씨처럼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바로 ‘저널리즘적 글쓰기’ 감각 때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씨가 10년 넘게 최고의 미술 저술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글솜씨 이상으로 탁월한 책 기획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씨는 자신이 책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철저한 프로의식이 깔려 있다. 이씨의 출세작인 <50일간의~>을 보면 이씨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프로’인지를 알 수 있다. 이씨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미술책이므로 가족여행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독자들이 편하게 책을 접할 수 있고, 또한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글을 쓸 에피소드들이 나올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부부는 힘들어도 책에 재미를 넣어 보다 폭넓은 대상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런 기획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당시만해도 이런 식의 미술책은 거의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술이 뭔지 쉽게 설명해주는 이씨의 고군분투 여행기를 읽다보면 유럽 풍광을 엿보는 동시에 옆에서 설명듣듯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책만의 새로운 재미였다. “당시 여행자유화가 되면서 유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였어요. 그런데 유럽에 가면 미술관을 가봐야 하고, 미술관에 가면 뭔가를 좀 알아야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이제는 이런 책이 나올 때가 됐다고 본거죠. 개인적으로는 ‘될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기획력으로 이씨는 지금까지 낸 10여종의 책을 단 한권도 절판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만들어냈다. 이씨의 책들은 모두 제각기 컨셉과 문체, 구성이 다르다. 이씨처럼 계속 책에 변화를 주는 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씨는 언제나 책의 소재와 주제를 그 시점의 미술책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되 새로운 것으로 골라 철저하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 자신의 취향보다는 독자들이 관심가질 만한 것들을 고르는 것이 원칙이다. 한동안 그가 집중적으로 소개한 라파엘 전파가 대표적인 사례다. 때로는 철저하게 타깃 독자들에게만 맞추기도 한다. ‘가정주부’들만을 대상으로 한 미술책 <그림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가 대표적이다.

-이씨의 프로기질에는 미술 관련 글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 자기 분야에 대한 순결주의와 자기관리도 빼놓을 수 없다. 파주 헤이리 자택에 틀어박혀 오로지 미술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만을 쓸 뿐이다. 요즘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풀중이다. 트레챠코프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미술관들과 그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이 조만간 이씨의 책목록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글 구본준 기자)

06. 08. 11.

P.S. 따져보니 내가 갖고 있는 그의 책은 <미술로 보는 20세기> 한권뿐인 듯하다. 하지만, 그의 러시아 미술관 소개를 나는 손꼽아 기다려보기로 한다(사진은 트레챠코프 미술관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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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덕분에 좋은 정보 얻었습니다. 아직 본 책이 없는데 챙겨 봐야겠어요. 몹시 궁금해집니다. ^^
헉, 지금 클릭해 보니 50일 간의---는 절판이네요ㅠ.ㅠ

로쟈 2006-08-1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를 2005년판으로 바꾸었습니다. 절판되지 않았으니까 걱정마시길.^^

마노아 2006-08-11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다행이에요^^

바람돌이 2006-08-11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은 제게 각별한 책입니다. 이후 이주헌씨의 팬이 되었다죠. 이주헌씨의 책은 거의 다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아끼던 것이 <미술로 보는 20세기>였어요. 근데 누가 가져가서 안돌려주네요. 누군지가 기억에 안나니.... ㅠ.ㅠ 하마 돌아올까 기다리는데 목만 빠지고 있어요. ^^

로쟈 2006-08-11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지도 모르신다면, 보시하신 셈 쳐야 하지 않을까요?^^

chika 2006-08-1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몰래...로쟈님 글 읽고 퍼가고 했었는데요...추천이 없어서 문득 댓글 남기고 싶어졌어요. 다른땐 추천이 많더니...^^;;; (저도 이주헌님 책 많이 갖고 있거든요.ㅋ)

해적오리 2006-08-1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치카언니가 퍼간글보고 왔는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전 아직 이주헌님 책을 한권도 보지 못했는데 ;;; 이 페이퍼 읽다보니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저도 퍼갈께요.. 참 추천도요..^^

로쟈 2006-08-11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사실 퍼온 글로 추천받으면 머쓱하긴 합니다.^^

해콩 2006-08-1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펌~ 감솸~
 

퇴근길에 사든 문화일보에서 이번주에 나온 김영하의 신작소설과 지난주에 나온 김인숙의 신작소설 리뷰를 읽었다. '위기의 한국소설'을 구원해줄 '스타작가들'? 내막을 조금 따라가본다. 개별 소설에 대한 리뷰 기사 두 편도 같이 옮겨다 놓는다.  

문화일보(06. 08. 10) ‘위기의 한국소설’ 구원투수?

-김영하(38·), 김인숙(43)씨.각종 문학상을 받으며 문학계 내부에서 인정을 받고, 또 대중에 게도 널리 알려진 이른바 스타작가들이다(*다섯 살의 나이 차이를 갖고 있지만 63년생 작가군의 한 명으로 '80년대 작가'인 김인숙과 '90년대 대표작가' 김영하는 문학적으로 한 세대의 격차를 갖는다. 그 차이가 두 작품에도 각인돼 있지 않을까 싶다). 386세대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 한국 현대사의 풍경 속 에 개인의 쓸쓸하고 아픈 상처를 어루만진 장편 소설을 잇달아 펴내 눈길을 끌고 있다.

 

 

 



-9일 출간된 김영하씨의 <빛의 제국>(문학동네 발행)은 남파간 첩을 주인공으로 분단상황에 쫓기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그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다. 앞서 나온 김인숙씨의 <봉지>(문학사 상사)는 한 시골소녀가 민주화과정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성장하 는 이야기다. 당대의 시대상을 담고 있으나 사회, 역사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개인의 실존적 흔들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탄탄한 서사구조와 더불어 힘있는 문체로 독자를 흡인한다는 점에서도 같다. 문학계는 각기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두 작가의 신작 장편이 장기 침체를 겪고 있는 국내소설판에 독자를 끌어오는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빛의 제국’의 풍경 =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따 왔다. 하늘은 청명한데 땅은 어두운 그림의 풍경이 소설 전체에 배경으로 깔린다. 20여년간이나 남쪽에 적응해 살고 있던 김기영은 어느날 24시간 후 귀환하라는 평양의 명령을 받고 고민에 휩싸인다. 1963년 평양 태생인 그는 67년생으로 둔갑, 연세대에 입학해 학생운동권에서 활동하다가 졸업 후 영화수입업자로 일해왔다. 운동권 후배와 결혼해 딸을 둔 기영은 95년에 그를 남파한 북쪽 담당자가 실각함으로써 ‘잊어진 스파이’가 됐다.

-“처음엔 주인공 기영의 시점으로만 글을 썼다가 없애버리고, 주요 인물마다의 시점으로 다시 썼어요. 8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를 입체적으로 그려가는 데 필요해서였지요.” 작가의 의도대로 등장 인물 하나하나의 가족사가 현대사의 골짜 기를 이룬다. 이 골짜기에서 어떻게든 살아 온 인물들의 모습은 비극적이면서 희극적이다.

-대학시절엔 임수경을 질투하며 평양에 가고 싶어 안달했던 기영의 아내 장마리는 스무 살이나 어린 대학생들과 섹스놀이를 즐기고(*얼마만큼 리얼리티가 있는 설정일까?), 기영의 뒤를 주도면밀하게 뒤쫓아온 남쪽 정보기관원 박철수는 실향민인 할아버지와 코미디언인 아버지의 삶을 애틋하게 반추한다. 이들의 모순된 모습에 당혹해하면서도 끝내 애정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은 작가의 밀도 있는 묘사력 때문이다.

◆‘봉지’의 과거와 미래 = 1970, 80년대를 건넌 청춘들에 대한 회상록이다(*김인숙의 데뷔작이 <79-80 겨울에서 봄 사이>였던가?). 제목은 주인공 봉희가 어린 시절에 패싸움을 하는 오빠를 부르러 싸움판에 들어갔다가 자전거 체인에 맞아 이마가 비닐봉지처럼 찢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을 옮긴 것. 봉지는 예쁘지도 않고 공부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매사에 당당해서 친구인 순미, 영주, 가현의 부러움을 산다.

-봉지는 어느날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 진영을 보고 사랑을 품게 되지만, 독재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진영에게 시골 소녀의 풋사랑은 대수롭지 않은 일. 봉지는 서울의 한 간호전문 대에 입학, 진영의 학교로 그를 찾아가지만 여전히 두 사람 사이는 거리가 있다. 봉지는 어느날 당국의 수배에 쫓기는 진영을 숨겨줬다가 어딘가로 연행돼 고문을 받는다.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과거로 여행하는 일은 봉지에게 추억을 되찾는 일이라기보다는 지우기에 가깝다. ‘찢어진 봉지’와 같은 삶을 어느 누군들 껴안고 미래로 가고 싶을까.

-이 작품은 작가 김씨가 1983년 등단 이후 줄기차게 성찰해 온 시대적 고민을 좀 더 개인사 쪽으로 내면화한 느낌을 준다. 중년에 이른 봉지의 독백은 참혹한 세월에 무릎 꿇지 않고 살아온 자신의 과거에 담담하게 악수를 건넨다. ‘지나온 생을 견딘 힘만으 로도 남은 생은 괜찮은 법이다.’(장재선 기자)

서울신문(06. 08. 11) 남북 분단 그린 장편 ‘빛의 제국’ 펴낸 김영하

-소설가 김영하(38)가 장편 <빛의 제국>(문학동네)을 냈다.2004년 한해에 이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을 독식하며 문단의 스타로 떠올랐던 그가 <검은 꽃> 이후 3년 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이다. 흡혈귀, 자살안내인 같은 비일상적인 설정에서 멕시코 이민사의 거대 서사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전복적인 글쓰기로 자신만의 문학적 입지를 탄탄히 구축해온 작가는 이번에도 내용과 형식 모두 기존 소설과 차별되는 실험적 작품을 내놓았다.


 

 

 

-<빛의 제국>은 남파 간첩으로 20년을 살아오다 갑작스럽게 북으로의 귀환 명령을 받은 40대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김기영은 엘리트 출신 공작원을 남한 대학의 신입생으로 입학시켜 학생운동을 주도하려는 당의 계획에 따라 스물두살이던 1984년 서울로 남파된다. 대학 졸업 후 영화수입업을 하며 임무를 수행하던 김기영은 1995년 북측의 책임자가 실각하면서 잊혀진 스파이가 되어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소설은 김기영이 귀환 명령을 받은 그날 오전 7시부터 다음날 같은 시간까지 단 하루 동안 김기영과 그의 아내 마리, 딸 현미에게 일어난 일상을 긴박하게 엮어나간다.

-생의 절반은 북한에서, 나머지 절반은 남한에서 지낸 한 남자의 삶에서 남북 분단의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조명하는 소설의 구조는 최인훈의 <광장>과 닮아 있다.“처음부터 <광장>을 염두에 뒀다.”는 작가는 “1980년대 이후 달라진 남북의 변화상을 통해 ‘광장’이 지닌 시대적 한계들을 돌파하고 싶었다.”고 말했다(*말하자면 김영하 버전의 <광장>, 소위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광장>쯤 되겠다). 노동당원인 김기영이 대학 운동권서클에서 주체사상을 학습하는 비극적 아이러니는 <빛의 제국>이 <광장>과 결별하는 지점이다.

-스파이가 주인공이지만 30·40대 남성들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보편적인 이야기로도 읽힌다(*나도 때론 내가 고정간첩이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작가는 “과거를 잊고 평범한 일상을 지내다 하루아침에 소환명령을 받는 주인공은 언제든 세상으로부터 해고를 당할 수 있는 이 시대 남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어느 한순간 중심을 잃어버린 채 한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로 추락하는 것이다.

-<빛의 제국>은 계간 ‘문학동네’에 지난해 가을호까지 4차례 연재하다 중단했던 소설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만 제외하고 시점이나 구성을 완전히 바꿔 새로 썼다. 지난 겨울부터 칩거하면서 몸무게가 10㎏이나 빠질 정도로 작품에 열중했다.“착상이나 진행방향 등에 자신이 있었고, 쓰여져야 할 책이라는 확신도 컸다.”는 그는 “지금까지 작가로서 쌓아온 모든 역량을 총체적으로 쏟아부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작가 김영하의 모든 것이 담긴 야심작이라는 얘기다.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소설은 속도감 있고, 재밌게 잘 읽힌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희미해진다. 작가는 “다시 쓰여진 <광장>처럼 보이나 뒤로 갈수록 그 의미가 사라지도록 했다. 독자가 책을 읽은 뒤 안개 숲속을 즐겁게 헤맸다는 느낌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가장 잘 팔리는 한국 작가인 그의 신작은 벌써 해외 에이전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영문 시놉시스만 보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먼저 출간 제의를 해올 정도. 작가는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빛의 제국> 해외 출간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이순녀 기자)

국민일보(06. 08. 07) “찢어진 비닐봉지 같은 성장기”

-소설가 김인숙(43)은 요즘 중국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다. 유학간 딸을 돌보기 위해서지만, 밥짓는 냄새나 오폐수 냄새가 진동하는 베이징의 뒷골목을 걷다보면 흘러간 시간들이 발에 툭툭 채인다. “어쩌다보니 중국에 살게 되었지만 무엇을 하기 위해서라는 반짝이는 목적 의식 같은 거는 없어요. 다만 글 쓰는 사람으로 무대를 옮겨서 살아보는 것이 나쁜 경험은 아닌 거 같아요. 자극도 되고요.”

-그의 새 장편소설 <봉지>(문학사상사)는 베이징의 뒷골목을 걸으면서 써내려간 소설이다.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처럼 찢어지거나 채워지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한 여자의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의 본명은 김봉희로 별명은 봉지. 17세 여학생때 봉희가 오빠의 싸움을 말리려다 자전거 체인에 이마를 맞아 열두 바늘이나 꿰매야 했던 일을 겪고나서 친구가 붙여준 별명이다.

-“봉지의 머리에는 구멍이 뚫여버렸다. 그녀의 생각,자신이 젖은 창호지에 뚫린 구멍 같다고 여겼던 상상은 그녀의 이마를 향해 날아오던 자전거 체인을 비키지 못한 순간에 현실이 되어 버렸다. 미세한 바늘이 촘촘히 기울 수 있었던 것은 찢어진 살뿐이었다. 구멍은 그대로 남았다.”(33쪽)

-봉희의 이마에 난 구멍은 일종의 성장통을 뜻하는데 소설은 봉희가 14년 전에 쓴 ‘김봉지의 자전소설’을 풀어놓는 형식으로 전개되면서 제재소집 날나리 친구 순미,읍내에서 제일가던 여자 깡패 가현,봉희가 좋아하는 운동권 대학생 진영,봉희를 좋아하는 초등학교 동창 수호 등이 등장한다. 왜 이 소설을 썼는지, 로밍 서비스로 중계되는 국제전화를 통해 물었다. “바로 내 세대의 이야기지요. 참 오래전에 지나버린 시대같은데 내 안에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들이 있지요. 무엇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오늘의 나를 이루었을까. 내 안의 그 시대, 내 안의 그들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등장인물들은 1970년대말부터 1980년대까지의 사회 혼란과 혼돈을 통과한다. YH사건, 부마항쟁, 12·12쿠데타, 광주사태, 학내 프락치 사건, 통금해제,프로야구 출범…. 봉지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을 때 바깥 세계 역시 거대한 구멍과 균열의 가운데에 있었다. 혼돈의 시대를 통과한 그들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순미는 화려한 삶을 꿈꾸며 술집에 나가는 여대생이 됐고, 23세에 미혼모가 된 가현은 미용사로 성공했으며 간호사로 일하던 봉희는 병원에서 만난 약사와 결혼한다. 진영은 감옥에서 나온 후 유학을 갔다가 소설가가 되었고 수호는 작은 출판사에 취직한다.

-꿈은 작아지고 스러지지만 작가는 “작아지고 스러져가고 어긋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얘기한다. “몸속에 든 것이라고는 텅 빈 바람밖에 없던 비닐 봉지. 그 찢긴 봉지에 무엇이 담길 수 있었을까. 유년의 순진했던 기억들이 찢어진 자리로 흘러나간 후,봉지는 그 찢긴 자리 때문에 다시는 완전히 부풀어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존재는 그것의 비어있는 자리로부터 살아 있는 소리를 낸다.”(149쪽)

 

 

 



-소설은 쓸쓸한 삶의 풍경, 여전히 텅빈 봉지일 수밖에 없는 인생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숱한 상처를 지나왔지만 그 상처가 지나간 자리에 영광이 스며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지만 그 안에는 존재에 뚫린 구멍을 메우기 위해 나름대로 절절했던 ‘완전한 순간’이 들어 있다. 작가는 그 순간들이 삶을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어놓는 삶의 불가해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녀는 다시는 그러한 순간을 갖지 못하리라는 것, 어떤 남자를 만나 어떤 사랑을 하더라도, 그런 순간의 느낌을 다시는 갖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과는 다른 것, 말하자면 완전한 순간인 것이다.”(314쪽)(정철훈 전문기자)

06.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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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1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8-11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정신분석쪽에 관심을 갖고 계신 듯하네요.^^ 그 방면의 분석을 언제 한번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장마리의 변태섹스행각'에 관해서 제가 궁금한 건 '장마리'가 아니라 작가의 생각입니다. 그런 인물설정이 가능하다고/필요하다고 본...

2006-08-13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8-13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그 관심이 조만간 멋진 비평문으로 마무리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복날이었지만 딸아이의 생일이기도 해서 이래저래 바쁜 하루였다. 실상 아침, 점심, 저녁을 먹고 케익까지 먹는 '장정'이었을 뿐 따지고 보면 한 일도 없지만(생일카드를 늦게 주었다는 이유로 딸아이한테 반성하라는 경고를 먹었다. 물론 생일선물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바쁜 일들을 제쳐두고 있다는 부담감과 무더위 때문에 더욱 피로한 하루이기도 했다. 아이가 그래도 '즐거운 하루'였다면 잠자리에 드니까 막판에 면피는 했구나란 안도감이 든다. 그나마 다행이다.

잠시 짬을 내 '고상한' 학술기사들을 찾아보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없다(이런 복더위에 무슨 공부를 하랴!). 대신에 가짜 명품 사기 사건으로 사회란이 도배돼 있다.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코믹하고 또 '예술적'이어서 몇 마디 참견을 한다. 먼저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하는 동아일보의 기사부터 시작해보자(요 며칠 새 유행어가 된 '된장녀'도 그렇지만 이 '빈센트' 시계 건도 석사논문감은 된다. 학술은 딴동네에 있지 않다).

동아일보(06. 08. 09) “다이애나 비도 차던 시계래” 연예인도 부유층도 홀렸다

-“일본에서 스위스산(産) ‘빈센트 앤드 코(Vincent & co)’ 시계를 봤는데 한국에서 파는 곳이 어디예요?” 최근 국내 유명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지식검색 코너에 올라온 질문이다. 질문 아래에는 ‘고가의 제품으로 한국에도 곧 수입된다’는 내용과 함께 매장의 위치를 소개한 답글이 달렸다. 하지만 이 질문과 답변은 모두 연예인과 부유층을 상대로 가짜 명품 시계를 팔다 사기 혐의로 검거된 일당이 올린 것. 실제 스위스에는 ‘빈센트 앤드 코’란 상표의 시계가 없다.

-이모(42) 씨는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과 신사동에 각각 시계유통업체 사무실과 40여 평 규모의 매장을 차렸다(*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서울 강남에서 벌어지는 각종 파티에 참석하면서 연예계 등 각계에 인맥을 쌓았다고 하는 이 이모씨가 청담동 일대에선 '필립'으로 통했다고. 이름하여 '청담동 필립' 되시겠다). 이 씨는 이곳에서 한국과 중국제 부품으로 만든 저가 시계를 100년 전통의 스위스산 명품 시계로 둔갑시켜 판매했다(*이 정도면 거의 '신지식인' 아닌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비 등 세계 인구의 단 1%만 착용할 수 있는 시계’라는 그럴듯한 허위 광고에 허영심 많은 일부 연예인과 부유층은 매료됐다. 이 씨는 지난달 초 청담동의 한 바를 빌려 부유층과 연예인을 초청해 호화 제품 소개회를 열기도 했다. 또 이 시계를 유명 MC와 탤런트 등 8명에게 무상으로 나눠 줘 홍보효과를 극대화했다.

-이 씨는 부유층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시계 부품을 스위스 현지로 가져가 조립한 뒤 완제품 형태로 국내로 다시 들여와 정상적인 수입신고필증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원가 6만 원짜리 시계가 580만 원짜리로 부풀려졌지만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이만한 고부가가치 산업이 많지 않을 듯싶다. 일부 부유층 명품족들을 상대로 한 이 사기극이 서민경제에 특별히 피해를 주었을 리도 만무한데 이러한 '재능'이 감옥에서 썩는다는 건 좀 아쉬운 일이다. 가령 비상한 두뇌의 해커들을 생각해보라. '뛰어난 재능'은 활용될 필요가 있다).

-200여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은 원가 300만 원짜리 시계에는 무려 9750만 원의 가격표를 붙였다(*당연한 말이지만 원가 300만원을 붙였다면 그만큼 주목받지도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품질'이 아니라 가격 아닌가?). 이 씨는 32명에게 35개의 시계를 팔아 4억4600만 원의 판매 수익을 올렸다. 한 부유층은 원가 150만 원짜리 시계를 6750만 원에 사갔고 연예인 5명도 이 씨의 고객이었다. 연예인들 사이에선 이 시계가 ‘행운의 시계’로 불리며 선물용으로 인기를 모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8일 서울지방경찰청 외사과는 이 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또 시계를 만든 박모(41) 씨는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이들은 국내 판매권을 넘기겠다고 속여 4명에게서 15억6700만 원을 가로챈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은 “최근 검증되지 않은 수입 귀금속이 명품으로 팔려 나가는 사례가 많아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임우선 기자)

=사건의 전말에 대한 좀더 심층적인 분석 기사를 읽어본다. 이 동네는 조선일보가 좀 잘 아는 모양이다.

조선일보(06. 08. 09) 연예인도 부자도 ‘가짜’에 홀렸다

-‘세계 1% 명품’이라는 광고에 우리 사회 부유층이 넘어갔다. 중국산 부품으로 국내에서 조립한 싸구려 시계지만, ‘스위스산(産) 시계명품’이라고 포장하자, 강남 일대의 부유층과 유명 연예인들이 달려들었다. 원가 10만원도 채 안 되는 시계가 수천만원에 팔려나갔고, 유명 백화점이 특별전을 열어 ‘명품족(族)’을 꾀었다.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일부 계층의 허영심을 파고 든 ‘대(大) 사기극’이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것이다.

◆싸구려 시계의 둔갑
-미국 영주권자인 이모(42)씨(*역시 미국산 사기가 스케일이 다르다). 그의 명품시계 사기극은 2000년 ‘빈센트 앤 코(Vincent & Co)라는 시계 브랜드를 만들면서 수년의 준비를 거쳐 치밀하게 추진됐다. 스위스와 우리나라에 법인 및 상표등록을 한 뒤, 스위스에 본사가 있는 것처럼 꾸몄다.

-그는 중국에서 시곗줄과 연결고리를 들여왔다. 여기에 시침, 분침, 외장케이스 등 값싼 국내부품을 경기도 시흥의 제조업체에서 결합했다. 원가 8만~20만원.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워낙 고가품이라 강남의 일부 고객들이 ‘스위스 직수입’인지 확인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시계를 분리해 스위스로 가져간 뒤 현지에서 다시 조립해 정상적인 통관절차를 거쳐 수입신고필증을 받아냈다. 그렇게 수입신고필증까지 얻고 나니 장애물이 싹 걷혔다. 을지로 주변 인쇄소도 동원했다. 가짜 품질보증서를 만들어 붙여 구석구석 명품의 흉내를 냈다.

 

◆화려한 마케팅
-이씨는 철저하게 강남 일대 부유층을 겨냥한 마케팅에 나섰다. 명품 패션잡지와 TV, 인터넷 등에 ‘100년 동안 영국 등 유럽 왕실에서만 판매되던 스위스 명품 시계가 마침내 한국에 상륙한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다이애나비, 그레이스 켈리, 한국 유명 여배우 등이 차는 바로 그 시계’라며 허영심을 자극했다. 또 소수 부유층과 유명 연예인들을 불러 모아 청담동의 클럽에서 호화 런칭쇼(제품 출시를 앞두고 제품을 소개하는 패션쇼)를 열고, 강남의 한 백화점에서 VVIP(초우량고객)들만 초청해 특별전까지 가졌다. 지난 5월엔 압구정 로데오 거리 근처에 40평 규모의 매장도 열었다.

-연예인들에게 시계를 공짜로 제공한 뒤 사진을 찍어 잡지 등에 홍보하는가 하면, 유명 미용실 관계자들에게 홍보용 시계를 제공했다. 입소문이 나도록 ‘협찬 마케팅’도 빠뜨리지 않았다. 포털사이트의 댓글도 활용했다. 이씨는 직접 “일본에서 이 시계를 봤는데 국내 매장이 어디죠?”라고 질문을 올린 뒤, 마치 다른 사람이 답하는 것처럼 댓글로 매장 위치와 제품정보를 올렸다.

◆연예인·재벌2세·정치인 아내 등 미끼 물어
-이씨의 명품 마케팅 전략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580만원’ 가격표를 붙여놓은 골프 시계가 연예인, 재벌 2세, 정치인 아내 등에게 인기 좋게 팔렸다. 금과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시계는 9750만원에 팔렸다. 모 유명 여자 연예인의 경우, 원가 20만원의 제품을 500만원대에 구입했다. 연예인 5명이 직접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고, 홍보용으로 협찬·대여받은 연예인을 합치면 13~14명에 이른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이 시계는 ‘행운의 시계’로 통했다. 여기에 재벌 2세와 정치인 아내도 ‘가짜 명품’ 구매대열에 합류했다. 경찰은 모두 30여명이 ‘빈센트 & 코’ 시계를 샀다고 확인했다. 경찰은 “시계 구입자 명단은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씨는 시계 판매로만 4억5000만원, 대리점 운영 희망자들로부터 받은 보증금까지 합치면 23억원을 벌어들였다(*투자비용을 고려하면 생각만큼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는 아니었군). 희대의 사기극을 벌이며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던 이씨는 “연예가, 방송가 주변에 값비싼 시계가 공짜로 돌고 있어 수상하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에 결국 덜미가 잡혔다. 서울경찰청 외사과는 8일 사기 혐의로 이씨를 구속하고 제조업자 박모(41)씨를 불구속 입건했다.(최규민 기자)

=그래도 역시 최강의 분석기사는 중앙일보의 것이다(기자들이 '특종'을 다루듯이 여럿 움직이는군). 다른 기사들과 중복되는 내용이 많지만 그대로 옮겨온다.

중앙일보(06. 08. 09) 강남 파고든 '허영 마케팅'

#1 올 6월 1일 서울 강남 청담동에 있는 T바. T바에선 유명 명품의 런칭(판촉) 행사가 자주 열린다. E.L씨 등 유명 연예인들이 눈에 띄었다. 각계의 저명인사도 있었다. 무려 400여 명이 참석했다. '빈센트 앤 코(Vincent & Co)' 시계의 한 모델인 '어반 토네이도 라인' 국내 런칭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뱀 가죽 시계줄을 사용한 이 제품 소개를 위해 온몸에 보디 페인팅을 한 러시아 무희들과 살아있는 뱀 여러 마리가 동원됐다(*러시아는 여기서도 제몫을 다하는군. 그런데, 이 컨셉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가져온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필립은 자신의 사기술이 갖는 존재론적 함축까지도 은근히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닌가?). 행사장 여기저기엔 제품 부스가 차려졌고 2층 쇼룸엔 빈센트 시계의 모든 제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값은 비싼데 디자인이 좀…." 행사장 구석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호화로운 분위기에 묻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날 행사 비용만 1억30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 7월 초 강남의 한 유명 백화점 상설 전시장.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다이애나비, 모나코 그레이스 켈리 왕비 등만이 산 제품"이라는 광고문구가 나 붙었다. 빈센트 앤 코 전시행사였다. 이날은 판매는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나던 백화점 고객들은 두 번 놀라야 했다. 백화점에서 알음알음 입소문이 났던 명품 시계를 전시한다는 것에 놀랐고, 가격에 또 놀랐다. 시계의 가격은 수백만원에서 1억원에 육박하는 것도 있었다. 유명 백화점에서 가짜를 전시할 것이란 생각은 누구도 할 수 없었다.

-미국 영주권자이자 빈센트 앤 코 대표 이모(42)씨는 이런 방법으로 중국산 부품으로 만든 손목시계를 스위스 최고급 명품으로 속여 강남 부유층과 연예인을 공략했다. 이씨는 원가 8만원짜리를 580만원에, 다이아몬드를 박은 300만원짜리 시계를 9750만원에 팔았다고 한다. 서울지방경찰청 외사과는 8일 가짜 명품 시계를 스위스산 최고급 명품으로 속여 판매한 혐의(사기)로 이씨를 구속했다. 이씨에게 시계를 납품한 N사 대표 박모(41)씨도 불구속 입건했다.

◆ '국적세탁' 수법 동원=경찰에 따르면 가짜 명품 시계는 경기도 시흥의 N사에서 중국산 부품을 이용해 만든 것이다. 2005년 3월부터 최근까지 유명 연예인과 강남 부유층 인사들을 상대로 7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 이씨는 총판 운영권을 준다며 박모(46)씨 등 4명에게서 15억6700만원을 가로챈 혐의도 받고 있다.

-이씨는 2000년부터 가짜 명품시계를 국내에 팔 계획을 세웠다. 스위스와 한국에 '빈센트 앤 코'라는 법인과 상표를 등록했다. 스위스에 본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이씨는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과 신사동에 각각 사무실과 매장도 열었다. 올 2월에는 홍콩에 유령회사를 차렸다. 이로써 스위스에 본사가 있고 국내에서 수입하는 형식을 갖추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백화점 행사 땐 진가를 발휘한다. 전시행사를 했던 백화점 관계자는 "보통 명품 브랜드나 신규 브랜드 초청 전시회를 할 때 담당자가 검사하는 수입 면장과 본사 확인서 등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어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 인터넷에 자문자답(自問自答) 홍보도=준비를 마친 이씨는 고객 확보에 나섰다. 우선 강남에서 잘나가는 고급 미용실을 공략했다. 원장에게 시계를 뿌렸다. 미용실에 다니는 연예인과 부유층도 주요 목표였다. 이들에게 '수작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다'며 구매 대기자 명단까지 보여줬다. '행운의 시계'란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한 미용실 관계자는 "이씨가 재벌회장 누구를 안다며 친분을 과시해 믿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고객이 '수입신고필증'을 요구하면 국내에서 부품을 갖고 스위스에서 들어가 조립한 뒤 정상 수입절차를 거치는 '국적세탁' 수법까지 동원했다. 또 인쇄소에서 품질보증서를 가짜로 만들어 붙였다.

-이씨는 언론을 이용해 가짜 명품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도 신경 썼다. 명품을 다루는 잡지에는 여러 차례 광고를 실었다. 올 들어서는 주요 일간지도 접촉했다. 홍보대행사를 통해 접촉한 언론 중 일부는 이씨의 뜻대로 움직여 줬다. 6월에 한 경제지에는 '빈센트시계 한국 매장 오픈'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인터넷 포털에는 댓글을 올려 이씨 스스로 자가발전을 했다. 그는 포털사이트에 "일본에서 이 시계 봤는데 국내 매장이 어디죠"라는 질문을 올린 뒤 댓글을 올려 매장의 위치와 제품정보를 알려줬다.(이철재.문병주.조도연 기자)

-강남 명품족의 심리를 이용한 이씨의 수법은 인맥 관리에서 또 한번 진가를 발휘한다. 청담동에 있는 매장의 총판을 맡은 회사의 대표는 현재 국내에서 잘나가는 진짜 명품의 마케팅 책임자의 친오빠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입수한 이씨의 장부에는 구매자로 여당 중진 의원의 부인과 모 재벌 그룹 고위경영자의 부인이 포함돼 있었다. 또 여자 탤런트 C씨, 남자 탤런트 L씨 등 10여 명의 유명 남녀 연예인들이 이 업체의 사기에 속아 시계를 구입하거나 협찬품으로 받았다. 이들은 경찰에서 "명품으로 소장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빈센트 앤 코' 가짜 명품 시계 사건은 청담동으로 대표되는 명품 소비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서울대 여정성(소비자아동학과) 교수는 "부(富)의 상징, 즉 다른 사람보다 내가 많이 가졌다는 걸 드러내는 기호로 이른바 명품이 등장했다"며 "이번 사건은 명품으로 치장하려는 허영 심리를 교묘히 활용한 것으로 천민자본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패션 업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명품과 유행을 좇는 일부 계층의 심리를 파고든 사례로 분석한다. 패션 마케팅 관계자는 "비싸고 희소가치가 있는 명품이라고 선전하면 그것을 사는 것이 자신의 위치가 올라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며 "(이번 사건은) 그런 바람 같은 사람을 공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빈센트 앤 코가 유럽에서도 상위 1%만 아는 브랜드라며 '한정판(리미티드 에디션)'을 판다고 내세운 것도 이런 심리를 역이용한 것이다.

-연예인과 패션계의 일그러진 공생관계도 확인됐다. 소위 명품 브랜드나 신규 브랜드의 런칭 행사 때 연예인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연예인을 동원하지 않으면 명품의 소비계층인 부유층을 유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행사에 동원되는 연예인은 급수에 따라 행사에 소개되는 200만~500만원가량의 물품을 받는다. 연예인들은 물건을 받는 것 외에 명품 브랜드가 자신을 인정했다는 식으로 행사에 참여한 것을 홍보에 이용한다.(조도연 기자)

 

 

 

 

학술적으로 정리를 해보자면, 먼저 이 사건은 '세계 1% 명품'이라는 사기홍보에 넘어간 자칭 '대한민국 1%'의 부유층, 곧 유한계급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우물이있는집, 2005)을 막바로 떠올리게 한다. 베블런은 "자본가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은 일치하며, 경쟁체계는 경제적 진보의 원천이라는 고전경제학의 주요 명제를 반박하며, 당대의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인류학, 역사학,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명예'와 '과시성'이 갖는 계급적 의미를 논리적으로 드러냈다." '과시적 소비' 와 '과시적 여가'라는 말의 저작권자가 바로 베블런인바, 이번 사기 사건은 '과시적 소비'의 흔한(하지만 빼어난) 사례로 분류될 수 있다(그러니까 '연습문제' 정도는 되겠다). 또한 베블렌 이론의 사회학적 영감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부르디외의 '취향의 사회학' 혹은 '사회학적 판단력 비판'은 사회계급적 시각에서 이 문제를 조명할 수 있는 틀거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두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는 상품의 사용가치보다도 오히려 그 기호적 가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보드리야르의 통찰이다. 게다가 그는 현대사회에서 TV 등 영상산업,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현실을 모사한 것들이나 이미지들 즉 ‘시뮬라크르’가 오히려 거꾸로 현실이나 실재를 지배한다는 ‘시뮬라시옹’ 이론을 제창하는 바, 진짜보다는 가짜/짜가가 판을 치는 요지경 포스트모던 사회의 실상을 예리하게 해명한다(비록 별다른 대안을 제사하지 않아서 패배주의적이란 비난을 무릅쓰고는 있지만). 겉보기에 '명품'이고 남들이 명품이라 하면 그게 또 명품인 것, 그게 시뮬라시옹의 세계 아닌가?

 

 

 

 

세번째는 그러한 과시적 소비와 과다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극대화되는 모방욕망이다. 이 경우는 명품 그 자체보다도 짝퉁 명품의 소비 현상을 설명하는 데 보다 유용하다. 이번 케이스는 짝퉁을 명품으로 오인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이지만 짝퉁인 줄 알면서도 명품유사품으로서 그 효과를 발휘하는 짝퉁에 대한 선호도 우리 사회에는 존재한다. 제대로 알고 구입하느냐 모르고 구입하느냐의 차이가 여기엔 걸려있는 듯하지만, 실상한 동일한 현상의 이면이다. 어떤이의 소비가 그의 존재를 규정한다는. 그리고 상위 1%의 소비를 모방함으로써 자신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는 걸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정욕망. 그러한 욕망의 발생과정(스캔들)에 대한 면밀한 해명은 지라르 이론의 특장이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의 실제적 사례 아니었을까? "우리는 '명품 시계'가 벼락처럼 강남 명품족을 강타하는 것을 본다." 

 

 

 

 

네번째는 사건의 주모자인 '청담동 필립'의 절묘한 사기술이 경탄을 유발한다. 비록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는 대한민국 1%의 소비심리와 그 구조적 메커니즘을 꿰뚫고 있었고 이를 철저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이를 테면 명품시장의 새로운 블루오션을 개척한 공로가 그에겐 있다. 핵심은 언론과 연예인, 그리고 인맥을 이용하라, 이고,  이아무개가 아닌 '필립'으로 행세하라, 이다. 스위스 현지에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법인등록을 했다는 게 이 '필립'의 '플러스 알파'가 되시겠다. 신형 사기술의 귀감으로서 그의 사기술은 '합법성'의 테두리 안에서 충분히 재음미될 가치가 있다(사실 그가 판 것은 '명품'이라기보다는 '명품효과'이다. 명품의 진품성이란 건 그 효과가 한 가지 지탱요소일 뿐 본질적인 건 아니다. 그는 적어도 적발되기 전까지는 '진짜' 명품-효과를 판매했다!).

이 모든 문제성과 함께 내게 떠오른 것은 러시아 작가 고골(1809-1852)의 <죽은 혼>(1842)이다('죽은 혼'은 러시아어로 '죽은 농노'를 뜻한다). 지방을 돌아다니며 (지주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죽은 농노들을 장부상으로 사들인 다음 그걸 담보로(장부상으론 많은 농노를 거느린 대지주가 된다) 거액의 대출을 받으려고 한 희대의 사기꾼 치치코프의 행각을 통해서 당대의 비틀린 러시아 사회를 실감나게 묘사/풍자하고 있는 소설, 아니 '서사시'가 <죽은 혼>이다(국내에 아직 정본 번역이 안 나와 있다는 것은 유감스럽다. 참고로 3부작으로 기획됐던 이 소설의 1부만이 완성되었고 단테의 <연옥>과 <천국>에 해당하는 2, 3부를 마저 완성시키지 못하는 자괴감에 고골은 괴로워하다가 굶어죽는다. '속물' 묘사에 천재적인 작가였지만 선한 인간은 그려낼 수 없었다).

차이라면 치치코프가 '죽은 혼'들을 거래했던 반면에 명품 시계 사건에서는 '죽은 혼'들이 거래의 당사자라는 것. 지라르의 표현을 빌자면, '낭만적 거짓'에 빠져있는 주인공들처럼. 혹은 사도 바울의 경고를 빌자면, "너희가 살아있다고 해서 다 살아있는 줄 아느냐?" 이때 필요한 것은,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공백으로서의 주체'를 메우기 위한, 이 경우엔 치장하기 위한 모든 명품-주체화로부터 탈피하는 것, 그러한 환상을 횡단하는 것이다. '신성한 광기'란 그러한 탈피/횡단의 운동에 붙여진 이름이다(우리가 주체화에 안주하게 될 때, 인조인간의 운명은 곧 우리 자신의 운명이기도 하다. 아래는 <블레이드 러너>에서의 인조인간 조라).

=이제 마무리를 지어보자. 한겨레의 사설과 조선일보의 '만물상' 칼럼을 옮겨온다.

한겨레(06. 08. 10) 허영이 부른 가짜 명품시계 사건

- 일부 부유층과 연예인들이 치밀한 사기꾼에게 호되게 당했다. 원가 8만~20만원짜리 시계를 최고 수천만원에 사서 차고 다녔다고 한다. 웬만한 직장인의 한 해 소득쯤 되는 액수를 시계 구입에 썼다는 것도 놀랍지만, ‘명품’에 눈이 멀어 어이없이 당했다는 점은 더욱 놀랍다. 서울 강남 등의 일부 부유층이 서양 부자들 흉내내는 ‘국제 감각’은 익혔어도, 가짜를 알아보는 안목까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내실은 없이 겉치레만 신경 쓰는 일부 계층의 행태를 상징하는 듯하다(*그러니까 '대한민국 1%'가 '세계 1%'가 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는 얘기이다. 벼락치기 교양의 한계인 것일까?).

-사기 수법은 더욱 혀를 내두르게 한다. 사기 유통업자는 삐뚤어진 부유층의 허점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유럽 왕족’을 내세운 점, 화려한 제품 발표회로 현혹한 점, 특권 의식을 한껏 부추기는 ‘초우량 고객 전용’ 마케팅 수법 등이 특히 그렇다. 마치 일부 부자들을 비웃어주기로 작심한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그런 의혹은 나도 갖게 된다). 치밀성도 놀라울 정도다. ‘스위스 직수입’을 확인시키려고 현지에 직접 법인까지 차리고 상표까지 등록했다고 한다. 한탕에 거액을 챙기려는 사기범들도 이젠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시대가 됐다.

-이번 사건은 돈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잡은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요즘 날로 번져가는 ‘명품 집착증’의 밑바닥에는, 돈으로 치장해야 알아주고, 돈이 곧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사서 쓰는 상품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소비 만능주의의 또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크게 한탕을 벌여 일확천금을 얻겠다는 사기범 또한 물신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돈으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허영심과 돈을 최고로 여기는 한탕주의가 빚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중산층에까지 번지고 있는 고급 선호 현상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은 상당한 진실을 담고 있다. 질이 좀 떨어져도 국산품을 쓰자는 주장이 먹혀들던 시절도 지났다. 소비자의 고급스런 안목이 국산품의 품질 향상을 자극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문제는 일부 부유층의 지나친 행태가 사회 전반에 끼치는 악영향이다. 분수에 맞지 않더라도 부유층을 흉내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과 이를 이용하는 상술이 진짜 걱정이다. 단순히 합리적인 소비만 강조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물질만능 풍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고민이 언제 끝나시는 건지 의문일 뿐더러 한겨레의 결론은 식상하게도 '물신만능주의'와 '한탕주의'에 대한 훈계로 마무리되고 있다. 아무런 사고도 자극하지 않는, 맥빠진. 과연 "분수에 맞지 않더라도 부유층을 흉내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문제인가? 그래서 분수를 지키자? "일부 부유층의 지나친 행태"는 또 무엇인가? "분수를 모르는 일부 부유층"? 그러니가 부유하기는 한데 아직 세계 수준에는 미달인 졸부들? "문질만능풍조"에 대해서 고민하면, 무슨 정신운동이라도 벌여야 할까? (같은 검색어로 뜨긴 했지만) 조선일보 칼럼까지 읽게 된 건 한겨레의 칼럼이 너무 맹탕이어서였다.

 

 

 

 

조선일보(06. 08. 10) [만물상] 신종 명품 사기극

-16세기 로마의 조르조 추기경이 큰돈을 들여 ‘잠자는 큐피드’를 샀다. 고대 조각상이라 했다. 알고 보니 젊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것이었다. “자네 작품을 땅에 묻었다가 고대 로마 작품이라고 팔면 훨씬 많은 돈을 받을 걸세.” 한 친구가 미켈란젤로를 꼬드겼다. 미켈란젤로는 큐피드상을 파묻었다가 친구에게 건넸다. 친구는 그걸 로마로 가져가 다시 땅 속에서 묵힌 뒤 추기경에게 팔았다.

▶르네상스시대 영국과 독일 귀족들이 자식들을 3~4년씩 파리와 이탈리아로 보내는 ‘그랜드 투어’가 유행했다. 자식들은 세련된 문화인 행세를 하느라 비싼 예술품을 잔뜩 갖고 돌아왔다. 태반이 가짜였다. 예술품 위조의 맥은 1980년대 영국의 모작(模作) 거장 에릭 헵번에게 이어 왔다. 그는 “내가 500점 넘게 그린 가짜 그림 목록을 폭로하면 미술시장이 마비된다”고 했다. “내 그림이 대영박물관과 워싱턴 국립미술관에도 걸려 있다”고 비웃기도 했다.

▶예술품은 물론 약품부터 자동차까지 베끼지 못할 게 없는 세상이다. 세계 위조품시장은 10년 사이 17배나 팽창했다고 한다. 2003년 한 해에 4500억달러어치의 위조품이 세계를 휘저었다. 세계 무역의 6%에 이르는 덩치다. 하도 교묘하게 만들어서 진품 가게가 애프터서비스를 해주는 위조품들도 자꾸 늘어난다.

▶‘루이뷔통은 변호사 40명과 조사관 250명을 전 세계에 풀어 놓았다. 이들이 2003년에 덮친 위조 현장만 4200곳에 이른다. 그래 봐야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 된다. 명품 회사들은 때 되면 모여 머리를 맞대곤 하지만 밀려드는 위조의 해일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 세계적 ‘짝퉁 전쟁’에서도 보지 못한 신종 명품 사기극이 서울에서 벌어졌다. 연예인과 부유층이 원가 8만~20만원짜리 국산 시계를 스위스 명품으로 속아 수천만원까지 주고 샀다.

▶이 사기꾼은 명품을 위조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있지도 않은 브랜드를 하나 창조한 뒤 최고 명품이라고 거짓 선전했다. 중국 부품을 국내에서 조립한 시계를 스위스로 가져가 통관 서류까지 받아 되들여 왔다. 백화점에서 특별전까지 열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엘리자베스여왕의 시계’라는 말에 넘어갔다. ‘짝퉁’은 명품의 후광을 맛보려는 서민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이번 사기극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의 허영을 농락했다는 점에서 고소한 구석이 없지 않다.(주용중 논설위원)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다. "이번 사기극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의 허영을 농락했다는 점에서 고소한 구석이 없지 않다"는 것. 이게  "문제는 일부 부유층의 지나친 행태가 사회 전반에 끼치는 악영향이다"라는 한겨례의 판단보다 현실적이며 합리적이다. 몇 천만원짜리 시계도 차 본 사람이나 차며 부러워하는 사람이나 부러워한다. 돈이면 다 되는 사회라고 해서 다 죽은 혼들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06. 08. 09-10.

 

 

 

 

P.S. 이번 사건으로 챙기게 된 사실은 '명품'이란 표현 자체의 이데올로기이다. 중앙일보에서 정리해준 바에 따르면, "명품(名品)=고가의 브랜드 제품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사치품'으로 불리다 1990년대부터 '명품'이란 단어로 대체됐다. 일반적으로 값이 비싸고, 역사가 깊고, 소량 생산되는 제품을 말한다." 진정한 사건은 '가짜 명품' 따위가 아니라, '사치품에서 명품으로의 이행'에 있었던 것이다. 아래는 그와 관련한 칼럼.

한국일보(06. 08. 16) 사치품과 명품

-인간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찾는 합리적 소비를 추구한다는 가정은 경제학을 떠받치는 기본 전제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는 감소한다는 것이 유명한 마샬의 수요법칙이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비쌀수록 도리어 수요가 늘어나는 비합리적 소비행태가 버젓이 존재한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 베블렌은 이를 사치적 소비를 통해 신분을 과시하려는 현상이라고 설명, ‘베블렌 효과’라는 용어를 낳았다. 비싸고 쓸모도 적은 은제품이 상류층의 식기로 널리 쓰이는 유일한 이유는 과시적 소비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싸구려 중국시계를 스위스 명품이라고 속여 수 천만원씩 받고 판 명품시계 사건은 베블렌 효과를 극적으로 활용한 사기 수법이다. 최근에는 180년 전통의 이탈리아 명품이라던 시계 역시 가짜라는 보도가 있어 경찰이 가짜 명품에 대한 전면 수사에 나섰다. 문제의 가짜 명품업체는 강남 한복판에 초호화 매장을 내고 유명 연예인을 개점행사에 대거 동원했는가 하면 유명 인사들에게 시계를 선물로 뿌리는 판촉전략을 썼다. 명품을 찾는 소비심리에는 천박한 과시욕과 함께 명품을 쓰는 계층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점을 간파한 상술이다.

-허황된 명품소비 심리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가 명품이란 말의 남용이다. 요즘 명품으로 통하는 제품들은 실은 사치품이 더 적합한 표현이다. 과거 박정희 정권 시대만 해도 이들 제품은 사치품이라고 불렸다. 영어로도 ‘값 비싸고 호화스럽다’는 의미의 럭셔리(Luxury) 제품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들 사치품이 장인정신과 예술혼이 살아 있는 작품을 의미하는 명품으로 슬며시 간판이 바뀌었다. 사치라는 단어의 거부감을 없애고 예술작품이라도 소장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말장난이 절묘하다.

-과시적 소비는 베블렌이 19세기말 2차 산업혁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벼락부자들의 타락적 소비행태를 질타하면서 쓴 용어다. 당대에 부를 축적한 부자들이 전통적 부자에게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돈을 물 쓰듯 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소비행태의 이면에도 갑작스레 부를 얻은 졸부들의 과시욕이 있다고 생각된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구두 굽이 닳는 것을 막기 위해 징을 박아가며 30년 동안 같은 구두를 사용한 것이 사후에 밝혀져 새삼 감동을 주었다. 진정한 부자의 소비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배정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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