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부터 일거리가 많군. 기사들을 읽다가 그냥 넘어가기 뭐해서 몇 개 옮겨놓는데, 최근에 <헤겔>을 출간한 이제이북스의 전응주 대표를 다룬 인터뷰 기사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한번 다룬 줄 알았더니 그냥 읽기만 하고 지나쳤던 모양이다. 해서, 예의상 자리를 마련한다.

경향신문(06. 08. 12) "제대로 된 철학서 누군가는 내야겠죠"

-‘2006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2005년 9월 말 현재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출판사 2만4천5백80개 가운데 지난해 책을 한 종이라도 낸 출판사는 전체의 10%에도 못미치는 2,273개이다. 평균 발행 부수는 2,745부. 이들 가운데 그나마 적자를 면할 정도로 책이 팔린 출판사는 얼마나 될까.

-이제이북스는 이른바 ‘안 팔리는 책’만 ‘골라서’ 내는 출판사 가운데 하나다. ‘안 팔리는’ 인문학서적, 그것도 철학서를 주로 내놓는다. 인문학서적의 손익분기점이라고 흔히 말하는 1,000부 이상 팔린 책은 손에 꼽을 정도. 이 회사 전응주 대표(49)는 “재판(再版) 찍은 게 3~4종 정도 되는데 그나마 철학책은 하나도 없다”면서 “사재를 털어 꾸역꾸역 책을 내고 있다”고 밝혔다.

 

 

 



-‘범주론 명제론’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 ‘헤겔 예나 시기 정신철학’ ‘스피노자와 정치’…. 출간 도서목록만 살펴봐도 사정을 알 만하다. 최근 내놓은 역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도 그 같은 ‘운명’을 비켜가기가 수월치 않아 보인다. 책은 극단의 평가를 받는 철학자 헤겔의 참모습을 가장 충실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 전기물이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 독자들을 압도한다. 전대표는 “출판사를 시작한 2001년에 번역자와 계약을 했으니 5년이 넘게 걸린 셈”이라고 웃었다.

-철학을 전공하고 시간강사 생활을 하던 전대표는 “좋은 철학서를 제대로 내겠다”는 신념 하나로 출판업계에 뛰어들었다(*묵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철학서의 번역물들이 이해하기 힘든 게 많았고, 일본어 번역서를 다시 번역한 것도 많았습니다. 최소한 오역이 없는 철학서를 내보자고 생각했지요.”

-어려운 개념이 많다보니 철학서 번역은 특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대여섯번 교열을 보는 건 기본. ‘헤겔~’은 교열과 편집 작업에만 반 년 가까이 걸렸다. 전대표가 직접 교열을 보는 경우도 많다. 그는 “지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원전 번역물을 영어와 독일어 번역을 옆에 두고 비교하면서 보고 있다”면서 “그냥 대충 하면 손해보지 않고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편집자들은 그를 원고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라고 부른다. 책을 오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철(絲綴) 제본을 하고, 밑줄 긋고 메모하기 편한 종이를 쓰는 것도 그 같은 꼼꼼함 때문이다.

-전대표는 희랍어·라틴어 원본을 번역할 수 있는 세대가 활동하고 있는 지금 관련 철학서를 번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만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낼 예정이고, 플라톤 전집도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책을 낼수록 적자만 쌓여가는 상황은 고민거리다. “좋은 책인데 내려면 겁난다”는 그의 말은 이 같은 고민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도 유행을 따라 책을 만들 생각은 없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란다. “남들은 뭐라 해도 1,500부, 2,000부 팔았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철학서 독자가 50~100% 늘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가요.”

06. 08. 14.

P.S. 국내 철학전문 출판사라면 서광사와 철학과현실사를 들 수 있었다(서광사의 책들은 뜸해졌다, 철학과현실사의 책들은 '대중'과 '교양'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하다). 이제이북스는 새로운 강자다. 플라톤 전집까지 완간한다면 아마 판도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쌓여가는 적자를 버텨주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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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8-14 11:49   좋아요 0 | URL
오오오. 퍼가요. 아 이런 사람들이 많아져야하는데. 나오면 죄 얼마 안가 절판되어버리니.

반딧불,, 2006-08-14 11:51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갑니다.

로쟈 2006-08-14 11:56   좋아요 0 | URL
누군가 해야 할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죠(사실 그 이면은 섬뜩한 것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악역들)...

호랑녀 2006-08-14 12:48   좋아요 0 | URL
버텨주기를...

biosculp 2006-08-14 18:21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 의사나 한의사가 한 7-8만명정도, 변호사도 한만명정도 되나요.교수들도 몇만명은 되는것 같고, 기업과장급이상도 꽤 될것같고, 학교 선생님들도 한 30만명 되나요. 전교조가 조합원이 9만명이라니. 그런데 좋은 학술서가 천권이 넘어가기힘드니.
수능 1등이 저 공부할때 헤겔읽었어요. 해야 좀 팔릴지, 아니면 부잣집들 장식품이 두꺼운 책으로 유행이 바뀌어야 좀 될지.
하여간 힘되는대로 당장 읽지는 않더라도 좋은 책은 사놔야지요. 안그러면 절판되어 구경하기 조차 힘드니.

로쟈 2006-08-14 23:23   좋아요 0 | URL
사실 도서구입 십일조 같은 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십오조가 넘을 때도 많았지만, 그런 '민폐' 수준은 아니더라도 정신의 '웰빙'을 위해서라면 좀 투자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문학의 빈곤'이라...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문구다. 예전에 중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성민엽의 첫 평론집이 <문학의 빈곤>(문학과지성사, 1988)이었다(*<지성과 실천>에 이은 두번째 평론집이다. 세번째 평론집이 재작년에 출간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철학의 빈곤>(아침, 1989)을 패러디한 제목이엇다(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철학을 풍자했던가). 아침신문에 시인이자 현재는 경향신문 기자인 김중식씨가 <작가와 비평> 특집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다. 그걸 옮겨온다.  

 

 

 

 

경향신문(06. 08. 14) 모두 가난한데 빈곤문학이 없다

-모두가 가난하다고 아우성인데, 문학은 더 이상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최근 나온 <작가와 비평> 제5호의 특집은 ‘우리 시대의 가난과 빈곤의 상상력’이다. 요즘 문학이 빈곤 문제를 사회양극화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아보자는 취지다. 빈곤의 원인·양상이 시대마다 다르므로 문학적 상상력 또한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가설’에서 출발한 기획인 셈이다. 그랬는데 글을 쓴 4명 비평가의 결론은 ‘모두 가난한데 빈곤문학은 사라졌다’는 것쯤 된다. 작가들이 현실의 절망에 눈감았거나 세상을 체념한 탓에 가난의 원인과 결과를 개인에게 귀속시킬 뿐 ‘근대성과의 충돌’이라는 문제제기를 회피하고 있다는 요지다(*내가 읽어본 몇 개의 빈곤문학으로는 중과부적인 모양이다).

-문학평론가 정문순씨(37)는 1990년대 이후의 소설을 분석한 글 ‘빈곤문학의 길 찾기, 좌절과 모색’에서 “겉으로 드러난 풍요와 이기심 뒤에 숨은 빈곤의 얼굴을 직시하는 작가가 과연 있는가”라고 자문한 뒤 “없다고 본다”고 자답했다. 정씨에 따르면 빈곤문학은 70년대까지는 하나의 독립적 영역이었다. 80년대 빈곤문학은 노동문학에 수렴됐다. 90년대 이후에 대해서는 “민중의 삶을 말하던 그 많은 작가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라고 표현했다. 작가들이 절망의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란 주장이다.

-가까스로 빈곤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일부 작품들도 빈곤의 이유를 가족해체에서 찾을 뿐이다. 가난 자체가 모멸이며 소외라는 인식을 가진 작가가 거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근대적 사회제도의 일부로서 가족제도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면서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서 빈곤을 통한 성찰은 근대성과의 충돌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평론가 강경석씨(31)는 ‘불황의 상상력인가, 근대문학의 종말인가’에서 최근작 소설에 실업자 캐릭터들이 집단적으로 등장했다고 보고 그 배경과 의미를 살핀다. 정이현 ‘소년은 꿈꾸지 않는다’, 김숨 ‘트럭’, 김미월 ‘너클’, 이기호 ‘나쁜 소설’, 김애란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날 때’ 등을 분석했다. 강씨에 따르면 ‘소년은 꿈꾸지 않는다’는 속물의 허위를 폭로하기보다는 속물을 속물이게 만드는 속물성의 세계 혹은 그 메커니즘을 비판한다.

-주인공들이 현실의 백수라기보다 정신적 실직자에 가까운데, 이는 작가가 ‘세계의 기성질서=처음부터 막다른 골목’이라고 체념했기 때문이며 작품 속에서 속물성의 세계에 대한 암묵적 동의로 귀결된다는 설명이다. ‘너클’ 속 주인공의 무력감 또는 권태 역시 ‘무엇도 되지 않고자 하는 열정=세속적 방기=귀차니즘’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강씨는 그러나 “‘문학을 떠나서 생각’한다는 젊은 작가의 표현처럼 문학하는 허망함이 집단적인 표현들을 얻었던 시대는 없었다”면서 “이들이 그만큼 문학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반어일 수 있다”고 동시대 작가들을 감싸안았다.

-비평가 엄경희씨(43) 역시 한국시사 속의 가난을 살핀 ‘가난을 재생산하는 자는 누구인가?’에서 “가난을 촉발시키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통찰은 이제 소수 시인들의 관심 영역”이라고 했다. 전국노동자문학회, ‘일과 시’ 동인, 백무산·조기조·최종천 시인 등 노동문학 계열, 그리고 70년대 이후 출생자 가운데 박성우·김사이 시인 정도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실업은 자본주의를 버티게 하는/몇 안 되는 기둥 가운데 하나다/실업은 노동의 무덤이며 자본의 강력한 무기다”(백무산 ‘너희들이 손댈 수 없다’).

-문학평론가 조해옥씨(43)는 ‘내면의 가난과 가난이 주는 풍요’에서 “90년대 이후 가난을 소재로 한 시작품들은 시대의 가난 또는 물질적 빈곤 대신 내면의 가난을 추구하는 게 대부분”이라면서 “이는 시인의 빈곤한 자아, 즉 시정신의 미시성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거대담론과 이데올로기의 해체에 뒤따르는 허무감이 90년대 이후의 시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조씨에 따르면 90년대 이후에 가난을 다룬 시들은 대개 ‘무욕의 시’다. 시인들이 빈곤하고 위축된 자아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내면의 가난을 추구하는 바, 비판정신보다는 서정성과 생의 본원적 문제에 천착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시인들의 가난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거부하고 누추한 곳에서 삶의 비의와 환희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내면의 가난은 특정한 시대·역사와 무관한 시창작의 에너지”라면서 “가난을 오로지 시인 또는 시적 자아 개인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시의 미시성이 곧 시정신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김중식 기자)

06. 08. 14.

 

 

 

 

P.S. 전체적인 요지는 '빈곤문학의 빈곤'쯤 되겠다. 그게 (역설적이지만) '문학의 빈곤'을 낳고 있다고(거기에 비하면 차라리 영화가 괄목할 만하다. 가령 1000만명 이상이 볼 걸로 예상되는 <괴물>만 하더라도 얼마나 계급의식에 투철한가?!). '빈곤문학'은 다르게 규정하면 '계급문학'이다. 그리고 이 계급을 규정하는 변수는 경제적 특권과 문화적 특권이다.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이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이하인 경우가 많지만 이들의 문화적 향유 수준은 평균을 훨씬 윗돈다(대부분의 대학강사들처럼). 때문에 경제적 피착취 계급이란 자의식을 강하게 갖지 않는다/못한다. 더불어, 절대 빈곤의 상태에서라면 무슨 문학을 하겠는가? 그건 문학(예술) 자체의 오랜 딜레마이다(가령 19세기 인텔리겐치아 문학의 독자가 되어야 할 대다수 민중/농민들은 문맹이었다). 한데, <작가와 비평>은 몇 명이나 읽는 잡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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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6-08-14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명쯤?

마노아 2006-08-14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깨기 어려운 딜레마군요. 몇달 전에 누가 저더러 너의 하부구조는 뒷받침되지 않는데 너의 상부구조는 인텔리라고 하더만...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나는군요.ㅡ.ㅡ;;;

2006-08-14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jouissance 2006-08-15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민엽의 첫 번째 평론집은 '문학의 빈곤'이 아니라 '지성과 실천' 아닌가요? '문학의 빈곤'은 그의 두 번째 평론집으로 알고 있는데... 한때 그의 비평을 좋아한 적이 있어 기억이 가뭇하게 나네요. 암튼 성민엽은 '문학의 빈곤'을 출간하고 현장비평을 떠나 아카데미성으로 꼭꼭 숨어버렸지요. 이동하는 그를 일러 '비평계의 기린아'라고 평할 정도로 뛰어난 비평가였는데 말입니다... 로쟈님 좋은 글과 정보들 항상 감사^^ -

로쟈 2006-08-16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지성과 실천>(1985)이 먼저 나온 첫 평론집입니다.^^ 한데, 제가 그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있고, <문학의 빈곤>은 사서 본 책이라 후자가 더 기억에 남아있네요(더불어 <지성과 실천>은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는 책이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2004)을 최근에 냈으니까 현장비평을 아예 떠난 건 아니겠고, 관심이 좀 줄었다고 봐야겠네요. 하긴 중국문학이 더 재미있고 역동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침신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외신 기사는 <양철북>의 작가로 독일의 노벨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가 자신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로 복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다음달 발간 예정인 그의 회고록에 담긴 내용이라는 데, 그가 이전에 쓴 '나의 세기'는 전폭적으로 수정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관련기사 두 개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6. 08. 14) ‘양철북’ 노벨상 작가 귄터 그라스 “나는 나치 친위대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78) 씨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SS)에서 복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인터넷판은 11일 이런 내용이 포함된 그라스 씨와의 회견 내용을 보도했다. 그는 다음 달 발간되는 회고록을 통해 2차 대전을 전후한 자신의 행적을 공개할 예정이다.

 

 

 


-그라스 씨는 회견에서 “이런 과거가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 왔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랜 세월 침묵한 끝에 회고록을 내놓게 됐다”며 “당시에는 SS에서 복무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으나 전쟁이 끝난 뒤 수치스러운 감정이 들어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는 15세 때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잠수함부대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한 후 군 노무자로 일하다가 17세 때 드레스덴에 주둔한 SS 제10기갑사단으로 징집돼 복무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그라스 씨는 자신의 군 복무 경력에 대해 17세 때 징집돼 교황 베네딕트 16세처럼 방공부대에서 근무한 것으로 얘기해 왔다. 그는 종전 후 부상한 채 미군 포로로 잡혀 1946년까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S는 원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경호대였으나 이후 강제수용소를 운영하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등을 학살하는 임무를 맡아 악명을 떨쳤다.

-그라스 씨는 “내 기억에는 SS가 그렇게 소름끼치는 존재가 아니었고 격전지에 파견된 엘리트 부대일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2차 대전 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서 SS는 범죄 조직으로 규정됐다. 그는 “10대 시절의 나치 사상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며 자신이 나치 사상의 자발적인 동조자는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또 “(전쟁 참여는) 당시 많은 젊은이에게 흔했던 일”이라고 자신의 행적을 옹호했다.

 

 

 

-나치 시대에 성장해 전쟁에서 살아남은 세대의 ‘문학적 대변자’로 불리는 그라스 씨는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양철북은 영화로 만들어져 1980년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라스 씨는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나타냈고 인종 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로 명성을 떨쳤다.

-그라스 씨의 이 같은 고백에 대한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그간의 귄터 그라스론에 적어도 의미있는 수정이 불가피하겠다. “이런 과거가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 왔다”는 고백을 고려하지 않은 작가론이란 사실 무의미하다). 독일의 유대계 작가인 랄프 조르다노 씨는 그의 과거사 고백을 환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 온 업적과 명성이 훼손됐고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는 반응도 만만치 않다. 국제펜클럽 체코본부는 13일 그라스 씨에게 수여했던 문학상의 철회를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지리 스트란스키 회장은 “우리는 이 문제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며 논의에 부칠 것”이라고 말했다.

-체코 펜클럽은 1994년 체코의 저명한 작가인 카렐 차페크(1890∼1938)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그라스 씨에게 수여했다. 공교롭게도 차페크의 형으로, 작가 겸 화가였던 요세프 차페크는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사망했다.(김기현 기자)


세계일보(06. 08. 14) 귄터 그라스 "나는 나치 친위대원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78·사진)가 자신이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악명 높은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에 복무했다는 사실을 61년 만에 고백해 독일사회에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그라스는 12일자 일간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너 차이퉁과의 회견에서 자신이 17세 때인 1944년에 당시 군부대를 지원하는 노동봉사자로 근무하다가 드레스덴에 주둔한 나치 친위부대인 제 10기갑사단에 입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근무했다고 털어놨다.

-이 같은 그라스의 고백은 오는 9월 출간 예정인 ‘양파 껍질들’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 자세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라스는 “전쟁이 끝난 뒤 나치 친위대에 복무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괴로워했다”며 “친위대 복무 사실을 아내 외에 자식들에게도 비밀로 했었다"고 실토했다(*양파껍질들!).

-그라스가 복무한 제 10기갑사단은 45년 2월까지 동부전선에서 옛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다 4월에 옛 소련군에 투항했으며, ‘프른즈베르크’라는 별칭을 지녔다. 나치 친위대는 하인리히 히믈러 지휘하에 초기엔 9만5000명의 히틀러 경호부대로 발족했으나, 이후 90만 병력에 36개 사단을 자랑하는 정예 전투부대로 발전했다. 임무는 전선 투입은 물론 유대인 체포와 강제노동수용소 관리, 유대인,공산당원,집시 학살과 프랑스, 폴란드, 체코 등 나치 점령지에서 민간인 학살과 마을 방화 등의 만행을 자행해 악명을 떨쳤다.

-그라스는 자신은 15세에 집을 벗어나 애초 잠수함 부대에 입대하려 했으나 더 이상 모집을 하지않아 노동봉사 부대에 근무하다가 후에 친위대로 편입됐다고 밝히고 “나는 친위대 복무 사실을 치욕으로 느껴 차마 말로 고백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회고록에 밝혔다”고 실토했다(*작가 자신이 파문을 감수하고 생전에 사실을 고백한 것은 용기있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데, 나의 관심은 그보다는 그가 느낀 '치욕의 문학적 변용'에 두어진다. 귄터 그라스 읽기의 지평 변화가 사실 이 파문의 보다 중요한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라스는 1927년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단치히에서 출생했고 전후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59년 반 나치소설 ‘양철북’으로 9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고양이와 쥐’, ‘넙치’ 등 명작들을 내놓았다. 그는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어서 항상 사민당 선거운동에 참여해 왔으며 반전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그의 고백이 발표된 후 소설가 발터 옌즈, 발터 켐포스키, 역사학자 아눌프 바링, 평론가 미카엘 볼프존 등 독일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라스를 둘러싼 옹호와 비난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다.(프랑크푸르트=남정호 특파원)

06. 08. 14.

P.S. 한국일보의 칼럼 하나를 보충해 놓는다(아래 사진은 그라스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회견 도중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06. 08. 16) 그라스의 주홍글씨

-김지하 같은 시인을 감옥에 가둬놓는 나라는 방문하지 않겠다던 귄터 그라스는 30여년이 지나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그는 월드컵 개막식 전야제에서 '밤의 경기장'이라는 축시를 발표했다.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때 사람들은 관중석이 꽉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앞에 서 있었고/ 그러나 심판은 호각을 불었다: 오프사이드' 그라스는 이 시에서 축구를 빌어 절묘하게 시인, 넓게 말해 작가 혹은 지식인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현실의 게임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한 발 앞서 가는 그들은 운명적으로 오프사이드 반칙을 범할 수밖에 없다.

-독일어권 최고의 지성, 비판적 좌파 지식인의 대변인 등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이 알려주듯 그라스는 이 시의 고독한 시인처럼 인류의 이상이라는 골대를 향해 누구보다 앞서 가며 오프사이드를 두려워하지 않던 작가였다. 나치 비판, 반핵운동,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반대, 독일 통일과정에 대한 비판 등 20세기와 함께 달려온 그라스는 소설 <어느 달팽이의 일기>(1972)에서 작가를 "악취에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 악취를 사랑하는 사람, 그것이 존재의 조건"이라고 정의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음으로써 그는 한층 더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작가가 됐다.

-이런 그라스가 최근 2차대전 당시 가장 악명 높은 조직인 나치 친위대(SS)에 복무한 적이 있다고 62년만에 털어놓으면서 독일은 물론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17세 때인 1944년 SS 제10기갑사단에 배치돼 종전까지 복무했다는 사실을 내달 회고록 출간을 앞두고 언론에 밝힌 것이다. 독일 언론들은 그를 위선자 취급 하는 모양이고, 일부는 노벨문학상 반납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독일에 점령당한 뼈아픈 역사를 가진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더하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은 "그를 만나면 악수하지 않겠다"며 그라스의 출생지로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그단스크 명예시민 자격 취소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라스는 왜 60년이 넘게 이를 숨겨 왔을까. 그는 "나치 친위대 복무 사실은 아내 말고는 자식들도 몰랐다"며 "젊은날 세상 물정 모르고 한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이후 줄곧 나를 짓눌렀으며, 그것은 나의 '주홍글씨'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홍글씨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양철북>(1959)의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의 입을 통했든, 47그룹의 동료 하인리히 뵐이 자신보다 27년이나 앞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였든, 그는 더 일찍 자신의 악취에 '이름을 붙여' 주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가 2002년 방한시 "일본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깨닫는다 해도 그걸 내놓고 말하지도 않는다"고 독일과 일본의 과거 청산을 비교했던 말이 지금 훨씬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8월은 오욕의 시간이다. 그라스의 고백에, 이라크전 일으켜 그로부터 욕 먹었던 부시와 블레어, 8ㆍ15에 신사참배 강행한 고이즈미, 혹은 땅찾기에 혈안인 이 땅의 친일파 후손 등등 평소 고상한 문학이니 이상이니 따위 경멸해왔을 세계의 현실주의자들은 "거 봐, 잘난 척하더니, 너희들은 별 수 있냐" 하며 코웃음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세기'(1999)를 소설로 썼던 노작가의 인간적 나약함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그라스의 고백은 너무 늦었다. 20세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하종오 피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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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날씨의 연속이다. 오늘은 낮에 아이가 엄마에게 이런 얘기를 했단다. 여름에 에어콘 없이 지내는 집이라고 우리집 얘기를 '세상에 이런 일이' 코너에 보내자고(아이는 진담이었다). 선풍기 두 대를 풀로 돌리고는 있지만 땀이 많은 아이인지라 여름나기가 힘겨울 만하다. 그래도 너무 덥다고 짜증을 부리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이런 날씨와 무관하게 읽어야 할 책들은 많고, 정리해야 할 글들도 많으며 써야 할 것들도 산적하다. 한데, 잠시 '세상에 이런 일이' 정신에 여유를 얻어서 재작년 이맘때 모스크바에서 무슨 일로 소일했는지가 궁금했다.

찾아보니 예전에 쓴 글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미지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해놓지 않은 게 눈에 띄길래 옮겨온다. 모스크바 통신에서는 '생활이란 또 무엇인가'란 제목을 달았지만, 10년전에 쓴 글의 원제는 '중력과 은총'이었으며(같은 제목의 책을 만든 바 있는데, 그 한 꼭지였다) 여기서는 그걸 다시 복원해둔다(물론 '중력과 은총'은 내가 좋아했던 시몬느 베이유의 책 이름이다). 곧, 96년 여름에 쓰고, 2004년 여름에 다시 정리해놓은 걸(*더러 붙인 군말은 그때의 것이다) 2006년에 업그레이드 해놓는다.

 #. 사랑은 우리들의 비참함을 말해주는 표시이다. 신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S. 베이유, <중력과 은총>)

#. 87년에 시작된 우리의 여정은 이제 96년 봄과 여름에 이르렀다. 이건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이문세, '옛사랑')에서 “오, 제발!”(김건모, '스피드')에 이르는 여정에 맞먹는 것이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일단 ‘중력’과 ‘은총’을 정의해야 할까? 아니면 한 여류 시인이 “직업적인 능청”이라고 부른, 시들을 늘어놓아야 할까?.. 다 내 마음이다.

(1) 생활이란 또 무엇인가 아침부터 햇빛은 들창을 때리고 나뭇잎들은 자꾸 구멍이 뚫리고 무엇인가 끊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듯 햇빛은 무게 없는 타격을 던지고 있다 무더기로 떨어지는 햇빛의 시체를 보며 이럴 때일수록 나는 안 지려고 조바심을 한다 무엇이 나를 이기려 드는지 모르지만 내 지고 나면 저 햇빛도, 햇빛의 무게 없는 타격도 없을 것이기에

(2) 햇빛은 따스하지만 바람은 아직 쌀쌀해서 새들은 자꾸 목을 감춘다 기숙사 담벽 아래 흰 매화꽃들이 검은 가지에 소복이 앉아 미끄러질 듯하고 아까부터 벤치에 앉은 젊은 남녀는 붕어처럼 입을 맞춰댄다 아까부터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으드득 이를 갈아보지만 그건 무슨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붙어 있는 위턱과 아래턱 사이의 친화력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이다 

 

 

 

 

#. 내 마음은 두 편의 시를 골랐다. (1)은 이성복의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2'이고, (2)는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7'이다. 이 두 편에서 나는 각각 ‘조바심’과 ‘친화력’이란 말을 고른다. ‘조바심’(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조바심!)이 '게으른 저공비행Low Flying'에 대응한다면(*'게으른 저공비행'은 책에 실린 다른 글로서 '중력과 은총'의 짝패였다), ‘친화력’은 '중력과 은총Gravity & Grace'에 대응한다. ‘조바심’은 “무게 없는 타격”과의 싸움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질병(=중력의 거품)과의 싸움이고 곧 LF의 세계이다. 하지만 ‘친화력’은 싸움이 아니다. 아니 싸움이 되질 않는다. 이것은 자신의 ‘무게’(=존재근거)와의 싸움이기에 그러하다. “으드득 이를 갈아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것!

물론 이러한 대응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또 이미 LF에서 다룬 ‘꽃나무’나 ‘항아리’의 주제는 이 GG의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략적인 윤곽에 있어서 이러한 대응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래도 너무 막연한가? 사실, ‘은총’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중력’에 대해서만 조금 관심을 두었을 뿐이다(*중력에 대한 물음은 나의 고유한 물음이다. 언젠가 나는 나만의 <중력과 은총>을 쓸 계획으로 있다).

그럼 중력이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다. 이것을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프로그램 program이다. 즉 우리의 글자들(gram)에 앞서 있는(pro) 어떤 것이고, 이 글자들에 무게를 주는 어떤 것이다. 이때의 ‘어떤 것’은 어떤 작용력이다. M. 하이데거의 존재(Sein; Being)가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라면, 중력은 모든 글자들을 글자들이게끔 하는, 모든 형태들을 그런 형태들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DNA글자들, 유전형(genotype)과 표현형(phenotype)은 그래서, 중력의 장 속에 놓인다. 그리고 모든 어련하다 싶은 행동양태나 행동거지들은 중력의 입김 속에 놓인다. 중력은 그런 것이다. 아니, 이게 중력에 대한 나의 정의이다. 아니 아니다, 나는 그런 중력을 ‘발명’하고자 한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 좋다, 가령 “근처 공원에는 마로니에나무들이 빛나는 창 같은 흰 꽃을 세우고 지나가는 아가씨들의 불쑥불쑥 솟은 유방은 공격적이다 이곳에서 나는 욕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루가 얼마나 길까 생각해본다”('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8')라거나 “이런 세상에, 어쩌자고, 세상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22')라는 건 모두 중력의 품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중력의 끄나풀로서 우리는 “관념은 이유없는 참견”('미녀와 야수')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력이라는 거대조직의 세포들이다! 이 다함 없는 충성의 나날들? 아, 나는 파리에 있던 P형에게 정말 ‘공격적’이더냐고 편지를 낸 적이 있다. 말도 말라고 했던가?.. 나는 입다물고 이런 걸 쓴다.

(1) 가짜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꽃바구니를 보고 있다
중력은 얇은 가슴들에게 관대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점심을 먹고 생등심집을 나서려는 참에도
나비 한 마리, 조직의 끄나풀처럼! 가짜 꽃바구니를 맴돈다
중력은 참으로 질긴 조직을 가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2 )어항 속 금붕어에게 구두를 넣어준다
헤엄치는 일과 구두 닦는 일은 생의 소명과도 같은 것
(가끔 구두를 내팽개치고 강물로 뛰어드는 금붕어는 뭔가?)
하루 세 번 이빨을 닦듯이 빠닥빠닥 구두를 닦아야지
닦는 김에 어항 밑바닥도 닦고 책상도 닦고
그렇게 닦아놓은 세상이 어항 속 그랜드 캐넌!

어항 속 금붕어에게 또 하루치의 구두를 넣어준다

#. (1)은 '중력에 대하여.1'이고, (2)는 '중력에 대하여.2'이다. 5월말, 6월초에 쓴 시들이다. 3월 중순부터 6월말까지 나는 대략 30여 편의 시를 쓴다(*대략 나는 98년 정도까지 시를 썼다). 5월에 이 시집을 기획하고 6월 중순에 시집의 제목을 정한다. “중력과 ××”라는 제목을 찾았는데 작년에 읽은 S.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보다 나은 걸 찾을 수가 없었다(*후보로는 ‘중력의 왈츠’ ‘중력과 탱고’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짬짬이 중력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은 개략적일 따름. 중력은 한 눈에 들여다보거나 한 손에 거머쥘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념적인 언어로 잘 표상할 수 없다. 오직 시적인 언어, 비유적인 언어로 만져볼 수 있을 따름이다, 아주 잠깐씩! 그래 어떤 생각들을 했냐고? 이제 그걸 말하려는 참이다.

 

 

 



#.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로 규정할 때, 그는 중력에 대해서 잠시 잊은 것은 아닐까? 즉 그는 현존재의 한 면만을 말한 것. 다른 한 면이란 바로 현존재가 ‘잡아당겨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로, 운명에로, 소명에로, 명분에로, 행복에로, 자유에로, 사랑에로, 본능에로 잡아당겨진다. 우리는 결코 내던져진 채로 가만 놔두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꼼지락거린다. 따라서 내던져짐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현존재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는다(<존재와 시간>은 미완의 책이다). 잡아당겨짐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반드시 거기에 덧붙여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존재물음과 존재사유는 제 값의 덩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대학 신입생에게는 좀 어려워 보이지만,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 또한 내가 적극 추천하는 책이다).



또, ‘현존재 Dasein’에서 ‘Da’의 문제. 현존재를 ‘거기에 있음’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현존재의 모든 양상을 포괄하는 것이 못 된다. 독어의 접두어 ‘Da’가 ‘거기에(저기에)’이면서 ‘여기에’를 뜻하듯이 현존재는 ‘거기에 있음’과 ‘여기에 있음’이라는 두 가지 양상을 갖는다. “밤은 이미 왔으며 노래하며 울릴 종은 없다/ 가난한 세월은 흐르지 않아 나는 늘 여기 있다”(장정일, '푸른 다리')에서 ‘여기에 있음’은 분명 ‘거기에 있음’과 동일시될 수 없다. 중력은 바로 이 잡아당겨짐과 여기에 있음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요구한다. 이게 시작이었던 것.

#. 중력에 대한 사유는 ‘잡아당겨짐’과 ‘여기에 있음’에 대한 사유라고 했다(*지젝식으로 얘기하자면, ‘잡아당겨짐’/‘여기에 있음’은 ‘내던져짐’/‘거기에 있음’의 짝패이면서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가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이데거라면 얘기를 어떻게 시작할까? 아마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중력에 대한 사유가 왜 요구되는가?”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그것이 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얘기는 나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걸어 다니면서도 정작 우리의 무게를 받쳐주고 있는 중력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지낸다. 그래서 중력은 이 망각이라는 어둠에 가려져 있다. 그것은 우리 가까이에 항상 있는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사유를 우리는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물고기가 물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이 망각은 결코 실수나 죄악이 아니다. 그것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망각조차 중력의 프로그램인 것.

 

 

 



중력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도록 잡아당긴다. 중력은 우리를 자신의 품안에 가두어 놓을 뿐, 결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걸 은총이라 불렀던가? 그리하여 중력에 대한 우리의 망각은 바로 중력에 의해 권유되고 보증되는 망각이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중력은 그의 본질에 있어서 자신을 뒤로 빼돌려 감추면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낸다. 중력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중력의 역운(Geschick)이다. 그래서인가? 번번이 우리는 중력에 대한 사유(가령, C.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1859)의 경우)를 거부하고 무시하며 비웃었던 것이다. 우리는 중력의 맨얼굴을 쳐다보는 걸 두려워했던 것이다.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마치 우리의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다가 문득 계시의 순간은 오는 것인지, 이렇게. 어떻게? 느닷없이!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최승호, '北魚')

 

 

 

 

“너도 북어지?”란 내면의 소리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당신을 찾으면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음을 알게 된다(두 번까지는 괜찮겠지만).

#. 너무 걱정할 건 없다. 우리는 특권적인 존재이니까. ‘깊은 개별성’이란 특권(*나는 이 ‘깊은 개별성’ 혹은 ‘단독성’을 ‘중력의 거품’이라고 부른다): “다른 모든 종들이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자손을 낳고 그리고 언젠가 죽는다면, 우리 종의 운명도 그러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큰 뇌는 사람에게, 의식과 기억과 불멸성에 대한 꿈을 가져다 주었고 또한 우리 종(우리 중 어떤 한 사람이 아니고, 어떤 가족이 아니고, 종족, 종교, 국가가 아니라)이 자연선택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이며 종의 생존은 보장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기 힘들게 만드는 깊은 개별성을 주었다.”(R. 폴락, <생명의 기호>)

이 특권은 모든 망각을 주도하는 매우 막강한 것이다. 이것을 나는 달리 ‘유한성의 방어기제’라고 부르고 싶다. 그것은 모든 ‘무한성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한다(*정신분석학에서라면 이 ‘무한성의 침입’은 ‘실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흔한 말로 ‘자기 앞가림’이라는 것. 바로 생활이라는 것. 또 한편은 이렇다. 우리는 마냥 기분 좋게 살기를 희망하고 다른 주변적인 것들은 우리의 기분이나 맞춰주며 살기를 희망한다.

가령, “공부는 잘 하지만 정서발달이 늦어서 정신연령이 낮고 미숙하며 자기만 위해 주기를 바라고 자신의 재능을 과대평가하며 특별 대우를 바라는 여성이 많아졌다.”(<여자도 모르는 여자의 콤플렉스>)는 것. 이 깊은 개별성의 거품! 이 거품이 간혹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아으, 눈뜬 장님들의 덧없고도 맹렬한 희망이여, 의지여, 의지박약이여! 그리하여 우리가 이 중력의 손바닥 안에서 끝내 헤아릴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깊은 시간, 중력의 시간이다.



#. 우리의 깊은 개별성은 지질학자들이 제안한 깊은 시간(deep time)에 대한 이해를 곤란하게 한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10억을 의미할 때 10뒤에 0이 몇 개나 붙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10억 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건 단지 비유를 통해서만 가능할 따름이다. 가령 이 깊은 지질학적 시간을 1마일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마지막 몇 인치를 차지한다. 또 우주 달력을 예로 든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제야의 종이 울리기 불과 몇 분 전에 나타났을 따름이다. 한 지질학자는 지구의 역사를 왕의 코에서부터 쭉 뻗은 손끝까지를 거리로 쟀던 옛 영국식 야드 자로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왕의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손톱줄로 한 번 갈면 인간의 역사는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 즉 중력의 시간, 깊은 시간 앞에 놓일 때 우리는 가련한 존재일 따름이다. 그것은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 내던져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건 두려운 일이고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예의 우리는 자신의 발등만을 주시하며 자신의 일생에만 목을 매는 것. 이걸 겸손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으, 겸손이여!

#. 이 겸손이야말로 영국의 생물학자 J. M. 스미스의 개념을 빌면 가장 유력한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lly Stable Strategies), 즉 ESS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존재근거에 대해 망각하는 것(*이 망각은 정신분석학의 ‘억압’/‘배제’에 대응한다), 그래서 중력의 품안에 안주하는 것, 이것이 진화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바로 ESS인 것이다. ESS로서의 겸손/망각은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과 주변의 일이나 알아서 잘 하라!” 이것이 자기보존과 종족보존의 ESS이다. 가령, 이제 막 바닷가의 모래무지에서 깨어나온 새끼 거북이가 전력을 다해 자신의 고향이자 거처가 될 바다로 기어갈 때, 우리의 거북이는 ‘존재사유’를 개진할 수 있을까? 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관심할 수 있을까, 질문할 수 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런 따위의 일들은 ESS가 아니기에 존재의 문턱을 넘어서질 못한다. 즉 현존하지 않는다. 이건 아주 단순 명쾌한 일이다. 이걸 현실이라고 부르던가? 이러한 현실은 인간이란 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생활(*생존) 이전의 사유는 ESS가 아니다. 즉 존재에 대한 사유나 중력에 대한 사유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특권적인 것일 따름이다. 이것은 기억에의 특권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지적했던 망각에의 특권과 동음이의어(homonym)이다. 깊은 개별성은 두 개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 “너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릴케)는 것은 어느 쪽의 목소리일까? ESS의 가장자리에서, ‘여기에 있음’으로서의 나는 두 눈을 끔벅여 본다. 한 이백 년 묵은 거북이처럼?..


 

 

 


#. 고작 이십팔 년 묵은 거북이가 이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된다(*당연한 말이지만, 나에게도 20대가 있었다!). 나는 이 바닥의 생리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자주 들먹이는 홍어(洪魚)와 광어(廣魚) 얘기를 또 해줄까(*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얘기이다). 이미 이름에서 보이듯이 이들은 바다 밑바닥에 사는 몸이 납작한 물고기들이다. 이 동네에서 사는 데는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 바닥에 엎드리는 편이 유리하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큰 차이가 있다. 몸을 납작하게 만드는 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온 것. 상어와 가까운 종류인 가오리과의 홍어는 ‘정규과정’을 거쳐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이 녀석은 몸을 양 옆으로 늘려서 커다란 날개를 만든 것. 그래서 마치 압착기를 통과한 상어와 같다. 여전히 몸이 좌우대칭.



하지만 가자미과의 광어(일명 넙치)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경골어류인 이 녀석은 상어와 다르게 대개 세로로 납작하다. 따라서 광어의 조상이 바다 밑바닥에 엎드릴 때, 홍어의 조상처럼 배를 깔고 엎드리는 것보다는 몸을 한쪽으로 눕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 것. 그러나 이런 방식은 아래를 향한 눈 하나가 항상 모래 속에 파묻히게 되어 결과적으로 외눈잡이가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 문제는 진화과정에서 아래로 내려간 눈이 위쪽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눈이 돌아가는 과정은 광어의 어린 새끼가 자라는 동안 재현되므로 우리는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란 가자미는 양쪽 눈이 모두 위로 향한, 마치 피카소의 그림과 같은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바다 밑바닥에서 살아간다. 덕분에 이 녀석은 기이하게 뒤틀린 두개골을 가지게 된다. 물론 광어에게도 홍어와 같은 방식으로 납작해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하지만 광어의 조상이 만약 그와 같은 진화 경로를 따랐다면, 단기적으로는 한쪽으로 눕는 종과의 경쟁에서 뒤졌을 것이다(*그 결과 광어는 현존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

#. 우리의 넙치는 나름대로 다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삶의 질(commme il faut!)을 따질 여가가 없었다. 이젠 두개골마저 뒤틀려 버렸으니 무얼 차근차근 제대로 생각할 만한 여건도 안 된다. 오호, 이 일을 어찌할까?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오규원)일까? 어떤가, 남들이 3백 년 동안 해놓은 일을 30년 만에 해치운 나라의 국민들이여? 이 조바심 아닌 자부심! 그런 자부심을 우리의 넙치도 가지고 있을까?(*진화론에 관한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우리의 모든 존재양태와 행동양식이 이미 유전자에 프로그램 돼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홍어/광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러한 ‘프로그램’은 완벽하지 않으며 우연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즉 필연적이지 않다. 다만, 거기에 어떤 방향성(=경향성)이 주어질 따름이다. 그리고 이 방향성은 우연과 양립가능하며, 오히려 우연을 자신의 구성적 계기로서 포함한다. 홍어/광어의 서로 다른 ‘모양’을 프로그램의 필연적 결과로 간주하는 것은 그것을 전부 조물주의 계획(=섭리)으로 간주하는 신학적 태도의 이면이다. ‘프로그램=신’이라는.)

#. 생명체, 정신, 또는 문명 속에 감춰진 정보는 정보가 살아남는 성공적 경쟁이나 협력을 통해 결정하는 거대한 선택계(selective system)의 일부분이다... 선택계는 규칙적 형태를 생성하는 그리고 인식하는 계이며, 그것은 지구상의 생명의 규칙적 형태, 정신의 상징적 질서, 또는 문명의 규칙적 형태가 된다. 선택계는 복잡성을 다룬다. (H. 페이겔스, <이성의 꿈>)



#. 이 선택계, 즉 SS는 자기조직계(self organizing system), 즉 SOS와 함께 중력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개념적 도구이자 이해의 전략이다. 이런 것이 필요한 이유는 중력(의 역운)이 대단히 복잡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복잡한 것은 바로 깊은 시간, 즉 중력의 시간 때문이다. 아주 단순한 규칙(형태)도 이 시간을 통과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것이 된다. 따라서 중력(의 역운)에 대한 이해는 복잡한 단계와 절차를 필요로 한다. 아주 탁월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

반면에 중력의 거품은 단순하다. 그것이 단순한 것은 얕은 시간 때문이다(비키니 수영복은 고작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올해로 60년이 되었다). 우리의 평균적인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일들이 대개 여기에 속한다. 그저 유행에 불과한 것. 이런 유행은 주로 사회학에서 다룬다. 이에 대해 중력은 사회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 그리고 요즘 대두하는 복잡성의 과학에서 다룬다(*거기에 몇 년 전부터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정신분석학이 포함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중력의 역운과 중력의 거품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을 결코 혼동하면 안된다. 적어도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 지난 계절에 아주 뛰어난 데뷔작을 발표한 영화감독 H는 “영화란 표면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H는 홍상수이며, 그는 한국 영화사에서 아주 드문 ‘영화-작가’이다. 한국영화에 판돈을 건다면 나는 그에게 걸겠다). “나는 영화를 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 싫다. 주제를 내세우기보다는 기본적 맥락만 가지고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상황에 반응하는 모습과 사람들의 관계들을 보여준다. 그걸 나는 ‘표면’이라 부른다. 그 표면 연마가 잘 된다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보여줄 때면 감독은 교만해지지 않고도 사람들에게 좋은 인간이 되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여러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사진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다. 소설이 인물의 심리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고 사진이 순간의 정지된 느낌을 잘 잡아내듯이 영화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은 따로 있다. 뭐랄까, 현실의 표면을 있는 그대로 자세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표면을 차곡차곡 쌓아놓으면 거기서 어떤 덩어리가 보일 것이다. 난 그게 진짜 우리 삶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걸 한마디로 옮길 수는 없겠다. 그럼 영화 만들 필요가 없어지니까.”



내가 여기저기서 발췌한 그의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영화는 일단 절대적인 가시성의 세계이니까(보여지지 않는 것은 영화가 아니다!). 이 가시성의 세계는 ‘1초/24프레임’으로 세계를 분할하는 영화의 기초 몽타주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필름의 두께만큼 얇다. 그것은 자신의 두께만큼의 현실을 영화적 현실로 포착한다(엉터리 영화들은 더 많은 걸 찍으려고 한다). 그래서 표면이다. 영화적 ‘덩어리’라는 것은 이 표면들의 쌓임이다. 영화적 깊이라는 것은 이 쌓임의 효과이다. 나는 중력의 효과(=감동?) 또한 그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그리고 그런 효과들을 탐구하고 전시한다는 점에서 홍상수의 모든 영화들은 탁월하다).

 

 

 



#. <도덕의 계보>의 저자는 가치들을 그들과 그들의 기원 사이의 친족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평가하고자 했다. 그에 의하면, 가치들은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의 존재방식, 존재양태”로부터 유래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방식은 고급하거나 저급하며, 고귀하거나 비천하다. 고귀한 존재방식은 본질적으로 능동적이며 긍정적인 반면, 비천한 존재방식은 반동적이며 부정적이다. 가치들은 존재방식을 통해 창조된다. 바로 이 존재방식(존재양태; mode(s) of being)을 투시할 수 있는 안목, 이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다혈질, 우울질, 담즙질, 점액질 같은 것. 고급하고 고귀한 것은 복잡한 것의 MOB이고, 저급하고 비천한 것은 단순한 것의 MOB이다. 중력에 대한 앎은 바로 이 MOB의 기원과 유형과 계보와 진화에 대한 앎이다.

여기서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은 MOB와 존재상태(state(s) of being), 즉 SOB이다. 물은 얼음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눈물이 되어도 H2O라는 동일한 존재자질에 의해 정체성이 유지된다. 이 정체성이 가치로부터, 즉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의 MOB로부터 독립적일 때 우리는 그걸 SOB라 부를 것이다. 나는 이 MOB와 SOB에 대한 지식(=과학)이 또한 구별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MOB에 대한 앎은 주체의 MOB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관여하는 것이기에 복잡하다. 나는 이걸 ‘즐거운 지식’(gay science)이라고 부르겠다. 이에 반하여 SOB에 대한 앎은 주체의 MOB와 무관하다. 이걸 ‘객관적 지식’(dummy science)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 즐거운 지식이 주는 즐거움은 ‘울적한 즐거움’(gloomy gay)이다. 이때의 울적함은 존재양태의 다양성에 기인하는 존재의미의 다양성을 우리가 망연히 마주할 때 느끼는 울적함이다. 결코 자기화되지 않는 타자의 현존을,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의 망연자실함 같은 것. 이때의 즐거움은 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님의 침묵')붓는 즐거움이다. “그대는 발을 좀 삐었지만/ 하이힐의 뒷굽이 비칠하는 순간/ 그대 순결은/ 형이 좀 틀어지긴 하였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대는 나의 노래 나의 춤”('처용삼장')인 즐거움 말이다. 그리하여 이 ‘울적한 즐거움’, 즉 gg가 바로 GG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 지지한 것. 지지, 어린아이들에게 ‘더러운 것’이라고 일러주는 소리. 그래서 우리가 만질 수 없던 것! 하지만 이젠 만질 수 있는 것(나이가 어려서 못 만질까)! 미숙한, 저급한 MOB에게 지지는 다만 더러운 것이고 울적한 것이다. 그것은 겸손한 것, 얌전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성숙한, 고급한 MOB에게 그것은 즐거운 것이다. 폭풍우가 치는 날의 즐거움, 바로 그것이다. 그걸 이제 다시 사랑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은 나의 자유이고 당신의 오판이다. 아직 당신은 지지부진한 것 같으니까, 개미처럼? 당신은 베짱이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그것은 성교를 한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가 아니다.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들이다... 하나는 흐름을 내보내고, 다른 하나는 그 흐름을 끊는다. 유방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요, 입은 유방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다. 식욕상실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기계, 말하는 기계, 숨쉬는 기계 중 어느 것이 될 것인지 망설인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이것저것 긁어 모아 잘 꾸려내는 자들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작은 기계들을 가지고 있다.”(들뢰즈/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 개미가 아니라고? 그럼 기계이지. ‘그것’(ça)은 기계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기계이다. 학교도, 제도도, 국가도 모두 기계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기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MOB를 재생산할 따름. 물건의 형태로, 지식의 형태로, 그리고 생명의 형태로 말이다. 세상은 그런 기계들이 밤낮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꼼지락거리며 무얼 만들어낸다. 그리고 제대로 만든 걸 보면 “바로 이/그/저거야!”라고 말한다. “C'est ça!”라는 것(영어로는 “That's it!”). 이때 ça는 주객동일성의 표지이다. 이 ça에서 세계를 개량하는 것과 자신을 개량하는 것은 만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ça의 개량, 기계의 개량이다. 새로운 기계, 이것이 몇 푼의 돈보다 중요하다.

#. 언제였던가. 90년 여름, 나는 7년 만에 양양군 S면 K리에 첫사랑의 여자를 찾아갔다. 휴일이었는데 아직도 그곳은 하루에 두 번 버스가 다녔다. 나는 만 22세가 될 참이었고, 아마 그녀도 나만한 나이였겠지. 그녀는 집에 없었다. 시골 학교 운동장을 서성이다가 한 꼬마에게 “너 ×자 아니?”라고 물었다. “서울에서 공장에 다녀요.”(아, 그래서 못 만났었구나!) 그리고 또 6년이 지났다. 우리가 만나고 헤어진 지 13년이 지난 것이다. 어디선가 만나게 되더라도 이젠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나는 고작 16세, 만 15세였다. 그리고 이젠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마 다시 만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그녀의 행복을 빈다, 는 건 아, 말이 안 되는구나!



#. S. 베이유(1909-1943)는 1934-5년에 공장생활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노동자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노동이 사고와 발명과 비판에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기계의 효율성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기계가 노동자에게 얼마나 사고를 요구하고 허용하는가를 고려하여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 시몬느가 유명해지는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중에 자기 딸의 명성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 “난 그 애가 유명해지기보다는 행복해지기를 얼마나 더 바랐는지 몰라요”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 시몬느는 ‘볼셰비키’였던 어릴 때부터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인형을 가지고 놀지 않았다(나는 그런 여자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바느질도 싫어했다. 눈에 띄게 좋은 옷을 입는 것도 싫어했다. 대신에 문학을 좋아했다. 오빠인 앙드레와 아주 단짝이었는데, 라신과 코르네이유의 희곡을 모두 외어 함께 암송하면서 상대방이 틀릴 때마다 번갈아 따귀를 때렸다. 동생 시몬느가 고집이 세서 무슨 일이건 양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남매는 자주 싸웠다. 하지만 혹시 어머니가 싸우는 걸 알고 와서 둘을 떼어놓을까봐, 얼굴이 새하얘진 채 서로 물고 뜯으면서도 절대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들은 마치 친구처럼 어디에나 붙어 다녔으며 항상 사내아이들이 하는 장난을 즐겨 했다. 언젠가는 이 두 장난꾸러기가 손을 잡고 이웃집의 문을 두드린 다음 “우린 배가 고파 죽겠어요. 엄마와 아빠가 먹을 것을 하나도 주지 않아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너무나 불쌍하게 여긴 이웃 사람은 눈물을 글썽이며 과자와 빵을 주었다. 나중에 이 일을 안 시몬느의 양친은 이웃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1943년 영국 런던, 34세의 시몬느는 폐결핵으로 입원했으나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여 끝내 죽음에 이른다. 검시관은 자살이라는 판정을 내리지만 서류상으로는 “기아와 폐결핵으로 인한 심장 근육의 마비”라고 적힌다. 영국 법률에서는 자살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중력이란 주제가 아니었다면 나는 시몬느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여동생도 없으니까. 시몬느의 다른 생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녀의 전기를 참조하면 된다. 나는 그저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녀의 의견에 동감할 따름이다(*베이유는 보부아르, 아렌트 등과 함께 20세기 3대 여성 철학자로 꼽히기도 한다).



#. 새로운 사유가 새로운 기계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가 새로운 기계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신들로서는 너무 늦게 왔고, 존재로서는 너무 일찍 왔다. We are too late for the gods and too early for the Being.”(그래서 기계들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인간은 이제 막 시작인, 존재의 시이다. Being's poem, just begun, is man.” 그에 따르면 우리는 존재라는 시의 맨 첫 줄인 모양이다. 이제까지 나는 내가 읽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몇 줄을 중력이라는 나의 언어로 번역해왔지만, 이쯤에서 ‘거기에 있음’에 대응하는 ‘존재’와 ‘여기에 있음’에 대응하는 ‘중력’의 차이를 지적해야겠다.

존재-시와는 달리 인간은 중력-시의 맨 마지막 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고래들!)의 싸움”에서는 고작 새우급이지만 “중력을 둘러싼 난쟁이들의 싸움”에서는 적어도 넙치급이다. 우리는 중력의 역운을 마감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유되지 않는 중력을 사유하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중력-시의 맨 마지막 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마감되지 않은 이 중력-시의 윤곽을 읽어낼 수 있다. 도대체 이 시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물 몇 통”(김종삼, '물桶') 길어다 나르면서 우리는 짬짬이, 두 눈을 끔벅거리며 머리를 굴려본다. 중얼중얼거리며.



나는 밀밭에서 들려오는 낱알들의 기도를 듣는다
이 고요한 시간 냄비뚜껑을 열고
주여, 우리는 당신의 아들로서 너무 늦게 왔나이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이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이젠 튀겨주소서
자글자글 끓는 물에 우리의 연사(演士)들을 모두 넣어주소서
오, 나의 사랑하는 면발들이 이제 막 몸을 푸는 시간!
나는 별스런 감미로움에 젖어 눈물을 훔친다

주여, 우리는 당신의 면발로서 너무 일찍 왔나이까!

#. '나의 사랑하는 면발들'은 내가 지난 계절에 맨 마지막으로 쓴 것이다. 시작과 끝을 벌써 말해버렸으니 이야기가 너무 재미없어질까? 그런 면도 없지 않겠지.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도대체 우리 동료 면발들이 나한테 무얼 더 기대하겠는가? 그러니 바쁜 사람은 이 자리를 떠도 좋다. 나는 이유 없는 참견은 하지 않겠다. 그래도 몇 사람은 남겠지. 그래도 몇 사람은 남겠지. 하나, 둘…… 여섯…… 열다섯…… 스물아홉…… 마흔둘…… 정말, 다 가냐?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의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양념통닭집이 다섯, 호프 집이 넷, 왕족발집이 셋, 개소주집이 둘, 레스토랑이 셋, 카페가 넷, 자동판매기가 넷, 복권 판매소가 한 군데 있습니다. 마땅히 보신탕집이 둘 있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비에 젖습니다. 산부인과가 둘, 치과가 셋, 이발소가 넷, 미장원이 여섯,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입니다.

빨간 우체통이 둘, 학교 담장 밑에 버려진 자전거가 한 대, 동작구 소속 노란 소형 청소차가 둘, 영화 포스터가 불법으로 부착된 벽이 셋, 비디오 가게가 여섯, 골목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전당포 안내 표지판과 장의사 하나, 보도 블록 위에 방치된 하수도 공사용 대형 원통 시멘트관 쉰여섯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표 가변 차선 표시등 하나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한 줄에 아홉 개씩 마름모 꼴로 놓인 보도 블록이 구천오백네 개, 그 가운데 깨어진 것이 하나, 둘…… 여섯…… 열다섯…… 스물아홉…… 마흔둘…… (오규원,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



P.S.1. 그런 식으로 주절거리는 얘기는 계속되지만, 분량상 여기에서 끊는다(그 사이에도 할 일들은 점점 밀리고 있다). 나에게 감동적인 것은, 하이데거가 <형이상학 입문>에서 던진 질문이지만, 무엇인가가 차라리 없지 않고 도대체가 있는 것이다. 그것도 “모두 반짝”이면서 말이다. 더불어, 그러한 감동을 배가시키는 것은 무엇인가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언제나 꼼지락거리며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인가가 차라리 모스크바에 가만히, 얌전히 있지를 못하고 도대체가 언제나…

P.S.2. 한 아나운서의 이른 죽음이 몇 가지 추억거리를 가져다 주었고, 5년 전 겨울 모스크바에서 사고로 죽은 한 친구도 떠올리게 했다(이미 얼마 전부터 그 친구의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너무 이른 죽음, ‘안타까운 죽음’들에 대한 애도의 글이 머릿속에는 들어 있지만(그들은 차라리 더 있지 않고 도대체가 갑작스레 없어진 이들이다!), 당장은 뽑아낼 여유가 없다(<두이노의 비가>는 그러한 애도에 적합하다). 그것이 또한 안타깝고 유감스럽다. 어젯밤에는 지젝의 <이라크>도 다 읽어버렸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도 뭔가 할말이 있지만, 역시나 그 또한 말할 만한 형편이 되지 않는다. 나는 요즘 형편없이 살고 있다…

04. 08. 06./ 06. 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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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칸트를 다룬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와 독창적인 니체론 <정오의 그림자>(도서출판b, 2005)로 우리에게도 소개된 슬로베니아의 여성 철학자 알렌카 주판치치의 베르그송론을 옮겨놓는다(출처는 http://www.cinestatic.com/infinitethought/2006/03/zupancic-lecture.asp.) 보다 정확하게는 강연내용의 정리이다. 지난 봄(06. 03. 06) 강연으로 돼 있는데, 베르그송의 <웃음>을 다루고 있다. 이 <웃음>(1900)은 종로서적판(1989)과 세계사판(1992)로 두 차례 번역/출간된 바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모두 품절상태인 듯하다. 베르그송 입문서로 가장 얇은, 그렇기에/하지만 가장 쉬운/좋은 책이다.



Alenka Zupancic on Bergson and the Comic, March 2nd 2006

Bergson's "formula" of the comic, namely 'something mechanical encrusted on the living' gives a clear indication of the division at the heart of his conception of comedy: the separation of life (flexible, elastic, light, novel) and the machinic (the automated, the repetitious, the inert, the rigid). Zupancic began with this phrase, arguing that this division formed the core of all the other dyads in Bergson. I argued in questions that it was perhaps rather the opposition soul/matter that was more fundamental, and that any Lacanian re-reading of the comic through a perversely redemptive reading of Bergson's concepts such as 'life' would be in danger of falling into more or less the same theologically 'redemptive' structure as in Bergson's original argument:



(Long quote from Bergson's essay) 'Our starting-point is again "something mechanical encrusted upon the living." Where did the comic come from in this case? It came from the fact that the living body became rigid, like a machine. Accordingly, it seemed to us that the living body ought to be the perfection of suppleness, the ever-alert activity of a principle always at work. But this activity would really belong to the soul rather than to the body. It would be the very flame of life, kindled within us by a higher principle and perceived through the body, as if through a glass. When we see only gracefulness and suppleness in the living body, it is because we disregard in it the elements of weight, of resistance, and, in a word, of matter; we forget its materiality and think only of its vitality, a vitality which we regard as derived from the very principle of intellectual and moral life, Let us suppose, however, that our attention is drawn to this material side of the body; that, so far from sharing in the lightness and subtlety of the principle with which it is animated, the body is no more in our eyes than a heavy and cumbersome vesture, a kind of irksome ballast which holds down to earth a soul eager to rise aloft.'

Anyway, Zupancic pointed to a fundamental weakness in Bergson's formula that, whilst seemingly specific, is nevertheless too general - in a different vein, the same formula of the 'mechanical encrusted on the living' could easily be applied to the uncanny, for example, the living dead, for example, do they not precisely demonstrate this comedic formula, only in a horrific mode? Are zombies funny? Sometimes...



Bergson's further argument that laughter serves as a 'social corrective' simultaneously reduces the affirmatory elements of comedy (as Hegel argues) to mere forms of scorn and mockery. (Just a banal consequence of Bergson's empirically-driven social conservatism, I would argue, not to mention his ridiculous racism (from 'On Laughter', again): 'why does one laugh at a negro?...I rather fancy the correct answer was suggested to me one day in the street by an ordinary cabby, who applied the expression "unwashed" to the negro fare he was driving. Unwashed! Does not this mean that a black face, in our imagination, is one daubed over with ink or soot? If so, then a red nose can only be one which has received a coating of vermilion. And so we see that the notion of disguise has passed on something of its comic quality to instances in which there is actually no disguise, though there might be').

Bergson overlooks, she argued, the possibility that this formula could instead be the retroactive (and reactionary) effect of comedy itself - alternatively put, is not the mechanical rather constitutive of life itself? If we remove the mechanical do we really get pure liveliness/spirit? No! Life is already an imitation of life - repetition (in language/personality) does not persist purely on one side (the 'bad', heavy side) of the comedic/non-comedic division. Comedy plays not with the mechanism/life opposition, Zupancic continued, but with the inconsistency of the one (as subject) - the fact that the two elements identified by Bergson function in fact 'in a most intimate bond', rather than a disjunctive one, and that it is ultimately impossible to separate the two terms because of the 'insistence' of the one qua (incomplete) subject - traversed by language, not prey to the discrepancies between the spirit and the letter, exactly, but rather the way in which the spirit emerges out of the mechanical letter...slips of the tongue, the way language itself is productive of thought...

Zupancic quoted Groucho Marx (Driftwood) and Mrs Claypool from Night of the Opera so as to demonstrate the effect of comic imitation at the very heart of 'personality':

'That woman?
Do you know why I sat with her?

Because she reminded me of you.

- Really?
- Of course.

That's why I'm here with you,
because you remind me of you.

Your eyes, your throat, your lips...
Everything about you reminds me of you...

except you.'




Is the mechanical thus an essential feature of life, rather than its comedic antonym? Zupancic briefly turned to a discussion of 'drive' in Lacan, though this was (unfortunately) not really cashed out. Questions drew upon the relationship between Freud and Bergson (and why it was that the former's book on jokes was so unfunny), what the relationship between life and theatre was, if we are already 'playing' at life, so to speak. Also, didn't we also need to understand what the temporality of laughter was in order to understand comedy (comic timing, etc.); what were the cultural/historical dimensions of mechanism, and didn't we really need to be aware of them in order to put Bergson's claims about machines etc. into context?

Zupancic concluded that we needed to read Bergson's own examples against him: to examine the real structure at work in them and show how vivacity emerges, not against, but from within repetition.

06. 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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