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책 한권씩을 읽지는 못하더라도 책 한권 정도와는 안면을 터놓는 게 나대로의 '기본'이다. 오늘의 책으로 고른 건 프랑스의 역사학자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1929- )의 <몽타이유>(길, 2006)이다. 나로선 생소한 이름인데, 아날학파의 대부 페르낭 브로델의 뒤를 이어서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근대사를 담당했다고 하니까 걸출한 역사학자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하긴 주초에 교보에 들렀다가 신간으로 나온 책을 보고 몇 페이지 넘겨보기는 했지만 대체 어떤 책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제목부터가 알듯 모를 듯한 '몽타이유' 아닌가? 오늘자 경향신문의 서평을 읽어보니 '몽타이유'는 지명이다. 자세한 서평이므로 일독한 연후에 라뒤리의 세계로 한번 빠져보는 것도 그럴 듯한 역사기행이겠다. 중세사는 아직 내게 유혹적이진 않지만, "20세기 서양사학이 거둔 최대 역작의 하나로 평가받는 명저"라고 띄워주니 또 눈길이 안 갈 수도 없지 않은가.

경향신문(06. 11. 25) 중세 이단마을 민중의 삶·운명·神

전세계적으로 지난 20세기의 역사학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학파를 하나 꼽으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선뜻 아날학파를 지목하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거기에 속하는 역사가들은 양과 질에서 모두 풍요로운 업적을 산출하며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역사학의 영토를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향력을 반영이라도 하듯 우리나라의 출판계에서도 아날학파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역사가들의 저작을 앞다투어 번역 출간했다.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 페르낭 브로델에서 자크 르 고프와 조르주 뒤비를 거쳐 마르크 페로와 로제 샤르티에에 이르기까지 많은 아날학파 역사가의 책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지적 호기심과 열의를 가진 독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외된 한 공백이 있으니 그가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이다. 게다가 그는 한 점 공백이라고 말하기에는 아날학파 내에, 더 나아가 사학사 전반에 너무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1973년 그가 브로델을 계승하여 99년까지 사반세기에 걸쳐 명성 높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근대사를 담당한 교수였다는 사실은 그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한 지표에 불과하다.

66년에 책으로 출간된 그의 박사학위 논문 ‘랑그독의 농민들’은 15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프랑스 남부 지방의 토지대장에 수록된 방대한 양의 계량적 정보를 분석하여 농업의 성장과 쇠퇴에 거대한 주기가 있음을 밝힌 연구서이다. 토지는 여러 가지 구조적 요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집중되고 분할되는 주기가 있지만, 그 변화는 극히 완만하여 랑그독의 역사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였다는 그의 결론은 초기 아날학파 연구 방법론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실로, ‘움직이지 않는 역사’라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취임 강연의 제목은 (최소한 초기) 아날학파의 특징인 구조주의 역사학의 면모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구호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라뒤리에게 국제적으로 가장 큰 명성을 안겨준 책이 바로 ‘몽타이유: 중세 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이다. 본디 75년에 발간되었던 책이 30년도 넘어서야 우리글로 소개되니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지만, 최선의 번역자와 출판사를 만나기 위해 걸린 시간이라 자위하며 그 간행을 반긴다. 더구나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저서의 실제 내용은 알 수 없는 공백으로 남아있던 아날학파의 한 핵심 인물의 저작을 통해 아날학파의 계보를 실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 것도 기쁨을 더해준다.

그뿐 아니라 이 책은 아날학파를 넘어서는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인정 받고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피터 버크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이 책이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와 함께 ‘미시사’를 지식의 지도 위에 올려놓은 저작으로서, 물질문화와 망탈리테(집단무의식)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문화사에 크게 기여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여류 역사가로 여러 면에서 유럽 중세와 근대 초의 역사를 개척한 선구자로 꼽히는 나탈리 데이비스는 자신의 학문 여정을 회고하는 연설에서 자신이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저작을 쓰게 된 계기의 하나가 ‘몽타이유’라는 미시사의 저작이 거둔 성공에서 얻은 자극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책은 1294년부터 1324년까지 프랑스의 남쪽 랑그독 지방 피레네 산맥의 1,300m 고원 지대에 자리한 몽타이유 마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연구서이다. 이 시기에 몽타이유 마을은 카타르파 이단에 물들어 있었다. 카타르파는 물질계를 사악한 신의 피조물인 것으로 간주하는 기독교의 극단적인 이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빵을 통해 우리 몸에 임한다는 성체성사의 핵심적인 교리마저 부정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들을 척결하기 위해 1244년에 십자군을 파견했고, 그 이후 생존한 카타르파의 일부가 피레네 산간 지방으로 도피하여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후에 교황 베네딕투스 12세가 된 자크 푸르니에가 1317년 몽타이유 마을 근처의 파미에 교구에 주교로 부임했다. 그는 이단재판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 몽타이유 마을 사람들을 피의자로 소환했다. 그는 마을의 모든 비밀을 꼬치꼬치 끈덕지게 심문하여 그 내용을 양피지에 정서했다. 라뒤리는 그의 기록을 이용하여 몽타이유 마을 사람들의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 모두를 생생하고 정교하게 되살려놓았다. 농경 방식, 집, 다른 마을과의 관계, 세속 권력이나 교회 권력과의 관계와 같은 물질 세계와 신, 운명, 삶, 죽음, 마법, 공간, 시간, 구원, 성(性)과 같은 정신 세계의 모습이 복원된 것이다.

그렇게 복원된 이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 기독교 사회의 엄격한 행동 윤리와는 거리가 멀다. 이 마을 사람들의 자유로운 성 관념과 느슨한 성 풍속은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라, 14세기에 이르기까지도 기독교의 윤리관은 아직 민중 문화에 깊이 침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몽타이유’의 번역 출간을 계기로 ‘랑그독의 농민들’ ‘로망스의 사육제’를 비롯하여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그의 저작들을 더 많이 접할 수 있게 되기 바란다.(조한욱|한국교원대 교수·역사학)

06. 11. 25.

P.S. <로망스의 사육제>는 영역본(1979)으로도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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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4세기 카타르파 이단의 재판기록을 통해 본 중세인의 삶
    from 창조를 위한 검은 잉크의 망치 2011-05-03 15:50 
    프랑스 남부의 랑그독 지방은 알비 카타리즘, 카타르파에 감염되었다. 1208년 알비파 이단에 대한 십자군 전쟁이 있었고 카타르파 최후의 보루였던 몽세귀르 성이 함락된 뒤에 이단재판이 맹위를 떨쳤다. ‘약속된 탈선의 땅’이라 불리는 이 지역에는 그 뒤에도 끈질기게 이단이 창궐한다. 도시에서 쫓긴 이단들은 이곳 산골 농민세계로 퇴각해 생존의 땅을 얻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이단자들을 좇아 이곳에 새로운 교구를 신설하고 재판을 통한 이단척결공세를 퍼붓는다. 파

김장하는 동생네에 오면서 내가 들고 온 책은 요즘 필요 때문에 들춰보는 책인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바다출판사, 2004)이다. 아예 도서관에서 원서까지 대출했는데, 펭귄북 사이즈의 허름한 포켓북이어서 좀 의외였다. 내가 주의해서 읽은 건 4장 '왜 살인자가 되었는가'와 6장 '범죄 유형의 두 얼굴'이다. 시간이 되는 만큼 읽은 내용에 대해서 정리해둘 작정이다.

 

 

 

 

먼저, '왜 살인자가 되었는가?', 라고 제목이 붙어있지만 원서의 장제목은 'Childhoods of Violence'이다. '폭력에 물든 어린시절'쯤 될까? 살인범들의 유년기가 대개 가정폭력으로 얼룩져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국역본은 이를 효과적으로 의역하고 있다(절제목들 또한 국역본에만 있는 것이다)

저자 로버트 레슬러가 던지는 질문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란 물음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지? 바로 고갱의 그림(1897) 제목이기도 하다(그림은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인간의 생로병사를 보여준다). "고갱의 유명한 작품에 나오는 이 세 가지 큰 질문은 내가 1970년 후반부터 살인범들을 만나보면서 면담 때마다 주제로 삼았던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이들이 살인마가 된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내서 살인범의 심리를 이해하고 싶었다."(137쪽)

레슬러는 FBI의 '범죄인 성격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복역중인(번역본엔 '북역 중인'으로 돼 있다. 북역?) 살인범 36명과 만나서 면접조사를 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작성된 결과보고서는 살인범에 관한 연구로는 유례가 없으면서도 가장 방대하고 치밀하며 완성도 높은 연구라고 한다. 그가 살인자들의 성장환경과 성격에 대해 지적하는 대목들은 이런 '데이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르게(이 상식은 이후에 물론 많이 교정됐지만) 대부분의 살인범들은 가난한 결손가정 출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능의 경우에도 "연구 대상이었던 36명중 IQ가 90미만인 사람이 7명 있기는 했지만 나머지는 정상 범주에 들었으며, 그중 11명은 120이 넘었다." 하지만 중요한 공통점. "겉보기에는 정상적일지 몰라도 이 가정들은 사실상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연구 대상 중 절반은 직계가족 중에 정신질환자가 있었고, 부모가 범죄행위에 연루된 적이 있는 경우도 절반이 넘었다. 가족 중에 술이나 약물을 남용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는 거의 70퍼센트에 달했다. 게다가 모두 어린시절에 심각한 정서적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성인이 되어서는 이들 모두가 정신과 전문의들이 '성불능자'라고 부르는, 다른 성인과 교감하며 성숙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139쪽)

'다른 성인과 교감하며 성숙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 '성숙한 관계'란 물론 '성적인 관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다른 성인과 정상적인 성관계를 갖지 못하는 '성불능자(sexually dysfunctional adults)'는 살인자들이 성에 대한 극도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과 연관해서 주의를 요한다.

이어서 다루어지는 건 가정환경이다. 레슬러는 두 단계로 나누는데, 상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여러 연구에 따르면 출생후 6-7세까지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어른은 어머니이며, 이 시기에 아이는 사랑이 무엇인지 배운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한 살인범들의 경우 어머니와의 관계는 한결같이 차갑고 냉담하며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아이들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 바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흔히 말하는 인격형성기의 '애정겹핍'이 되겠다. 유아기때의 애착관계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애정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경우에 아이의 사회적 인격 형성은 치명적인 장애를 수반하게 되며 그 대가는 단지 당사자와 가족에게만 지불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결국 남은 평생 동안 그 결핍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가 무고한 생명을 여럿 앗아갔으며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영영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남겼으므로, 사회 역시 고통받게 된 셈이다."(139쪽)  

중요한 것은 정서적 학대가 신체적 학대 못지 않게 아이에게 치명적이며 폭력적인 성향을 자극한다는 사실이다.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는 때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는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아이를 방치하지 말라'가 아니겠는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자신의 아들들 네 명을 모두 제 손으로 양육하지 않았으며 사생아 스메르자코프는 아예 하인으로 부려먹는다. 그가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그가 한번 죽은 것은 그의 목숨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0-6세 아동의 최대 과제는 사회화다. 다시 말해 아이들에게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과의 적절한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하지만 자라서 살인을 저지르는 아이들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주로 어머니가 소홀한 탓이지만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한다."(140쪽) 

 

 

 

 

물론 부모가 무관심하더라도 다른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이 정성껏 돌봐준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카라마조프의 세 형제, 드미트리와 이반, 그리고 알료샤(알렉세이)가 부모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친인척의 도움으로 (비록 알료샤를 제외하곤 아버지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사회적인 인격으로 성장하지는 않은 것도 한 가지 예이다. 하지만, 그런 이차 보호망마저 부재하다면 아이는 자신의 존재의의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즉 "가족에 대한 아이의 애착은 훗날 아이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인정하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살인범들이 자란 가정에서는 부모의 냉담함을 상쇄시켜줄 수도 있는 형제자매나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의 관계 또한 거의 전무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이 아이들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가장 가까운 가족에 대한 애착을 발전시킬 수도 없는 상태에서 점점 더 외롭고 고독해져갔다."(142쪽)

어머니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은 물론 아버지이다. "잠재적인 살인범들은 8-12세 사이의 시기에 외톨이로 굳어지며, 고립은 그들의 정신적 발달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들을 외톨이로 만드는 여러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빈자리다... (물론) 아버지 없이 자란 소년이라고 해도 반사회적 이상성격자로 자라나는 이른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반사회적 이상성격자로 자란 사람들의 경우 8-12세 사이의 기간이 결정적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연구를 하다 보면 바로 이 시기, 다시 말해 아버지 역할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아이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오게 될 때가 많다."(1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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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1-24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이어요 방가워서...

로쟈 2006-11-2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제가 좀 늦은 편이죠. 도서관 책이 항상 대출중인 걸 보면.^^
 

김장을 하는 날이다. 예년 같으면 그냥 얻어다 먹었지만 어머니가 60포기나 되는 김장을 담그시기로 해서 며느리들을 모두 소집했고, 제일 '한가한' 나에겐 잔심부름과 애들 보는 역이 맡겨졌지만 무료한 탓에 페이퍼나 올리고 있다. 계간 <문학동네>(겨울호)의 젊은 작가 특집은 김애란을 다루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북데일리의 기사를 옮겨놓는다(고아라 기자의 기사들이 자주 눈에 띄는군). 그러고 보면 김애란씨에 대해서는 나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듯하다. 

 

 

 

 

 

 

 

 

 

 

 북데일리(06. 11. 24) 김애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출판계와 저널리즘에 이르는 오늘날 문단의 불문율 중 하나는 ‘김애란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다. 진보적 리얼리스트들에서부터 전위적 모더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젠체하는 비평가들에서부터 자유분방한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작가론 ‘소녀는 스피노자를 읽는다’)에서 던진 질문이다.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그가 제시하는 ‘우리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그녀가 ‘명랑’하기 때문이다. 명랑하다는 건 상처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김애란의 인물들은 IMF 현실, 서울 문화의 은근한 배타성, 가족의 결핍 등과 마주친다. 그들은 상처를 받지 않을 만큼, 혹은 상처에 맞서 싸울 만큼 강하지 못하다. 조력해줄 키다리 아저씨도 없다. 국가도, 이념도, 가족도 무력하다. 하지만 고독한 개인의 안간힘으로 상처를 이겨낸다. 그 마주침의 기록이 핍진하고 그 안간힘이 애틋하다.

둘째. 김애란의 중성(中性)성.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의 성별에 의지하지 않는다. 마주침과 견뎌냄의 과정에 어떤 성별 논리도 개입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특별히 겪게 되는 마주침은 없다. 그들의 슬픔, 그 슬픔의 처리과정도 중성적이다. 이 중성성이 그녀의 명랑성을 만든다.

신형철의 열렬한 ‘김애란 애찬론’은, 그녀의 작품들을 공간, 소통, 가족, 욕망의 측면에서 조망한 평론 내내 이어진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김애란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 이가, 비단 신형철 한 명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울대 백낙청 명예교수는 계간 ‘창비’ 봄호에서 “최근 문학현장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을 준 신인작가”로 박민규와 김애란을 함께 언급한 바 있다. 솔출판사 임우기 대표는 계간 ‘유역’ 창간호에서 그녀의 소설을 “영성적 문학의 소중한 싹”이라고 표현했다.

작년 8월 김애란이 창작집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순원문학상 예심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 몇몇 심사위원이 “규정을 바꾸라”며 반기를 들고 나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작년 11월 그녀는 ‘달려라, 아비’로 역대 최연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애란의 첫 창작집 <달려라, 아비>(창비. 2005)는 출간 한 달 만에 판매부수 1만부를 넘기며, 한동안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일반 독자들 역시 그녀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 그렇다면 정말, 신형철의 말대로 모든 사람이 김애란을 사랑하는 걸까. 물론 아니다. 그녀의 소설에 대해 실망의 목소리를 감추지 않는 독자도 있다(*우리 동네 분들이다!).

“하도 칭찬일색이기에 주문해서 읽은 책이건만 너무 실망. 자기 독백에 곁들여진 화려한 말솜씨뿐 아무것도 없다. 스토리도, 줄거리도 없다. 유머도 재치도 없다.” (알라딘 ‘기억의 집’)

“김애란의 소설들은 트렌디 드라마를 닮아 있다. 밝고, 새롭고, 경쾌하지만, 현실성이 없다. 울고 짜고 배신과 복수가 판을 치는 멜로드라마에 식상한 사람에게 트렌디 드라마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두어 편 보고 나면 금세 질리고 만다.” (알라딘 ‘urblue’)

김애란은 이제 막 스타트를 끊은 작가다. 그녀를 사랑하고, 하지 않고를 결정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다는 말이다. 선택은 그녀의 장편이 나온 후로 미뤄둬도 그리 늦은 일은 아니지 싶다. 개인적인 바람을 한 가지 덧붙이자면,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 날까지 ‘달려라, 김애란’.

06. 11. 24.

P.S. 개인적으론 김애란의 일부 소설들을 좋아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소설들도 없지 않다. 내가 주목하는 건 단순하게도 '삶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그 점에서 그녀는 얼마간 신뢰를 준다. 그녀의 본격적인 소설(장편소설)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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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2006-11-24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틈틈이 로쟈님이 올리신 글들을 읽고 있어요. 그런데 어디까지가 기사문이고 어디까지가 로쟈님 글인지 모르겠어요. 저만 그런가요? 색깔이나 구획선으로 구별해주시면 로쟈님 생각을 빨리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ㅅ^

로쟈 2006-11-2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소 불편하시겠네요.^^ 인용문에 코멘트를 집어넣을 때는 언제난 *표시를 합니다. 그밖에 인용되는 기사에 제가 끼여드는 경우는 없구요, 강조표시만 해둡니다. 인용문이 길 경우에 다소 혼동의 소지가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색깔은 부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취향상 많이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기인 2006-11-2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또 퍼갑니다. 신형철 선배가 정말 주목받고 있는 평론가인가 보네요. ㅎ :)

로쟈 2006-11-2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히 발군의 기량을 뽑내고 있습니다. 첫평론집이 나오면 보다 명확해지겠죠...

sommer 2006-11-25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를 사랑하는' 소녀에 관한 글을 읽다가, 그리고 그녀의 자전소설을 읽다가 문득 불능이 아닌 '부재'를 '상상'으로 대체하는 데서 그녀가 명랑으로 인도되는 건 아닐까 긁적이게 되더군요...

로쟈 2006-11-2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잡지를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긁적거리시는 김에 끄적거리시면 '김애란론'이 되지요.^^
 

러시아 관련 국내기사는 대부분 (1)북핵 (2)에너지 (3)테러에 집중돼 있는 듯하다. 우리의 관심과 맞닿아 있는 탓이겠다(하긴 어제는 러시아의 곰들이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지구 온난화가 이유라고). 예전에 러시아의 국영 에너지기업 '가즈프롬'에 관한 페이퍼를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오마이뉴스에 '러시아 에너지'의 근황에 관한 기사에 올라와 있어서 옮겨놓는다. 같이 읽어볼 만한 관련서들이 많지는 않은데, 요는 에너지 주권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러시아 제국'은 무엇보다도 '에너지 제국'이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06. 11. 23) 에너지의 힘... 러시아가 돌아왔다

러시아가 돌아왔다. 과거의 '핵'을 버리고 신무기인 '에너지'로 무장했다. 소련 붕괴 이후 '종이 호랑이' 신세로 전락했던 과거의 러시아는 어디를 둘러봐도 없다. 소련이 붕괴했을 때 유럽연합은 언젠가 러시아가 다시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올초 러시아는 유럽연합에 잊을 수 없는 새해 선물(?)을 선사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가격협상 논쟁을 벌이다 급기야 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공급을 일시 중단했다. 가스중단은 우크라이나에 한정되어 우려했던 '비상사태'는 없었지만, 수송관이 우크라이나를 지나 유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볼 때 그 의미는 분명했다.

이후 유럽연합은 해결해야 할 최선의 문제로 '에너지 독립'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다할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게 되자, 유럽연합은 에너지 부문의 자유시장 관계를 규정하는 '에너지 헌장' 문제를 부각시켜 러시아에 대응했다. 유럽연합은 러시아 이외의 국가에 대한 가스 수송망 자유 이용을 위한 국제 에너지 헌장의 비준을 요구했다(러시아는 1994년에 서명은 했지만, 현재까지 비준을 하고 있지 않다).

러시아 "EU는 이중잣대를 버려라"

러시아 측 입장은 간단하다. 러시아에게는 불공정하고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비준일 뿐이다, 따라서 '유럽연합이 러시아에 진출하면 투자와 국제화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러시아가 유럽연합에 진출하면 러시아 독점기업의 시장 확대'라는 이중잣대를 버리고 러시아에게도 공정한 기회와 게임의 룰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한 예로 최근 러시아 국영가스기업 가즈프롬은 영국의 에너지 회사 센트리카(Centrica)를 인수-합병하려다 영국정부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지난 22일 러시아 외무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는 "러시아는 에너지 헌장에 비준하지 않겠다, 이에 대해 이미 러시아는 여러 차례 밝혔다"고 말했다. 러시아에게 가스는 '피'와 같은, 가스 수송관은 '핏줄'과도 같은 존재이다.

한편, 세계 시가총액 톱10에 진입한 러시아 에너지 독점기업 '가즈프롬'은 인수-합병과 투자에 집중하며 에너지 분야와 가스 파이프라인 확대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15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가즈프롬의 올해 9월까지의 순이익은 작년보다 무려 76.6%나 증가한 약 2360억 루블(약 90억달러)이라고 한다.



러시아 '가즈프롬' 제국 탄생

가즈프롬은 유럽연합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다. 유럽연합에 약 25%의 가스(러시아 가스 수출의 약 67%)를 수출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가스분쟁 사태의 중심에 서있었다. 가즈프롬의 경영진은 모두 푸틴의 최측근들이고 회사의 전략과 비전은 러시아 에너지 정책을 대변한다.

석유와는 달리 수송관을 통해 들어오는 가스는 유럽연합을 러시아에 더욱 더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독일은 가즈프롬과 발트해를 통해 독일로 들어오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미래의 안전한 가스 보급망을 확보했고 프랑스는 제2의 가스공급자인 알제리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원자력 에너지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유럽연합을 이끌어가는 프랑스와 독일의 이런 발빠른 전략과 책략은 러시아 가스에 의존도가 높은 동유럽과 발틱국가들에게 위기와 배신감을 가져다 주고 있다. 독일과 러시아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폴란드의 입장을 대변하듯, 폴란드 국방부 장관은 러-독 가스관 사업(Nord Stream)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불가침 조약)이라고 비꼬아 불렀다.



독-러 공동가스관 사업 = 독-소 불가침조약?

한편, 오는 24일 유럽연합 25개 회원국들은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유럽연합·러시아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전략적 파트너십' 협약을 맺을 계획이다. 그런데 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폴란드가 자국의 육류 제품에 대한 러시아의 금수조치를 이유로 유럽연합·러시아 정상회담에 보이콧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럽연합의 규정은 회원국 전원의 동의하에만 러시아와 새 협약을 체결할 수가 있다.

따라서 유럽연합은 폴란드를 설득하는 입장이고 의견 차이로 대립하는 모습마저 나타나고 있다. 유럽연합은 러시아와의 에너지 분야를 포함한 전략적 파트너십이 적극 필요한 상황에서 폴란드의 돌출 행위가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편 폴란드의 이번 행동은 유럽연합내에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러시아에 압박을 가하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오히려 유럽연합의 분열과 대립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22일 대통령 보좌관 세르게이 야스트르젬브스키는 기자회견을 통해 폴란드의 딴지를 이렇게 비꼬아 말했다. "유럽연합은 자신의 문제에 봉착해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닌 러시아로서는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유럽연합은 최근 러시아의 '여기자 살해 사건'과 영국에서의 '전 KGB요원의 독살사건'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테러를 자행한다고 러시아를 비난하며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오히려 유럽연합의 이중잣대를 비난하고 있다.

중요한 건 유럽연합의 어떤 공세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에너지 국유화 정책과 강한 러시아 건설은 전세계에 '러시아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위협적이고 지능적인 무기를 가지고 돌아온 러시아 제국은 부활하고 있다.(정인고 기자)

06.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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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판>이 5주년 기념호를 냈다(어느덧 '중견' 잡지의 대열에 들어서는 듯하다). 2006년 겨울호가 그것이다(계간지 겨울호들이 계절을 더욱 재촉하는 듯하다). 자체 소개에 따르면, "전위적이며 독창적인 작업을 실험하는 작가들의 활동을 지지해온 계간 <문학 판>의 창간 5주년을 맞이했다. 2001년 겨울, 편집인 이인성은 '문학의 상업화에 맞선다는 기본 취지 아래 대중적 감각과 지성적 이해를 결합'시키며, '평단에서 소외된 신인작가의 전위적 작업을 부각'시키겠다는 포부로 창간 의의를 밝힌 바 있다."

"이번 호 특집은 새로운 문학 세대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자리로 꾸몄다. 김진수, 손정수 두 평론가가 각각 시와 소설 분야의 새로운 세대의 문학에 대해 논했다. 시인 김민정, 진은영, 황병승, 김태형, 소설가 구경미, 편혜영, 김중혁, 김애란, 평론가 허윤진, 신형철 등 각 장르의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열 명의 작가들이 각자의 글쓰기의 근거에 대해 발언했다."고 돼 있다. 이에 대한 최재봉 기자의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1. 24) 문단 막내들에게 듣는 ‘문학이란?’

“말하자면 어떤 그리움이나 상실감이 없는 채로, 부정해야 할 대상도 없고 증언하고 싶은 시절도 없이, 고백해야 할 내면이나 문학적 책임의식도 없는 20세기 막바지 세대가 21세기에 문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소설가 편혜영(34)씨가 <문학/판> 겨울호에 쓴 ‘교본의 시간’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전통적으로 문학 창작의 동기로 꼽히는 요소들을 두루 나열하면서 그 어느 것 하나도 제 몫이 아닌 채로 문학을 해야 하는 세대로서의 자괴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글은 <문학/판>이 창간 5주년을 맞아 기획한 특집 ‘21세기 문학세대’에 포함되었다.

이 기획에는 시인 진은영 김태형 김민정 황병승씨와 소설가 구경미 편혜영 김중혁 김애란씨, 그리고 평론가 허윤진 신형철씨 등 10명이 참여했다. ‘우리는 문학으로 무엇을 하는가’라는 편집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의 이 특집에 참여한 이들은 1980년생인 김애란 허윤진씨를 제하고는 모두 1970년대생이다. 문단의 막내들이라 할 만하다.

대부분이 도시 태생인 이들에게는 “오히려 알 수 없는 전원과 자연의 풍경을 보면 두려움이 느껴”지며 “회색 콘크리트가 기왓장이나 대청마루처럼, 전봇대가 마을 앞의 수령 깊은 나무처럼 느껴진다.”(편혜영) ‘전통 서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이 젊은 시인들은 종종 ‘미래파’라는 저널리스틱한 이름으로 뭉뚱그려지기도 하는데, 그 대표자 격인 황병승씨가 “나는 미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흥미롭다. 미래파는 그 이름을 창안한 이의 의도와는 달리 자주 비판과 공격에 노출된다. 자폐적 상상력과 폭력적인 이미지, 대중문화적 기호의 범람이 주로 빌미를 제공한다. 황병승씨 글의 마지막은 그를 의식한 것 같다: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배척된 채로/배척된 채로”

비장한 결의와 뻔뻔한(?) 각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은영씨의 말을 들어보자. “우린 다소 지겹다. 지나치게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 빤하고 몇 가지 문학적 수사에만 능숙하다. 우린 너무 쉽다. 결코 난해하지 않다. 몇몇 인디밴드 음악이나 일본만화, 퀴어문화 등등 특정한 문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사실은 누군가를 감염시키는 데 실패했다.(…)우리는 복화술사가 아니라 특정문화를 소비하는 부류의 또렷한 입으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른다. 무성한 소문과 달리 아직 우리는 새로운 문학으로 탄생하기 이전이다.”

아마도 21세기에 문학에 종사하는 이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주창한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일 것이다. 자기 안에 갇혀 사회 전체의 긴급한 현안에 대응하지 못하는 지금의 문학은 본래적 의미의 문학에서 멀어졌으므로 지금 문학은 없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주장이다. 이제 막 문학을 시작하는 이들을 향해 누군가는 문학이 진작 끝났노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낭패가! 신형철씨의 화려한 글 ‘몰락의 에티카­: 21세기 문학 사용법’은 가라타니의 선언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

“거인으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본래 난쟁이였고, 더 작게는 ‘짱돌’이었으며, 더욱더 작게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 가장 ‘협소한’ 영역 안에서 가장 ‘깊게’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문학이라 하면 어떨까.(…)넓은 총체성이 아니라 깊은 총체성 말이다.”

“다른 총체성이 있고 다른 윤리가 있다”고 신형철씨는 주장한다. 그 새로운 총체성의 이름은 ‘파편으로서의 총체성’이라고. “21세기라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면서 여전히 아름다움과 상상력에 대한 믿음을 피력하는 김중혁씨의 글은 평론가의 주장과 다르면서도 같다.(최재봉 기자)

06. 11. 24.

P.S. 굳이 분류하자면 '20세기 문학독자'로서 내가 동감하는 견해는 시인 진은영씨의 것이다. 일곱 가지 항목으로 규정하면, '21세기 문학'은 (1)다소 지겹다. (2)지나치게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 빤하고 (3)몇 가지 문학적 수사에만 능숙하다. (4)너무 쉽다. (5)결코 난해하지 않다. (6)몇몇 인디밴드 음악이나 일본만화, 퀴어문화 등등 특정한 문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7)사실은 누군가를 감염시키는 데 실패했다.

"거인으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건 '21세기 문학세대'의 활기찬(하지만 수세적인) 상상력이다. '본래'라는 어사가 굳이 동원될 필요가 있을까? 지겹고 빤하고 쉽고 그래서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 그 '바닥'에서 뭔가 기대해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몰락의 에티카'는 몰락의 승인을 전제로 작동하는 윤리학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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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어. 저 중 진은영 시인이 '우리'라고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닐텐데. (물론 긍정적 의미로). 진은영 시인 또한,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양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읽히는 데요. 구해서 읽어봐야겠네요. 퍼갑니다. :)

로쟈 2006-11-2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기사상으론 '우리', 혹은 '우리세대 문학'에 대한 고백으로 읽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