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데일리에 들어갔다가 '알라딘서점 조유식 대표'란 타이틀이 눈에 띄어 클릭해보았다. '명사 추천도서' 연재의 한 꼭지인데, '명사'가 조유식 대표이고, 그의 '추천도서'가 <바람의 그림자>(문학과지성사, 2005)이다(이 소설은 소설가 후배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알라딘서재를 무료로 임대해주고 계신 '대표(업자)'님에게 사의를 표한다는 의미에서 기사를 옮겨온다. 알라딘의 직원들은 쑥쓰러워서 못할 테니까.

북데일리(06. 12. 08) 조유식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조유식 대표는 자사 플래티넘 회원이다. 그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홍보용으로 출판사에서 보내오는 책은 서평용으로 직원들이 읽고, 자신은 책을 구입해서 본다”고 밝힌 바 있다. 책 구입비로 보통 월 15만원 정도를 쓴단다(*오타가 아닌가 해서 한참 들여다봤다. 150만원이 아니라 15만원이라고? 나도 '플래티넘 회원'이긴 한데, 그래도 나보다 구입비가 적다는 것은 의외이다. '직원'에게는 90% 할인해준다면 모를까).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효형출판. 2003)는 최근 조 대표의 도서 구입 목록에 이름을 올린 책. 30여 년간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와 방송국에서 정치, 경제부 기자로 일한 저자가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099일간에 걸친 대장정을 기록하고 있다. 특기할 점은 이 여행이 모두 도보(徒步)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올리비에는 1년에 3개월씩, 네 번에 걸쳐 무려 12,000km를 걸었다고 한다(*이 책이 '시리즈'인 줄은 이번에 알았다. 얼마나 걸었으면!).

조 대표는 최근 알라딘을 통해, 웹 2.0에 기반을 둔 블로그 수익모델 ‘생스 투 블로거(TTB)’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TTB는 누리꾼들이 자신의 블로그에 쓴 책, 음반, DVD 리뷰가 알라딘에도 게시되고, 고객이 그 리뷰를 읽고 상품을 사면 블로거에게 판매가의 3%, 구매자에게 1%의 수익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그러니까 알라딘 서재가 무료라고는 하지만, 외부 블로거에 비해 TTB의 2%가 덜 배분되는 걸로 보아 나름대로 그에 대한 '대가'는 지불하고 있는 셈이겠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서점도 진화된 운영을 하고 있지만 정작 조 대표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시대를 초월한 고전들인 듯하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를,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꼽았다(*음, 이건 마음에 든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문학과지성사. 2005)는 조 대표가 독자들에게 권하는 책. 배경은 스페인 내전 직후의 바르셀로나. 주인공 소년이 우연히 갖게 된 한 권의 책과 그 작가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사랑과 증오, 복수와 배신, 부재와 상실 등을 이야기하는 장편소설이다. 책은 2002년 스페인의 ‘최고의 소설’, 2004년 프랑스의 작가, 비평가, 출판업자들로 구성된 심의회에서 그해 출판된 ‘최고의 외국 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고아라 기자)

06. 12. 09.

 

 

 

 

P.S. 하여, 정리하자면 우리의 대표님은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바람의 그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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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2-09 12:4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재밌군요.

끼사스 2006-12-09 14:07   좋아요 0 | URL
<바람의 그림자>는, 제겐, 너무 반듯해서(≒너무 잘 써서) 별로 인상에 안 남는 책이었습니다만…. 근데 '책 구입비 15만원'을 정색하고 기사 리드에 올린 건 로쟈님 만큼이나 제게도 생뚱맞게 느껴지네요. ㅎㅎ

로쟈 2006-12-09 22:11   좋아요 0 | URL
그게 너무 잘 생겨도 정이 안 간다는 얘기가 있으니까요...

맑음 2006-12-09 22:12   좋아요 0 | URL
발행인이나 편집자, 서점주인들은 일로써 읽는 책 말고 스스로 즐거워 읽는 책이 한 달에 몇 권이나 될까 평소 궁금했었는데, 재미있는 기사네요.^ㅅ^ 로쟈님, 한 달에 15만원이면 적은 건 가요? 전 꼼꼼하게 책 한 권 읽는 데 3일 거려요. 그럼 일주일에 2권, 한달이면 8권. 책 한 권이 이만원 안팎이면 8권에 15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오는군요. 전 가난해서 도서관에서 대부분 대출해 읽지만요.^^; 언제더라, 조유식 대표님 문장 하나 하나 음미하면서 정독형이라는 글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로쟈 2006-12-09 22:5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정독할 수 있는 책은 몇 권 되지 않지요. 하지만 모든 책을 정독할 필요는 없을 뿐더러 사실 모든 책을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달에 15만원은 많은 액수가 아니지요. 최소한 수입의 10%는 돼야 하지 않을까요?..

맑음 2006-12-10 00:38   좋아요 0 | URL
책 뿐만 아니라 영화, 미술관, 공연 등 다른 문화 매체에 응수하는 것 까지 포함해서 전 수입의 10%p라고 보고 있습니다.^^ 가계부 작성해보면 10%p도 꽤 클 껄요. 일로써 읽는 책(관련 분야나 학습으로써 책읽기)말고 순수하게 "아~ 책이 고프다."란 강한 호기심으로 읽는 책은 한 달에 몇 권 되세요? 같은 직장에 동료들과 비교해서요. 이건 순전히 저의 호기심이 어린 질문이니, 실례라면 말씀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전 발행인이나 편집자들은 자기네 출판사에서 내는 책 외엔(일로써 책 읽기), 거의 안 읽을 것 같은데 로쟈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로쟈 2006-12-10 01:19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에 의무로 읽어야 하는 책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에도 상당 부분 자발적인 의지를 포함하고 있어서(제가 좀 게을러서 억지로 무슨 일을 하진 않습니다) '강한 호기심으로 읽는 책'이 구별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많은 책을 '보고' 몇 권을 '읽습니다'. 사실 읽고 떠들거나 끄적거리는 게 직업이기도 해서 '일'과 분리하기가 어렵네요. 단, 교양과학서들을 읽을 때는 '휴식'이란 느낌을 좀더 많이 갖습니다.^^

맑음 2006-12-11 19:35   좋아요 0 | URL
그럼 로쟈님에게 다른 장르의 책들은 늘 구매대상이라 보면 되고 "교양과학서"들이 어떻냐에 따라 구입할 책목록에 많이 올라올 수도 적게 올라올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답변 감사드립니다.^ㅅ^

로쟈 2006-12-11 21:49   좋아요 0 | URL
그게 저로선 '교양과학서'를 쓸 일이 없다는 생각 때문인 거 같습니다. 구경하고 경탄하면 되는 세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할까요...
 

'오래된 새책'이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든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요즘 부쩍 과거에 출간됐던 책들의 재판, 개정판, 수정판 등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이다. '오래된 새책'이란 표현은 물론 '오래된 미래'를 떠올려주기도 하지만 종종 들르는 '북데일리'의 카테고리였기도 하다. '세계의 책'과 함께 나란히 빌어온 셈이 됐는데, 정작 북데일리에서는 사이트를 개편하면서 이들 카테고리를 '명퇴'시킨 듯하다. 그럼 '오래된 새책'은 '나대로의' 카테고리에서 '나만의' 카테고리로 지위가 격상되는 건가?

가장 먼저 다룰 책은 <번역의 윤리>를 구하러 구내서점에 들렀다가 발견한 레이코프와 존슨의 '출세작' <삶으로서의 은유>(서광사, 2006) 수정판이다. '수정판'이란 표현을 썼지만, 흔히 '개정판'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지난 95년에 나온 국역본 초판에 비해서 표지가 훨씬 화사해졌고 하드카바도 장정도 바뀌었다. 내용이야 그대로 보전된 부분이 더 많겠지만 형식은 '대폭' 수정된 것이라 하겠다.   

 

 

 

 

레이코프(/존슨)은 흔히 촘스키언어학에 반기를 든 '인지언어학'의 대표적인 학자들로 지목된다. 그들의 책을 다 읽어볼 기회는 없었지만 우연찮게도 다 사모아둔 처지인지라 이 '수정본'에도 관심이 간다. 개인적으로 <도덕의 정치>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같은 정치평론쪽 책들을 나올 때마다 소개한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도 비껴가지는 못하겠다.  

Cover Image

사실 이 책과의 인연은 국역본이 나오기 전에 원저 'Metaphors we live by'(1980)를 사둔 시점으로 올라간다(왼쪽 표지). 제목을 직역하면 '우리가 달고 사는 은유들' 정도 될까? 대학가 서점에서 마스터본으로 샀던 듯한데 대학원에서 문체론 강의를 들을 때 부분적으로 참조했던 기억이 있다(기말 리포트를 쓰면서는 참조하지 않았지만). 국역본은 그 이후에 출간됐다. 찾아보니까 수정판은 2003년에 출간됐다(오른쪽 표지). 약간 증면이 됐지만 대차는 아니고 본문의 사례들에 어떤 변화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지난번 국역본이 절판된 상태인지라 새로 나온 책에 대해선 반가워할 이유가 충분하겠다. 

단, 이 페이퍼에 혹 자극을 받아서(내가 '약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탓에) 책을 사보시려는 분은 '삶으로서의 은유'라는 다소 '철학적인' 제목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언어학' 책이라는 점을 유념하면 되겠다. 참고삼아, 목차와 제1장의 원문을 옮겨놓는다. 그리고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자세히 얘기되는 레이코프의 '프레임론'을 응용하고 있는 최근의 칼럼기사 하나도 같이. 내가 붙인다면 '이문열은 생각하지마'가 칼럼의 주제이다.  

Preface
Acknowledgments
1. Concepts We Live Bye
2. The Systematicity of Metaphorical Concepts
3. Metaphorical Systematicity: Highlighting and Hiding
4. Orientational Metaphors
5. Metaphor and Cultural Coherence
6. Ontological Metaphors
7. Personification
8. Metonymy
9. Challenges to Metaphorical Coherence
10. Some Further Examples
11. The Partial Nature of Metaphorical Structuring
12. How Is Our Conceptual System Grounded?
13. The Grounding of Structural Metaphors
14. Causation: Partly Emergent and Partly Metaphorical
15. The Coherent Structuring of Experience
16. Metaphorical Coherence
17. Complex Coherences across Metaphors
18. Some Consequences for Theories of Conceptual Structure
19. Definition and Understanding
20. How Metaphor Can Give Meaning to Form
21. New Meaning
22. The Creation of Similarity
23. Metaphor, Truth, and Action
24. Truth
25. The Myths of Objectivism and Subjectivism
26. The Myth of Objectivism in Western Philosophy and Linguistics
27. How Metaphor Reveals the Limitations of the Myth of Objectivism
28. Some Inadequacies of the Myth of Subjectivism
29. The Experientialist Alternative: Giving New Meaning to the Old Myths
30. Understanding
Afterword
References  

CONCEPTS WE LIVE BY

Metaphor is for most people device of the poetic imagination and the rhetorical flourish--a matter of extraordinary rather than ordinary language. Moreover, metaphor is typically viewed as characteristic of language alone, a matter of words rather than thought or action. For this reason, most people think they can get along perfectly well without metaphor. We have found,on the contrary, that metaphor is pervasive in everyday life, not just in language but in thought and action. Our ordinary conceptual system, in terms of which we both think and act, is fundamentally metaphorical in nature.

The concepts that govern our thought are not just matters of the intellect. They also govern our everyday functioning, down to the most mundane details. Our concepts structure what we perceive, how we get around in the world, and how we relate to other people. Our conceptual system thus plays a central role in defining our everyday realities. If we are right in suggesting that our conceptual system is largely metaphorical, then the way we thinks what we experience, and what we do every day is very much a matter of metaphor.

But our conceptual system is not something we are normally aware of. in most of the little things we do every day, we simply think and act more or less automatically along certain lines. Just what these lines are is by no means obvious. One way to find out is by looking at language. Since communication is based on the same conceptual system that we use in thinking and acting, language is an important source of evidence for what that system is like.

Primarily on the basis of linguistic evidence, we have found that most of our ordinary conceptual system is metaphorical in nature. And we have found a way to begin to identify in detail just what the metaphors are halt structure how we perceive, how we think, and what we do.

To give some idea of what it could mean for a concept to be metaphorical and for such a concept to structure an everyday activity, let us start with the concept ARGUMENT and the conceptual metaphor ARGUMENT IS WAR. This metaphor is reflected in our everyday language by a wide variety of expressions:

ARGUMENT IS WAR

Your claims are indefensible.

He attacked every weak point in my argument.

His criticisms were right on target.

I demolished his argument.

I've never won an argument with him.


you disagree? Okay, shoot!

If you use that strategy, he'll wipe you out.

He shot down all of my arguments.

It is important to see that we don't just talk about arguments in terms of

It is important to see that we don't just talk about arguments in terms of war. We can actually win or lose arguments. We see the person we are arguing with as an opponent. We attack his positions and we defend our own. We gain and lose ground. We plan and use strategies. If we find a position indefensible, we can abandon it and take a new line of attack. Many of the things we do in arguing are partially structured by the concept of war. Though there is no physical battle, there is a verbal battle, and the structure of an argument--attack, defense, counter-attack, etc.---reflects this. It is in this sense that the ARGUMENT IS WAR metaphor is one that we live by in this culture; its structures the actions we perform in arguing. Try to imagine a culture where arguments are not viewed in terms of war, where no one wins or loses, where there is no sense of attacking or defending, gaining or losing ground. Imagine a culture where an argument is viewed as a dance, the participants are seen as performers, and the goal is to perform in a balanced and aesthetically pleasing way. In such a culture, people would view arguments differently, experience them differently, carry them out differently, and talk about them differently. But we would probably not view them as arguing at all: they would simply be doing something different. It would seem strange even to call what they were doing "arguing." In perhaps the most neutral way of describing this difference between their culture and ours would be to say that we have a discourse form structured in terms of battle and they have one structured in terms of dance. This is an example of what it means for a metaphorical concept, namely, ARGUMENT IS WAR, to structure (at least in part) what we do and how we understand what we are doing when we argue. The essence of metaphor is understanding and experiencing one kind of thing in terms of another.. It is not that arguments are a subspecies of war. Arguments and wars are different kinds of things--verbal discourse and armed conflict--and the actions performed are different kinds of actions. But ARGUMENT is partially structured, understood, performed, and talked about in terms of WAR. The concept is metaphorically structured, the activity is metaphorically structured, and, consequently, the language is metaphorically structured.

Moreover, this is the ordinary way of having an argument and talking about one. The normal way for us to talk about attacking a position is to use the words "attack a position." Our conventional ways of talking about arguments presuppose a metaphor we are hardly ever conscious of. The metaphors not merely in the words we use--it is in our very concept of an argument. The language of argument is not poetic, fanciful, or rhetorical; it is literal. We talk about arguments that way because we conceive of them that way--and we act according to the way we conceive of things.

The most important claim we have made so far is that metaphor is not just a matter of language, that is, of mere words. We shall argue that, on the contrary, human thought processes are largely metaphorical. This is what we mean when we say that the human conceptual system is metaphorically structured and defined. Metaphors as linguistic expressions are possible precisely because there are metaphors in a person's conceptual system. Therefore, whenever in this book we speak of metaphors, such as ARGUMENT IS WAR,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metaphor means metaphorical concept.

한겨레(06. 12. 08) 정치언어의 은유와 상징적 폭력

‘구원, 해방 그리고 문제 해결’이라는 강연의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했다. 한달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 강연에서 언급한 ‘종말론’이 국내 언론에서 이미 문제가 되었고, 마침 한국의 정치 민주화 과정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책을 준비 중이었던 필자는 이문열씨의 강연에 궁금증이 한층 올라 있었다.

발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일종의 종말론적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예가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는 정권이 분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제국과 항쟁한 유대민족의 투쟁사가 수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한 무모한 전쟁이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로마제국은 오늘날의 미국을 은유하고 있다.

2006년 11월29일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행해진 이문열씨의 강연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우선 이씨는 정치학의 초보 문법마저 무시하고 있다. 현 정부의 분배정책을 비판하려 했다면 ‘사회민주주의’(social-democracy)라는 용어가 적절하다. 그런데 최저생계를 위협받는 사람에게 기초생활을 보장하고,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에게 보험금을 지원하는 복지국가를 만들자는 것이 바로 사회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이다. 이것을 종말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인가? 오늘날 유일한 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의 힘은 세계체제를 무대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축적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군사력을 통한 로마제국의 팽창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또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것이지, 무모하게 항쟁하다가 희생당하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지과학의 연구 성과를 통해서 보면, 보통사람들이 세상사를 이해하고 정치적 판단을 내릴 때는 일정한 언어적 프레임이 작동한다. 이러한 프레임은 일상적인 삶의 체험이나 정치를 표현하는 언어적 은유를 통해서 결정된다. 예컨대 한국전쟁을 경험한 사람은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이해하기 쉽다. 또 이라크를 ‘악의 국가’라고 표현하는 것은 미국의 대외전쟁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은유다. 이것은 언어적 고정관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개인들의 이성적 사고를 방해하는 요인이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것을 용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입장 차이를 정치문법의 무지와 혼동할 수는 없다. 또 무분별한 정치적 은유가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씨는 한국민을 향해 상징적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극심한 가치관의 혼동에 싸여 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표현하는 언어가 더욱 정교하고 세련되게 변화되어야 한다. 이제는 정말이지 한국 정치판에서 ‘빨갱이’니 ‘좌파’니 하는 해묵은 언어적 유희가 사라져야 한다. 우리 정치는 오랜 희생 끝에 민주화를 이루었다. 이제는 그 내용을 채워가는 과제가 남겨져 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비전은 언어로부터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 사용의 관습이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언어의 민주화가 절실히 필요하며, 이것이 오늘날 지식인의 책무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필가요, 지식인을 자처하는 그가 이러한 언어의 민주화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강연 내용이 이번에 출간한 소설의 내용이라고 하니 걱정이 앞선다. 그는 2300만부의 소설을 판매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닌가!(홍성민/동아대 정치학과 교수, 미 버클리대 방문학자)

06. 12.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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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신간들 가운데 가장 묵직한 책은 며칠전 소개한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안티쿠스)와 함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1914-1984) 등이 편집한 <사생활의 역사>(새물결, 2006)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두 권이 마저 나와서 전체 5권이 완간된 이 책은 올해 완간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함께 '사건'이라 할 만한, 새물결출판사의 역작이다.

 

 

 

지난 2002년에 나온 1,3,4권 중에서 나는 한권을 갖고 있는데 당장은 눈길이 닿지 않는다(출판사 할인판매시 30% 할인 가격으로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아동의 탄생>이나 <죽음 앞의 인간>이 아리에스의 대표작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제안으로 기획됐다는 <사생활의 역사>가 갖는 의의도 간과될 수는 없겠다. 책을 당장 곁에다 둘 형편은 아니어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사회학자 김종엽 교수의 글인데, 나름대로 의미가 없지 않은 건 (내 기억에) 필립 아리에스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 그의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한나래, 1994)에서였기 때문이다. 그게 어느덧 12년 전 이야기다. 결자해지 차원에서라도 아리에스에 관한 해설은 그의 몫으로 돌리는 게 낫겠다.  

경향신문(06. 12. 09) 公과 私 영역, 분리와 융합의 역사

‘사생활의 역사’는 어린이와 죽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역사학을 혁신한 필립 아리에스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아날학파의 노장 및 신진 모두의 역량이 투입돼 프랑스에서 1985년에 출간되었다. 모두 다섯 권으로 된 1권(로마제국~11세기)과 3권(르네상스~계몽주의), 4권(프랑스 혁명~1차 세계대전)이 2002년에 먼저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이때 각종 매체의 서평들은 부부의 침실과 귀족의 일기장과 집안 하녀들의 생활 같은 영역에 대한 핍진한 연구에 경이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고 의의는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번에 2권(중세~르네상스)과 5권(1차 세계대전~현대)이 나옴으로써 마침내 완역됐는데, 더 이상 사생활 속으로 역사적 시선을 투과시키는 것의 중요성과 의미를 해설할 필요는 없어진 듯하다. 먼저 번역된 ‘사생활의 역사’가 제법 널리 읽힌 데다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도 이 책과 같은 시도가 이미 꽤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생활의 역사’ 전체에 대한 논평보다는 이번에 새로 번역된 것들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에 두 책 중 2권보다 5권이 더 적합해 보인다. 2권을 읽으려는 독자는 이미 이전 번역을 읽고 그 결락 부분을 채우려는 독자일 것이고, 그런 독자에게 책의 의의를 논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이에 비해 5권은 이미 ‘사생활의 역사’를 읽어본 독자에게도 새로울 뿐 아니라 읽어본 적이 없는 독자가 ‘사생활의 역사’에 접근해 보려 할 때도 제일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독서의 쉽고도 좋은 길은 역시 자기가 속한 시대와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5권은 흔히 사생활이라 불릴 만한 것인 섹스와 자신의 육체에 대한 태도나 가족생활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변화와 제1,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대도시의 형성사가 다뤄진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생활의 역사가 친밀한 인간관계의 영역, 그리고 개인의 자기관계를 다루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런 역사를 다루기 위해서도 사생활의 영역을 규정하는 공·사의 분리선과 변동을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은 규모나 전개 양상 모든 면에서 인류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쟁은 개인의 사생활을 바꿀 뿐 아니라 군인의 참호 생활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사생활을 만들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사생활의 역사를 추구하는 한 전쟁에 대한 분석을 피할 수 없다. 같은 논리의 연장선에서 20세기에 대두한 집단수용소는 수용소 안에서의 삶이라는 새로운 사생활을 야기했기에 분석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렇게 공적 구조의 변화가 사생활의 변화와 적응 그리고 새로운 창출을 야기할 뿐 아니라 사생활의 변화가 공적 구조의 변화와 개입을 유발하기도 한다. 20세기는 이혼과 동거가 폭증하고 임신과 섹스가 역사상 어느 때보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 조절된 시대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병원과 법률이라는 공적 장치가 끊임없이 개입해 들어온다. 결국 가족생활의 주도권이 국가와 개인에 의해서 분점되고 개인은 그 여분의 주도권마저 의사와 교사 그리고 양육 전문가와 심리치료사 같은 각종 전문가 집단에 양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족은 오로지 감정생활이라는 단 하나의 줄에 매달려 나부끼게 된다.

그리하여 제5권은 사적 영역의 역사이자 그 자리에서 바라본 공적 영역의 역사가 되는데, 책장을 계속 넘겨보면 이 책의 저자들이 좀더 야심적임을 알게 된다. 문화적 다양성을 다룬 제3부는 종교와 내면생활의 변화(‘가톨릭 신자들: 상상과 죄’), 정치적 정체성(‘공산주의자 되기?-하나의 존재방식’), 인종적 정체성(‘유대인으로 살아가기’와 ‘이민자로 살아가기’)을 다룸으로써 20세기가 만들어낸 특유한 자아 정체성의 궤적을 범례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제4부는 미국·스웨덴·이탈리아·독일의 사생활을 분석함으로써 사생활의 비교사회학의 토대를 놓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사생활의 역사’는 한 권의 훌륭한 20세기 서양사에까지 근접해 간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이 책의 의의는 서구인의 삶 그리고 사생활이라는 소재에 대한 관음증적 호기심을 격조 있게 충족시켜주는 것에 그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이유 가운데 두 가지 정도를 꼽고 싶다.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특히 제4부) 우리의 사생활이 의외로 서구인의 삶과 가까우면서 또한 다르다는 것을 시종일관 깨닫게 된다. 우리 사생활의 어떤 측면은 미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과 닮았고 심지어 스웨덴과도 유사한 데가 있지만 동시에 이 모든 사례와 다르다. 공시성과 역사적·문화적 차이를 매개로 한 공시성의 다양한 조합, 변화에 대한 민감함과 어떤 끈덕진 지속을 모두 실감하게 되는데, 이런 독서 경험을 통해 자기 성찰의 길이 열린다는 점이 소중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이 책의 독서가 주는 각별한 기쁨의 원천은 사생활이라는 소재에서 오는 재미이기보다는 사유를 촉구하는 힘을 가진 역사학적 통찰을 담은 문장들에서 오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고 싶지만 지면이 허락지 않아 아쉽다. 하지만 우선 읽기 바란다. 읽게 되면 밑줄을 긋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장담할 수 있다.(김종엽|한신대교수·사회학)
 
06.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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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존 산본마쓰의 <탈근대 군주론>(갈무리, 2005)을 언급할 일이 있었는데, 내친김에 몇 페이지 읽어보았다. 책장을 들추니까 예전에 저자의 한국어 서문 정도를 읽었군. 나는 작년에 책이 출간되자 마자 서점에 가서 몇 페이지 읽어보고 막바로 도서관에 원서를 주문했었다. '옮긴이 후기'에서 "책을 번역해 내놓을 때마다 항상 변변치 못한 번역 실력을 절감하지만, 이번만큼 번역을 내어놓기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라고 겸양의 말을 적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의례적인 말이긴 하나 독자로선 한번쯤 주저하게 되지 않나?

여하튼 주문한 원서는 몇 달 후에 들어왔고, 나는 첫 대출자가 되었다. 그리고 복사한 책을 번역서와 나란히 책장에 꽂아두었다. 아마도 작년 겨울에 몇 권의 다른 책들과 함께 읽어볼 생각을 했을 듯한데 대개의 다른 계획들처럼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손에 든 것이다. 그리고 서문을 읽었다. 저자가 책의 윤곽에 대해서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어서 마치 조감도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덧붙이자면 번역은 역자의 엄살과는 달리 잘 읽히며 무난하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서문을 정리해두려 했으나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견적을 필요로 한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범위가 매우 넓고 또 논쟁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모든 종류의 전력작 정치사상을 폭넓게 비판한 이 포스트구조주의 비평가(=푸코)가 급진적 전통에 가장 큰 해악을 끼쳤다고 주장한다."(35쪽) 같은 핵심적인 전언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상단한 분량의 사전정지 작업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러한 악역(푸코)을 물리칠 우리의 영웅으로 저자가 추켜세우는 인물은 그람시이다(그람시란 이름은 책의 헌사에도 들어 있다). 말하자면 책은 '좌파정치학'을 놓고 '탈근대 목장'에서 벌어진 푸코와 그람시의 '결투'를 다룬다. 

하지만 이 페이퍼는 그 결투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역사를 많이 거슬러 올라가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를 다룬다. 저자가 보기에 오늘날의 '좌파'가 처해 있는 문제점은 분리되고 분열돼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바벨탑 이후'처럼. "전 지구적 '좌파'라는 걸 의미있는 범위에 국한해 말하자면, 게슈탈트로스 곧 '형태없는'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실체'가 없는 것으로 비치는 운동이라는 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이 땅을 떠돌 운명이다."(27쪽) 그렇다면, 이 '형태 없는' 좌파는 '형편 없는' 좌파이기도 할 것이다. 그걸 타개해보고자 하는 게 책이 기획이다.

"언제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지난 한 세기 이상, 사회주의는 세계의 좌파 상당수에게 형태 또는 형식을 제공해왔다. 사회주의 힘은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있었다. 그건 바벨탑에서 잃어버린 인류의 단결을 되찾자는 고대 종교적 이상과 닿아있다."(강조는 나의 것) 그리고, 흥미롭게도 저자인 산본마쓰는 그러한 사회주의의 비전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대목에서 발견하고 인용한다. 사실 이것이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든 동인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는 단지 노동 문제가 아니다."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화자는 말한다. "그건 무엇보다 미학 문제이고 오늘날 무신론이 취한 형식의 문제이고, 또 신 없이 건설한 바벨탑의 문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이 땅에 하늘을 건설하는 문제이다."(28쪽)

참고로, 산본마쓰가 인용하고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1949년 Modern Library판의 영역본인데, 짐작엔 저명한 러시아문학 번역자 콘스탄스 가넷 여사의 번역이다. 그 원문은 이렇다: "Socialism is not merely the labour question, it is above all things the atheistic question, the question of the form taken by atheism today, the question of the tower of Babel built without God, not to mount to Heaven from earth but to set up Heaven on earth."

이 대목은 제1부 1편의 5장 '장로들'에 나오는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막내 알료샤의 성장사와 조시마 장로에 대한 소개로 돼 있다. 역자는 한국어판으로 이훈섭 역의 '정음사판(1959) 등 다수'라고 원주에다 병기해놓았지만, 실제로 정음사판을 참조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정음사판은 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던 대중적인 판본이긴 하나 최초의 번역본도 아니며 한편으론 중역본이기 때문이다. 번역에 민감한 역자가 굳이 오래전에 절판된 중역본을 표나게 내세운 이유를 나로선 알기 어렵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it is above all things the atheistic question'을 "그건 무엇보다 미학 문제이고"라고 옮긴 건 착오이다.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무신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많이 읽히는 무난한 번역이지만 가넷 여사 등의 번역은 원문을 100% 번역하지 않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가독성은 높지만 충실한 번역은 아니다. 이그나트 압세이가 옮긴 1998년판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번역본에서 문제의 대목은 이렇게 번역됐다.

"[F]or socialism is not only a conditions of labor or of the so-called fourth estate, but rather, for the most part, a question of atheism, a question of today's particular form of atheism; it is a Tower of Babel built specifically without God, not in order to ascend to heaven from earth but in order to bring Heaven down to earth."(33쪽)

단어 선택에 있어서의 차이가 작지 않은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나 가넷판에서 누락된 'of the so-called fourth estate'를 되살려놓고 있는 점이다. 김학수 선생의 국역본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라는 것은 단순한 노동 문제라든지, 이른바 제4계급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로 무신론의 문제이고, 무신론의 현대적인 구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지상에서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 하느님 없이 쌓고 있는 바벨 탑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제4계급이란 건 프롤레타리아, 곧 노동자계급을 말한다. 중세의 신분적 위계질서 속에서 제1계급은 왕이나 영주를 가리켰고 제2계급은 귀족, 그리고 제3계급은 평민(부르주아)을 뜻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한 제4계급이 노동자였던 것. 김학수 선생의 번역에서도 '제4계급'에 대해 주석을 달아주거나(옥스포드판에는 미주가 달려 있다) '노동자계급의 문제' 정도로 옮겨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정리하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사회주의란 '신 없이 건설하는 바벨탑', 곧 무신론의 현대판이다(도스토에프스키는 이 무신론을 '니힐리즘'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이 '새로운 무신론'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와 알료샤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산본마쓰의 인용은 본래 작품에서 괄호안에 들어가 있는데 그것이 부연하고 있는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알료샤도 자기 진리의 조속한 성취를 갈망하는 점에서는 다른 청년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나 다만 그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정반대 되는 길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는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신과 영생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얻자마자 곧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영생을 위해 살고 싶다. 어중간한 타협 같은 건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그가 신과 영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렸다면 그는 곧 무신론자나 사회주의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러니까 알료샤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던 것. (1)신과 영생 (2)무신론 혹은 사회주의. 그걸 바벨탑(유토피아) 버전으로 말하자면, '신과의 영생(Immortality with God)' vs '신 없는 바벨탑(Babel without God)' 산본마쓰는 도스토에프스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여기서 두번째 입장을 사회주의의 잃어버린 비전으로 제시한다.

"바벨탑 이야기의 교훈은 이 땅에서 인간의 노력을 통한 단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 품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창조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할 수 있다고 꿈꾸면, 우리의 교만이 우리를 파괴할 것이다. 한마디로 전지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지역적으로(또는 부족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는 거다."(28-9쪽) 하지만 그렇게 주저앉는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계속 반역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다. 이 땅에서 보편적인 화합을 이룬다는 유토피아적 표상을 후대가 계속 보존해왔다.(...) 기독교 그리고 후에 이슬람교가, 하나가 된 세상이라는 오랜 꿈을 보편적인 정의라는 자신들의 꿈의 밑바탕으로 삼았다. 한참 뒤 계몽사상은 바벨탑의 복원에대한 아브라함의 열망을 세속화했다. 근대 이성의 꿈속에서, 18세기 백과전서파와 자코뱅파로부터 19, 20세기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바벨탑을 재건하고 전체를 복원하려 했다."(29-30, 강조는 나의 것)

이어서 등장한 맑스. "맑스의 생각은 흩어진 노동계급을 단결시키고 역사적 건설 또는 포에이시스라는 공통의 기획의 바탕을 창조할 수 있는 공통의 정치 언어를 향한 탐구를 대표했다." 원문에서 포에이시스(poeisis는 이탤릭체로 돼 있다. 보통은 포이에시스(poiesis)라고 더 많이 음역되는 그리스어인데, 제작/창조(making/creating)란 뜻이고 하이데거는 'bringing forth'란 뜻으로 새겼다. 여기서는 '새로운 역사의 건설과 창조'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한 건설/창조에 바탕이 될 '공통의 정치언어'를 맑스는 찾으려고 했다는 것.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주의는, 옛날엔 표면상으로만 달랐지 본질적으론 그렇지 않던 노동게급의 많은 '나라들'을 단결시키는 공통의 언어, 일종의 에스페란토어였을 것이다."(31쪽) 곧, 만국의 노동자를 단결시켜줄 수 있는 공통어(에스페란토어), 그게 사회주의이다. 사진은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광장에 있는 맑스의 동상. 비대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러시아어로 새겨져 있다.

산본마쓰의 불만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이러한 사회주의의 꿈(=바벨탑)이 거의 포기됐다는 것. 남은 건 '바벨탑 이후'의 분열적인 분파들이다. 평화운동, 동성애운동, 여성주의, 환경운동, 유색인종 운동 다 제각각의 진보를 주창하지만 이게 콩가루다. 게다가 이론과 실천의 새로운 종합에 대해서는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는 이론들만 대학가에서 득세한다. '연대'가 아니라 '차이'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저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현상이며, 그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 뒤이어 그람시적 제스처를 따르는 새로운 에스페란토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차이의 정치학'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그런 것이 내가 서문에서 읽은 밑그림이다. 책의 나머지 부분들도 흥미를 끌지만 언제 마저 읽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한편 산본마쓰가 서문에서 줄곧 참조하고 있는 책은 조지 스타이너의 <바벨 이후>(1977)이다(리쾨르의 <번역론>에서도 참조된 책이다). 나는 책의 2판인지를 갖고 있는데(젠장, 박스보관도서이다) 찾아보니 지난 1998년에 제3판이 출간됐다. 스타이너의 주저 중 하나인 이 책이 언제쯤 번역돼 나올 수 있을까, 기다리느니 원서를 읽는 게 더 빠를까? 아무튼 '바벨 이후'에 막바로 소통이 안되는 언어들 때문에, 차이들 때문에 고생 만땅이다...

06. 12. 07.

 

 

 

 

P.S. 하니, 영어 공용어론자들이야말로 좌파 사회주의자들 아닌가?(복거일은 가면을 쓴 사회주의자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망상'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자는 어떻게 자신의 포지션을 유지할 수 있는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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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shin 2006-12-0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판 번역과 관련된 언급만이 제 몫일 겁니다. '미학'은 착오에 의한 오역이군요. 바로 뒤에 무신론이 나오는데, 꼼꼼히 챙기지 못했군요.

이훈섭 역을 언급한 이유는 엉뚱한 데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검색 결과를 참조했고, 저 책이 첫 번역일 거라고 그냥 짐작했기 때문이지만 더 큰 이유는 절판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번역이 있고 어떤 번역이 신뢰할만한지 모르니 안전하게 아무도 볼 수 없을 옛날 책을 거론한거죠. 독자들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번역자로는 그냥 '다수의 번역'이라고 주석에 달 수는 없기에 쓴 겁니다.

sommer 2006-12-08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트와 바벨탑, 현대한국 사회와 소비에트 시절...이미 엉뚱한 곳에서 바벨탑은 '재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6-12-0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ishin님/ '아무도 볼 수 없을 옛날 책', 이라도 왜 굳이 집어넣으신 건지는 이해되지 않지만, 정황은 짐작해볼 수 있겠네요. 아무도 볼 수 없을!..
suture님/ 표지의 뉘앙스를 알아보시니까 반갑습니다.^^ 곧 짓게 된다는 제2 롯데월드 같은 것도 바벨탑의 유력한 후보가 아닐까 싶네요...
 

두 명의 '퀸'에 대한 평전이 출간됐다. 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이고, 프랑스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다른 한 사람이다. 평전류를 즐기는 독자라면 이 걸출한 여성들과 함께 부듯한 연말을 보낼 수 있겠다. 두 책과 관련한 기사와 관련자료들을 모아보기로 한다.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탁월한 재능을 갖춘 전설적인 미인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진정 불운한 군주였을까?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지은이 캐럴 쉐퍼가 여왕 메리의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녀를 둘러싼 흥미로운 사건들과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렸다. 지은이는 여왕 메리의 추종자에 가까운 입장을 견지하며, 그녀를 낭만적이고 인간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세심한 자료 조사를 통해 객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여왕 메리를 순교자로 되살리고 있다.

잉글랜드의 왕위를 놓고 엘리자베스 1세와 갈등을 빚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일고 있다.

세번 결혼해 남편들을 모두 비운에 죽게 만든 요부, 신구교간의 갈등을 부추겨 결국 자신도 참수된 비극적인 여인, 불운했지만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갖췄던 절세 미인이었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저자는 여왕 메리의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여왕 메리를 순교자로 되살리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메리는 뛰어난 지도자이자 신앙심 깊은 여인, 시인으로 재탄생한다.

 

 

 

 

 

 

 

 

 

 

 

안토니아 프레이저

역사가이자 소설가이고, 고전기작가로 이다. 현재 극작가인 해롤드 핀터와 결혼하여 런던에서 살고 있다. 1969년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를 발효 한 후에 <크롬웰, 우리의 호민관> <찰스 2세> <나약한 성 : 17세기 영국 여성의 운명> 드의 책을 집필 했으며, 제미마 쇼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일련의 미스터리 소설을 써 왔으며, 이 탐정소설은 1983년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로 방영되기도 했다.

 

문화일보(06. 11.24) 그녀는 사치의 화신이었나, 佛 격동의 ‘희생양’ 이었나

젊은 만화마니아뿐 아니라 1970년대 초반 학창시절을 보낸 중장 년층 중에도 마리 앙투아네트왕비, 넓게는 프랑스 혹은 프랑스혁명을 주목하게 된 계기로 일본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지 목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프랑스혁명 직전,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한 오스트리아공주를 둘러싼 격동기의 프랑스를 다룬 이 작 품은 만화영화로도 소개되며 18세기 중후반의 유럽 왕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과 존재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렸다.

앙투아네트는 서른여덟해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과 비참한 감옥 등 양극을 경험한 인생 역정의 주인공. 1755년 ‘유럽의 열강’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여왕의 열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난 그는 14세때 프랑스 루이16세와 결혼,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1793년 참수됐다. 이같은 연대기 이면에 변혁기 유럽사의 주요 순간을 증언하는 그녀에 대한 세평은 지금도 열성 적인 찬미와 맹렬한 비방이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대중문화를 통해 드라마나 영화 속 비운의 주인공처럼 소개됐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두툼한 전기를 통해 실존했던 역사인물로 생 생하게 되살아난다. 저자는 스코틀랜드 메리여왕, 영국의 헨리 8세와 크롬웰,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14세 전기 등을 집필한 작가.

보통 책의 2, 3배 분량의 이 책은 앙투아네트와 주변 인물의 초 상화부터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참수 직전의 모습까지 다양한 사진을 갖추며, 연대기순으로 826쪽에 걸쳐 왕녀의 인생 을 다룬다. 출생 무렵의 유럽 정세부터, 적대국인 오스트리아 출신 아내를 맞은 프랑스 황태자와 프랑스인의 마음가짐, 탐욕스러운 동성애라는 식의 각종 추문이나 참담한 감옥생활을 비롯, “그 오스트리아 여자의 머리를 내놓으라”는 광분한 군중 앞에서 참 수되기까지.

“세상물정 모르는 앙투아네트가 먹을 빵이 없다는 사람에게 케 이크를 먹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지만, 과연 그녀는 사치하고 음란한 성욕의 화신이며 프랑스혁명의 결정적 계기였던 인 물인가.

유럽 각국의 왕실자료보관소 등에서 관련 자료를 모으고 왕녀가 나고 자란 곳을 직접 둘러본 작가는 앙투아네트이야기 중 ‘잔인한 신화와 음란한 왜곡’에 대한 반증을 제시한다. 프랑스속 오 스트리아 여자였던 그녀는 결혼뿐 아니라 죽음까지 국가적 전략 과 이해타산에 좌우된 희생자였다는 것. 당시 유럽왕실의 혼인동맹과 프랑스 왕의 외교적 수완에 따라 비정치적이고 여린 그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타락한 마녀, 기품없는 섹스파티의 상징 처럼 악평을 받아왔다는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신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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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2-08 04:04   좋아요 0 | URL
앗, 무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아내가 쓴 책이로군요. 프랑스혁명 시절의 유럽사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읽어보고 싶은 맘이 생깁니다. 아직 진행중이긴 하지만, 로쟈님의 '곁다리-텍스트'를 기대하면서 추천하고 갑니다.

ilbooks 2008-07-23 10:10   좋아요 0 | URL
요새 슈테판 츠바이크 책을 보고 있는데 여기서 <베르사이유의 장미>란 책이 있는 줄 첨 알았네요. 츠바이크 책을 읽고 있으니 이케다 리요코가 그의 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 알겠더군요. 만화 장면이랑 똑같아요! 수소문해서 이케다 책도 보려고 합니다~ 다 보고 나면 프레이저 책도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