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가 구내의 서점에서 사들고 온 책은 노리나 허츠의 <소리 없는 정복>(푸른숲, 2003)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국가의 죽음'은 그 부제이다. 책은 3년전 여름에 출간됐는데, 언론의 주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소리없이 사라진 책 중의 하나가 돼 버렸다(물론 흔한 일이다). 세계화(글로벌 자본주의)의 현황과 그 비판을 내용으로 한 책들이 이후에 다수 출간됐기 때문에 그다지 '화끈하지' 않은 책이 묻혀버렸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잠깐 손에 든 책을 집에까지 들고 오는 수밖에 없었는데, 첫째는 1장의 'TV에 방영되지 않는 혁명'이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이고, 둘째는 러시아의 자본주의화/민영화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던 저자가 러시아 경제 전문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저자인 노리나 허츠(1967- )은 저명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여성운동가 리 허츠의 딸이기도 하다는데, 세계은행의 구성원으로 1990년대 초반 러시아로 건너가서 '자본주의 러시아'를 위한 증권시장의 설립과 민영화 프로그램 실행에 관여했다. 그러한 현장경험을 토대로 러시아의 시장경제화 과정에 신랄한 비판을 제기한 것이 1996년에 간행된 박사학위논문 <개혁기 러시아의 비즈니스 관계('Russian Business Relationships in the Wake of Reform)>이다. 이후에 그녀는 중동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현재는 케임브리지대학 저지 비즈니스스쿨의 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론 2002년에 출간된 <소리 없는 정복> 외에도 <채무위협(The Debt Threat : How Debt Is Destroying the Developing World)>(2005) 등이 있다.

3년전이면 이런 블로그도 없었던 시절 같은데 뒤늦게 관련리뷰 두 편을 옮겨놓는다.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읽어볼 심산으로.  

한겨레(03. 06. 20) 기업, 국가를 접수하다

“이제 정부는 시장의 복잡한 거미줄에 걸린 파리 신세에 지나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정부의 무능력을 감지하고 있다. 정치인의 손은 포박되어 있고, 그들이 내건 공약들이 점차 공허해지고 있음을 모두들 알고 있다. 우리는 기업의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정치인들을 이미 목격하고 있다.”

<소리 없는 정복>은 모든 게임의 규칙을 기업에서 결정하고, 국가는 단지 이런 규칙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집행관으로 전락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실을 고발한다. 정부가 시민을 헐값에 팔아넘기면서 ‘시민’의 존재는 사라지고 소비자만 남게 된 현실을 폭로한다. 국가가 기업의 하수인·경비원이 되는 과정, 이것이 지은이가 말하는 ‘소리없는 정복’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1980년대 신자유주의 물결 이후 국가는 자본(기업)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게 아니라, 사실상 자본의 ‘계급지배 도구’가 돼버렸다는 얘기이다.

이 책의 3, 4, 5장은 이 정복의 실상을 보여준다. 한 국가 안은 물론 국가간 빈부 격차 확대, 너도나도 이웃나라를 빈곤하게 만드는 조세정책을 펴게 만드는 바닥을 향한 경쟁의 논리, 기업이 제공하는 천문학적인 선거자금을 둘러싼 ‘더러운 거래’와 부패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제3의 길’을 주장한 빌 클린턴이나 토니 블레어 등 정치인들이 상당부분 실패했음을 주장한다.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도 이런 정복 과정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유럽 사회모델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일말의 기대를 나타낸다.

기업이 국가를 조용히 접수하는 과정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국가의 견제와 감시를 벗어난 재벌체제의 무분별한 확장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사태는 이 소리없는 정복의 비극적 귀결이라 할 만하다. 한두 대기업의 이해를 위해 경유자동차 관련 세금이 인하되고 경제정책의 뼈대가 결정되는 현실도 그런 생생한 예이다.

크레디스위스, 브리티시피트롤리엄 등 대기업의 컨설턴트로 일하며 옛 소련 몰락 이후 러시아 증권거래소에서 “10년 동안 자본주의를 팔러 다니던” 지은이는 “이 소리없는 정복에 맞서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말로 자신이 이 책을 쓴 배경을 설명한다. 지구 도처의 시민단체들의 시위는 기업으로부터 ‘국가를 되찾기 위한’ 희망의 싹이다. 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환경회의, 94년 멕시코 사파티스타 봉기와 사이버 전쟁, 99년과 2000년 시애틀, 프라하의 반세계화 시위, 2000년 시작된 부채탕감운동인 ‘주빌리 2000’,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시위가 그런 시도들이다.

동시에, 정치인들 스스로의 각성에도 기대를 건다. “소리없는 정복의 마지막 단계는 정치 그 자체의 종말”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물론, 지은이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만일 정부가 기업에 쏟았던 관심을 우리 국민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투표 대신에 구매와 시위를 선택”하겠다는, “국가가 우리를 되찾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국가를 되찾지 않을 것”이라는 배수진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조준상 기자)

동아일보(03. 06. 20) '소리 없는 정복:글로벌 자본주의와 국가의 죽음'

후세의 역사가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 홉스봄이 지난 19세기를 ‘자본의 시대’라 명명한 바 있듯이, 1970년대 이후 세계 사회는 아마도 ‘세계화의 시대’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서유럽은 물론 정통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노동자당 대통령 룰라의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변화와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세계화다.

지난 몇 년간 이 세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다룬 책들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다. 한편에서 세계화를 새로운 시대적 흐름으로 옹호하는 견해도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화의 덫’ 또는 ‘빈곤의 세계화’를 경고하는 저작들도 있었다. 찬사를 보내든 비난을 하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이미 세계화라는 질주하는 호랑이의 등을 타고 있으며, 이 질주가 어디로 향하는지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노리나 허츠의 ‘소리 없는 정복’은 바로 이 세계화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여기서 흥미롭다는 것은 복잡다단한 세계화의 구조와 동학(動學)을 다양한 사례와 자료들을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국내에서도 성공을 거둔 바 있는 ‘세계화의 덫’이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계보 속에 놓여 있다.

다른 책들과 비교해 이 책이 갖는 강점은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국가의 무력함을 예리하게 분석한다는 점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국가는 시민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자본주의라는 브랜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국가는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 권력을 거대 기업에 넘김으로써 이른바 정당성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국가의 복원과 시민사회의 강화다. 저자는 오늘날 그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하더라도 기업의 권력남용을 제재하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마지막 거점은 역시 국가라고 본다. 더불어 비정부조직(NGO)은 최근 반세계화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외형은 자유롭지만 이면은 더없이 냉혹한 시장의 원리에 맞서는 또 하나의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리 없는 정복’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흥미로우면서도 설득력 있는 보고서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아쉬움은 흥미를 넘어선 독창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책의 내용은 많은 부분 이미 다른 책들에서 다뤄진 바 있으며, 대안으로 제시하는 일종의 개혁 세계화론도 그리 새로운 전략이라고 보기 어렵다.

문제의 핵심은 현실이 강제하는 힘을 규범적인 처방으로 과연 어느 정도까지 제어할 수 있느냐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인간적인 세계화를 갈망하고 있음에도 그 길로 나아가는데 여전히 자본의 강제력이 압도적이라는 게 세계화 시대의 본질이다. 비인간적인 세계화를 넘어설 수 있는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남긴 숙제다.(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06. 12. 25.

P.S. 여담을 덧붙이자면, 저자 노리나 허츠의 이미지를 검색해보면 패션 모델처럼 찍은 사진들이 여럿 눈에 띈다(겨울숲을 배경으로 롱코트에 부츠를 신고 커다란 등받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모습을 찍은, 국역본 책갈피의 사진도 그런 종류이다). '이건 또 무슨 컨셉인가' 싶었는데, 어머니가 패션 디자이너였다니까 이해가 된다. 그녀의 표현을 빌면, '판타스틱한 어머니'였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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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06. 12. 01) 서양철학의 새지평 개척 베르그손 철학 다시 읽기

근대 서양 철학과 과학의 대표 주자로, 정신과 물질 이원론자인 데카르트와 기계적 운동법칙을 발견한 뉴턴이 꼽힌다. 그리고 이같은 전통은 인간 중심적인 기독교적 인간관과 결합한, 서양 근 대 문명의 한계로도 이해된다. 인간의 이기적인 과학기술 만능주의와 경제 제일주의를 비판할 때 서양 근대의 기획이 도마에 오 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 은 불교나 노장, 혹은 유학의 양명학으로 대표되는 동양적 사유 다.

하지만 동양의 불교나 노장, 그리고 양명학이 이른바 정파(正派)라 할 유학의 주자학 입장에서 보면 사파(邪派)였듯이, 서양에서도 불교나 노장에 비견할 만한 지적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들이 근래 프랑스에서 일군의 걸출한 철학자들을 만나 자본주의를 축으로 하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에 탁월한 설명력을 발휘했으니, 바로 현대 프랑스 철학이다. 그리고 그 절정에는 들뢰즈가 서 있는 듯 보인다.

한국에서 베르그손이 각광받게 된 계기도 들뢰즈 철학의 곳곳에 서 배어나는 베르그손의 영향력 때문이리라. 들뢰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니체와 함께 베르그손을 꼽는데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그린비 출판사가 ‘연구공간 수유 + 너머’와 함께 기획한 ‘리라이팅(rewriting·다시 쓰는) 클래식’의 하나로출간된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은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쓴 것이다.

‘물질과 기억’은 베르그손이 37세 되던 1896년 출간돼 당시 고교 교사였던 베르그손을 단번에 유명인사로 만든 책. 당시까지 이어져 온 철학 전통은 물론, 심리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탁월한 분석으로 출간되자마자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으나, 비전문가가 이해하기에는 녹록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의 철학적 방법론과 주요 개념의 대부분을 포괄하면서도, 심 리학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약 20년간 베르그손에 천착하며, 그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를 번역하고 베르그손 연구서를 낸 저자가 ‘물질과 기억’ 에서 드러나는 베르그손의 철학을 쉽고도 입체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어렵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개념에 대해서는 부록까지 만들어가며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고, 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에는 그림까지 삽입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물론 ‘리라이팅 클래식’의 첫 책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처럼 게으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문외한이더라도 조금만 집중해서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 면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이미지’와 ‘기억’이라는 독특한 개념들로 설명하면서, 서양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베르그손의 면모를 즐길 수 있다.(김종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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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7 02:14   좋아요 0 | URL
물질과 기억’은 베르그손이 37세 되던 1896년 출간돼 당시 '고교 교사'였던 베르그손을 ...<- 이 대목이 눈에 확 들어오는 군요.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굉장히 부러워집니다..

로쟈 2006-12-28 16:26   좋아요 0 | URL
프랑스에서도 드문 경우 아닐까요?^^
 

커피를 한 잔 마시다가 문득 책장에 있는 책 한권을 꺼내들게 되었다. 독일의 문예학자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1921-1997)의 <미적 현대와 그 이후>(문학동네, 1999)가 그것이다. 독어본이 1989년에 나온 걸로 돼 있으니까 10년 안쪽으로 '발빠르게' 번역소개된 문예이론서이다. 이번에 찾아보니까 영역본도 아직 나오지 않은 책이다.

흔히 수용미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야우스는 그의 대표작인 <도전으로서의 문학사>(문학과지성사, 1983)를 통해서 비교적 일찍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이후에 몇몇 글들이 더 번역된 걸로 기억되지만 단행본은 그 두 권이 전부인 듯하다. 나는 영역된 그의 책을 2-3권 더 갖고 있다.

  

<미적 현대와 그 이후>는 "수용미학의 창시자이자 독일의 대표적인 문예학자가 쓴 근현대 서유럽의 철학, 예술적 담론에 대한 학문적 탐색"이다. 러시아 모더니즘에 대한 강의를 준비해야 하는 까닭에 그 '미적 현대'를 되짚어볼 필요성이 생겼는데, 야우스의 책은 요긴한 준거점이다. 그 모더니즘/모더니티에 대한 이야기는 내년에 자주 하게 될 듯하고, 다만 이 번역서의 책갈피를 들여다보다가 이 책이 속해 있는 '모더니티 총서' 목록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진리와 방법>부터 시작된 총서는 9번째 책으로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책 <세계의 독서가능성>을 '근간'으로 적어놓고 있다. 그게 7년 전 일이고, 책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아마도 '엎어진' 기획인 듯싶다.

야우스란 이름과 함께 곧잘 떠올려지는 독일 철학자/문예학자의 이름이 한스 블루멘베르크(1920- )인데, 두 사람은 연배도 비슷하고(비록 야우스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또 이름도 똑같이 '한스'이다(한스 vs 한스?). 모처럼 블루멘베르크의 주저 한 권을 읽어볼 수 있겠구나, 라고 기대를 걸었던 일이 목록을 보면서 다시 상기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국어와는 아직 인연이 없는 것을. 도서관에 있는 영역본으로 당분간은 만족해야겠다(책을 복사해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블루멘베르크의 책으로 내가 읽어본 건 'Shipwreck with spectator : paradigm of a metaphor for existence'(MIT Press, 1997)이란 얇은 책 한권이다. 흥미는 갖고 있었지만 대개의 그의 책들은 잘 엄두가 나지 않는 방대한 부피를 자랑한다. 영역본 <세계의 독서가능성>과 함께 같은 시리즈(Studies in contemporary German social thought)의 책으로 출간된 <코페르니쿠스적 세계의 발생(The genesis of the Copernican world)>(1989)만 하더라도 본문만 772쪽에 이르는 책이다(블루멘베르크의 책으론 그밖에 'Work on myth'(MIT, 1985) 정도가 더 영역돼 있다). 

독일 현대 문예이론의 봉우리들을 이루는 이러한 저작들이 조만간 번역/소개될 수 있을까? 블루멘베르크의 '독서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여기에 적어두도록 한다...

06.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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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이란 제목의 책이라면 어떤 내용이 연상되는가? 아무래도 그리스 비극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쓴 인문교양서라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힘들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사실이 그러하며 원제 또한 그러하다. 이번에 번역본을 낸 출판사에서도 한번쯤 고민을 해봤겠지만 '비극'보다는 '러브'와 '섹스'의 선정성에 기대/내기를 건 듯하다. 표지까지 어두침침해진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목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책인 듯싶어서 부랴부랴 낚시질을 해둔다.

 

경향신문(06. 12. 23) 고대 그리스인도 ‘몸짱’에 열광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그리스 문학과 문화를 가르치는 저자는 그리스 비극의 세계적인 권위자. 그의 저서 ‘그리스비극 읽기(Reading Greek Tragedy)는 이 분야의 대표적 참고문헌이다(*그렇다면 이 책이 먼저 소개되어도 좋지 않았을까? 조만간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은) 그런 그가 섹스 몸 결혼 종교 오락 정치 등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고대 그리스와 현대를 조목조목 비교해놓은 대중교양서다. 2004년작.



일례로 현대의 ‘몸짱’ 열풍과 비슷한 몸만들기 노력이 고대 그리스 시민(여성과 아이와 노예를 제외한 남성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 “자넨 올림픽 경기 선수 못지않게 몸을 관리해야 하네”. 이는 소크라테스가 몸이 빈약한 친구 에피게네스에게 한 말이다. 훌륭한 몸은 자아감을 높였던 만큼 체육관과 다이어트 및 운동안내서가 번창했다.

그리스인들의 부부관계가 가족유지를 위한 형식적인 것이었다는 대목도 있다. “아내와 연인처럼 같이 자는 것은 간통만큼이나 혐오스러운 짓”이라는 세네카의 말대로라면 아내에게 애정을 갖는 것은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 일이었다.

동성애는 보편적일 뿐 아니라 명예롭게 받아들여졌다. 사춘기를 지나 턱수염이 나기 직전의 미소년은 성인 남성들에게 갈망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이 체육관에 들어섰을 때 벼락을 맞은 듯 눈을 홉뜨면서 혼란스러워 했다. 모든 이들이 그를 조각상처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소년의 망토 안을 얼핏 보고서 활활 타올라 더 이상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타우레아스체육관에서 미소년 카르미데스를 본 뒤의 느낌을 이렇게 토로했다.

상류층 여성이 거친 남성에게 끌리는 일도 다반사였던 것 같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황제의 부인인 파우스티나는 한 검투사를 좋아하게 돼 그것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황제는 즉시 그 검투사를 죽이게 해서 왕비와 잠자리를 갖기 전 그의 피로 목욕을 하도록 했다.

여성에 대한 비하는 서구문명의 전범인 고대 그리스의 치부였다. 미술이나 조각작품에서 여성의 몸을 볼 수 없는 것은 여성의 몸을 남성의 몸의 기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혈액과 체액이 흐르는 관이 서로 연결돼 있는 항아리로 간주됐는데 이것이 잘 뚫려있는지 보기위해 여성의 질 속에 밤새 마늘조각을 넣어두었다가 이튿날 아침 입을 통해 냄새가 올라오는지 확인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후대인들에게 숭모의 대상이었던 고대 그리스를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모습으로 복원해놓는다. 그 목적은 “네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면 너는 언제나 어린아이에 머물러있게 될 것이다”라는 키케로의 말처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다.(한윤정 기자)

06. 12. 23.

 

 

 

 

P.S. 그리스 비극과 관련한 책 몇 권의 이미지를 띄워놓는다. 천병희 선생의 원전 번역과 함께 시중에서 구해볼 수 있는 작품집에는 현암사에서 출간된 '그리스비극' 시리즈가 있다. 천병희 교수의 <그리스 비극의 이해>(문예출판사, 2002)와 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한길사, 2003)는 이 분야의 '업적'이다. 그리스 비극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다루고 있는 사이먼 골드힐의 책과 같이 읽으면 유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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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6-12-24 19:58   좋아요 0 | URL
이 '우리'의 문제... 저자 혹은 기자에 따르면, 한국인인 우리도 '우리'가 누구인지 혹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고대 그리스를 알아야 하는군요... 가히 그리스는 우리의 또 다른 '또 하나의 조국'입니다....

책 자체는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네요...^^

로쟈 2006-12-24 20:08   좋아요 0 | URL
철학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 되는 것이죠.^^
 

교수신문에서 연재하고 있는 '고전번역비평-최고 번역본을 찾아서'에 몇 달 전 출간된 최초의 원전번역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에 대한 번역비평을 옮겨온다.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소개한 바 있기에 흥미롭게 읽은 기사이다. 필자는 몇몇 번역어들의 일관성 부족과 부절적절함에 대해 아쉬움을 피력하고 있다. 새 번역서를 읽으면서, 혹은 읽기 전에 참조해둘 만하다.

 

 

 

 

교수신문(06. 12. 19) 고전번역 비평_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은 어떤 삶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붙들고 씨름하는 물음의 내용이다. 그의 관심은 신(들)의 삶이나 짐승들의 삶(?)이 아닌 인간의 삶에 있다. 또 아무리 좋은 삶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실제로 영위할 수 있는 삶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 그의 문제의식은 인간이 실제로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은 어떤 삶이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일련의 논의 끝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결론은 실천적 지혜와 도덕적 덕을 드러내 보여주는 행동의 삶이 그런 삶이라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처음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1966년 최명관(숭실대 명예교수)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무엇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했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을유문화사와 서광사(1984)를 거쳐 지난 해 훈복문화사에서 새롭게 출간되었다. 최명관 역은 최초의 한국어판으로서 고전철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그리스 고전에 눈을 뜨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마도 이 땅에서 철학하는 사람들 치고 최명관 역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 달 이창우(가톨릭대)·김재홍(숭실대)·강상진(목포대)에 의해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 고대 그리스 원전을 3인의 전공자가 5년간 공들여 번역한 결과물이다. 최초의 본격적인 원전 번역이라 하겠다. 말미에는 용어해설을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 한편, 왜 새로운 번역어를 선택했는지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한글세대에 의한 제대로 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3인의 공동번역은 기존의 번역어를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번역어를 채택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탁월성’이라는 ‘아레테’의 번역어이다. 통상 ‘덕’으로 번역되던 ‘아레테’가 인간의 기능이나 본성을 지속적으로 잘 실현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마땅히 ‘탁월성’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다른 맥락에서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한국어에서 탁월성이란 근본적으로 ‘~의 탁월성(~에서 빼어남)’이기 때문에 그냥 탁월성이라고 하면 ‘팔다리가 잘려나간 풍뎅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와 대조적인 ‘카키아’는 종전처럼 ‘악덕’으로 번역했는데 여기서는 왜 ‘[악]덕’을 그대로 두었는가. 아레테를 ‘탁월성’이라 할양이면 ‘카키아’는 ‘열등함’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똑같은 ‘아레테’를 ‘능숙함’(VI 5)이라 옮겨 일관성이 없는 경우도 보인다.

‘아가톤’은 ‘좋음’으로 번역했다. 기존의 ‘선’보다 훨씬 나은 번역어이다. 그렇다면 ‘카키아’도 ‘악덕’보다 ‘나쁨’으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 ‘헤도네’는 ‘즐거움’으로 번역했다. ‘쾌락’이라는 한자말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반대되는 ‘뤼페’도 ‘고통’이라기보다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편이 나았을 듯 싶다.

제5권에서는 ‘정의’와 ‘부정의’가 논의된다. 그러나 ‘디카이오쉬네’와 ‘아디키아’는 각각 ‘정의’와 ‘불의’로 옮기는 편이 조어(造語) 면에서 나았을 듯싶다. ‘아이스테시스’의 번역에서는 ‘감각’과 ‘지각’이 혼용되고 있다.
‘헥시스’는 ‘품성상태’로 번역했다. 이때 ‘품성’은 ‘稟性’이 아니라 ‘品性’일 텐데 그렇게 되면 ‘성격’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되어 ‘헥시스’와 ‘에토스’가 구별되지 않게 된다. 원래 ‘헥시스’란 ‘영혼의 상태’로서 영혼이 어떻게 틀 잡혔는가를 뜻하는 말이다. ‘테크네’는 ‘기예’로 번역했다. 예술적 기량의 면을 부각시키기 위함일 것으로 짐작되나 테크네가 앎의 일종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도 ‘기예’와 ‘기술’이 혼용되고 있다.

기술과 학문의 분과가 별다른 기준 없이 ‘~학’과 ‘~술’로 번역되고 있다. ‘의술’, ‘조선술’, ‘마술’이 있는가 하면, ‘가정경제학’, ‘정치학’, ‘수사학’이 나온다. 어떤 기준으로 이렇게 번역하였는가. 일관성을 고려한다면 ‘가정관리술’, ‘정치술’, ‘수사술’로 옮기지 못할 것도 없다. 실제로 ‘의술’(I 1)과 ‘의학’(X 9), ‘정치학’(I 2)과 ‘정치술’(VI 8)이 혼용되고 있다. 공동번역이기 때문일까.

3인의 공동번역은 상당히 많은 대괄호 [ ]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역자들이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보다 더 정확한 의미 전달과 가독성을 함께 고려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괄호의 남용은 독자로 하여금 선입관을 갖게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덧붙인 괄호가 오히려 가독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독자로 하여금 독서를 잠깐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경우를 보자. (1) “그렇기에 그들이 행하는 것은 탁월성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면서 [그저] 다른 사람들을 낮추어 보는 것이다.”(IV 3) 여기서 ‘그저’라는 말이 없어도 문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2) “이런 까닭에 테티스 [여신] 또한 제우스에게 베풀어 준 선행들을 이야기 하지 않았으며…”(IV 3) 여기서 ‘여신’의 첨가어는 필요치 않다. 각주에서 “테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여신으로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3) “아마도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즐거움이나 그들이 추구한다고 말하는 즐거움이 아닐 것이며, [사실] 그들은 오히려 동일한 즐거움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VII 13) 여기서 ‘사실’이라는 괄호는 필요치 않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문장에서 ‘그들’이라는 단어가 4번 나옴으로써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인칭대명사, 지시대명사 등의 번역은 융통성을 보이는 게 좋다.

(4) “많은 사람[다중]들이 그러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다중]이 즐거움으로 기울어지며 여러 가지 즐거움들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다.” 이들 예에서 ‘많은 사람’ 다음에 [다중]이라는 첨가어가 꼭 필요한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대괄호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1) “이때의 동등함은 저 [기하학적] 비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산술적 비례에 따르는 것이다.”(V 4) [기하학적]이라는 괄호를 사용함으로써 원문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2) “이러한 친애들은 [선행의] 우월성에 근거하는데, 부모님들이 존경을 받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VIII 11) 여기서 [선행의]라는 첨가어가 없다면 우월성이 선행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임을 선뜻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게 어차피 역자의 해석이 가미된 것일진대 굳이 괄호를 사용할 필요 없이 노출시켜도 무방하리라 본다.

잦은 복수형 사용도 거슬린다. ‘다중’이 복수형인데 왜 ‘다중들’이라고 해야 하는가. ‘모든 품성상태들’에서도 ‘들’을 없애는 게 낫다. ‘모든’에 이미 복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굳이 복수형을 쓰지 않아도 복수의 뜻을 담아내는 경우가 많다. 복수형을 쓰면 외려 거추장스럽다. 그외 ‘만들어지는’에서처럼 수동형을 사용하는 것이나 ‘~에 있어서’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한국어 어법에 어울리지 않는다.

제1권 제2장에 ‘총기획적’이라는 말이 나오고 제10권 마지막 장에는 ‘인간적인 것에 관한 철학’이라는 말이 나오나 아무런 주해도 없다. 다른 개념들에 해설과 각주를 다는 데 비하면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윤리학의 학적 위상에 관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총기획적’이란 ‘아르키테크토니코스’의 번역어로서 정치학을 규정하는 표현이다. 정치학이 아르키테크토니코스하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모든 실천적 과학의 목표를 포함하고 그것들을 내용으로 갖고 있다는 말이다.

‘건축학’(architecture)이 ‘아르키테크토니코스’에서 파생된 점을 감안하면 ‘건축학적’으로 번역해도 좋겠으나 ‘총기획적’이라는 말이 더 적합해 보인다. 다만 이 번역어가 최명관 역에 나오므로 그런 것쯤은 언급해두는 것이 학적으로 성실한 태도가 아닐까.

흠 잡자고 덤비면 어떤 번역인들 배겨낼 수 있겠는가. 이창우·김재홍·강상진 3인의 공동번역은 특장이 훨씬 더 많은 번역이다. 당분간은 한국어 표준판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제3의 한국어판이 나와 그 자리를 넘보기까지는. 그러나저러나 아무리 번역이라지만 번역체의 문장이 아니라 원래 우리말처럼 술술 읽히는 번역은 언제쯤이나 만날 수 있을까.(한석환/ 숭실대·철학)

06.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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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12-23 11:19   좋아요 0 | URL
우리말처럼 술술 읽히는 번역을 하려면, 지금 번역하는 것이 실제로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국가에서 연구비타서 하는경우 전공자가 번역을 하면 국문학이나 문학을 공부하는 분이 같이 감수하는 식으로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연구비에 이런것까지 포함하라면 택도 없을려나요.
전공자가 번역, 같은 전공자에게 일차 감수후, 문장을 볼수있는 사람에게 감수후 최종적으로 번역자가 결정. 현실에 안맞는 애기인지?

로쟈 2006-12-23 11:54   좋아요 0 | URL
번역의 관행 자체가 바뀌는 시간이 필요하겠죠. 역자들끼리 의견을 조율하는 데에도 상당한 진통과 애로를 겪는 게 다반사니까 감수자/편집자의 의견까지 고려한다면 상당한 견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인 2006-12-24 21:34   좋아요 0 | URL
오, 강상진 선생님! 정말로 꼼꼼하고 치밀한 선생님이셨는데 :)
이것도 새로 장만하던지 해야겠네요.

로쟈 2006-12-24 23:05   좋아요 0 | URL
같은 고전 전공인 강대진 선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 분인가요?..

기인 2007-01-01 19:57   좋아요 0 | URL
ㅋㅋ 한 때 두 분이 형제라는 '설'이 있었는데(4~5년 전에 서울대에서 라틴어 1, 2 두 분이 번갈아 수업하시기도 했습니다 ㅋ), 두 분 모두께 수업을 들어본 결과(?) 두 분은 '의형제'시라고 하시더라고요. 강대진 선생님은 정말 유쾌하고 재미있으시고, 강상진 선생님은 정말 진지한데, 그 진지함이 또 유쾌한 분 ^^

로쟈 2007-01-01 21:5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러고 보면, 기인님도 한 고전 하시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