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되는 '과학을 읽다'는 내가 즐겨 읽는 코너이다. 지난해 줄기세포 관련보도 기자상까지 수상한 김희원 기자가 거의 전담해서 '과학책 읽어주는 기자'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번주에는 매트 리들리의 <붉은 여왕>(김영사, 2006)이 도마에 올랐다. 사실 이 책은 지난 2002년에 출간된 바 있고, 나는 그 초판을 갖고 있다. 한데, 몇 가지 오역에 대해서 지적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이번에 나온 건 소위 '전면개정판'이다(원저의 개정판이란 얘기가 아니다).

판형도 하드카바로 바뀌고 페이지수도 130쪽 가량이 늘어났다. 그렇다고 내용이 증보된 건 아닐 텐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개정판은 지난 초판보다 훨씬 매끈하게 나왔고 구매욕구도 자극한다. 나는 지난달부터 이 '오래된 새책'을 다뤄보려고 했지만 마무리를 못 짓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리뷰기사를 접하게 되어 반갑다. 다음주까지 연재될 기사를 이 자리에 모아놓도록 하겠다. 책의 부제가 '성과 인간 본성의 진화'이다. 참, 제목은 왜 '붉은 여왕'인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붉은 여왕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캐릭터이다. 저자 리들리가 1장의 에피그라프로 인용하고 있는 대목:

가장 이상한 점은 나무들과 그 주변의 것들이 결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주변의 풍경은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들이 우리를 따라 움직이는 걸까"'하고 앨리스는 어리둥절하게 생각했다. 그때 여왕은 앨리스의 그런 생각을 알아차리기나 한 듯이 이렇게 외쳤다. "더 빨리! 잡담하지 말고!"

내가 '사냥'도 자주 안 나가는 주제에 이런 잡담(페이퍼)이나 쓰고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한국일보(07. 01. 09) [과학을 읽다] 붉은 여왕 上

‘남성의 대화는 공적(公的)이며, 집에서는 아예 말을 하지 않으려 하고, 경쟁적이며, 주의를 끌려고 한다. 여성의 대화는 사적(私的)이며, 큰 모임에서는 입을 다물고, 협동적이고, 안심시키려 하고, 그저 말하기 위해 말하는 경우도 있다.’

‘포르노 영화는 남성을 겨냥한다. 대체로 여러 명의 여자에 의해 남자의 욕망이 충족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배경설명이나 유혹의 과정은 가차없이 생략된다. 반면 연애소설은 여성을 위한 것이다. 사랑, 서약, 가정사, 관계를 형성하는 내용이 주된 것이다. 섹스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남자의 몸이 아니라 여자의 느낌이 주로 묘사된다.’

남녀 본성의 차이는 시시한 통념이라거나, 차별적인 성 역할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왔다면, 영국의 과학저널리스트 매트 리들리가 쓴 <붉은 여왕>(김영사 2003년 초간 발행)은 충격에 가까울 것이다. 그저 양육방식의 문제였다면 ‘화성 남자 금성 여자’ 시리즈와 같은 부부관계 상담서적이 그토록 공감을 얻으며 성공했을 리는 없었을 것 같다.

우리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에 극도로 예민하고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러면서도 현재 인간의 모습이 성(性) 선택에 의한 진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하지만 생물 종과 인류 문화를 넘나드는 <붉을 여왕>을 읽고 나면, 세련되게 포장된 행동들이 사실은 수백만년 전 조상으로부터 전수받은 유전자의 산물임을 간파하게 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 종의 짝짓기의 목표는 나의 유전자를 번성토록 하는 데 있다. 그런데 같은 목표를 위해 동맹하는 남녀는 불균형적인 투자를 한다. 특히 포유류가 그렇다. 수컷은 몇 초의 짝짓기만으로 아버지가 될 수 있지만 암컷은 오랫동안 새끼를 몸 속에서 키우고 젖을 먹여 길러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남녀 성 선택 전략의 차이를 낳는다. 즉 남성은 가능한 한 수많은 여성과 짝짓기를 하는 것이 유전자를 퍼뜨리는 효과적인 전략이지만, 여성은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남성을 까다롭게 고르게 된다.

부모가 육아의 책임을 나눠 진다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영장류보다 조류와 비슷한 점이 많다. 남성은 수렵 채집인 시절 이후 멀리 사냥을 나가 먹을 것을 구해오고 배우자와 자식을 먹이는 역할을 해왔으며 여성은 집 가까운 곳에서 머물며 아이를 돌보고 과일을 채집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사람의 일부일처제는 일부 조류처럼 자녀의 양육을 분담하고자 하는 남녀 전략의 결실이다.

하지만 남성은 틈만 나면 일부다처제를 추구한다. 권력과 부를 가진 남성이 하렘(haremㆍ많은 여자를 모아놓고 곳)을 구축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가능한 한 널리 퍼뜨리려는 것은 역사상 수없이 확인된다. 일부일처제는 여성이 아닌, 결혼을 못하는 대다수 피지배 남성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다.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은 현대에도 약 5분의1이 혼외정사로 태어난다는 연구가 있다. 여성은 혼외정사의 경우 남편이 아닌 정부를 통해 우수한 유전자를 확보할 수 있는 이익을 얻게 된다. 남편은 그저 자녀 양육에 헌신적이면 그만이다.

이러한 진화생물학적 해석들은 페미니스트들의 강력한 비판에 처할 수 있다. “남녀의 본성은 생물학적으로 그렇다”고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다 보면 유전자들이 펼치는 치열한 경쟁과 교묘한 전략에 빠져 사회에서의 남녀의 지위는 잠시 잊게 된다.(김희원 기자)

한국일보(07. 01. 16) [과학을 읽다] 붉은 여왕 下

문화적 차이나 시대를 초월해 남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수렵인 시대로부터 이어져왔음을 <붉은 여왕(The Red Queen)>은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그런데 애초에 성(性)이란 왜 존재하는 것일까? 효모처럼 인간도 그저 ‘중성’이라는 1개의 성만 있어서, 배에서 싹을 틔워 내 아이에게 내 유전자를 절반 아니라 100% 물려준다면 얼마나 효율적인가.

그리고 세상은 또 얼마나 평화롭고 단순해질 것인가. 연애감정에 시달리는 청춘도, 결혼 조건을 저울질하는 머리싸움도, 조건을 따지다 결국 치닫게 될 치정사건도 싹 사라질 테니 말이다. 성을 이해하려면 ‘붉은 여왕’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붉은 여왕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인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다. 붉은 여왕은 전속력으로 뛰지만 배경이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결국 늘 제자리에 머문다. 이것이 진화를 바라보는 최근의 패러다임이다. 과거의 진화론자들이 생각하듯 생물은 진보의 방향이나 우등이라는 목표점을 향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늘 바뀌는 생물학적 환경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나아갈 뿐이다.

성은 붉은 여왕의 법칙이 작용하는 메커니즘이다. 생물의 생존에 피튀기는 전쟁은 기생생물(병원균)과 숙주의 싸움인데 성이란 기생생물과의 싸움에 대비한 무기경쟁의 핵심 전략이다. 성의 본질은 유전자를 섞는 것이다. 단지 난자의 유전자와 정자의 유전자가 만나 섞이는 것뿐만이 아니다. 사람(대다수 생물)은 정자 또는 난자를 만들 때, 먼저 부모로부터 받은 두 벌의 유전자를 섞은 뒤에 반으로 나눈다. 이렇게 매번 새로운 유전자 조합이 만들어지고, 역시 새로운 조합의 배우자 생식세포와 결합해 유전자의 다양성을 유지한다.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생명체는 이렇게 태어난다.

유전자의 다양성은 기생생물과의 무기 경쟁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세포는 조직적합성항원(HLA)을 갖고 있어 자기 세포를 인식하며, 외부 침입자의 항원은 백혈구 같은 면역세포가 기억하고 공격하도록 한다. 이 때 항원-항체 반응은 열쇠-자물쇠처럼 작동한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는 우리의 세포에 침투하는 열쇠를 찾기 위해 변이를 일으킨다. AI(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한 우려는 이 바이러스가 인간 세포에 대한 열쇠를 곧 찾을 만큼 돌연변이가 진전됐다는 의미다.

우리의 면역계는 다양한 병원균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자물쇠와 기억력을 갖춰야 한다. 첨단이 아닌 희소성이 관건이다. 바이러스가 쉽게 열쇠를 따기 시작했다면 이 열쇠에 맞지 않는 옛날 자물쇠를 다시 찾아 채우면 된다. 성이 없다면 이렇게 다양성을 유지할 방법은 없다. 면역계뿐 아니라 성 선택에는 붉은 여왕의 법칙이 작용한다. 경쟁력 있는 특정 유전형질이 득세하면 다시 희소한 유전형질이 유리해진다. 돌고 도는 진화의 쳇바퀴다.

성 선택에 깃든 속임수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예를 들어 남성은 다산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큰 엉덩이와 큰 가슴의 여성을 선택해왔을 것이다. 이에 대해 여성은 허리가 가늘어지도록 진화했다. 실제 선호도 조사에서 남성은 여성의 몸무게나 엉덩이 크기 자체보다 엉덩이-허리의 비율에 좌우됐다.

영국 태생으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과학기자로 활동한 매트 리들리는 과학자들에게 강연을 할 정도로 깊이있는 시각을 보여준다. 2003년 처음 번역된 <붉은 여왕>은 국내에선 다소 냉담한 반응을 얻었지만 최근 번역을 손질하고 하드커버로 새로 선보였다.

07. 01. 09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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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8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7-01-09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자가 과학전공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내용 소개 말고 '평가' 부분은 마지막 한 문단 '어쨌든 재미있다' 뿐이어서 아쉽네요. 저도 과학책을 읽는 걸 좋아하지만 과학적 상상력(이해력)의 부재를 늘 뼈저리게 느끼는데, 저 기자분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 책이 다시 나왔군요. 읽고 나서 누구 줘버렸는데... 그런데 이번엔 하드커버로요. -_- 130쪽이나 늘어났다고요. 신기하네요.

로쟈 2007-01-09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성선택설에서 하는 얘기가 바로 그건데요.
딸기님/ 제 기억에 딸기님도 리뷰를 쓰셨죠 아마. 다음주에 하편도 있으니까 더 보태진 얘기가 있을지 모르죠(한데, '과학전문기자'도 비전공자를 쓰나요?). 책 분량에 대해서는 가끔 저도 우려하게 됩니다. 이제 한국어의 문제인지, 판형의 문제인지 둘다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원서의 두 배 이상이 돼 버리니...

아놔키스트 2007-01-0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를 보니 구미가 당기네요. <이기적 유전자>와 <남자>라는 책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네요. 마침 요즘 남녀 차이에 관한 글을 찾아 읽고 있는데 이 책도 읽어보고 싶군요. 감사..

로쟈 2007-01-09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이팅 마인드>도 같이 읽으셔야 합니다.^^

딸기 2007-01-0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리뷰를 썼어요. 그래서 항상 안타까운 '비전공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요. 저분은 과학전문기자인데, 제가 알기로 학부 전공은 확실히 과학 아니었던 것 같고요, 그 뒤에 대학원이나 그런 곳에서 공부를 더 하셨는지는 모르겠어요. 책 분량은... 로쟈님도 가끔씩 퍼오시는 어떤 글의 주인공인 제 오라비 말로는, 한국어로 옮기면 두 배가 된다는데, 저 붉은여왕의 경우 한글판을 다시 내면서 늘어난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든 일인 것 같아요. ^^

로쟈 2007-01-09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글의 주인공'이 얼른 떠오르진 않지만, '오라비'시군요?!..
 

평상시에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습성이 있다. 필요에 얽매이지 않은 경우에 그런데, 간혹 그런 필요에도 불구하고 만용을 부릴 때도 있다. 차가워진 날씨 때문에 외출을 자제한 어제오늘이 그렇다. 프로프의 <민담형태론>의 서문과 <라캉과 정치>의 서문, 그리고 <스피박 넘기>의 서두 등이 그렇게 읽은 대목들인데, 시간이 나는 대로 정리해두도록 한다. 이 페이퍼는 <라캉과 정치>의 서문에 대한 것이다.

 

 

 

 

원래 서문은 '라캉과 정치를 연관지을 수 있는 가능한 논의를 위한 몇몇 예비 질문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부제 자체는 라캉적인 것이다(<에크리>에서 정신병을 다루는 한 장의 제목이 비슷한 식이다). 그걸 페이퍼의 제목으로 삼을 순 없으므로 간단히 '라캉과 정치의 합류점'이라고 해둔다. 저자인 야니 스타브라카키스가 제기하고 있는 것은 '라캉과 정치적인 것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인바, 이 표제에 대한 해제가 서문의 내용을 이룬다.

저자는 먼저, '라캉과 정치'라는 타이틀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의심들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그 의심이란 사회/정치적 심급을 정신분석이라는 개인심리학적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언제나 사회적인 수준 즉 '객관적인' 수준을 개인의 수준, 즉 '주관적인 수준'에서의 분석으로 환원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은 정당한 것이기도 한데, 그간에 정신분석학적 환원주의, 곧 사회는 집합적 무의식 또는 초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며 그로 인해 사회를 정신병리적 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처럼 다루는 태도는 그간에 오명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인용하고 있는 뒤르켐의 발언은 그리하여 원칙적으로 옳다: "사회현상이 심리현상에 의해 직접적으로 설명될 때마다 우리는아마도 그 설명이 틀렸음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14쪽) 국역본에는 이 발언의 출처가 누락됐는데,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한 회의론에 맞장구를 치는 이들이 또한 다름아닌 정신분석가들이다. 라캉의 사위이자 상속자 자크 알랭-밀러(*'밀레'나 '밀레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는 이렇게 묻는다: 정신분석가들은 자신들에게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정치를 말하는 것이 남용인지 아닌지를 자문해 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분석에 들어서는 것은 고도로 개인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15쪽)

하지만, "정신분석학은 초연한 이론도 고립된 개인에 관한 심리학도 아니며(라캉은 어떠한 형태의 원자론적인 심리학에도 반대하였다), 더더욱 분석주체는 '고독한 방랑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석주체는 다른 사람과, 즉 분석적 세팅 안에서 분석가와 연결됨으로써만 이 분석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분석주체'는 'analysand'의 번역어이며, '환자' 곧 '피분석자'를 가리킨다. 분석적 세팅 안에서 피분석자가 갖는 능동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는 '분석주체(analysand)'라고 부른다. '분석가'는 물론 'analyst'를 가리킨다. 그리고 밀러 자신이 분석에서 이 양자간의 관계를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적 결속'이라고 불렀다. 프로이트 자신이 정신분석학적인 사회-정치적 분석 작업을 다양하게 남겨놓기도 했고(<환영의 미래>나 <문명 속의 불만>, <왜 전쟁인가> 등은 대표적이다).

라캉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자신의 영감과 사유방식, 그리고 자신의 기술의 무기고를 이와 같은 연구들에서 찾아내었다. 그는 또한 이것들을 정신분석학 교육의 조건으로 만드는 것은 불필요할 정도로 과잉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16쪽)

참고로,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But he also regarded it as a necessary condition in any teaching of psychoanalysis."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것을 모든 정신분석 교육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으로 간주했다"라는 '평이한' 내용 같은데, "그는 또한 이것들을 정신분석학 교육의 조건으로 만드는 것은 불필요할 정도로 과잉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라고 불필요할 정도로 복잡하게 옮겨진 이유는 모르겠다. 인용의 출처는 쉐리단의 <에크리> 영역본인데, 설마 이후에 나온 핑크의 완역본 <에크리>를 참조한 탓일까?(역자는 후기에서 핑크의 번역본도 참조했다고 적어놓았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발언을 직접 들어보는 게 유익하겠다: "사회학은 심리학이 사회속에서의 사람들의 행동을 다루는 것과 같이 (...) 사람들의 행동을 다루기 때문에, 사회학은 응용심리학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엄격히 말해서 두 개의 과학만이 있을 뿐이다. 심리학, 즉 순수심리학과 응용심리학 그리고 자연과학."(17-8쪽) 재인용의 출처는 <새로운 정신분석강의>이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라면 이 심리학마저 사회생물학에 '통섭'된다고 말할 법하다.

하지만 "라캉은 정신분석학적인 사회분석의 설득력과 정당성에 관해서는 프로이트와 의견을 같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강한 '환원주의적' 접근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다."(18쪽) 대신에 라캉은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서 존재하는 쌍방향의 운동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가 제시하게 되는 것인 새로운 주체성의 개념이다.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정치적인 주체성 개념'.(이에 대한 설명이 책의 1장을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캉의 이론이 중요한 것은 정신분석학과 사회-정치 분석 간의 진정한 함축 또는 상호함축을 허용한다는 점이다."(20쪽) 그리고 이러한 주체성 개념으로부터 객관성(객관적인 수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제안된다(이에 대한 설명이 2장이다).

잠시 덧붙이자면, 책의 1장 '라캉의 주체'에 대해서는 저자도 참조하고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1995)가 필독서이다. 이 책의 국역본은 올 상반기에 나올 예정인 것으로 안다. 스타브라카키스의 보다 중요한 기여는 따라서 2장 '라캉의 객체'에서 찾아진다(물론 이 대목도 지젝의 저작들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간취할 수 있다. 스타브라카키스는 보다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의 문제제기에 이어지는 내용은 소위 '애로사항'이다. 라캉과 정치적인 것의 합류점을 사고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미리 짚어보고 있는데, 첫번째 문제는 "라캉의 담론의 복잡성과 그의 바로크적인 복잡한 문체와 관련이 있다."(22쪽) 사실 라캉에 대한 많은 비난이 바로 이러한 모호한 그의 문체적 스타일에 집중되어 있기도 하며, 영화 <지젝!>에서 지젝은 이러한 수사적 제스처를 과감하게 배제하고 라캉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라캉은 "청중들 속에서 새로운 독해 문화를 배양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이 보인다 - 그의 텍스트는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 쓰여지는텍스트이지, 읽혀지는 텍스트가 아니다."(23쪽). 여기서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은 역자가 삽입한 것이다. 그것은 '쓰여지는 텍스트(writerly text)'와 '읽혀지는 텍스트(readerly text)'란 말의 출처가 롤랑 바르트라는 것을 친절하게 보충해준다(나의 친절은 22쪽에서 'Lacan in Samuels'의 's'가 탈자되었다고 보고하는 정도이다). <문제적 텍스트 롤랑/바르트>(앨피, 2006)에서 이 두 용어는 각각 '작가적 텍스트'와 '독자적 텍스트'로 옮겨졌는데, '작가적 텍스트'란 텍스트의 의미지평이 열려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뭔가를 계속 끄적거리고 싶도록 만드는 텍스트이다.

여하튼 이러한 어려움을 낳는 라캉의 스타일을 저자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라캉의 담론이 지닌 모호함은 사실상 모든 독자에 대한 도전이며,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도전이고, 떠맡아야만 하는 어려움이다. 왜냐하면 그의 담론의 비환원적인 모호함과 비결정성을 인정할 때에만 우리는 라캉의 담론을 가지고 작업할 욕망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우리에게 건네는 도전이다."(24쪽)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인문 번역서를 읽을 때 '비환원적인 모호함' 같은 표현에 주눅들면 안된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비환원적'이란 말은 'irreducible'의 번역이고 이 단어는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더 이상 약분할 수 없는'[수학] 등의 뜻을 갖는다. 수학에서의 의미가 여기서는 이해에 더 용이하겠다. 라캉의 담론이 (보기엔 굉장히 크고 복잡한데) 더이상 약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 즉 그 모호함이 더 이상 축소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실이 거꾸로 우리에게 라캉을 읽고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설명하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긴다는 얘기이다.

모호함을 의도적/적극적으로 창출해내는 라캉의 수사적 전략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라캉주의 문헌 속에는 라캉 담론의 복잡함을 모방함으로써 재생산되는 몽매주의자들의 비체계주의적인 전통이 존재하며, 다른 수준에서는 라캉이 비판했던 자아-심리학의 문제가 존재한다"(25쪽)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만약 라캉의 전략이 전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입증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 마지막 인용문도 모호한데, 우리말로는 전체부정으로 읽히지만 의미는 부분부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라캉의 전략이 전적으로 성공하못한 것으로 입증된다면" 정도가 적합하지 않나 싶다(그러니까 그것이 절반의 성공에 머문 이유는 이런 때문이다, 란 뜻이다).  

"라캉의 담론 상태와 관련된 두번째 어려움은 라캉의 개인적인 문체에서 비롯될 뿐만 아니라, 시간에 따른 라캉 담론의 급진적인 발전에서도 비롯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라캉의 저작에서는 '라캉에게 맞서는 라캉 Lacan contra Lacan'이라는 투쟁적 계기는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26쪽)

그러니까 라캉은 시작부터 체계적이고 완전무결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 게 아니었고, 조금씩 수정하고 대체하고 방점을 이동시키는 식으로 그의 이론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래서 우리가 접하게 되는 것은 다면적 얼굴의 라캉이며, 때로 이 라캉'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라캉 vs 라캉'이란 표어가 억지가 아닌 것이다(라캉에 대한 국내의 많은 비판은 대개 이런 점들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일반적으로 라캉 이론의 진화는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로 방점이 차츰 옮겨간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라캉 자신이 이 세 등록소(register) 혹은 초점이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병행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이론가'라면 다들 그렇게 말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른다면, 그가 (*1940년대에) 상상계에 두었던 이론적 무게만큼 다른 차원에 동일한 무게를 두지 않았던 이유는 그 당시 청중들이 상상계 차원을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27쪽) 

인용문에서 '상상계 차원'은 원문에서 그냥 대명사 'it'이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역자가 '상상계 차원'이라고 바꿔놓았는데, 내 생각에 이 번역서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오역인 듯싶다. 전후맥락은 이렇다.

"Lacan argues, for instance, that references to the role of the signifier were present in his discourse and his papers from the 1940s - the same applies to the concept of the real which is already present in his first seminars. The reason he didn't invest these demensions with th same theoretical weight that he did with the imaginary is, according to his view, that his listeners were not yet ready to accept it at that time."(6-7쪽)

기표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다르게 말하면 '상징계'에 대한 강조이다. 내가 보기엔 이 두 문장엔 라캉과 스타브라카키스 두 사람의 주장이 겹쳐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나의 심증으로 "references to the role of the signifier were present in his discourse and his papers from the 1940s"라고 지적한 건 라캉이고,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the same applies to the concept of the real which is already present in his first seminars."라고 덧붙인 건 스타브라카키스이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라캉의 발언을 옮긴 "his listeners were not yet ready to accept it at that time"에서 'at that time'은 1940년대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거울단계'를 핵심으로 한 '상상계'에 대한 이론정립에 골몰하던 1940년대에도 라캉은 '상징계'를 언급했지만, 더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청중들이 그것(상징계)을 수용할 준비가 안돼 있었다는 것.

스타브라카키스는 이러한 변호가 상징계-실재계에서도 반복된다고 덧붙인다. 즉, 1951년의 첫번째 세미나에서도 '실재계'란 말은 등장하지만 라캉은 더 발전시키지 않았다. 왜? 청중들이 아직 그걸 받아들일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도 역자는 'it'가 단수이기 때문에 앞에 나오는 'the imaginary'를 받는 걸로 보았을 텐데, 내가 보기엔 의미상 'these demensions'를 받아야 한다. 라캉에게는 '상징계'만을 뜻했을 'it'이지만 두 가지 사례가 포개져서 'these demensions'(상징계와 실재계)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라캉을 읽는 어려움이야 다 말할 수도 없겠다. 그저 독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도리밖에: "라캉의 독자들 모두에게 제기되는 도전은 라캉의 사유의 복잡함을 특정한 층화작용으로 환원함 없이 그리고 재현 안에서의 실재의 흔적으로 보전되어 있는 비결정성을 봉합함 없이 자기 자신의 독해를 구성하는 것이다."(28쪽)

'특정한 층화작용'이라는 건 침전시켜서 걸러낸다는 것인데, 알맹이들만 골라낸다는/환원한다는 의미겠다. 비결정성을 봉합한다는 건 제거하거나 무시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쉽겠다. 요는 그 복잡함과 비결정성을 보존하면서 자신의 독해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모방이 아니라 최종적인 라캉을 추구하지 않는 실재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즉, 라캉적인 실재계의 구성력에 우리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원문 역시 간추리면, "Simply put, instead of imitation we need interpretation, an interpretation which is not searching for the real definitive Lacan... and chooses to concentrate on the constitutivity of the Lacanian real..."(7쪽) 

역자의 '해석'이 많이 반영된 대목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라캉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해석해야 한다. 그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해석은 라캉의 어떤 고정적인 실체를 찾는 작업이 아니라 (의미작용의 확실성을 교란시키는) 라캉적 실재(계)의 구성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어야 한다. 표상되지도 환원되지도 축소되지도 않는 '라카니언 리얼'에 언제나 유의해야 한다는 당부이겠다.

이 서문의 마지막 대목은 라캉에 관한 '전기적 스케치'이다. 그건 그냥 읽어보면 되겠다. 그 이전에 저자는 라캉 읽기의 어려움이 어떤 보상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고 있다. 그게 또한 독자의 마지막 몫이어야 하겠다.

"최근의 유토피아 정치의 위기는 실망과 정치적 염세주의의 원인이 되는 대신에 조화와 환상의 윤리학이 부과한 구속으로부터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해방'시킬 기회를 창조하고 있다. 또한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 네오파시즘, 민족주의적 배타주의와 근본주의가 다시금 그들의 추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시대에 정치적인 상상력의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보다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라캉의 이론은 이러한 정치적 '해방'의 촉매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정치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비-근거적인(*비정초적) 윤리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34-5쪽, 강조는 나의 것) 

07. 01. 07 -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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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올리다가 먹통이 되는 바람에 다시 쓴다(많이 안 쓴 게 다행이다). 다른 게 아니라 올부터 경향신문에 '작가와 문학 사이'란 연재물이 실리는 모양이다. 그 첫기사는 문학평론가 심진경씨가 '유령작가' 김연수를 다루고 있다. 반가운 연재이기에 옮겨놓는다. 중간에 삽입한 이미지들은 알라딘의 방침에 따라서 상품페이지에 노출되지 않는 걸로 갖다 쓴다(그래서 사이즈가 좀 크다).

 

경향신문(07. 01. 06) [작가와 문학사이](1)김연수

한 편의 소설, 김연수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수록)에서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소설에서 평범한 회사원인 ‘나’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전처와 만나 안국역 근처 일대를 걷다가 어정쩡하게 헤어진다. ‘나’는 그녀와 헤어진 후 안국동과 화동과 가회동과 재동이 나오는 북촌 근처의 지도를 산다. 그리고 그날의 행로를 지도 위에 그어나가기 시작한다. 안국동 175번지 앞에서 걷기 시작해서, 우리의 대화는 가회동 12번지 지날 즈음 끊기고, 그러다가 재동 83번지 헌법재판소를 지날 즈음 그녀는 꿈 얘기를 하고….



그러나 사실 그날의 행로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녀와 내가 걸어다닌 그 길의 행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그녀와 내가 왜 헤어졌는지, 그날의 만남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되풀이해서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자신들이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걸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나무는 박지원, 지구의, 홍영식, 갑신정변, 제중원 등과 같은 역사적 사실과 느슨하게 연결된, 이제는 천연기념물이 된 육백년 된 백송이다. 소설에서 ‘나’는 질문한다. 과연 나무를 중심으로 그려진 그날의 동심원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백송처럼 육백년을 견디면 우리의 행로도 필연이 될까.

모든 의미는 사후적으로 결정된다. 무의미한 행로 중심에 놓인 육백년 된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우연과 농담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일상은 어떤 의미의 빛을 띠게 된다. 이즈음 김연수의 장편소설(‘밤은 노래한다’ ‘모두이면서 하나인’)은 이 우연의 세계에 떨어진 개인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흔히 역사라고 하는 필연과 진담의 세계가 어떻게 우연과 농담의 세계와 겹쳐지면서 이어지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는 허무한 농담의 세계를 견디려는 인간의 의지가 있다. 김연수 소설의 평범한 개인들이 결코 평범하달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놓인 우연한 삶의 자리에 대해 끝까지 질문한다. 명쾌한 답은 없지만, 결국 대답 없는 그 질문은 그들을 벽 앞의 절망으로 밀어가겠지만 그래도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김연수는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이자 불가지적 세계의 암호를 풀려는 자이다. 그는 자기가 던지는 질문에 정답은 없으며 세계라는 수수께끼는 절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질문과 해석을 중단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그는 모든 사실들을 동원한다.



그는 성균관대 동아시아 협동과정 석사과정에 있는 ‘학삐리’ 작가이자 ‘젠틀 매드니스’라는 번역서를 출간한 역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단편 하나를 쓰기 위해 수십 권의 책을 탐독한다는 그의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밖에. 그러나 사실을 그러모아 허구의 탑을 쌓는다면 그것은 참말일까, 거짓말일까(*여담이지만, 나는 도서광 열전이라 할 <젠틀 매드니스>를 소장하고 있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책에 미친 사람은 아니라는 게 입증된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아무리 많은 자료를 읽어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나오면 그제서야 이 소설은 제대로 됐구나 하는 생각을 한단다. 그에게 사실에 대한 집요함은 결국 모든 사실을 동원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알 수 없음’의 세계를 향한 그의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소설가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농담 같은, 거짓말 같은, 우연 같은 우리의 삶을 진담으로, 참말로, 필연으로 만들어주는 자가 아니겠는가. 이를 위해 작가는 자신의 삶을 통째로 문학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굳빠이, 이상’에서 삶 전체를 판돈으로 걸고 스스로를 천재작가라는 허구적 텍스트로 변형시키고자 한 ‘이상’에게서 우리는 작가 김연수의 표정을 본다. 그것은 이 시대의 마지막 문학적 낭만주의자의 표정이다. 이토록 젊은 그가.(심진경|문학평론가·서울예대 강사)

07. 01. 06. - 07.

P.S. 마지막 멘트는 무슨 의미일까? '이토록 젊은' 그가 '이 시대의 문학적 낭만주의자의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게. 보통 낭만주의는 젊음과 잘 접속되는 것인데, 우리 시대의 '이토록 젊은' 작가들은 이 '철지난 낭만주의'에 대해서 대부분 냉소하거나 조롱한다는 얘기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한국문학의 특수성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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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1-0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은 당근 노땅이 지키는 건데^^... 이런 뜻 아닌가염

로쟈 2007-01-07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땅들은 다 어디가고 유령이 지키나요?^^

비로그인 2007-01-0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작품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다크아이즈 2007-01-19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문단의 젊은 작가들이 '낭만주의'를 폐기처분한지 오래되지 않았나요? 박민규나 이기호도 낭만주의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요.

i 2007-01-2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비범한 동시대 한국 작가라고 여겨집니다.

로쟈 2007-01-20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다리 건너 전해드리도록 하지요.^^
 

어제 스크랩해놓은 기사인데, 몇 자 보태서 '방주'에 올려둔다. 지난주 언론의 북리뷰들에서 가장 눈에 띈 책은 프랑스의 (신)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황금부엉이, 2006)와 철학자 조중걸씨의 <열정적 고전 읽기> 완간 소식이었다. 두 권(<고전읽기>는 10권짜리이지만) 다 아직 실물을 보지 않아서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전자는 다음달 '사회적 독서'의 목록으로 올려놓을까 생각중이고(따라서 자세한 페이퍼는 2월에 쓰게 될 듯하다), 후자는 한두 권 정도 견본삼아 읽어볼 생각이다. 논술대비용 고전읽기야 차고 넘치다 못해 범람하는 수준이지만, 조중걸판의 특징은 저자의 독특한 이력과 맞물린다. 기사의 내용대로라면, 저자는 도올 김용옥 이래의 '걸물'이라 할 만하다. 10권짜리 '액면'을 다 펴 보였으니 인터뷰에서 내비친 그의 고성이 허언만은 아니겠다(그는 말로만 떠는 게 아니라 실물을 보여준 셈이므로). 이러한 제도권 바깥의 목소리를 접하며 더불어 기대하게 되는 것은 제도권 '안'의 목소리이다. 한번 겨뤄보자고 청하고 있으니 누구라도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한국일보(07. 01. 06) 고전을 다 읽으면 세상이 모조리 보인다

꽃자주색 띠지(책 표지에 두른 광고지)에, 그 빛깔보다 더 선정적인 문구(‘생각의 폐활량을 높여라!- 논술 달인을 위한 비밀 레시피’)를 단, 한 철학자의 고전 안내서 10권이 완간됐다. 국내에 적(籍)도 없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철학자 조중걸(50)씨가, 한 두 분야도 아니고 철학 사회 역사 예술 과학 등 서양 지성사의 돌올한 고전들을 모조리 섭렵하고 썼다는 <열정적 고전읽기>다.

시리즈의 마지막 권은 영국 학자 키토의 <그리스인>부터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 윌리스 퍼거슨의 <르네상스>, 앙드레 모루아의 <영국사>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를 소개하는 역사편. ‘폴리스’의 성격과 의미를 뒤지는 첫 텍스트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양대 젖줄인 ‘부르주아 혁명(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으로 나아가는, 요컨대 ‘서구 정치사의 흐름’을 되밟아 가게끔 ‘기획’된 책이다. 각각의 고전들이 서구 정치사의 어떤 구비에 있으며, 또 어떤 경로로 흘러가는지 목차만으로도 감을 잡도록 짜여졌다는 의미다. ‘기획’은 개별 텍스트의 구성에서도 엿보인다.

고전이 탄생한 시대적ㆍ지성사적 맥락을 설명하는 전문과 고전 원문(주요 부분 발췌), 원문 번역문, 해설이 각 장을 구성하는데, 장의 꼬리는 다음 장의 머리에 닿아있다. 그 구성이 역사뿐 아니라 철학 사회 예술 과학으로 거미줄처럼 네트워크화한다. 고전으로 훑는 서양 지성사의 개론서이면서, (저자가 의도한 바) 고전을 건져올릴 그물이 되게 한다는, 부분과 전체의 조화로서의 ‘기획’이다. 저자는 부분(책)은 전체(세상)와의 조화로 읽혀야 한다고 말했다. “책도 시대의 소산인 만큼 그 시대의 맥락, 패러다임과 세계관의 연관과 이해 속에서 시대의 일부로 읽혀야 합니다.”

서울대 사범대 인문사회계열 77학번. 재학 1년2개월 만에 입대해 82년 제대. 1개월 뒤 프랑스문화원 유학시험에 합격해 그 해 프랑스파리3대학(소르본) 유학. “스승으로 만나 친구로 헤어진”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서양예술사와 서양철학을 전공. 미국 예일대로 건너가 문학사와 수리철학으로 2개의 석사학위, 미술사 음악사 수리철학으로 3개의 박사학위를 획득. 그 해 나이 만 32세.

다수의 논문과 몇 권의 대학 교재(영문)를 썼고, 캐나다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아카데미의 한계를 깨닫고 귀국, 강단과 거리를 둔 채 집필에 전념(*생계는 누가 돌보는 것인지? 독신인가?). 미 랜덤하우스와 계약한, 그의 표현을 빌리면 예술 철학 역사가 어우러질 ‘메타피지컬 인터프리테이션’ 예술사(전10권)를 집필중이다.

저자는 이런 ‘장황한’ 이력의 나열을 불편해 할 것이다. “‘Publish or Perish!(책으로 말하라, 아니면 사라져라!)’ 학위나 경력 따위는 학문 장사꾼에게나 필요한 겁니다.” 대학에 대한, 대학교수에 대한 그의 독설은 거침없다. “한 전직 교수가 ‘50년간 글을 쓴 나도 서울대 논술에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죠? 그 논술문제가 ‘데카르트 자아관과 현대사회의 자아관을 비교하라’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걸 못 쓴다니…. 무식하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도 됐던 인문학자의 서글픈 고백입니다.” 그게 지금 우리 교수들의 대체적인 수준이라는 말도 했다(*한 '전직 교수'란 이어령 선생을 말한다. 저자의 배포를 짐작하게 한다. 한데, 이어령 선생은 책으로 치자면 저자보다 20배는 더 많이 써내지 않았나?).

유학 초기, ‘그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교양에의 갈증과 소외감에 고전을 읽었고, 그 고전 읽기의 노하우를 책에 담았다고 그는 말했다. 이 안내서만 읽으면 어떻겠느냐는 에두른 질문에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봐도 아마추어는 주인공의 운명(스토리)에만 관심을 쏟지만, 진정한 딜레탕트는 운명의 전개양식을 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원수의 딸을 사랑하게 됐다’와 ‘증오의 가지에 사랑이 싹텄다’가 같을 수 없지요.”

암벽 등반을 즐기고 플라이낚시광(狂)이라 6~8월은 캐나다에서 산다는 철학자. “인문학은 병적인 행복을 정상적인 불행으로 만드는 학문”이라며 세속의 기쁨을 멀리하라고 말하는 학자. 돈과 상을 마다하고 지적 희열과 자유 속에 침잠하고 있다는 러시아의 수학 천재 페렐만을 연상시키는 그는, 만 40살이 된 기자에게도 “공부 시작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말했다.(최윤필 기자)

07. 01. 06. - 07.

P.S. 검색해보니까 조중걸씨는 심산 스쿨에서 서양미술사 강의를 올해 진행할 계획이며, 기사에서 언급된 대로 서양미술사 전반에 대한 그의 해석(철학적 해석)을 담은 원서를 조만간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아놀드 하우저를 넘어설 만한 대작을 기획하고 있다는데, 저자의 포부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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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07 22:32   좋아요 0 | URL
와 정말 대단한 학력이군요. 다양하게 또 많게.

로쟈 2007-01-07 22:39   좋아요 0 | URL
세 개의 박사학위논문을 동시에 썼다는 게 믿기진 않지만, 사실이라면 대단하긴 합니다(우리 시스템상으론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고 석사논문 등을 제출해야/혹은 시험에 통과해야 박사학위논문을 쓸 수 있기 때문에).

biosculp 2007-01-10 17:20   좋아요 0 | URL
서점에서 책 보았을때 뭔 또 애들 상대 논술책인가 하고 들쳐보지도 않았었는데 다시 봐야겠군요.
심산에 인터뷰한내용이 있더군요.
http://www.simsanschool.com/bbs/zboard.php?id=board1&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4

로쟈 2007-01-11 00:41   좋아요 0 | URL
저는 '예술' 파트만 구입했는데, 아예 참고서 매장에 가 있더군요. 번역도 안된 책들을 정말로 (논술을 준비하는) 청소년들에게 권하는 것인지, 컨셉은 아무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논술교사들에게는 유익해 보이는 책입니다...
 
미셸 푸코,죽음의 빛
자네트 콜롱벨 지음 / 인간사랑 / 199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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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겨울에 몇 자 적어둔 게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책을 완독하지 않았기에 리뷰랄 것도 없지만, 완독할 수 없는 이유는 대고 있으므로 정상은 참작될 수 있겠다...

책머리에 실린 들뢰즈의 말. "내가 사랑하는 한 저자에 관해서만 말한다는 내 이상은, 그를 슬프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며, 그가 더 이상 대상이 될 수 없도록, 사람들이 그와 동일시 되지 않도록 충분히 그를 생각하는 것이리라." 이 정도면 대단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프롤로그인 '여정과 추억'은 아주 사적인 성격을 지닌 부분이어서 프랑스 지성사에 '과도한' 관심을 가진 독자가 아니라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푸코에 대한 번역 전기 중에서 가장 읽을 만한 것이라면 디디에 에리봉의 것을 꼽겠다. 그리고 읽은 것은 1장 "불확실성과 유한성". 정독해야 할 만큼 무게 있는 내용도 아니고 정확한 번역도 아니어서 대충 훑어본다. 번역이 부정확하다는 것은, 먼저 "(...) 경기장 안에 나 혼자 있음을 알았을 때 다시금 푸코가 현재해 있었다."(51) '현재[現在]하다'와 '있다'를 나란히 병치시켜 놓는 것은 좋은 번역이 아니다. "푸코가 곁에 있었다" 정도의 뜻이지 싶다.



그리고 <말과 사물>에 나오는 벨라스케즈의 그림 '시녀들(Les Menines)'를 '귀족의 딸들'(78)이라고 번역해 놓은 것. 역자가 <말과 사물> 읽지 않았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러니 번역 전체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사랑'에서 나온 프랑스 철학 관련서들의 번역이 대체로 믿을 만하지 못하다. 역자 선정과 교정 등에서 좀더 많은 주의가 기울어져야 하리라고 본다.

다음으로, 나에게 유의미한 부분. "어떤 말들은 생각할 수 없다. 시간성에 대하여 잘 몰랐던 고전주의 시대의 '삶'이란 말처럼. 각 시대는 여러 상이한 영역에서의 교응을 필요로 한다."(77) 이건 푸코와의 관련 없이도 흥미를 끄는 내용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삶'이라, 생각할 수 없는! 그리고 푸코의 말 인용. "생각하는 내가, 나의 사고의 내가 내가 생각하지 않는 어떤 것이 되려면, 또 나의 사고가 내가 아닌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는 도대체 나는 무엇이어야만 하는가?"(90) 이건 <말과 사물>의 "코기토와 사고되지 않은 것(Le Cogito et l'impense)"에 나오는 부분이다.

또 푸코가 한 대담에서 한 말. "삶은 죽게 마련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이어야 하며..." 이건 니체의 미학주의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앨런 맥길의 <극단의 예언자들>(새물결)에서 푸코에 대한 부분을 참조해야겠다. 끝으로 재미있는 건 앙겔로플로스('안젤로포울로스'로 번역 돼 있다)의 영화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Le Pas suspendu de la cigogne)>에 관해서 언급되고 있다는 점.(113)

책은 반납했다. 너무도 프랑스적인 책이다. 푸코를 읽는 일도 버겁지만 그걸 '프랑스적'으로 읽을 만한 여유를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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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6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놔키스트 2007-01-06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엉망인 건 잘 알겠습니다만.. '프랑스적'이라는 의미는 썩 잘 모르겠군요..^^

로쟈 2007-01-06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 짤막하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서두의 '여정과 추억' 같은 대목이 제겐 좀 이질적이었습니다. 기억에 그 나라 사람들의 회고담 같은 식이라. '그러니까 제가 프랑스적이라고 한 건 저자가 푸코를 다루는 시각을 가리킵니다. 푸코의 생각 자체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