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에 관한 자료를 옮겨놓는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공동작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낭시는 흔히 '데리다 사단'으로 분류되는 철학자인데, 데리다 스스로가 이 '제자'에게 상대한 두께의 저작을 헌정했을 정도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국내에서 출간된 책 가운데는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2005)에 낭시의 공동체론이 들어가 있고,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는 낭시 등이 편집한 책이다(참고로, 그의 저서가 일본어로는 10권 이상이 번역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간지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세계 지식인 지도>(산처럼, 2002)에서 대략적인 소개를 읽어볼 수 있다.

 

 

 

 

난데없는 낭시 타령인가 싶지만, 러시아 학자와 낭시와의 대담 하나를 번역하게 될지 몰라서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영역본으로는 가장 최신간인 <다양한 예술: 뮤즈들2(Multiple Arts: The Muses II)>(스탠포드대학출판부, 2006)를 대출했다. <뮤즈들>에 이어서 자투리글들을 모은 낭시의 예술론집인데(불어 원서가 있는 건 아니고 영역본의 편자가 낭시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표지의 사진이 인상적이어서(게레로의 작품이라고만 나온다) 검색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어쨌든 이 두 책을 소개한다는 명분으로 이 페이퍼는 '세계의 책'으로 분류된다. 아직 주저들이 번역/소개되지 않은 철학자이지만(나는 네댓 권의 영역본과 연구서를 갖고 있다) 불시에 또 소개될지 누가 알겠는가.

달랑 이런 내용만 띄워놓기는 멋쩍으니까 참고자료도 하나 덧붙여둔다. 앞서 언급한 블랑쇼의 책을 번역한 박준상씨가 2003년 6월 동국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게재한 소개의 글이다.

장-뤽 낭시와 공유·소통에 대한 물음

박준상 (연세대 철학과 강사)

1. 공유 내의 존재 etre-en-commun
여기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장-뤽 낭시Jean-Luc Nancy(1940- )에 대해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하는가? 그의 사상의 특성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을 밝혀봄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낭시의 사유의 핵심에 정치적인 것이 놓여 있으며, 그의 사상은 시종일관 정치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많은 다른 정치사상가들의 경우에 그러하듯, 낭시는 물론 정치적 사건들(동구권의 해체, 걸프전), 정치적 변화들(세계화, 서양중심주의의 한계), 정체政體들·이데올로기들(민주주의, 공산주의, 나치주의)에 대해 구체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분석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일 뿐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판단으로 이어질 뿐이며, 모든 경제·문화·사회현상들을 총체적으로 설명 가능하게 하는 어떤 초월적 원리를 배경에 깔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낭시의 정치철학은 이른바 '형이상학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 또는 조건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치적인 것이란 이미 공동존재(함께 있음, etre-avec)에, 인간들 사이의 소통에 기입되어 있으며, 어떤 '우리'의 존재의 수행(실현, 표현)이다. '우리'의 존재, 다시 말해 '나'의 존재도 타자의 존재도 아닌, 모든 단일성, 동일성(정체성), 내재성 바깥의 존재, 고정된 개체의 속성에 따라 규정되는 존재가 아닌, '나'와 타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 내의 존재, 관계에만 정초될 수 있는 존재.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으로 귀결되는 자기의식의 반대편에 놓이는 존재, 또한 어떤 주제theme에 고정되어 동일화된, '내'가 구성한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존재. 정치적인 것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수행이란 '우리'의 서로에게로 향함·나타남, 관계 내의 서로를 향한 실존들의 만남, 접촉touche이다. ('접촉'은 낭시의 용어이지만, 그 중요성을 부각시킨 사람은 그의 동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이다. 데리다의 낭시에 바쳐진 저서, <접촉, 장-뤽 낭시> 참조, J. Derrida, Le Toucher, Jean-Luc Nancy, Galilee, 2000.)



낭시는 보이지 않는 관계('나'와 타인은 보이지만 그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를 조명하며, 거기에 그의 사유, 정치적 사유의 핵심이 있다. 그러나 '나'와 타인―또는 타인들―의 관계를 정치에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이거나 과장이 아닌가? 분명 '나'와 타인 사이의 관계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 그 자체는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공유 내의 존재는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종류의 만남의 근거에 있는 나눔partage, 어떤 '무엇'을 나눔이 아닌, '우리'의 실존('우리'의 있음 자체)의 나눔의 양태, 나눔의 전근원적 양태를 지정한다. 공유 내의 존재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종류의 소통과 공동체 구성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나아가 현실의 정치적 결정·행동에 있어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유 내의 존재는 '정치적'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정치의 근원이다.

아마 낭시는 공유 내의 존재가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사유된 적이 없이 망각 가운데 묻혀버렸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까지 나눔과 공동체라는 정치적 문제에 있어, '무엇'을 나눔과 '무엇'에 기초한, '무엇'을 위한 공동체만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세계 전역에 걸쳐 진행된 마르크스주의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하나의 '무엇', 즉 재산의 공유共有였다.

나치는 열광적인 정치공동체를 이루었지만, 그것은 공동의 이념적 '무엇'(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의 기초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공동체가 가시적 '무엇'(재산, 국적, 인종, 종교, 이데올로기)의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을 때, 그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왜곡, 말하자면 보이는, 쥘 수 있는―전유專有할 수 있는―동일성의 지배, 공유 내의 존재의 망각. 그 '무엇'에 따라 전개될 수 없는, 그 '무엇'이 목적일 수 없는, 실존의 나눔의 망각, 함께 있음 자체의 망각.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자에 대한 이해와 소유라는 관심에 사로잡혀 존재망각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낭시는 우리가 보이는 '무엇'에 대한 공유 바깥의 나눔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관계에 기입되는 공유 내의 존재를 망각했다고 말할 것이다.

거기에 결국 낭시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적 물음이 있다. '우리'가 함께 있는,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이 아니며, '무엇'을 나누기 위해서도 아니다(우리는 재산을 공유하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이 말은 재산을 나눈다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와 목적은 다만 함께 있다는 데에 있다. 함께 있음의 이유와 목적은 함께 있음 그 자체이다. 다만 함께 있기 위해 함께 있음, 즉 공유 내의 존재를 위한 함께 있음, '무엇'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 자체를 나눔, 다시 말해 '나'와 타인의 실존 자체가 서로에게 부름과 응답이 됨,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



2. 유한성의 경험
공유 내의 존재,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시적 어떤 것의 공유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향해 다가옴, '내'가 그 다가옴에 응답함, 즉 '내'가 타인을 향해 건너감, 타인을 향한 외존外存ex-position, 관계 내에 존재함, 어떠한 경우라도 비가시적, 동사적 움직임들의 부딪힘, 접촉이다. 유한有限한 자들의 만남. 낭시는 현대철학에서 많이 언급되고, 그 중요성이 강조된 '유한성finitude'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상가이다.

인간의, 인간들의, '우리'의 유한성, 여기서 유한성은 첫째로 완전한 내재성內在性의 불가능성이다. 완벽히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을 수 있는, 그 스스로에 정초된―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란 없다.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 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에게로 향함, 그에게 노출되어 있음, 그를 향한 외존, 관계 내에 존재함, 그것이 '나'의 존재의 조건이다. 인간은 자유의 존재가 아니라, 그가 향해 있는 타인에 의해 제약된 존재, 하지만 그 제약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sens에 이를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유한성 가운데에서의 존재란 먼저 외존 가운데에서, 관계 내에서의 존재, 폐쇄성과 내재성 바깥의 존재를 의미한다.

두 번째로 유한성은 만남의 유한성을 가리킨다.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지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접촉은 불규칙적, 단속적 시간에, 즉 시간성 내에서 전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을 통해 확인하고, 표상할 수 있는 '무엇'에 정초되어 있지 않고, '무엇' 바깥의 타인의 나타남에 응답하는 순간의 정념情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접촉, '무엇'에 의하지 않는, '무엇' 때문이 아닌 급진적인 만남, 그것에 정념만이, 극단의 단수성(singularite, 타인의 나타남의 단수성)을 긍정하면서, 답할 수 있다. 정념, 만져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무엇'에 따라 고정될 수 없는 관계 자체에 대한 감지.

그러나 만남의 유한성은 인간들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나아가 지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 유한성은 관계를 '내'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즉 타인을 '나'에게 필요한 그 '무엇'의 요구에 따라 어떤 동일성 내에로 동일화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에 따라 그것은, 만일 '무엇'이 관계를 지배할 때, 그러한 지배(예를 들어 재산의 지배, 정치적 이념의 지배, 인종과 국적의 동일성의 지배―지금 이 땅의 경우 학벌과 지역적 동일성의 지배)에 지속적으로 저항할 수 있게 하는, 근거·이유·목적도 없는 만남, 또는 그 자체가 이유와 목적인 만남, 즉 실존들의 접촉과 그 순수성을 정당화한다.

세 번째로 낭시가 말하는 유한성은, 그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한계상황(죽음, 병, 고독)에 놓여 있는 인간의 존재양태를 표현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낭시에게 유한성은 공유 내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하이데거는 죽음에로의 접근이 '나'로 하여금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존재양태, '그 누구Man'의 지배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에로 눈을 돌리게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반해 낭시는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본래적 실존에로 돌아가게 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외존(타인을 향해 존재함, 타인과의 관계 내에 존재함)을 통한 급진적인 공유 내의 존재를 부르게 한다고 본다.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은 '나'와 자신의 본래적 관계의 회복을 요청한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절대타자 앞에서 '나'의 동일성이, 그것이 무엇이든,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07. 01. 13.

P.S. 한 분이 귀뜀해주신 바에 따르면 국내에도 개봉된 바 있는 영화 <텐 미니츠 첼로>(2002)에 낭시가 직접 출연했다. 열 명의 감독이 찍은 단편영화 열 편으로 구성돼 있는 <텐 미니츠 첼로>의 다섯번째 영화가 바로 클레르 드니 감독의 <낭시를 향해서(Vers Nancy)>이다. 기차여행을 하면서 10분간의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고 하는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이렇다. 

철학자 장 뤽 낭시와 그의 학생 중 한 사람인 안나가 기차여행을 하며 서로 나누는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낭시는 ‘침입자’라는 단어로 이민자들이나 타자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불안과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또한 인종융합에 관한 미국적 개념인 ‘도가니’가 차이를 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판하며 더불어 이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태도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길게 이어진 대화가 끝난 후 그들의 자리에 한 흑인이 들어와 조용히 묻는다. “언제 도착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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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13 17:38   좋아요 0 | URL
세계 지식인 지도 저런것도 있었나요. 당장에 보관함 넣습니다. 김상환 교수가 엮은거네요?

로쟈 2007-01-13 17:41   좋아요 0 | URL
중앙일보엔가 연재됐던 글들입니다...

토마스 2007-01-14 22:40   좋아요 0 | URL
장-뤽 낭시가 등장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국내에서 개봉되었던 옴니버스 영화 <텐 미니츠 첼로> 중 클레어 드니가 연출한 <낭시를 향해서>에 등장합니다. 기차 안에서 주인공은 장-뤽 낭시와 그의 철학적 개념인 환대, 타자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고보면, 이 영화의 제목이 꽤 의미심장하지요. 낭시는 레비나스와 데리다 이후 환대, 타자에 관한 성찰을 친절하게 영화에서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영화감독들이 가끔 영화를 통해 사상을 전하는 일이 있기는 하지요.

로쟈 2007-01-14 22:32   좋아요 0 | URL
요긴한 정보군요.^^ 눈에 띄면 구해봐야겠습니다...
 

지난주부터 연재를 시작한 경향신문의 '작가와 문학 사이' 꼭지는 매번 챙기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김연수에 이어서 이번주는 평론가 신형철씨가 쓴 시인 문태준의 스케치이다. 문태준 시인과 관련한 페이퍼들은 두어 번 쓴 바 있고, 아래글에서 '문사마의 시대'란 말도 기억엔 내가 쓴 말 같다(내가 그리는 젊은 시인들의 구도는 '문사마와 바퀴벌레들'이다). 그러니 인연이 없지 않다. 평론가의 지적대로, 백석-장석남의 계보를 잇는 적자인데(유사 계보에 백석-안도현도 있다), 젊은 나이에 너무 노숙한 경지에 이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의 시들을 읽다보면 시를 잘 쓰는 게 시인의 미덕이면서 또한 약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말도 안되는 트집인가?). 여하튼 '대가급'을 이미 예약해놓고 있는 시인의 묵묵한 '소걸음'을 따라가보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일들 중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경향신문(07. 01. 13) [작가와 문학사이](2) 문태준

1970년에 태어나 1994년에 시인이 되었다. 세 권의 시집을 펴냈고 여섯 개의 문학상을 받았다. 받은 상보다 받지 않은 상을 헤아리는 것이 빠르다. 그래서 혹자는 ‘문사마의 시대’라고 했다. 욘사마만큼 인기 있겠는가마는 욘사마만큼 노곤할 일도 많겠다. 소설가 김연수와 김중혁이 그의 고교동창이다. 김연수가 도서관 타입이고 김중혁이 박물관 타입이라면 문태준은 마을회관 타입이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시인들이 ‘고양이’과라면 그는 비슷한 연배인데도 ‘소’과에 가깝다. 그는 소처럼 ‘마실’ 다니며 끔뻑끔뻑 쓴다. 그런데 그게 너무 아름답다.

멀게는 백석, 가깝게는 장석남과 시적 혈연관계다. 그는 서정시 가문의 적자다. 서정시는 아름다운 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아름답게 쓰는 것이다. 어떤 말이 팽팽한 긴장을 품어 읽는 이를 한동안 붙들어 맨다는 것이다. 한 단어를 공용사전에서 구출해 개인사전에 등록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수런거리다’나 ‘뒤란’ 같은 말들이 그렇다.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이후 이 말들은 시인 문태준의 인질이 되었다. 인질이 인질범을 사랑하듯 이 말들은 이제 문태준만을 사랑한다. ‘맨발’과 ‘가재미’를 거치면서 그런 말들 점점 많아졌다.

부럽다. 자신의 마음을 ‘뒤란에서 수런거리는’ 것들에게 몽땅 내주는 방심(放心)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런 것들의 존재를 혼신으로 호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떤 것들이 단지 ‘있다’는 사실만을 지극하게 기록한다. 깨달음의 발설을 자제하고, 감탄문이나 느낌표를 아낀다. 혹은 그럴 때 아름다워진다. 출석을 부르는 시간만큼은 모든 학생들이 평등해지듯, 그가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고 그 존재를 호명해 줄 때 만물은 서정적 사해동포주의로 느릿느릿 물든다.

그가 ‘나’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감응하고 해석하고 교설하는 ‘나’가 겸손하다. “낮과 밤과 새벽에 쓴 시도 그대들에게서 얻어온 것이다”라고 그는 썼다. 이런 겸허함은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의 습관 같은 것이라 감동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의 시가 실제로도 그렇게 씌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감동적이다. 시를 대하는 태도와 시를 쓰는 원리가 일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가 시를 얻어온 ‘그대들’의 목록은 다채롭지만 특히 ‘나무’에 진 빚이 커 보인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호두나무와의 사랑’)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개복숭아나무’)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매화나무의 해산’) 세 권의 시집에서 한 편씩 골랐다. 모아놓고 보니 꽤나 닮아있다.

이 세 편의 시에서 그의 근본 중 하나를 짐작한다. 그의 시는 여자를 슬퍼하는 남자의 시다. 그는 나무에게서 하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잃은 여자, 아이를 낳은 여자를 본다. 이 여자들은 어머니라기보다는 출가한 누이에 가깝고, 시인은 고단한 그녀들 앞에서 조용히 아파한다. 혹자는 그의 시에서 장자(長子) 의식을 읽어냈다. 나는 차라리 철든 막내를 볼 때 누나들이 느끼는 애처로움 같은 것을 느낀다. 그는 따뜻하고 슬프다. 이를 자비(慈悲)라 한다. 그는 불교방송 프로듀서다.



몰인정의 시대에 그의 시는 갸륵하다. 그의 다정(多情) 때문이다. 이조년은 “다정도 병인 양하여”라 했다. 병 맞다. 이를 다정증이라 부르려 한다. 문태준은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다정증 환자다. 이 환자가 우리 딱한 정상인들의 가슴을 찌른다. 저 환자의 눈에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휑하고 빤한 인생일까 싶어진다. 그래서 돌연 아연하여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란 그런 것이다. 언제 그 맥이 끊어질지 모를 이 소중한 환후(患候)를 우리는 아껴 기린다. 그는 낫지 말아라. 그래야 우리도 산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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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키스트 2007-01-13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는 치유되지 말았으면 하는 질병들이 꽤 있군요. 형이상학적 질병도 그렇고, 다정증도 그렇고.. 남의 병이 낫지 않기를, 심지어 깊어지기를 이렇게 바라도 되는 건지..

로쟈 2007-01-1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란 종 자체가 '생태학적 박테리아'라고도 하는데 그보다는 좀 인간적인/낙관적인 병들이 아닐까요...

kleinsusun 2007-01-14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문태준이 불교방송 PD였군요.^^
근데... 김중혁이 "박물관 타입"이란 건 어떤 뜻일까요?

로쟈 2007-01-14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용지물 박물관'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나비80 2007-01-16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의 평을 존중하시는 모양이군요.^^ 문태준 시인은 동년배 젊은 시인들이 가닿을 수 없는 삶의 절창을 줄곧 보여주곤 합니다. 저는 비슷한 의미에서 손택수 시인을 아낍니다.

로쟈 2007-01-1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택수 시인도 많이 거명되는 걸 들었지만 아직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소이부답님의 의견을 참고하지요.^^

다크아이즈 2007-01-1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벼파는 시, 이면을 꿰뚫는 시, 부끄러움으로 화끈거리게 하는 시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책꽂이의 문태준에게 무덤덤합니다. 모국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나머지 병적으로 그 ' 배열'에만 집착하는 몇몇 시인들의 언행불일치가 저로하여금 '착한 시' 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하나 봅니다.

우쒸, 저로서는 문태준의 시보다 신형철의 해석이 더 탐나는데요.

로쟈 2007-01-1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씨한데 전해드리죠.^^

다크아이즈 2007-01-20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쒸, 더 열 받네. 로쟈님만 신형철님 측근이라는 게!
하지만 로쟈님은 모든 ~디너들의 측근이니 용서할게요.

로쟈 2007-01-2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에 비평집이 나온다니까 그때 한권 사시고 싸인도 받으시길.^^
 

저녁을 먹으러 가면서 한겨레의 '18.0도'를 들고 갔다. 설렁탕을 먹으면서 두 꼭지를 읽었는데, 그 중 하나가 소설가 유재현의 세설 '캄보디아의 평양냉면집 꽃처녀'이다 . 작가의 소설들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동남아기행이나 쿠바 기행에 대해서는 전해들은 바 있고, <느린 희망>(그린비, 2006)은 대충 훑어본 적이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을 그래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작가군에 속하는데, 이 세설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읽을 수 있어서 인상적이다.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다(기사의 원문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3616.html).

2003년 처음 시엠립에 등장했던 ‘평양냉면’은 개점초기에 “아름다운 평양처녀들이 여러분들을 친절하게 봉사해 드리겠습니다.”란 간판의 문구로 보는 이의 심정을 착잡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열심히 봉사한 때문인지 또는 남한 관광객이 급증한 때문인지 평양냉면은 본점보다 두 배쯤 큰 분점을 하나 더 열고 있었다. 귀띔받은 평양냉면의 작년 순익규모는 깜짝 놀랄 액수였다. 또 평양냉면과는 다른 계통이지만 또 하나의 냉면집이 들어서 모두 3개의 북한냉면집이 성업 중으로 모두 남한관광객들을 고객으로 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남한과 북한 그리고 냉면. 그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이 모여 연출해내는 분위기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무슨 까닭에 아름다운 평양처녀들은 이역만리 낯선 도시의 어느 한 구석에 갇힌 새(그네들은 한 달에 한 번 집단으로만 외출이 가능했다)가 되어 노래와 춤과 웃음을 팔고 있을까. 불현듯 오래전에 만났던 평양냉면의 실력자인 기름지고 도도한 뽄새의 중년 북한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 그 얼굴은 이내 고급 모피를 걸치고 단둥의 쇼핑가를 무시로 출입하며 달러 현찰로 사치품들을 사재끼는 북한의 붉은 귀족들과 겹쳐졌다. 한때의 소련과 동구를 몰락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던 노멘클라투라의 북한판이다. 결국 남한 관광객들이 급증하며 뿌려대는 시엠립의 달러를 긁어모으고 있는 자들도 그들 중 하나이며 달러의 향방도 그들의 호주머니다.

노멘클라투라가 탄생하는 순간 평등은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사회주의는 이미 사회주의가 아니다. 북한은 이미 오래전에 사회주의의 배신과 오욕을 상징하는 그런 오물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그 시점은 개인숭배가 고착되고 한명의 노멘클라투라가 만명의 노멘클라투라에게 면죄부를 하사한 그 시점부터일 것이며,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때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당과 인민을 통치할 권력을 물려받은 그 때부터일 것이다. 북한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볼모로 인민에게 굶주림과 민주주의의 박탈을 야만적으로 강제하는 기괴한 동토의 국가가 되어 있다. 그 체제는 마치 구소련의 음유시인이자 배우이며 가수인 블라디미르 비소츠키가 <뒷걸음 치는 말(Koni Priviredlivie)>에서 고통스럽게 노래한 야만의 말(馬)과 같다.

(*)인터넷판에는 '브이쵸스키'라고 오기돼 있다 노래 제목도 'Koni Priveredlivie'로 잘못 병기돼 있다. 맞는 표기는 'Koni Priviredlivye'이다. 필자는 이 노래에서 뒷걸음치는 말, 혹은 길들여지지 않는 말을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은유, 그래서 북한 체제에 대한 은유로 전이될 수 있는 은유로 이해했는데, 나로선 생소하다(그렇게도 읽을 수 있나?). 여하튼 영화 <백야>의 주제가이기도 했던 이 노래의 동영상을 참조해 보시길. 1970년대 전설적인 시인/가수이자 배우였던 비소츠키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hWEOaosGDi0. 노래 가사와 배경 등에 대한 설명은 바람구두님의 문화망명지 사이트가 자세하다(http://windshoes.new21.org/music-vysotsky.htm)  

나는 죽어간다. 한 포기 이삭처럼 폭풍우 나를 쓰러뜨린다.
새벽, 썰매는 나를 눈 속으로 끌고 간다.



북한의 체제는 그렇게 인민을 동토의 눈 속으로 끌어가고 있으며 그토록 오랜 시간을 꾸준히 뒷걸음쳐 왔다. 이제 그 체제가 도달한 곳은 핵을 앞세운 협박과 막무가내의 구걸이고 한줌 붉은 귀족들의 기득권 사수이며, 고작해야 아름다운 여성들을 음식점 봉사원으로, 노동자들을 러시아와 중국의 벌목장과 동유럽의 공장으로 헐값에 수출하고 그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는 막장일뿐이다. 이건 사필귀정의 종장이며 사회주의, 인민과 민주주의에 대해 최소한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북한이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호를 지금이라도 떼어내야 하는 이유이다.



시엠립에 머무는 동안 몇 번인가 평양냉면에 들렀다. 여성봉사원들이 부르는 이미 희화화된 ‘휘파람’ 노래는 끝임 없이 비소츠키의 절규로 뒤바뀌어 들렸다. 비소츠키는 “마지막 피난처에 도달할 때까지는 최후의 날을 늦추어다오”라고 애절하게 노래한다. 그러나 북한 인민에게 마지막 피난처는 어디이고 얼마의 날을 늦추어야 하는가. 앞으로 달리는 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시엠립을 떠나던 날의 내 우울한 상념은 해답을 얻지 못했지만 그 가슴 저린 물음은 지금도 줄곧 내 머리와 가슴을 떠나지 않는다.(유재현/소설가)

07. 01. 12.

P.S. '휘파람' 노래와 가사는 http://www.tongiledu.or.kr/zboard/zboard.php?id=edu_music&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it&desc=desc&no=3

휘파람 ♬♪♭ (작사 조기천, 작곡 리종오)

1. 어제밤에도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벌써 몇 달째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복순이네 짚앞을 지날 땐 이 가슴 설레여/ 나도 모르게 안타까이 휘파람 불었네

2. 한번 보면은 어쩐지 다시 못볼 듯/ 보고 또 봐도 그 모습 또 보고싶네
오늘 계획 300을 했다고 생긋이 웃을 때/ 이 가슴에 불이 인다오 이 일을 어찌하랴

(후렴) 휘휘휘 호호호 휘휘 호호호/ 휘휘휘 호호호 휘휘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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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1-12 22:23   좋아요 0 | URL
아....비소츠키 노래...정말 좋네요..최곱니다..^^ 그런데 가사가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위에 조금 있긴한데..

로쟈 2007-01-12 23:15   좋아요 0 | URL
자세한 건 바람구두님의 사이트를 참조하시길. http://windshoes.new21.org/music-vysotsky.htm
 

오래전, 11-2년쯤 전에 잠깐 써둔 걸 옮겨놓는다. 아침에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관한 기사(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83704.html)를 읽다가 예전에 만든 자작시집을 집어들게 됐는데, 거기서 다시 읽어본 것이다. 이번에 알게 된 거지만, 키에르케고르의 이 대표작도 국역본들이 대부분 품절/절판돼 있다. 작년에 나온 김용일 교수 번역의 <죽음에 이르는 병>(계명대출판부, 2006) 정도가 추천도서로 올라와 있다. 제목의 '형이상학적 질병'은 개인적인 관용구이기도 한데,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불안)과는 좀 다르지만 겹치는 부분도 없지는 않겠다.

 

 

 

 

아주 어렸을 때 일로, 나는 기억에 없지만 어머니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밖에 나가서 동생이 다른 아이와 싸움이 붙어도 나는 멀기니 옆에서 구경만 했다고 한다. 다 끝나고 나서야 둘이 손을 붙잡고 울면서 돌아왔다고. 이제와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럴 만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고 해서 내가 달리 처신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런 성격을 물려받은 것이겠지. 그런 걸 두고 의리가 없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친구들이 별로 없다. 그리고 그걸 안타깝게 여기지도 않는다. 간섭을 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다는 것이 모종의 원칙처럼 돼 버렸다.

연극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일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가족중심주의와 종족(민족)중심주의를 내가 혐오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런 건 박테리아나 말미잘도 다 하는 일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새끼 잘 되라고, 자기 집안 잘 되라고 분투하는 일 말이다. 단지 인간이란 종은 조금 현학적으로 그런 일을 할 따름이다(현학적인 말미잘!).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이건 모든 생물학적 종들이 지닌 자연사적 소명에 대한 일조으이 연대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보기에 좋다. 그래서 감동적이기도 하고.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고작 그게 전부일까, 하는 의혹이 생기면서 인상을 찡그리게 되고 속이 거북해진다. 이걸 나는 '형이상학적 질병'이라고 부른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차 좋은 쪽으로는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가끔은 옛날의 병이 도지는 것이다.

시나 소설에서 그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대목이 나오면 빙긋이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는 '이거 아주 쓰레기는 아니군!'이란 생각을 한다. 두 개만 여기에 적어보겠다.

 

 

 

 

파니는 아이가 마음을 다칠까봐 신중학 처신을 해야했고, 그래서 고추를 넣어줄 때도 싱싱한 것으로만 골라주었다. 자기 아들이, 어느날 아침, 고추 네 개 중에서 쭈글쭈글하고 빛이 바랜 묵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일로 아이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슬픔을 맛볼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고 파니는 생각했다.(봉그랑, <밑줄 긋는 남자>)

 

 

 

 

절름발이 개미가 나서서 해명한다. 그의 이야기로는, 바위냄새 풍기는 병정개미들은 '악성 스트레스를 막는 병정개미들'이라는 것이다. 스트레스에는 유익한 스트레스와 악성 스트레스가 있는데, 유익한 스트레스는 겨레를 발전시키고 사기를 북돋아주지만, 악성 스트레스는 겨레를 자멸에 빠뜨린다. 정보들 중에는 겨레에 알리지 않는 편이 나은 것도 있다. 이런 정보들은 '형이상학적인' 고뇌를 불러일으키는데, 그런 고뇌에는 아직 해결책이 없다. 그래서 겨레는 고민만 하고 대응책을 찾지 못한 채 기력이 쇠잔해진다.(베르베르, <개미>)

07. 01. 12.

P.S. 키에르케고르는 '악성 스트레스를 막는 병정개미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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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키스트 2007-01-12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중심주의에는 저도 꽤나 뒷걸음질 치는 편인데요.. "내 새끼, 내 가족 잘되라"는 식은 그래도 나아요. "내 새끼만 잘되라"에 비하면 말이지요...그리고 '형이상학적 질병', 그거 아마 불치병일걸요..^^

로쟈 2007-01-12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불치인 건 특권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원숭이와 구별해주는 종차. 호모 사피엔스를 그래서 저는 '호모 사피엔자'라고 부릅니다(사유능력은 인플루엔자 같은 거라서)...

깽돌이 2007-01-1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어린시절 이야기 들으니...저도 남자애로서(!) 싸움을 잘 하고 싶은데(물론 어릴때^^)시도조차 안해본것이 한이 된듯합니다.

로쟈 2007-01-13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신에 제가 바둑은 쌈바둑입니다.^^
 

어제 주문한 책들 중의 하나는 사회학자 김동춘 교수의 신간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길, 2006)이다. 아마도 작년 연말에 나왔어야 하는 책이 약간 지체된 모양이다. 저자의 전작들 만큼이나 두툼하고 또 듬직하다. 거기다 제목! 그래서 읽어야 할 '의무감' 같은 걸 촉발시킨다(2월달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야겠다). 미리 리뷰기사 두 개를 참고삼아 읽어둔다. 개인적인 스크랩이지만 출간 소식을 반가워할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일보(07. 01. 12) "한국, 10년만에 기업사회로 변했다"

외환 위기를 경험한 지 10년. 세련된 말로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국민 대다수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몸으로 알고 있다. 김동춘(48)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최근 출간한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도서출판 길)에서 “한국이 ‘기업사회’가 됐다”는 말로 지난 10년간의 변화를 표현한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단순화하면 시장 혹은 기업이 사회를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사회가 시장의 일부가 되고, 기업이 가장 이상적인 조직으로 부각된 것이다.

김 교수가 말하는 한국의 기업사회화 양상은 이렇다. 초일류, 일등 등 경쟁을 부추기는 용어가 난무하고 CEO 대통령, CEO 총장, CEO 장관, CEO 시장이 유행이다. 경제부처 장관이 교육부 장관에 기용되고, 정부 관료가 대기업에 무더기로 들어간다. 대기업 혹은 그 대기업 총수의 잘못은, 돈을 벌어준다는 이유로 법적 면죄부를 받고, 엄정한 법 집행을 책임지고 있는 법무부 장관은 “기업이 신명 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만 달러 시대를 주창하면 정부가 이를 받아 반복한다. 정부는 운영의 법칙과 지향이 기업과 다른데도 여전히 기업 배우기에 열중이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미국을 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미국은 돈이 지배하는 사회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기업가의 아들이고, 낸시 페레스 하원의장은 남편이 백만장자다. 기업에 대한 비판이 거의 없고, 그래서 기업이 정치 외교 군사 심지어 사람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김 교수가 보기에 한국의 기업사회화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돼 있다. 시장도, 국토도 좁아 생존의 압박이 매우 크기 때문에 기업의 신호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교육 의료 복지 등 공공 영역의 임무를 개인이 부담하는 것도 돈에 대한 의존을 높이는 요인이다.

김 교수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기업사회가 반공사회와 닿아있다는 점이다. 과거 안보를 이유로 고문 등 비인도적인 행위가 용인됐듯이, 지금은 돈만 되면 무엇이든 괜찮다는 것이다. 군사형 사회가 총과 칼을 앞세웠다면 기업사회는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김 교수는 이 대목에서 “히틀러는 경제 불황을 활용해 나치즘을 일으켰다”고 상기한 뒤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절망감이 우리 사회에 새로운 파시즘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의 기업사회화 정도가 미국에 달렸다고 말한다. 고삐 풀린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견제를 받을 때 우리의 기업사회화도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배층의 도덕성에 대한 유달리 강한 저항력도, 기업사회화를 억제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보고 있다.

김 교수는 “1970년 전태일이 제 몸을 불살랐을 때는 대학생들이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지만, 지금과 같은 분위기라면 사회적 약자가 분신해도 그를 못난 놈이라며 더 소외시킬 가능성이 있다”며 “당장 먹고 살기 힘들더라도 과도한 기업사회화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박광희 기자)

한겨레(07. 01. 12) 한국사회는 기업의 식민지

시이오 시장, 시이오 총장, 시이오 목사, 시이오 대통령…. 한국에서 시이오(CEO,기업 최고경영자)는 모범이자 모델이고 표준이자 이념이다. 지방자치단체를 운영하는 일에서부터 국가와 정부를 통괄하는 일까지, 학문의 전당을 책임지는 일에서부터 사람의 영혼을 돌보는 일까지 모든 것이 ‘기업경영’을 이상형으로 삼고 있다. ‘전사회의 기업화’ 논리는 기업가 식으로 하는 것이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효율적이며 가장 진취적이라는 가정 위에서 맹렬한 힘으로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있다.

‘반공’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던 한국사회는 이제 혁신만이 살 길이고 변화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고 있다. 요컨대, 기업만이 구세주라고 통성기도하는 형국이다. 이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여기에 함정은 없는가. 혹시라도 기업가의 피리 소리를 따라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가 최근 출간한 책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의 성찰>(도서출판 길 펴냄)에서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기업화 광풍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나섰다.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 사회 변화를 성찰한 글을 모은 이 책은 서론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1997년 외환위기 이래 한국사회가 ‘기업사회’로 전환했다고 진단하면서, 그 변화의 파국적 본질을 직시할 것으로 촉구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처음 제시한 ‘기업사회’라는 말은 한 마디로 줄이면, 기업이 중심이자 주인이 된 사회다. “기업이 단순히 사회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기업의 모델과 논리에 따라 재조직되는 사회”가 기업사회다. 경제학자 카를 폴라니의 논리를 빌리면, 기업사회는 “시장이 사회로부터 분리돼 나와 자율적인 것이 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를 식민화한 상태”를 말한다. 이 식민화의 가공할 성격은 사람들이 식민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과거의 식민화가 총과 칼을 앞세운 것이었다면, 새로운 식민화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앞세운다. 사회 전체를 기업의 힘 아래 굴복시킨 기업사회는 강력한 이데올로기 체제다.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헌신을 끌어내고 그것을 동력으로 삼아 작동하기 때문이다.

삼성공화국, 정책 입맛맞게 조성

자본주의 체제, 시장경제 체제라고 해서 모두 기업사회인 것은 아니다. 기업이 사회의 기준으로 서고 기업가 마인드가 사회적 마인드가 되고, 기업의 사회지배를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으로 인식하는 사회가 기업사회다. 기업은 단순이 이윤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고용을 창출한다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이윤은 더 많은 고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기업사회의 바탕에 깔린 일반적 믿음이다. 기업의 이익이 곧 사회의 이익이 되는 것이다. 이 믿음 위에서 이제 기업 바깥의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 기업가의 손이, 기업가 마인드가 뻗치지 않은 공공 영역은 비효율과 무능력의 온상으로 낙인찍힌다. 그런 인식이 진전되면 “효율성과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이 정부와 정치를 모두 직접 담당하는 게 좋지 않은가”라는 과격한 주장마저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대기업이 국가의 교육과 복지는 물론이고 국가의 최후 보루인 안보와 전쟁까지 담당하는 ‘기업가정부’, ‘기업가국가’가 나타날 가능성이 커진다. 김 교수는 지금 미국이 거기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지구적 확산으로 기업사회라는 미국적 모델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기업사회는 국경을 치고 들어가 점령군처럼 주둔하고서 연일 포고령을 내린다. 모든 것을 기업의 이익에 맞춰 바꾸라. 부패한 것은 참아도 이익을 내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비효율이야말로 부도덕이다.

기업사회는 수천년 인류를 이끌어온 도덕의 기준마저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기업사회는 결코 대중의 이익에 복무하는 사회가 아니다. 기업사회는 기업주의 사회이며, 더 좁혀 말하면 대기업 소유주와 경영자의 사회다. 통제받지 않는 기업사회는 대기업의 절대권력화를 낳으며 그것은 기업사회 이데올로기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기업부패를 불러온다. 기업가의 이윤 추구와 공공의 이익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빚어진다. 기업의 생산성 향상의 결과는 사회의 특권층에게 집중된다. 공공성은 실종되고 기업의 사익이 공익으로 둔갑해 횡행한다.

약자 보호법 대항 공장이전 위협

김 교수는 지난 10년 사이 기업사회의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기업은 선과 정의와 올바름의 잣대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기업을 비판하는 것은 곧 공익을 비판하는 것이 됐고 기업가의 잘못을 추궁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산을 공격하는 것이 됐다. 김 교수는 여기서 삼성의 경우를 이야기한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기업사회 한국’의 한가운데에 삼성이 버티고 있다.

삼성은 국가경제를 책임지는 견인차와 같은 존재로 칭송받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나서서 자신이 아니라 삼성이 한국의 대표자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삼성의 경쟁력 강화는 곧 국가 경쟁력 강화로 통한다. 급기야 정부의 주요 정보가 삼성의 정보망을 통해 사유화된다. 삼성의 힘은 관료사회를 움직여 정부의 정책마저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정할 정도로까지 강력해지고 있다. 국가와 정부가 껍데기 또는 들러리가 되고 삼성이 나라의 핵심을 장악하는 말 그대로 ‘삼성공화국’이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공화국 현상은 한국사회가 기업사회로 진입했음을 도드라지게 입증하는 사례다. 기업사회는 사회를 재편하려는 이데올로기 공세도 멈추지 않는다. 기업가 단체들이 ‘중고등학교 경제교과서 반시장·반기업 정서를 부추긴다’며 뜯어고칠 것을 요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 법안을 통과시키면 기업을 국외로 이전해버리겠다는 ‘기업 파업’ 위협도 마다하지 않는다. 국민이 기업을 키운 것이 아니라 기업이 국민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공격적으로 구사하는 모습이다.

정치기능 복원·주체적 대중이 해법

기업사회의 이 진군은 사회적 보호장치가 폐기되고 약자가 강자의 힘 앞에 무방비로 서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기업사회에서 처벌은 체포·구금·고문·학살이 아니라 명예퇴직 강요, 분사, 비정규직화, 해고, 비연고지 근무 요구”로 나타나며, 더 끔찍한 것은 그것이 “처벌이 아니라 기업 경영 합리화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돼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약자들의 자살행렬이 ‘기업의 처벌’에서 비롯한다.

김 교수는 이렇게 사회 구성원을 식민화하고 지배하는 기업사회에서 벗어나려면 정치의 기능을 복원시켜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기업사회의 하수인이 된 정치를 본디 상태로 정상화해야 한다. 대중이 단순히 기업사회의 지배대상인 ‘소비자’가 아니라 시민으로, 주체로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유권자이며 노동자이며 주민이며 학부모이며 자신의 귀중한 삶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존엄한 인간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억울한 죽음에 공감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다.”(고명섭 기자)

07. 01. 12.

P.S. 한국사회의 단면을 꼬집는 기사 하나를 덧붙여둔다.

경향신문(07. 01. 12) 상상할수록 불쾌한 광고…양극화 부추기는 TV광고 눈총

TV 광고가 도를 넘는 소재와 설정으로 시청자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다. 소비자들의 마음은 물론 지갑까지 열어야 하는 광고의 속성상 허영을 부추기고 현실을 과장할 수도 있지만, 요즘 방영되는 광고는 지나치게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하는 데다 사람 목숨을 아예 돈으로 환산하는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부럽거나 불쾌하거나

지난해 말 한 보험회사 광고가 논란을 일으켰다. ‘남편이 죽은 뒤 보험설계사의 도움으로 생명보험금 10억원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광고를 본 시청자들은 ‘실제로 10억원을 받으려면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는 지적부터 ‘생명을 돈으로 연결시켰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보험설계사를 남자로 설정해 부적절한 상상까지 가능케 했다’는 반응도 있었다. 광고회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광고가 소비자들에게 불쾌감을 안겼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명품 아파트’ 이미지를 남용하고 있는 아파트 광고에서 소형 평수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헬스클럽에 골프장까지 갖춘 대형 아파트에 사는 여성들은 서로 같은 아파트 주민임을 한눈에 알아본다. 때로는 유럽이나 뉴욕의 이미지를 차용하며 집안에서 드레스를 입고 다닌다. 유부남, 유부녀가 아파트에서 첫사랑과 재회하는 분위기를 묘사하는 한 아파트 광고는 ‘불륜 아파트인가’ 하는 냉소까지 유발한다. 아파트 속 모델들은 신형 아파트의 특별한 시설을 통해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고 배우자, 아이와 함께 지나가다 어색하게 마주친다. 집값 폭등과 경제적 양극화,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 등으로 괴로운 소비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광고는 끊임없이 ‘돈 들고 돈 되는’ 아파트만 보여준다.

자동차 광고에서는 자동차의 크기나 값을 사회적 ‘성공’과 ‘능력’의 증거로 연결시킨다. 광고 속에 외환위기 시절 절약의 이미지를 대변하기도 했던 소형차나 경차는 온데 간데 없고 대형 외제차를 경쟁 상대로 삼는 대형차들만이 넘쳐난다. 대형차를 타는 아버지를 둔 아이가 친구들에게 인형을 나눠주는 내용이 방영되기도 했다.

이런 광고에 대해 시청자들은 불쾌함을 넘어 화가 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학생 김민석씨(27·한국외대 불어과)는 “아는 분이 광고를 본 아이가 ‘우리는 집이랑 차가 왜 이렇게 작으냐. 언제 저런 데로 이사가느냐’고 물어 가슴이 아팠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트렌디 드라마에 외제차와 최신형 휴대전화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처럼, TV 광고도 비현실적 상황으로 허영을 조장한다”고 말했다.

#일그러진 현실 더욱 일그러지게

학습지나 학원 광고도 비뚤어진 우리의 교육현실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한 학습지 광고에서는 학부형이 치과에서 이빨을 잘못 뽑히고도 “괜찮다”며 웃는다. “당신은 상위권 엄마의 기쁨을 아느냐”고 묻는 이 엄마는 아이가 상위권이 된 배경에는 학습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와 함께 학습지 교사에게 머리 숙여 인사한다. 심지어는 ‘학년을 앞서가는 힘’이라며 미리 학습지로 공부한 아이들이 학교 선생님을 떠난다는 내용의 광고도 있다. 광고 속에 등장하는 교사마저 ‘애들은 (학습지)를 좋아해. 자꾸 자꾸 앞서가면 나는 어떡해’라며 노래한다.공교육이 힘을 못 쓰고 사교육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현실이 광고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교육효과를 강조하는 것을 넘어 공교육을 아예 무시하는 듯한 광고를 보는 시청자들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김형진 팀장은 “광고가 부정적인 현실을 더욱 왜곡하며 사회적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팀장은 “소비층은 다양한데 비해 광고는 상류층 지향으로만 흐르고 있다”며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끌어내기 위해 불쾌감까지 주면서까지 소비자들을 자극한다”고 지적했다.(장은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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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12 07:07   좋아요 0 | URL
우리사회는 어딜가나 미국에 대한 담론으로 넘쳐나지요.(미국유학파가 많기 때문인지) 반면 유럽과 우리를 비교해보면 분통터지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요. 미국과 비교하면 이 사회는 정말 잘 돌아가고 있는거지만 ㅋ

로쟈 2007-01-12 08:15   좋아요 0 | URL
기사내용만으로는 상식의 확인수준이지 '통찰'이란 건 없는데요. 강준만의 '삼성공화국'론에서 더 나아간 내용이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아놔키스트 2007-01-12 09:03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낚은 책에 저는 썩 낚이지(^^) 않네요..근데 광고 기사를 보니 속이 부글거립니다. 무엇보다 저런 광고들 보기 싫어 전 TV를 끊었지요...

로쟈 2007-01-12 09:07   좋아요 0 | URL
다행이십니다. 두꺼운 데다 책값도 비싸거든요.^^ 저는 읽어볼 '필요'가 생겨서 부득불 구입을 했습니다...

드팀전 2007-01-12 09:17   좋아요 0 | URL
^^...제가 오늘 아침 본 기사 두 개가 공교롭게 페이퍼로 올라왔군요.한겨레 김동춘 교수 리뷰하고 경향신문 광고....
기사는 기업공화국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듯한데..알라딘에 실린 소제목들을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네요. IMF 이후 한국 사회 전반의 변화를 짚고 있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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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 | '기업사회'로의 변화를 중심으로

제1부
탈분단 시대 지식인의 역할 | 리영희의 사상과 실천을 생각하며
한국 사회과학의 탈식민 과제
21세기에 돌아보는 1980년대 한국 사회성격 논쟁
한국의 지식인들은 왜 외환위기를 읽지 못했는가

제2부
한국의 우익, 한국의 '자유주의자' | 상처받은 자유주의
한국의 자유주의자
한국의 지식사회와 지식권력

제3부
'민주화'라는 환상? | 교체되는 권력과 교체되지 않는 권력
강요된 지구화와 한국의 국가, 자본, 노동 | IMF체제하의 한국
노동.복지체제를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 | 냉전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한국 노동자 내부 구성과 상태의 변화 | '계급' 없는 계급사회?
신자유주의와 한국 노동자의 인권 | 외환위기 직후를 중심으로
전환기의 한국사회, 새로운 출발점에 선 사회운동

제4부
한국 민주화의 주도세력
21세기에는 학벌주의가 사라져야 한다 | 대학 서열화 극복을 위한 대학개혁
유교와 한국의 가족주의 | 가족주의는 유교적 가치의 산물인가

제5부
한국인들의 자민족 중심주의
시민운동과 민족, 민족주의
21세기와 한국의 민족주의
일상적 파시즘론에 대한 생각
해방 60년, 한국의 민족주의와 민족문제의 위상

로쟈 2007-01-12 10:25   좋아요 0 | URL
기사는 아마 다들 서론만 읽고 썼나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