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할일이 많았는데, '중복리뷰'와 관련한 페이퍼들을 읽다가 상당 시간을 허비하게 돼 유감스럽다(문제제기 자체야 5분이면 정리될 수 있는 내용이었는데, 논쟁이 너무 소모적이었다). 무슨 일을 하면서 '나의 서재'를 같이 띄워놓는 일은 앞으로 삼가해야 하지 않나 싶다. 게다가 창피하게도 어제오늘 주간페이퍼의 달인 1위이다. 이런 확실한 '물증'이 있으니 밤낮 페이퍼질이나 하고 있다는 핀잔을 들어도 변명할 구실이 없겠다. 거의 페이퍼꾼 아닌가? 이러니 돈내고 페인트칠하는 주제에 알라딘에서 '알바'하느냐는 소리까지 듣는 것 아닌가? 남세스러워서라도 한동안 잠적하든지 해야겠다. 혹 그런 결단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들고가고픈 책은 아마도 오늘 도착할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창비, 2000)과 조만간 주문할 T. E.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뿔, 2006)이 될 것이다.

 

 

 

 

나온 지는 벌써 몇 년이 지났건만 최근에 영화화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오래된 정원>은 일종의 후일담 소설인바 지난 80년대와 90년대를 가름하는 지표이면서 20세기와 21세기의 경계를 표시하는 작품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어제가 박종철 학형의 사망 20주기였지만 지난 80년대, 별로 돌이켜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오래된 정원>을 사지도 읽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박종철'이란 이름을 내가 제일 처음 본 것은 20년전 이맘때 인천의 한 가건물 식당에서였다('오래전 식당'이로군!). 논술시험을 보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상경해서 친구분 댁에 이틀인가 유숙해야 했었는데, 그 댁이 식당일을 하고 있었다. 그 식당에서 읽은 아침신문에 '턱' 치니까 '억' 하더란 기사가 났던 것이다.

예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학생활이란 게 얼마나 '비낭만적'일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좀더 우려했어야 했다. 얼마후 대학에 입학하고 나는 두달쯤 다니다가 학생생활연구소에 우울증 상담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6월이 시작되자마자 기말시험도 거부한 채(한두 과목은 보았지만) 지방에 있는 집으로 내려갔다. 6.10항쟁이 일어났을 때 아마도 나는 바닷가에 있었거나 배 쭉 갈고 엎드려 소설책들이나 읽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1학기 같은 분위기였다면 나는 대학을 오래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6월 이후에 맞은 2학기는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아졌다('개량국면'이라고 한다). 그해 겨울 알다시피 대선이 있었고, 나는 대선 참관인단이 되어 다시 지방에 내려왔었다. 물론 '보통 사람들' 때문에 또한번의 '좌절'을 맛봐야 했지만...  

<오래된 정원>은 불가피하게 그런 시간의 족적들을 들추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읽기 괴롭다. 문제는 내가 그런 괴로움도 이젠 얼마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란 어느 시구절이 나의 무기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대개 호평이 많은 듯하다. 임상수의 현대사 3부작 가운데, 그래도 내게는 가장 '현실적인'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그의 냉소는 한국영화에 드문 자질이지만, 나는 냉소를 즐기지 않는다). 임상수 감독과의 인터뷰 기사들이 많지만 얼른 눈에 띄는 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12211738051&code=960401 이다.

그럼, 또 왜 <지혜의 일곱 기둥>인가? 최근에 데이비드 린의 영화 <닥터 지바고>(1965)와 관련된 이들, 곧 제작자와 원작자에 대한 기사들을 페이퍼로 만들면서 자연스레 관심이 가던 차에 <닥터 지바고>의 바로 전작이자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주인공 'T. E. 로렌스'의 '원작'이 출간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책은 지난 11월말쯤에 나왔는데, 북리뷰 기사들을 거의 빼놓지 않는 내가 어떻게 무심코 지나갔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짐작엔 다른 신문들에서 비교적 작은 기사로 다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참고할 만한 언론리뷰는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f=total&&n=200611250128).

사실 이 로렌스는 또다른 로렌스인 소설가 'D. H. 로렌스'보다도 내게 먼저 각인돼 있는데, 오래전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세계위인전에 그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차례 TV에서 방영되었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나는 진득하게 본 기억이 없고 따라서 유별난 감동을 간직하고 있지도 않다. 영화를 공부하던 한 선배가 최고의 추천작 중 하나로 꼽아서 그런가 보다 했을 뿐(피터 오툴이란 이름은 덕분에 기억하게 됐다). 그런 '아라비아의 전설'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더구나 원작이 나온 지 70여년만에 완역된 책이라면.  

소개에 따르면, 책은 "20세기 초반 서구 제국주의와 아랍 민족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했던 T.E. 로렌스의 자전적 기록. 아랍 반전 전쟁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작품으로, 국내 최초로 완역되어 선보인다. 정신의 힘과 의지에 대한 찬양, 거대한 역사적 흐름 안에서 몸부림쳤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함께 녹아 있는 저작이다. 영어권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필적하는 대작으로 손꼽히며, 20세기 최고의 전쟁 문학이자 자서전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원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후 맥락을 앞에서 언급한 리뷰에서 발췌하면 "영국 옥스퍼드대를 수석졸업한 엘리트 고고학자였던 T. E. 로렌스는 1916년 28세의 육군 정보장교(대위) 신분으로 오스만제국의 해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것은 오스만제국 안에서 터키인과 하나가 됐던 아랍인에게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불리는 오늘날 시리아, 리비아, 요르단, 이라크, 이스라엘 지역의 통치권을 주는 것이었다. 아랍독립전쟁이라는 거창한 명분이 달려 있던 그것은 거대한 기만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한편이었던 오스만제국을 분열시키기 위한 대영제국의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적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로렌스의 제의를 받아들여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서쪽 지역인 헤자즈를 지배하던 후세인 이븐 알리에게 오스만제국에서 분리된 통일아랍왕국의 수장 자리를 제의했다. 대신 영국과 한편이 돼 오스만제국에 대한 전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맥마흔 선언과 더불어 영국은 프랑스와 이 지역의 분할통치를 밀약한 사이크스피코협정을 체결했다. 로렌스는 이런 음흉한 계약 위반 사실을 눈치 챘으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 아랍인과 우정을 나누며 2년여간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이 책은 1916∼1918년 이집트에서 사우디의 메카로, 다시 홍해 유역의 아카바를 거쳐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이어지는 ‘사막의 전투’를 치르며 겪은 모험에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함께 녹여낸 그의 회고록이다."



 

 

 

물론 책에 대한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랍계 미국의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이 책이야말로 ‘제국주의의 대리인’의 관점에서 쓰인 오만과 편견의 덩어리라고 비판했"고, "실제 이 책에는 터키인을 대신해 중동지방을 다스릴 새로운 민족(아랍민족)을 세우겠다는 제국주의적 시각이 틈틈이 포착된다." 그러니/그래서 문제적이다.

사실 잠적을 꿈꾸는 이들이 갈 만한 곳이라곤 '감방'이거나 '사막' 말고 더 있겠는가. 그러니 들고갈 책도 자명할 밖에. 해서 당신에게도 권한다. '잠적할 때 들고가고픈 책' 두 권을. 물론 <오래된 정원>이나 <지혜의 일곱 기둥>을 들고 가는 게 아니라 감방/사막에서 갖고 나오는 '강적들'은 예외다. 상종을 못할 자들이다...

07. 01. 15.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7-01-1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좀 타격을 입으셨군요. 이 주부터는 좀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잠적을 꿈꿀 수 있는 님 부럽습니다^^

로쟈 2007-01-1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정신적(시신경적), 물질적 피해가 상당합니다. 1년에 리뷰 두어 개 쓰는 형편이라 '중복리뷰' 자체에 관심을 가질 만한 형편도 아니면서 말이죠('중복페이퍼'라면 또 모를까)...

stella.K 2007-01-15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혜의 일곱 기둥 읽고는 싶은데 영 자신이...

로쟈 2007-01-1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막에 가실 때(만) 읽으시면 되지 않을까요...

기인 2007-01-15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생각보다는 로쟈님의 학번이 낮으시네요 ^^ 황석영 선생님의 책은 나왔을 때 봤었는데, 황석영 선생에 관한 논문은 꼭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ㅋ 하고 싶은 것만 많은 공익 -_-;; )
영화는 제 주위에서는 혹평이 더 많던데, 로쟈님은 호평을 더 많이 들으셨나보네요 ㅎ

로쟈 2007-01-1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렇게 노티가 났었나요?^^ 그래도 기인님보다는 꽤 높은 학번 같은데요. 지금 나이도 '명퇴'가능한 나이이고(알라딘에서도 '후임자'를 물색중입니다). 영화에 대한 평은 주로 잡지나 언론의 것들을 참조하고 있는데, 실제 관객들의 '현장평'은 좀 다를 수 있겠죠. 제 예상치보다는 평들이 좋았습니다. 물론 대학 주변의 눈높은 관객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호평하는 걸 저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만...

기인 2007-01-1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아니 이제 활발히 개척하실 연배시죠! 물론 저보다는 많이 높으신 선배님이시죠 :) 예전에 제 국문과 선배님들과 저랑 (90년대 중후반학번들)이 모여서 로쟈님의 학번대를 추론해본 적이 있었는데, 80년대 초반 같다는 것이 대세였거든요. 사실 예상과 별 차이는 안 나지만, 저희한테는 83-85 와 86-88 은 쫌 다르게 다가와서요. 86-88은 같이 하는 것도 많고 '선배'라는 위치라면 83-85는 '선생님'으로 갈리는 뭔가 물질적 기반의 차이가 있어서 ^^; ㅎ

로쟈 2007-01-15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론'씩이나요.^^; 사실 여기저기 단서들은 흘려놓았었는데 말입니다. 제 경우엔 97-98학번 정도가 경계인 것 같습니다. 저더러 형/오빠라 부르기도 하고, 선생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물론 듣기 좋은 건 '오빠'죠...

클리오 2007-01-1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로쟈오빠!!! (문득 실례가 아닌가 하면서 눈을 하늘로.. ㅋ) 이렇게 부르고나니, 어려웠던 로쟈님이 더 편해지는 듯한... 이런 페이퍼에나 댓글을 달 수 있는 제 수준을 탓하고 싶어요.. ^^ 그리고 저 책은 보셔도 좋지만, 잠적은 하지말고 자주 뵈요.. 아니, 저만 보는건가요? ^^;;

로쟈 2007-01-15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클리오누님, 오빠라니요?!!

클리오 2007-01-15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누가 더 어리나 시합하기?? ^^; 87년에 전, '광주사태' 사진전을 처음보고 경악했던, 그러나 심한 데모로 학교가 빨리 끝나는게 마냥 좋았던 중학교 1학년 이었다지요.. ㅋㅋ

로쟈 2007-01-15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데요. 저는 박통이 암살당하는 바람에 전쟁이 일어날까 잔뜩 겁먹었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어요!..

yoonta 2007-01-1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복리뷰논란이라... 중복해서 리뷰를 올리건 말건 상업적 의도만 없다면 그만인 일 아닌가요? 왜 중복리뷰에 대해 그렇게 예민한건지 솔직히 이해가 안간다는. 출판사 관계자들이 중복리뷰를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런 쓰잘데기 없는 논란 때문에 로쟈님이 잠적하는 일은 절대 없길 바랍니다..^^

로쟈 2007-01-16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선 중복리뷰로 여러 곳에서 '이주의 리뷰'에 선정된다든가 하는 문제만 걸러진다면, (도의적인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굳이 그런 수고를 감수하는 것도 취향이지요). 그 정도 해야 '서평꾼'이기도 하고. 저더러 은근히 잠적하길 권하시는 것 같네요.^^ 전 감방에 안 갑니다! 사막도 싫고요!...

나비80 2007-01-1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복리뷰에 대한 견해를 소략하게 밝혀주셨네요. 저는 로쟈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했었거든요. 워낙 알라딘에서도 '오버마인드' 역할만 하시지 웬만한 전장(?)엔 직접 뛰어들진 않으시니까. 저도 사실 그 '중복서평'에 관한 논란과 추인, 반박, 응징의 현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상황만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형편이랍니다. 괜한 말을 늘어놓았네요.^^
저는 뭐든지 책으로 봐야 제 맛이라는 편견을 가진 편입니다. <뽕> 시리즈는 제외하고서 말이죠.

로쟈 2007-01-16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별로 특출난 견해도 아니어서, 그리고 '전장'에 뛰어들 만큼 그 문제에 열의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구경만 했습니다. 골자는 (1)예스24와 알라딘에 같이 리뷰를 올리시는 분들이 많아지면 결국 차별성이 없어지는 거 아니냐, (2)그리고 이중으로 '수익'을 챙기는 거 아니냐 같은데, (1)에 대해서는 데이터가 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도서구입을 양쪽 모두에서 하는 경우라면 무방한 거 아니냐란 게 제 생각입니다(그게 아니라 한쪽 서점하고만 거래하면서 다른쪽엔 서평만 띄워놓는 건 좀 얌체짓이란 생각이 들고요). (2)에 대해선 그 '수익'이란 게 맥시멈 한달에 만원 가량일 텐데(물론 현상 리뷰는 좀 액수가 되지만) 아직은 무시할 만한 수준 아닌가, 그 '노동'에 대해서 본전도 못 추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혹은 출판사쪽과 연계된 알바 서평 같은 건 진지하게 문제가 될 만하겠죠(대규모 서평단이라도 뜬다면). 하지만, 그게 당면한 문제는 아닐 뿐더러, 그러한 기획/시도가 성공할 거란 보장도 전혀 없지요. 뭐가 무서워서 장 못담그는 격이라고 봅니다. '소략하게' 몇 자 더 보충했습니다...

나비80 2007-01-1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서평쓰기'라는 행위를 '노동'으로 분류해야 할지 '유희'로 분류해야 할지 아니면 그 둘의 교섭 작용으로 인해 나오는 산물인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대목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둘을 넘어서는 어떤 강력한 동인이 있을 수도 있겠구요. 저는 알라딘 쪽에서도 그 주변부에만 기식하는 형편이라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 대한 감각도 무딘 편이고, 오로지 '불량 서평' 대목만으로도 스스로 찔리는 부분이 많아 '중복'까지는 언감생심 말도 못 꺼내겠더라구요. 전 아무 생각 없이 일기식으로 쓴 서평도 있거든요. 전문 서평꾼들에겐 아마 책의 객관적인 평가를 방해하는 질 낮은 사변담쯤으로 보였을 것 같네요. 소박한 변명이었습니다.

로쟈 2007-01-16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한 보수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발적인 무보수 노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희'라고 하기엔 품이 많이 들고 또 주변의 시선(?)도 의식해야 하니까요. 그게 주류(?) 시각에서는 '서평꾼' 정도로 폄하될 수도 있겠죠. 이게 무슨 공직도 아니고 대단한 벌이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자본'이 펼쳐놓은 마당에서 주제들 모르고 깝치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다 사이드이펙트, 부작용입니다. 의도하지/계획하지 않은. 알라딘 '커뮤니티' 같은 것도 그런 거구요. 제가 간혹 치르는 유명세(?)도 그런 거겠죠. 여긴 '동네'니까요...

나비80 2007-01-1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착한 사람들의 마을'이라니 하는 말도 나오게 된 모양이군요.
로쟈님의 세세한 자료 배치라든지, 정보의 질적인 측면을 보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계시단 걸 충분히 알겠습니다. 갑자기 품질이 낮아지면 소비자들의 항변이 장난아니겠죠? ㅋㅋ 그러나 로쟈님의 페이퍼 쓰기의 경우는 본인의 욕구 충족도 큰 폭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로쟈 2007-01-16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멘트는 아주 당연하신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모든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하고 또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이죠. 밥먹고 숨쉬는 것부터 시작해서... '큰 폭'이라는 건 제 경우 비공개를 공개로 돌린다는 것 정도일 텐데, 사실 비공개인 페이퍼들도 적지는 않습니다.^^

마늘빵 2007-01-27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저 98이에요. 로쟈님의 경계선요. ^^v

로쟈 2007-01-2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오빠'(?)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지젝에 대한 비판에는 어떤 것들이 있냐고 에바님이 물어오셔서 몇 군데 검색을 해봤다. 몇 편의 글들에 대한 서지 정도를 확인해두었는데, 영문 서지인지라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띈 건 다름아닌 내가 3년전에 쓴 것이다. 다시 읽으며 약간의 '시간차'를 느끼게 되지만, '자료'로 치면 무난할 것도 같아서 그냥 옮겨놓는다(지젝에 관해 쓴 자료들을 다 옮겨놓은 줄 알았는데 창고에 없다!).  

인터넷 검색(산책)을 하다가 작년(*2003년) 10월 6일자 이대학보에 실린 '지젝 특집'을 읽게 되었다. 당시 각 대학 학보마다 지젝의 방한을 맞이하여 학술면 특집을 마련했더랬는데, "욕망과 실재로 현대사회를 본다"라는 이 특집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 특집은 "사회를 구하는 환상,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지젝의 작업을 개관하는 기사와 함께, 각각 그의 행동적 지식인으로서의 실천에 대한 지지와 이론적 작업에 대한 비판을 담은 짧은 기고문 두 편으로 구성돼 있다. 내가 제목에서 '두 가지 의견'이라고 한 것은 이 두 기고문을 말한다.

먼저 허윤(국문4)은 자신이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를 열거한다: "그는 학문이 삶과 괴리되지 않음을, 사상이 현실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활동가다. 이것이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학자는 상아탑에 갇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젝은 상아탑의 높은 벽을 부수고 두 발을 땅에 붙인 채로 자신의 사상을 펼친다. 개인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으로 여겨졌던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을 현실사회와 연결시키고 현실을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짧은 기고문의 마무리인데, 여기에 그대로 옮긴 이유는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래에 나는 그보다 열정적인 목소리로 우리의 전지구적/인간적 현실에 대해서 발언/비판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내가 작년에 읽은 가장 감동적인 책이다). 지난번 방한 강연회에서의 그의 거친 목소리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복장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바이지만, 그는 이론적/사회비판적 저작들을 계속 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즘의 인물은 아니다. 요컨대 '교수'나 '학자' 타입이 아니라, '활동가'이다.

사실 그가 슬로베이나의 류블랴나 대학에서 맡고 있는 지위도 우리식의 '연구교수' 같은 것이어서 강의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그는 강의로부터 면제돼 있다). 그것은 슬로베니아 당국 혹은 대학권력과의 마찰/불화의 결과이지만, 그는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전화위복으로 삼는다. 우연찮게(우연은 아니다. 그는 대담에서 영화에 대한 관심/열정은 철학보다도 앞선 것이었다고 말하니까) 대중적인 영화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으로 '뜨게' 되었지만, 그의 그러한 '전술'은 사실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낳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건 충분히 훌륭한 '미끼' 역할을 해준 것이니까.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부터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친-지젝파들은 애초에 라캉을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갖지 못했거나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대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라캉 이해는 전적으로 자크-알랭 밀레에 기대고 있다. 밀레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지젝도 가능하지 않았을 법하다. 하지만, 그가 이론가이자 해석가로서 밀레와 구별되는 지점은 이미 언급되었다시피, 그가 '활동가'라는 점에 있다. 물론 그가 활동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라캉의 이론과 독일 관념론 같이 아주 난삽한 '이론'이긴 하지만, 이때의 이론은 이미 실천으로서의 이론이다. "정신이 뼈"라는 헤겔의 문구를 반복하자면, 그에게는 "이론이 곧 실천"이다(반면에 '실천적 이론'이라거나 '이론적 실천'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이론/실천의 이분법적 도식안에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와 작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열정은 '연구'에 바빠서 미처 사회적 '활동'을 할 만한 여가가 없는 책상물림들에겐 충분히 자극적이며 모범이 될 만하다. 그러한 모범에 따른다는 것은 무사안일하게 'mere life'나 'mere study'에 함몰돼 있는 '왜소한' 자신의 삶/학문을 더이상 방치하지 않는 것이며, 지금까지의 습관/관행을 "이건 아니지!"라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어서 진태원(서울대 철학과 강사)은 지젝의 세계적인 유명세("동유럽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주류 철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진단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론'(이건 비교문학쪽 소관이다)과 '철학'(분석철학이나 현상학)을 구분하는 미국 학계의 제도적 특성 때문인데, "더 나아가 이는 지젝의 논의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즉, "지젝은 정교한 논변을 제시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다양한 대중문화의 사례들의 제시를 통해 자신의 이론, 곧 라캉의 정신분석을 예증하는 논의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이론의 타당성을 따지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같은과 김상환 교수의 "지젝은 여러 이론들의 활로를 찾는 공을 세웠지만 독자적인 이론가는 아니"라는 평가와도 맥을 같이 한다.

사실, 이러한 평가/비판은 니체의 철학을 무체계적이라고 하여 '문학류'로 취급하거나, 데리다의 철학을 지나치게 수사적(동시에 수행적)이라고 하여 '비철학'으로 간주해버리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데리다의 <에코그라피>를 번역하기도 한 이에게서 이러한 태도를 다시 확인하는 것은 다소 의외이다. 국내 '유일의' 데리다 전문가 김상환 교수의 평 또한 그간에 '데리다'에게 쏟아졌던 단골 비판이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다. 문제는 지젝의 실재가 아니라 지젝의 대가적 명성을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함'이 아닐까?

진태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또한 지젝의 급진적인 사회적 변혁에 관한 주장은 경험과학적 지식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어 논증적 효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데, 이 또한 비판을 위한 비판밖에는 되지 못한다. 최근에 바울이나 레닌에 경도되어 있는 지젝에 따르면, 진정한 행위(act)는 어떤 계획이나 고안에 의해서 성취/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겪어낸다거나 통과한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경험과학적 지식에 의해 뒷받침된 사회변혁의 사례가 과연 있었던가? 지젝의 말대로, '지식'은 사후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의미화하기 위해서 마련되는 것이다. 지젝도 인용하고 있는 영국 사회철학자 존 엘스터에 따르면, 새로운 것은 항상 "본질적으로 부산물인 상태"이지, 결코 선행 계획의 결과가 아니다. 지젝이 강조하고 있는 행위에의 결단에 대해서,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식(증거)를 제시하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내보여라, 그럼 신을 믿겠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신앙은 도약의 문제이다).

평자는 당부의 말로 덧붙인바, "앞으로 '이론가' 지젝의 핵심과제는 라캉 사유의 약점이기도 한 '진리와 경험적 지식 사이의 괴리'를 해결하는 것인 듯하다"라고 했는데, 평자가 과연 "진리와 경험적 지식 사이의 일치'(이건 상당히 프래그머티스틱한 주장인데)야말로 이론의 목적이자 철학의 지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좀 의심스럽다. 평자가 전공한 스피노자가 과연 그러한 철학자이며, 헤겔이 그러한 철학자이며, 알튀세르가 그러한 철학자인가?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양자역학의 진리(이론)는 전부 넌센스가 될 것이고, 무의식의 진리(앎)를 말하는 정신분석학 또한 잠꼬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사실 지젝이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내 경우에, 상당히 역설적이고 급진적인 그의 주장들이 매우 실감있다는 점 때문이다. 말 그대로 아주 리얼한 것이다. 책속의 진리야 말로 지젝이 혐오해 마지 않을 만한 것인데, 지젝의 '이론'을 책속의 진리로만 치부하는 것은 비판으로서도 좀 고약하다...

04. 01. 07/ 07. 01. 1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7-01-14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아, 이것이 지난번에 어느 페이퍼에서인가 암시(?) 되었던 로쟈님과 진태원님의 견해 차이군요. ^^

로쟈 2007-01-14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이나 지젝이나 모두 거부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게 수용되는 거라고 했으니까 학계/대학에서의 거부감 같은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제생각엔 거부의 '논리'가 불충분한 게 아닌가 싶어요...

sommer 2007-01-15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부정성으로 귀결되는 '반성'과 무관하게 '행위'를 강조하는 '형이상학적 활동가'가 곧 지젝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하이데거가 실패했던 그 지점에서 물구나무를 서는...사례가 곧 이론이 되는 '매뉴얼'처럼 말이지요...

로쟈 2007-01-1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행위'가 '자기부정성'(반성)과 무관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오히려, 자기부정, 지젝식 용어로는 자기철회의 제스처가 바로 행위인데요. '형이상학적 활동가'란 명칭도 형이상학을 새롭게 정의하지 않는 한 지젝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suture님의 자세한 입론을 기대합니다...
 

안톤 체호프의 '희극' <갈매기>가 정초에 무대에 올려진다는 소식이다. 전세계에서 <햄릿> 다음으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라고 하니까 드문 일도 아니며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국내에서 공연되는 <갈매기>를 본 적이 없어서 얼마간 흥미는 갖게 된다. 공연기간이 짧아서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매일경제(07. 01. 11) 안톤 체호프 `갈매기`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인간

'인간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면서 자신에게만은 철저히 몰두한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가 한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그의 정의는 탁월하다.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면서 사랑하고 싶어하고 또 사랑받고 싶어하는, 상대에게 진정으로 뭔가를 주는 데는 지독히 서툴면서 자신은 의지하고 기대고 싶어하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인 까닭이다.

극단 여백(대표 오경환) 창단 10주년 기념작 '갈매기'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잘 그린 연극이다. 모자 관계인 여배우 아르카지나와 작가 지망생 코스차, 아르카지나의 애인인 소설가 트리고린, 배우 지망생 니나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통해 자기애에 빠져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고 사랑에도 서툰 인간의 모습을 고찰한다.



'갈매기'는 '세 자매' '벚꽃동산' '바냐 아저씨'와 더불어 체호프의 4대 장막극 중 하나. 명확한 사건이나 주제가 없어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체호프 서거 100주년이었던 2004년부터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극단에 의해 여러 차례 공연된 바 있어 연극 애호가들에게는 익숙한 작품이다.

평범하고 하찮기까지 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진실을 섬뜩할 만치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는 점이 '갈매기'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작품 번안과 연출을 맡은 오경환 대표는 "'갈매기'는 우리가 얼마나 끔찍하게 삶을 흘려보내고 있는지를 투명하게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선종남 유준원 박현미 박찬국 정선철 이보영 등이 출연한다. 16~21일 대학로 우석레퍼토리극장. 2만~2만5000원. (02)762-0810(노현 기자)

07. 01. 14.

Чехо в театре - Чайка
 
P.S.  사진은 극단의 동료들에게 <갈매기>를 읽어주고 있는 안톤 체호프(가운데).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1-14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14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글쎄요, 체홉의 작품으로는 들어본 바가 없는데요(제가 두루 알지는 못하지만). 체홉의 작품으로는 좀 '쎈' 설정 같기도 하구요(일단 누굴 죽이고 하는 얘기가 그의 취향은 아니라서요). 체홉의 작품이라면 놀랄 일이지만, 아무래도 후자쪽 같습니다...

릴케 현상 2007-01-25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매기는 연영과 애들이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아 보고 싶네염
 

작년에 '2006년의 영화책'으로 <트뢰포>(을유문화사, 2006)와 함께 꼽았던 책이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을유문화사, 2006)였다. 우연찮게도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는데, 이 책에 대한 서평으로 연초에 읽어두었던 것을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지난 2003년에 반쪽짜리 책이 나왔을 때 추천사를 쓰기도 했던 영화평론가 김영진씨의 칼럼이다.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씌어진 '적임자'의 서평이다. 더불어 기대하게 되는 것은 한국 영화비평에서의 '로저 에버트들'이다. '들뢰즈들'이나 '지젝들' 말고.

필름2.0(07. 01. 05)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에 대한 서평

얼마 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 영화평론 심사를 맡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래의 평론가를 꿈꾸며 보내온 글들을 숙독했다. 장년층의 필자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 특기할 만했으며 글에 인용되는 지식의 범주가 꽤 광범위해서 은근히 놀랐다.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똑똑한 글들이 많은데 인상적인 글이 적다는 것도 신기했다. 대다수의 글들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주인 입장이 되어 평론 대상이 되는 영화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 위압적이며 수직적으로 어떤 특정지식에 의지해 영화를 내려다보며 훑는 글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똑똑한 티가 나긴 하지만 글을 읽고 나면 거기 분석된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영화와는 상관없는 성실한 대학원생의 리포트를 읽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좋은 평론은 언제나 작품과 수평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평론이, 평론이 아니라 이론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1960년대의 구조주의 열풍 이후 한때 영화학계의 신념이 됐다. 검증될 수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며 영화가 좋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삼류 저널리즘의 인상비평에서나 할 짓이라는 통념은 오늘날에도 완강하게 통용되고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글들에서는 대개 열정과 공감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되는 대신 평자들이 표현자와 맞먹으려 들며 과시하려 드는 자기도취의 흔적을 보게 된다. 평자가 표현자의 위치에 오르려는 것은 자연스런 욕망이며 그게 결핍의 표현으로써 시지푸스의 운명처럼 거듭된 성실성으로 나타날 때 위대한 평론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와 반대로 평자가 이미 표현자의 자의식을 갖고 대상이 되는 작품을 제멋대로 갖고 놀며 군림하려 들 때 그 평론은 추악해지기 쉽다. 영화보다 평론가의 자의식과 지식이 더 돋보이는 대다수의 평론은 그래서 불편하다. 이게 동시대의 대중뿐만 아니라 동업자들끼리도 평론을 잘 읽지 않는 이유다.



그런 심정으로 나름대로 반성하고 있는데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 1권의 개정판과 <위대한 영화> 2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1권의 추천사를 쓴 사람의 입장에서 그 뉴스는 기분 좋은 것이었다. 미국의 스타 평론가의 글을 묶은 두툼한 분량의 책이 상당량 팔려나갔다는 것은 여하튼 이곳에 평론을 읽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실 <위대한 영화> 역서를 읽기 전에는 에버트의 평론집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시카고 선타임스’에서 수십 년 동안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건 텔레비전 비평쇼를 진행하는 이 할아버지 평론가는 지금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평론을 쓰고 있지만 그가 텔레비전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거나 내리거나에 따라 때로 영화의 흥행 성적이 갈라지는 그 위대한 영향력 말고 대체 취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싶었다.
이런 선입견은 인정에 끌려 추천사를 써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식 출판되기 전의 역서를 읽은 후 손쉽게 무너졌다. 영화평론가로서는 미국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에버트의 경력이 괜한 허명은 아니었다는 자책이 생겼다.

기자로 시작해 평론가로 자리 잡은 에버트의 글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하고 쉽다.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고 영화를 볼까 말까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토록 폭력적인 저널리즘 독서 환경에서 단련된 에버트의 문장은 담담하면서도 신중하고 때로 신랄하며 종종 열정적이다. 그는 개봉영화들을 따라가는 집필활동 틈틈이 고금의 명작들을 소개하는 칼럼을 쓰고 그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상영하는 영화제를 개최하며 관객들과 일주일 동안 특정 영화를 숏 바이 숏으로 분석하는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위대한 영화>는 그런 에버트의 과외활동의 산물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에버트가 점점 더 많이 영화를 알아가는 사랑의 방식이 독자에게도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는 솔직하게 예전 기자 시절에 썼던 영화평의 태도를 스스로 비판하기도 하고, 접하지 않아 일정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고도 명작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다.

에버트의 책 초고를 읽으며 근사한 문장이 나올 때마다 옮겨 적던 필자는 그게 10쪽을 넘어가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영화의 이미지가 주는 매력을 활자로 따라잡는 불가능한 임무를 때로 해내는 에버트의 손이 행한 기적에 부러움을 느꼈다. 이를테면 그는 니콜라스 뢰그의 매혹적이지만 플롯이 헝클어진 영화 <쳐다보지 마라>를 옹호하면서 이렇게 쓴다.

“유령이 출몰하는 도시 베니스가 〈쳐다보지 마라〉에서보다 더 우울한 모습을 보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도시는 광대한 공동묘지처럼 보이고 돌덩이들은 축축하고 연약하며 운하에는 쥐떼가 우글거린다. 앤소니 B. 리치몬드와, 크레딧에는 오르지 않은 뢰그가 담당한 촬영은 베니스에서 사람들을 제거해버린다. 북적거리는 길거리나 대운하 인근에서처럼 베니스 거주자나 관광객들을 볼 수 있는 몇 가지 장면이 있지만, 존과 로라가 (처음에는 함께, 나중에는 별도로) 길을 잃는 한결같은 두 장면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거리와 다리와 운하와 막다른 골목과 잘못된 모퉁이는 그것들끼리 서로서로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버트는 이런 유형의 영화들이 ‘플롯에서 자유롭고, 어떤 최종적인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 하나의 체험으로만 존재하는 영화’이며 관객인 우리는 ‘소풍을 따라 나섰다가 안전하게 돌아온 소녀들과 비슷하다’고 본다. 이것은 결국 우리 시대에 점점 사라져가는 영화보기의 매혹과 미덕에 관한 장 뤽 고다르의 다음과 같은 잠언을 인용하는 것과 연결된다. “영화는 역이 아니다. 영화는 기차다”라는 고다르의 말을 언급하며 에버트는 자크 타티의 <윌로씨의 휴가>를 보기 전까지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전혀 몰랐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영화를 ‘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기차’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차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대신 빨리 목적지인 종착역에 도착하려 안달하는 어린애와 같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팜므 파탈>과 같은 영화가 대중의 적대감을 사는 것에 대해서도 에버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작품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요즘 관객들의 조바심을 고발하는 고발장이라 할 수 있다. 요즘 관객들은 괴롭힘 당하기를 원하지, 유혹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에버트에 따르면 “대부분의 영화는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영화의 플롯에 의해 규정되거나 제한된다는 암묵적인 가정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생은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인생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와 어른들을 위한 영화의 차이점이다.” 이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에버트가 정의하는 영화의 꼴인데, 이런 방식으로 에버트가 끌어내는 영화의 매력의 범주는 넓게 뻗어간다.

그는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들>을 찬양하면서 빠른 글 호흡으로 그 영화의 비범한 시각적 특질을 따라잡는다. “레오네는 롱 숏으로 화면을 시작해 권총, 얼굴, 눈동자, 그리고 비지땀과 파리들을 클로즈업으로 작업해 들어가면서 이 장면을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길게 끌고 나간다. 자신이 서스펜스를 얼마나 길게 유지할 수 있을지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게 진짜 서스펜스이기는 한 걸까? 전적으로 스타일의 시험이었고, 장면 자체에 주의를 끌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감독의 고의적인 조작이었을 것이다. 레오네가 장난을 치곤 했던 패러디의 자유를 여러분이 맛봤다면, 여러분은 그의 방법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대담한 제스처를 향한 찬양이다.”

‘대담한 제스처를 향한 찬양’, 이런 식의 표현은 멋지다. 에게, 겨우 그것 같고 그러냐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렇다. 우리가 거대한 틀에 갇혀 영화를 보는 고정관념을 에버트는 쉽게 넘어선다. 그가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 못지않게 상세하게 접근하는 배우들의 매력을 서술할 때도 마찬가지다. <스카페이스>에서의 알 파치노의 연기를 칭찬하면서 그는 파치노가 토니 몬타나라는 인물을 ‘오페라 같은 규모로 연기해낸다’고 쓴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그는 책상 위에 코카인을 쌓아놓고는 삶 그 자체를 흡입하려고 기를 쓰는 것처럼 그 속에다 코를 처박는다. 파치노는 코에다 흰색 분말을 묻힌 채로 그 장면을 연기했다. 종종 패러디되는 디테일이지만, 이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외하고는 만사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변해버린 남자를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선택이었다. 파치노가 <스카페이스>에서 한도를 넘어선 연기를 했다면, 그것은 캐릭터가 그를 그곳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한계를 넘어선 세상, 그곳이 바로 토니 몬타나가 사는 곳이다.” 이런 문장은 쉬워 보이지만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로 영화를 따라잡는 경지의 출발점은 자기도취가 아니라 영화대상과의 일체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의 평론은 보여준다.

07. 01.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이데거의 <철학입문>(까치글방, 2006)이 출간됐다. 출간일자는 작년말이지만 지난주에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알라딘의 '새로 나온 책'을 둘러보다가 발견하게 됐다. 지난주에 유난히 읽을 만한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온 탓에(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나 다니엘 벨의 <탈산업사회의 도래> 등)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는데, "하이데거가 1928~29년 겨울 학기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강의록"으로서 지난 1996년 하이데거의 전집 제27권으로 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충분히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아직 영역본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기도 하지만, 게다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 입문' 아닌가?

하이데거  

그런 '입문'이란 단어를 제목에 달고 있는 책으로 나는 <형이상학 입문>(문예출판사, 1994)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우연이지만, 내가 하이데거에 매혹당하게끔 한 책이 바로 <형이상학 입문>이었다. 그러니 <철학 입문> 또한 철학 입문이면서 동시에 하이데거 입문으로의 역할을 덩달아 해줄 거란 기대를 갖는 건 억지스럽지 않다. 1928-9년이면 주저인 <존재와 시간>을 발표한 직후이고 갓 마흔이 된 '젊은' 거장의 염력이 거침없을 때이다. 해서, 이 겨울에 딱 3일 정도 바람이라도 쐬러 가면서 들고 가고픈 책이다.

하이데거와 전혀 '안면'이 없는 독자라면 <30분에 읽는 하이데거>에서부터 역자이기도 한 이기상 교수의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서광사, 1993)나 역시나 하이데거 전공자인 박찬국 교수의 <들길의 철학자, 하이데거>(동녘, 2004)를 미리 혹은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내가 감동적으로 읽었던 조지 스타이너의 <하이데거>(지성의샘, 1996)도 지난번에 절판된 듯하다고 적었지만 다시 나왔다). 한데, 하이데거는 가장 기초적인 물음(들)을 던지면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기 때문에 그냥 차근차근 따라가봐도 팍팍하거나 멀미나지 않는다. 아니, 그냥 장서용이면 어떤가. 폼나지 않나. '하이데거' 그리고 '철학입문'.

 

 

 

 

재작년 여름에 데리다의 <정신에 대하여>(동문선, 2005)가 출간되었을 때 책소개를 하면서 몇 자 적어놓은 걸 다시 읽어봤는데, 이왕 하이데거를 펴보았다면 하이데거론도 곁들어 얼마쯤 읽어두면 좋겠다. 나도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정신에 대하여>에서, 이전의 소개를 반복하자면,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관련하여 한번도 질문된 적이 없는 '정신(Geist)'의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하이데거의 철학은 해체/구축한다. 이런 '대결' 장면은 며칠전 이종격투기 프라이드 경기에서 표도르('효도르'라는 이름은 러시아어가 일어로 음역된 걸 다시 옮겨오면서 생긴 '괴상한' 이름이다)와 크로캅이 맞붙은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볼거리이다. 그런 걸 놓쳐도 좋은 삶은 또한편 나름대로 재미있을지 모르겠으나 내가 부러워하는 삶은 아니다."

앨런 메길의 <극단의 예언자들: 니체, 하이데거, 푸코, 데리다>(새물결, 1996)은 네 철학자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안내서이다. 하이데거 편을 데리다 편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그리고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비판서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도 (원제인)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비판으로 읽어봄 직하다.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그리고 라캉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하이데거 전공자였던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 책의 1장은 '칸트 독자로서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다루고 있는데, 주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한길사, 2001)에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나는 지젝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도달해 있는/있을 경지가 부럽다).  

 

 

 

 

물론 <철학 입문>을 통해서 하이데거의 사유에 맛을 들이고 매혹을 느낀다면 이후엔 그의 주저들에 도전해볼 수 있겠다. 하이데거만큼 상대적으로 풍족하게 번역/소개된 철학자도 국내엔 많지 않다. 게다가 번역의 수준도 높은 편이다(당장 헤겔과 비교해 보라). <존재와 시간>에서 <이정표>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그렇게만 읽어도 우리의 한해는 다 가고 말 것이다. 맨날 하는 소리이기도 한데, 인생은 행복하기에는 너무 길지만 공부하기에는 너무 짧다...

07. 01. 13.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80 2007-01-14 12:44   좋아요 0 | URL
얼마전부터 로쟈님 글을 훔쳐보기만 했는데 이제 아예 본격적으로 훔쳐가고 있습니다. 제 페이퍼 폴더에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로쟈님의 인상깊은 정보와 글을 퍼담고 있습니다. 항상 발전의 자극이 되어주셔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의 글도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7-01-14 12:48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관심을 나눠가질 수 있다면 그만큼 '친구'가 늘어나는 것인데 저로서도 반갑고 고마운 일이지요.^^

에바 2007-01-14 13:00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부러워 하는 경지의 "지젝을 비판하는 사람들"에는 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 지젝 비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알려주시면...^^;;

로쟈 2007-01-14 13:03   좋아요 0 | URL
얼치기 비판은 많습니다. '대중적인' 스타들이 안티팬을 거느리는 것처럼. 다만, 제가 궁금한 건 진지한 비판이고, 그 비판의 조건입니다. 그런 '경지'를 저도 좀 보고 싶다는 말씀이었습니다(가령 지젝의 하이데거론에 대한 재비판 같은). 지젝 연구서가 올해만 해도 3권 정도 근간 예정인 걸로 압니다. 그런 '경지'의 가능치/근사치도 조만간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biosculp 2007-01-14 17:16   좋아요 0 | URL
철학입문-23000, 미완의 시대-22500, 탈산업사회의 도래-40000.
나오는 책들은 반가운데 가격이 압박으로 다가오네요.

로쟈 2007-01-14 17:44   좋아요 0 | URL
제게 그 '압박'은 '구박'의 형태로 현시됩니다. '도대체 제 정신이야?', 제가 제일 자주 듣는 소리죠...

2007-09-04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