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 최고의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 리스트를 다룬 책이 영국에서는 다음주에 출간된다고 한다. 작가들에 대한 이 설문조사에서 최고 중의 '최고 작품'으로 선정된 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이다(그래서 이 페이퍼는 '러시아 이야기'로 분류해놓는다). 사실 영어권 작가들의 톨스토이에 대한 선호와 경탄은 20세기 내내 지속돼 온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놀라운 결과는 아니다. 이미 비평가 F. R. 리비스가 자신의 비평집 제목을 <안나 카레니나와 기타 에세이들>(1967)이라고 붙였을 때도 징후적으로 드러난 게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강의시간에 자주 다루는 작품들이 상위권에 랭크돼 있어서 반갑다. <롤리타>가 4위, 체홉의 단편집이 9위이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의외로 좀 처져서 17위이다. 흥미로운 건 독어권 작품이 탑10은 물론, 20권 안에 한 작품도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 20위까지를 보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영문학에 이어서 러시아문학 5, 프랑스문학 2,  스페인/남미문학 2, 그리스문학 1의 순이다. 영문학 작품 가운데는 동시대 작품이 단 한편도 포함돼 있지 않아서 특이한데, 작가들의 안목이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일보의 관련기사와 함께 '더 타임즈'의 원기사를 옮겨놓는다. 우리에게도 소개된 몇몇 작가들의 탑10 리스트도 붙여놓았다.  

한국일보(07. 02. 26) 영어권 작가들 “톨스토이 최고"

영어권 최고의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러시아 대문호 레오(*레프)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리나>가 선정됐다. 톨스토이는 역사소설 <전쟁과 평화>로 3위에도 이름을 올려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됐다.

출판사 W W 노튼이 노먼 메일러, 피터 캐리, 스티븐 킹, 톰 울프 등 미국, 영국, 호주의 유명 작가 125명에게 가장 좋아하는 최고의 문학작품 10권을 물은 결과 이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영국 일간 더 타임스가 3월1일 발매되는 신간 <톱 텐(The top 10)>을 인용해 23일 보도했다.

125명의 작가들이 뽑은 544권의 작품 중 2위는 구스타프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차지했으며, 4위에는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뽑혔다. 러시아 소설은 세계 3대 단편작가로 꼽히는 안톤 체홉의 <체홉 단편선>을 9위에 올리며 톱 10 중 4개를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영어권 소설 중에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5위에 올라 작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영어소설의 영예를 차지했다. 여성 작가로는 <미들 마치>의 작가 조지 엘리엇이 10에 올라 톱10에 턱걸이했다.

설문에 응한 작가들은 근ㆍ현대 고전을 선호한 반면 동시대 작가들에겐 인색했다. 이안 머큐언의 <속죄>, 마틴 에이미스의 <런던 들판>, 살만 루시디의 <한밤 중의 아이들> 같은 현존하는 작가들의 걸작은 1표밖에 얻지 못했다. 설문에 참가한 미국 하버드대 강사 스벤 버커츠는 “작가들이 꼽은 최고작은 감각적 문장과 함께 사랑과 죽음의 드라마를 이끌고 가는 강렬한 등장인물들이 나온다는 게 공통점”이라고 분석했다.(박선영 기자) 

최고 작가들이 뽑은 최고 작품

1.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2. 구스타프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3.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4.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5.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6. 셰익스피어 <햄릿>

7. 스콧 F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8.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안톤 체홉 <체홉 단편선>

 

10.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11.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12. 허먼 멜빌 <백경>

13.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

14.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

15. 호머 <오디세이>

16.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17.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18. 셰익스피어 <리어왕>

19. 제인 오스틴 <엠마>

20. 가브리엘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

자료 : 더 타임스(07. 02. 23) 

When serious writers relax, they’re always in the mood for a romance

Leo Tolstoy

Have you ever wondered what books your favourite author would choose as their favourites? Well, here is your chance to find out. Leading writers from Britain, America and Australia have been asked to list their top ten works of literature, and the results will be published in a book next month.

The top-rated work was Anna Karenina by Leo Tolstoy. His other great epic, War and Peace, came third. Two other Russians also made the top ten. Vladimir Nabokov’s infamous novel Lolita came fourth and the stories of Anton Chekov ninth.

Gustave Flaubert’s Madame Bovary came second. Shakespeare was the highest rated British author, coming sixth with Hamlet.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by Mark Twain was voted the greatest American novel. The only woman to make the top ten was George Eliot with Middlemarch.

The 125 authors selected 544 titles. Contemporary authors were conspicuous by their absence. Ian McEwan’s Atonement, now being made into a film starring Keira Knightley, had only one nomination, as did Martin Amis’s London Fields. Even Midnight’s Children by Salman Rushdie, which won the “Booker of Bookers”, gained only one nomination.

Peter Carey, the Australian author who won the Booker Prize twice — for Oscar and Lucinda and True History of the Kelly Gang — picked Madame Bovary as his favourite novel. Margaret Drabble, author of 17 novels, was the only author to name Shakespeare’s Antony and Cleopatra. Thomas Keneally, who won the Booker for Schindler’s Ark, his historical novel about the Holocaust, picked Brontë’s Wuthering Heights.

The horror writer Stephen King chose as his favourite book The Golden Argosy, an anthology of 55 short stories from authors including Hemingway and Fitzgerald, first published in 1947 and reissued in 1955, which he bought in a sale for $2.25. He tells the editors of The Top Ten: “At that time I only had $4 and spending over half of it on one book was a hard decision. I’ve never regretted it. [It] taught me more about good writing than all the classes I’ve ever taken.” Independent People, a chronicle of endurance and survival by the Icelandic Nobel laureate Haldór Laxness, appeared on 19 lists.

J. Peder Zane, editor of The Top Ten, said: “We live in a Golden Age. Never before have so many books been within such easy reach. But when anything is possible, choice becomes torture. What to pick? Where to start?” The premise of the book was simple, he said: “Who knows more about great books than great writers?”

Sven Birkerts, a lecturer at Harvard University and one of the book’s contributors, said: “One thing that stands out so clearly in the list of top choices is the outsized vividness of the characters. . . They are our representatives in the world of life imagined — Prince Andrei and Natasha, Pierre, Anna and Vronsky, Levin and Kitty, Tom and Huck, Emma, Gatsby and Daisy, Hamlet, Ophelia, Humbert Humbert and Lolita, Dorothea Brooke and Casaubon. Even to name them is to recall their compact human resonance. To read their lives is to be forced to reconsider our own.”

He said that he was surprised that classics such as Joyce’s Ulyssesdid not make the overall top ten. “There is no disputing tastes,” he said. “But there is also no disputing that collective preferences exist. The collective preference reflected in the list of greats is clearly for memorable character-driven dramas of love and death delineated in sensuous nuanced prose.” The Top Ten is published by W W Norton on March 1, price £9.99.

Norman Mailer

1 Anna Karenina Leo Tolstoy

2 War and Peace Leo Tolstoy

3 Crime and Punishment Fyodor Dostoevsky

4 The Brothers Karamazov Fyodor Dostoevsky

5 Pride and Prejudice Jane Austen

6 U.S.A. (trilogy) John Dos Passos

7 Moby-Dick Herman Melville

8 The Red and the Black Stendhal

9 Buddenbrooks Thomas Mann

10 Labyrinths Jorge Luis Borges

Stephen King

1 The Golden Argosy edited by Van H. Cartmell and Charles Grayson

2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Mark Twain

3 The Satanic Verses Salman Rushdie

4 McTeague Frank Norris

5 Lord of the Flies William Golding

6 Bleak House Charles Dickens

7 1984 George Orwell

8 The Raj Quartet Paul Scott

9 Light in August William Faulkner

10 Blood Meridian Cormac McCarthy

Margaret Drabble

1 Antony and Cleopatra William Shakespeare

2 Emma Jane Austen

3 Madame Bovary Gustave Flaubert

4 The Three Sisters Anton Chekhov

5 The Aeneid Virgil

6 The Divine Comedy Dante Alighieri

7 Germinal Émile Zola

8 The Golden Notebook Doris Lessing

9 To the Lighthouse Virginia Woolf

10 The Old Wives’ Tale Arnold Bennett

Thomas Keneally

1 Wuthering Heights Emily Brontë

2 Treasure Island Robert Louis Stevenson

3 The Scarlet Letter Nathaniel Hawthorne

4 Great Expectations Charles Dickens

5 War and Peace Leo Tolstoy

6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James Joyce

7 Mrs Dalloway Virginia Woolf

8 The Great Gatsby F. Scott Fitzgerald

9 Voss Patrick White

10 The Tin Drum Gönter Grass

The Top Twenty

1 Anna Karenina Leo Tolstoy

2 Madame Bovary Gustave Flaubert

3 War and Peace Leo Tolstoy

4 Lolita Vladimir Nabokov

5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Mark Twain

6 Hamlet William Shakespeare

7 The Great Gatsby F. Scott Fitzgerald

8 In Search of Lost Time Marcel Proust

9 Stories of Anton Chekhov Anton Pavlovich Chekhov

10 Middlemarch George Eliot

11 Don Quixote Miguel de Cervantes

12 Moby-Dick Herman Melville

13 Great Expectations Charles Dickens

14 Ulysses James Joyce

15 The Odyssey Homer

16 Dubliners James Joyce

17 Crime and Punishment Fyodor Dostoevsky

18 King Lear William Shakespeare

19 Emma Jane Austen

20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Gabriel GarcÍa Márquez

07. 0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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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2-2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톨스토이와 스티븐 킹은 알겠는데. 체홉은 그럼에도 숙제군요.
톨스토이가 그랬다죠. "체홉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글쓰기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올 해 전작으로 나가볼까 '벼르고만' 있답니다. 당근, 백년의 고독이 대기중입니다. 붉은 왕세자빈 평은...표지는 거창한 시늉을 했지만.

해적오리 2007-02-2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의 고독은 예전부터 봐야지만 하면서 못보고 있는 책이네요. 한 일년 책만 볼 수 있을 수 있을 까요?

기인 2007-02-26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작가들이 '백년동안의 고독'을 뽑은 것. '포즈'가 아닐런지. 이런것은 무기명 투표로 해야 하는데 ㅋㅋ 고전의 정치성!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호메로스의 오디에우스보다 앞서네요. 유명한 영문학자들에게 물으면 다르게 나올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2-2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임/ 톨스토이가 체홉의 몇몇 단편들을 높이 평가한 건 사실이지만 드라마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죠. '저게 뭔가?'
해적님/ 책읽기 가장 좋은 곳은 '빵'이라고들 합니다...
기인님/ 작가들의 '포즈'라니요? <고독>이 졸작이라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작가들이 안 읽었을 거라는?(참고로 영역본은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그리고 작가들이 학자들보다는 아무래도 '실전적'이죠. 문학연구자들도 대개 동의하는 것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소설이 더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쓰기 어려운 소설은 톨스토이적인 소설이지요...

콜필드 2007-02-26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나라별로 조금씩 틀린 거 같기도 합니다.
전에 각국을 대표하는 문학가들에게 의뢰했을 때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제일 인기가 좋았었어요.
유일하게 4편이 포함된 작가였으니까요.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순위야 그렇다치더라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안 들어간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 되네요.
그리고 문학연구자들 사이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를 좀 낮춰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하는 사람도 많이 봤거든요.
문학의 '객관성'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부류라면 플로베르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 작품 말미에 나오는 그 '결론'이라는 게
영 부담스러워서요. 부활 같은 예를 들 수 있겠죠.
톨스토이가 높게 평가되었던 건 지금보다는 예전 같고
현재는 그 작법이 다분히 근대적이고 세련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폄하되고 있는 듯 합니다.

물론 문학계에 몸담고 있는 분이니
제가 틀린 말을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제가 본 작가나 지망생
혹은 평론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대개 도스토예프스키였어요.

콜필드 2007-02-2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예를 하나 들자면
몇년 전에 김원일 선생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얘기를 하시며 열변을 토하시더군요.
자기는 전쟁을 겪었는데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그것보다
더한 충격이었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콜필드 2007-02-26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미국은 서사와 '이야기의 힘'이 중요시되고 있어서
관념적인 작품들이 배제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디킨스가 포함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닌가 싶구요.
핀천이야 그렇다치더라도
포크너가 없다는 것이 그런 특성을 말해주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로쟈 2007-02-26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말씀드린 톨스토이에 대한 선호는 영어권의 얘기입니다. 물론 소비에트 시절에도 톨스토이는 좀 다른 이유에서 높이 평가되긴 했지요(도스토예프스키가 퇴폐적인 작가로 폄하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우리의 경우에도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선호는 1950년대(전쟁)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박경리, 김원일 선생 같은 연배의 작가들이 도스토예프스키에 공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지요(톨스토이는 상류 사교계를 배경으로 다루니까 '우리'의 실감과 거리가 멀지요). 첨언하자면, <부활>은 소설가 톨스토이와는 상대적으로 무관한 작품인데(작가 자신이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유독 한국에서 많이 읽히고 과대평가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소설가 톨스토이의 작품은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하지 무라트> 정도입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2-26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잘 봤습니다, 퍼갈게용.
3월달엔 새판 출간 기념으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려 했는데,
톨스토이부터 읽어봐야겠군요 ㅎ

기인 2007-03-06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백년동안의 고독'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말하고자 한 건데, 해적님 때문에 '백년동안의 고독'이라고 쓰게되었네요! 이런 오타가;;;;

로쟈 2007-03-06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듯하네요. <잃어버린 시간>도 작가들이 좋아하는 소설이니까요...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1940-2007)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컬처뉴스에서 한 리뷰를 읽다가 알게 된 것인데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까 지난 1월 28일(영어판에는 27일)에 파리에서 영면한 것으로 돼 있다. 지난달에 페이퍼로 다룬 적이 있는 장-뤽 낭시와 함께 '데리다 사단'으로 분류되던 철학자이지만 낭시의 경우도 그렇듯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철학자로 평가된다. 개인적으로 그의 저작을 이미 몇 권 갖고 있고 러시아어로 된 그의 대담 한 꼭지를 번역할 일도 있어서 자료들을 더 모으고 있던 참이었는데(그가 남긴 저작은 낭시보다는 많지 않다) 병환중이라는 얘기에 이어서 부음을 듣게 되어 안타깝다. 그의 명복을 빌면서 번역가이자 도서출판 그린비의 편집장인 이재원씨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낭시 등과 함께 쓴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에 대한 리뷰를 겸하면서 라쿠-라바르트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있는 글이다. 라쿠-라바르트의 주저들이 조만간 소개되기를 기대하면서 '세계의 책' 카테고리로 분류해놓는다.

  

컬처뉴스(07. 02. 23) 정치적 범주로서의 숭고

 내겐 조만간 읽을 계획이 없는데도 책을 사두는 버릇이 있다. 출판 자체가 '사건'이거나 '곧 절판'될 것이 예상되는 책을 이런 식으로 사는데, 『숭고에 대하여』도 그런 책이었다. 이렇듯 당장 읽을 계획이 없던 이 책을 들춰보게 된 건 지난 1월 28일 이 책의 공동 필자 중 하나인 필립 라쿠-라바르트(1940~2007)의 부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그에게 보내는 때늦은 조사(弔詞)이기도 하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2대학 철학과 교수"가 공식 직함이었던 라쿠-라바르트는 흔히 자크 데리다의 제자로 소개된다. 1980년 데리다의 제안으로 절친한 동갑내기 친구 장-뤽 낭시와 함께 정치철학연구소를 세웠고, 1983년 데리다가 창립발기인 중 하나였던 국제철학학교의 연구원이 됐으며, 1987년 데리다가 라쿠-라바르트의 박사논문 심사위원 중 하나였다는 등의 개인사적 사실로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라쿠-라바르트가 데리다의 제자였다면 스승에게 충실했기에 불충한 제자였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데리다의 핵심 개념인 '차연'(diffrance)의 논리에 충실하게 스승의 말을 끊임없이 거스르고(differ) 유예시키면서(defer) 자신의 독창적 사유를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2월 2일 낭시는 라쿠-라바르트의 영결식 추도사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오늘, 무한한 차연이 끝났습니다." 얄궂긴 하지만, 지난 2004년 10월 9일 데리다가 사망했을 때 호들갑떨던 미국 언론(그리고 외신이라면 전적으로 미국언론에 기대는 한국 언론)이 라쿠-라바르트의 사망소식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점("라쿠-라바르트는 데리다가 아니다")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안타까운 사실은 라쿠-라바르트의 독창적 사유를 음미하기에는 국내에 소개된 그의 작업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의 작업은 「지금 우리에게 낭만주의란 무엇인가?」(『세계의 문학』, 106호, 2002), 그리고 곧 살펴볼 「숭고한 진실」 단 두 개밖에 소개되지 않았다. 한편 그에 관한 글은 세 편이 있다. 「데리다 사단과 온고지신의 해체철학」(『세계 지식인 지도』, 산처럼, 2002), 「미메시스와 미메톨로지」(『뷔흐너와 현대문학』, 18권, 2002), 「모델을 소멸시키는 미메시스」(<교수신문>, 2006년 2월 23일자) 등이 그것이다. 어찌 보면 읽을거리가 별로 없으니 더 많은 관련 자료들이 쏟아지기 전에 라쿠-라바르트를 읽기 시작하기에는 지금이 적당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Du Sublime

「숭고한 진실」이 라쿠-라바르트의 독창적 사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숭고란 무엇인가?"라는 모티프를 통해 롱기누스, 버크, 칸트, 헤겔,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벤야민, 리오타르 등의 '숭고론'을 어지럽게 횡단해 가는 라쿠-라바르트의 여정을 좇다보면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된다. 흔히 예술(혹은 미학)의 범주로 여겨지는 숭고가 정치적 범주로 변모하는 발견을.

흔히 말하는 숭고란 우리가 겪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 요컨대 감히 거역하기 어렵거나 우리를 압도하는 어떤 힘을 가진 무엇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감정에 가깝다. 그랜드캐니언이나 허리케인 같은 자연의 압도적인 크기나 힘 앞에서 감동할 때 우리는 숭고를 느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정의상 숭고는 '재현'(reprsentation)될 수 없다. 다만 그 자체로 '제시'(prsentation)될 뿐. 말 그대로 숭고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느닷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라쿠-라바르트의 표현을 빌면, 숭고는 "스스로의 법칙을 자신이 쥐고 있다".

근대미학이 숭고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이유, 혹은 숭고가 근대미학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숭고는 예술의 진리 역시 개념적 인식의 진리, 즉 재현되는 대상과 재현된 바의 일치로 생각하던 근대미학을 붕괴시킬지 모를 개념이었던 것이다. 라쿠-라바르트는 근대미학의 이런 궁지를 타개함으로써 현대미학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 하이데거라고 본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예술의 진리란 재현된 바가 재현되는 대상의 외관과 일치됐을 때가 아니라, 재현되는 대상의 본질(존재자의 존재)이 예술작품 속에 정립(탈은폐)됐을 때 비로소 얻어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예술작품 속에서 탈은폐된 존재자의 존재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던 존재자를 낯설게 보게 된다. 라쿠-라바르트에 따르면 바로 그때의 "그와 같은 황홀함, 그와 같은 매혹"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숭고이다. 이렇듯 하이데거는 재현되는 대상과 재현된 바의 일치라는 근대미학의 전제를 해체함으로써, 숭고를 외부 대상(요컨대 '대자연')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술작품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 무엇으로 변모시킨다. 따라서 숭고는 더 이상 미학을 위협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라쿠-라바르트는 하이데거가 존재자의 존재를 '민족으로서의 존재'(un tre-peuple)와 동일시할 때의 위험을 지적한다. 하이데거의 주장대로 존재자의 존재를 정립하지 못하는 예술을 더 이상 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예술은 "민족으로서의 존재 가능성을 구성하는 요소나 시조"가 될 때에야 비로소 예술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는 셈이다. 이와 동시에 하이데거가 말하는 숭고의 체험 역시 '민족으로서의 존재'의 도래(요컨대 고대 게르만 신화 속의 위대한 영웅 지그프리트의 도래)를 고대하는 열광, 탄식, 환호성으로 표변할 위험을 늘 안게 된다(라쿠-라바르트는 자신의 1988년 저서 『정치적인 것의 허구』를 통해 이 위험을 본격적으로 다룬 바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단지 하이데거와 나치 이데올로기의 이런 공통점 때문에 숭고 개념이 정치적 범주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라쿠-라바르트는 「숭고한 진실」의 말미에서 하이데거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숭고의 정치성을 포착해낸다. 라쿠-라바르트는 하이데거처럼 숭고를 예술작품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라쿠-라바르트는 숭고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를 비평서가 아니라 '철학적인 저작'으로 읽음으로써 숭고의 정치성을 포착해낸다.

라쿠-라바르트가 롱기누스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그의 미메시스론이다. 롱기누스의 미메시스론에 따르면 숭고는 '재현'될 수 없을지언정 '모방'(mimesis)될 수는 있다. 왜냐하면 격정과 고양, 한마디로 숭고에 관한 한 자연은 자신의 법칙을 따르지만, "자연이 우연에 스스로를 방기하거나 아무런 체계 없이 작동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 롱기누스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숭고 체험을 다른 종류의 체험으로 환원하는 방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자연의 작동체계(푸시스)를 포착하고 다룰 수 있는 테크네(미메시스)를 습득하는 것, 그래서 숭고의 과잉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때 라쿠-라바르트가 말하는 미메시스는 "통상적인 의미의 재생산이나 복제의 의미가 아니며, 베끼기 또는 흉내내기란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푸시스(*퓌시스?)가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나도록 출현시키고 드러내는 기술이다. 요컨대 하이데거가 존재자의 존재를 탈은폐하는 것에서 예술의 진리를 찾았다면, 라쿠-라바르트는 푸시스를 탈은폐하는 것에서 예술의 진리를 찾는 셈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재자의 존재가 탈은폐될 때 느끼는 감정을 숭고라고 재해석한 하이데거와 달리, 라쿠-라바르트는 우리로 하여금 푸시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정관(靜觀)케 하기 위한 계기로 숭고를 재해석한다.

라쿠-라바르트가 발견한 숭고의 정치성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숭고는 그것이 없었다면 영영 감춰지고 묻힌 채로 남게 됐을 그 어떤 것을 현존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가령 기성의 모든 질서는 늘 완전무결하다고 여기는 현대의 신화를 침범해 교란시키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이다. 비유컨대 이때의 숭고는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이 "아름다운 것은 발작적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리라"라고 말했을 때의 그 정치성,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깨뜨리는 망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의 그 정치성을 획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말 라쿠-라바르트의 논의를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을까? 이것은 과도한 해석이 아닐까? 어쨌거나 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등졌고, 우리는 이제야 그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주저, 특히 『철학의 주체』(1979)와 『근대인의 모방』(1985)이 국내에 소개되면 우리는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Adieu, Monsieur Lacoue-Labarthe!(이재원 _ 그린비 편집장)

07. 02. 25.

P.S. 내가 갖고 있는 라쿠-라바르트의 책은 영어본 6권과 러시아어본 2권이다. 그 중 네 권이 낭시와의 공저이다. 그만하면 들뢰즈/가타리에 견줄 만한 듀오이다. 이 듀오에 대한 김상환 교수의 해제를 옮겨놓는다. 중앙일보에 연재된 '세계 지식인 지도'의 한 꼭지였으며 단행본 <세계지식인 지도>에 수록돼 있다.  

중앙일보(01. 05. 10)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해체철학  

서양 철학은 끝났다. 이렇게 외친 사람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 였고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이상 독일의 실존철학자) 였다. 오늘날은 자크 데리다(71.프랑스의 철학자) 가 이 종언의 주제를 다시 한 번 과격하게 밀어붙이고 있으며, 그의 작업은 '해체론' 혹은 '탈구축' 이라 불린다. 해체론은 서양 철학사 전체를 분해해서 탈(脫) 서양적 사유의 지반 위에 재구축하려는 기획이다.

장 뤼크 낭시(Jean-Luc Nancy) 와 필립 라쿠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 는 세계적 인맥을 구축한 데리다 군단(軍團) 의 용장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점차 독창적인 철학자로 인정받게 된 2세대의 대표적 해체론자다. 특히 정치철학적 측면과 미학적 측면에서 해체론을 발전시킨 공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을 여는 첫 구절은 도(道) 를 언어적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해체론자가 해체하고자 하는 것도 언어 초월적 사태를 개념적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이런 작업은 서양 철학사 전체에 대한 전복(顚覆) 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 태도가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 전체의 기본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서양적 사유에서 개념적 언어에 담기지 않는 것은 미신적이고 신비한 것,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 더 나아가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위험한 것이 개념적 질서의 뿌리 아닐까□ 해체론자가 되풀이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가 강조하는 언어 초월적 사태는 무엇보다 정치성(政治性) 이다. 이 정치성은 이론적 차원이나 경험적 차원의 정치와 구분된다. 정치를 있게 하는 정치성, 살아 있는 정치성은 일단 '이것이다' 라고 규정하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대신 거기에는 박제화한 정치성이 남는다. 물론 그렇게 해야 정치적 담론이나 실천이 뒤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담론과 규칙은 음식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신선한 기운을 포기한 통조림 깡통에 불과하다. 해체론자의 눈에는 서양 사상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정치 이론은 이런 통조림만 생산해왔다. 그리고 그런 제조 공정의 기초 시설을 제공하고 보호해 온 것이 필로소피아라는 이름의 철학, 이론적 사유의 종손(宗孫) 인 철학이다.

니체 이래 해체론자들은 이런 철학이 끝났다고 본다. 이는 철학이 자신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실현하는 가운데 완성되었다는 것을, 따라서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과 의미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에서 태어난 철학적 사유는 오늘에 이르러 과학과 기술로, 사회 제도로 실현되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다시 말한다. 철학은 정치를 통하여 세상과 일상을 점령했다. 정치적인 것은 생활 속에 일반화되었지만 의미를 결여한 정치, 공허한 정치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정치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진단은 철학과 정치의 상호 공속성(共屬性) 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완성으로서의 끝에 도달한 정치를 전체주의라 부른다. 전체주의 사회는 초월성이 완벽하게 사라진 사회, 총체적으로 표준화되고 동질화된 사회, 따라서 폐쇄성이 강한 사회이다. 이런 의미의 전체주의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현대 유럽 사회도 역시 이미 일상의 차원에서 혹은 미시적 차원에서 전체주의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 스트라스부르 철학자들의 진단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박제화하는 동시에 전체주의화하는 정치 안으로 초월적 정치성을 다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다. 이들이 예술의 문제를 천착하는 것은 이런 문맥을 배후로 한다. 사실 예술적 전통에는 이론적인 것과 경쟁하는 전혀 다른 정치의 가능성이 꿈틀댄다. 서양사상사의 전통이 플라톤에서 확립됐다면, 그의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정치에 있었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그의 '철인(哲人) 왕' 의 이념이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리스에서 교양세계의 주인이자 정치의 기본 규칙을 제공하던 주역은 시인들이었다. 플라톤의 철학은 시인들이 누리던 권리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후 시적 사유 안에서 정치적 실천이 이루어지던 시대는 이론적 사유가 승승장구하자 그 속에서 망각되었다. 다만 초기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새롭게 구상되었을 뿐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이 낭만주의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다. 물론 이 전통이 대변하는 예술적 정치학도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지닌다. 이것은 나치가 어떤 심미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였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반추해 볼 수 있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참여했고 또 실망한 것도 그가 시적 사유의 옹호자였다는 것에서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예술적 정치성을 옹호하되 우상제작으로 전락하는 조형적 의지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그에 반하는 초월적 사태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경향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재현(再現) 주의' 혹은 '표상(表象) 주의' 로 귀결된다. 재현주의는 개체의 지위를 절대화한 형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모상(模像) ' 으로 규정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형상을 중심으로 총체적으로 해석하려는 버릇은 조형적 의지의 속성이다.

따라서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정치철학과 예술론은 다시 존재론적 탐색으로 이어진다. 조형적 의지를 포괄하되 그것의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는 초월적 사유, 탈표상적이고 탈재현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때만 그들이 의도한 새로운 정치가 납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김상환 서울대교수.철학)



<공동 약력>
▶1940년 모두 프랑스 출생.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철학과에서 교수로 함께 재직했으며 현재 미 UC버클리 초빙교수로 있음.
▶1980~84년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설치된 정치철학연구소 공동 소장으로 활동.
▶라쿠라바르트는 세계적인 학술잡지 『포에티크』의 편집에 참여.

<관련저작.미번역서>

◇ 공동 저작
▶문학적 절대성(1978)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문학이론과 철학을 다룬 고전적 저서.
▶문자의 지위(73) :라캉에 대한 해체론적 해석.
▶나치의 신화(91) :나치의 출현을 게르만 민족의 정체성을 고안해 내려한 조형적 의지의 산물로 해석.

◇ 공동 편집
▶인간의 종언(81) :80년 데리다 사상을 주제로 프랑스에서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의 발표 논문집.
▶정치성 재고(81) :정치철학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들에 대한 1차 편집서.
▶정치성의 후퇴(83) :정치철학연구소에서 발표된 논문들에 대한 2차 편집서.

◇ 낭시의 저서
▶에고 숨(79) :데카르트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무위의 공동체(83) :동일성의 원리에 기초한 공동체 개념을 비판하고 차이의 정치학을 제시하는 명저.
▶자유의 체험(88) :근대 철학에서 철학과 정치를 동시에 떠받쳐 왔던 자유의 개념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중후한 저서.

◇ 라쿠-라바르트의 저서
▶철학의 주체, 도상적 유형학1(79) :문학과 철학의 대립적 관계 안에서 서양사상사의 흐름을 재구성.
▶근대인의 모방, 도상적 유형학2(86) :근대적 미메시스(모방) 개념이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전복적 효과를 띄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비구상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
▶정치성의 허구화(87) :하이데거의 나치참여 이유를 그의 심미적 정치학에서 찾고, 철학과 예술의 관계를 성찰.

<용어 해설>
▶해체론과 탈구축〓파괴와 구성을 동시에 함축한다. 해체론은 플라톤이래 확립된 서양사상사의 본질적 유래와 내재적 한계, 그리고 그 한계 안의 공간이 형성되는 역설적 논리를 탐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탈(脫) 서양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정치성〓정치성(the political) 은 정치(the politics) 와 구분된다. 정치는 개념.이론.제도의 차원에서 성립한다. 반면 정치성은 정치가 있기 위하여 먼저 있어야 하는 사태이되 정치의 개념이나 제도 안에서 망각되는 초월적 사태이다.

▶조형적 의지〓우상적 형상을 만들어 내려는 의지다. 이질적 것들을 하나로 묶고 거기에서 동질성과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괄하거나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상징적 도형이나 형상을 고안해 내야한다. 서양사상사는 이런 우상제작의 역사였다.

▶초월성〓우상적 형상이 지배하는 표상을 뛰어넘는 사태다. 이는 곧 이론중심적인 서양적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태이고, 정치성은 그런 초월적 사태에 속한다. 정치적 차원에서 이 초월성의 망각은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재현주의와 표상주의〓어떤 인위적인 형상(원본) 을 정해놓고 이를 절대화하며 개체의 지위 또한 그 신화화 원본과 '복사품' 의 관계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사의 중심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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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5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니다 2007-02-25 20:11   좋아요 0 | URL
혹시 "숭고에 대하여" 영문판은 없나요? (불어 원서 옆에 없는걸로 봐선...^^)

로쟈 2007-02-25 20:19   좋아요 0 | URL
**님/ 책을 아직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주니다님/ 영역본이 아직 없더군요...

주니다 2007-02-25 20:34   좋아요 0 | URL
번역본을 서점에서 잠깐 들춰봤던 기억으로는 읽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아쉽네요. 숭고는 저도 관심이 있는 주제인데 말이죠....^^

2007-02-25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5 21:05   좋아요 0 | URL
**님/ 그랬었군요.^^ 예전에 낭시나 라쿠-라바르트로 검색을 했더니 안 뜨더라구요...
주니다님/ 영역본이 있습니다. 'Of the Sublime: Presence in Question'(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3)

2007-02-25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니다 2007-02-25 22:21   좋아요 0 | URL
Of the Sublime: Presence in Question이 영역본이었군요. 꽤 비싸네요. ㅎㅎ

로쟈 2007-02-25 22:32   좋아요 0 | URL
**님/ 시차와도 관계가 있을까요?^^
주니다님/ 책은 제가 주문해놓았습니다.^^
 

얼마전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의 참고문헌 얘기를 하면서 사전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거듭 말하자면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좋은 사전을 활용하는 습관은 매우 중요하다." 더불어, "인간의 지식은 좋은 사전들을 통하여 정밀해지고 광범해진다". 단순한 ABC이지만 그걸 실천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다. 일단 현실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바 전공분야인 문학비평/이론쪽만 하더라도 우리말로 씌어지거나 번역된 사전들이 절대적으로 빈약하다.

 

 

 

 

내 경우에 단권 사전으로는 4-5종을 갖고 있는데 알라딘에 이미지가 뜨는 책으론 조셉 칠더즈 등의 <현대문학-문화 비평용어사전>(문학동네, 1999), 이상섭의 <문학비평용어사전>(민음사, 개정판 2001) 등이다. 김윤식의 <문학비평용어사전>(일지사)이나 이명섭의 <세계문학비평용어사전>(을유문화사)도 예전에 많이 참조되던 책들인데 아직 절판되지는 않은 듯하다. 거기에 번역서로는 렌트리키아가 편집한 <문학연구를 위한 비평용어>(한신문화사, 1994)나 분야는 좀 특화돼 있지만 <새로운 미술사를 위한 비평용어 31>(아트북스, 2006)도 참조할 만한 책이다. 내가 안 갖고 있는 책으로는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엮어낸 <문학비평용어사전>(전2권, 국학자료원, 2006)이 있다. 아래의 이미지는 영어권에서도 대표적인 비평용어사전에 속하는 조셉 칠더스 편의 사전과 렌트리키아 편의 사전.

 

잠시 생각이 나서 <현대문학-문화비평용어사전>을 훑어보다가 아무리 분량이 방대하다 하더라도 단권 사전으로는 역시나 부족한 면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록 조감도로는 훌륭하지만 중요한 용어들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이 잡듯이 훑어줄 수 있는 사전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사전이 아주 없지는 않았는데, 서울대출판부에서 출간되었던 '문학비평 총서'가 비록 얇은 분량이긴 하지만 상세도의 역할을 얼마간 해주었기 때문이다.

 

 

 

 

 

 

 

 

권당 1,000원의 저렴한 가격이었기 때문에 30권에 육박하는 시리즈의 대부분을 구매했었던 기억이 난다(얇은 문고본 판형이어서 보관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 시리즈의 단점은 역시나 시의성. 원서들의 대부분이 197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나온 책들이다. 거의 40년전 책들인 것이다. 그간에 새로운 비평이론과 용어들이 쏟아져나온 건 당연하고 그런 부분까지 카바해줄 수 있는 새로운 사전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당면한 요구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해줘야 하는 게 대학출판부의 역할이 아닌가 한다(아무래도 상업출판에서 다루어지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기에).

 

 

  

 

 

 

 

 

그런 점에서 눈에 띄는 책은 국내서의 경우 연세대출판부에서 나오는 '문학의 기본개념' 시리즈이다. <근대어의 탄생>(2003)을 시작으로 하여 <현대문화와 신화>(2006)에 이르기까지 대략 13권의 책이 나와 있는 듯하다. 몇몇 새로운 '용어'들을 포함하고 있는 단행본 분량의 '사전'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흠이라면 아직 많은 영역이 공백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 1년에 3권씩 보태지는 걸로는 앞으로 10년쯤 더 기다려봐야 어지간한 용어들을 카바할 수 있을 듯싶다.

GOTHIC, BOTTING (NCI)

국외로 눈을 돌리면 가장 탐나는 건 루틀리지출판사에서 나오는 '새 비평용어(New Critical Idiom)' 시리즈이다(http://www.routledge.com/literature/series_list.asp?series=4). 현재 40권이 넘게 출간돼 있는데, 특징이자 장점은 <고딕>이나 <희극> 같은 고전적인 비평용어에서부터 <식민주의/탈식민주의>나 <젠더>처럼 새롭게 필수적인 비평용어로 등재된 용어들까지 두루, 그리고 자세하게 카바하고 있다는 것. 문학전공자라면 한 질을 서가에 모두 꽂아두고 싶은 시리즈이다(세보니까 10권쯤을 갖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 시리즈의 몇 권이 국내에 이미 산발적으로 번역/소개돼 있다는 점. 예전에 한번 언급한 바 있는데 폴 해밀턴의 <역사주의>(동문선, 1998), 데이비드 호크스의 <이데올로기>(동문선, 2003), 그리고 사라 밀즈의 <담론>(인간사랑, 2001), 앤터니 이스트호프의 <무의식>(한나래, 2000), 조셉 브리스토우의 <섹슈얼리티>(한나래, 2000)가 이 시리즈의 책들이다. 당연히 갖게 되는 아쉬움은 이 번역/소개가 체계적이지도 지속적이지도 않다는 것. 가장 바람직한 건 전 시리즈를 계약/전담해서 '총서'류로 내는 것일 테지만 현 출판상황에 미루어볼 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좋은 사전을 활용하는 습관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어로는 그런 습관을 기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국어는 과연 학문어가 될 수 있는가란 질문은 사치스러운 질문일까?..

07. 0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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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2-25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추천합니다.

기인 2007-02-25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 안타깝네요. 학교 출판사 하나가 맡아서 열심히 하면 좋으련만.. 용어사전은 논문 쓸 때나, 여기저기 참고할 게 많은데.. 어쨌든 퍼갑니다. ^^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2-25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잘 봤습니다 - 퍼갈게용 ^^

2007-02-26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저도 뒤지는 건 구글뿐입니다...

jouissance 2007-02-27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비평용어사전>(전2권, 국학자료원, 2006) 로쟈님이라면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10만원이란 가격이 부담스러웠나 보군요. 아니면 일찍부터 도서관용을 쓰시기로 방향을 잡으셨던지. 이 사전 의외로 괜찮더군요(저는 두 달 벼르다가 구입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유사한 사전 중에서 첫 손가락으로 뽑고 싶어요. 제목이 '문학비평용어사전'이지 거의 '인문학사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사전이더라구요. 여러면에서 공들여 만든 사전임에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그 쪽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들으니 김한길이 문화부장관 했던 덕에 나올 수 있었던 사전이라고 하더군요. 이미 검토를 마쳤을 로쟈님의 촌평을 듣고 싶군요^^

로쟈 2007-02-27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만 본 적이 있습니다.^^; 가격도 그렇지만 보관할 장소(?)도 마땅찮긴 합니다. 한데 항목수가 많은 것인지 항목별로 상세한 해설을 담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방대한 두께라 하더라도 가령, '러시아 형식주의'니 '모더니즘'이니 하는 항목을 얼만큼 상세하게 풀고 있을지는 좀 의문이구요. 거의 '인문학사전'이라면 백과사전 수준이 아닐까 싶네요. 평이 좋은 듯하므로 구경은 해봐야겠습니다. 이게 웬만한 서점에는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뉴스기사들을 둘러보다가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선생의 한국문단 현실에 대한 비판을 읽었다. '어른들의 잔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문학의 현실을 보는 한 가지 시각으로 스크랩해놓는다. 돌이켜보니 <민족의 상황과 문학사상>(한길사, 1986), <한국현대문학사상사>(한길사, 1988) 등을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40대 후반의 '중견' 평론가였지만 어느덧 '백미'의 원로 비평가가 되었다. 세월무상. 한데, 그간에 한국문학은 과연 전진해온 것일까? 원로 비평가와 공유하게 되는 물음이고 문제의식이다.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자료삼아 옮겨오는 김에 민족문학연구소에 떼놓을 수 없는, 임종국 선생과 그 평전에 관한 기사도 같이 옮겨놓는다. 세로읽기 <친일문학론>은 오래전에 구입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꽂혀 있는지 행방을 알지 못하겠다(아무래도 지방에 있는 듯하다).

오마이뉴스(07. 02. 24) 임헌영 "공지영은 한국 장편소설의 마지노선"

"우리나라에 장편 없다고 상 만들고 하는데, 상금 아무리 올려도 좋은 장편 안 나온다. 우리나라는 이미 장편의 시대는 갔다. 작가들이 장편 쓸 능력이 없다. 공지영이 최후 마지노선이다. 그 연배나 후배들 장편을 보면 수필집이다. 서사구조가 없다. 역사가 서사구조의 기본골격인데, 역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지방이든 세계든 역사가 없다."

지난 22일 기초예술연대(위원장 김지숙ㆍ방현석)가 마련한 '한국사회와 문화예술의 미래' 심포지엄 현장. 이날 두번째 발표자로 나선 문학평론가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씨는 주최 측에서 미리 배포한 자료집의 발표문과는 달리 한국문단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일관했다. 그에게 예정된 주제는 '변화하는 세계, 문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자료집에는 문학의 가치를 주장하고, 그에 대한 정책 지원을 강조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현장의 발표 내용은 사뭇 달랐다.

그는 먼저 "발표문에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적었지만 난 '문화의 세기'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20세기는 전쟁과 살육의 세기"이고 그 뒤를 이은 "21세기는 문화에 의한 정복의 세기로 이는 세계화와 똑같은 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다운 문화를 만들어 오히려 그 같은 문화 정복에 대해 역공할 때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미학의 가치기준이 없어졌다"면서 "윤동주 서시를 읽으면서 어떻게 친일파를 옹호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그렇기에 "예술적 안목이 굉장히 중요"하고, 이를 위해선 "초등학교 교사들부터 어떤 게 진짜 아름다운 것인지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참여정부 실패의 상당 부분은 문화예술이 책임져야 한다고 본다"고도 말했다. "조중동의 논리가 국민들에게 먹히는 것은 그만큼 우리(문화예술인)가 국민에게 올바른 미의식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민예총 예총 문화연대 회원들 모두 반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최근 '민족문학' 명칭 논란과 관련 민족문학작가회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작가회의는 '민족'자 떼고 안 떼고 논의할 필요도 없다. 이미 비민족적인 집단이다. 민족문학이란 흔적도 없어지고 형해만 남았다." 그는 심지어 "변화된 시대에 새로운 미래를 예측하여 문화예술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전혀 없이 예산 따내서 행사나 하는 단체로 전락했다"면서 "내가 문화부장관이라면 그런 단체에 돈 안 주겠다"고까지 했다.

한편 그는 자신의 "희망"이라는 단서를 달아 "문학이 모든 문화예술의 기본이며, 그 중핵은 문학적 상상력이다"면서 문학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은 "작가들이 창의력과 문화적 상상력을 잃어버린 상태"로 그에 따라 "문학의 헤게모니를 다른 장르에 빼앗겼다"고 평가했다. 그는 "80년대 중반부터는 문학이 드라마에도 뒤지기 시작했다"면서 "<모래시계> 드라마만큼 문학에서 광주항쟁을 대중적으로 감동적으로 쓴 작품을 못 봤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광주항쟁 다룬 작품이) 몇 편 있지만 읽어보면 재미가 없어서 몸살이 난다. 그런데도 평론가들은 좋다고 줄을 섰다. 그러면서 '장사 안 된다, 독자 없다'고 하소연한다. 누가 독자 없게 만들었나. 소설가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는 특히 문학에서 서사구조가 없어지면서 좋은 장편소설이 나오지 않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러면서 그는 공지영을 '장편의 최후 마지노선'으로 평가했다. "공지영은 인문학적 지식도 있고, 역사를 보는 눈도 있고, 격랑을 겪기도" 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다. 또 "공지영의 소설은 십대부터 팔십대까지 다 읽을 수" 있는데, 지금 나오는 소설들 가운데는 평론가들조차 제대로 읽기 어려운 소설이 많다고 비판했다.

"보편성을 잃어버린 것은 문학이 아니다. 비문학인도 읽는 문학이 진짜 문학이다. 조정래 소설이 왜 많이 팔리는가? 비문학인도 읽기 때문에 팔리는 것이다. 문학인 중에서는 아예 30대 넘으면 내 소설 못 읽는다 이렇게 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경계를 허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는 그 같은 경계를 허물고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또한 다시 문학적 상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작가들이 "만날 술집에 앉아서 술이나 먹고" 그럴 것이 아니라, "현장을 뛰든지 취재를 하든지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서울 대학로 중앙대 공연영상예술원에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는 이밖에 김지하 시인이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란 주제로 기조강연을, 그리고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인문사회과학부)가 '한국문화와 세계문화, 그리고 예수의 역할',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이 '시각예술의 가치와 미래'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천호영 기자) 

 

 

 

 

 

 

 

 

 

 

 

 

북데일리(06. 11. 21) 임종국, 친일연구 앞장선 `거리의 약장수`

거머리가 무서워 모심기도 못하는 겁쟁이, 프로연주자 못지 않은 기타와 첼로 연주실력, 여동생들과 아내에 대한 못된 손찌검, 첫 아내와 두번의 이혼과 재혼, 거리의 약장수에 화장품 외판원까지...

얼핏보면 나약하고 생활력 없는데다 모난 성격에 소심남의 전형이며, 재력만 충분했다면 한량기질 넘치는 난봉꾼이라 짐작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평생 살아가면서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 있었다.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친일연구가 故 임종국(林鍾國. 1929.10.26~1989.11.12). 해방 60돌을 맞은 오늘, 일제 잔재와 친일파 청산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 치고 있는 무관심과 외면의 현실 속에서 그의 그림자는 깊고 진하다. 정운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이 선생의 타계 16주기를 맞아 최근 펴낸 인물평론 <임종국 평전>(시대의창)은 대쪽같은 선비정신을 가진 학자적 면모 외에도 생전에 고인이 `저질렀고` `후회했던` 인간적인 삶에 대해 진솔하게 공개한다.

저자는 "무거운 `위인전`이기 보다는 읽기 편하고 재밌는 내용을 추구하기로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래도 백점짜리 남편, 만점짜리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임종국의 일생은 그의 친일연구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없이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젊은 시절 해사했던 외모의 임종국이 얼굴에 `무서운` 흉터를 갖게 된 사연은 불완전하고 배고프지만 열정과 신심(信心)을 가진 재야학자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시인 신경림에 따르면 60년대초 어느날, 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단골다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등장한 임종국이 대뜸 `글 안쓰고 술만 마시는 문인놈들은 모조리 숙청시켜야 한다`며 머리로 유리창을 그대로 들이받았다고.



불세출의 낭만시인 이상(李箱)과 닮은 자신을 발견하고 시인을 꿈꾸며 <이상전집>까지 출간했던 임종국은 이승만-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과 문학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의 친일파 실상에 충격을 받고 문학도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친일연구에 혼신을 바친 그가 1966년 첫 출간한 <친일문학론>은 일본 천황과 일제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팔았던 친일파의 증거를 하나하나 찾아내고 기록한 최초의 친일연구서로서 국내외 친일 연구의 반석이 된 역작이 됐다.

식민지시대 매국매족 인물들과 그 후손들이 정관재계의 요직을 차지하고 전권을 휘두르던 시절, 철저히 외면받던 임종국의 연구는 그가 지병인 폐기종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구르는 바윗돌처럼 쉼없이 계속됐다. 그리고 임종국이 세상에 이별을 고하고 나자, 그의 유지와 업적을 받든 후대에 의해 일제 청산을 위한 법이 마련되고 민족문제연구소 설립을 통해 외롭고 고독했던 친일연구는 국가적인 과업이 됐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오늘날 문제삼아야 할 쟁점은 친일파 청산 그 자체에 못지 않게 오히려 친일파 청산 반대세력에 대한 연구와 평가"라며 "친일행위 옹호론의 차세대로의 전이는 독재와 분단고착화, 침략전쟁, 쿠데타 등 반역사적인 행태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원으로 논리적 귀착점이 닿는다"는 추천사를 통해 임종국의 삶과 업적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다.(노수진 기자) 

07. 0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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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2-2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헌영 선생님은 예의 그 긴 눈썹이 트레이드마크예요. 10년 전쯤 뵈었을 때만해도 저렇게 하얗치는 않았는데, 역시 세월이 선생님을 비껴가지 않는군요. 한번 입을 여시면 술술 풀어 내시는 그 언변과 입담이란...! 정말 시간가는 줄 몰랐지요. 임종국 평전 한번 읽어보고 싶군요.^^

로쟈 2007-02-25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교육방송인가 얼굴을 자주 내비치신 적이 있지요. 근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흰 눈썹이네요(10년이면 세월이죠^^)...

나비80 2007-02-26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이 마지노선이라는 이야긴 자괴감이 드는걸요. ^^

로쟈 2007-02-26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성을 변수로 고려하게 되면 불가피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문열의 발언력도 다 그 '판매부수'에서 나오는 것이구요...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http://www.dambee.net/)에서 학술동향기사 한 편을 옮겨온다. '한국사회학'에 게재된 한 논문을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도 기사의 부제로 붙어 있는 '멜랑콜리와 모더니티: 문화적 모더니티의 세계감 분석'이 그 논문의 제목인 듯하다. 사회학 논문으로서는 이채로운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흥미로운 주제이고 분석이다.

담비(07. 02. 24) 멜랑콜리, 우울한 토성의 아이들

세계관, 인생관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감(世界感)이라는 단어는 뭘까. 최근 문화적 모더니티를 연구하는 논문에 자주 등장하게 될 단어다. 프랑스에서 국내 사회학자로서는 드물게 영상사회학 이론을 전공하고 돌아온 김홍중 박사의 논문은 문화적 모더니티와 관련한 첨단의 인식론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것도 매우 알기 쉽고 유려하게 인식의 깊이와 이론적 해박과 서술의 겸손함을 곁들여서 말이다. 그가 '한국사회학'  제40집 3호에 발표한 '멜랑콜리와 모더니티'는 이 '세계감'이라는 낯선 용어로 인간의 자기인식과 세계인식을 표현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그 길을 따라가 보자.

어느 날 파리의 한 유명한 신경전문의에게 환자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세기병"에 시달려 살고픈 의욕이 거의 없으며, 기분이 늘 침울하고 항상 권태롭다고 털어놓았다. 의사는 걱정말라고 다독인뒤 잠시 휴식을 취할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날을 잡아서 드뷔로의 공연을 보러가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인생이 달라보일 것이라고 말이다. 드뷔로는 19세기 프랑스 무언극 배우로 명성을 떨쳤는데, 천진하면서도 슬픈 웃음을 자아내는 현대적 광대의 원형을 창조한 배우다. 그런데 의사의 말에 대한 환자의 답이 가관이다. "하지만 선생님, 제가 바로 드뷔로입니다."

이상은 벤야민의 '파사젠베르크'의 '권태, 영겁회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드뷔로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중세의 광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들의 신랄한 재담과 파괴적인 농담 그리고 과장된 몸짓과 가면 뒤에는, 종종 사태를 명증하게 파악하는 비판적 지성의 단초 혹은 이러한 지성의 소유자가 '어리석은' 세계에 대해서 가질 법한 깊은 상심이 은폐되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김 박사는 위의 일화에 숨은 더 심각한 것을 지적한다. 그것은 우울을 풀어주는 광대마저 우울증에 걸린 난감한 상황이다. '세기병'이라는 표현은 우울이 이제 그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사나의 세계감(感)으로서 존재하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이다.

그 어떤 것에도 진정한 삶의 활력을 느끼지 못하는 '타성의 원천'으로서의 멜랑콜리. 이것이야 말로 무사태평한 웃음 속에서 메아리치는 이 시대의 질병이며, 우리로부터 명령과 복종과 행동과 희망의 용기를 앗아간다고 키에르케고르는 지적한 바 있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세계감이 사회의 모든 부면에서 성취된 전례 없는 혁신에 대한 자신감과 낙관 위에 설립된 근대의 진보적 세계관의 필연적인 그림자라는 것.

사회적 모더니티가 국민-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시민사회를 축으로 하는 공적 제도의 영역에서 '정신 없는 전문가'와 '가슴 없는 향락자들'(막스 베버)를 만들었다면, 그것에 저항하는 문화적 모더니티는 진보하는 부르주아의 공적 세계까 엄폐한 사적 공간에서 되살아난 우울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의 힘에 복속된 '토성의 아이들'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지금껏 온갖 학문들은 근대적 세계감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인 이 토성적 감정의 발생과 구조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보여주지 못했다. 멜랑콜리는 대다수 문화적 산물들의 심정적 배경을 구성하는 문화해석학적 열쇠임이 점점 분명해지는데도 말이다. 김 박사는 이 지점에서 그것에 대한 체계적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하이데거의 '정조'(Stimmung) 개념을 끌어온다.

역시 서구 형이상학을 탈구축한 하이데거가 1929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겨울학기 강의에서 던진 질문은 참으로 멋드러진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철학적 사유를 뒷받침하는 감정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은 무엇인가. 이성의 추리와 전개로 구축되는 철학의 기저에 특수한 감정의 상태가 놓여있다는 인식, 즉 로고스와 파토스의 위계를 전도시키는 시도가 담겨있다. 하이데거는 이 질문을 통해 '사유'와 '의지'에 늘 종속되어 있던 '느낌' 즉 감정의 질서를 학문적으로 복권시키고자 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가장 유명한 개념은 다자인(현존재, Da-Sein)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이 바로 그것. 세계 안에 던져진 유한자는 자신앞에 펼쳐지는 무한한 가능성과 직면하고 있는 자기형성적인 주체이다. 하이데거는 다자인을 다자인으로 만드는 것은 코지토가 아닌 정조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권태, 환희, 불안의 정조를 분석했으며, 정조란 다자인이 세계와 화음을 조정하는 과정이며 세계의 객관적인 음조와 주체의 음조가 섞이고 부딪히고 조정되어 형성되는 일종의 음역(音域)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정조가 사유보다 근원적인 체험의 양식일 때, 사유라는 상부구조는 자신의 전(前)-사유적인 하부구조로서 감정적 차원을 갖게 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리스 철학을 가능케한 것은 '경이의 감정'이었고, 데카르트적 근대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의혹의 정조'였다. 하지만 하이데거조차 20세기의 사유를 규정하는 본원적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런 것이었다. 차갑고 냉정한 계산적 합리성에 의해 정조가 압살된 듯 보인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근대적 사유의 근원적 정조는 느낌의 불가능, 열정의 불가능, 파토스의 불가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근대적 사유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정조는 파토스의 분출이 아니라 그 퇴행과 은폐이며 감정의 원초적 폭발이 아닌 소멸이라고 말이다. 니체가 근대문화 일반을 데카당스라 부르며 그토록 폄하했던 이유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조건을 뛰어 넘어 초월적인 것과 소통하는 고양의 체험에 동반되던 비극적 감정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세기 초엽의 인간들은 이러한 존재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물론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인 주체는 합리적 이성에 근거해 세계와 대면하고, 세계를 분절하고 측량한다. 반면 권태롭고 우울한 우울자들은 그가 대면할 세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지 못하고, 세계를 분절할 수 있는 경계를 상실한 이들이다. 그는 정서의 욕동을 단호하게 억제하면서 미래를 투기하지 못하고, 토성적 정조에 사로잡혀 현실원칙으로 귀환하지 못하는 욕망의 노마드다.

근원적인 내적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파편들을 끊임없이 섭취하고 내면화하는 일종의 복합적인 식인증적 주체와 조응하는 멜랑콜리의 세계, 이것은 하나의 '기호학적 폐허'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물신으로 구성된 파편적이고 환몽적인 세계와 식인증적 주체의 변증법적 관계를 더 들여다보면 놀라운 역설이 발견된다. 토성적 정조의 근본적 징후인 '식인증'은 어떻게 보면 '우울증적 전략'이라 부를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

피에르 페디다(Pierre Fedida)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심화시키면서 "멜랑콜리는 대상의 상실에 따른 퇴행적 반응이라기보다, 오히려 상실된 대상을 살아있게 만드는 몽환적인(또는 환각적인) 능력"이라고 말한다. 김 박사는 이걸 좀더 명료하게 요약한다. 토성적 정조는 무언가의 상실로부터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사실은 상실을 인식하고 상실을 문제시하게 만드는 조건이라는 사실. 무언가를 상실해서 우울한 게 아니라, 우울하기 때문에 상실을 인지하고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계내의 기호들을 삼킨다는 것이다. 우울자는 그가 단 한번도 소유해 본적이 없는 '그것'의 상실을 연기(演技)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의 회복을 끝없이 '연기'(延期)한다고 말한다.

사실 우울자에게, 진정한 소유의 대상은 바로 상실감 그 자체이다. 이 대목에서 아감벤은 "식인증이란 이처럼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상실된 것으로서' 나타나게 하고,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재현불가능한 것으로서 표상되게 하며,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알레고리적으로' 접근가능하게 해주는 토성적 정조의 전략"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사회적 모더니티가 빠른 속도로 일소해버린 초월적 가치들과 대상들, 즉 사유의 타자들을 문화적 모더니티의 영역에서 생존시키려는 일종의 전략이라고 김 박사는 부언한다. 신은 죽었지만 '죽은 신'은 하나의 형식으로 살아남고, 예술도 죽었지만 '죽은 예술'은 하나의 이상으로 남는다. 마찬가지로 소멸한 총체성은 가능성의 범주로서 살아남고 이들 앞에서 우리는 우울하다.

초월적 가치를 아직도 신앙하는 자는 우울하지 않다. 또한 이들이 완벽하게 소멸되었다고 믿는 자 역시 우울할 수 없다. 우울자는 그 중간에 머물면서 '소멸됨으로써 살아 있는 어떤 것'을 끝없이 추구한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시인이 바로 보들레르이다. 릴케 같은 이도 '두이노의 비가'에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영웅은 존속한다. 영웅의 추락은 단지 존재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김 박사는 결론에서 "근대적 로고스의 타자를 '사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사유의 형식 안으로 포섭하는 문화적 모더니티의 심연적 성찰성의 근저에는, 하이데거가 권태라고 불렀던 근대적 형이상학의 근본 정조, 즉 토성적 정조가 있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패기만만한 진보주의자들과는 달리, 어둡고 우울하지만 한층 더 심오한 정신적 역설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리뷰팀)

07. 02. 25.

 

 

 

 

P.S.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이데거의 1929/30년 겨울학기 강의는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세계-유한성-고독>(까치, 2001)로 번역돼 있다. '우울증'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책은 크리스테바의 <검은 태양>(동문선, 2004)인데 기억에 딱히 '모더니티'를 특화시켜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페디다의 <우울증의 유익>도 소개되면 좋겠다.

마침 '모더니티'와 관련해서 요즘 읽고 있는 책들은 앙리 르페브르의 <모더니티 입문>(동문선, 1999), 앙리 메쇼닉의 <모데르니테, 모데르니테>(동문선, 1999), 그리고 에른스트 벨러의 <아이러니와 모더니티 담론>(동문선, 2005) 등이다. 물론 모더니티 관련서들은 이보다 훨씬 많다(적어도 20여 권의 목록이 꾸려질 수 있다). 개인적으론 미술 관련서로 칼리니스쿠의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시각과언어, 1998)까지 챙겼으면 하지만 아마도 박스에 들어가 있는 듯싶다(이 책은 일종의 사전이다). 그 다섯 얼굴에 모더니티의 주된 정조로서 '우울한 표정'을 더 보태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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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5 10:48   좋아요 0 | URL
이런 사이트도 있군요. 즐찾에 넣어놔야겠어요.

싸이런스 2007-02-25 12:24   좋아요 0 | URL
"근대적 사유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정조는 파토스의 분출이 아니라 그 퇴행과 은폐이며 감정의 원초적 폭발이 아닌 소멸이라고 말이다" 감정이 소멸되면 인간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마저 불구화 되기 때문에 살아가기 어렵게 된다는 이론(Damasio, Antonio)을 생각한다면, 소멸이라기보다는 apathy의 정조가 아닐까요.

로쟈 2007-02-25 12:39   좋아요 0 | URL
아프님/ 일주일에 한번 정도 들어가보시면 됩니다.^^
싸이런스님/ 사실 분출구가 없는 건 아닌데요. 스포츠나 카니발 같은 걸 보면. 문제는 그러한 '폭발'이 '근대적 사유'에는 은폐/소멸돼 있다는 것이고, 말씀대로 그때의 '소멸'은 냉담과도 대치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논문은 안 읽어봤기 때문에 맥락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포커 페이스 같은.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논문이라는 담론'의 형식이 요구하는 게 바로 apathy이죠...

싸이런스 2007-02-25 14:17   좋아요 0 | URL
그래서 논문 읽는게 글케 지루하나보군요. ㅠ.ㅠ

주니다 2007-02-25 20:31   좋아요 0 | URL
P.S.에서 언급하신 동문선의 책들 번역 상태는 어떠한지요? 멜랑콜리와 모더니티는 흥미롭고도 계발적인 주제인 듯 하네요. 이 주제와 관련된 로쟈님의 페이퍼를 기대하겠습니다.^^

로쟈 2007-02-25 20:45   좋아요 0 | URL
저는 페디다의 책이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르페브르의 책은 영역본을 곧 구할 생각이구요, 메쇼닉의 책은 일부만 복사했습니다(영역본이 없어서요). 일견 번역이 나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검은 태양>은 원저나 영역본과 같이 읽어야 하구요, 벨러의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리니스쿠의 책은 읽을 만하지 않았나 싶은데 오래전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2007-02-26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6 12:25   좋아요 0 | URL
**님/ 감사.^^ 인문서가 잘 안 나간다는 건 거의 '기본조건'인지라 이유가 안 될 거 같구요, 책은 '고집'으로 내야 할 거 같습니다. '그 사장님'처럼 고집만 있어도 문제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