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자다 말다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가벼운 몸살 같기도 하고 피로의 누적 같기도 하다). 엊그제부터 샹탈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론에 대해 몇 자 적고 밀린 일들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진도는 두어 페이지를 못 나가고 있다. 정신 좀 차리기 위해 '단순작업'을 해두기로 한다. 얼마전(사실 몇주 전)에 출간된 김석의 <에크리>(살림, 2007)에 대한 리뷰가 뒤늦게 올라왔는데(한국적 서평 관행에 미루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어 <에크리>가 없는 상태라 여전히 '엇박자'라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지만 여하튼 '예습'한다는 기분으로 읽어볼 수는 있겠다. 리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7158.html)를 읽어가며 몇 가지 코멘트를 덧붙이도록 한다.

한겨레(07. 12. 15) '욕망의 이론가’ 라캉을 다시 읽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1~1981)에 대한 관심은 국내에서 몇 번의 변곡점을 그렸다. 프랑스 구조주의 사상이 밀어닥치던 1990년대 중반 라캉의 이론은 루이 알튀세르나 미셸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과 함께 구조주의의 중심 이론 가운데 하나로 거의 빠지지 않고 거명됐다. 그러다 곧바로 탈구조주의 물결이 구조주의 위를 덮쳤다. 라캉은 이 물결에 밀려, 특히 질 들뢰즈의 철학에 밀려 지식장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러니까 기자가 그리고 있는 라캉의 수용사는 알튀세르. 푸코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겠다. 기억에 가장 '혁신적'이었던 책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 1990)이었다. 저자의 <에크리>의 참고문헌 소개에는 '국내에 번역된 책들'만 제시되고 있는데 기존의 수용 성과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과문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와 라캉, 푸코, 알튀세르에 대해 저자가 소화한 내용을 그래도 적시하고 있는 것이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이며 '교양서'로 분류하기엔 다소 전문적이지만 참고문헌으로서의 가치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구조주의 일반에 대해서는 물론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동문선, 전4권)가 필독서이다. 비록 술술 읽히는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알기에 라캉에 관한 모든 책은 김형효 교수의 책에 뒤이어 출간됐다. 국내 필자가 쓴 또다른 책으로 이진경의 <철학의 외부>(그린비) 정도가 떠오르는데 '구조주의자 라캉'에 대한 소개와 비판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홍준기의 <라캉과 현대철학>(문학과지성사, 1999)와 국내 '라캉학'을 종합한 <라캉의 재탄생>(창비, 2002), 그리고 박찬부 교수의  연구서들이 빼놓을 수 없는 '흔적'일 텐데 <에크리> 해설의 저자는 이런 책들 대신에 "라캉의 <에크리>를 읽고 연구할 때 참고가 될 만한 책들"로 불어권 연구서들만 나열해 놓고 있다. 국내 연구서들을 읽느니 차라리 불어 입문서를 읽는 게 낫다는 암시일까? 일반독자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들뢰즈의 ‘생산으로서의 욕망’ 개념은 라캉의 ‘결여로서의 욕망’ 개념을 날려버렸고, 들뢰즈의 저작 <안티오이디푸스>는 라캉이 암묵적으로 지지하던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삼각형’(아버지-어머니-아들)을 폭파해버렸다. 한동안 세상은 들뢰즈의 것이었다. 그러나 라캉의 이름은 슬로베니아학파를 이끄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등장과 함께 다시 귀환했다. 지젝이 자기 사상의 이론적 기둥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 지젝과 더불어 라캉은 부활했다.

 

 

 

 

"한동안 세상은 들뢰즈의 것이었다. 그러나 라캉의 이름은 슬로베니아학파를 이끄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등장과 함께 다시 귀환했다."라는 문장을 읽고 웃음이 났다. 한동안 들뢰즈의 것이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지? 들뢰즈의 독자가 그토록 많은가? 지젝과 함께 라캉은 정말 '귀환'하고 '부활'했는가? 약간은 드라마틱한 과장이 느껴진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폭파해버렸다면 지젝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오이디푸스 또한 다시 귀환하고 부활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품게 된다. 물론 짤막한 리뷰 기사에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라캉 전공자 김석(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박사)씨가 쓴 <에크리-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은 이렇게 부활한 라캉을 그의 주요 저서 중심으로 친절하게 소개하는 안내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 분야의 이론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후 명실상부한 최고의 이론가다.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프로이트 사후 분화를 거듭하던 정신분석학계에 강력한 이론적 성채를 제공했다. 그러나 라캉이 단순히 프로이트로 돌아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극복하고 혁신하려고 했다. 그는 ‘리비도’(성에너지)와 같은 프로이트의 생리학적·생물학적 개념과 완전히 단절해 무의식을 구조주의적으로 해명했다. 특히 프로이트가 거리를 두었던 철학이나 언어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정신분석학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했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라캉의 대표 명제는 이런 사정을 보여준다.

 

 

 

 

저자는 '라캉의 욕망하는 주체'를 주제로 2005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돼 있으니까 액면 그대로 '라캉 전공자'이다(이미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동문선, 2002)을 옮긴 바 있다). 올해는 역시나 라캉으로 학위를 받은 김서영씨가 브루스 핑크의 <에크리 읽기>(도서출판b, 2007)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어서 <에크리> 수용의 품새는 다 갖춰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와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도 최근에 모두 소개되었기에 라캉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에크리>도 <세미나>도 아직 소개되지 않은 점이 아이러니컬하긴 하지만(듣자 하니 <에크리>의 경우 내년에는 번역본이 나올 듯하다). 한편 여전히 가장 쉬운 입문서는 다리안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2)이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해설 대상으로 삼은 것이 제목에 드러난 대로 라캉의 대표저작 <에크리>다. 1966년 출간된 <에크리>는 1936년 이래 30년 동안 라캉이 쓴 논문 28편을 엮은 책이다. 라캉 사상의 거의 전부가 이 책에 압축돼 있다. 라캉을 두고 ‘욕망의 이론가’라고 하는데, 그가 평생토록 해명하려 한 것이 이 욕망의 성격과 구조와 작동이었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밑바닥에서 작용하는 욕망의 질서를 가리키며, 이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실행하는 존재가 주체다. 라캉은 주체가 대상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그 세계를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나누었다. 1950년 이전 상상계를 설명하는 데 집중했던 라캉은 원숙기에 이르러 상징계를 분석하는 일을 중심 과제로 삼았고,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실재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된 개념이어서 일종의 세트를 이룬다. <에크리>의 논문들은 이 세트 개념들을 포괄해 설명하고 있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키워드로 하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 세 단계를 거친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다. 1966년에 나온 <에크리>는 이 중 상징계, 혹은 구조주의 시기의 라캉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지적된다. 70년대의 <세미나>에서 그는 자기 이론에 대한 새로운 제안과 교정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라캉'의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라캉 vs 라캉'이란 표현은 그래서 나온다). 나는 이게 라캉 이해의 가장 큰 난점이라고 생각한다. 라캉의 '이론적 전기;'에 대한 관심이 그런 의미에서 필요하다(수시로 사전도 참조해야 하고).  

상상계는 어린아이의 자아인식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라캉은 ‘거울단계’라는 용어로 이 세계를 설명한다.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서 그 거울 이미지를 따라 ‘상상적으로’ 자아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렇게 구성된) 자아는 주체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주체를 속이는 기만적 환영이다.” 거울단계를 거친 어린아이는 다시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그 단계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법, 아버지의 권위를 내면화한다. 그 과정을 거쳐 진입하는 곳이 상징계다. 상징계란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다. 이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를 통해서 관계 맺는 세계다. 아버지란 이 질서의 대표자이자, 주체가 동일시하는 ‘대타자’(큰타자)다. 그 아버지는 남근(팔루스)을 소유한 자로 간주되며, 남근이라는 특권적 기표를 얻고자 하는 것이 주체의 욕망이다. 욕망이란 그러므로 남근이 없는 상태, 곧 결여를 가리킨다.

상징계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에 상응하는 것은 라캉에게서 '아버지의 이름'이다. 여기에 개입하는 건 정신분석의 '언어학적 전회'이다(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불운은 그가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 이전에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다는 것. '언어학적 전회' 이후의 아버지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상징적 아버지, 부권적 권위로서의 아버지이다. 곧 법이고, 질서이고 언어규칙이다. 때문에 '안티오이디푸스'가 정신병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법과 질서, 언어규칙의 바깥으로 외출/탈주하려는 것이 안티오이디푸스의 기본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의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욕망은 상징계의 질서에 갇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데, 여기서 그 너머가 바로 실재계다. 실재계란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 그 세계는 상징계가 균열을 일으키거나 구멍이 뚫릴 때 언뜻언뜻 드러날 뿐이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어서, ‘주체의 원초적 현실’이자 ‘균열 없는 충만한 세계’이며 “안과 밖의 구분도, 대상과 주체의 구분도 없는” 세계다. 실재계는 때로 환각으로 때로 광기로 드러나기도 하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가 닿을 수 없고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 모순적 대상이야말로 욕망의 궁극적 귀착점이다. 라캉의 후예인 지젝은 실재계로 대표되는 이 후기 이론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고명섭 기자)

07. 12. 15.

P.S. 라캉에 대한 지젝의 주석의 많은 부분이 실재(계)에 할애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실재계란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라고 정의되지만 그것이 '어떤 세계'라고 규정될 수는 없다. 실재는 그저 상징계의 표상/재현이 실패하는 지점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징계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생겨나는 잉여가 '실재'이다.

기자는 계속해서 지젝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에크리> 해설의 저자는 특이하게도 그에 대해서 전혀 참조하지 않는다(하지만 라캉을 이해하는 데 지젝을 경유하는 것이 가장 용이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애당초 이 책을 구입했을 때 '지젝 없이 라캉 읽기'라는 페이퍼를 적으려고까기 했을 정도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라고 기자는 적었는데, 기꺼이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그냥 '여성의 음부' 같은 곳이다(지젝이 어디선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다 믿을 듯하다). 가려진 뭔가가 있지만 막상 '가리개'를 제거하는 순간 그 뭔가는 상실된 것으로 체험된다.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라는 건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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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1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어디선가 지젝이 그렇게 말했다는 '확신'까지 드는데요...^^
개인적으로 Bertrand Ogilvie의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은, Peter Widmer의 <욕망의 전복>과 함께, 라캉 입문을 위한 좋은 안내서라고 생각합니다. Bruce Fink의 <에크리 읽기>는 아직 채 다 읽지 못했는데, 역시나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저 모든 책들은 언제나 제게 '가닿을 수 없는 실재'입니다...ㅠㅠ

로쟈 2007-12-16 17:39   좋아요 0 | URL
문제는 실재가 아니라 욕망이지요.^^

람혼 2007-12-17 02:27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

vinoveri 2007-12-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울단계를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가는 과정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듯 한데요.. 라깡은 거울단계에 상상계뿐만 아니라 상징계가 개입하는 것으로 얘기하지 않나요?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그게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오인)할 때, 그것에 대해 보증자의 역할을 하는 제3자 - 주로 어머니겠지요 - 의 확인 내지 인정의 개입을 통해서 말이지요.(람혼님이 소개해주신 <욕망의 전복>에도 이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거울단계를 통해서 아이가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옮겨가게 된다'라는 식의 생각은 라깡이 국내에 소개되던 초기에 잘못 소개된 통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거울단계 이전에는 상상계밖에 없고 그 이후에 아이가 상징계에 편입된다라는 식의 생각 말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상상'계', 상징'계'라는 번역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적인 것만이 있는 '세계', 상징적인 것만이 있는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요.)
그렇게 본다면, 거울단계를 거쳐 다시 외디푸스단계로 넘어간다라는 설명도 제가 보기에는 별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라깡이 이런 식의 단계론적 설정을 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로쟈 2007-12-16 17:45   좋아요 0 | URL
상상적 동일시와 상징적 동일시를 구별하면 문제가 해소될 듯한데요. 그리고 상상계, 상징계, 실재는 순차적인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상계 이후에 상징계가 온다는 식이 아니라 서로 매듭을 이루며 공존하는 것이죠...

vinoveri 2007-12-18 01:31   좋아요 0 | URL
거울단계에서 아이에게 일어나는 동일시는 상상적 동일시가 아니냐는 말씀으로 이해되는데요..
물론 아이가 자신의 거울이미지를 보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상상적 동일시이지요. 하지만, 아이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확신(오인)하게 되는 과정에서, 어머니로 대표되는 제3자의 보증이 개입하게 되지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면서 '저게 나야?'라고 묻는 (듯한) 아이에 대해서, '그래, 그게 바로 너란다.'라고 대답하는 (듯한) 어머니의 따뜻한 미소.. 뭐, 이런 상황이 이들 3자간에 벌어지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이 제3자의 시선은 소위 '정형외과적 기능'을 하게 됩니다. 즉 파편화된 채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던 이미지들이 하나로 기워져서 단일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이지요. 제3자의 개입이 없다면 아이는 사회적 동일성을 획득하는 데 큰 장애(소위 자폐)를 겪게 되며, 그런 점에서 거울단계에서 제3자의 개입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드리고자 했던 것은 이 과정에서 하는 제3자의 역할이 상징적인 것의 개입에 해당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어머니가 주로 하는 역할이지만, 이 때의 개입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개입하는 것이구요.) 따라서 거울단계에서 일어나는 상상적 동일시에는 이미 상징적 동일시가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거울단계에서 개입하는 제3자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라깡의 에끄리의 거울단계논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후기 라깡의 세미나에서 강조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출전의 차이 때문에 혼란이 가중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체적인 논지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듯 합니다.)

이거, 로쟈님의 블로그에 처음 다는 댓글이 너무 딱딱하고 까칠한 게 아닌가 해서 많이 걱정이 되네요..--; 그저 지식인들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는 로쟈님의 블로그를 빛내려는 충정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쟈 2007-12-17 15:52   좋아요 0 | URL
네, 좋은 의견이십니다. 사실 아시다시피 라캉에 대한 '해석'의 문제 같고, 제가 특별한 의견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저는 전공자가 아니라 독자일 뿐이라서요). 몇몇 2차문헌에 근거하여 판단할 따름입니다. 보다 정밀하게 의견을 제시(발표?)해주시면 라캉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vinoveri 2007-12-18 01:32   좋아요 0 | URL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블로그를 드나들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저야말로 그저 독자일뿐일걸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관심도서가 많지 않아서 눈길을 돌리게 된 건 해외신간이다. 중앙일보의 '글로벌책읽기'에 마침 하 진의 신간에 대한 소개가 올라왔기에 옮겨온다. 리안이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계 영화감독이라면 하 진은 가장 성공한 소설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그의 소설들이 국내에서도 작년부터 적극 소개되고 있다. 해서 'Free Life'(자유인생)가 원제인 이 신간도 어쩌면 내년에는 구경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672쪽 분량이니까 시일은 좀 소요될 듯하다).

중앙일보(07. 12. 14) [글로벌책읽기] 아들놈이 창피하대, 내가 영어 못해서 …

소설 『기다림』으로 명성을 얻은 중국계 소설가 하진이 새 소설을 출간했다. 중국을 배경으로 했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 소설은 중국인 이민자 가족이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미국 유학생 부부인 난우와 핑핑이 천안문 사태 직후 미국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3년간 헤어져 있던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난우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대학원을 그만두고 야간 경비원 등 갖가지 험한 일을 하게 된다. 뭐든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저축을 위해 극도의 내핍 생활을 하는 부부의 유일한 희망은 아들 타오타오의 교육이다. 난우에게는 결혼하기 전에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고 결혼 후에도 그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부인 핑핑도 잘 알고 있어서 부부 사이는 자주 삐걱거린다. 하지만 둘 다 중국에서 어렵게 데려온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희생한다.

보스톤 지역에서 뉴욕으로 가서 브루클린에서 조그만 레스토랑을 열고 다시 아틀란타 교외의 쇼핑 몰 한구석에 중국식당을 가지게 되는 과정은 아메리칸 드림이 어떻게 실현되어 가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두꺼운 장편소설은 어떤 면에서 중국인 이민자들의 정착 교본처럼 읽힐 수도 있을 정도로 생활의 세목들을 자상하게 적어놓고 있다. 미숙한 영어 때문에 생기는 일들은 처음에는 코믹하지만 나중에는 가슴을 짓누른다. 그것이 결국 중국문화와 미국문화의 비교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난우가 보기에 미국인들은 근면하지만 돈의 노예이자 교양 없는 속물들이다. 하지만 중국에선 날마다 누군가와 싸워야 살아남을 수 있고 뇌물 없이는 되는 일이 없는데다 정부는 국민들을 어린아이 취급하면서 복종만 강요한다. 난우는 자신의 아들이 그런 폭력적 환경을 견디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경제적 안정을 이루어가면서도 주인공 난우를 앙앙불락하게 만드는 열망이 있는데 그것은 시인이 되는 것이다. 중국에 있는 옛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함께 난우를 괴롭히는 시인의 꿈은 이민자가 가지게 되는 이중적 심리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에서 살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영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미국에 온 사람이 영어를 마스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진이 인터뷰에서 한말 그대로 이민 생활의 핵심은 “영어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계속 배울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영어로 시를 쓰겠다는 난우의 생각은 편집자로부터 “시란 언어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라는 충고를 듣기에 이른다.

여기다 불쑥 커버린 아들 타오타오는 부모들의 어설픈 영어를 창피해한다. 십대 아이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언행일 수도 있는 일이 이민자 부모들에겐 날카로운 아픔이 된다. 자신들의 삶을 희생해가면서 키운 아들이 미국인처럼 행동하면서 부모와 거리를 두려고 할 때, 부부는 위기에 도달한다. 부부 싸움 끝에 핑핑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를 집어드는데 누르는 번호가 911인 것은 우스우면서도 슬픈 장면이다.

하진의 전작들이 미국 독자들이 원하는 중국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자신이 미국에 와서 경험한 것을 적은 자전에 가깝다. 미국 숭배와 영어 배우기 열풍에 대한 적절한 비판으로 읽힐 수도 있는 이 소설은 미국 이민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이영준_문학평론가)

07. 12. 15.

 

 

 

 

P.S.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하 진의 소설은 대표작 <기다림>을 비롯해서 다섯 권 정도가 번역돼 있다. 디아스포라 문학이란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라 <기다림>과 <자유인생> 정도는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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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이번주에는 주머니를 털어갈 만한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몇 권의 책을 그냥 기억해놓으면 되는 수준이다. 그 중 한 권은 미국의 두 심리학자가 쓴 <거짓말의 진화>(추수밭, 2007)이다. 목차를 보니 진화론은 물론이고 진화심리학과도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원제와 다르게 '진화'란 말이 국역본 제목에 들어간 건 아무래도 '호객'을 위한 것이지 싶다('거짓말'이라고 하면 너무 야박하겠고). 차라리 부제가 더 분명하게 책의 주제를 제시해주는 듯하다. 자기정당화의 심리학(혹은 '발뺌의 심리학', '오리발의 심리학'). 이건 뭐 한국인이라면 거의 매일같이 안팎으로 경험하는 것이겠는지라 '우리 얘기'로 읽어도 되겠다. 내가 읽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7. 12. 14) '자기정당화’의 덫에 걸린 거짓말쟁이들

한국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 바로 검찰 조사를 받으러 들어가는 피의자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는 모습이다. 특히 정치가나 기업인, 고위 관료 등 특권층에 속하는 인사들일수록 완강하게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검찰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자신에 대한 혐의가 벗겨질 것이라는 뜻)” 등의 말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나마 나은 경우엔, “어떻든지 간에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정도다. 이 말 역시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지만, 국민적 관심사가 된 만큼 소란을 일으켜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왜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까. 불과 수시간 후면 드러날 거짓말을 왜 줄줄이 늘어놓을까. 국민들의 눈에는 이들의 잘못이 너무나 명백하게 보이는데 왜 정작 당사자들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을까. 책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심리학적인 답을 내놓는다. 바로 ‘자기정당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당화하는 심리구조를 철저히 파헤치고 있다. 저자들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우선, 죄를 지은 사람이 대중을 설득하는 것(‘나는 그 여자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등)과 자신을 설득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대중을 설득할 때는 자신이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스스로 설득할 때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자기정당화가 공공연한 거짓말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위험하다.

남을 속이기 위한 의식적 거짓말과 자신을 속이기 위한 무의식적 자기정당화 사이에는 매혹적인 회색 영역이 존재한다.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종종 과거 사건의 윤곽을 흐리게 하고, 범죄성을 호도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자기고양 편향(ego-enhancing bias)’에 의해 재단되고 형성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의 자기위주 왜곡이 작용함에 따라 우리는 과거의 사건을 잊거나 왜곡하고, 그 결과 차츰 자신의 거짓말을 믿게 된다.

자기정당화를 추동하는 엔진은 무엇일까. ‘인지부조화’다. 예를 들어, ‘흡연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과 ‘나는 하루 두 갑을 피운다’라는 자각 사이엔 긴장 상태가 형성된다. 흡연자가 이 같은 심리적 불편함을 해소하는 방법은 금연을 하든지, 아니면 ‘흡연이 긴장 이완이나 비만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구실을 붙여 흡연으로 인한 피해를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대부분 흡연자들은 후자의 방법으로 자신을 속인다.

이처럼 인지부조화 상태를 해소하려는 욕구는 강렬하다. 부조화 상태에서는 불편함과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실험 결과 부조화 상태에 있을 때 뇌의 추론 영역은 거의 정지되며, 조화가 회복됐을 때는 뇌의 정서 회로가 밝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메커니즘은 마음을 일단 결정하고 나면 바꾸기가 어렵다는 관찰을 뒷받침하는 신경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더욱이 되돌이킬 수 없는 행위를 했을 때는 자기가 옳았다는 확신이 더 강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 사람들은 상당히 긍정적인 자기개념을 갖고 있어서 자신을 유능하고, 도덕적이며, 똑똑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부조화를 줄이려는 노력은 긍정적인 자아상을 보존하도록 설계돼 있다. 자기확신이 강하고 유명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가능성이 더 낮은 것이다. 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 역시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정당화의 메커니즘을 따른다. 단, 이들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자신을 속인다. 예를 들어, 자신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는 사람은 평소의 생각과 다르게 성공을 거뒀을 때 ‘아냐, 이건 우연일 뿐이야’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다시 한국사회로 돌아와보자. 매일매일의 뉴스거리가 흘러넘치는 한국사회에서는 왜 그토록 많은 공직자들이 비리를 저지를까. 자신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명예와 경력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짓을 어쩌면 그토록 무모하게 저지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저자들은 ‘피라미드의 비유’를 든다. 처음엔 피라미드의 정상에 서 있던 인물도 한쪽 사면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결국 맨 밑바닥까지 추락한다는 것.

누구나 처음부터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초기엔 ‘업자와 식사를 같이 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한다. 업계의 현안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니 같이 밥 먹으며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럼 골프는? 서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더욱 좋지 않은가.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외 골프관광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결국, 처음 공직에 발을 들여놓을 당시엔 ‘비리 공직자’로 여겼던 인물과 닮은 꼴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은, 미국사회에서의 풍부한 사례들, 즉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밥 먹듯이 하는 대통령을 비롯해 과학자, 의사, 성직자, 사법기관에서 외도를 한 남편의 행동까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며 자기정당화의 심리구조를 철저히 파헤친다. 마지막 장에서 이 같은 자기 기만의 유혹을 떨치고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용기 있는 인물의 사례까지 보여준다. 자기정당화의 덫이 얼마나 깊고 끈질긴지를 책을 통해 충분히 느낀 뒤에 이처럼 용기 있는 유명인들의 고백사례를 보면 새삼 이들이 달라 보인다. 책의 날개에서 경고하고 있듯이, 어느 누구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시는 예전처럼 그렇게 속 편하게 책임을 회피하지 못할 것’이다.(김영번기자)

07. 12. 15.

P.S. 알라딘에는 이 책의 원제가 병기돼 있지 않아서 몇 번 더 손품을 팔아야 하는데, 부제까지 더하면 원제는 좀 길다. 'Mistakes were made (but not by ME): Why we justify foolish beliefs, bad decisions, and hurtful acts'(2007) 올봄에 나온 책이고 분량은 304쪽. 공저자의 한 사람인 엘리엇 에런슨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 100인’의 한 사람으로도 꼽힌 적이 있는 저명한 심리학자이고 <사회심리학>이란 교재의 공동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국내에도 번역돼 있다기에 찾아보니 <사회심리학>(탐구당, 1990)이라고 소개되었다. 당연히 애런슨이 공저한 'Social Psychology'(2006, 6판)를 옮긴 것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라 애런슨의 단독 저서인 'The Social Animal'(2007, 10판)을 옮긴 것이고 원래는 <현대사회심리학개설: 사회적 동물>(탐구당, 1981)이라고 번역되었다가 <사회심리학>이라고 개정돼 나온 것이다. 5판을 옮긴 것이라고 하는데, 원서가 현재 10판까지 나왔으니 좀더 보완해서 개정판을 내야 할 듯싶다(교재용 책은 물론 많이 찍은 책들이 좋은 책이다), 라고 적고 다시 살펴보니 <사회심리학>(탐구당, 2002)이라는 최신판도 있다. 이건 8판을 옮긴 것인데 국역본의 경우 분량은 오히려 줄었다. 책의 판형이 바뀐 게 아니라면 군더더기들을 덜어낸 모양이다.   

애런슨의 책은 <사회심리학> 외에도 공저 한권이 더 번역돼 있는데, <누군가 나를 설득하고 있다>(커뮤니케이션북스, 2007)가 그것이고, <프로파간다시대의 설득전략>(커뮤니케이션북스, 2005)의 재판이다. 원제는 '프로파간다의 시대'(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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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15 14:28   좋아요 0 | URL
심리학적으로 설명은 되어도 용서는 안되는게 그들의 행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부정부패 금품수수로 구속된다 치더라도 금방 사면되서 나오며 별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부유하게 사는게 그들이니까. 어쩌면 X밟았다 생각할지도 몰라요.
자기합리화는 곧 도덕불감증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로쟈 2007-12-15 23:33   좋아요 0 | URL
자기정당화의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학도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 정도는 개얀타"는 대중적 정서의 문제도 걸려 있고요...
 

얼마전 '한국의 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이란 글을 창비주간논평에 실으며, 현 번역문화와 번역의 컨텍스트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1739728). 아는 바대로, 우리 출판/독서 문화에서 번역서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고려하면 현재의 번역문화는 아직 척박한 수준이다. 번역과 번역자에 대한 대우가 열악하고, 때문에 양산되는 번역서의 질 또한 기대에 못 미칠 때가 많다(저작권이 있는 책의 경우 번역서가 나오는 게 더 고역일 때도 있다. 한국어로는 제대로 읽을 수가 없게 돼 버리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널리 확산되는 게 일단은 개선의 첫발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침 관련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로쟈란 이름도 언급돼 있어서 모른 체할 수도 없고).    

한국일보(07. 12. 14) "번역물 옥석 가리자" 번역비평 '회초리' 들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표하는 <2006년도 출판통계>에 따르면 작년에 나온 신간 중 23%가 번역서다. 그 비율이 7% 수준인 미국과 비교할 것도 없이 한국은 번역서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이런 현실에 발맞춰 번역물의 옥석을 가리는 번역비평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특히 학계를 중심으로 기존 번역서의 수준을 평가하는 보고서가 잇따르고, 번역비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지가 발간되는 등 번역비평의 체계를 갖추는 작업이 한창이다.

■ 번역비평의 체계화
한국번역비평학회(학회장 황현산 고려대 교수)는 지난달 연간 학회지 <번역비평> 창간호를 냈다. 첫 번역비평 전문지다. 황현산 교수는 창간사에서 “이 학회지를 통해 깊이 있는 번역론을 개발하고 번역 평가의 방법과 기준을 모색하는 한편 번역 현장의 체험에 귀 기울이고 그 결실을 비평할 것이며, 번역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과 처방들을 위해서도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썼다.

이 잡지는 ‘번역비평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의 특집과 함께 <한국 현대시의 러시아어 번역의 문제> <도스토옙스키 한국어 번역의 문제점> 등의 평론을 실은 ‘번역비평’, 서구 번역이론을 소개하는 ‘번역이론 연구와 소개’, ‘신간 번역서평’ 코너 등으로 구성됐다. 번역가이자 출판평론가 표정훈씨, <번역은 반역인가>의 저자 박상익 교수 등이 기고한 번역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코너도 마련했다.

영미문학연구회(학회장 김명환 서울대 교수)는 영미 고전문학 71개 작품의 국내 번역서들을 비교 평가하고 재작년과 올해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 발행ㆍ전2권)란 보고서를 발간했다. 번역서의 41%가 표절본이고, 추천할 만한 번역본은 8%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 결과는 국내 번역 수준의 척박함을 보여주는 통계로 자주 인용된다. 이 학회는 96년 창간한 반년간지 <안과밖>에서 영미문학 번역 실태를 점검하는 고정란을 꾸려오고 있다.

교수신문은 2005년부터 2년간 동서양 대표 고전 번역본에 대한 분석글을 연재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발행ㆍ전2권)로 묶었다. 일부 소장학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수준 있는 번역비평에 나서기도 한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balmas’라는 필명으로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저작 번역본을 집중 검토하는 진태원씨, ‘로쟈’가 필명인 러시아문학 전문가 이현우씨가 대표적이다.

■ 새로운 비평기준 모색
번역비평이 단순한 오역 지적을 넘어 진일보한 평가 잣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논의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특히 번역의 기본 원칙으로 여겨져온, 원전의 자구(字句)를 충실히 옮겨야 한다는 ‘충실성’과 번역하는 언어권의 독자가 읽기 편하도록 해야 한다는 ‘가독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상당하다.

불어권 문학 번역가인 정혜용 서울대 교수는 <번역비평>에 기고한 ‘번역문학 비평을 위하여’라는 글을 통해 “번역비평이라면 당연히 번역가의 번역관, 번역물의 번역 논리를 그 핵심에 둬야 한다”며 “그것이 충실성과 가독성 규범으로 포착될 수 없다는 점에서 두 잣대는 궁극적으로 폐기돼야할 비평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밋밋한 직역 대신 생생한 의역을 택했던 번역 경험을 소개하면서 “번역자는 특정 표현의 작품 내 기능에 대한 분석과 그 단어가 상징하는 작가의 언어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충실성 규범을 저버릴 수 있다”고 썼다.

영미문학 번역가 왕은철 전북대 교수는 <안과밖> 2007년 하반기호에서 “번역가는 원문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기계적으로 바꾸는 ‘하인’이 아니라 비판적 안목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비평하고 창작하는 자”로 규정했다. 왕 교수는 “비평가가 번역가의 기준과 원칙을 고려하지 않으면 공정한 비평은커녕 번역가를 ‘혼내는’ 형태의 비평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면서 영미문학연구회의 고전 번역 평가의 문제점을 에둘러 지적했다.

■ 현장 번역가 ‘볼멘 소리’도
학계 중심의 번역비평 본격화에 현장 번역가들은 “열악한 번역 현장을 도외시한 채 일방적 평가 잣대를 들이대면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표정훈씨는 <번역비평>에 실은 글에서 부실한 번역을 양산하는 환경을 조목조목 짚었다. 전업 번역가로 생계를 꾸리기 힘들 만큼 번역료가 박하고, 대학 도서관의 외부인 통제로 참고 자료 이용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표씨의 지적이다. 아울러 그는 번역서의 질적 수준을 평가할 서평 시스템의 부재, 분야별 번역 작업의 기반이 될 기초 고전의 번역 미비, 번역을 경시하는 연구자 평가 정책을 비판했다. 일본문학 번역가 김남주씨는 “번역가의 언어 선별은 병아리 감별사의 작업을 닮았다”며 경험을 통해 획득되는 직관에서 좋은 번역이 나온다는 입장을 표했다.

이현우씨는 이달 인터넷 ‘주간창비논평’에 기고한 글에서 장기적 안목의 번역 문화 개선을 주문했다. 이씨는 한국고전번역원, 한국키케로학회 등이 40~50년을 잡고 번역 작업을 진행 중임을 상기시키면서 “대학원생에게 번역 과제로 제출받은 원고를 짜깁기해 교수 이름으로 출판하는 관행부터 타파하는 등 번역 텍스트를 둘러싼 현실적 조건, 즉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해야 한다”고 썼다.(이훈성기자)

07.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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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2-1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이현우씨였구나요~~~^^ 창비논평 잘 읽었어요

로쟈 2007-12-14 14:44   좋아요 0 | URL
닉네임을 바꾸든지 본명을 바꾸든지 해야겠어요, 이젠...

수유 2007-12-14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명이 낯설어요..그참..

2007-12-14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5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7-12-15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을 "소장학자"라고 부르니 왠지 좀 거리감이.. "소장학자"라는 보통명사보다는 "로쟈"님이라는 고유명사가 훨씬 좋네요.^^

로쟈 2007-12-15 23:32   좋아요 0 | URL
요즘은 그냥 40대까지를 '소장학자'라고 부르는 것 같더군요. '로쟈'란 닉네임이 공식직함으로 사용하기는 아직 어려우니까요.^^;

목동 2009-10-13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전번역과 중역에는 차이가 있을 것같은데요?
렬국은 최종 번역자의 능력이 문제일까요?
 

며칠전 배송받은 책은 영국의 저명한 극작가 톰 스토퍼드의 <유토피아의 해안>(2007)이다. 연초에 '어느 혁명가의 생애'(http://blog.aladin.co.kr/mramor/1033616)란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제1부 '항해(Voyage)', 제2부 '난파(Shipwreck)', 제3부 '구조(Salvage)'로 돼 있고, 전체 공연은 휴식 시간을 포함 12시간이 걸린다는 대작이다. 3부작을 모두 묶은 책은 지난 1월에 나왔지만 저렴한 페이퍼백이 지난 가을에야 나왔고 기다림 끝에 드디어 손에 넣게 되었다.

작년 가을의 기사를 다시 옮기면, "이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제정러시아시대. 유럽이 혁명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1833년부터 1866년까지의 30여년 간에 러시아 지식인들이 겪은 대립과 갈등, 좌절, 투쟁, 사랑, 꿈을 그린 것이다.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급진적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작가 투르게네프, 문학비평가 벨린스키, 혁명적 사상가 알렉산더 헤르젠 등이다."

국내에도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싶지만 이런 데 눈독을 들이는 출판사는 드물어서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게다가 한국 독자들이 희곡은 또 잘 안 읽는다). 나야 물론 전공과 관련된 책이기도 하고 강의용 참고서이기도 해서 아무런 망설임도 가질 수가 없지만.

책머리에 실린 감사의 말을 잠시 읽어보니 스토퍼드는 이 '러시아 지성사'를 쓰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이로 두 사람을 꼽고 있다. <러시아의 사상가들>의 저자 이사야 벌린과 <낭만적 망명가들>의 저자 E. H. 카이다. 벌린의 책은 늦어도 내년에는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카의 책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의 전기 <미하일 바쿠닌>은 곧 새로 번역돼 나오는 걸로 아는데, 이왕이면 이 책도 마저 소개되면 좋겠다(*찾아보니 <낭만의 망명객>(까치, 1980)으로 소개됐었다. 손을 봐서 재출간하면 좋겠다).

거기에 더 보태자면 스토퍼드가 가장 먼저 감사를 표하고 있는 에일린 켈리의 연구서 <또다른 해안을 향하여(Toward Another Shore)>(1998)과 <피안에서의 견해들(Views from the Other Shore)>. <유토피아의 해안>이란 작품명을 들었을 때 제일 처음 떠올린 책들이기도 한데, 실제로 스토퍼드가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자문'역이었던 셈이다. 내년 1학기에는 겸사겸사 이 책들과 씨름하면서 '유토피아의 해안'을 좀 거닐어 봐야겠다...

07.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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