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당신의 추천도서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http://www.kpec.or.kr/)에서 매달 발표하는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이 이달에는 며칠 일찍 발표되었다(연말이어서인가 보다). 그걸 빌미로 나도 따라서 '이달의 읽을 만한 책'들을 골라본다. 1월부터는 분야별로 한권씩 고르는 걸 따라해보기로 한다(10개 분야이다). 어느새 2008년 '1월의 읽을 만한 책'이다!

1. 문학

 

 

 

 

지난 11월의 읽은 만한 책으로 골랐던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2007)가 뒤늦게 올라왔다. 추천자인 작가 신경숙씨는 "어린 시절의 폭력이 한 인간의 내면에 어떻게 각인되는지, 그 상처가 주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채식주의자>는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의 미세한 지형도"라고 평해놓았다. 사실 나도 사놓고 아직 읽어보진 못했기에 1월에는 읽어봐도 좋겠다. 그래도 나대로 고르자면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창비, 2007)을 꼽아본다.

몇 편 읽지 않았으면서도 평소 공선옥의 소설이 '촌스럽다'고 생각해왔지만 이번에 나온 소설집은 평도 좋고 또 '명랑' 모드인지라 연초에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알라딘의 소개는 이렇다: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삶을 긍정적으로 포용하는 자세는 공선옥 소설의 개성을 한층 돋보이게 만든다. 그가 <멋진 한세상>(2002) 이후 5년 만에 신작 단편집을 펴냈다. 낯익지만 일관된 주제의식을 견지하며 냉엄한 현실을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는 공선옥 소설의 활력은 여전히 놀랍다."

2. 역사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추천한 역사 분야의 책은 김호웅 등이 쓴 <김학철 평전>(실천문학사, 2007)이다. 나도 출간시 리뷰들를 읽으면서 찡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말 그대로 격정의 시대를 산 '최후의 분대장'의 파란만장한 삶을 반추해볼 수 있겠다. "의열단으로 시작해 중국 홍군(紅軍)의 우군(友軍)이었던 조선의용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한쪽 다리를 잃고 8·15광복 후 출옥한다. 월북 후에는 김일성 신격화에 회의를 느끼다 중국으로 망명하지만 모택동을 비판한 <20세기의 신화>를 썼다는 이유로 10년간이나 투옥"되고 했던 삶이다.

거기에 보태 내가 고른 책은 독일의 철학자 바이츠제커의 <역사 속의 인간>(에코리브르, 2007)이다. 소개에 따르면,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사유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현대 인간의 삶에서 제기하는 실천적 과제들에 대한 대답을 담은 책이다. 지은이 바이츠제커는 사유방법론으로 인간의 역사를 고리로 하여 이어진 두 개의 반원으로 형성된 하나의 ‘원환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고 단언한다." 바이츠제커의 책으론 <과학의 한계>(민음사, 1996) 이후에 오랜만에 소개되는 듯하다(에른스트 울리히 폰 바이츠제커가 아니라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다).

3. 철학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과)가 추천한 철학 분야의 책은 이영남의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푸른역사, 2007)이다. 추천의 이유는 "독창적인 역사철학자로서의 푸코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 더불어 "저자가 철학 전공자가 아니라 역사 전문가라는 것이 이채롭다"고 했다(출판사도 '푸른역사'다. 내가 갖는 불만은 이 출판사의 책들이 페이지당 여백을 너무 많이 준다는 것이다).

푸코를 읽는 김에 내가 고른 책은 콜브룩의 <들뢰즈 이해하기>(그린비, 2007)이다. '들뢰즈와 함께 보는 현대 영화'란 부제를 달고 있는 파트리샤 피스터르스의 <시각문화의 매트릭스>(철학과현실사, 2007)도 이번에 출간되었기에 같이 읽어볼 만하다(콜브룩의 책을 조금 읽으면서 나는 들뢰즈의 철학이 '예술가 철학'이라는 심증을 더 굳히게 되었다). 물론 일반독자가 가볍게 읽을 만한 책들은 아니지만 들뢰즈를 이해하기에 가장 쉬운 책이란 점은 인정할 수 있다(<들뢰즈 이해하기>의 경우 일부 오역과 편집상의 실수들은 교정되면 좋겠다).

4. 정치


 

 

 

손호철 교수(서강대 정치외교학과)의 정치 분야 추천도서는 뜻밖에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프랑스 작가 10인이 쓴 <세상의 아이야, 너희가 희망이야>(푸른나무, 2007)이다. 추천사는 이렇다: "11월 20일이 어떤 날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날은 국제연합(UN)이 정한 '아동권리의 날'이다. 아동도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1년이면 거의 1천만 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 등으로 목숨을 잃고 가난 때문에 1억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학교를 가지 못하고, 2억 명 이상이 노동을 한다. <세상의 아이야, 너희가 희망이야>는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10명의 프랑스 최고 작가들이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을 위해 건강할 권리, 가족을 가질 권리, 먹을 권리, 보호받을 권리, 교육받을 권리 등 어린이들의 핵심적인 10가지 권리를 짧은 소설형식으로 그려서 헌정한 탁월한 교양서이다." 듣고 보니 의미있어 보이는 책이기도 하다.

비슷한 취지에서 내가 고른 책은 데루오카 이츠코의 <부자나라, 가난한 시민>(궁리, 2007)이다. 제목 그대로 '돈 많은 가난한 나라'(일본)를 돌아보면서 '진정한 풍요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는 책이다. '선진화 담론'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도 좀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출판사측의 소개를 인용하면, "지금 한국은 ‘돈 많은 못 사는 나라’이며, 분명히 ‘기형국가’이다. 개발과 투기 문제, 저열한 사회자본 문제, 위험한 연금개악 문제, 그리고 이기적이고 무능력한 노동운동 문제에 대한 데루오카 이츠코 교수의 설명은 우리에게 훌륭한 반면교사 역할을 할 것이다." 역자인 홍성태 교수의 <대한민국, 위험사회>(당대, 2007)와 함께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5. 경제/경영

 

 

 

 

정운찬 교수(서울대 경제학과)가 추천하는 경제분야의 책은 윤수영의 <세속 경제학>(삼양미디어, 2007)이다. 모처럼 국내 필자가 쓴 경제학 입문서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듯한데, 추천의 변 또한 뜨겁다: "세계의 중심 맨해튼을 24달러에 팔기로 선택한 인디언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이자의 당·부당성,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일자리와 임금, 황금제국의 부활, 유럽의 투기와 버블,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세계적인 시사주간지와 경제·경영 잡지, 세계유명 경제지와 일간지, 투자와 투기의 쌍쌍파티, 부자가 되는 꿈 등 무궁무진한 주제로 꽉 차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눈을 책으로부터 떼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대학이나 연구소에 있는 경제학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복잡한 수식이나 그래프를 통하지 않고도 현실 경제의 모습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으로 나는 믿는다."

내가 고른 책은 영국의 비평가이자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느린걸음, 2007)이다. 오늘자 한겨레의 북리뷰를 참조하면, "산업혁명으로 최성기를 구가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비평가요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에서 애덤 스미스에서 토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진 자본주의 정통 경제학의 전제조건들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는 고용주와 노동자를 포함한 경제 주체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정의와 애정”이라고 주장한다." 러스킨의 책으론 건축론 <베네치아의 돌>(예경, 2006)이 소개된 바 있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고려대 사회학과)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다카하라 모토아키의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삼인, 2007)이다. 몇 주전에 리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김교수에 따르면 "한류 열풍 속에 확산 중인 혐한증이나 탈식민화 시대의 반일운동 등에 관한 근본적 이유를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인력이동에 따른 고용경쟁이나 실업위협에서 찾는다. 경제의 세계화로 사회적 유동성이나 위험성이 증대되고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과거의 고도성장형 내셔날리즘이 개인형 내셔날리즘로 대체되어 젊은이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동시적으로 출현하는 청년실업과 같은 국가 차원의 사회문제가 안톤 오노의 금메달 강탈 항의사건 등에서 식별할 수 있는 “명랑한 애국심”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걸 '불안한 내셔널리즘'이라고 이름붙인다. 일본의 76년생 젊은 학자의 패기만만한 주장을 담고 있는 책.

사실 '사회'분야란 카테고리는 좀 막연해서 나로선 책을 고르기가 애매한데(정치 분야와 중복되고 하고), 그냥 구해놓고 아직 읽지 않은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공화국>(후마니타스, 2007)이나 <도시의 창, 고급호텔>(후마니타스, 2007)을 뒤적거려보기로 했다. 관련 페이퍼는 '아파트공화국의 고급호텔'(http://blog.aladin.co.kr/mramor/1636910) 참조.

7.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편집장이 추천한 과학분야 도서는 외르크 치들라우의 <다윈, 당신 실수한 거야!>(뜨인돌, 2007)이다. 소개글에 따르면 "과학저널리스트인 외르크 치틀라우가 다윈진화론의 핵심인 적자생존, 자연선택 등에‘위배되는’ 실제 사례들을 동물의 세계에서 뽑아내 진화론이 과연 생물계에 통용될 수 있는 진리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고, 추천사에 따르면 "진화론의 핵심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인 셈이다. 생물학 교과서에 진리처럼 서술된 이러한 진화론의 핵심 개념을 비웃는 책이 있다. 바로 <다윈, 당신 실수한 거야!>다. 이 책에서는 진화하면서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믿음에 의구심을 보이며 한없이 열등한 모습으로도 잘 살고 있는 개체들을 소개한다." 나로선 좀 싱겁다는 생각이 드는데, '강자'의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은 것 아닌가 싶어서이다(장자가 말하는 '무용의 용'도 있고).

차라리 내가 더 관심을 갖는 책은 <살아있는 지구의 역사>(까치글방, 2005), <생명 - 40억년의 비밀>(까치글방, 2007)이 소개된 바 있는 리처드 포티의 <삼엽충>(뿌리와이파리, 2007)이다(포티의 책들은 이한음씨가 번역을 전담하고 있다). 옛날도, 아주 오랜 옛날 생물 수업시간에만 들어보던 삼엽충. '고생대 3억 년을 누빈 진화의 산증인'에 대한 아마도 가장 자세한 책이지 않을까 싶다.

8. 예술

 

 

 

 

김춘미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김경의 <이야기가 있는 종이 박물관>(김영사, 2007)이다. 사진작가 김중만과의 합작인데, 소개에 따르면 "종이 물건에 담긴 우리 삶의 다양한 표정을 읽어내려 한 책"으로 "종이에 스며든 옛사람의 소박한 삶. 적게는 100년에서 많게는 300년을 훌쩍 넘은 오래되고 진귀한 종이 소품과 세간을 모았다. 따라서 이 책은 종이에 관한 박물학적 지식의 산물임과 동시에, 한국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인류학적 접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로선 쉽게 손이 가지 않을 책이다.

대신에 나라면 아무 주저없이 최근에 나온 러시아 미술/예술 관련서들을 집어들 것이다. 이병훈의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한길사, 2007)과 이진숙의 <러시아 미술사>(민음인, 2007)가 그 책들이다. 관련 페이퍼로는 '러시아 예술로의 초대'(http://blog.aladin.co.kr/mramor/1790172)를 참조하시길.

9. 교양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이 고른 교양분야의 책은 한스 귄터 가센 등이 쓴 <인간, 아담을 창조하다>(프로네시스, 2007)이다. 주목하지 못했던 책인데, 부제가 '생명 복제 시대에 돌아보는 인간 만들기의 역사'이다. 바로 떠오르는 책은 알렉산더 키슬러의 <복제인간, 망상기계들의 유토피아>(뿌리와이파리, 2007)이다. "호프만의 괴기소설 <모래 사나이>에서 시작해 데이비드 오스본의 <머리들>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상과학 소설에서 나타나는 인간 만들기의 꿈을 추적한다"는 전자와 짝을 지어 읽을 만하다. 그러는 참에 이번에 새로 번역돼 나온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도 다시 읽어볼 수 있겠다. 이젠 '생명복제시대의 예술작품'도 씌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10. 아동->전기

 

 

 

 

두 분의 아동도서연구가/아동문학가가 추천한 아동도서는 <예쁜 우리말사전>(파란자전거, 2007)이다. 나로선 과문하기 짝이 없는 분야인지라 그냥 좋은 책인가 보다고 기록해놓은 따름이다.

약간 변칙이긴 하지만, 아이도 자는 김에 '아동' 분야를 '전기'로 바꾼다. 그리고는 세 사람의 책을 고른다. 찰리 채플린의 <나의 자서전>(김영사, 2007)과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 그리고 자서전은 아니지만 수전 손택의 유고평론집으로 마지막 에세이들과 강연들을 모은 <문학은 자유다>(시울, 2007)가 탐나는 책들이며 새해에 읽어볼 만한 책들이다.  

 

 

 

 

이상 10개 분야의 책들 외에 가외로 고른 책은 '1월의 고전' <한비자>이다. 물론 예전에 나온 번역본들이 없지 않지만 최근에 이상수의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출간되어 바람을 넣는 탓에 기획하게 된 것이다. 편역서인 <이야기의 숲에서 한비자를 만나다>(웅진지식하우스, 2007)와 윤찬원의 <한비자>(살림, 2005)를 기존의 번역서들에 덧붙여서 읽어볼 수 있겠다. 새 정부도 들어서고 하는 김에 '제왕학'도 좀 알아두는 것이 신민의 자유와 권익을 챙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07.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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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촌스러운 사람이지만 로쟈님처럼 공선옥 소설은 촌스러워서 잘 안 읽었다죠. 근데 쓰신 글을 보니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누가 머라해도 소신있게 한 가지만 밀고 나간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 면에서 대단하단 생각도 들구요.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도 독특하고 재미있을 듯 싶네요.^^

로쟈 2007-12-29 13:20   좋아요 0 | URL
한가지만 밀고 나가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대로 '달인'의 경지가 되는 거겠죠.^^

수유 2007-12-2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탁과 나보코프, 그리고 러시아 미술.
그리고 흥미를 안끌래야 안끌수 없는- 말이 요상하다요.
다윈 당신 실수한거야. 정도.

로쟈 2007-12-29 18:48   좋아요 0 | URL
<러시아미술사>는 저도 오늘 샀습니다...

Mephistopheles 2007-12-2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을 열심히 채우고 있습니다..꾸역꾸역..^^

로쟈 2007-12-29 23:06   좋아요 0 | URL
이제 돈벼락 맞을 때까지 기다리시면 되겠습니다.^^;

이리스 2008-01-08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러시아 미술사 샀는데ㅇㅅ. ㅎㅎ 공선옥 소설은 촌스러워서 안 읽구요.. 으흠..

로쟈 2008-02-03 23:29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2007년의 마지막주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올해의 책' 한권을 발견했다.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가 그것이다(사실 귀가할 때 문화일보의 북리뷰를 집어들긴 했는데 얼핏 롤프 데겐의 <오르가슴>(한길사, 2007)이 메인으로 다뤄진 것만 보고 그 아래 나보코프의 자서전에 관한 기사는 알아보지 못했다). 사실 개인적으론 내년쯤에 번역서가 나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그리고 예기치않게 책이 나와서 반갑고 흐뭇하다. 마치 연말의 '선물' 같은 책이다. 이번주에 <롤리타>에 대한 강의도 했고 내달에도 '보강'이 예정돼 있는지라 재빨리 읽어봐야겠다(물론 나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지만 완독하진 않았었다)...

문화일보(07. 12. 28) '롤리타’ 작가 나보코프의 자서전

“고백하건대, 나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내 마법의 융단을 사용한 뒤에,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의 무늬가 겹쳐지도록 접어두는 것을 좋아한다.(…)이때에 아무렇게나 골라진 풍경처럼 시간이 없는 상태로부터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란, (…)그 무아경의 뒤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이는 마치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달려 들어가고 있는 순간적인 진공과도 같다.”

열두 살 소녀를 향한 중년남자의 사랑을 그린 소설 ‘롤리타’로 20세기 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자서전과는 다른 형식을 띠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드러내듯, 이 자서전은 과거와 현재 사이를, 때로는 현재라고 말할 수 없는 다른 시공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순간적인 진공, 곧 죽음을 향해 가는 자연의 상태를 거부하는 나보코프만의 시공을 만들어낸다. ‘가장 예술적인 자서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책은 기억과 그것을 희미하게 만드는 시간 사이의 싸움과도 같다. 이는 그의 굴곡 많았던 삶의 역정에서 기인한다.

나보코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국인과 프랑스인, 러시아인 가정교사들에게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러시아와 유럽 휴양지를 오가면서 나비와 나방 채집을 즐기며, 사랑에 빠져 시를 짓는 행복한 청년으로 자랐다.

하지만 볼셰비키 혁명으로 1919년 그의 가족이 유럽으로 망명하면서 그의 삶은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러시아 극우파에게 암살당했고, 어머니는 프라하에서 죽었으며, 남동생 세르게이는 1945년에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죽게 된다. 나보코프가 1940년 미국에 망명했을 때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롤리타’(1955)로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후에야 겨우 삶을 지탱할 경제적 여건이 생겼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1966년 이 자서전을 출간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나보코프가 1947년 ‘롤리타’와 이 자서전을 동시에 시작했다는 점이다. ‘롤리타’에서 롤리타를 영영 잃은 험버트는 그녀와 영원 속에 남게 될 최후의 방법으로 자서전 집필을 택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영원히 죽지 않을 유일한 길이야. 나의 롤리타”라는 험버트의 최후의 독백처럼, 시간 안에 갇힌 비극적 존재라는 점에서 나보코프는 험버트와 다르지 않다.(엄주엽기자)

경향신문(07. 12. 29) 기억, 불현듯 솟구치는 빛

파격 소설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죽기 11년 전 내놓은 이 책은 흔히 자서전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책은 몇쪽을 넘기자마자 자서전에 대한 통념을 무너뜨리며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 책은 시대 상황이나 개인 역사의 기술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초점은 기억의 단편들이고, 펜 끝은 내면으로 향한다. 나보코프는 기억을 둘러싼 한 편의 옴니버스 드라마를 펼쳐놓았다. 물론 주인공은 나보코프 자신이다.

책은 나보코프가 4살이던 1903년부터 1940년까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총 15장으로 이루어진 기억에 관한 에피소드는 각각 다른 시기에 쓰였고, 다른 매체에 게재됐다. 나보코프는 많은 작품 가운데 자서전이라는 성격에 어울릴 것을 선별했으리라. 그런데 그 선별 기준은 ‘기억’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기억의 대상은 가족, 영어 교육, 첫사랑, 시 창작, 가정교사, 망명 등이다.

나보코프에게 기억이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을 통해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이다. 암실의 문을 열면 빛이 들이닥치듯 기억은 그렇게 불현듯 솟구친다. 나보코프는 그런 기억의 재생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본다. 기억을 불러오는 매개체는 시각, 청각이 중추 역할을 한다. 책은 과거로 가는 길목마다 시청각적 묘사가 빛을 발한다. 책이 시적이면서도 육감적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는 “그(유년) 시절의 인상들이란 시각과 촉각의 참된 에덴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감각은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인 셈이다. 가령 ‘내 해군복에 달려있던 호루라기의 날카로운 소리, 잠이 깬 아침 창 밖 푸른 인동덩굴, 해가 번쩍거리는 강물, 낚시꾼이 버리고 간 눈부신 양철 깡통’ 따위가 기억의 열쇠이자 주문이다.

그는 또 “한 사람의 삶 속에 있는 주제적 무늬를 이해하는 것이 자서전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말하는데 ‘주제적 무늬’란 과거 강렬하게 스쳤던 인상 같은 것이다. 책이 사소한 일상 속에서 큰 의미를 찾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주제적 무늬는 나보코프에게 성장의 나이테와 다름없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을 시적 언어로 묘사하는 대목이 많아 책은 한 번 읽고 이해하기 다소 버겁다. 이해하기보다 음미하는 자서전이라 해야 할 듯하다.

또 기억을 불러오는 감각이라는 측면에서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리게 한다. 프루스트와 나보코프는 기억을 과거의 복사본이 아니라 감각 혹은 인상의 하나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은 유년의 기억을 어찌 이렇게 선명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만큼 세세하다. 혹 기억을 변주한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데, 이마저도 프루스트의 소설과 닮았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있는 것이 소설이라 한다면 이 책은 경험과 허구, 즉 자서전과 소설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15장 각각은 하나의 단편소설로 불러도 무방할 만큼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같이 특색있는 글쓰기만큼이나 그의 이력도 유별나다. 나보코프는 곤충학자로도 유명하다. 나비 채집은 그의 오랜 취미이자 열정의 분출구였다. 7살 때 호랑나비를 보고 “경험해본 적 없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는 그는 “나비의 의태(擬態)의 신비에 끌렸다”고 말한다. 진화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비의 보호색이 그를 매료시켜 평생 나비를 쫓아다니게 만든 것이다. 형형색색의 감각으로 기억을 연주하는 나보코프의 글은 형형색색의 나비를 쫓아다닌 그의 일생과 닮았다.(서영찬기자)

07.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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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2-29 17:01   좋아요 0 | URL
왜 나보코프가 좋은 걸까요.. 망한 귀족이라서? 롤리타 때문에? 나는 나를 곰곰 생각합니다..
방학은 하였고 영화도 굉장히 좋은것들이 특집으로 걸리고 사야될 책들도 엄청나고 읽고싶은 책들도 많고
일본정도의 여행은 세 자매와 한 조카의 일정을 맞추다 보면 늘 떠나지 못하고 입씨름속에 계획만 세우고..
뭐 그렇습니다. 내일 책사러 나가야겠어요!!

로쟈 2007-12-29 18:48   좋아요 0 | URL
망명작가의 '노스탤지어'에 공감하시는지도...
 

가끔씩 옮겨놓고 있는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이 내일은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을 다루고 있다. '방앗간'을 또 지나칠 수 없어서 옮겨놓고 몇 자 보탠다. 아래 열음사판 시집 표지를 보니 감회가 새로운데, 애석하게도 소장하고 있는 시집은 아니다. 대신에 창비사의 오장환 전집을 갖고 있고 거기에 뛰어난 예세닌 번역시들이 수록돼 있다. 물론 이 책 또한 절판되었지만...

한국일보(07. 12. 28) [오늘의 책<12월 28일>] 자작나무 숲에서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이 1925년 12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여관에서 자살했다. 30세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예세닌은 1916년부터 러시아 농촌의 자연과 민중, 역사에 바탕한 섬세한 서정시ㆍ서사시를 발표해 러시아혁명기를 대표했던 시인이다. 한 세기 저편 러시아의 ‘마지막 농촌 시인’이지만 그는 세 인물과 얽힌 인연으로 우리 기억에 각인돼 있다.

첫번째 인물은 현대무용의 개척자인 ‘맨발의 이사도라’ 이사도라 던컨(1877~1927). 예세닌의 자살의 직접적 원인은 음주벽과 신경증이었지만 그의 죽음이 던컨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 던컨은 러시아 혁명 후 1921년 모스크바에 무용학교를 설립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예세닌은 자신보다 열일곱살 연상인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1922년 결혼식을 올리지만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다 1924년 결별했다.

이듬해 자살한 예세닌이 여관방에 남긴 마지막 시는 ‘잘 있거라, 벗이여’였다. 던컨은 예세닌이 죽은 지 2년 후 파리에서 죽었다. 스포츠카를 시승하기 위해 뒷좌석에 앉아있던 그녀가 어깨 뒤로 둘러 내려뜨린 숄이 차 뒷바퀴에 낀 채 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목이 졸려 숨진 것이다.

두번째 인물은 러시아 현대시의 개척자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 예세닌의 장례식장에서 ‘예세닌에게’라는 시를 낭송했던 그는 5년 후 역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세번째 인물은 한국의 시인 오장환(1918~1951)이다. 예세닌에 크게 영향을 받은 오장환이 1946년 번역한 <에쎄닌 시집>은 20세기 가장 뛰어난 번역시 작업의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이 시집은 오장환이 월북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금기였다. 노문학자 박형규 번역으로 ‘어머니’ ‘목로술집의 모스크바’ 등 예세닌의 절창을 모아 1985년 출간된 <자작나무 숲에서>도 절판 상태다.(하종오기자)

07. 12. 27.

Виталий Безруков Есенин

P.S. 자료를 찾으니 예세닌에 대해서는 소설도 나와 있고, 영화도 제작되었다(영화의 몇몇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5IrtAU36438 참조). 그리고 예세닌의 자료 사진들(http://www.youtube.com/watch?v=0fXAS7HRl5o)과 함께 '진짜' 장례식 자료화면도 떠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UjJepN2ZrCY). 

"Сергей Есенин". (Фото — 1tv.ru)

영화속 장례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XFwLTDilATk 참조. 러시아 그룹 '류베'가 부르는 노래 '자작나무'는 http://www.youtube.com/watch?v=LuxlG2Y7j0U 에서 들어보시길...

P.S.2. 예세닌 삶과 시에 대한 촌평은 천양희 시인의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샘터,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마야코프스키의 시 '세르게이 에세닌에게'는 물론 <마야코프스키 선집>(열린책들, 2006)에 번역돼 있다. 오장환 시에 대해서는 유종호의 <다시 읽는 한국시인>(문학동네, 2002)을 일독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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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장환 시인의 고향에서 근무를 했던 적이 있어서 오장환문학제를 구경한 적이 있었어요.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다는데 월북하는 바람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로쟈님 서재에 와서 사진을 다시 보니 반가운거 있죠.^^

로쟈 2007-12-28 00:51   좋아요 0 | URL
별칭이 '비극의 미남시인'이네요.^^

깐따삐야 2007-12-28 12:50   좋아요 0 | URL
하핫. 별칭 귀여운데요. 비운의 꽃미남이시구나. 오장환 시인.^^
 

러시아의 문화, 예술/미술 관련서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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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미술사- 위대한 유토피아의 꿈
이진숙 지음 / 민음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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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미술사
A.I.조토프 / 동문선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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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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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실험- 러시아 미술 1863-1922
캐밀러 그레이 지음, 전혜숙 옮김 / 시공아트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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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 강좌의 리스트를 만든 계기가 된 리뷰를 옮겨놓는다. 소설가 김연수의 번역으로 얼마전에 출간된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문학동네, 2007)에 대한 리뷰이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7). 리뷰에서도 언급되는 문학상식이지만, 참고로 덧붙이자면 카버의 일어판 전집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옮겼다. 해서 '체호프-레이먼드 카버-하루키'(http://blog.aladin.co.kr/mramor/1054184)에다 우리는 김연수를 덧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사인(07. 12. 24) '가장 완벽한 단편’ 빈말이 아니네

비평가란 본래 과장하기 좋아하는 족속이다. ‘경천동지할 걸작’ 혹은 ‘구제불능의 쓰레기’라는 표현을 만지작거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그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최상급 형용사들과 싸워야 한다. 카드를 다 써버리면 나중에 어쩔 것인가. 그런데 못 참겠다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비평가 아무개 씨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일러 ‘가장 완벽한 단편’ 운운하는 걸 보고, 또 한 비평가가 백기를 들었구나, 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제야 ‘대성당’을 찾아 읽었다. 뭐랄까, 완벽한 단편이었다. 

10년 전에 소개된 바 있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문학동네, 2007)이 최근에 새 번역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카버는 1938년생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치코 캠퍼스에서 존 가드너에게 소설을 배웠고 22세에 첫 단편을 발표했다. 38세에 첫 단편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1976)를 출간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1981)으로 자리를 굳혔다. 세 번째 단편집 <대성당>(1983)이 대표작이다. 이 책으로 그는 ‘아메리칸 체호프’라는 칭호를 얻었다. 체호프의 아류라는 뜻이 아니라 체호프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마따나 “놀랍게도 레이먼드 카버는 처음부터 진짜 오리지널 레이먼드 카버였다”.

<대성당>에는 표제작 ‘대성당’을 포함해 단편이 총 12편 수록되어 있다.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작품이지만, 그 중 한 편만 읽어야 한다면 역시 ‘대성당’일 수밖에 없다. 작품 속 ‘나’의 아내에게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맹인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아내는 이름이 로버트인 그 맹인 친구가 곧 그들을 방문할 것이라고 ‘통보’한다. 맹인이라니, 내가 아는 맹인이라고는 영화에서 본 사람들뿐이다. 아내는 오래된 친구를 따뜻하게 맞이하지만 나는 모든 게 그저 귀찮고 불편하기만 하다. 저녁 식사를 마쳤고, 아내는 잠이 들고, 마침내 로버트와 단둘이 남았다. 어찌해야 하나.



‘아메리칸 체호프’ 칭호 안겨준 대표작

나는 하릴없이 텔레비전 채널만 이리저리 돌린다. 어떤 채널에서 세계 각지의 성당을 소개하고 있다. 대성당이라.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로버트에게 묻는다. 맹인은 잘 알지 못하니 설명해달라고 청한다. 앞 못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성당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려나, 비로소 나와 로버트의 진지한 대화가 시작된다. 로버트는 한술 더 떠서 대성당을 함께 그려보자고 말한다. 둘은 손을 포개어 잡고 펜을 든다. 그리고 이제 소설은 당신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아름다운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이 소설은 편견과 소통에 대해 말한다. 부정적인 견해만 편견인 것은 아니다. 내가 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앎, 한 번도 반성해보지 않은 앎은 모두 편견일 수 있다. 이를테면 맹인이 아닌 자가 맹인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란 것은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편견의 테두리 밖에 있기 어렵다. 그 편견은 어떻게 깨어지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은 많다. 그러나 편견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이렇게 자연스럽고 힘 있게 그려낸 소설은 많지 않다.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가끔 주제넘은 충고를 한다. 저 자신은 소설을 단 한 줄도 써본 바 없으면서 말이다. “인물의 내면을 말로 설명하겠다는 생각을 접어라. 굳이 말해야 한다면, 아름답게 말하려 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라. 아름답게 쓰려는 욕망은 중언부언을 낳는다. 중언부언의 진실은 하나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가장 좋은 것은 쓰지 않는 것이다. 내면에 대해서라면, 문장을 만들지 말고 상황을 만들어라.” 그러고는 덧붙인다. “카버를 읽어라.”

일본에서 카버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한국어판 <대성당>을 번역한 사람은 소설가 김연수다. 김연수는 누구인가. 이를테면, 1~2년에 한 권씩 책을 내는데, 그러고 나면, 당신이 책 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상이 주어지고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그런 부류의 작가다. 하루키와 김연수라니, 어쩐지 공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장의 국가 경쟁력이랄까, 뭐 그런 차원에서 말이다. 이제는 하루키의 문장으로 카버를 읽는 일본 독자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7. 12. 27.

P.S. 지난 학기에 카버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원서도 한권 구했는데, 내가 소장본으로 고른 단편선집은 <대성당>이 아니라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이다. 말 그대로 '선집'이기 때문에 <대성당>에 실린 작품들도 다수가 포함돼 있고, 이전에 묶이지 않은 신작들까지 해서 모두 37편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때 <대성당>보다도 더 좋아하게 된 작품이 표제작인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이어서 특히나 이 선집에 애착을 갖게 된다(김연수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대성당>은 1982년판 <전미 최우수 단편소설>에 수록된 바 있고,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1983년판 같은 모음집에 실렸다).

작품집에 수록된 마지막 단편은 체호프의 임종 장면을 다룬 단편 <심부름(Errand)>이다. 나는 이 작품이 카버의 '문학적 유언'이라고까지 생각하며, 체호프의 마지막 단편들과 비교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졌더랬다(가령, 내가 체호프의 '문학적 유언'이라고 생각하는 <주교> 같은 작품). 물론 그런 욕심을 버리더라도 카버의 단편들을 음미하는 일에 지장이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음악을 듣듯이 새로운 번역본의 문장들을 원서와 대조해가며 중얼거리는 일은 이 겨울의 한 가지 즐거움이다. 가끔 이렇게 읊조리면서 말이다. "It's really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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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7 20:59   좋아요 0 | URL
저는 집사재에서 나온 전집으로 세 권 갖고 있는데 김연수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궁금해지네요.

로쟈 2007-12-27 23:01   좋아요 0 | URL
말하자면 같은 곡을 여러 연주자의 판으로 듣는 것이죠. 애서가들은.^^

2007-12-27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Koni 2007-12-28 22:48   좋아요 0 | URL
아, 전 카버는 이상할 정도로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 글을 보고 결국 장바구니를 열고 맙니다.

로쟈 2007-12-28 22:59   좋아요 0 | URL
물론 '아메리칸' 작가라는 건 고려해야겠지만(그러니까 문화적 차이/거리는 있는 것이죠), 군더더기 없는 문체의 몇몇 단편들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시골사람 2007-12-29 01:50   좋아요 0 | URL
그 몇몇의 단편이 그 누군가의 소설쓰기에 강도 7 정도의 지진파 역할을 했지요. 레이먼드 카버...어느 날 그 누군가의 삶에 화락 뛰어든 먼 나라 사람 중 한 명. 음음...고맙습니다. 이 늦은 밤 그를 죄다 책장에서 뽑아 제 책상 위에서 되살렸습니다.

로쟈 2007-12-29 10:13   좋아요 0 | URL
알게모르게 애독자들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