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읽기의 계속이다. 이 논문에 대한 체계적인 해제를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몇 대목을 짚어보고 있다. 이 페이퍼에서 다룰 대목은 10절의 후반부로 내용 자체는 간명하며 어렵지 않다. 

 

 

 

 

일단 8절부터 벤야민은 영화라는 기술복제 매체가 배우의 연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분석한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배우에게서 인격의 아우라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아우라는 무엇보다도 '여기'와 '지금'에 결부되어 있는데, 관객이 현장에서 직접 배우의 연기를 관람하는 연극무대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그러한 현장성이 부재하는 것이니까 아우라의 결여는 당연하다.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무대 위에서 맥베스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는 관객이 입장에서 보면 맥베스 역을 해내는 배우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아우라와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제작소에서 행해지는 촬영의 특징은 관객의 자리에 카메라가 대신 들어선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기 마련이고, 동시에 그가 연출하는 인물의 아우라 또한 사라지게 된다."(최성만, 124쪽) 

"무대 위에서 맥베드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는,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맥베드 역을 해내는 배우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아우라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제작소에서 행해지는 촬영의 특징은 관객의 자리에 카메라가 대신 들어선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기 마련이고, 동시에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아우라 또한 사라지게 된다."(반성완, 214쪽)  

"무대 위에서 맥베드 주변에 있는 아우라는, 현장에 있는 관객에게는 맥베드를 연기하는 배우 주위에 있는 아우라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영화제작소에서의 촬영의 특이한 점은, 촬영이 관객의 자리에 기계장치를 설정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배우를 둘러싼 아우라는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고 그와 동시에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아우라도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강유원, 10쪽)

이 대목에서 최성만과 반성완본은 대동소이하다.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가 '떼어놓을 수 없다'로, '그려내는'이 '연출하는'으로 바뀐 정도이다. 한데, 배우가 "연출하는 인물"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좀 어색하다. 강유원본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냥 '연기하는 인물' 혹은 '그려내는 인물'이 아닌가 한다. 강유원본에서는 '카메라' 대신에 '기계장치'가 들어섰는데, 이 또한 직역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기계적'인 번역이다.   

아무튼 같은 연기라고는 하나 연극연기와 영화연기는 그 본질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벤야민의 따르면, 그 차이란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배우는 자신을 그가 연기하는 역할과 동일시하지만 영화배우의 경우에는 대체로 그러한 동일시가 실패한다는 점이다."(최성만, 125-6쪽) 강유원본은 이 대목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자신을 하나의 역할 속에 옮겨 넣는다. 영화배우에게는 그러한 것이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로 옮겼는데, '거의'는 너무 강한 표현이다.

영어본은 '매우 자주', 러시아어본도 '자주' 정도로 옮겼는데, 영화연기의 경우는 여러 테이크로 나누어 찍으니까 연기의 몰입과 연속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정도의 뜻이고 사실 오늘날에는 거의 극복되는 게 아닌가 싶다(벤야민은 김태희의 연기를 떠올리는 듯하지만 전도연처럼 하는 연기도 가능하니까). 해서 요즘 현실에 맞게 수정하자면 "영화배우는 그가 연기하는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정도겠다.  

물론 그러한 어려움의 이유로 벤야민이 제시하는 건 연기력 자체가 아니라 연기를 둘러싼 환경이다.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라 하더라도 영화연기에서는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영화배우의 연기는 하나의 통일된 작업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개별적 작업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예컨대 촬영소의 임대료, 동료 배우들의 사정, 무대장치 등과 같은 것에 대한 부차적인 고려 말고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할 수 있는 에피스드로 쪼개어놓을 수밖에 없는 기계장치의 기본적인 필연성들도 작용한다."(최성만, 126쪽)

"영화배우의 연기는 하나의 통일된 작업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개별적 작업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예컨대 촬영소의 임대료, 공연자(共演者)의 사정, 장치 등과 같은 것에 대한 부차적인 고려 말고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할 수 있는 에피소드로 쪼개어 놓는 기계의 기본적인 필요들도 작용한다."(반성완, 215쪽)

"그[영화배우]의 연기는 어디까지나 통일된 연기가 아니라 많은 개별적인 연기들이 합해진 것이다. 촬영소의 임대료, 상대 역의 변동, 무대장치들과 같은 것에 대한 부수적인 고려 외에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가능한 에피소드로 나누는 기계도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강유원, 10쪽)

여기서도 최성만본과 반성완본은 대동소이하다. 몇 단어가 바뀌었을 뿐이다. 영화연기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연극에서처럼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나뉘어서 이루어진다는 것. 하나의 연기 신(scene)이 보통 여러 쇼트로 이루어진다는 걸 생각해보면 되겠다. 게다가 하나의 쇼트조차도 여러 차례, 곧 여러 테이크로 촬영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게 분리해서 찍은 걸 나중에 편집과정에서 이어붙이는 게 영화인 것이다. 부차적인/부수적인 고려가 아닌 '기본적인 필요'란 영화가 필름조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고 그에 따라서 연기의 분할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해서, 강유원본에서처럼 '기계'가 필요한 게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기계장치는 이미 주어졌다. 필요한 건 그 기계장치의 필요/요구에 연기를 맞추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연기의 사례로 벤야민이 들고 있는 건 도주 장면의 몽타주(편집)이다. 스튜디오(제작소)에서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은 다음에, 도주 장면은 나중에 옥외촬영을 해서 두 장면을 이어붙이면 되는 식이다. 이 경우 연극이나 실제에서라면 연속적인 행동이지만, 영화연기에서는 상당한 시간차를 둘 수도 있다. 또 한가지 드는 사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는 배우의 반응쇼트를 찍을 경우이다. 이때 원하는 연기가 나오지 않았을 경우(연극에서라면 낭패이겠지만) 감독은 며칠 뒤에 아무런 예고 없이 배우의 등뒤에서 총을 쏨으로써 그를 놀라게 하고 그 장면을 찍어서 영화에 끼워넣을 수도 있다는 것. "예술이 지금까지 그것이 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으로 여겨져 온 '아름다운 가상'의 왕국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최성만, 126쪽)

물론 최근에는 CG 때문에 실제 연기 장면이 벤야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가상의 상대역을 고려하면서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름다운 가상'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가상이라고 해야겠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영화에서 배우의 아우라는 상실되며, "영화는 아우라의 위축에 대항하기 위해 스튜디오 밖에서 '유명인물'이라는 인위적 스타를 만들어낸다."(최성만, 128쪽; 반성완, 216쪽) 인용문에서 '유명인물'은 짐작에 영어단어 'personality'를 옮긴 것이다. 강유원본에는 그냥 '퍼스낼리티'라고 옮겨진 것으로 보아 벤야민의 원문이 그렇게 돼 있는 듯하다. 영화 안에서는 이 퍼스낼리티가 구축될 수 없기 때문에 영화 '바깥'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얘기. 이 스타 숭배 현상에 대한 벤야민의 시각은 이렇다.

"영화 자본에 의해 장려되고 있는 스타 숭배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품성의 부패한 마력에 지나지 않았던 그런 개성의 마력을 보존하고 있다. 영화 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 오늘날의 영화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업적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고 있다는 점이다."(최성만, 128쪽)

"영화 자본에 의해 장려되고 있는 스타 숭배라는 이 마력은 실제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품성의 타락한 마력 속에서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은 오늘날의 영화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업적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고 있다는 점이다."(반성완, 216쪽)

"영화자본에 의해 촉진되는 스타숭배는 인격성이라는 마력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 마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상품적 특성이라는 타락한 마력에서만 존립하는 것이다. 영화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 오늘날의 영화에게는 일반적으로 예술에 관한 전래의 표상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혁명적 기여를 인정해줄 수가 없다."(강유원, 11쪽)

벤야민이 보기에 스타숭배 현상은 상품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영화산업 자체를 소위 영화자본이 쥐락펴락하고 있는 이상은 영화에서 혁명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만 벤야민이 기대하는 것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 혹은 예술의 전통적인 표상에 대한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는 것이다.    

전통적 예술에서라면 예술작품의 대상은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은 누구나 영화화되어 화면에 나올 수 있는 권리를 제기할 수 있다."(최성만, 129쪽) 혹은 "모든 오늘날의 사람들은 영화화되려는 요구를 가질 수 있다."(강유원, 12쪽) 곧, "스크린에 내가 나온다면'이란 욕망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벤야민이 예로 드는 영화는 지가 베르토프의 <레닌에 관한 세 노래>(http://www.youtube.com/watch?v=eIdeEgY4LTo, http://www.vunet.org/videos/story-313.html)나 요리스 이벤스의<탄광광부> 등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일별해보기 위해서 벤야민은 글쓰기(문학)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비교한다.

수백년 동안 문학계/문필분야에는 소수의 글쓰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지만 19세기말부터는 사정이 바뀌어 "오늘날에 와서는 직업을 가진 유럽인치고 직업 체험담이나 항의, 르포르타주와 이와 유사한 것들을 발표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거의 없다".(인터넷이 보급된 20세기말은 또 한번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필자와 독자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그 의미를 상싱하게 되었다. 필자와 독자의 차이는 이제 다만 기능상의 차이가 되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되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게 되었다. 독자는 언제든지 필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최성만, 129쪽) 바로 이런 것이 변화된 상황이다. 이어지는 대목.

"고도록 전문화된 노동 과정에서 싫든 좋은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독자는 필자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 노동 자체가 곧장 말로 표현된다. 노동을 말로 서술하는 것은 노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의 일부가 된다. 글을 쓰는 권한은 이제 특별한 전문교육이 아니라 종합기술교육에서 그 기반을 얻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러한 능력은 공동재산의 성격을 띠게 된다."(최성만, 129-130쪽)

"고도록 전문화된 노동 과정에서 싫든 좋은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는 독자는 필자가 되는 기회를 갖기 마련이다. 소련에서는 일 자체가 곧장 말로 표현된다. 일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노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의 일부가 된다. 글을 쓰는 문학적 능력은 이제 특별한 전문교육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기술교육을 통해서 배양되어지고, 그럼으로써 그러한 능력은 공동소유의 성격을 띠게 된다."(반성완, 217-8쪽)

"독자는 좋든 싫든 고도로 전문화된 작업과정에서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전문가로서 저자로 등장할 기회를 얻는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노동 자체라야 발언권을 가진다[말발이 선다]. 그리고 노동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노동의 수행에 요구되는 능력의 일부를 이룬다. 글을 쓰는 권능은 이제 더이상 전문 교육이 아닌 다방면의 기술교육에 기초하며 그리하여 공동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강유원, 11-12쪽)

세 가지 번역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지만 최성만본에서는 '소련에서는'이란 구절이 누락됐다. 그리고, 글을 쓰는 권한/글을 쓰는 문학적 능력/글을 쓰는 권능 등으로 옮겨진 대목은 영어본에 따르면 'literary competence'이고,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직역하자면) '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아무려나 이젠 누구든지 저자/필자가 될 수 있다는 것. 벤야민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글쓰기에는 수백 년이 걸렸던 변화가 영화에서는 단지 십 년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론 러시아 영화의 경우가 그렇다.

"러시아 영화에서 보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배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사람들이다. 서구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하여 복제되기에 대한 현대인의 정당한 요구는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산업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생각들과 애매한 투기로써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을 따름이다."(최성만, 131쪽)

"러시아 영화에서 보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배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민중이다. 서구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하여 자기자신을 재현/연출해보려는 현대 인간의 정당한 요구는 외면 내지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영화산업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스펙타클과 아리숭한 상상력을 통하여 대중의 참여를 자극하는 데만 관심을 쏟고 있을 따름이다."(반성완, 218쪽)

"러시아 영화에서 접하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배우가 아니라 스스로를 연출하는 사람들이다. 서유럽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가, 현대인이 자신의 복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당한 요구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영화산업은 환상적인 생각이나 모호한 사색을 통해서 대중의 참여를 자극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강유원, 12쪽)

세 가지 번역 모두 대동소이한데, 다만 마지막 대목에서는 차이가 있다. 강조 표시한 대목들이 영어본에서는 'illusory displays and ambiguous speculations'로 옮겨졌고, 러시아어본에서는 (영어로 직역하자면) 'illusory images and dubious speculations'로 번역됐다. 최성만본에서는 '영화산업'이 주어란 점을 고려해서 'speculations'를 '투기'로 옮긴 듯하다. 한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처럼 'speculations'가 'displays'/'images'와 댓구를 이룬다면 '투기'는 어색하다. 나는 의역으로 보이지만 맥락상 반성완본이 가장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싶다...

08. 01. 12-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을 다룬 "시조차도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12887)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역사에 대한 철학의 무관심이 18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전통을 지배했다고 했는데, 여기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이었다. 이 두 역사적 사건은 현재가 과거와 근본적으로 단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철학은 이성이 본질적인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철학이 역사와 좀더 능동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23쪽)

 

 

 

 

그리하여 보수적인 성향의 칸트조차도 "과거의 권위를 비롯한 모든 권위에 맞서 개인들에게 자기 독립심을 부여하는 혁명적 정신을 찬양했다. 칸트를 비롯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의 자기 확신이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했는데, 왜냐하면 이성만이 현재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사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칸트와 계몽철학자들의 인식은 아직 철저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이성은 단지 인간 종에 속함으로써 모든 개인들이 갖게 되는 하나의 정신적 능력일 따름이며, 이성의 힘은 역사의 우발적 사건들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역사에 대해서 초월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What if?)'라는 역사에 대한 가정법, 혹은 '대체역사'는 아마도 '역사 이후의 이성' 혹은 '역사 바깥의 이성'에 가장 잘 상응하는 사례일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연쇄에서 오직 한 가지 변수만을 분리해내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를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대체역사의 전제는 역사를 마치 물리학에서의 사고 실험 대상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헤겔로의 이행은 그러한 가정/대체의 불가능성과 상관적인 게 아닐까. 그것은 '역사 바깥의 이성'으로부터 '역사 속의 이성'으로의 이행이다.

"칸트 이후 단지 한 세대가 지난 다음에, 헤겔은 이성 그 자체가 역사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역사와 철학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최후의 일보를 내디뎠다. 헤겔에게 이성은 모든 인간이 구비하게 되거나 또는 자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추상적인 정신적 능력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파생되는 결과는 무엇인가? "만약 생각하는 능력이 시간과 문화에 의해 지속적으로 형성된다면, 역사에 대한 연구만이 우리의 본성과 세계속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 그 자체는 역사-의존적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철학을 제외하면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것은 없다.'"(23-4쪽) 즉, '역사적 인간'은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라 조건 자체이다.  

역사와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바로잡게 된다면 자유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만약 이성이 역사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합리적 행위자가 자신을 자율적 단위로 경험할 여지가 있"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이 입장에 대한 헤겔의 반응이나 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롯하여 헤겔을 따랐던 사람들의 반응은, 그것이 허구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허구적인 생각'은 'illusory conception'의 번역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그 입장은 표면 아래에 있는 심층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으며 또한 개인들이 왜 그러한 선택을 하는지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택은 개인들이 모든 종류의 자원들, 즉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심리적, 종교적, 기술적 자원들에 전급할 수 있는가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그 시대의 지배적 힘에 종속되게 만든다."(24-5쪽)

이에 따른 결론: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것은 없다는 믿음은 다음과 같은 것을 함축한다. 외부의 힘과의 영구적인 절충을 통해 개인의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깨달을 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따라서 자유는 우리가 이러한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정도에 의해서 평가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힘이 우리를 통제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은 9.11의 의미에 대한 공적 토론에 기여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해야 할 책임도 있다."

08. 01. 12.

P.S. 예전에 책을 읽으면서 빼놓았었는데, 보라도리의 서론 '테러리즘과 계몽주의의 유산'은 잘 씌어진 글이다. 하버마스와 데리다 철학의 '입문'으로서 간략하면서도 요긴하다. 해서 몇 차례 '브리핑'을 시도해볼까도 한다. 우선은 '공적 참여의 두 가지 모델'에 관한 절을 브리핑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는데(이 절은 저자가 한권의 책으로 발전시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전에 역사와 철학의 관계에 대하여 지난번에 미진하게 끝내놓은 듯해서 마저 정리해놓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hilocinema 2008-01-13 09:55   좋아요 0 | URL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01-13 09:59   좋아요 0 | URL
덕분에 한번 더 읽어보고 오타들을 수정했습니다.^^
 

두 편의 문학관련기사가 왠지 겹쳐지기에 나란히 옮겨놓는다. 채희윤의 신작 장편소설 <소설 쓰는 여자>(현대문학, 2008)에 대한 소개기사와 '문학상 인플레'에 대한 '최재봉의 문학풍경' 기사다. "자본주의 시대에 사양산업인 소설"이란 작가의 자조가 무색하게 문학상 '현상금'은 갈수록 치솟고 있다(문단의 주도권 다툼처럼도 보인다). 해서 작가들에겐 소설 쓰기 어렵다는 사회이지만 동시에 소설 쓰기를 권하는 사회가 현재의 한국사회다(중견 작가들은 창작스쿨 강사로 뛰게 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장편소설에 걸린 상금만 일년에 몇 억이니까 앞으로 우리는 해마다 토탈 몇 억짜리의 소설들을 읽게 될 것이다!  

세계일보(08. 01. 12) 소설가 지망생 눈에 비친 가정, 그곳은 감옥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문학을 하기 위해선 “교도소 같은 곳에 정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체제 순응자의 범상함에서 뜨거운 예술혼이 분출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 소설가 오 헨리도 감옥에서 소설가로 거듭났다. 예술의 영감을 얻기 위해 파출부를 자처한 여자는 어떨까. 확신범만큼 강렬하지 않지만, 적어도 평범하지는 않다.

소설가 채희윤(54)씨의 첫 장편 ‘소설 쓰는 여자’(현대문학)에는 신선한 글감을 찾기 위해 일부러 ‘부엌데기’ 노릇을 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32세 소설가 지망생 서주희는 부족한 상상력을 자책하며 일탈을 꾀한다. 심야 주차안내원, 생맥주집 아가씨,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거쳐 파출부로 변신한다. 월수금은 공인회계사의 저택으로, 화목토는 퇴역 장성의 집으로 출근한다. 파출부 주희에게 비친 가정은 감옥 같은 곳이다.

“존경이란 신비함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죠. 그 신비함을 조성하는 강력한 인자가 미지와 거리감인데 그것이 가장 쉽게 깨지는 장소가 바로 가정이죠. (…) 일종의 유형지가 아닐까 싶어요.”(92쪽)

공인회계사의 아내는 남편보다 애완견을 사랑하고, 퇴역 장군은 낡은 반공주의와 나르시시즘을 고수하며 노추(老醜)를 보인다. 주희는 이들 인간 군상의 위선, 피폐, 좌절된 꿈을 면밀히 관찰한다. 파출부를 빙자한 문학 수업은 공인회계사와의 불륜이 발각되던 날 종결된다. 결국 주희는 간통죄로 구치소에 갇히며 토마스 만이 설정한 예술가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소설의 뼈대는 주희가 두 가정에 ‘잠입’해 겪은 체험이다. 이야기의 다른 축은 주희가 감춰온 쓰린 개인사다. 주희는 기생 딸로 태어나 17살에 요정 지배인에게 성폭행당했다. 상처와 죄책감 때문에 첫사랑을 떠나보내야 했고, 이후의 사랑도 엉망진창이 된다. 소설에 생을 거는 주희의 집요함은 상처 치유의 의지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나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소설을 쓰려는 것인가요, 아니면 소설 쓰기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61쪽)

수희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들었던 소설 강의가 중간중간 인용되며 이야기 전개를 돕는다. 이를 테면, 주희는 퇴역 장성과 진보 교수 며느리의 살벌한 다툼에서 소설적 요소를 포착하며 “요약과 장면, 묘사 이 모두가 다 들어 있어야 합니다”란 강사의 가르침을 상기한다. 예비 소설가 주희가 세상을 묘사할 때 쓰는 비유는 일상적이지 않다. 흉물스러운 퇴역 장성은 표도르 카라마조프, 장형보, 딤즈 데일 등 문학적 인물에 비견되며 더욱 사악하게 표현된다. 파출부의 시선으로 본 두 가정의 삐걱거림도 흥미롭지만, 상투적 문장을 결벽증 환자처럼 피하는 문체가 읽는 맛을 돋운다.

작가 채씨는 첫 장편에 대해 “매우 자기고백적인 소설”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1989년 등단해 소설집 ‘한 평 구 홉의 안식’ ‘곰보 아재’ 등을 펴냈다. 장편은 등단 20년 만에 처음으로 썼다. “처음으로 내가 자신을 한번 풀어봤습니다. 이 자본주의 시대에 사양산업인 소설에서 제가 무슨 영화를 구하겠습니까. 주희가 소설로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고 첫사랑에 다시 다가가듯,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할 뿐이지요.”(심재천 기자)

한겨레(08. 01. 12) 문학상, 현상금 인플레 시대

문학 월간지 <문학사상> 신년호를 보니 ‘문학사상 장편소설상’이라는 새로운 문학상을 제정한다는 안내문이 있다. 국내 출간과 동시에 해외에서 영어로 출간한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1억5천만원의 상금 규모가 놀랍다. 안내문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국내 최고 상금’에 해당한다. 세계일보사가 주관하는 세계문학상, 그리고 조선일보사가 지난해 새로 만든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의 1억원 상금에서 50% 인상된 것이다. 10여 년 전 국민일보사에서도 1억원 상금을 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적이 있으니, 1억5천만원 상금은 한국 장편소설 현상공모의 기록을 깬 셈이다. 국문 및 영문 번역 출판저작권을 출판사가 영구 확보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어도, 기록은 기록이다.

비록 억대에는 못 미치지만 상금 액수가 수천만원대에 이르는 고액 장편소설 현상공모는 여럿 있다. 문학동네소설상이 5천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있으며, 한겨레문학상 역시 올해부터 상금을 5천만원으로 늘렸고, 지난 가을호로 창간된 <문학의 문학>도 5천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를 시작했다. 이밖에도 창비의 창비장편소설상과 민음사의 오늘의작가상이 각각 3천만원, 문학수첩의 문학수첩작가상과 문학동네의 문학동네작가상이 각각 2천만원의 상금을 걸고 작품을 모집하고 있다.

이 상들이 대체로 신인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별다른 문단 경력이 없어도 장편소설 하나만 잘 쓰면 순식간에 수천만원 내지는 억대의 상금을 거머쥘 수 있다는 말이 성립한다. 실제로 신인 작가 서유미씨는 지난해 문학수첩작가상과 창비장편소설상을 연달아 수상하면서 5천만원을 ‘벌었다.’ 소설책 한 권 값을 1만원이라 쳐도 5만 권을 팔아야 얻을 수 있는 인세 수입에 해당한다. 몇몇 잘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제하고는 웬만한 기성작가들조차 1만 권은 물론 초판 3천 부도 소화하기 어려운 시장 상황에서 이런 고액 상금은 상당한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고액 상금을 내건 문학상이 느는 데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없지 않다. 문학의 위상이 갈수록 저하되고 있는 상황에서 높은 액수의 상금을 통해서나마 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제고하고, 재능 있는 잠재 작가들의 참여와 문학적 투신을 유도하는 효과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상금 액수의 고저가 작품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상금 액수를 경쟁적으로 늘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나은 작품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해되지만, 장기적으로 보아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볼 일이다. 가령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과도한 몸값이 경기 발전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상황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먹튀’가 문학에서라고 없으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고액 문학상을 문학에 대한 사회적 투자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혹시라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성장 이데올로기의 문학적 반영은 아닌지 점검해 볼 일이다. 문학적 논리와 맥락에 따른 자연스러운 문학 부흥은 물론 바람직스럽되, 인위적인 경기 부양 식의 ‘쏟아붓기’는 곤란하다. 거품 경기가 경제의 건전한 기반을 갉아먹는 것처럼 과도한 ‘투자’는 작가와 문학을 타락시킬 수도 있다. 문학과 돈, 적당한 거리와 긴장이 필요하다.(최재봉기자)

08. 01.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며칠전 '로맹 가리 읽기'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이번에 <하늘의 뿌리>와 <새벽의 약속> 두 작품이 번역돼 나와서였다. 주말 북리뷰란에 기사들이 올라왔기에 하나를 옮겨놓는다. 두 작품 모두 예전에 번역됐었다고 하고, 그제서야 나는 <새벽의 약속>을 표지로는 보았었다는 기억을 떠올린다. 85년이라. 고등학교 때 아닌가. 흠, 지방 소도시의 서점들을 순례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한국일보(08. 01. 12) 소설처럼 살다 간, 로맹 가리의 잊혀진 소설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자기 앞의 생> 등의 작품으로, 궁핍한 이민자의 아들에서 전쟁 영웅ㆍ외교관ㆍ세계적 작가로 승승장구하다 느닷없는 권총 자살로 마무리한 극적인 삶으로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1914~1980)는 문학 독자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그의 또다른 대표작 <하늘의 뿌리>와 <새벽의 약속>이 출간됐다(문학과지성사 발행). 각각 68년, 85년에 첫 번역된 후 절판됐던 작품으로, 둘 다 가리의 작품 이력에 있어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늘의 뿌리>는 가리가 볼리비아 주재 영사로 재직하던 1956년 발표해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은 작품이다. 첫 소설 <유럽의 교육>(1945)으로 비평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던 가리의 문명(文名)을 결정적으로 드높인 이 출세작은 출간 3개월 만에 10만 부가 판매되는 등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주인공은 코끼리 구호 운동가인 프랑스 사람 모렐이다. 2차대전 독일군 강제수용소에 갇혔다가 출감한 그는 해마다 수만 마리씩 학살되는 코끼리를 구하고자 프랑스 식민지인 아프리카 차드로 온다. 비참한 아우슈비츠 생활을 아프리카 대평원을 질주하는 코끼리를 상상하며 견뎌낸 그에게 이 덩치 큰 동물은 “우리와 다르기는 하나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은” 존재다.

자신의 노력을 물 밖으로 나와 허파가 생기길 기다리며 숨쉬던 선사시대 파충류에 빗대며 “그놈처럼 여러 번 해보면 아마도 우리는 결국 필요한 기관, 예를 들면 존엄이나 우애 같은 기관을 갖게 될 거요”라고 말하는 모렐의 의지는 단단하다. 그는 야생보호 국제회의에 보낼 청원서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한편, 사냥꾼, 무기 밀매업자, 가죽 가공업자 등 코끼리 학살 공범들에게 가차없는 테러를 가한다.

주인공이긴 하지만 모렐이 독자와 직접 대면하는 일은 좀체 없다. 3인칭인 이 소설에서 그의 발언과 행적은 여러 주변인물의 시점과 대화를 통해서 전달된다. 다종한 주체로부터 비롯되는 이야기들은 서로 겹치고 반복되며 단순하다(출간 당시 일부 프랑스 비평가들은 내용의 장황함과 중복을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리는 독자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다. 그는 제각기의 입장과 경험을 가진 생생한 캐릭터를 창조함으로써 다채롭게 이야기를 변주한다. 아울러 인물들이 모렐의 맹목적이지만 순수한 열정에 감화돼 가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면서 자신이 ‘최초의 생태학적 소설’로 칭한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분명히 한다.

1960년작 <새벽의 약속>은 가리의 소설 중 가장 자전적이란 평을 듣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러시아에서 가난한 유대계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로 이민한 ‘나’의 유머러스한 성장기다. 동유럽에서의 어린 시절, 프랑스 정착 후 학창 시절, 2차대전 참전으로 이어지는 주인공의 인생 여정은 작가의 실제 생애와 고스란히 겹친다. 아버지의 부재를 상상으로 메우고, 소수계 이민자에서 사회 주류로 편입되려 애쓰면서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형성해가는 ‘나’의 성장 과정은 소설의 틀을 빌린 로맹 가리의 은밀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소설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좌절된 연극배우의 꿈과 실패한 두 번의 결혼생활을 딛고 어머니는 생애를 온전히 아들의 성공을 위해 투입한다. 늘 “넌 프랑스 대사가 될 거야. 위대한 극작가가 될 거야”라고 축원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수혜자인 아들마저도 종종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리게 하는 극성스러움이었다.

라켓 몇 번 잡아본 것이 전부인 아들을 프랑스의 고급 테니스 클럽에 가입시키려 마침 그곳을 방문한 스웨덴 왕에게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엔 우습다 못해 연민이 느껴질 정도다. 자기 조카를 내세워 에밀 아자르란 가상 작가를 창조해서 ‘몰래’ 공쿠르상을 또 받는 등 가리의 광대 같은 생애 뒤로 허영에 찬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던 그의 어린 시절이 드리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었고, 그래서 헛웃음 지은 뒤엔 가슴이 뭉클하다. 특히 전선에 나간 장성한 아들에게 꼬박꼬박 부쳐진 어머니의 편지에 숨은 사연이 소설 말미에 밝혀질 땐 독자는 더 이상 어머니 없는 로맹 가리를 상상하기 힘들어진다.(이훈성기자)

08. 01. 12.

P.S. 기사를 읽어보니 내 취향에 더 맞는 소설은 <새벽의 약속>이다. 2월에 읽을 책으로 찜해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보코프의 <롤리타> 강의를 위한 자료들을 최근에 업그레이드했는데(대여섯 권 정도 더 구했다), 국내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서도 참고할 만한 책들을 꼽아둔다.


1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말하라, 기억이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오정미 옮김 / 플래닛 / 2007년 12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2008년 01월 11일에 저장
구판절판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2008년 01월 11일에 저장
절판
롤리타- 피귀르 미틱 총서 4
모리스 쿠튀리에 엮음, 임미경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7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8년 01월 11일에 저장
품절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 금지된 소설들에 대한 회고
아자르 나피시 지음, 이소영.정정호 옮김 / 한숲출판사 / 2003년 12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08년 01월 11일에 저장
절판


1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1-11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