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서평 특집호를 냈는데(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2) '내가 생각하는 서평'이란 꼭지에 몇 마디 보탠 글을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6). 국내에서도 전문 서평지가 꾸려진다면 출판문화에 좋은 자극이 되지 않을까 싶다.  

교수신문(08. 01. 29) '소개’와 ‘비평’ 사이에 놓인 판관의 칼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책이 있는 곳에 서평이 따라붙는 것은 자연스럽다. 서평은 말 그대로 책의 됨됨이에 대한 평이니까 책이란 물건이 존재하는 이상 서평은 불가피하다. 책에 대한 평이라고 했지만 이때 評은 좋고 나쁨 따위를 평가하는 말이다.그럼으로써 값을 매기는 일이다. 책도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이니까 풀어서 말하자면 한 책에 대해 품평한다는 것은 그것이 어원적 의미 그대로 ‘꼴값’을 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그러한 판별을 위해서 보통은 책을 한 번 읽고 마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읽어야 한다. 적어도 넘겨보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리뷰(re-view)다.

이 ‘리뷰’란 말 자체에 ‘비평’이란 뜻도 포함돼 있지만 나는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는 책에 대한 ‘소개’와 ‘비평’ 사이가 아닌가 싶다. ‘소개’의 대표적인 유형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보도자료’와 언론의 ‘신간소개’일 것이다. 그것은 주로 어떤 책의 ‘존재’에 대해서 말한다. 그래서 “어, 이런 책이 나왔네!”란 반응을 유도한다. 반면에 ‘서평’은 그것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인가를 식별해줌으로써 아직 책을 접하지 못한 독자들의 선택에 도움을 준다. 그것은 일종의 길잡이다. “이건 읽어봐야겠군.”이라거나 “이건 안 읽어도 되겠어.”가 서평이 염두에 두는 반응이다. 그에 대해 ‘비평’은 책을 이미 읽은 독자들을 향하여 한 번 더 읽으라고 독려한다. 그것은 독자가 놓치거나 넘겨짚은 대목들을 짚어줌으로써 “내가 이 책 읽은 거 맞아?”라는 자성을 촉구한다.

물론 소개-서평-비평은 일종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이어서 경계를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책에 관한 담화와 담론들은 이 세 요소들을 약간씩이라도 모두 포함하기 마련이다. 다만 분류는 그 비율과 방점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가 그렇게 가늠될 수 있다면 서평의 바람직한 역할이란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적어도 일반론적인 차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보다 세분해서 서평의 유형학을 가정할 경우에는 초점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서평의 유형은 다양한 기준에 따라 나뉠 수 있는데, 먼저 그 서평의 주체에 따라서 일반독자, 전문독자, 전문가 서평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독자란 자신의 관심과 흥미에 따라 책을 사서 읽게 되는 보통의 독자를 가리키며, 전문독자는 주로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란 직함을 달고 여러 매체에 정기적으로 북리뷰나 칼럼을 게재하는 이들이나 언론의 출판면 담당기자들이 지목될 수 있다. 그리고 전문가란 서평을 정기적으로 담당하지는 않지만 해당 분야의 전공자로서 식견과 조예를 갖고 있는 이들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독자 유형 또한 중복 가능하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인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서평의 주체가 이렇게 구분될 수 있다면 바람직한 것은 이들이 유기적인 분업체계를 구축하는 것이겠다.

두 번째로, 서평의 또 다른 분류기준은 분량이다. 원고지 매수로 따지자면 5매, 10매, 20매,  30매 등의 유형학이 가능하다. 분량의 제한이 없는 자유서평이 아닌 이상 대개의 ‘공식적인’ 서평들은 분량의 제한을 요구받으며 이러한 분량 자체가 서평의 내용을 상당 부분 한정한다.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평하느냐는 전적으로 이 분량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서평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평만큼은 아니더라도 보다 많은 분량이 확보될 필요가 있다. 주요한 학술서나 교양서를 평하면서 원고지 10매 분량도 할애하지 않는 것은 ‘서평 문화’ 자체의 피상성을 양산할 따름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서평을 다루는 매체 또한 서평의 분류기준이다. 이것은 서평의 주체와도 얼추 상응하는데, 주로 일반독자들의 서평이 올라오는 온라인서점이나 개인 블로그, 그리고 전문독자들의 리뷰들이 게재되는 일간지, 주간지 등의 언론매체, 끝으로 전공자들의 학술서평이 실리는 학술지 등이 서평의 유형학을 구성한다. 여기서도 물론 바람직한 것은 각 매체별 서평들의 역할 분담이고 특화이다. 매체에 따라서 요구되는 서평의 성격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그 성격과 내용에 따른 분류이다. 서평은 대상도서의 학술적, 사회적 의의를 거론할 수도 있고, 도서 상태의 문제점과 오류들에 대한 지적으로 채워질 수도 있다. 그것은 곧 책에 대한 권유/만류와도 맞물리는데, ‘반드시 읽어보시길’ 권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낭비하지 마시길’이라고 충고를 던질 수도 있다. 물론 그 두 가지 양 극단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독자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서평이란 그러한 권유/충고가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나열한 대로 우리의 ‘서평 문화’는 다양한 층위의 서평들로 구성되며 따라서 일률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론 서평의 경우에 신간들 위주의 표면적인 소개보다는 일정 분량 이상이 전제된 깊이 있는 리뷰들이 보다 많이 다뤄지기를 기대해볼 수는 있겠다. 이런 정도의 소감밖에 피력할 수 없는 것은 ‘주요 서평자’로 거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로 해온 일이 본격적인 서평이라기보다는 주변적인 서평 혹은 책에 대한 수다 정도이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책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모아놓거나 늘어놓는 일을 즐겨 하게 됐고 덕분에 본의 아니게 얻은 직함이 ‘인터넷 서평꾼’에다 ‘북리뷰어’다. 자임한 직함은 아니기에 정확한 규정 근거는 모르겠지만 ‘서평꾼’은 아무래도 ‘서평가’나 ‘서평자’와는 급이 좀 다르다(무슨 학술서평에 ‘서평꾼’이 등장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하는 일도 약간 좀스럽다. 가령 나는 이런 지적들을 늘어놓는다.



국내에 다수의 책이 번역 소개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대표작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의 한 대목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은, 그 통일성을 깨트리며 그 허위성을 드러내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이상(理想), 또는 ‘허구’이다.” 이 경우 나의 의문은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상 또는 허구이다” 같은 ‘이상한’ 주장이 어떻게 나오는가이다. 저자가 멍청이라서? 대개 그런 경우는 없다. 문제는 역자 혹은 편집자의 부주의다. ‘이상(理想)’으로 번역돼 있는 것은 실상 영어의 ‘so far as’(~인 한에서)를 옮긴 것이다.

짐작에, “모든 이데올로기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포함하고 있는 이상, ‘허구’이다”라는 번역문에 편집자가 부적절한 개입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다음 문단에 ‘시장의 이상(理想)’(이때는 ‘ideal’을 번역한 ‘이상’이다)이란 말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 알고 보면 정상 참작이 가능한 실수이긴 하지만 순진한 독자들을 골탕 먹이거나 자학하게 만드는 ‘오류’이다.



같은 저자의 『향락의 전이』(인간사랑)도 마찬가지다. 국역본은 초판의 오역들을 교정한 개역판까지 나와 있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영화감독과 제목명의 오역을 어느 정도 바로잡았을 뿐 근본적인 교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영화명과 주인공에 대해서도 ‘시라노’를 여전히 ‘키라노’로, 그의 여인 ‘록산느’는 ‘로잔느’라고 옮기고, 유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차’는 ‘쿤스투리카’로 개명하고 거기에 ‘Kunsturica’라고 엉뚱하게 병기까지 해놓았다.

이런 지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데, 정작 문제적인 것은 서평이다. 허다한 오류와 오역이 속출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해서 한 일간지 서평은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자들은 지젝의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비밀인 향유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해놓았다(서평자들이 자주 잊어먹는 것은 서평의 대상이 원저가 아니라 번역서라는 사실이다). 물론 지면의 성격과 분량의 제약이 서평의 일차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읽을 만한 책을 판별해내고 엉터리 책들을 감시하는 서평의 고유한 자기 역할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서평을 통한 학문적 교류에 이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08. 01. 29.

P.S. 나대로의 서평 사례로 인용한 대목은 '오역의 모험'(http://blog.aladin.co.kr/mramor/429942)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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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잃어버린 학술서평을 찾아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09 18:41 
    학술서평의 문제점을 짚은 대학신문의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지난주에 전화로 잠깐 기자의 질문에 답한 적이 있다. 출판대국의 면모에 걸맞은 (학술)서평문화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인데, 하루아침에 달라지긴 어려운 것이 아닐까(일단은 '학술'이 먼저 돼야 학술서평도 뒤를 따를 것이고). 그것도 '문화'라면 매일매일의 한 걸음이 그래도 먼훗날 어떤 궤적을 보여줄지도 모를 따름...    대학신문(09. 11. 09) 잃어버린
 
 
파란여우 2008-01-2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우리는 갈고 닦으면서 가야하는거겠죠?
전 이걸 '글의 길로 가는 차력'이라고 부릅니다.

로쟈 2008-01-29 21:38   좋아요 0 | URL
차력도장 가는 길이기도 하네요.^^

비로그인 2008-01-2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향락의 전이. 저도 개정판을 구입하긴 했는데. 늘 찜찜하네요... 조금만 막히면 불안해서 검색하곤 경악하고- 고쳐읽기를 계속하게 된답니다 :)

로쟈 2008-01-30 00:21   좋아요 0 | URL
우리말로 번역해서 읽어야 하는 번역서죠...

노자읽기 2008-01-30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문제는 기억의 패턴이 거짓말을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어떤 책을 보더라도, 거기서 자신이 확인할 수 있은 사실, 알 고 있었던 것 만을 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새로운 지식을 늘인다거나 새로운 견해를 배운다는 것을 있을 수 없을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만큼 새로운 지식이나, 견해가 이해받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2-03 11:41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관성적인 읽기와 이해도 한가지 변수입니다...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를 지난주에 구입해서 며칠 동안 읽었다. 다른 일들에 매이지 않았다면 하루나 이틀 안에 통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속독이 가능한 건 국내에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 비교적 쉬운 책 범주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번역의 가독성이 그만큼 좋기 때문이다. 몇몇 부주의한 오역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교정해가며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사실 이론서의 경우 이 정도 번역도 드물며 역자의 노고를 기억해둘 만하다. 

2001년에 나온 <전체주의가 어쨌다고?>는 국내에 번역된 지젝의 책들을 연도별로 펼쳐놓으면 중간쯤에 위치하는 책이다. 2000년대 이후의 저작들로 한정하자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 2004)에 바로 이어지는 책이면서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믿음에 대하여>(동문선, 2003),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 <이라크>(도서출판b, 2004),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 앞서는 책이다. '신간'이긴 하지만 진작에 소개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그래서 든다. 영어본을 기준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2006, How to Read Lacan, London: Granta Books (also New York: W.W. Norton & Company in 2007).

 

 

 

 

2004, Iraq: The Borrowed Kettle, London: Verso.

 

 

 

 

2003, The Puppet and the Dwarf,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2003, Organs Without Bodies, London: Routledge.

 

 

 

 

2002, Revolution at the Gates: Žižek on Lenin, the 1917 Writings, London: Verso.


 

 

 

2002,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London: Verso. 


 

 

 

2001, Opera's Second Death, London: Routledge.(*근간 예정으로 안다)

2001, On Belief, London: Routledge.

 

 

 

 

2001, The Fright of Real Tears: Krzysztof Kieślowski Between Theory and Post-Theory, London: British Film Institute (BFI).

 

 

 


2001,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London: Verso.

 

 

 

 

2000, The Fragile Absolute, London: Verso.

 

 

 

 

가장 읽기 쉬운 축에 속한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만만한 건 아니어서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의 경우에도 지젝에 대한 사전 숙지는 얼마간 필요하다. 라캉 정신분석의 용어들이 걸림돌이 될 수 있는데, 여차하면 그냥 넘어가도 좋겠다. 그럼에도 읽을 만한 대목들은 많이 있으니까. 여기서는 몇몇 오역과 역자와 의견을 달리하는 대목들만 나열해둔다(다섯 편의 에세이에 대한 '읽기'는 그 자체로 상당한 견적을 필요로 하며 여기서 다룰 수 없다). 지젝을 읽을 독자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약간'이다.  

먼저 고유명사와 관련된 대목들인데, 사실 이런 건 일반 독자들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다. 그럼에도 나로선 '교정의지'를 억누르지 못한다. 13쪽에서 한나 아렌트에 대한 재평가('아렌트 르네상스'란 말까지 쓰지 않는가!) 분위기에 대해서 지젝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고 언급하는 대목인데, 가령 1970년만 하더라도 학술 토론장에서 "당신의 논의 전개는 한나 아렌트와 비슷한 것 아닌가요?"란 말이 나왔다면 당사자가 꽤나 곤경에 빠져 있다는 신호가 됐지만 이젠 달라졌다는 것(90년대 이후겠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렌트가 의당 경의를 표해야 할 인물로 여겨진다. 기본적 성향으로 보건대 당연히 아렌트에게 반기를 들어야 할 것처럼 생각되는 학자들조차도 자기 이론의 근본적 신조들을 아렌트와 화해시켜 보려는 불가능한 작업에 빠져 있다."

그러한 학자들로 지젝이 거명하고 있는 사람이 크리스테바와 리처드 번스타인이다. "해서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정신분석학자가 정신분석 이론을 묵살해버린 아렌트를 평가할 때나, 리하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후계자들이 아도르노에 대한 아렌트의 극단적인 증오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처럼"이 인용문에는 삽입돼 있다. 

'정신분석가'인 크리스테바가 아렌트를 높이 평가하거나(크리스테바는 아렌트의 평전을 썼다) 프랑크푸르트학파 계열의 번스타인이 아도르노를 증오한 아렌트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게(번스타인은 <아렌트와 유태인 문제>란 책을 썼다) 지젝으로선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여기서 'Richard Bernstein'을 역자는 '리하르트 베른슈타인'으로 읽었는데, 독일 학자라면 그렇게 읽겠지만 번스타인은 미국 학자이다(이름으로 미루어 독일계이긴 할 테지만). 때문에 나는 '베른슈타인'이라고 읽어줄 이유가 없다고 본다. 더구나 국내에 '번스타인'이란 이름으로 <존 듀이 철학 입문>(예전사, 1995),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 등이 소개돼 있기까지 하므로(후자는 절판된 게 유감이다. 좋은 책이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과 하버마스, 가다머 등의 독일철학이 그의 주된 전공 분야다.   

 

 

 

 

그리고 29쪽 등에서 <순수의 시대>의 작가 '이디스 워튼(Wharton)'을 '훠튼'이라고 읽어주고 있는데 이미 국내에 <순수의 시대>(오리진, 1993)을 필두로 하여 여러 작품들이 소개된 작가를 다르게 읽어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마틴 스콜세지가 영화화하기도 한 <순수의 시대>는 지젝이 다른 책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어서 나도 뒤늦게 번역본을 구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에 '피터 셰퍼'와 '허버트 드레퓌스', '존 브록만'의 표기에 관한 지적들을 적다가 날려먹었다(임시저장도 안돼 있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걸 포함하여 몇몇 오역들(대표적으론 83, 148, 288, 306, 312쪽 등에 나온다)과 불만들(나는 'act'를 상용되고 있는 '행위' 대신에 굳이 '행동'으로 옮긴 것 등에 대해서 동감하지 않는다)은 중국에 다녀와서 다루도록 하겠다...

08.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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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29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지름신의 사도요, 모든 탐욕의 샘이시옵나이다.......;ㅅ;
1.로쟈님 글을 읽고 지젝거리기 시작했다.
2.지젝은 굉장히 열심히, 계속해서 글을 쓴다.
3.역자들(과 출판사들)은 굉장히 빠르게, 계속해서 번역/출간한다.
4.나는 굉장히 허겁지겁, 무리하게 쟁여놓는다.
5.읽으며 머리를 쥐어뜯........거나 혹은 책값을 마련하러 일터로 간다.
라는 순환입니다. (웃음)

로쟈 2008-01-30 00:22   좋아요 0 | URL
사실 지젝은 그 정도의 '보상'은 하지요. 엉터리 번역들만 아니라면...

bongsun 2008-01-3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이 책의 편집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로쟈 님의 글은 항상 감탄스러운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같은 편집자에게 로쟈 님은 감사와 두려움의 대상이죠.^^
이번 글도 너무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 가지 밝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로쟈 님께서 지적하신 인명 표기에 관한 것인데요,
책의 '일러두기'에 밝혀놓았듯이
인명은 원칙적으로 브리태니커 사전의 표기를 따르는 것이 출판사 방침이어서,
역자 선생님도 그 방침을 따라주시도록 설득했습니다.
따라서 인명 표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편집자(인 저의) 책임입니다.

중국에 다녀오시는 모양이네요.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8-02-03 11:47   좋아요 0 | URL
'브리태니커'에 '베른슈타인'이나 '훠튼'으로 표기돼 있나요? '한국어판 브리태니커'를 말씀하신다면 그 또한 음역인데요... 음, 어쨌거나 제 생각은 고유명사 표기의 '고유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발터 벤야민'과 '한나 아렌트'라고 굳어진 이름을 '원칙'을 이유로 '발터 베냐민'이나 '해나 아렌트'로 표기하는 건(한겨레 같은 경우가 그런데) 원칙의 남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성 표기에서도 '두음법칙'에는 위배되지민 '류'씨 성 같은 표기를 허용/인정하고 있는 것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은 제가 편집자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bongsun 2008-02-0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 잘 다녀오셨는지요.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사전에 책에 언급되는 모든 인물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경우 같은 철자의 다른 인물명 표기에서 따오거나,
다른 책이나 언론 등에서 쓰는 표기를 참조하거거나 했는데,
아무튼 문제점이 꽤 있는 것 같네요.
특히 베른슈타인은 명백히 제가 오해했거나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인명 표기에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고는 했는데,
허술한 부분이 상당히 있군요.
지적과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로쟈 님과 모든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앞으로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쟈 2008-02-04 14:06   좋아요 0 | URL
'번스타인'은 '번슈타인'이라고 옮긴 경우도 있습니다. 저로선 기간된 책의 경우 오류가 아니라면 고유명사들은 일치시켜주는 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처음 번역되는 고유명사라면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bongsun 2008-02-0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무튼 충고 감사드립니다.^^
(앗, '참조하거거나'(?) - 편집자의 자질이 의심된다는... ㅜㅜ)

로쟈 2008-02-04 15:13   좋아요 0 | URL
저도 덩달아 오타를 냈네요. '일이라고요'라니요.^^;
 

본의 아니게 이번주에 며칠간 중국 여행을 가게 됐다.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지만 중국의 고대 사상에 관한 책들에 요즘 다시 관심을 갖고 있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관련분야의 책들의 대부분은 박스 보관도서다. 예전에 동양고전과 한국철학에 관한 책들은 막연히 불혹 이후에나 다시 집어들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불혹이다! '少年易老 學難成'이 따로 없다). 어제도 도서관에서 사마천의 <사기 열전>의 한 대목을 읽었다. 찾아보니 관련서들이 생각보다는 많이 나와 있다. 이 대단한 역사가에 대한 리스트도 따로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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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28 22:21   좋아요 0 | URL
이제 제가 이립(而立)이니 로쟈님과 딱 10년 차이가 나는 듯 합니다. 이립이라고는 하나 확고하게 세운 것 하나 없어 부끄럽기만 합니다. '少年易老 學難成'이라는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겨 경계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즐거운 중국 여행 하시길 기원합니다.^^

로쟈 2008-01-29 00:30   좋아요 0 | URL
아주 '소년'이라고 할 만합니다.^^ 일취월장하시길!..

2008-01-28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9 0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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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릴리오 읽기 리스트를 만든 김에 리뷰기사도 하나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론 '최근에 나온 책들' 연재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882648) 책을 완독하진 않았다(책이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러시아로 떠났었다).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들 중의 하나와 연관되기에 영어본을 찾는 대로 조만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기본적으론 '전쟁학'에 대한 관심이다. '제자백가'의 사상을 낳은 '조건'으로서의 전쟁).

한겨레(04. 03. 12) '속도’는 어떻게 희망서 악몽으로 바뀌었나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폴 비릴리오(72)는 살아서 재발견된 학자다. 1975년 전쟁 건축물을 철학적으로 살핀 첫 저서 〈벙커의 고고학〉을 내놓으며 자기만의 정치적 사유를 시작한 그는 자신의 주요한 저서들이 나오고도 한참 뒤인 1990년대에 들어서야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군사학적 상상력으로 정치의 흐름을 살펴온 그의 이론은 유고슬라비아내전, 9·11 뉴욕 테러와 같이 서구 내부에서 벌어진 파괴적 사건을 거치면서 진지한 연구와 참조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국내에서 그는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의 사상과 연관돼 이제 막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구사한 개념의 상당수가 비릴리오에게 연원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이다. 실제로, ‘노마디즘’이나 ‘탈영토화’와 같은 들뢰즈·가타리의 핵심 개념은 비릴리오가 1976년에 펴낸 〈영토의 불안정성〉에서 처음 선을 보인 개념이다.

〈속도와 정치〉는 그의 저작 가운데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책이다. 1977년에 나온 이 책은 정치를 속도의 개념으로 사유함으로써 전통적인 정치학의 사고방법을 새로운 상상력으로 내파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제껏 주로 ‘공간’을 중심으로 하여 논의되던 정치 영역을 ‘시간’을 중심으로 한 정치학으로 뒤집어놓고 있는 것이다.

비릴리오가 이 책에서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 내놓은 것이 ‘질주학’ 혹은 ‘질주의 이론’이다. 그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현상인 ‘가속화’가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의 본질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정치는 일상적인 의미의 정치라기보다는 전쟁·혁명과 같은 폭력적 상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치 현상이다. 무엇보다 그는 군사적인 차원에서 정치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그런 분석을 통해 지은이는 정치 자체뿐만 아니라 경제·사회 등 인간의 삶 일반의 변화를 통찰한다.

이 통찰의 바탕에 놓인 아이디어가 ‘군사학적 속도 개념’이다. 가령, 봉건제 시대의 유럽에 존재했던 요새화한 도시는 도시 대중의 순환과 운동량을 규제하고자 등장한 부동의 전쟁기계였다고 지은이는 이해한다. 이 ‘난공불락의 전쟁기계’는 거주의 관성이 지배했던 정치적 공간이자 정치의 특정한 배치였으며 봉건제 시대의 물질적 토대였다.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은 이런 ‘정지된 속도’의 상황이 일변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은 “봉건적 농노제로 상징되던 부동성의 억압에 맞서는 반란”이었고, “임의적인 유폐나 한 곳에 거주해야 한다는 의무에 맞서는 반란”이었다.

그러나 ‘이동의 자유’를 주장했던 이 반란의 요구는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주도권을 틀어쥐면서 ‘운동의 독재’로 변질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는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적 운송장치를 획득하고, 달리기와 같은 생체의 속도, 말·코끼리 등의 동물적 속도를 능가하는 ‘기계적 속도’를 얻었다.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지은이는 서구인들이 인구가 적은데도 동양인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처럼 서구인들이 기계적 속도를 선점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속도는 서구인의 희망’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한번 탄력을 얻은 속도는 그 가속화를 멈추지 못한다. 비릴리오는 ‘핵 억지력’, 곧 핵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은 ‘순수 전쟁’의 상태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이 순수 전쟁의 상태에서 속도는 ‘절대 속도’가 된다. ‘단 1초 만에’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수 있는 핵무기는 ‘속도의 희망’이 ‘속도의 악몽’으로 뒤바뀌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비릴리오가 이 ‘저주의 예언’으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권력의 ‘절대 속도’가 지배하는 이런 상황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상상력’을 동원해 찾아내려 한다. 그 저항의 형태는 속도의 폭주를 중단시키고 방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총파업은 ‘시간 속에 쌓아놓은 바리케이드’이다.(고명섭 기자)

08.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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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28 22:33   좋아요 0 | URL
Virilio는 후일의 독서를 기약하며 '꿍쳐둔' 사상가였는데, 이 소개글과 아래의 리스트가 왠지 '불씨'를 당기는 느낌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는 제게 건조한 계절에 특히 조심해야 할 불씨로 보입니다.^^;

로쟈 2008-01-29 00:33   좋아요 0 | URL
네, 조심해야죠. 꺼진 불도 다시 봐야 될 판인데요.^^;
 

프랑스의 사상가 폴 비릴리오의 <동력의 기술>(경성대출판부, 2007)이 작년 늦가을에 출간됐다. 좀 뒤늦게 알게 된 셈인데, 최근 제자백가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손자>도 읽어볼까 하다가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에 다시 눈길을 주게 됐다(영어본을 찾고 있는 중이다). <속도와 정치>를 제외하면 읽을 만한 번역서가 있는 건지 좀 의심스럽지만 리스트는 만들어둔다...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동력의 기술
폴 비릴리오 지음, 배영달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7년 11월
13,000원 → 13,000원(0%할인) / 마일리지 390원(3% 적립)
양탄자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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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속도
폴 비릴리오 지음, 배영달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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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미학
폴 비릴리오 지음, 김경온 옮김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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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화- 지각의 병참학
폴 비릴리오 지음, 권혜원 옮김 / 한나래 / 2004년 4월
15,000원 → 15,000원(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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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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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28 01:51   좋아요 0 | URL
참, 로쟈님, 혹시 박찬부 선생님의 '현대정신분석비평' 필요하신가요? 절판된 책 구하다가 여벌이 한 권 생겼는데, 다시 헌책방에 내어 놓기도 뭣하고 해서, 로쟈님이나 비평고원 분들 중 혹 필요로 하는 분이 있다면 드리고 싶네요 : )

로쟈 2008-01-28 08:14   좋아요 0 | URL
저는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