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파리'가 말하는 한국사회

지난주에 소개기사를 옮겨놓기도 했는데,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내일 개봉한다고 한다. 동네 CGV에서는 상영을 하지 않아서 언제, 어떻게 봐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여하튼 몰상식한 뉴스들만 쏟아지고 있는 터라(오늘도 어이없는 언론탄압 기사들이 떴다) 최소한의 정신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보고 싶다. 감독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고대신문(09. 04. 06)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린 다 특별해"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 곁으로 날아온다. 오는 16일(목)에 개봉하는 영화 <똥파리(Breathless)>다. 지저분한 맨홀 뚜껑 아래에서의 삶을 절절히 그려낸 <똥파리>에서 주연으로 열연한 양익준 감독. 그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스물다섯의 용기 하나로 살아간다. 영화인 양익준과 한 인간으로서의 양익준을 만나봤다.   

#1. 영화가 말을 걸다
영화 제목이 왜 똥파리(Breathless)인가
예전에 어른들이 ‘똥파리’란 말을 많이 썼잖아요. 아마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저 같은 경우엔 너무 많이 들어서(웃음). ‘에잇, 이 미천한 놈, 더러운 놈, 우리 곁에 오지 않았으면……’하고 내쳐지는 사람들을 비유하는 말이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상훈이나 영재가 다 똥파리로 치부되는 사람들이에요. 영어 제목 ‘Breathless’는 손원평 감독이 지어줬어요. 손 감독은 제가 주연으로 연기했던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2005)의 감독이었어요. 제 첫 작품부터 계속 제목을 지어줬는데 이번 것은 정말 잘 지어준 것 같아요. 이 세상에 숨 쉴 수 있는 공기는 수북하게 있지만 사람들은 숨을 헐떡이면서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똥파리’라는 제목과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프랑스의 거장 장 뤽 고다르(Monsieur Godard)감독의 첫 작품 제목도 ‘Breathless’였대요. 그 때문에 해외 영화인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어요. 

네덜란드에서 귀국한지 얼마 안 됐다. 지난 1월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타이거상을 수상한 소감이 어떠한가
사실 이렇게 얘기하면 ‘로테르담 국제영화제’한테는 미안하지만 예전에 ‘미쟝센 단편영화제(2005)’에서 인기상 받을 때와 처음 만든 단편영화로 ‘서울독립영화제(2005)’에서 관객상 받았을 때가 더 기뻤던 것 같아요. 그 땐 초반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상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들어가는 게 싫어서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려고 해요. 이번 영화제엔 젊은 감독들이 많이 모여서 활기찼고, 상을 받은 것보다도 다른 나라의 감독, 관객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게 더 좋았어요. 자전거를 타고 오시던 네덜란드의 한 중년 여성이 절 보더니 ‘Breathless!’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한 20분 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결국 가족이라는 건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더라고요.  



연출과 주연을 둘 다 맡았다
처음부터 ‘내가 하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근데 촬영을 끝내고 편집하면서 ‘아, 내가 괜히 했나?’하고 고민을 했죠. 아무래도 연기만 할 때엔 연기에 온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는데 연출까지 하니까 아무래도 정신이 분산되더라고요. 대사를 잊어버려서 촬영 중간에 ‘잠깐만!’이라고 했던 적도 많고요(웃음). 아무리 때리는 연기라도 정신적으로 고요한 상태에서 집중해야 제대로 할 수 있어요. 인간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영화에서 용역깡패 상훈 역을 맡아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이 많다. 실제로 싸움을 많이 해봤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남을 먼저 때려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일단 맞으면 그때서야 저에 대한 보호본능으로 싸움을 했죠. 맞아서 몇 번 기절했던 기억도 있고. 영화 속에서 상훈과 닮은꼴인 또 다른 주인공 영재(이환)라는 캐릭터를 보면 집에선 폭력을 행사하지만 밖에선 오히려 두려워해요. 밖에서 억압됐던 것들이 안에서 풀어지는 것. 참 아이러니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폭력성이 내재돼 있어요. 이 폭력성을 배출할 수 있는 통로가 우리 사회에 없어요.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곳곳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존재할지 한 번 드러내보고 싶었어요. 영화에선 폭력의 수위가 센 감이 없지 않지만……. 아니, 어떻게 보면 그 수위도 따질 수 없는 거예요. 가족 안에서 아무리 미약한 모순과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 당사자가 힘들다고 느끼면 그게 제일 괴로운 것 아니겠어요? 제가 주위에서 힘들게 봐왔던 이야기를 픽션으로 만들어서 표현한 거예요. 전 일단 착한 사람입니다(웃음).

영화에 개인적 경험이 많이 들어가 있나
네, 부모님과 징글징글했던 모든 것들. 저뿐만 아니라 제 주위 친구들이 그런 경험을 했고요. 지난달 31일(화) 시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 눈빛을 봤는데 고개를 계속 끄덕거리더라고요. 제작할 땐 저로부터 시작했지만 영화가 극장에서 공개된 그 순간부턴 관객들의 이야기가 된 거예요. 저의 어떠한 경험에서 시작됐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전적 경험이라기보다 자전적 성찰이 담긴 거죠.

독립영화계에선 유명한 배우인데, 대중들에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몰랐으면 좋겠어요. 제 삶이 제일 중요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침해받고 싶지 않거든요. 지금은 영화가 개봉되는 시기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려고 해요. 영화가 거의 막을 내릴 즈음엔 다시 제 삶을 찾아 돌아가야죠. 언제까지 ‘나 상 받은 놈이야, 나 감독이야’ 이러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지금은 제 인생에 있어 아주 특별한 시간인 거고요. 그렇지만 전 아주 특별한 지금보다 평범한 시간들, 일상이 더 좋아요.

초창기 배우 시절에 <품행 제로>(2002), <해피에로 크리스마스>(2003),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 등에서 단역을 주로 맡았다. 그 때의 생활이 궁금하다
아, 단역은 아니었는데 많이 편집됐어요. 주조연급 정도였어요. 사실 그 땐 아르바이트로 영화에 출연했어요. 연기는 하고 싶고 돈은 벌어야 하니까 생계를 위해 했던 거죠. 현실적으로 초짜한테 누가 중요한 역할을 주겠어요. 가능성이 보인다고 해도 스타들이 득실거리니 안 되죠. 그런 환경에서는 인정받기 어려워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에 둘 다 출연했어요. 사실 상업 영화중에 내 영화다 싶은 건 없어요. 애착이 가는 영화는 손원평 감독, 이진우 감독이랑 찍었던 단편 영화랑 제 작품 4편 정도예요.  



#2. 평범하고 독특하게 사는 법
첫 인상과 달리 내성적인 것 같다

엄청 내성적이어서 표현을 많이 하고 살려고 하다 보니 말을 많이 하는 성격으로 변한 것 같아요. 요즘엔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도 잘 떠들어요. 아무래도 ‘내가 그렇게 모자란 존재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인식하게 돼서인 것 같아요. 예전엔 좋아하는 사람에게 먼저 고백하지 못했어요. ‘쟤는 나보다 크고 높은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드니까 위축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제 자신을 제일 존중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어요. 남들 앞에서 주눅 들지 마세요. 사는 데 별로 도움 안 돼요.

영화배우가 안 됐더라면 지금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 것 같은가
노숙자?(웃음) 그냥 뭘 해도 잘 했을 것 같아요. 열심히 사는 건 습관화돼 있으니까요. 사실 거의 10년 동안 계속 연기만 하면서 살아와서 잘 모르겠어요. 20대 때엔 정말 미친 듯이 연기했던 것 같고, 몇 년 전부터는 연기가 재미있다는 걸 생생하게 느끼고 있어요. 저는 영화배우다, 감독이다 뭐 이런 것보다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당신의 20대는 어땠나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고3때부터 막노동하고, 용산전자상가에서 냉장고 배달하면서 생활비를 벌었어요. 그리고 바로 군대에 갔는데 고참들이 대학 얘기를 하더라고요. 대학에 가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군대에서 하루에 두 시간씩 공부해서 수능을 봤어요. 중학교 때부터 조금씩 연기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고 자연스레 연기과에 진학했죠. 사실 대학 자체가 제게 큰 의미가 있진 않아요.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은 많이 남아 있죠. 지금 이렇게 미친 듯이 연기할 수 있는 것은 학교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저와 제 친구들이 스스로 만들어나갔던 덕분인 것 것 같아요. 연기라는 건 절대 누군가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배우가 살아온 흔적들이 결국 연기를 통해 나와요. 대부분의 배우들은 연습을 통한 일관된 감정들이 나오잖아요. 그런 건 제가 볼 땐 되게 재미없어요. 거짓말 같은 느낌들이죠.

살면서 이것만은 꼭 붙잡고 살아야 한다, 이런 게 있다면
사랑. 끊임없는 사랑. 그 중에서도 연인과의 사랑. 그게 삶에 있어 가장 큰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미움도 헤어짐도 사랑이에요.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만큼 그리고 저보다도 더 많은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사랑은 꼭 제대로 해봤으면 좋겠어요. 남들과 비슷하게 살지 않는 것도 중요해요. 특별한 이유에 의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난 이상 특별한 존재로 살아가야죠. 부모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아닌 건 아니라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가끔은 싸우기도 할 줄 알아야 해요. 남에게 피해주고 상처 주지 않으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거침없이 뛰어드세요. 젊은 데 뭘 망설여요.(노희 기자) 

09. 0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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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7-2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독과 주연을 동시(똥파리),
주연에 대한 느낌이 영화 제5원소의 '게리 올드만'을 나게 합니다.
알파치노,게리올드만,양익준 - 무언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작품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마음도 아픕니다.

돌탑영화의 신지승 감독의 말이 생각납니다.
"풍경보다는 사람의 모습에 촛점을 둔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영화 <지젝!>에 나오는 한 강연에서 대표적인 데리다주의자로 지젝이 거명하는 이름이 '아비탈 로넬'이었다. 그때 잠시 이 여성 철학자에게 흥미를 가진 적이 있는데, 마침 '해체론의 후계자'로 로넬의 철학을 소개하는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기사 덕분에 야코프 타우베스에게서 수학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됐다.   

교수신문(09. 04. 13) 해외 학자_해체론의 후계자 아비탈 로넬 뉴욕대 교수 

아비탈 로넬(Ronell, Avital: 1952- )은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유대학자이자 저명한 종교철학자였던 야코프 타우베스에게 수학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괴테, 휠덜린, 카프카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파리에서 "해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쟈크 데리다, 그리고 뤼스 이리가레이, 쥴리아 크리스테바와 함께 현대 프랑스 페미니즘의 큰 축을 이루는 엘렌 씨수등과 공부하였다. 현재는 뉴욕대학에서 독문학과 비교문학을 가르치고 있고, 스위스의European Graduate School의 철학과 교수로도 재직중이다. 2004년 데리다가 타계하기 직전까지 뉴욕대에서 우정, 환대, 용서, 괴물등의 주제로 매해 가을 대학원 세미나를 함께 강의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 『받아쓰기(Dictations)』(1986), 『전화수첩(The Telephone Book)』(1989), 『마약전쟁(Crack Wars)』 (1992), 『어리석음(Stupidity)』(2003), 『테스트욕동(The Test Drive)』(2005) 등이 있다. 



글쓰기의 기원으로서 타자
칸트에서, 프로이드, 니체, 하이데거, 레비나스, 블랑쇼, 데리다, 라쿠-라바르트와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워즈워드, 도스토예프스키, 클라이스트, 뮤질, 괴테, 플로베르, 카프카까지, 또한 텔레비젼, 전화, 가상현실, 정신분열증, 걸프전, 오페라, 후천성면역결핍증, 마약중독, 트라우마, 소문, 무지함, 공권력 등 아비탈 로넬은 특유의 거침없고 신랄한 문체로 서양철학과 문학, 문화이론,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종횡무진한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영역과 요소들을 천착하며, 인위적인 경계를 넘고 닫힌 뚜껑을 열고 상식을 의심하고 정돈된 명제들을 휘저어 놓는다. 걸러지지 않은 듯한 거리의 언어, 그 거칠음, 무모함, 대범함이 문헌 (혹은 쟁점)에 대한 숨막힐 정도의 미시적 엄밀성과 이성의 변두리에 대한 무르익은 윤리적 성찰, 그리고 섬세한 여성적 감성과 함께 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러나 펜을 든 그의 손을 움직이는 것, 이 아름답고 힘있고 거침없는 글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로넬 자신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뒤에서 그를 원격조정한다. "유령에 홀린 글쓰기," "몽환적 글쓰기," 혹은 "수동적 글쓰기" (받아쓰기, 립씽크, 윤리적 채무관계, 부름에의 부응, 볼모 등으로 표현되는) 라고 스스로도 말하고 있지만, 이 수동적이고 비자발적인 글쓰기를 조정하고 있는 그 힘이 정확히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는 로넬 자신도 알지 못한다. 개념화 할 수도 개념화 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 힘의 기원을 "타자"라고 한다면, 그에게 글쓰기란 언어를 읽어버린, 혹은 언어 밖에 있는-그러나 끊임없이 말하기를 갈망하는- "타자"를 위하여 자기 손을, 자기 몸을 빌려주는 행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넬의 글들에는 "왜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이것을 쓸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성찰과 고뇌가 밑바닥에 깔려있다. (글쓰기의) 주체가 생성되기 이전, 자아가 이루어지기 이전부터 자아에 각인되어 있는 타인의 흔적에 대한 채무의 이행이든, 그 희미한 기억에 대한 집착이든, 욕망이든, 어쨌든 그는 호텔 프론트의 전화 교환원처럼 리셉션 데스트에 앉아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를 받아쓴다.

결정되지 않은 한계의 순간
서양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이성적 사고가 그 체계 유지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은폐하고 망각해 온, 끊임없이 철학의 주변으로, 이성의 뒤꼍으로 배재해 온 그 "것"이 로넬의 철학적 사고가 향하고 있는 곳이다. 망각되고 배재되고 지워지는 과정에서 그 저항의 손톱 자국이라도체제 안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며, 그 사유되지는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각인 (inscribed, written) 되어있는 그 변형과 소멸, 왜곡과 망각의 흔적을 문헌에서 찾아 읽는 것, 그것이 로넬의 해체철학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고, 설명하거나 개념으로 가둘 수 없지만,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 유령과도 같이 - 그것, 즉 단일자 (singularities)에 대한 긍정과 celebration에 로넬철학의 핵심이 있다. 해체는 결코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테러리스트적 파괴가 아니다. 부정을 위한 부정도, 냉소적 허무주의도 아니다. 해체는 가혹하리만치 세밀한 문헌분석과, 타자, 단일자, 혹은 ‘유령’의 부름에 응하는 진실하고 엄밀한 글쓰기, 그리고 익숙한 사유체계의 뼈대가 드러날 때까지 확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끝까지 몰아 부치는 의심과 회의이다. 목소리를 빼앗긴 자들의 소리 없는 비명과 눈물 (로넬은 이를 "ethical scream"이라고 말한다), 쉽게 개념화 할 수 없는 내 몸에 난 타자의 흔적, 역사의 결에 거꾸로 난 손톱 자국…  로넬의 철학은 그것들을 향해있지만, 굳이 그것을 설명하고 정리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언어가 목젓까지 올라왔다가 나오지 못하고 목에 걸려버리는 그 순간, 그의 펜은 그곳에 머문다. 이것이 한계인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가능성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일 것이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그의 언어 속에서 철학은 끊임없이 그리고 가차없이 흐트러지고 다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아비탈 로넬을 다룬 영화로 로넬 외에 슬라보이 지젝, 쥬디스 버틀러, 마사 누스바움, 코넬 웨스트 등 동시대를 사는 흥미로운 서양 철학자 8인을 담은 아스트라 테일러 (Astra Taylor) 감독의 <음미되어진 삶: Examined Life> (2008)가 있다. 또한 로넬의 <전화수첩 The Telephone Book>에서 영감을 받아 아리아나 레인즈 (Ariana Reines)가 각본을 쓴 연극 <전화: Telephone>가 현재 뉴욕의 Cherry Lane Theatre에서 상연 중이다.(장지은 뉴욕대 박사과정)  

09. 04. 14.  

P.S. '어리석음'에 대한 로넬의 연속 강의 동영상은 http://www.youtube.com/watch?v=SaP6rRor32Q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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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09-04-15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루는 사상가들과 주제들을 보니 벤야민이나 지젝을 방불케 하는 '전방위 비평가'이신 것 같군요.ㅎㅎ이제는 좀 파렴치한 기대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부디 '번역되어 주시옵소서'하는 바람이 듭니다.

로쟈 2009-04-15 21:30   좋아요 0 | URL
책들이 두꺼운 편이어서 시간이 좀 걸리지 않을까 싶네요...
 
다큐멘터리 <지젝!> 상영전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간략한 리뷰이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지젝!>에 대한 페이퍼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을 다룬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를 같이 참고할 수 있다.    

한겨레21(09. 04, 20) 정치 경제,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멘터리 영화 <지젝!>(2005)에서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아주 겸손한 학문이에요. 철학은 단지 ‘네가 이것이 참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게 뭐냐?’라는 식으로 질문할 따름이지요. 그런 겸손함이 역설적이지만 철학의 위대성입니다.”라고 답한다. 지젝 스스로 자신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은 <시차적 관점>(마티 펴냄)은 철학에 대한 그의 정의에 충실한 책이다. 그는 지금까지 제기해온 문제를 해결하지도, 새로 더하지도 않으며 다만 ‘시차(視差, parallax)’라는 개념을 빌려서 재정의하며 재구성한다.  

‘시차’란 과학용어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가장 단순하게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각각 한쪽씩 가리고 보았을 때 나타나는 약간의 차이가 시차다. 서로 다른 시각(관점)이 만들어내는 차이를 시차라고 하면, 이것은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양자물리학에서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신경생물학에서 의식현상과 회백질 더미,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 정신분석학에서 욕망과 충동 사이의 간극, 그리고 성적 삽입의 대상이면서 출산의 기관이기도 한 질(바기나)의 시차 등등.  

지젝은 이 책에서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시차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철학과 과학,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양식에 나타는 시차적 간극들에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궁극적으로 변증법의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된다. 그가 보기에 시차적 간극이라는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이라는 아이디어를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2001)에서 얻어오지만, 칸트주의를 이론적 전거로 삼는 가라타니와 달리 헤겔적 사유에 접목시킨다. 그가 보기에 헤겔의 근본적인 교훈은 존재론의 핵심 문제가 ‘현실’이 아니라 ‘현상’이라고 본 데 있다. 흥미롭게도 지젝이 들고 있는 다양한 사례 가운데는 분단 한국의 상징적 장소도 포함돼 있다. 바로 비무장지대 남쪽에 위치한 통일전망대다. 이 ‘극장’ 같은 건물에는 ‘스크린’ 같은 창이 설치돼 있고, 북한의 ‘현실’을 전시 가옥들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도 살지 않지만 저녁에는 동시에 불이 켜지는 집들이다. 여기서 현실은 틀에 맞춰진 외양(현상) 그 자체다. 아르헨티나의 사례도 흥미롭다. 2001년 12월 반정부 시위 때, 특히 시위 군중의 표적이 됐던 경제부장관 카발로는 그를 조롱하기 위해 사람들이 쓰던 자신의 가면을 쓰고 집무실에서 탈출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최상의 가면이라는 정신분석적 교훈을 직접 실천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가 보여주는 순수한 차이는 한 요소와 다른 요소 간의 차이가 아니라 한 요소와 그 자체와의 차이다. 여기서 시차는 서로 대칭적인 두 관점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이 있을 때 그것을 빠져나가는 무언가가 있으며 두 번째 관점은 그 첫 번째 관점에서 볼 수 없었던 무언가를 채우게 된다. 예컨대, 지젝은 마르크스의 시차를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라고 본다.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에서 지적한 대로,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데 있다. ‘레닌을 반복하라!’는 그의 요구는 거기서 비롯된다. 경제가 핵심이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차적 관점은 두 겹의 싸움을 요구한다. 

09.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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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항의 교착상태와 혁명의 필연성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8 21:20 
    중앙대 대학원신문(260호) '冊과 담론' 코너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을 다루고 있다. '한겨레21'에도 서평을 실은 바 있어서 청탁을 받고 주저했지만 초점을 다른 쪽에 맞춰달라고 해서 결국은 수락했다. 하긴 그렇게 초점을 달리하면, 서평은 몇 편 더 쓸 수도 있겠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9. 05. 07) 저항의 교착상태는 어떻게 돌파해야 하나 슬
 
 
2009-04-14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14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14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몇달 전에 번역돼 나온 루소의 <신엘로이즈>(한길사, 2008)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관련기사가 드물어서 아쉬워하던 차였다. 사실 책은 아직 손에 들 여유가 없지만, 낭만주의 문학이 한때는 '전공'이었기 때문에 관심을 안 가질 수도 없다. '성의 역사'와 함께 '사랑의 역사'를 더듬어볼 때도 한번쯤 둘러봐야 할 이정표이기도 하다.  

 

대학신문(09. 04. 12) 새로운 사랑의 신화, 『신엘로이즈』 

루소는 너무나 다채로운 면모를 가진 천재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회학의 방법을 모색했고, 『사회계약론』을 통해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의를 천명했으며, 『에밀』을 통해 교육철학에 한 획을 그었고, 『고백록』을 통해 근대적 의미의 자서전이라는 문학 장르를 창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루소가 일류 식물학자이자 『마을의 점쟁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해 프랑스 국왕의 연금을 받을 뻔했던 탁월한 음악가였을 뿐만 아니라 『신엘로이즈(Julie ou la Nouvelle Heloise)』라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쓴 작가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루소의 다양한 모습들 중 일부에 편중된 번역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번에 서익원 교수(경원대 불어불문학과)의 『신엘로이즈』 완역본이 출간됨으로써 그동안 우리들에게 가려져있던 루소의 한 면모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루소는 무엇보다도 『신엘로이즈』를 통해 문학적 영광의 정점에 이른다. 루소의 다른 글들이 주로 일부 식자층에서 읽혔다면 이 소설은 매우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면서 18세기 말까지 적어도 70판이 출판됐는데, 이는 그야말로 유례 없는 성공이었다. 그렇다면 『신엘로이즈』가 이러한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 작품은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왜냐하면 8백여쪽에 이를 정도로 분량이 많았고 사건들도 거의 없는데다가 결투, 대도시 파리의 풍속, 음악, 교육, 종교 등 일반적인 주제들에 대한 긴 논술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자신을 작품의 주인공들과 동일시하면서 책에 빨려들어 갔다. 거기에 담겨있는 열정은 너무나 격렬해서 당대의 한 평론가는 글이 쓰인 종이를 불태울 정도라고 외쳤고, 낭만주의를 주도했던 스탈 부인은 루소가 선량한 풍속을 해치는 연애소설을 써서 미덕을 손상시키기는커녕 미덕에 상상적인 매력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열정으로 만드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찬양했다. 그러나 당대 독자들이 열광한 사랑과 미덕을 향한 열정이 현대의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감정일 수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할 수 있다. 루소의 어투를 흉내 내자면 ‘진지한 사랑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이 책을 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루소가 사랑에 부여한 새로운 의미다. 루소에게 사랑은 관능의 충족을 넘어서 미덕을 지향하는 힘이며,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미덕의 화신으로 이상화한다. 그는 사랑에서 모든 것, 가령 사랑할 때 일어나는 모든 감정 등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시인하지만 그 환상이야말로 인간을 가치의 세계로 고양시키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미덕은 실천하기 어렵지만, 사랑하는 대상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미덕을 실천할 때 그로 인해 받는 물질적 고통은 달콤한 사랑으로 상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민인 생 프뢰와 귀족 출신인 쥘리는 그들의 사랑이 사회 질서와 충돌하면서 미덕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둘의 관계를 눈치 채고 애태우던 쥘리 어머니의 죽음이 한 예인데, 어떻게 보면 쥘리는 사랑 때문에 어머니를 죽인 셈이 된다. 만약 쥘리가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 프뢰와 결혼했다면 그녀는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사랑을 파괴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미덕을 추구하는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허락된 사랑의 형식은 그리움뿐이고, 미덕이야말로 내세에서 이 둘을 맺어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런데 쥘리의 남편인 볼마르는 그들이 앓는 사랑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생 프뢰에게 자신의 영지인 클라랑에 와서 살라는 제의를 한다. 유물론자이자 이성의 화신인 볼마르는 과거의 쥘리와 현재의 볼마르 부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두 사람에게 일깨우려고 그들에게 자기가 없는 상태에서 입맞춤을 하도록 강요한다. 볼마르의 방법은 쥘리와 생 프뢰가 서로에게 사랑과 존경의 시선을 보낼 때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게 하려는 것으로, 사실 이것은 ‘클라랑의 질서’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행복을 향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클라랑의 질서는 실상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전방위 감시체제’에 기초를 두고 있어서, 하인들은 주인의 이익을 위해서 항상 서로를 감시해야만 한다. 볼마르가 감시하는 시선이 내면화될수록 이 두 사람은 활기를 잃어버리고 쥘리는 일상적인 행복에서 생겨나는 권태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클라랑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가장 유효한 방법이었던 감시 체계의 효율성이 결정적으로 의문시된다. 쥘리가 느끼는 권태감은 자신이 자율적이라고 느끼지만 실상은 세밀하게 통제 받는 클라랑 사람들의 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가능한 결말은 쥘리가 죽는 것이고, 그래서 그녀는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러 물에 뛰어 들어가 아이는 구하지만 자신은 죽을 병에 걸린다. 그녀는 생 프뢰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아이들의 교육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죽음을 맞는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두 연인은 그동안 겪어야만 했던 모든 고통을 보상받고 심원한 존재 이유를 되찾는다. 쥘리는 미덕으로 인해 받은 고통 덕분에 자신의 사랑을 부끄러움 없이 고백할 수 있었고, 생 프뢰는 지금까지의 고통을 쥘리의 사랑 고백으로 보상받았으며 또 내세에서 쥘리를 만날 희망을 갖고 앞으로 미덕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돼서 사람의 내면을 직접 느끼고 싶다는 쥘리의 희망과 미덕을 실천하는 자신의 내면을 쥘리가 그대로 느꼈으면 하고 바라는 생 프뢰의 희망은 그 강렬함으로 이미 죽음을 넘어 둘을 하나로 만든다.  

계몽주의자들이 신성을 탈신비화했다면 루소는 이렇게 세속적인 사랑을 신비화하면서, 당시 형성 중인 부르주아 사회를 위해 혹은 그 사회를 견뎌내기 위해서 새로운 사랑의 신화 혹은 종교를 창조한 것이다. 이성적이고 명석한 프랑스어를 몽상과 열정의 언어로 변형한 루소의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 지나친 직역 때문에 따라 읽기 힘든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공들인 번역을 내놓은 역자의 노고에 루소 전공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이용철 교수 한국방송통신대 불어불문학과) 

09. 04. 12. 

 

P.S. 본문 중에 이름이 나오지만 스탈 부인(마담 드 스탈) 또한 낭만주의 연구자에겐 피해갈 수 없는 이름이다. 그녀의 <독일론>(나남, 2008)과 소설 <코린나 - 이탈리아 이야기>(문학과지성사, 2002)가 출간돼 있지만 이 역시 아직 손을 못대고 있다. 나의 현실이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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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2 18: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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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2 2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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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3 0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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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3 2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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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3 23: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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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3 2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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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사회, 혹은 정보화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으로 잘 알려진 마뉴엘 카스텔의 3부작을 읽어볼 계획이다. 방대한 분량 때문에 엄두를 내긴 어려운데, 실제로 언제나 다 읽게 될는지 장담할 수 없다(다 읽기 전에 개정판이 나올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론 소련의 붕괴를 다룬 3권 '밀레니엄의 종언'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3부작이라고 하니 1권부터 손에 들었다. 리처드 세넷과 지그문트 바우만까지, 내가 주목하는 세 사회학자의 키워드는 각각 '네트워크 사회' '새로운 자본주의' '유동적 근대'이다. 어디서 만나고 갈라지는지는 더 읽어봐야겠다. 참고로, <밀레니엄의 종언>의 원서 표지엔 일리야 레핀의 그림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들'이 들어가 있다. 국역본의 밋밋한 표지는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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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노바바 2009-04-14 07:38   좋아요 0 | URL
제 경험상 information age 3부작은 읽는데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됩니다 (사실 2권은 건너뛰엇습니다만). 워낙 정보와 자료를 꼼꼼하게 들이대다보니 질릴 정도입니다. 그게 카탈루냐 사람이라서 그렇답니다. 그 사람들이 꼼꼼하기로 유명하다는... 오히려 반대로 미디어에 관한 보다 철학적인 2개의 장 (1권 중후반부)은 너무 허술해서 의아할 정도입니다. 사실 real virtuality, space of flows, timeless time 장이 가장 유명한 챕터지만 미디어 전공자 입장에서 가장 엉성한 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근데 정말 사소한 걸로는 한국 번역판에는 왜 '마누엘 카스텔스'가 아니라 '마뉴엘 카스텔'이라고 적는지 궁금합니다. 프랑스에서 많이 활동햇으니 프랑스어식으로 읽은건가 의문스럽다가도, 그렇더라도 어쨋든 '마누엘' 아닌가 싶어 더더욱 의아합니다. 혹시 이 사람이 자기 이름은 이렇게 읽어달라고 햇는지...

로쟈 2009-04-14 23:1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닥 읽고 싶은 학자는 아닌데, '지명도'라는 것 때문에...^^;

노노바바 2009-04-15 01:49   좋아요 0 | URL
'책이 후졋다'는 얘기는 아니엇구요, 읽을 가치는 잇습니다. 두껍고 위트도 없이 꼼꼼하게 진행되는 책이니만큼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는 얘기엿습니다 ^^

로쟈 2009-04-15 07:05   좋아요 0 | URL
네, 재미에 대한 기대는 접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