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4.29 재선 지역 가운데 울산 북구에서 진보 진영 후보들간의 단일화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단일화가 필수적이라는 데 모두가 동감하지만 정작 단일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는 형국인 듯싶다(서로의 명분을 앞세우다가 필패의 국면으로 가는 것일까?). 어제오늘 일간지의 두 관련 시론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4. 21) '좌파 분열’이란 신화  

볼셰비키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분열돼 나온 다수파를 뜻한다. 사회민주당은 1903년 영국 런던 2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소수파)로 분열됐다. 분열의 직접적 원인은 당원의 자격문제였다. 레닌은 당원은 당 기관에 속하고 언제나 당의 지휘 명령에 복종하며 노동계급의 전위(前衛)인 자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멘셰비키는 당원 자격을 직업혁명가들로 국한시켜야 한다는 볼셰비키에 반대하고 서유럽의 사회민주당들처럼 대중정당이 돼야 한다고 맞섰다. 이 사소해 보이는 이견에는 혁명에 대한 근본적 입장 차이가 담겨 있었다. 볼셰비키는 폭력적 정권 탈취를,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혁명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1917년 10월 마침내 정권을 잡은 것은 볼셰비키였다.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는, 꽤 널리 퍼진 속설이 있다. 이 말이 어디에서 유래한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러시아 혁명사만 봐도 그렇다.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는 이념지형상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좌파였다. 멘셰비키는 상대적으로 우파였다. 현대에도 좌파가 반드시 분열하란 법은 없고, 우파가 반드시 부패로 망하란 법도 없다. 유럽을 들여다보면 우파도 분열로 망한 경우가 많고 좌파가 부패 때문에 몰락하기도 한다. 또 부패했으나 망하지 않고 건재한 우파도 있다. 끝없는 부패 추문 속에서도 50년 이상 장기 집권해 온 일본 자민당이 그 사례다. 분열이건 부패건 좌파·진보, 우파·보수 어느 한 편의 전유물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생각컨대 좌파=분열이란 등식엔 검증되지 않은 신화적 요소가 개입돼 있다.

4·29 재선이 치러지는 울산 북구에서 좌파 진영 후보 2명의 단일화가 관심거리다. 민주노동당 김창현 후보와 진보신당 조승수 후보는 “여론조사 결과 우리 중 한 명만 나가면 한나라당 후보를 이긴다”며 단일화를 다짐해왔다. 문제는 21일로 단일화 2차 시한이 다가왔는데도 단일화 협상이 지지부진하다는 점이다. 굳이 양김 단일화에 실패한 1987년 대선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진보정당은 거대 여당의 독주 속에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울산 북구에 좌파 회생의 시금석이란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진보는 소탐대실(小貪大失)로 좌파=분열이란 신화를 입증하려는가.(김철웅 논설위원)    

한겨레(09. 04. 22) 두 진보정당은 시험대에 올랐다

필자는 지난 2월4일치 〈한겨레〉 ‘시론’을 통하여 현재 진행되는 국회의원 보궐선거 및 다가오는 지방자치 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간의 선거 연대를 촉구하였다. 이후 양당 사이에 울산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위한 후보 단일화 논의가 계속되어 선거 연대가 가시화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후보 등록 마감 전 단일화는 무산되었고, 현재 민주노동당의 김창현, 진보신당의 조승수 두 후보는 각각 후보 등록을 하고 별도의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일차적 이유는 울산 북구 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 단일화를 위한 민주노총의 투표를 불법으로 유권해석했기 때문이다. 2002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동조합이 선거운동 기간 전에 예비후보에 대해 조합원들을 상대로 선전 행위를 하지 않고 투표를 하는 것이 적법하다고 판단한 바 있지만, 이번 울산 북구 선관위는 이러한 중앙선관위의 해석도 무시한 것이었다. 이후 민주노총 울산본부도 내부 이견이 발생하여 후보 단일화를 위한 총투표를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선거운동 기간 중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쉬워 보이지 않는다. 두 정당 및 후보 사이에 분당으로 인한 구감(舊感), 진보 정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경쟁, 여론조사의 방식과 절차에 대한 이견 등이 있기 때문이다. 진보정당 소속 인사들은 과거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 사이의 단일화 실패와 그로 인한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맹비난하였지만, 이제 두 진보정당이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

두 정당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감 놔라, 배 놔라” 할 자격은 없다. 그렇지만 두 정당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단일화 실패 이후 어떠한 일이 닥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예상이 되기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당장 양 정당과 후보는 단일화 실패를 상대 당과 후보 탓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낼 것이다. 선거 결과가 좋지 않으면 상대에 대한 비난은 더 가중될 것이다. 입으로는 ‘진보 대연합’을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역시 쟤네들은 안돼”라고 되뇌며 서로를 적대시할 것이다. 보수정당보다 경쟁 진보정당을 더 미워하고 경원시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다가올 지방자치 선거에서도 겉으로는 후보 단일화를 거론하겠지만 속으로는 각개약진의 길을 추구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의 냉소와 실망은 커질 것이다. 이 경우 진보정당의 미래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노동자 정치 1번지’라는 상징성을 갖는 울산 북구의 국회의원 한 석에 대한 양당의 열망은 치열하다. 게다가 단일화가 되면 당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일방의 자발적 양보나 살신성인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경우 후보 단일화는 양 후보와 정당에 대하여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외부적 세력이 있거나, 또는 양 후보와 정당이 정치력을 발휘하여 서로의 이해(利害)를 합리적으로 분배·조절할 수 있는 경우에 가능하다. 현재 시점에서 첫 번째 경우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도덕적 힘을 가진 세력은 없으므로, 두 번째 경우만이 유일한 선택지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지도부와 두 후보는 즉각 만나야 한다. 그 자리에서 그동안 그리도 외쳐왔던 진보의 대의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누구를 내세워 진보의 원내 교두보를 추가할 것인지, 그리고 양보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혜택을 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두 정당 지도부와 두 후보의 그릇과 정치력을 지켜보고 있다.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두 진보정당의 정치적 선택은 적어도 향후 10년간 진보 정치의 명운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09. 0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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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귀가해서 한숨 돌리고 잠시 뉴스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신간 리뷰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경제학계를 뒤흔든 차세대 블록버스터!'라는 광고문구를 띠지에 달고 있는 책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한즈미디어, 2009)가 눈길을 끄는 책이다. 제목이 다소 긴데, 표지대로 하면 초점은 '왜 부국의 원조가 빈국의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는가?'이고 기사의 제목대로라면, '국가간 빈부격차 왜 해결되지 않을까'이다. 한마디로, "'부의 탄생'과 '빈부격차'라는 인류역사와 경제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소개된다(저자 자신은 '가설'이라고 얘기하지만). 2007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자세한 서평이 기대되는 책이다. 경제서이긴 하나 보관함에 집어넣는다.

엽합뉴스(09. 04. 20) 국가간 빈부격차 왜 해결되지 않을까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맬서스의 덫'(Malthusian Trap)에 갇혀 있었다. 인류의 소득 증가는 인구 증가에 가로막혀 번영을 지속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인류의 생활 역시 부자와 귀족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구석기나 중세, 심지어 산업혁명 초기까지 별 차이가 없었다. 영국에서 발생한 산업혁명은 인류의 생활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수렵시대 이후 오랜 세월 지속해온 맬서스의 덫을 단번에 풀어버렸지만, 부의 증가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지 못하고 일부 국가에만 집중됐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부터 미국과 영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사회만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이른바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가 발생하면서 국가 간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그레고리 클라크 캘리포니아대 경제학 교수가 지은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한스미디어 펴냄)는 산업혁명에 따른 부의 탄생과 확대, 그리고 국가 간 빈부격차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우선 '맬서스의 덫'을 풀어버린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발생한 이유는 고도의 제도적 정체성과 인구통계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영국은 적어도 1200년 이후 사회적 변화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강한 고정성 혹은 정체성을 보였으며, 1300년부터 1760년까지 인구 증가 속도는 더뎠다. 반면 경제적으로 성공한 부유층의 출산율이 높았고, 중산층의 가치가 문화나 유전자에 반영돼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산업혁명이 촉발된 것은 기존의 경제학이 설명하는 것처럼 정치, 법률, 경제 등의 제도가 급작스럽게 발전했기 때문이라거나 식민지 개척, 지리학, 자원 등의 요인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요소에서 비롯됐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시 말해 폭력, 성급함 등으로 대표되는 수렵채집인의 속성을 버리고 근면, 합리성, 교육 등 좀 더 경제적인 속성을 채택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인류의 문화가 심층적으로 변화하면서 산업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오랜 정착생활의 경험과 안정성의 역사를 지닌 사회만이 사람들의 문화적 특성을 변화시켜 경제성장에 적합한 효율적인 속성을 지닌 인류로 탈바꿈시킨다"고 강조한다.

산업혁명을 설명하는 데는 인구통계학적 특성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저자는 "중국과 일본은 1600-1800년 당시 영국처럼 근면, 인내, 정직, 합리성, 호기심, 학습 등 중산층의 가치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지만 상류층의 출산력이 일반 계층의 출산력을 약간 상회하는 선에 그쳐 영국처럼 빠른 속도의 성장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상류층의 출산율이 높았던 영국은 모든 자녀가 부모의 부를 세습 받지 못했지만, 교육수준이 높은 나머지 자녀가 직업을 찾아 사회계층 구조상의 아래 단계로 내려가면서 중산층을 급속히 확산시켰고, 이는 자본주의 경제를 성장시키는 발판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안정성의 역사를 지니지 못한 사회는 산업화라는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서 "현대의학과 항공기, 휘발유, 컴퓨터 등은 과거 200여 년간 이뤄진 기술적 풍요로움을 상징하지만 아직도 '맬서스의 덫'에 걸려 있는 아프리카 사회에서 기술적 진보는 인구를 증가시키는 데 일조할 뿐이어서 빈곤층을 양산하는 데 '큰 공'을 세울 뿐"이라고 말한다. 이어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경제 대국들은 저개발 국가의 경제발전이란 명목으로 '식민지 정책'을 합리화했고, 지금은 빈국을 돕는다는 취지로 부국의 지원과 원조가 물밀듯이 이뤄지지만, 이는 세계적 빈부격차를 심화시킬 뿐"이라고 덧붙인다.

저자는 "오늘날 부국들이 허울 좋은 원조를 통해 겉으로는 인심을 쓰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통합이 아닌 배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난한 나라에 제시할 만한 경제발전 모형이 적어도 서구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그 결과 지금 인류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부자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의 행복지수는 전혀 증가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에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이러한 지적들은 세계적 빈부격차를 줄일 근본 방안이 어디에 있는지, 나아가 물질적 풍요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류의 진정한 경제적 행복과 번영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한다.(정천기 기자) 

09. 0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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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21 08:12   좋아요 0 | URL
인구통계학이라 --a
흥미롭긴하네요 ^^

로쟈 2009-04-22 08:42   좋아요 0 | URL
네, 새로운 접근법 같습니다...
 
누가 니체를 읽었다 하는가

서평후보로 꼽아두었다가 다른 책에 밀리는 바람에 잠시 독서를 미뤄두고 있는 책이 김진석 교수의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개마고원, 2009)이다. 책은 이달초에 구입을 했으니까 좀 됐다(니체에 대해서 자주 언급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전작 읽기를 시도한 적은 없다. 다음 학기에 강의를 하게 되면 겸사겸사 유고들까지 읽어볼 계획이다). 나는 책소개라도 해놓은 줄 알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눈에 띄지 않는다. 그냥 넘어갔던 모양이다. 강준만 교수의 칼럼으로 뒤늦은 소개를 대신한다.   

한겨레(09. 04. 20) [강준만칼럼] 약자의 원한 

현대 민주주의 체제는 아마도 약자들의 복수와 원한에 내재하는 합리성 혹은 정당성을 창조적으로 인정한 덕택에 발전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을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창조적으로 이해해보자. 그것은 약자들의 원한과 분노가 창조적으로 인정되면서 새로 태어난 권리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개마고원)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묘하다. 니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사회의 깊은 구석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주니 말이다. 김 교수가 한국 민주주의를 논하다가 “니체의 철학을 논의하는 책이니만큼, 이 정도에서 만족하자”고 했을 때,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아니 철학이 뭐길래, 그렇게 점잔을 빼야 한단 말인가?

니체는 ‘약자의 원한’을 혐오했으면서도 그것이 현대적인 방식으로 무수한 얼굴을 가질 것임을 예감했다고 한다. 어느 사회건 그 얼굴의 정체성을 놓고 사회적 갈등을 겪기 마련이지만, 그 갈등은 자주 ‘약자의 원한’을 혐오하는 쪽으로 결말을 맺는 것 같다. 그것이 창조적 결실을 맺은 뒤엔 어김없이 타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김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현대 사회의 개인들은 자신의 약점은 결함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거기에서 생기는 차별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강점에서 오는 이로움이나 명예는 그대로 누리면서 차별을 인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그런 이중적 태도는 ‘강약’(强弱)이 상대적이며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개념이라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방의 도시 거주자가 ‘서울 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선 농촌에 대한 ‘도시 패권주의’에 눈을 감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약자의 원한’이 자주 드러내는 한계이자 모순이다.

‘약자의 원한’을 타락시키는 매개는 늘 돈이다. “돈은 원초적으로 무의식의 대상”이라고 한 제임스 힐먼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1789년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모든 정치경제 시스템을 바꿔 놓았지만 단 하나 바꾸지 못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돈 시스템이다. 돈은 혁명 위에 존재한다. 수많은 혁명가들과 개혁가들이 종국엔 돈으로 망가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의식의 세계에선, 그들의 패가망신은 ‘권력·금력·명예 3분법의 파괴’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 인간의 삶은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이지만, 사회적 인정의 기준과 투쟁 방식이 너무 획일화돼 있다. 가장 이상적인 건 권력·금력·명예의 3분법이 지켜지는 것인데, 세 가지를 모두 갖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게 당연시되는 풍조마저 만연해 있다. 그런 풍조를 타고 공직의 기회비용에 대한 과대평가가 발생한다. 자신의 역량이라면 공직에 있지 않고 개인적인 돈벌이로 나섰을 때에 어느 정도를 벌었을 것이라는 계산을 자기 위주로 하고, 권력을 이용해 그 돈을 취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죄책감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다. 단죄의 형평성에만 집착한다. 강자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약자의 원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에도 불구하고 ‘약자의 원한’이 가져온 사회적 축복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균형 감각이 꼭 필요하리라. 김 교수는 니체를 가리켜 “인간 사회가 문화적으로 고양되기 위해 필요했던 폭력에 대해 너무 생생하게 증언하느라 미쳐버린 증인”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의 성찰을 압박하는 위악적 달인이라고나 할까.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는 오랜만에 두뇌훈련도 할 겸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09. 04. 19.  

P.S.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5장에서 안 그래도 하이데거와 니체에 관한 대목들을 읽던 차였는데, 마침 내일자 강준만 교수의 칼럼이 김진석 교수의 책을 다루고 있어서 옮겨놓았다. 책상맡에 있는 책을 한번 펴보는데, 박홍규 교수의 니체 비판서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필맥, 2008)을 정면으로 다룬 장도 눈에 띈다. 지젝의 용어를 빌자면, 두 대립적 관점이 니체의 '윤리 정치적 이율배반'이다. 기회가 되면 나대로 이 문제를 정리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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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9-04-19 23:56   좋아요 0 | URL
저도 김진석 선생의 새 책 얼마 전에 구입하고 언제쯤 독서의 기회가 올까 나름 '일발장전' 중인데, 좋은 소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니체의 '발광'에 대한 김진석 선생의 '진단'을 읽고 있자니, 일전에 지젝이 <폭력(Violence)>에서 니체가 발광한 원인에 관해 눙치듯 언급했던 그 예의 번뜩이는 '재기'가 떠오릅니다. 어쩌면 니체 자신도 빠져 있었을지 모르는 이 '약자의 원한'에 관해서는ㅡ지젝도 여러 번 인용하고 있는 바이지만ㅡ슬로터다이크의 <분노와 시간(Zorn und Zeit)>과 함께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역시나 기본적으로 '사회적 정의' 혹은 '해방'을 약자의 원한과 분노에 기초한 것으로 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로쟈 2009-04-20 00:00   좋아요 0 | URL
지젝의 인용을 보니 슬러터다이크가 하이데거론도 썼더군요. 니체 얘기는 주로 주판차치를 참조하고요..

Claire 2009-04-21 23:18   좋아요 0 | URL
이 내용을 읽기 전까지는 나도 약자의 원한이라는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못했네요. ^^
 

중국 관련서 얘기가 나온 김에 지난주에 나온 <차이위안페이 평전>(김영사, 2009)도 기억해 둠직하다. 차이위안페이(채원배)는 베이징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사상가라고 한다(아래 기사에서도 도산 안창호와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사를 다룬 책으로도 읽을 수 있을 듯싶다.    

세계일보(09. 04. 11) 중국 교육 근대화의 아버지

우리나라엔 도산 안창호와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이 있었다면 중국엔 차이위안페이(蔡元培·1868∼1940)가 있었다. 베이징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차이위안페이는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뜨거운 애국자, 5·4운동의 아버지 등 호칭도 다양하지만, ‘근대 중국의 초석을 마련한 선구적 교육자’가 가장 적합하다.

‘차이위안페이 평전-시대보다 먼저 현대중국을 준비한 위대한 지식혁명가’는 26세 때 과거에 급제해 한림원 관리로 나섰던 차이위안페이가 1894년 갑오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하자 낙향해 교육자로 변신하는 과정,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유학생활, 귀국 후 두 차례의 교육부 장관과 베이징대 총장으로서의 활동 등 그의 삶 전반을 조명한다.

쑨원의 신해혁명 이후 교육부 장관을 맡은 차이위안페이는 경전강독만 중시하는 구교육을 배척하고, 남녀의 교육평등과 근대적 학제를 과감히 도입하는 등 낡은 교육체계를 하나하나 뜯어고쳤다. 프랑스 유학 중에는 일하며 공부하자는 ‘근공검학운동’을 주도했다. 200여명의 중국 유학생이 참여한 이 운동에는 훗날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도 포함돼 있다. 마오쩌둥은 차이위안페이가 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했으며,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근공검학회의 후원으로 유럽 유학을 마칠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차이위안페이의 평가도 명문으로 전한다. “아! 역사가 나라를 위해 죽으니 호연지기가 흥기하누나. 당년에 북쪽으로 가서 손가락을 잘라 굳게 맹세하고 큰 뜻에 비장한 노래를 불렀다.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역수의 결의를 다지고 일격에 수치를 씻고 몸은 오히려 죽게 되었다….”(조정진 기자) 

09. 04. 19. 

 

P.S. 덧붙여, 중국철학자 펑유란(풍우란)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는 책, <현대 중국철학사>(이제이북스, 2006)도 참조해볼 만하다. "차이위안페이, 후스, 천두슈를 비롯해 장빙린, 쑨원, 마오쩌뚱, 슝스리에 이르기까지 현대 철학자들을 아우르는 철학사이면서, 서세동점의 시기 ‘동아시아에서의 근대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중국현대사"이기도 한 이 책에는 '신문화운동의 창시자이자 교육자이며 철학자-차이위안페이'란 장이 포함돼 있다. 찾아보니, 주저인 <중국철학사>(까치)를 간추린 <간명한 중국철학사>(형설출판사, 2007)도 출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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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신간 중에는 중국 관련서도 포함돼 있는데, 일본의 원로 중국학자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충격>(소명출판, 2009)이 그것이다. 찾아보니 <중국사상 명강의>(소나무, 2004), <중국의 공과 사>(신서원, 2004)가 이미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책은 중국에 대한 시각 교정을 요청하는 것으로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론 이상수의 <아큐를 위한 변명>(웅진지식하우스, 2009)에 연이어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필자는 공역자의 한 사람이다.   

세계일보(09. 04. 18) '떠오르는 중국'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수십년간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 앞에 이제 중국이 세계적인 중심국가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세계인은 없을 듯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들이 이러한 중국의 부상을 ‘중국위협론’ 등으로 제기하면서 중국을 견제하고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 또한 중국의 위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논리의 반영인 셈이다. 또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일본 역시 중국의 이러한 성장을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는 없는 듯하고, 한국 역시 인적 물적 교류의 측면에서 중국의 강력한 힘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서구를 비롯해 동아시아 역내에서 중국은 이제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 지 오래되었다. 이 충격은 받아들이는 이들의 입장에 따라 위협으로, 야만으로, 비민주로, 무질서와 오만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근래 중국의 성장을 자신과의 관계 위에서 또는 세계 문명의 차원에서 제대로 평가해보려는 시도는 우리의 경우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충격’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쓰인 책이다. 근대 이후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패권적 국가로서 자부해왔던 일본과 일본인들이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변화에 주목하지 못하고 차별과 멸시 등의 부정적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이 이 책의 기본적인 저술 배경이 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일본의 근대사에서 늘 ‘일본(선진)-중국(후진)’이란 구도의 한 축으로서 기능해 왔고,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의 중국 인식은 왜곡된 형태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왜곡된 인식은 여전히 현상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중국의 대두를 전혀 문제시하지 않거나 서구의 위협론에 편승하여 그들의 부정적 중국상(中國像)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미조구치는 바로 이러한 일본의 중국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근래 중국의 부상을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충격’은 중국의 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인식, 즉 낙후된 중국과 선진화된 일본이란 이중적 인식을 문제화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인 것이다. 

미조구치는 이미 학계에서 은퇴한 노학자임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초 수년간 진행했던 중국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 내에는 각 국가마다 그 나라의 역사적 문맥이 존재하고 있고, 이것을 통해 폐쇄적인 상호인식이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아울러 당시 동아시아에서 현안으로 대두했던 ‘역사인식 문제’에 대해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었다. 이러한 활동을 계기로 중국학 연구자로서 자신의 중국 연구를 바탕으로 우선 동아시아 각국의 왜곡된 인식들을 타파하는 노력을 동아시아 지식인 공동으로 수행하자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각 국가 간의 왜곡된 인식이 결국 서구 근대를 수용하면서 형성된 일국(一國)적 지식의 차별구조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그의 연구와 지식인 연대운동은 궁극적으로는 서구 근대의 극복을 통한 세계적인 보편 문명의 건설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조구치의 지향과 활동은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새로운 평화적인 질서를 수립하고 새로운 미래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과연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 것인가 등등. 중국을 대상화하는 미조구치의 작업을 참조체계로 삼아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생산적이고 심도 있는 토론과 연구가 진행되기를 희망한다.(서광덕 안양대 대만연구소 연구교수)  

09. 04. 19.  

P.S. 책에 대한 출판사 소개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다. "이 책은 일생 중국 연구에 몸담았던 일본의 노학자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가 그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근대적 지식 체계의 차별 구조를 타파하고 동시에 미래의 신지식에 대한 모색을 동아시아 지식인 연대 운동의 차원에서 시도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가 일생 중국근대사상사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왔던 것 또한 왜곡된 일본의 근대를 비판적으로 극복하여 새로운 일본사회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미조구치는 일본의 근대화를 ‘서구추수’라고 비판하면서 중국을 비판의 근거로 삼아 일본 근대의 유약함을 폭로해낸 중국문학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를 잇는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요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책들에 덧대어 읽어도 좋겠다는 것. 특히 <일본과 아시아>(소명출판, 2004)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책이다.   

부수적으론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그린비, 2007)에서 시작된 '아이아 총서'의 책들도 참고해볼 수 있겠다.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이 오키나와 문제를 다룬 도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그린비, 2009)이다. 

 

국내서로는 얼마전에 창비에서 나온 '근대의 갈림길' 시리즈가 유익해 보인다. <동아시아 근대이행의 세갈래>가 '총론'이고 중국편이 강진아의 <문명제국에서 국민국가로>이다. 최원식 교수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창비, 2009)도 <중국의 충격>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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