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 대학원신문에 번역과 관련하여 두 문학비평가의 '만담'이 실렸기에 옮겨놓는다(두 사람은 모두 지행네트워크의 멤버다). 첫머리에 '로쟈'란 이름도 나온다. 특별히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번역을 통한 지식의 민주화와 대중화'라는 문제의식에는 전폭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중앙대 대학원 신문(09. 04. 19) 번역을 통한 지식의 민주화와 대중화

학문의 기반이 되는 번역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한국의 근대학문은 번역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다보니 번역과 관련된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이번호에는 번역이 갖는 의의와 한국 번역물 출판의 문제점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오창은(이하 오) : 최근에 번역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어요. <뉴레프트리뷰>에 실린 랑시에르 논문의 번역을 두고 인터넷 논객 로쟈가 문제제기를 한 거죠. 그런데 진태원씨가 좋은 선례로 남을만한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오역을 인정하고, 로쟈에게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독자에게는 사과를 했어요. 뿐만 아니라 정오표를 만들어서 인터넷에 뿌린 거예요. 물론 3쇄부터는 바로 잡겠다는 약속을 했고요.  

이명원(이하 이)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얼마 전에 김현의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를 읽으면서 새삼 깨달았는데, 그 책에서 김현은 김윤식의 <소설의 이론>이라는 지라르 책의 번역을 문제 삼고 있더군요. 일단 김윤식 교수가 지라르의 프랑스어 저작이 아닌, 영문판 저작을 참고로 번역했고 게다가 발췌번역을 해놓은 터라 아주 심각한 오역이 발생했다는 비판이었어요. 그러나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김현의 바슐라르 번역에 대해 동료교수인 불문과의 곽광수 교수가 비판한 것입니다. 김현의 번역 역시 오역 투성이라고 말이지요.  

오 : 번역과 관련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죠.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나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 등이 오역 논의가 전개된 바 있고, 2004년에는 자크 데리다의 <불량배들>이, 2003년에는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이 논쟁에 휩싸였고요. 질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혹은 <천의 고원>도 번역과 관련된 대표적인 논쟁 사례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이런 논쟁이 개별적 사례로 갑론을박하는 형태였고, 번역 문화 전체의 논의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이 :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 상의 근본적인 문제―가령 번역불가능성의 문제―를 제외하고, 한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번역’작업의 힘든 과정이나 이를 연구업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역과 같이 아주 심각한 문제가 구조적으로 양산되는 겁니다. 대학원생시절에 아르바이트 삼아 번역을 한 적이 있는데, 이런 번역자 취급 방식이 사실 더 큰 문제에요. 제가 <악기사전>을 번역했다니까요. 글쎄. 

오 : 하하,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 책을 번역하면서 충분한 대우는 받으셨어요? 

이 : 천만에요. 역자도 딴 이름으로 나가고(아마 감수자였겠죠), 번역료 역시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책이 제대로 출간되었는지도 확인해 본 바가 없고요.  

오 : 그렇군요. 이명원 선생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문구의 <관촌수필>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군요. 1960~70년대 풍경인데, 조그만 쪽방에 앉은 두세 명의 번역자가 번역이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사기행위예요. 이미 번역되어 있는 책을 윤문해서는 새로 번역한 것인양 장사를 해 먹는 거죠. 한국의 번역문화는 이러한 풍토 속에서 출판시장으로부터 박대 받으며 성장해 온 것 같아요. 번역이 언어의 문제이고, 두 개의 언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심오한 지적 사유라는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어요. 출판사는 인부 부리듯이 번역자를 다루려고 하고요.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 : 언젠가 영미문학연구회에서 번역된 영미작품의 번역수준을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1950년대의 최초 번역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다 최초번역본을 토대로 베껴쓴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어요. 요는 출판학술계가 번역을 무슨 덤핑사업 취급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도대체 전문학자가 그 힘든 작업을 하면 뭐합니까. 소모되는 것은 시간뿐인데. 그런 점에서 보면 발터 벤야민 전집을 십수 년 동안 번역하고 있는 이화여대 최성만 교수는 그야말로 존경할 만한 분이죠. 

오 : 교수업적 평가나 임용에서도 번역은 전공논문, 단행본 저술, 학술활동과 창작 및 공연, 지적재산권 다음에 위치해 있는 실정이죠. 현실이 이렇다 보니 상업적 번역만 성행하고 의미 있는 번역이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외국의 경우, 전문학술서 및 고전에 대한 엄밀한 번역을 ‘박사학위’로 인정한다고 해요. 가야트리 스피박은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한 번역과 주석 및 해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어요. 한국에서도 미국ㆍ일본 등과 같이 주목할만한 학술적 번역을 높게 평가하는 학술문화적 풍토가 조성돼야 해요. 그래서 한국 학문의 자생성이 오히려 강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 이러한 사실과 함께 ‘번역어’의 성립에 깃든 근본적인 어려움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가령 부르디외의 ‘habitus’같은 개념은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습속’ 정도로 할 수도 있지만, 그랬을 때 이 개념의 생성적인 의미를 포함시킬 수가 없죠. 네그리와 하트의 ‘multitude’의 경우도 지금은 일반적으로 ‘다중’이라고 사용하고 있지만, 이 역시 확정적인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 오역의 문제에서 이런 개념의 근본적인 번역불가능성의 문제가 중요한 논점을 형성하는 게 아닐까요. 

오 : 한 연구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한국 번역의 문제는 ‘정확성과 가독성’에만 치우쳐있다는 것이라며 번역의 창조성을 이야기하더라고요. 상투적인 번역을 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번역어를 개발한다든지 닫힌 언어가 아닌 열린 언어를 통해 의미를 해방시키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요.   

이 : 사실 번역자들은 새로운 표현을 창안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언어체계 바깥의 언어를 체계 안의 언어로 치환시키는 매우 고달픈 작업이지요. 그러면서도 원저작의 언어에 깃들어 있는 의미론적ㆍ뉘앙스적 퇴적물을 옮겨오는 매우 힘든 작업입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저작을 번역해도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한국어 번역어들이 다 상이합니다. 가령 들뢰즈 번역을 둘러싼 차이들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죠. 그러니까 어떻게 표준번역어를 설정하는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 : 그게 바로 근대학문 체계의 핵심인 ‘개념사’와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한국적 개념의 창출이나, 한국 학문의 토대라는 것이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번역’이라는 화두를 통해서도 사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한국 학계는 전반적으로 원전ㆍ원어 중심주의가 무소불위의 권능을 행사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엄연히 번역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 인용이 권장되고 있고 심지어 몇몇 교수ㆍ연구자들은 원서를 번역해 놓고도 학문적 공유를 위해 출간하는 것이 아니라, 독점적으로 소유한 채 자신의 학문적 권위를 시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이죠. 번역의 가치보다 원전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사회는 후진 학문사회예요. 한국 학문의 종속적 풍토가 ‘번역의 가치 재설정’을 통해 극복되지 않는 한 관성화된 수입 학문의 유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 번역작업은 지식의 민주화와 대중화의 토대입니다. 종교혁명 당시 자국어 성경번역도 그런 성격을 갖고 있었죠. 학자들 역시 자신의 번역행위가 학문적 축적의 중요한 매개고리역할을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된다고 봅니다. 지식의 독점이 아니라, 그것을 접근하기 힘든 대중들에게 개방하는 일에 번역의 중심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오 :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번역에 대한 연구자들의 검증시스템도 중요한 것 같아요. 앞에서 이명원 선생께서 언급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가 그 좋은 예인 것 같아요. 영미문학연구회에서 이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는데, 이러한 학계의 검증작업이 우리 번역 문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이 : ‘번역학’이나 ‘번역론’과 같은 학문적 검토도 필요합니다. 최근에 몇몇 대학에 ‘번역학’ 전공이 개설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동시에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전문번역자를 존중하는 사회적 상식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구요. 또 우리가 끝없이 외국저작의 번역에 의존하는 반면, 우리 저작의 해외번역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는 한계에 대한 자각도 드는군요. 

오 :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지요. 

이 : 그래야겠군요. 사실 요즘 같은 때는 서로의 한국어도 번역이 안 되는 듯한 소통불능의 시대라는 생각도 듭니다. 고생하셨어요. 

09. 04. 25.   

P.S. 대담 중에 "가야트리 스피박은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한 번역과 주석 및 해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어요"란 말이 나오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내가 알기에 스피박은 예이츠 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이다(폴 드만이 지도교수였다). <그라마톨로지>로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은 건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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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재택하면서 원고들과 씨름하다 보니 시간 감각도 둔해지는 듯하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도 아침 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을 정도다. 잠시 시간을 내 북리뷰들을 훑어보았는데, 이미 주중에 소개한 책들 외에 한권만 고르라고 하면 볼프강 쉬벨부시(쉬벨부쉬, 시벨부슈)의 <뉴딜, 세 편의 드라마>(지식의풍경, 2009)이다. '문화사의 거장'이라는 저자가 이번에 다룬 주제는 부제대로 '미국의 뉴딜.무솔리니의 파시즘.독일의 나치즘'을 비교한 것이다. 관련리뷰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4. 25) 루스벨트-히틀러-무솔리니…당신의 상식을 의심하라

“루스벨트와 무솔리니는 피를 나눈 형제다.” 누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상식’을 의심할 것이다. “2차대전을 통해 자유주의를 지킨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독재의 대표인 파시스트 무솔리니는 이념의 대극점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딜, 세 편의 드라마>에서 이 말이 루스벨트 스스로의 입에서 나왔음을 확인할 때, 우리는 이제 ‘우리의 상식’을 의심해야 한다.

<철도여행의 역사>나 <기호품의 역사> 등을 통해 문화사의 한 단면에 돋보기를 들이대던 볼프강 시벨부슈가 정치학과 역사학의 영역에서 다시 자신의 장기를 드러낸 <뉴딜…>은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책이다. 이 독일 출신 지은이가 1930년대 문헌들을 찾아 루스벨트의 뉴딜과 이탈리아 무솔리니, 그리고 독일 히틀러가 지닌 유사점을 설명해갈 때, 우리는 ‘우리의 상식’이 조롱받는 불쾌한 기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들 체제가 대공황이라는 ‘위기 속에서’, 그 ‘위기를 이용해’ 정권을 잡았고 ‘위기에 맞선’ 거대한 기념비적 사업들을 단행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고 밝힌다. 뉴딜의 상징인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VA) 댐 건설은 독일의 아우토반, 이탈리아의 폰티네 습지 개간과 ‘상징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외에도 리더십, 선전과 언론통제,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세 체제가 지닌 유사함을 확인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 나라들에서 높은 상징성을 지닌 각종 캠페인이 강압적으로 전개됐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루스벨트의 블루 이글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그가 집권한 해인 1933년 7월 대공황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됐다. 이 캠페인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블루 이글 배지를 옷에 달고, 가게나 공장들은 포스터를 걸도록 했다. 이 상징물이 없을 경우 ‘우리의 적’이라고 공포됐다. 당시 <데일리 헤럴드>의 한 특파원은 “독일의 스와스티카(나치 갈고리 십자가)보다 블루 이글이 더 많았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공통점은 이 체제들이 모두 이전의 ‘자유주의 자본주의체제’가 주지 못했던 것을 국민들에게 준 것이었다. 지은이는 이 체제들이 모두 ‘시장’이 아닌 ‘국민’을 중심 테제로 놓았으며,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무시받지 않고 동등한 존재로서 취급받는다”는 느낌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지은이는 이 점이 이 세 체제가 공히 대공황 이후에 폭발적인 대중적 지지를 받은 이유라고 해석한다. 

물론 지은이는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와 히틀러, 무솔리니는 매우 다른 정치체제를 구축했다는 점도 역시 강조한다. 특히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정치적 자유를 폭력으로 억압했으나, 루스벨트의 미국은 그런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1930년대 이들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상식’이 왜 지금은 ‘비상식’이 된 걸까? 지은이는 이를 이탈리아 및 독일과 2차대전을 치른 미국이 ‘유사성에 대한 기억’을 ‘억압’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지은이는 실제로 2차대전 이후에는 이 체제들의 유사성을 다룬 글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의 상식’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걸까? 현재 남북관계를 다루는 정부와 보수 언론의 비이성적인 ‘북한 때리기’를 보면, ‘남북의 평화공존’이라는 ‘우리의 상식’이 어느 틈에 ‘비상식’이 돼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밀려온다.(김보근 기자) 

09. 04. 25.  

P.S. 시벨부쉬의 또다른 책으로 소개됐으면 싶은 건 <패배의 문화>(2004)다. 400여 쪽 분량. 그리고 이번주 나온 책으로 뉴딜, 세 편의 드라마> 외에 한권만 더 고르라면, 마이클 화이트의 <갈릴레오>(사이언스북스, 2009)가 단연 탐나는 책이다(리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51587.html 참조).   

그리고 3순위는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산책>(살림, 2009).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가 쓴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라 할 만한 책이라고(관련리뷰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51590.html 참조). 소개에 따르면, "1994년에 펴낸 이 책의 원제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다. 한국판이 부제로 쓴 것처럼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를 다룬 책이다. 일종의 교양 역사서라 할 이 책이 가지가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밑실은 영어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 영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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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stant 2009-04-25 23:34   좋아요 0 | URL
가끔 2차대전과 관련된 글이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얼핏 느낀 점인데,
(특히 헐리웃 전쟁 영화를 보면 극명하게 나타나지만)
2차대전이 '상식'을 넘어 현대의 또다른 '신화'가 된것 같아요.
마치 극악무도한 무리인 추축국을 상대로 숭고한 자유의 깃발 아래 뭉친
정의로운 연합국이란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저 뿐인가요?

연합국들도 별반 다르지 않잖아요...
(그렇다고 추축국들의 공분할 만한 범죄를 정당화하는 건 아니구요.)
어차피 다 제국주의적이고 반민중적인 국가들일 뿐...

미국이야 2차대전 때 유럽의 상황을 관망하며 군수산업으로 대공황을 극복했고,
독일이 상선들을 격침시키고,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에야 뒤늦게 참전했으면서 전후에 자유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영국은 전쟁 전 사회주의 혁명의 전파를 막기 위해 나치의 팽창을 묵인했고,
소련은 나치와 비밀리에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면서 이후엔 '대조국전쟁'이란
명목으로 신화화했잖아요...
중국의 국민당 정부도 전쟁 전엔 추축국들에 우호적이었구요.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를 건국 신화화하고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는데 악용하구요.)

그러면서 거기에 정의의 이미지를 덧칠하는게 정말 어불성설이라 느껴져요.

그러고 보면 우리의 '상식'이라는 것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아요.


로쟈 2009-04-26 10:37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에서도 저는 이 책이 '뉴딜 신봉자'들에게 좀 읽혔으면 싶어요. '녹색 뉴딜'인가 뭔가도 있잖아요...

노이에자이트 2009-04-26 21:26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공황기를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라고 규정하면서 자본주의가 파시즘과 뉴딜을 통해 이를 면해보려고 했다고 주장하던데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하군요.

로쟈 2009-04-26 20:10   좋아요 0 | URL
소위 '근대의 쌍생아'론인가요. 수잔 벅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도 이와 관련하여 필독서인데, 부실한 번역이 아쉽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26 21:25   좋아요 0 | URL
오...벅모스의 책도 궁금하군요.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더러운 포식자들의 사회

요즘은 TV 뉴스를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종종 라디오에서 시사뉴스를 듣곤 한다. 오늘 방송된 CBS 시사자키에서 경찰의 장자연 리스트 수사 중간발표에 대한 의견 인터뷰를 옮겨놓는다.  

CBS 시사자키(09. 04. 24) “故 장자연 수사결과, 경찰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 진행 : 변상욱 대기자(CBS 라디오 '시사자키 변상욱입니다')
▷ 출연 : 민주당 김상희 의원


경찰이 오늘 장자연 리스트 수사와 관련해서 9명을 형사입건했습니다. 그러나 장 씨의 유족들이 성매매 혐의로 고소했고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조선일보의 임원은 여기서 빠졌습니다. KBS 기자를 포함해서 장자연 리스트를 보도한 언론인들은 모두 불기소 또는 내사중지 처분으로 수사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언론사에도 성매매 예방교육을 철저하게 시켜야겠다고 발언했던 민주당 김상희 의원으로부터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경찰의 수사결과를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십니까?

▷ 김상희 의원> 예상됐던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40일 동안 41명을 투입해서 조사한다고 했는데 그동안 제대로 된 수사 브리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경찰이 수사를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경찰 수사는 오히려 국민들의 의혹이 증폭되고 경찰에 대한 불신만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장자연 씨 죽음을 경제적 죽음에 우울증까지 겹쳐서 복합적으로 자살에 이른 것이라고 판단했거든요. 이것은 장자연 씨를 두 번 죽이는 처사입니다. 이런 수사결과를 내놓는 경찰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이런 커다란 권력형 비리, 뿌리가 깊었던 관행들을 수술해내야 할 작업이라면 처음부터 분당 경찰서에 맡기기엔 역부족이었네요.

▷ 김상희 의원>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 불거진 두 개의 성상납 비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청와대 행정관 성상납 비리이고요. 장자연 리스트라고 하는 소위 연예인 성 착취, 성 상납 비리가 있습니다. 이 두 사안이 처리되는 걸 보면서 지금 경찰이 이런 걸 수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검찰로 넘어가면 검찰에서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국민들은 다 의혹을 갖고 있습니다. 박연차 리스트에서 보면 죽어 있는 권력에 대해선 아주 철저한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안 해도 될 것까지 흘려가면서 하고 있는데, 소위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는 이렇게 공권력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리고 언론 권력이라는 게 얼마나 막강한지 이번에 여실히 국민들이 깨닫게 됐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언론인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니까 물론 언론인들이 제대로 알리바이를 증명했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언론도 확실히 권력에 서 있다는 걸 느끼긴 느끼겠습니다. 김 의원님이 보시기엔 언론인 봐주기 같습니까?

▷ 김상희 의원> 언론인들의 수사 하나하나에 대해선 어떻게 수사가 됐는지는 저도 자세하게 모르기 때문에 모든 언론인을 다 봐줬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하기엔 지금으로선 무리가 있는 게 아닌가 싶고요. 그렇지만 지금 가장 국민들의 의혹이 컸던 부분은 성상납 받은 사람, 누가 성상납을 받았는가에 대한 부분 아닙니까. 성상납을 받았다고 하는 유력 언론사 사주의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수사를 했어야 했는데, 제가 경찰 일문일답을 보니까 그동안 수사를 했는진 모르지만, 어제 경찰이 만나서 조사한 걸로 대답을 했는데요. 대답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경찰에 물어보니까 '구체적인 사안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고, 기자들이 알고서 '어제 하지 않았냐, 그런데 어제 하고 나서 하루 만에 불기소 방침을 세우는 건 면죄부 주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니까 '그것에 대해! 서는 만나기 전에 이미 수사를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수사를 언제 어디서 했냐'고 물어보니까 '본인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정말 이런 대답을 하는 경찰에 대해서 연민에 가까운 감정을 느낍니다. 경찰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국민들이 그렇게 의혹을 갖고 있는데 수사 못한 것 아닙니까.

▶ 진행/변상욱 대기자> 그 사람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 했다는 건?

▷ 김상희 의원> 밝히질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선 밝힐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결국 그 말은 원하는 만큼만 했다는 거니까 그 사람이 5분만 하자고 하면 5분만 하고 나왔다는 뜻도 되는 겁니까?

▷ 김상희 의원> 그렇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선 확인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정 중에 보니까 임원의 아들이 술자리에 있었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도 수사가 제대로 안 됐습니다. 그런데 왜 중간수사를 하고 이 부분을 불기소 내사중지를 하는 건지 국민들이 이해하겠습니까. 장자연 씨가 오죽하면, 연예인의 꿈을 키웠던 이 젊은 여성 연예인이 오죽하면 죽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경찰이 이런 식으로 수사를 종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장자연 씨가 그 많은 것들을 기억해 쓰면서 언론인에 관한 건 다 잘못 썼다고 받아들이기도 그렇고, 아무튼 경찰로서는 이래저래 난감하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앞이 안 보이니까 일단 일본에 있는 사람이 안 잡혀서 모르겠다고 하고 중단시켜놓고 차후 눈치를 더 봐야겠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군요. 장자연 씨에 대한 사건이 이번 발표로 어떻게든 큰 틀에서 마무리된다면 우리 사회에 어떤 파장이 남을 거라고 보십니까?

▷ 김상희 의원> 저는 굉장히 우리 사회가 위험한 사회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위험한 사회라는 건 신뢰가 없는 사회입니다. 주요 권력기관에 대한 신뢰, 기대가 다 무너진 사회야말로 위험한 사회 아닙니까. 그것이 가장 우려할 사안이고, 누구도 자기가 억울한 걸 경찰이나 검찰에 호소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09. 04. 24.   

 

P.S. 알다시피 "<조선일보>는 지난 4월10일 이종걸 민주당 의원과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그리고 인터넷 매체인 <데일리 서프라이즈>의 신상철 대표이사를 고소했다. 이종걸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정희 의원은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서 <조선일보>의 특정 임원이 이른바 ‘고 장자연씨 사건’과 관련된 것처럼 공표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취지였다." 이종걸, 이정희, 두 의원의 인터뷰 기사도 챙겨둔다(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4802.html). 더불어, '미디어오늘'에 실린 박경신 교수의 기고문도 옮겨놓는다.    

미디어오늘(09. 04. 24) 장자연리스트 실명보도는 언론사의 의무

미디어오늘 한상혁 논설위원은 지난 22일자 <바심마당-장자연리스트와 실명보도>를 통해 장자연 리스트의 실명보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공인의 사생활과 관련한 내용이고 그 사실관계의 확인이 매우 어려운 반면 보도 결과 그들이 입을 명예의 손상이 심각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며 “언론의 윤리의식”을 칭찬하였다.

언론사들은 충분히 장자연 리스트 실명공개를 할 수 있었다. 현행법상 ‘오로지 공익을 위한’ 진실 공개는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면책된다. 헌법재판소는 면책조건으로서의 ‘공익’은 폭넓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판시하였고 대법원은 심지어 언론보도는 공익성이 추정된다고까지 판시한 바 있다. ‘국내 유력 언론사 대표가 자살한 연예인으로부터 성 상납을 받았는가’는 어떤 법적 해석으로도 공적 사안이며 이에 대한 진실의 공개는 당연히 면책된다. ‘실제 성상납을 받았는가’는 ‘사실관계의 확인’이 어렵겠지만 ‘그러한 문건이 있다’는 보도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며 이 진실을 보도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합법적이다.

혹자는 ‘A가 그러는데 XYZ라고 하더라’ 식의 소위 전재보도도 XYZ라는 명제가 사실이라는 근거가 없다면 허위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며 신중론을 편다. 검찰의 현재까지 기소관행상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XYZ라는 명제 자체가 공적 사안이고 ‘A에 의한 제보’ 자체도 공적 사안이며 제보내용이 틀렸을 가능성과 함께 균형있게 전달된다면 위와 같은 보도는 면책이 된다. 

성상납이 해당 공인의 ‘공적 사안’이 아니라 ’사생활’이라서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생활의 자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단순논리로 따지자면 모든 범죄는 본질적으로 모두 ‘사생활’이다. 도둑은 들키지 않으려고 어둠을 타고 다니고 뇌물은 들키지 않으려고 밀실에서 수뢰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에 대한 고발이 사생활침해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범죄행위나 범죄의심행위에 대해서는 ‘사생활’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원리가 확립되어 있다. 바로 이 원리 때문에 범죄발생의 개연성이 있는 공간이나 물건에 대해서는 국가는 영장을 받아 압수수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익성의 면책을 받아내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실명보도를 하지 않는 언론사들에 대해서는 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호소하고 싶다. 암흑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권력비리에 대한 고발은 확신을 주지 않는 충분하지 못한 단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노회찬 의원이 안기부의 불법도청파일 외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떡값검사’ 실명을 공개한 것은 진실에 대한 실체적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실규명을 해달라는 사회에 대한 요청이었다.

노회찬, 장자연, 이종걸 모두 죽음 또는 형사처벌을 무릅쓰고 공적 비리에 대한 단서를 공개했다. 사람들이 공적 사안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은 언론의 최소한의 의무이다. 이들 내부고발자들의 단말마 비명과도 같은 아니 유언과도 같은 제보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못한다면 언론은 존재의 가치가 없다.

‘이미 누구인지 다 아므로 실명의 활자화는 실효성이 없고 관음증만을 충족시킬 뿐이다’라는 반문은 무책임하다. 몇몇 네티즌들이 형사처벌의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저기 실명을 올렸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알게되어 ‘○○일보 ○사장’라고 그나마 쓰게 된 것이다. 타인들의 용기있는 고발이나 받아먹겠다는 것이 언론의 자세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실효성’이 아니라 원칙과 상징의 문제이다.

명백히 공익적인 진실을 타인에게 불리하다고 밝히지 못하는 국가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과연 ‘명예’와 ‘위선’을 구분할 수 있을까? 언론은 익명보도에 대해 독자들에게 미안해할 일이지 ‘윤리의식’을 운운할 일이 아니다.(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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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4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5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9-04-24 23:51   좋아요 0 | URL
결론 나기 전에 이미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죠. 신기하죠? 웃어야 하나...

로쟈 2009-04-25 16:22   좋아요 0 | URL
쓴웃음이죠..

비연 2009-04-25 13:25   좋아요 0 | URL
우리를 바보로 아나 싶습니다...;;;

로쟈 2009-04-25 16:22   좋아요 0 | URL
'졸'로 보는 거죠...
 

점심을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신 다음에, 곧 써야 할 원고는 잠시 미뤄두고(생각만 해도 기운이 빠지는군), 주초에 읽은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21의 편집장 칼럼인데, 안 그래도 오늘 장자연 수사 중간결과가 발표된 걸 보고 한국 권력집단에 대한 염증을 한번 더 느끼면서 필자의 '조롱'을 거들고 싶어서다. 법대생은 아니었지만 나도 예전엔 “사법고시는 왜 안 봤어?” 류의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다(대학원 동료와 후배들 가운데는 변호사가 된 이들도 몇 된다). 그땐 법전의 (한국어) 문장들이 맘에 안든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지금은 칼럼을 참조하여 훨씬 더 많은 이유를 댈 수 있을 듯하다.  

한겨레21(09. 04. 24) P의 항변  

기자 P는 ‘펜 생활’ 15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종종 질문을 받는다. “사법고시는 왜 안 봤어?” 그러면 P는 대답한다. P가 법대를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법과 현실의 법이 너무나 달랐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은 현실에서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헌법 제1조부터 거짓말이었으니, 법에 실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P의 첫 번째 대답이다. 그러나 어디서 들어본 듯한 말이다. 왠지 도식적이다. 그렇게 물으면, P는 또 대답한다.

졸업 뒤에도 기회는 있었다. 90년대, 사법시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고시촌으로 스며드는 이들이 급증했다. 그러나 당시 법조담당 기자였던 P는 법에 대한 실망을 넘어 법조인에 대한 실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반말을 지껄여대는 판사들, 시국사건 재판에선 온순한 양이 되어 검찰의 논리를 답습하는 판사들, 늘상 재판 기록에만 파묻혀 ‘저러고도 창조적인 사고가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판사들…. 피의자를 쥐어패는 검사들, 그러면서 상관에게는 그렇게 깍듯할 수 없는 검사들, 비리의 몸통엔 약하고 깃털엔 강한 검사들, 사법 정의보다 주제넘은 ‘나라 걱정’에 여념 없는 검사들….  

영화에서 본 멋진 변론 대신 주눅 든 자세로 재판장에게 선처만 호소하는 변호사들, 사건을 더 수임하느라 브로커를 동원하는 변호사들, 전관예우로 돈을 긁어모으면서도 한 점 부끄럼 없는 변호사들…. 나름대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P로서는 법조계의 어떤 직업에도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대답이다. 이해는 간다. 그러나 의구심이 말끔히 가시지는 않는다. 지금이야 설마 그런 판사·검사·변호사들이 있으려고…. 정말 후회한 적 없니? 그러면 P는 대답한다.  

가끔은 후회한다고. 촛불집회와 관련해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에 대한 위헌제청을 하는 판사들을 보며(기자로서 야간 집회 금지를 비판하는 기사를 아무리 써도 이 정도의 반향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국방부의 불온도서 지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는 군법무관들을 보며(이 사실을 처음 보도한 기자는 특종의 영예를 안았다), 우리 사회의 온갖 궂은일에 손길을 뻗치는 공익 변호사들을 보며(언론 보도는 상당 부분 이들에게 기댄다), 후회를 한 게 사실이다. 대개 ‘행위자’가 아니라 ‘전달자’여야 하는 운명이 성에 안 찼다는 얘기다.

그러나 P는 곧 항변한다. 법조계 대부분은 여전하지 않으냐고. 최근의 박연차 사건 수사만 보더라도 검찰은 죽은 권력에 강하고 살아 있는 권력에 비실대지 않냐고.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 사건만 보더라도 법원은 여전히 정치적이지 않으냐고. 권력에 굴종하고 그러면서 권력을 지향하는 게 법조인의 DNA같다고. 권력으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지켜주는 게 본래 법률가의 몫이건만, 이 정부 들어 검찰·법원에 부쩍 과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바람에 그런 기대는 지레 접었다고 P는 정색하며 말한다.  

무엇보다 신영철 대법관 사례가 P의 후회를 가로막는 결정적 계기가 된 듯하다. 대법관이란 사람이 저 모양이라면, 누가 뭐래도 법조계의 최정점이자 법률가적 자존심의 화신이 돼야 할 대법관이 저 모양이라면, 이 땅의 모든 법조인이 법조인임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게 P의 생각이다. 그렇게 부끄러워해야 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게 다행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아 참, 지난해 촛불집회 때 그렇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쳤건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민주공화국이 아닌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인다. 첫 답변으로의 회귀. 아무튼 지금이 행복한 P는 이 순간에도 법조계의 권력 지향자 또는 권력 굴종자들을 한껏 조롱하는 칼럼을 쓰는 중이다. 그러니 더 이상 그에게 “사법고시는 왜 안 봤어?” 같은 질문은 하지 마시라.(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09. 04. 24. 

P.S. 신영철 대법관의 '이메일 재판 관여'에 관한 시사IN의 몇주 전 특집기사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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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4-24 19:29   좋아요 0 | URL
"법전의 한국어 문장들이 맘에 안 들어서" 사법고시를 안 봤다는 대답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ㅎㅎㅎ 멋진 대답이군요. ^^

로쟈 2009-04-24 19:39   좋아요 0 | URL
"양친, 친양자, 친생의 부 또는 모나 검사는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가정법원에 친양자의 피양을 청구할 수 있다."는 식의 문장이 혐오스러운 것이죠. 일본 법전을 그대로 베껴오다 보니 아직도 난해한 한자어에 어색한 구문 투성이입니다...

비로그인 2009-04-25 07:02   좋아요 0 | URL
법전이 인용해주신 이 한 문장과 모두 대동소이하다면 이것을 가지고 공부하는 법학도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 답답할 것 같아요. 그런 대답을 하신 것도 무리가 아니었군요.

노이에자이트 2009-04-24 23:24   좋아요 0 | URL
85년 신동아를 보면 신영철 사건과 비슷한 일이 그때에도 있었어요.그때 지적된 문제점은 독립적인 판단을 해야 할 판사들조차 위계질서에 바탕한 인사권 때문에 윗사람 눈치를 본다고 했는데....우리나라는 뭐든지 위아래 따지는 버릇이 있어서 정말 문제입니다.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게 몸에 완전히 배어 있어가지구요.인간관계에서 위계질서 외에는 없다고 여기니 문제지요.법조계도 마찬가지구요.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서평이 눈에 띄기에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필자인 이택광 교수의 기본적인 독후감은 저자의 '정신 사나운 자화자찬'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는 것인 듯하다. 내가 알기에 이교수나 역자는 같은 대학에서 같은 지도교수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지젝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뚜렷한 '시차'를 보여주는 듯하다.  

교수신문(09. 04. 20) 자칭 ‘훌륭한 헤겔주의자’의 정신 사나운 자화자찬 

애드리안 존스턴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책을 출간한 그 해 미국의 캘빈 칼리지에서 행한 강연에서 지젝은 자신의 꿈은 “헤겔의 루터가 되는 것”이라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발언은 진심이면서 동시에 은유적이다. 여기서 루터는 “왜 무신론자만이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예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에 바로 믿음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인데, 따라서 『시차적 관점』은 헤겔에 대한 지젝의 입장을 빼놓고 접근할 수가 없는 책이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헤겔적 혁신을 시도한다. 그 대상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어떻게 되살려내겠다는 것일까. 바로 여기서 지젝이 내뱉었다는 저 고백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하는 자만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믿을 수 있다. 지젝의 입장에서 보기에,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운동의 패배뿐만 아니라 이론 고유의 차원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퇴조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헤겔의 루터’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학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떠맡고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젝이 말하는 ‘시차적 관점’은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티크』에서 빌려 온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고진이 다분히 칸트에 의거해서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과 반대로 지젝은 헤겔에 근거해서 이 개념을 확장시키려고 한다. 물론 지젝의 헤겔은 그 옛날의 헤겔이라기보다 라캉의 혁신을 거친 헤겔이다. 이쯤 읽으면, 지젝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원’하려는 그 방식에 궁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본뜻’을 망친 스탈린주의로부터 이 ‘위대한 이론’을 분리시키는 것이 지당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젝은 엉뚱한 말을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스탈린주의의 결합 그 자체가 바로 요점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경천동지할 일이지만, 지젝은 실천에 무기력한 부정변증법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젝의 말을 요약하면, 그의 라캉-헤겔주의적 철학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은 동일한 것이고,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뼈”라는 최상위와 최하위를 오가는 헤겔적 무한판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적 무한판단은 둘이 아니라 하나(또는 전체) 자체에 내재한 수많은 간극을 모두 살피는 사유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적 기능 상실은 양극단의 투쟁이라는 ‘기본 법칙’이 “대극의 양극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극성’은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의 지점으로서,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이율배반’과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임슨 역시 『시간의 씨앗』에서 지젝과 비슷하게 이율배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성으로 인한 변증법의 무력화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지젝은 제임슨과 달리, 이런 이율배반이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하는 기반”도 존재하지 않아서 결코 고차원적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할 수 없는 대립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변증법의 장애라기보다 “그 전복적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를 제시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간극은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인 대립구조라기보다, 하나의 내부에 상존하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젝은 이런 양극성, 또는 이율배반적 대립을 “하나 자체에 내재적인 긴장, 간극, 불일치로 대체”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이런 이율배반은 서로 다른 두 극단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는 ‘시차’에 불과한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런 시차는 다양한 현대이론들에서 나타난다. 양자물리학에서 빛은 파동이자 입자라는 것, 신경생물학에서 신경의 반응을 뇌의 회백질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 존재론에서 존재론적 지평을 그 기원으로 환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지평으로부터 존재적 영역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것, 라캉의 실재계에서 나타나는 실증적이지 않고 실체적인 일관성을 결여한 다양한 관점의 결락들, 그리고 프로이트가 말하는 욕망과 충동 사이에 있는 간극에서 시차를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지젝이 스스로 밝히고 있긴 하지만, 확실히 이런 시차의 개념은 데리다의 ‘차이’(diff´erance)를 상기시킨다. 시차는 하나와 그 자체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미시 차이이기도 한 것이다. 지젝은 시차와 데리다의 차이 사이에 드리워져 있는 연관성에 대한 적절한 이론화를 통해 데리다의 메시아적 정치학을 세속화한 레비나스적 ‘도래할 민주주의론자들’로부터 구해내려고 한다. 지젝은 데리다의 초기 철학에 내재한 유물론적 속성으로 후기 철학의 정치학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지젝의 의도가 얼마나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실 지젝이 여러 경로를 통해 이 책을 자신의 주저로 손색없는 책이라고 밝히면서 그의 철학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과연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역시나 그렇듯이, 이 책은 너무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을 분석하다가, 갑자기 정신분석학을 논하고, 여기에 신경과학, 문학, 영화, 정치에 관한 언설들이 마구 뒤섞인다. 지젝을 읽어온 독자라면 정신 사나운 지젝 특유의 스타일이 그렇게 낯설지 않겠지만, 여하튼 멋모르고 책을 집어든 독자에게 좌절감부터 덥석 안기기에 충분하다. 이런 다채로운 스타일을 두고 지젝은 훌륭한 헤겔주의자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데, 저자를 통해 개념이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내부로부터 개념의 형식이 솟아나게 만드는 것이라는 지론이 곁들여진다. 이를 보면, 서문에 그가 왜 ‘개념들의 확장’이라는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반헤겔주의자 들뢰즈와 정통 헤겔주의자 지젝은 말 그대로 ‘시차’인 것이다. 기발한 자화자찬에 절로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다.(이택광 경희대·영문학) 

09. 0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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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2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4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9-04-2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판의 논리를 모르겠네요. 그냥 비아냥인가요?

로쟈 2009-04-24 09:13   좋아요 0 | URL
'그래 너 잘났다' 정도이겠죠. 그래도 나은 편인 게, 읽지도 않고 욕하거나 폄하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