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적합한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719134035&section=04). 번역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입에 오르내린 오래전 책인데, 마루야마 마사오의 대담집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2000)를 다루면서 번역과 근대의 문제를 곱씹어보고 있다. 필자는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번역에 참여하고 있다. 

프레시안(09. 07. 19) 낯섦의 체험…한국과 일본은 왜 운명이 갈렸을까?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가 공동으로 쓴 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병상에 있던 마루야마를 가토가 찾아갔고, 그 둘이 번역의 문제를 놓고 대화한 내용을 가토가 정리해서 나온 책이다. 이 대화가 일본근대사상대계(1988~1992, 이와나미쇼텐 펴냄) 중 <번역의 사상>(1991)을 편집하던 과정에 있었다고 하니 1990년께쯤 될 것 같았다(번역서에는 대화의 시기가 나와 있지 않았다).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것을 글로 정리한 가토가 1919년생이라니 당시 70살이 다 되었을 듯하다. 나이도 나이지만 약력을 보니 <일본문학사서설>이라는 대작을 남기기도 한 유명한 전방위 비평가이자 작가란다. 그런 사람이 일일이 찾아가서 질문을 하고 그 대화의 내용을 글로 정리했던 상대방 마루야마는 어떤 사람일까?

평소 일본 문화에 밝은 편이 못 되는 나는 그의 약력을 보고서야 내 처의 장서 중에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식한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일본 정치학계뿐만 아니라 지성계의 흐름을 주도했다는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가(그는 1996년에 <번역과 일본의 근대>의 출간을 못보고 타계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논문 실적보다도 못하게 쳐주는 번역이라는 주제에 자신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들였을까? 몇 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런 궁금증들을 품었고, 책장을 덮으면서 어렴풋한 짐작이 또렷한 확신으로 바뀌었음을 알았다. 적어도 일본의 근대는 번역이 곧 학문이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메이지 시대와 일본의 번역주의 

이 책에서 문제 삼는 일본 역사의 시기는 주로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이다. 지은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정책을 번역주의라고 요약한다. 이 번역주의의 성립과 내용, 그 공과를 따져보는 것이 두 노학자들이 무릎을 맞대고 나눈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번역주의는 19세기 초에 일본 해안에 서양의 배들이 출몰하지만 서양에 대한 정보는 없던 상황에서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의 발발과 중국의 패전으로 충격을 받은 일본이 서양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립했다고 한다.

세계의 중심인 중화의 몰락과 이에 연이어지는 서양의 쇄도, 아시아의 몰락, 그리고 그에 따른 서양에 대한 추종. 여기까지는 많이 듣던 이야긴데, 다른 아시아와 일본이 사정이 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이들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공교롭게도 서양이 일본을 침략할 시점에서 서양 쪽에 보불전쟁, 남북전쟁, 크림전쟁 등이 벌어져 아시아 침략이 지체되었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대응이 굉장히 재빨랐다는 점이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하고서도 여전히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대응이 느렸으나 일본은 몇 차례 서양과 벌인 전투와 중국의 패전을 통해 초반의 쇄국 정책(존왕양이론)에서 재빨리 개국으로 돌아섰고, 그 시기가 서양의 여러 전쟁 시기와 맞물려 운 좋게 근대화를 위한 시간도 확보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위기도 벗어났다는 말이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막부 시절부터 각 번(藩)에서 앞다퉈 유학생을 서양으로 보내 서양의 정보를 흡수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런 일본의 발 빠른 대응에는 전사인 무사가 지배 계급이었던 점이 중요하게 작동했다고 본다. 전쟁터에서 전쟁을 수행하듯이 일본의 지배 계급은 서양과 관련해서 벌어지는 당시의 상황을 대부분 군사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군사작전 하듯이 서구화를 진행시켰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메이지 시대의 세계 정세와 일본 정부의 계급 구조로만 번역주의가 내 놓은 성과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한다. 짧은 시간 내에 상당한 수준의 번역의 질과 양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이전 시대인 에도 시대(1603~1867)의 학문적 성숙이 번역과 맞물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평가다.

예컨대 에도 시대의 오규 소라이(1666~1728) 같은 학자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해서 일본의 학문적 근간을 이루던 중국의 유학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취했다고 한다. 중국식 발음을 가급적 원음대로 읽고 그것을 체화시키려 했던 조선과는 달리 음으로도 읽고 뜻으로도 읽는 일본식 한문 독법을 사용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현대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도 했던 것으로 들었는데, 그 원조가 오규 소라이였던 모양이다. 여기서 '낯섦'의 체험으로서 번역의 문제가 발생한다.

추상어를 수입하는 번역
나도 서양 고전 번역을 업으로 알고 공부를 하는 사람이지만 번역은, 특히 고전 번역은 번역을 하는 매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그 유명한 '이데아'가 있다. 이 말은 보통 '형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문제는 이 '이데아'가 플라톤 시대 일반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일반 용어이기도 했다는 데 있다. 일반 용어로 '이데아'는 '얼굴', '용모', '보임새' 등의 뜻이 있다.

플라톤은 이 일상어로부터 자신의 철학의 핵심을 표현하는 의미를 길어낸다. 개별적인 사물들이 하나로 묶이는 그 사물 자체, 예컨대 얼굴색과 성별과 나이가 다 다른 사람들을 묶는 사람 그 자체를 '이데아'라고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플라톤의 철학은 대화편이라고 하는 일상적인 대화의 형식을 취한 글에 담겨 있다. 따라서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철학 용어와 철학적인 사고 내용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 울고 웃기고 분노하는 일상의 희로애락이 담기는 일상의 일과 언어가 들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이데아가 누군가의 얼굴이 되고, 때로는 사람 자체를 표현하고 좋은 것 자체를 표현하는 말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갈등하게 된다. 다 형상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문맥에 따라서 달리 번역해야 하나? 물론 현재의 선택은 문맥에 맞는 번역이다. 그리고 주석을 달게 된다. '이 말이 여기서는 얼굴이라고 번역되었지만 희랍어로는 형상이라고 번역되는 말과 같은 말이다. 플라톤은 이런 일상어를 통해서….' 이렇게 해 놓으면 이해는 되겠지만, 플라톤이 희랍어를 사용하는 언어 대중에게 희랍어를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이 느꼈을 짜릿함, 일상적인 감각이 추상적인 세계로 비약하는 상승의 느낌은 강 건너 불구경이 되고 만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바로 이 이데아를 예로 들면서 언어에 대한 감각적 이해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추상적인 의미로 도입된 번역어들이 개념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말을 한다. 이후 피히테는 이런 논의를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찬탄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만 거기까지는 안 가더라도, 피히테의 말을 통해서 현재 우리말이 갖는 처지를 살펴볼 수는 있다.

예컨대 우리말에 '좋다'라는 말은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면에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는 영어의 'good'을 보면 '도덕적 선'이나 '상품'의 뜻으로 추상화되어 사용된다. 희랍어도 마찬가지여서 희랍어의 'agathos'는 일상적인 '좋다'라는 말에서 '도덕적 좋음' 즉 '선(善)'의 뜻으로 발전하여, 심지어 '좋음의 형상(또는 '선의 이데아')'이라는 표현에도 등장한다.

우리말은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수준에서 추상적 수준으로 발전해야 할 때, 한문에 치이고 영어에 밀리고 각종 외래어에 자리를 내줘 여전히 일상어의 수준에서만 통용된다. 아직도 우리는 몸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을 '컨디션'이라는 말로 간편하게 사용함으로써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할 우리말을 골라 쓰지 못하고 있다. 말이 그저 우리 생각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말은 우리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생각 자체가 되고, 생각을 길러내는 창고가 된다는 점에서 고민은 깊어진다.

번역, 낯섦의 체험
그렇다고 번역을 하지 않고 문화 교류를 거부하며 순수한 우리말을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런 고립된 문화관이 성립할 수도 없으려니와 문화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고립되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체적인 문화는 낯섦의 체험으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이 <번역과 일본의 근대>의 두 저자가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설명이 더 붙어야 한다. 낯선 것을 낯선 줄 알아야 낯섦의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심과 주류에 동화되려고만 하고, 우리 안에 있는 비주류와 주변적인 것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낯섦의 체험은 불가능하다. 이 지점에 일본 근대를 준비한 오규 소라이의 탁월함이 있고,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다고 하는 조선 유학의 정통성이 갖는 문제점이 드러난다. 오렌지를 오륀쥐라고 발음해야 직성이 풀리는 주류추종의 의식을 벗어나야 문화의 주체성이 드러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개화기에 우리의 독자적인 번역 문화를 갖지 못했다. 일본은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에 대한 충격으로 개화를 서둘렀고, 중국은 중국대로 뒤늦게나마 번역국을 설치해가며 독자적인 번역 문화를 형성해나갔지만, 우리는 중국의 것을 편리하게 가져다 볼 수 있는 한문 식자층이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번역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듯하다.

일본은 중국보다 개화가 빨랐기 때문에든 또 어떤 이유에서든(거기에 대해서는 이 책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중국과는 독자적으로, 또는 경쟁적으로 서양 문물을 번역해 나갔고, 중국은 중국대로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문화유산의 토대 위에서 서양 문물을 번역해 나갔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번역은 하겠다고 맘먹으면 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번역을 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와 여건이 있어야 한다. 이런 토대와 여건이 없고서는 낯섦의 체험도 체화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번역이 해석이 되는 지점도 여기다.

재미있는 사례를 이 책이 제공한다. 이 책의 저자들에 따르면 중국은 형이상학이 발달한 나라고, 도리(道理)의 사상이 그 형이상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나라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원리의 탐구가 중요하지 역사는 부차적인 것이라, 유교에서 독서의 순서도 경(經), 자(子), 사(史), 집(集)의 순서로 역사가 세 번째로 온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은 성현의 나라인 중국을 섬기는 처지라 경(經)도 물론 중시하지만 그런 경전이 성립한 중국의 역사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시되었다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해 중국은 이(理)를 중시하고 일본은 기(氣)를 중시하여 중국은 변하지 않는 것을, 일본은 변화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러한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가 19세기 서양 사상의 중심에 서있던 진화론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차이를 이루었다. 중국에서는 옌푸(嚴復)가 1898년에 진화론의 사상가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라는 책을 <천연론(天演論)>이란 이름으로 번역하여 진화론을 소개했다. 중국인들은 '하늘이 변한다('천연'의 뜻이 그런 듯하다)'란 사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氣)를 중시했기 때문에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일본의 사상가들은 자연을 유기적인 것이 아닌 무기적인 것으로 파악한 뉴턴 역학의 자연관에 더 혁명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의리와 도리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은 '적자생존'의 원리를 '살아남은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란 뜻으로 받아들여 약자의 입장에 서서 해석했고, 일본인들은 강자가 적자가 되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번역을 갖지 못했다. 조선에 진화론을 소개한 유길준은 1881년 일본에 사절단으로 가서 경응의숙(慶應義塾)을 다니며 독일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던 일본의 진화론을 나중에 한국에 수입하였다. 여러 이유가 더 있겠지만 개화 사상가의 선두에 있던 유길준은 이렇게 일본의 번역을 통해 일본이 해석한 강자가 살아남아야 하는 제국주의 논리의 진화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지만, 때로 번역은 번역 주체를 다시 번역하기도 한다. 본래 철학은 희랍에서 성립하여 그 뜻이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이었다. 그 말을 일본 학자 니시 아마네가 어원을 잘 살려 '희철학(希哲學)', 즉 '지혜의 상태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란 뜻으로 옮겼다. 이 말이 오늘날 줄어 철학이 되었는데, 본래 동양에는 '철학'이란 학문 분류는 없었다.

물론 서양에서도 고대에는 오늘날처럼 철학이 분명한 분과학문은 아니었지만, 서양의 근대를 거쳐 동양에 번역되어 수입된 철학은 동양의 학을 거꾸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유학자도 도학자도 동양철학자란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번역된 말이 서양의 문물을 등에 업고 번역하는 자를 규정하고 말았다. 개화한 지 100년이 넘었어도 아직도 우리의 것을 찾아야 살려야 하고,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고 외치고 있으나 딱히 우리 것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우리가 다시 또 번역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낯선 것을 낯선 것으로 의식하지 못하면 그 낯선 것이 침투해 우리를 우리에게 낯설게 하기 때문이다.(김주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정암학당 연구원) 

09.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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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의 생각
    from sanghyun's me2DAY 2009-07-20 11:25 
    낯섦의 체험 - 한국과 일본은 왜 운명이 갈렸을까 by 로쟈
 
 
목동 2009-07-2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깝게도 우리는 개화기에 우리의 독자적인 번역 문화를 갖지 못했다"

로쟈 2009-07-22 22:34   좋아요 0 | URL
그건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 같진 않습니다...

열매 2009-07-20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용옥선생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의 학문의 방법으로서의 번역에 대한 선도적 문제제기를 제외한다면, 그 이후 이런 번역문제 관련한 담론 역시 일본에서 수입, 유통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적하는 점 역시 하나같이 똑같은지, 꼭 잘못된 석,박사논문을 베낀 석사논문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전자도서관에서 '번역'관련해 논문을 검색하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문제의식마저 수입하는 시대가 된 것일까요?
단순히 번역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추측 아닌 확신이 듭니다.

로쟈 2009-07-22 22:34   좋아요 0 | URL
일반적인 수입과는 사정이 좀 다른 거 같습니다. 번역 담론 이전에 막대한 번역어 유입이 먼저 있었으니까요...

Sati 2009-07-22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은 번역 문화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죠...

로쟈 2009-07-22 22:32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
 
라투르와 근대성의 문제

저녁에 버스를 타고 전철역까지 가서 '한겨레21'을 사들고 왔다. 엊그제 퇴고도 못한 원고를 워낙에 황급하게 보낸 탓에 '오류'는 없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를 서평대상으로 삼았지만 코드를 잘 맞추지 못해서 독서에 애를 먹었다. 기사를 확인해보니 크게 '실수'한 대목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필자가 담당인 구둘래기자의 이름으로 돼 있다! 타이틀의 '착각'이 그대로 반영된 듯싶다.   

한겨레21(09. 07. 27) 우리는 '근대인'인 줄 착각한 '중국인'

‘도발성’이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라면, 프랑스의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는 단연 돋보인다. 저자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근대인이었던 적은 없다. 근대성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근대 세계는 존재한 적도 없다.” 이보다 더 과격할 수 있을까. 고대-중세-근대(현대)라는 역사적 시기구분이 ‘근대인’으로서 우리의 ‘상식’이라면, 라투르의 책은 그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어떤 근거에서인가? 

먼저, 라투르가 정의하는 ‘근대’와 ‘근대인’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근대란 새로운 체제와 가속, 파열과 혁명을 가리킨다. 즉, 시간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어떤 시대, 혹은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의미이며, 이 기준에 미달하는 ‘전(前)근대’는 무엇인가 낡아빠지고 정적인 과거를 지칭한다. 여기에 전제되는 것은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단절과 비대칭성이다.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간은 비가역적이어서 거꾸로 되돌릴 수 없다. 이 시간의 승부에서 근대는 승자이자 정복자이며 전근대는 패자이자 피정복자이다. 라투르가 비판하는 것은 그러한 비대칭적 이분법이다.  

근대성이라는 문제틀은 전근대인(과거)과 근대인(현재)을 나누고, ‘그들’과 ‘우리’로 분할한다. 그리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즉 ‘전근대 사회’ 혹은 ‘전통사회’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는 연구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신화와 민간과학, 정치형태와 기술, 종교, 예식 등을 모두 뭉뚱그려서 다루지만, ‘근대사회’는 그렇게 다루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인류학 대신에 자연과학과 사회학, 철학이 동원되며, 이들은 사실과 권력, 담론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라투르가 보기에 근대의 분과적 인식론이 가정하는 '자연/문화' '사실/가치' '문명/야만'의 이분법은 유지되기 어려우며 모든 현상은 혼종적이다. 가령 남극 오존층의 구멍은 완전히 ‘자연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회적’이며 또 너무나도 ‘담론적’이다. 현실은 모두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연결망’인 것이다. 저자의 비유를 들자면, 현실은 이란과 이라크, 터키라는 세 나라에 의해 찢겨진 쿠르드족의 처지와 같다. 인위적으로 분할돼 있지만 쿠르드족은 밤이 되면 국경을 넘어가 결혼도 하고 세 나라에서 벗어난 공동의 모국을 꿈꾼다. 이것이 하이브리드적 현실이다.  

라투르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접근법으로 문화와 관습에 대한 통합적인 연구, 곧 인류학적 연구를 주창한다. 소위 ‘근대세계에 관한 인류학’이다. 이때 인류학자는 자연계와 사회세계라는 근대적 분할을 폐기하고 실험실의 과학자와 정치가를 같은 차원에 놓고 조망한다. 지식과 권력과 풍습에 관한 책을 따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모두 연결된 단 한권의 책을 쓰고자 한다. 인식론에 대한 질문과 사회적 질서에 대한 질문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철학과 사회학과 정치학과에 따로 배정되지 않는다. 그렇게 근대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할 때, 대상으로서 전근대와 근대가 갖는 차이는 무의미하거나 사소해지게 된다.  

사실 근대 세계는 과거와 단절하는 총체적이고 비가역적인 ‘발명품’이었고,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은 그 새로운 세계의 산파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것은 미몽이었다. 라투르가 ‘기적의 해’라고 부른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사회주의의 몰락을 상징할뿐더러 동시에 자연에 대한 무제한적인 정복과 완전한 지배에 대한 자본주의적 헛된 희망의 종말을 상징한다. 연결망적 관점에서 볼 때, 서구에서의 혁신은 급진적인 단절과 비가역적인 운명을 초래한 ‘영웅담’이 더 이상 아니다. 지식순환에서 약간의 가속과 행위자 수의 미미한 증가, 과거의 믿음에 대한 약간의 변경 정도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 라투르의 평가다. 그가 근대의 경기장 대신에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훨씬 더 넓은 비근대적 세계의 장이다. 이 장을 그는 어원적 의미에서의 ‘중국(中國, Middle Kingdom)’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근대인’인 줄 착각한 ‘중국인’이라고 해야 할까? 

09. 07. 19.  

P.S. 참고로,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염두에 둔 대목은 "반근대인들은 탈근대인들처럼 그들의 상대방의 경기장을 받아들였다. 다른 경기장이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이는 비근대적 세계들의 장이다. 그것은 중기 왕국(Middle Kingdom)이며 중국만큼이나 광활하면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131쪽)이다. 사전에는 고대 이집트의 '중기 왕국'이라고도 나오지만, 나는 'Middle Kingdom'이 시간보다는 공간에 맞춰져 있는 듯해서, '中國'이 더 적합한 번역이지 않나 싶다. '중국'과 같은 '중앙왕국'. 

독서에 애를 먹은 건 라투르의 독특한 사고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반부의 번역도 좀 낯설었기 때문이다. 라투르는 일간지에 실린 남극 오존층 파괴에 관한 기사를 읽어내려가면서 기상학과 화학, 경제, 정치가 뒤섞여 있는 하이브리드적 현실의 사례로 제시하는데, 초반부터 이런 번역문이 나온다. "계속 읽어 내려가 보면 나는 고층대기를 연구하는 화학자에서 아토켐과 몬산토의 최고경영자로 변신한다.(17쪽) 이 대목의 원문은 "Reading on, I turn from upper-atmosphere chemists to Chief Executive Officers of Atochem and Monsanto (...)"이다. 나는 'turn'이라는 동사가 '시선이 옮겨간다'는 뜻 정도이지 싶은데, 역자는 과격하게도 '변신한다'라고 옮겼다. 불어본에는 그런 뉘앙스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읽기에 어색하다.   

일단 한번 '변신'하게 되면 이후의 변신은 좀더 쉬워진다. "몇 문단을 더 읽어 내려가면 나는 주요 선진산업국가의 수장으로서 화학, 냉장고, 에어로졸, 비활성 기체 문제에 휘말려든다."(18쪽)는 대목도 원문은 "A few paragraphs later, I come across heads of state of major industrialized countries who are getting involved with chemistry, refregerators, aerosol and inert gases."이다. 몇 문단 내려가다 보면 이런 환경 문제로 골치가 아픈 선진국 정상들에 관해 읽게 된다는 뜻인데, 여기서도 '수장으로서'라고 옮긴 건 지나친 감정이입이 아닐까. 독서과정 자체가 주체와 대상이 뒤섞이는 하이브리드적 과정이라는 주장을 함축한 게 아니라면 좀더 자연스럽게 옮기는 편이 좋았겠다.   

덧붙여, 67쪽 이하에서 'historian of ideas'는 '이념사가'로 옮겨졌는데, '사상사가'가 더 나을 듯하다(온갖 사상들의 역사를 다루기에). 69쪽 "근대의 비판적 입장이 불가능해지는 지배적인 장소를 복원한다"에서 '근대의 비판적 입장이 불가능해지는 지배적인 장소'는 '근대의 비판적 입장의 등장과 함께 상실한 지배적 장소(the dominant place it had lost with the modern critical stance)'이다.  

그리고 조금 의외의 오역. 연결망적 현실에 접근하는 데 '비판의 삼분법'(인식론, 사회학, 해체주의)이 갖는 한계 혹은 딜레마를 라투르는 지적한다. "이것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딜레마로서, 인류학은 내가 '자연-문화'라고 부를, 이음새 없이 이어진 직조를 통해서 우리가 차분하고 간단하게 이 딜레마를 다루는 데 익숙해지도록 만들지 못했다."(32쪽). 번역문만으로도 난센스라서(라투르는 인류학을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인류학이 이 딜레마를 다루지 못한다?) 원문을 찾아봤다. "This would be a hopeless dilemma had anthropology not accustomed us to dealing calmly and straightforwardly with the seamless fabric of what I shall call 'nature-culture' (...)"이다.  

아무리 봐도 내가 보기엔 'if가 생략된 가정법' 문장이다. 다시 옮기면, "만약 인류학이 내가 '자연-문화'라고 부르는, 이음새 없는 직조물을 우리가 차분하고 익숙하게 정면으로 다룰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다면, 이것은 해결 가능성이 없는 딜레마일 것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라투르는 '근대세계에 관한 인류학’, '대칭적 인류학'을 주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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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7-1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애쓰셨습니다. 읽어 봅니다.

로쟈 2009-07-19 23:01   좋아요 0 | URL
^^

2009-07-19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9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이] 2009-07-19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그렇군요... 자본은 국경을 넘나드는데 책과 노동자는 그렇지 못하네요.

로쟈 2009-07-20 09:16   좋아요 0 | URL
사실 책은 책값보다는 언어의 장벽이 더 높지요.^^;
 

'제국'과 '다중'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의 새 책이 출간됐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그린비, 2009). 지난달에 원서를 구한 책이어서 번역본은 뜻밖이다. 분량이 많지 않은 대담집이라 사회주의 이후의 좌파 운동의 현황과 향방을 훑어보는 데 유용할 듯싶다. 이 저명한 좌파 이론가를 가이드 삼아서(번역본의 표지는 너무 유순한 듯싶다. 마치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일보(09. 07. 18) "사회주의여, 또 다른 가능성을 추구하라" 

백남준이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이름을 떨쳤던 계기는 1984년 전세계에 동시 중계된 위성 라이브 프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었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이탈리아의 좌파 사회학자 안토니오 네그리(76)는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Goodbye Mr. Socialism)라고 외친다.

 

시류에 흔들리는 '대중'도, 혁명적인 '민중'도 아닌 '다중'이라는 탄력적인 개념을 제시했던 그가 이탈리아의 진보적 지식인 라프 발볼라 셀시(52)와 머리를 맞댔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위축된 좌파 운동 혹은 민주주의가 지금 어떤 모색과 변환을 겪고 있는지가 두 지성의 대화 속에 드러난다.

"스페인에는 현재 노동력을 구성하는 35%가 비정규직 형태의 노동에 종사합니다. 프랑스도 상황은 비슷하지만 인턴십이 조직되고 있어요."(131쪽) 유럽이 겪고 있는 사회 양극화 현상에 대한 네그리의 말이다. 노동시장의 국제화에 따른 이주노동자 문제를 두고 네그리가 "노동 발전과 기술 혁신의 진행에서 기업은 이민자를 선호하기"(117쪽) 때문이라고 원인을 짚는 대목은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네트워크의 변혁에 대한 네그리의 강조는 한층 심화됐다. 네그리는 그 같은 경향을 "새로운 관계들과 지식의 발견에서 오는 행복"(83쪽)이라며 강하게 긍정한다. 그의 통찰, 예를 들어 "좌파는 쇠락의 형국에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40쪽) 또는 "인터넷은 복잡성이 증가할수록 쓰레기로 더 뒤덮인다"(101쪽) 등은 문명비판적이다. 나아가 "1995년 이래로 지구를 장악해 온,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쓰레기"(83쪽), "미국에 대항해서 대안적 세계화의 문을 열어라!"(190쪽)는 등의 표현은 격문이 제격일지 모른다.

그가 기대는 가치는 자유와 민주다. 그는 "자유는 사람들의 두뇌 안에 있는 고정자본"이라며 "상상하고 소통하고 언어를 발전시키는 자유"를 강조한다.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오직 자유뿐"(201쪽)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네트워크에 기반한 혁명적 민주주의"는 결과로 주어지는 선물인 셈이다. 계급 이익에 골몰하기 일쑤인 유럽 좌파의 행태와 관련, 그가 노동계급의 이기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대목은 시사적이다.

책을 옮긴 박상진 부산외대 이탈리어학과 교수는 "사회주의에 안녕을 고하며 새로운 이성을 꿈꾸는 네그리는 이성의 가능성에 신뢰를 보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근대주의자"라며 "현실 사회주의와의 결별은 또 다른 가능성의 추구이면서 새로운 문명을 향한 충동"이라고 말했다.(장병욱 기자) 

09. 0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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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7-19 22:41   좋아요 0 | URL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 드뎌 나왔군요ㅋ 기대됩니다.

로쟈 2009-07-19 23:03   좋아요 0 | URL
네, 책들은 계속 나오는데, 누가 다 읽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러시아 여기자의 죽음

러시아의 여성 인권운동가가 또 피살됐다. 2006년 피살된 여기자 폴리트코프스카야의 친구이기도 하다고. 러시아 인권과 법치주의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사건이어서 음울하고도 씁쓸한 소식이다. 어제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7. 17) 체첸 비판 러시아 인권운동가 또 피살

체첸의 인권 실태를 비판해온 러시아의 여성 인권운동가가 또다시 피살됐다. 영국 BBC방송 등은 15일 체첸 인권단체 ‘메모리얼’에서 활동해온 나탈랴 에스테미로바(50)가 납치·피살됐다고 보도했다. 에스테미로바는 이날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서 무장괴한들에게 납치됐으며, 몇시간 뒤 인접한 잉구셰티야 공화국의 나즈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에스테미로바는 그로즈니 대학을 졸업하고 역사 교사로 일하다 2000년 인권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 2006년 살해된 여성 언론인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의 친구이기도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체첸 실태를 외부에 알려 2007년 여성노벨상 수상자들이 선정한 ‘폴리트코프스카야 인권상’을 받은 그는 유럽의회의 로버트 슈만 메달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사무실은 외국 취재진이 그로즈니를 방문하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에스테미로바는 지난달 체첸 당국이 분리주의 반군의 집을 모두 불태우며 탄압하고 있다는 조사 보고서를 냈다. 또 지난 7일 그로즈니 도심에서 총격전이 벌어지자 보안군의 무력 남용을 맹비난했다. 



메모리얼은 이번 살해의 배후에 람잔 카디로프 체첸공화국 대통령(32)이 있다고 밝혔다. 카디로프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대통령이었을 때부터 그의 지원을 받아왔다. 체첸 독립운동 세력의 공격에 숨진 아흐마드 카디로프 전 대통령의 아들로 체첸의 분리운동을 강경 탄압해왔다. 그는 푸틴이 1999년 ‘2차 체첸전쟁’을 일으키자 사병 조직 ‘카디로비츠’를 이끌고 러시아군에 합세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체첸 정보국장을 맡아 푸틴의 신임을 굳혔다. 2004년 아버지가 숨진 뒤 부총리를 거쳐 총리로 초고속 승진했고, 2007년 3월에는 푸틴에 의해 체첸 대통령으로 임명됐다. 그가 체첸 석유를 빼돌려 재산을 불리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폴리트코프스카야 사건에 개입한 의혹도 있다.

그의 집권 뒤 체첸에서는 독립운동가 납치·고문·살해가 계속되고 있다. 메모리얼 측에 따르면 카디로프는 이를 비판하는 에스테미로바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카디로프는 “살인범은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한다”며 배후설을 부인하고 있으나, 인권단체들은 “우리를 겁주기 위해 카디로프가 저지른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번 사건으로 유럽과 러시아 간에는 인권 갈등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유럽연합은 즉시 살인 배후세력을 맹비난하고 “러시아 연방정부 차원의 조사와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연방기구를 통해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성명을 냈지만 제대로 될지는 회의적이다. 올초 체첸 문제를 비판한 인권변호사 등이 피살됐을 때에도 메드베데프는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으나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취임 때 ‘법치 확립’을 강조했던 메드베데프가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고 보도했다.(구정은기자) 

09. 07. 18.  

Наталья Эстимирова в Грозном, 1 сентября 2004 года

P.S. 에스테미로바의 인터뷰 동영상이다(http://www.youtube.com/watch?v=3oZsJzXKqI0). 고인의 명복을 빈다. 비록 러시아/체젠의 수치스런 인권상황이 개선될 때까지는 그녀 또한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하겠지만... 

 

P.S.2. 체첸이나 체첸분쟁에 관한 단행본 저작이 국내엔 아직 나오지 않은 듯하다.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 몇 권만 찾아보았다. 체첸분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다룬 <야만의 시대>(황소자리, 2005)는 생소한데, 역시나 2004년에 나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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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무개 2009-07-19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초인가에 리벨리온이라는 리트비넨코에 관한 다큐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요.. 거기에 나오는 안나 폴리코브스카야의 모습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정부의 비리를 폭로해도 그에 대한 반응조차 볼 수 없는 상황에도 끈임없이 진실을 알리기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그런데 또 이런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네요... 끔찍합니다...

로쟈 2009-07-19 18:40   좋아요 0 | URL
끔찍한 일이야 지구촌 곳곳에서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는데, 저는 더 끔찍한 게 이런 일에 차츰 '면역'이 돼간다는 거예요...

목동 2009-07-20 09:36   좋아요 0 | URL
죽고, 죽이고, 대중의 이름으로, 민족으로 이름으로,,,
그리보면 살리려는 마음은 얼마나 값진 마음인가요!

람혼 2009-07-19 0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기사를 읽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곧 로쟈님의 멘트가 있겠구나 생각도 했습니다). "지난해 취임 때 '법치 확립'을 강조했던 메드베데프가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는 기사의 문장이 남의 나라 일 같지만은 않은 게 또 다른 문제겠지요...

로쟈 2009-07-19 18:39   좋아요 0 | URL
메드베네프는 이미 지난번에 무능력을 과시한 바 있지요. 푸틴을 넘어설 수 있느냐의 시험대이기도 한데, 별로 기대해볼 수 없지 않을까 싶어요...

목동 2009-07-19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반도 역시 분쟁지역에 포함된다. 우리의 경우는 타민족간의
분쟁이 아니라, 자민족간에 분쟁으로 세계대전과 이념적 산물로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이다.

체첸과 러시아는 민족도 다르며, 종교도 다른(리시아:정교,체첸:이슬람)
타민족으로부터 독립을 갈망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탈랴 에스테미로바(50)"가 납치·피살되었다.
기구한 운명이다. 용감하고 의로운 세계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딸 역시 깊은 상처속에 자국의 현실에 재인식하겠지만,,,

우리의 경우도 남과 북의 통일문제가 해결되다면, 새로운 국면의
중국과 러시아연방과의 문제가 새롭게 부상 될 것이다.

우리의 임시정부 시절, 일본에 의해 희생되었던 독립투사들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한다. 시대마다 고군분투했던 조상들 있다.

코샤크족(고용한 돈강)에 비해 체첸는 러시아 문학작품에 거이
등장하지 않지만, 1940년대 스탈린에 의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체첸이 비극을 그린 "황금색 구름은 비쳤다(1987)"가
있다고 한다.

로쟈 2009-07-19 18:38   좋아요 0 | URL
야만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Sati 2009-07-20 22:20   좋아요 0 | URL
펠렉스/ 톨스토이의 '하지무라트'가 체첸사람일걸요^^.
 

이번주의 '서프라이즈'는 어니스트 존스의 <햄릿과 오이디푸스>(황금사자, 2009)이다. 원저는 1949년에 나온 걸로 돼 있으니까 60년만에 번역돼 나온 셈. 저자는 프로이트의 영국인 제자로 정신분석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정신분석학자다. 그의 책은 프로이트가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란 에세이 등에서 제시한 정신분석적 독법을 더 자세하게 발전시킨 것.   

개인적으로는 재작년인가 '아버지란 무엇인가'란 주제의 강의를 하면서 <햄릿>과 <오이디푸스왕>, 그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두루 읽은 적이 있다. 여건이 되면 나대로 프로이트의 독해를 업그레이드한 책을 써보고도 싶다. 존스의 책은 <햄릿>을 읽을 때마다 참조해보고 싶었지만 시간을 내기 어려웠는데, 번역서도 나왔으니 이젠 단박에 읽을 수 있겠다. 따로 리뷰들이 뜨지 않아서, 그리고 자세한 출판사 책소개가 이미 나와 있기에, 나는 같이 읽을 리스트만 만들어둔다...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햄릿과 오이디푸스
어니스트 존스 지음, 최정훈 옮김 / 황금사자 / 2009년 7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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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mplete Correspondence of Sigmund Freud and Ernest Jones 1908-1939 (Hardcover)
Freud, Sigmund / Belknap Pr / 1993년 1월
150,860원 → 135,770원(10%할인) / 마일리지 4,08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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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ud's Wizard (Hardcover)- Ernest Jones and the Transformation of Psychoanalysis
Maddox, Brenda / Da Capo Pr / 2007년 3월
48,420원 → 39,700원(18%할인) / 마일리지 1,9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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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술, 문학, 정신분석
프로이트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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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7-18 17:01   좋아요 0 | URL
어니스트 존스... 프로이트와 관련된 책들에서 이름만 읽어본 사람이군요^^ 리스트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도 넣으면 더 완결적이지 않을까요?^^

로쟈 2009-07-18 17:48   좋아요 0 | URL
네, 햄릿 읽기와 관련되는 것만 꼽았습니다. 안티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읽기에 넣어야 할 듯해요.^^;

수유 2009-07-20 20:09   좋아요 0 | URL
읽고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더 즐거운것은 역자가 1990년생이라는 것, 스무살의 역자입니다.. 옮긴이의 소개를 먼저 읽게되네요..

2009-07-20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1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