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와 세계경제사로 분류되는 책 두 권도 지난주 관심도서인데, 하나는 어제 배송받은 기디언 래치먼의 <불안의 시대>(아카이브, 2011)이고, 다른 하나는 장바구니에 넣어둔 대니얼 앨트먼의 <10년후 미래>(청림출판, 2011)이다. 저자들은 각각 파이낸셜타인스의 칼럼니스트와 뉴욕타임스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오피니언 리더'들이 지난 30년과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참고해볼 수 있겠다.    

한국일보(11. 05. 21) 경쟁과 분열의 제로섬 시대 윈윈의 시대로 돌아가려면…

2008년 9월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국제 질서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외교 문제 칼럼니스트 기디언 래치먼은 <불안의 시대>에서 금융위기를 계기로 세계가 국가 간 협력을 강조하는 윈윈 게임에서 경쟁과 분열이 지배하는 제로섬 게임의 시대로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지난 30년간의 세계 역사를 전환의 시대(1978~91년), 낙관의 시대(91~2008년), 불안의 시대(2008~현재)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78년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은 그해 12월 덩샤오핑(鄧小平)이 결정한 중국의 개혁개방을 강대국들의 세계화의 출발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전환의 시대에는 자유시장과 민주화를 향한 움직임이 세계적 추세였다. 중국의 개방뿐만 아니라 레이건과 대처가 주도한 미국과 영국의 급진적 경제 개혁, 유럽의 단일시장 출범, 라틴아메리카의 개방, 인도의 개혁 등이 이 시대에 일어났다. 또 80년대에는 라틴아메리카와 한국, 동유럽 공산권 등 16개국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91년 겨울 구 소련이 사라지고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남으면서 전환의 시대는 끝났다.

낙관의 시대는 세계 어느 국가도 미국에 맞설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의 힘이 강력했던 시기다. 주요 강대국들이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이라는 비전을 공유해 국제 갈등의 가능성이 줄어든 윈윈의 시대였다. 저자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앨런 그린스펀 등의 인물들을 통해 이 시대의 사상을 보여 준다. 또 미국이 아시아, 유럽 국가들과 민주주의, 시장, 민주적 평화, 기술력에 대한 믿음 등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는가를 설명함으로써 주요 강대국이 왜 세계화를 수용했는지, 그리고 윈윈 시대가 어떻게 창출됐는지를 설명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는 국제정치가 위험하고 불안정해진 불안의 시대다. 이 시대에 제로섬 논리가 횡행하게 된 것은 낙관의 시대를 지탱했던 민주주의 자유시장 기술혁명 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국제 질서를 개편하는 새로운 요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특히 중국과 미국 간의 새로운 라이벌 관계로 인해 세계가 한 나라의 이익이 다른 나라의 손실을 의미하는 제로섬 논리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불안의 시대에 등장한 기후변화 경제불균형 같은 새로운 글로벌 문제의 특징,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주요20개국(G20) 유엔 기후회담 등을 무대로 나타난 글로벌 거버넌스 추진 움직임, 미국과 중국 간의 군사적 경제적 경쟁 심화가 세계 문제 해결이 걸림돌이 되는 이유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제로섬 논리를 극복하고 윈윈의 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낙관의 시대의 특징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미국의 입장에 치우친 감이 있지만 지난 30년간 시대별로 주요 사건과 인물들을 잘 포착해 세계 정치, 경제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남경욱기자)   

한국경제(11. 05. 21) "EU가 붕괴된다고"…세계가 직면하게 될 12가지 경제변화

중국은 다시 가난한 나라로 돌아간다. 유럽연합(EU)은 붕괴한다. 뉴욕타임스 최연소 논설위원인 대니얼 앨트먼 뉴욕대 교수는 이러한 일들이 불과 10년 후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10년 후 미래》에서 세계가 앞으로 직면하게 될 12가지 경제변화를 분석한다. 앨트먼 교수는 "세계 경제의 운명은 단기적 시장 변화가 아니라 보다 심층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지정학적 위치,정치제도,인구 등 '딥 팩터'들을 고려해야 경제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딥 팩터 분석을 통해 중국의 경제 전성기가 머지않아 막을 내릴 것이라 전망한다. 중앙집권적 정부체제와 유교문화는 중국 경제를 경직시키는 대표적 요인이다. 강력한 정부 통제는 산업을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지만 그만큼 기업 활동의 자유를 빼앗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은행이 조사한 '기업 환경평가보고서'에서 중국은 183개 국가 중 151위를 기록했다. 기업하기 힘든 나라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중국이 빠르게 늙어가는 국가라는 점도 근거로 든다. 1979년 이후 시행한 '한 자녀 정책'의 영향으로 노동할 수 있는 젊은 인구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일본과 유럽 등 선진국들 또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지만 미국의 취업연령 인구는 비교적 적게 줄어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근로자의 낮은 생산성과 법제도의 불투명성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따라서 인구 증가율과 생산성이 더 높은 미국에 세계 최대 경제대국의 타이틀이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는 "세계경제사에서 중국의 시대는 강력하지만 짧게 기록될 것"이라고 말한다.

EU의 미래에 대해서도 비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서로 다른 경제성장의 한계 때문에 재정위기를 계기로 이미 회원국 사이에 분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저자는 미국 남북전쟁을 예로 들어 "정치 · 경제제도의 통합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EU는 결국 불가피하게 다시 분열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는 독일 네덜란드 등 북서유럽 국가들끼리 금융과 상업적 연대가 강화되는 반면 다른 국가들은 점차 소외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은 지금 외부 세계에 경제를 개방할 것인지 아니면 폐쇄적인 상태로 남아있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시기"라며 "한국은 중국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예고편이기 때문에 세계가 주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경제의 몰락을 예로 들며 인구 감소를 감안해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젊은 인재들이 아이디어와 혁신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도록 경직된 위계질서를 타파하라고 조언한다.(최만수기자) 

11. 0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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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지식인/예술가들의 서재 구경이나 잠시 해보려고 <지식인의 서재>(행성:B잎새, 2011)를 손에 들었다가 뜻밖의 '문장수업'을 받았다. 자연과학자 최재천 교수가 미국 유학시절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대목에서인데, 과학논문을 쓰기 위해 '테크니컬 라이팅' 코스를 수강한 그는 '일생일대의 스승 로버트 위버 교수'를 만나게 된다고. 시인 흉내를 내는 게 눈에 띄어 개인 교습을 받게 됐는데, 위버 교수는 방에 놓인 긴 의자에 누워서 그가 들고 온 글을 읽게 했다. 그리고 맘에 안 드는 대목이 있으면 이유를 설명하게 하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고치도록 시켰다.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 교수와 제자는 글을 고쳐나갔다. 이 과정이 어떤 때는 밤이 어둑해질 때까지 끝나지 않은 적도 많았다. 학기 중간쯤 되어서는 고치는 문장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최재천에게는 글을 쓰면서 소리 내어 읽는 습관이 생겼다. 혀에서 구르지 않으면 수십 번이고 고쳐 썼다. 그러다 한숨에 문장이 쭉 굴러가면 그제서야 완성이다. 로버트 위버와의 수업은 최재천에게는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수업이었다.(54쪽)

요즘 유행하는 멘토-멘티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국어교과서에도 실리게 된 최 교수의 글쓰기 실력은 그렇게 해서 갖춰진 것.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위해 위버 교수에게 추천서를 받으러 갔다고 한다. 이번엔 거꾸로 위버 교수가 최재천을 긴 의자에 눕게 하고 자신이 학생용 의자에 앉아서 추천서를 읽기 시작했다. '가르치고 배우기'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최재천 교수의 사례는 <글쓰기의 최소원칙>(룩스문디, 2008)에 실린 강연에서도 언급된 듯싶다.)  

"마음에 드세요?"
"사실은 말이야, 난 이렇게 쓰고 싶었어."
"그럼 그렇게 쓰시죠." 

그렇게 해서 위버 교수가 최종적으로 완성한 추천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He writes with precision, economy, and grace(그는 정확하고 경제적이며 우아하게 글을 쓴다)." 

이 '기막한 추천서'에 가슴이 벅차오른 최재천은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이렇게 써주셔도 되는 겁니까?" 
"왜 부끄럽니? 앞으로 이렇게 쓰면 되지?"
그 순간부터 최재천은 '정확성, 경제성, 우아함'이라는 세 단어를 가슴에 새겼다.(55쪽) 

'테크니컬 라이팅' 코스도 없었고, 문장수업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선 좀 부러운 사례이다. 아무려나 '정확성, 경제성, 우아함'은 직업작가만 아니라면(그런 경우엔 여러 가지 문체가 선택지로 놓인다) 권장할 만한 글쓰기 덕목이다. 특히나 젊은 대학(원)생들에게는.    

<지식인의 서재>에는 각 서재 주인들의 추천도서 목록도 장 말미에 실려 있는데, 최재천 교수의 경우는 김병종 교수의 <화첩기행>(효형출판)을 첫번째 순위로 꼽았다.  

"저는 이 분의 책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림도 최고이고 글도 최고입니다. 제가 김병종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이 분의 책이 나온 출판사에 제 원고를 직접 들고 찾아갔어요. "김병종 선생님이 책을 낸 출판사에서 저도 책 한번 내게 해주십시오."

문장가도 경탄을 아끼지 않은 문장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화첩기행>을 나는 안 갖고 있기에. 하지만, 그 출판사에 낸 최재천 교수의 책은 읽어봤다. 알고보니 첫번째 책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 2001)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었다... 

11. 05. 21.  

P.S. 이번주에 책상 가까이 두고 있는 책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문학동네, 2011), 유종호의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현대문학, 2011), 그리고 존 그레이의 <추악한 동맹>(이후, 2011)이다. 두 한국 문학평론가의 유려한 문체는 이미 소문난 것이고,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이후, 2010)에 이어서 읽는 존 그레이의 책 역시 '정확성, 경제성, 우아함'의 원칙을 만족시킨다. 번역이 좋지만 이번에도 원서를 구할까 생각중이다. 순전히 문장 때문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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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린의 생각
    from ptec's me2day 2011-05-24 15:57 
    직업적 글쓰기 의 원칙은 정확성,경제성,우아함 이다. 최재천교수님 처럼 최고의 멘토를 만날 수 있는것도 커다란 행운이다.
  2. 그린의 생각
    from ptec's me2day 2011-05-24 16:03 
    글쓰기의 원칙은 정확성,경제성,우아함이다. 로버트위버교수와 최재천교수님의 일화가 너무나 부럽다. 누군가가 저런 멘토가 되어 준다면…
 
 
비로그인 2011-05-2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얼른 작문 숙제를 끝내고 낚시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두 꼬맹이 아들에게 자신들의 글을 되풀이해서 고치게 만들던 아버지... 그런 식의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어 부럽기도 했고요....
말이 나온 김에, 개인적으로 늘 궁금했던 건데, 저런 은사를 두신 것도 아니면서 로쟈님은 어떻게 그토록 정확하고 경제적이며 우아한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가요? 비법이 있다면 한두 가지만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로쟈 2011-05-21 15:35   좋아요 0 | URL
네, 인상적인 장면이었죠. 정확하고 경제적이고 우아한 글은 써보려고 저도 애쓰고는 있습니다.^^;
 

이번주 경제분야의 관심도서는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책들이다. 마인하르트 미겔의 <성장의 광기>(뜨인돌, 2011)와 클라이브 해밀턴의 <성장숭배>(바오, 2011). 미겔의 책은 <성장의 종말>(에코리브르, 2006)도 이미 출간돼 있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성장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의 한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경향신문(11. 05. 21) 또 다른 ‘성장’의 조건   

경제현상을 바라보는 최근 시각은 ‘숫자’ 너머를 향한다. 숫자 너머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다. 물론 여전히 숫자 이상을 보지 않으려는 매우 강력한 관성이 존재한다. 숫자는 사람들과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등장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람들의 움직임을 때로 숫자가 은폐해 현실과 유리된 경제현상을 전달하기도 한다. 



경제성장률은 이러한 은폐의 대표격이다. 경제성장률은 해당 기간에 국내총생산(GDP)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보는 지표이다. 기존 GDP 측정 방식에 대한 반성이 있고 대안적인 측정방법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GDP는 여전히 성장의 척도이다. 대안적인 측정방법을 모색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성장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성장 자체를 거부할 의의, 그리고 의지와 능력이 있을까. <성장의 광기>(뜨인돌)의 저자 마인하르트 미겔과 <성장숭배>(바오) 저자 클라이브 해밀턴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일단 숫자상으로 인류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산업화가 경제성장을 이끌기 시작한 1800년경 이후 세계 GDP는 인구 1인당 약 11배로 늘었다. 그 사이 세계 인구가 9억명에서 69억명으로 7.7배로 커졌으니, 세계 GDP 총량은 200년 전과 비교해 거의 80배로 늘어난 셈이다. 숫자상으로 인류는 200년 전과 비교해 훨씬 더 행복해져 있어야 하고 삶도 풍요로워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소득 수준에 도달하면 그 이후 인간의 행복도는 소득증가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스털린 역설’이 입증했듯 적어도 산업사회에 속한 국민들의 삶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원인이 무엇이든 성장옹호론자들은 문제해결에 성장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편다. 이들은 서구 사회의 삶에 대한 만족감과 효율성을 유지하는 데만 장기적으로 연 평균 1인당 최소 2% 성장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지난 200년의 1인당 평균 성장률의 2배만큼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빈국과 부국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서구사회가 매년 1인당 2% 성장하는 동안 세계 전체로는 4% 성장해야 한다고 세계은행은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현재 61조달러인 세계 GDP는 21세기 후반 약 2000조달러가 된다.

앞으로 이런 정도의 성장이 가능한지는 차치하고, 그렇다면 현재 시점에서 그동안의 성장 전략으로 사람들의 복지가 향상됐을까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성장의 광기>에서 미겔은 “많은 가계의 구매력은 오래 전부터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적지 않은 가계가 부채로 고통받고 있다. 성장과 물질적 복지의 증진은 적지 않은 시민들에게 아직도 빈말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사람들의 위와 옷장은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삶이 여전히 피폐하거나 혹은 더 피폐해졌다면 산업화 이후 성장을 기치로 내건 인류의 발전전략은 잘못된 것이라고 미겔은 역설한다. 나아가 성장옹호론자들이 제시하는 장밋빛 전망은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간단하게 인구 측면에서만 봐도 급격한 노령화로 세금 낼 사람이 줄고 연금 받을 사람이 느는데 과거 같은 역동적인 성장이 가능할까. 더 본질적으로는 자연과의 적대관계를 축으로 한 기존 성장은 성장비용을 숫자 속에다 숨겨 놓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성장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 세대가 계산하지 못하고 내버려둔 금액을 지불하고 있으며, 우리 후세들은 우리 대신에 또 지불하게 될 것이다. 지불하는 액수가 항상 동일하다면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액수는 몇년 전부터 점점 가파르게 증가하여 머지않아 지불할 수 없을 정도의 액수가 될 전망이다.”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에 출간된 <성장숭배>도 같은 관점을 유지한다. 선진국 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에서 소비자본주의로 변이하면서 폭주기관차가 됐다고 진단한다. 현대 사회를 ‘마케팅 사회(marketing society)’로 규정하는 저자는 진보주의자들도 이른바 전통적인 ‘빈곤모델’에 사로잡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장주의자의 관점에 빠져든다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성장을 포기하자는 논리는 아니다. 요는 어떤 성장을 어떻게 이루느냐이다. 답은 나와 있다. 지구와 우리 문명이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성장 혹은 수축하며, 물신을 숭배하는 대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존중하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방향이다. 해답이 식상하다고? 모든 해답은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해답인 것이다. 성장을 사회설계나 정책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오랜 선입관을 깰 수 있다면 인간은 또 다른 ‘성장’을 가능케 할 수 있다.(안치용| 지속가능사회를위한경제연구소장) 

11.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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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외출하면서 우편함에서 꺼내든 게 이번주 <한겨레21>인데, 출판면에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다룬 그래픽 노블 <메즈 예게른>(미메시스, 2011) 리뷰기사를 읽었다. 생소한 단어인 '메즈 예게른'은 아르메니아어로 '대재앙'을 뜻한다고. 책은 귀가길에 서점에 들러 바로 구했다. 생각보다는 얇은 책이지만 참혹한 학살의 진실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낮에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21(11. 05. 23) “세상의 모든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어떤 사람들’을 추방하는 목적은 미래를 위해서, 우리의 조국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어디에라도 살아 있다면 절대 선동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수를 가능하면 줄여야 한다. 부모들이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고아들만 수용하고 보호하도록 하라. 다른 고아들은 추방 행렬과 함께 보내라.”

1915년 당시 터키의 내무부 장관이던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가 시장들에게 보낸 전보다. 이탈리아 작가 파울로 코시가 그린 그래픽 노블 <메즈 예게른>(미메시스 펴냄)은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인을 뜻한다.  

20세기 최초의 대학살
탈라트가 전보에 글을 휘갈기는 그 순간에도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생을 놓고 쓰러져갔다. 죽음의 방식은 여러 가지였다. 총칼에 찔리거나, 목을 매달리거나, 목적지도 없이 시리아나 메소포타미아 사막을 헤매는 추방 행렬에 합류하거나. 터키 군인들은 가족 앞에서 딸을 윤간하고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이를 뽑아 이마에 쑤셔 박았다. 작가의 말마따나 “지구상의 모든 죽음이, 온 역사를 통틀어 존재하는 모든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극에 달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미쳐갔다. 어미는 어린 자식을 우물에 던져버렸고, 임신부는 노래하며 유프라테스강에 몸을 던쳤다. 허기와 두려움으로 정신을 잃은 이는 자신의 배설물을 먹기도 했다. <메즈 예게른>이 사진집이나 디테일한 묘사의 역사서가 아니란 점이 독자 처지에서는 다행이다. 건조한 내레이션과 흑백의 그림은 독자가 끔찍함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게 도왔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진보다 선명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다음 장으로 넘긴다면 잔인한 역사의 현장에서 황급히 벗어날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인은 자신들의 슬픈 역사를 ‘메즈 예게른’이라 부른다. ‘대재앙’이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는 1915~16년 터키 당국이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희생자는 1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20세기 최초의 대학살이었다.

징후가 있었다. 1895~97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는 아르메니아인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 죽임을 당한 아르메니아인은 30만 명에 달한다. 배경은 이렇다.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제국의 영토에 거주하던 소수민족 아르메니아인은 기독교를 믿었다. 이들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초로, 오스만제국 영토 안에서 아르메니아인과 무슬림은 십수 세기 동안 별다른 적개심 없이 어울려 지냈다. 그러나 19세기 말 제국들이 어깨를 겯고 서로의 욕망에 따라 손을 잡거나 충돌하기 시작하자 불똥이 엉뚱한 민족에게 튀었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인의 거주 지역인 터키 북동부를 점령하게 되는데, 러시아가 그곳 사람들에게 권리 향상을 위한 개혁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건넨다. 이를 계기로 아르메니아인 사이에서 민족운동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무슬림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고, 오스만 정부는 잔인한 대응을 한다. 이런 대응이 이어지다 폭발한 게 1차 학살이었다

1908년 청년투르크당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정치인 3명이 독재적인 권력을 가진다. 이들은 1909년 술탄 하미드 2세를 폐위하고 1911년 비밀 회의를 열어 아르메니아인 절멸에 골몰한다. 계획은 3단계였다. 첫째 군대와 행정부 내 아르메니아인들을 추방할 것, 둘째 지역 저명 인사, 아르메니아 당의 당원, 군에 들어갈 수 있는 성인 남자를 추방하고 제거할 것, 셋째 남아 있는 시민들을 없앨 것. 남자는 보이는 대로 죽이고, 죽음의 공포가 눈에 서린 여자와 아이들은 사막으로 내몰았다. 이들은 허기와 피로, 폭력에 남은 생을 짓이기다 죽어갔다.

터키에서 메즈 예게른은 금기시되는 단어다. 터키 정부는 이 대재앙을 강제 이주에 따른 희생이었다고 주장한다. 2006년 <내 이름은 빨강>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2005년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터키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터키는 지금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건에 대해 공개 언급이나 토론을 금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발끈했다. “파묵은 터키의 정체성과 터키 군대, 나아가 터키 전체를 적대시하는 근거 없는 주장을 퍼뜨렸다.” 터키 정부는 파묵을 기소했다. 터키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역사는 흐르지 못한 채 고여 있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는 아직까지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의 이름이 붙은 대로가 있다. 그의 무덤은 이스탄불 ‘순교자의 언덕’에 있다.  

글보다 더 세게 이야기하는 흑백의 선
역사의 굵직굵직한 순간을 백 마디 말 대신 그림으로 대신 말하는 그래픽 노블들이 있었다. 이슬람혁명기를 다룬 <페르세폴리스>(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안전지대 고라즈데>(조 사코 지음), <9/11 테러 리포트: 그래픽 어댑테이션>(시드 제이콥슨·어니 콜론 지음) 등이다.

<메즈 예게른>의 파울로 코시도 터키 정부가 끝내 지우려는 역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사실을 근거로 하되, 픽션을 가미했다. ‘피해자’라는 보통명사를 뒤집어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문학적 숨결을 불어넣어 가상의 고유명사로 되살려놨다. 지은이는 이야기 자체로도 충분히 강렬하기 때문에 최대한 단순한 선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밝혔다. 때로 그림은 글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신소윤 기자)  

11. 05. 19. 

 

P.S.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관련한 책이 더 있나 찾아봤는데, 엘리프 샤팍의 소설 <이스탄불의 사생아>(생각의나무, 2009) 정도만 눈에 띈다. 책소개의 일부는 이렇다. 

세계의 절반이 넘는 영토를 다스렸던 광대한 오스만 제국은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뒤섞이는 신세계를 열었다. 여러 민족과 국가가 이슬람이라는 깃발 아래 뭉쳐지면서 다수와 소수의 관계는 아르메니아 민족의 대학살이라는 비틀어진 모습으로 드러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터키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의 약 3분의 2를 학살했다고 한다.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백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거나 망각하려는 평범한 아르메니아인들과 터키인들이다. 단순히 현대 터키 공화국의 오늘을 살펴보는 데 그치지 않고 내부의 모순과 위선을, 국가와 민족의 비틀린 상처를 두 가정의 두 여성이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에서 용감하게 드러낸 작가의 역량이 대단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진실을 대면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작가가 택한 탄탄한 맥락의 스토리텔링은 이 소설이 가진 특별한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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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5-21 16:23   좋아요 0 | URL
엘리프 샤팍은 터키에 살고 있군요.파묵은 아직도 조국에 못오고 있는데...

아르메니아 계 미국인으로 윌리엄 서로얀이 생각납니다.그래도 아르메니아에 대해 한국인들이 조금이라도 안다면 서로얀의 소설을 통해서겠죠.

로쟈 2011-05-22 10:12   좋아요 0 | URL
사로얀이 아르메니아계였군요. 읽은 지가 너무 오래 돼 기억에 없는데, 요즘 독자들은 더 모를 듯싶은데요...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펴내는 소식지 <출판문화>(546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격월로 연재하는데, 이달에 화제로 삼은 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물음이고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을 길잡이로 삼았다. 프롤로그('왜 읽는가?')와 1부의 1장까지 따라가본 게 됐다.     

출판문화(11년 5월호) 홀로 행하는 독서의 즐거움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란 질문에 대해 ‘책읽는 세상’에서 한 차례 다룬 바 있다. 그게 “어떤 자전거를 타야 할까요?”란 질문과 마찬가지이며, 자전거를 탈 줄 알고 타는 걸 즐길 줄 안다면 ‘아무거나’ 골라잡아 타면 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어느 정도 독서력을 갖춘 다음이라면 아무 책이나 읽어도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독서목록이 아니라 독서력이라고. 그렇다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은 어떤가. 이 또한 “자전거를 왜 타는가?” 혹은 “산에 왜 오르는가?”란 질문과 같은 성격의 것일까? 그래서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둘러대는 것이 우문현답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책이 있으니까? 과연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잠시 미국의 저명한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견해를 참조해보도록 한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책을 잘 읽는 유일한 방법은 없지만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란 책을 통해서 우리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블룸은 이미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루비박스, 2008)와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을 통해서도 ‘우리는 지혜를 갈망하기에 독서하고 사색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피력한 바 있으니 낯선 견해는 아니다.    

책에서 지혜를 얻는다는 주장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블룸의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책이 지혜를 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아무 책’이나 읽어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블룸에 따르면 그렇다. 그래서 그가 권유하는 책은 소위 정전(正典)들이다.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서구의 정전>과 <셰익스피어: 인간의 발명> 등을 펴낸 바 있는 블룸은 성서와 소크라테스에서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거쳐 헤밍웨이와 포크너에 이르는 정전 혹은 문학적 천재들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결코 만만한 지혜는 아니다.  

지혜와 함께 블룸은 독서의 이유를 자아의 확장에서 찾는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튼튼하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를 깨닫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것이 또한 그의 주장이다. 국내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영향을 받은 예일학파의 일원으로 처음 알려졌지만, 악명 높은 ‘해체비평’의 일반적인 구호와는 달리 블룸에게 ‘작가’나 ‘자아’는 해체불가능하다. 오히려 ‘작가의 죽음’이나 ‘자아의 허구성’에 대한 주장이 우리가 독서를 통해서 몰아내야 할 유령이라고 그는 말한다. 각자가 갖고 있는 신념과 무관하게 우리는 “이데올로기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때문에 블룸은 독서의 원칙 가운데 하나로 “독서를 통해 자신의 이웃이나 주위 사람을 개선하려고 시도하자 말라”고 권고한다. 그가 보기에 독서의 즐거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이기적인 것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삶이 직접적으로 향상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또 개인의 상상력이 성장하는 것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증가하는 것도 별개의 문제다. “홀로 행하는 독서의 즐거움”을 공익과 연관 짓는 모든 주장에 대해 그가 불편해하는 이유다. 독서는 순전히 개별적인 독자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즐거움이 없다면 독서는 와해될 것이며 자아 또한 해체되고 말 것이라는 게 블룸의 염려다.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서 지혜를 발견하고 자아를 확장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경험이다. 블룸은 이 독서의 즐거움이 대학의 엄숙주의와 도덕주의 때문에 평가 절하돼왔다고 말한다. “대학에서는 독서를 즐거움의 미학이라는 깊은 의미에서 즐거운 일로 가르치는 일이 드물다.” 게다가 이 즐거움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서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이 쉽지 않은 즐거움, 곧 ‘어려운 즐거움(difficult pleasure)’ 혹은 ‘즐거운 어려움(pleasurable difficulty)’에 대한 갈망이다. 단순한 즐거움이 아닌 이 고차원의 즐거움이 독자가 얻을 수 있는 숭고함의 경험이다. 그렇다, 블룸이 권유하는 독서는 숭고한 독서이다. 요컨대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숭고함을 경험하며, 그것은 ‘사랑에 빠진다’고 할 때의 위태로운 초월의 경험을 제외하면 “우리가 세속에서 경험하는 유일한 초월의 경험”이다. 고전들에 대한 블룸의 비평은 이 특별한 경험으로의 초대장이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은 단편소설과 시, 장편소설과 희곡 등의 작품들에 대해서 어떻게 읽을 것이며, 왜 읽는지에 대해 가르쳐주고자 하는 책이다. 독서란 무엇인지 일종의 시범을 보여준다고 할까. 단편소설부터 시작해서 그는 시, 장편소설, 그리고 희곡에 대한 읽기를 차례로 선보인다. 그의 독서 여정에 들어서면서 내가 독자로서 품은 기대는 두 가지였다. 한편으론 작품을 읽어내는 그의 솜씨, 곧 ‘독서기술’이 궁금했고, 다른 한편으론 그 독서기술이 전수될 수 있는 여건을 우리가 갖추고 있는지 궁금했다.   

개인적으론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는 처지인지라 블룸의 단편소설 감상이 두 명의 러시아 작가에 대한 읽기로 시작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단편소설이란 장르의 여정을 투르게네프에서 체호프를 거쳐 헤밍웨이에 이르는 길로 파악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거론하는 것이 투르게네프의 단편집 <사냥꾼의 수기>(1852)다. 발표된 지 한 세기 반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놀라우리만치 신선하며 섬뜩하리만큼 아름답다는 평이다. 스물다섯 편의 단편 가운데 특정 작품을 고르는 게 어렵기는 하지만 블룸은 <베진 초원>과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 두 편이 자신의 베스트라고 말한다.   

<베진 초원>은 일반적으로도 <가수들>과 함께 <사냥꾼의 수기>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어떤 내용인가. 화자인 사냥꾼(투르게네프)이 7월 아침에 들꿩 사냥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어느 초원에서 노숙하게 되는데,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다섯 명의 농부 소년들과 만난다. 일곱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소년들이 서로 주고받는 도깨비 얘기, 귀신 얘기 등을 그는 엿듣는다. 그중 파블루샤란 아이가 똑똑하고 호감이 가는 소년이다. 잠이 들었다가 동틀 무렵에 일어나니 파블루샤만 깨어나 사냥꾼을 바라본다. 화자는 집으로 향하며 초원의 아름다운 아침을 묘사한다. 그리고 말미에 슬픈 소식을 덧붙인다. <베진의 들판>이라고 옮겨진 우리말 번역에서 인용하면 이렇다. “슬픈 이야기지만 여기에 덧붙여 알려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파블루샤가 그 해에 죽은 것이다. 그는 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참 훌륭한 아이였는데 아까운 일이다.”  

왜 <베진 초원>을 읽는가? 블룸은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적어도 우리의 현실을 더 잘 알기 위해, 운명에 대해 상처받기 쉬운 우리들을 더 잘 알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투르게네프의 솜씨와 이야기꾼으로서의 표면적인 무관심을 미학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 소품에서 독자가 발견하는 아이러니는 운명의 아이러니다. 파블루샤처럼 가장 호감이 가는 아이도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도 하는 것이 운명이다. 이 운명은 초원의 풍경과 소년들과 사냥꾼과 마찬가지로 무구하다. 투르게네프는 아무런 도덕적 판단도 보태지 않고 베진 초원을 벗어난 어떠한 시점도 이야기에 개입시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블룸은 투르게네프가 가장 셰익스피어적인 작가라고 말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최고의 재능을 필요로 하며, 그런 재능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과 흡사하다는 게 블룸의 견해다.  

작품집에서 <베진 초원>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은 한 난쟁이 이야기다. 사냥꾼 투르게네프는 50세가량의 이 불가사의한 인물과의 짧은 만남을 들려준다. 돈강 유역의 ‘아름다운 땅’을 빼앗기고 떠도는 늙은 난쟁이 카시안은 나이팅게일을 잡아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일을 한다. ‘벼룩’이란 별명을 가진 그는 자신이 읽고 쓸 줄 알며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는 특별한 능력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가족이 없다고 하지만 숲에서 갑자기 등장한 소녀가 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온전한 정체는 그냥 수수께끼로 남으며 투르게네프 또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에 대해 더 말하지 않는다. 결국 카시안은 자기만의 세계에, 농노의 러시아가 아닌 러시아판 성서적 세계에 남게 된다. 블룸의 감상은 이렇다.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을 읽으며 우리는 극소수를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투르게네프로부터도 단절된 타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카시안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는 보상은 잠시나마 대안 현실의 세계에 들어서도록 허락받았다는 점이다.”  

짧은 분량이긴 하지만, 블룸은 명불허전의 솜씨로 이 단편들의 미학적 성취와 지혜를 요약해낸다. 덕분에 오래전 학부시절에 읽은 작품들을 다시금 읽어보면서 새로운 감상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건 현재 <사냥꾼의 수기>의 완역본을 우리말로는 읽어볼 수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 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의 한권으로 출간된 바 있지만 지금은 절판된 상태다(<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은 <끄라씨바야 메치의 까시얀>으로 번역됐다). 그마나 현재 유통 중인 몇 안 되는 번역본은 보통 원작의 1/3 가량만 수록하고 있는 발췌본이다. 미국의 노예해방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돼 있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새롭게 번역․출간되고 있는 것과 달리, 훨씬 더 뛰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러시아 농노해방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은 우리에게 ‘부재하는’ 작품이다. 비단 투르게네프만이 아니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 읽어나가다 보면, 장편소설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빈곤한 상황은 계속 이어진다. 고로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에 “책이 있으니까”라고 답할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어려운 즐거움’이란 말을 다른 의미로 실감하게 된다.  

11. 05. 19. 

P.S. 본문에서 언급한 <베진의 들판>은 <귀족의 보금자리>(신원문화사)에 수록돼 있다. 이 책에는 <사냥일기>라는 제목으로 8편의 단편이 번역돼 있다. <사냥꾼의 수기> 완역 단행본이 현재로선 없는 셈이다. 한편, "독서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이 쉽지 않은 즐거움, 곧 ‘어려운 즐거움(difficult pleasure)’ 혹은 ‘즐거운 어려움(pleasurable difficulty)’에 대한 갈망이다."란 대목에서 대구로 적은 ‘어려운 즐거움’과 ‘즐거운 어려움'을 <해럴드 블룸의 독서일기>에서는 '쉽지 않은 즐거움'과 '즐거움을 주는 난제'라고 옮겼다. 나로선 대구 관계를 살려주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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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5-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냥꾼의 수기>는 예전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16번에 <부자> <첫사랑>과 함께 실려있었는데 요즘은 안 나오나요?

로쟈 2011-05-19 22:41   좋아요 0 | URL
절판된 지 이미 오래인데요.^^ 그리고 <부자>와 같이 실렸으면 완역본이 아닙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20 18:33   좋아요 0 | URL
사냥꾼의 수기에는 다섯개의 단편이 들어있네요.더 많은 편수로 되어 있나 보군요.

로쟈 2011-05-21 15:41   좋아요 0 | URL
25편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21 15:50   좋아요 0 | URL
다 읽고 싶어요.분량이 대단하군요.

미지 2011-05-2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게네프로부터도 단절된 타자의 모습"... 찡합니다...

로쟈 2011-05-21 15:36   좋아요 0 | URL
좋은 해석이에요...

雨香 2011-05-2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왜 읽나? 나이가 들면서 계속 드는 질문입니다.
학생때는 책을 통해 삶의 방향을 세우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이 둘 아빠에 40이 얼마 안 남고, 회사에서의 위치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서의 책 읽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가 몇 년 전부터 저를 괴롭혀온 문제입니다. 그래도 읽는다라는 자세로 임하기는 하는데 해럴드 블룸의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튼튼하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를 깨닫기 위해 책을 읽는다”로 수정해야 겠습니다.

멀기만한 주제인 고전읽기... 블룸의 책이 가이드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고전읽기 목록을 블룸의 책으로 잡아보겠습니다.

로쟈 2011-05-21 15:36   좋아요 0 | URL
좋은 가이드이긴 한데, 잘 읽히는 영어/번역은 아닙니다.^^;

페크pek0501 2011-05-20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기를 즐겁게 연주하려면 악기로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흥미를 잃으면 악기와 멀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책을 즐겁게 읽으려면 책 읽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때 흥미를 잃고 인내로써 읽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되도록 재밌는 책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조건 명작만 골라 읽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지루한 명작도 많으니까요.

책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중엔 다소 지루하거나 딱딱한 내용의 명작의 책도 즐겁게 읽게 되는 경지에 가게 됩니다. 명작이란 읽다보면 명작이라 할 만한 훌륭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어서 그 새로운 발견을 하기 위해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책부터 읽으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가령 연애소설처럼 흥미로운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국내의 대중 연애소설부터 읽다가 세계명작 연애소설로 옮겨 가다보면 다른 분야의 책에도 자연히 관심이 갈 듯합니다. 그냥 제 생각입니다.

로쟈 2011-05-21 15:38   좋아요 0 | URL
ㅎㅎ 연애소설이라면 재미없어 하는 독자들도 있는데요. 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