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라 공항서점(미니 공항서점이라고 해야겠다. 큰서점이 따로 있을까?)에서 얇은 책을 구입했다. 클레어 키건의 단편집 <너무 늦은 시간>(2023). 가장 최근작이다. 키건의 책을 최근에 나온 <남극>(원래는 첫 소설집) 말고는 다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늦은 시간>은 확실치가 않다. 그건 모아놓기만 하고 읽지 않아서다. 키건의 마지막 작품을 나는 가장 먼저 읽었다.

옮긴이가 잘 정리한 대로 여성혐오를 주제로 한 단편이다. 본문에 C-워드가 세번이나 나와서 놀랐다(<채털리부인의 연인>에 등징하여 독자들을 경악시켰다는 단어 아니가). 이 욕설에 대한 합의된 번역어가 있는지 모르겠는데(한 <채털리 부인> 번역에서는 ‘칸트‘라고 옮겼던가? 믿거나 말거나) 역자는 ‘씹년‘이라고 옮겼다. 따져보면 욕설도 역자들은 애먹게 한다.

소설은 주인공 카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결혼적령기의 하급공무원이 적당한 조건의 여성 사빈과 만나 연애하고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그녀가 마음을 고쳐먹으면서 결국 혼자 남게 된다는 ‘남과 여 이야기‘이다. 한데 이 단편에서 카헐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여성혐오자의 대명사이다. 아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여성혐오자이다. 아내와 엄마를 짓궂은 조롱거리로 삼았지만 이 세 남자는 무엇이 문제이고 잘못인가에 대한 자각조차 갖고 있지 않다. 카헐이 어렴풋이 문제의 기미를 느끼는 정도.

소설에서 ‘너무 늦은 시간‘은 카헐에게 너무 늦은 시간이다. 카헐과 같은 부류의 남성 독자가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바로 그 경우에만 ‘너무 늦지는 않은 시간‘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잠시 후 그는 부드러운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힘겨운 생각에 빠져서 애를 썼다. 그러다가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가스불 앞에 서서 버터밀크 팬케이크를 팬에서 뒤집어가며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가 식탁 상석에 앉고 카헐과 남동생이 양옆에 앉았다. 둘 다 20대 대학생이었고, 주말을 집에서 보내려고 빨랫감을 들고 온 참이었다. 어머니가 세 사람의 접시를 식탁으로 가져다주자 셋이서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자기 접시를 들고 와서자리에 앉으려고 했지만 동생이 손을 뻗어서 의자를 홱 빼버리는 바람에 바닥에 자빠졌다. 늦게 결혼한 어머니는 그때 예순 살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아버지는 껄껄 웃었다. 세사람 모두 실컷 웃었고, 어머니가 바닥에 떨어진 팬케이크와 깨진 접시 조각을 줍는 동안에도 계속 웃었다.
카헐은 마음 한구석으로 아버지가 다른 남자였다면,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았다면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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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폴란드 문학기행의 첫날, 일정이 순조롭게 지연되었다. 환승편 비행기 시간이 늦춰지더니 결국(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출발 항공편도 3시간여 지연되었다. 이런 경우 선택지가 있는 게 아니므로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식사 바우처로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대기중이다. 3시간여 여유시간 내지 자유시간. 일정표에 따르면 프라하에서의 자유시간을 미리 당겨쓰는 게 된다.

이번 여행은 체코와 폴란드의 네 도시를 찍게 된다. 체코의 프라하와 브르노, 폴란드의 크라쿠프와 바르샤바(두 나라의 수도와 제2도시를 찍는 일정이다). 바르샤바를 경유하여 프라하로 가는 거라 동선만 보면 한바퀴 돌고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문학기행을 타이틀로 걸었으니 목표한 작가들이 있을 터인데, 체코에서는 차페크와 카프카, 쿤데라가 메인 작가이고(<아우스터리츠>의 작가 제발트가 추가된다), 폴란드에서는 미츠키에비츠, 시엔키에비츠, 쉼보르카가 메인이다(미츠키에비츠문학관에서 다른 작가들의 자료도 전시돼 있을 듯하다). 거기에 바르샤바국제공항을 쇼팽공항으로 만든 쇼팽이 추가된다

차페크가 체코 국민문학의 아버지격이라면, 미츠키에비츠는 폴란드 민족문학의 상징이다. 카프카는 프라하를 대표하는 작가이고 모라비아의 주도 브루노는 쿤데라의 도시가 될 예정이다(올 7월에 3주기를 맞아 쿤데라가 브로노의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2023년 파리에서 사망한 그의 유해는 지난해 1월 브로노로 옮겨졌다). 크라쿠프는 쉼보르스카의 도시이고 바르샤바는 물론 폴란드 문화예술의 수도이다. 거기에 더해 나치독일의 두 수용소, 프라하 근교의 테레진과 크라쿠프 근교의 아우슈비츠도 가볼 예정이다.

바르샤바에서는 폴란드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아이작 싱어의 자취도 찾아보려 한다. 한강 작가의 <흰>에 등장하는 바르샤바 봉기박물관도 찾아가볼 예정이다. 개인적으론 키에슬롭스키 영화의 분위기도 느껴보는 것이 바르샤바 일정의 또다른 목표다.

예정대로라면 보딩타임인데, 아직 3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책 한권을 읽을 수도 있는 시간이니 가방을 열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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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상태는 어떠한가
서리 내린 아침길을 걸어
버스터미널에 도착
그리고 다시 공항터미널로 향한다
빛의 속도로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기내식 생각에 맘을 바꿨다
폴란드항공의 기내식이 궁금해서다
폴란드 승무원이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다
프라하의 상태가 궁금할 뿐
프라하를 떠난 지 8년 반
빛의 속도로 간다면 
밤하늘 시리우스까지
(편도로 그렇다는 거다)
시리우스까지 가려다
프라하로 향한다
바로 가지는 않는다
프라하의 상태가 궁금하여 
바르샤바에 들른다
바르샤바의 아파트에 
들르는 게 아니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려는 게 아니다
나는 이중생활자가 아니다
(베로니카의 안부가 궁금하군)
나는 매정하게 프라하로 떠난다
프라하의 아침을 향하여
가차없이 떠난다

이제 공항터미널이다
체크인부터 해야겠다

(카프카의 프라하를 놓고 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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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체코폴란드) 문학기행 전야에 마지막으로 읽은 건 필립 로스와 밀란 쿤데라의 대화다. 대화라고는 하지만 필립 로스가 인터뷰어로 질문을 던지고 쿤데라가 답하는 형식이다(로스는 영어권에 쿤데라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로스의 가계 자체가 동유럽(갈리시아) 유대인 이민자이므로 동유럽(쿤데라의 개념으론 중유럽 내지 ‘납치된 서유럽‘)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다. 두 작가는 주로 <웃음과 망각의 책>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데, 쿤데라가 소설의 지혜를 말하는 대목에선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다(고 느껴진다).

로스: 그러면 이것이 선생님의 비관주의에서 가장 멀리 나아간 지점이라 할 수 있을까요?

쿤데라: 나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라는 말을 경계합니다. 소설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아요. 소설은 문제를 탐색하고 제기합니다. 나는 내 나라가 망할지 아닐지 모르고 내 인물 가운데 누가 옳은지 모릅니다.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서로 맞서게 하고 이런 수단으로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모든 것에 답을 가지는 것에서 옵니다. 소설의 지혜는 모든 것에 질문을 가진 데서 오죠. 돈키호테가 세상 안으로 나섰을 때 그 세상은 그의 눈앞에서 수수께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첫 유럽 소설이 그이후 소설 역사 전체에 준 유산입니다. 소설가는 독자에게 세상을 문제로 파악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태도에는 지혜와 관용이 있죠. 신성불가침의 확실성에 기초한 세계에서 소설은 죽습니다. 전체주의 세계는 마르크스를 기초로 하든 이슬람을 기초로 하든다른 어떤 것을 기초로 하든 질문이라기보다는 답의 세계입니다. 그곳에 소설의 자리는 없습니다.  - P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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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책>(2026)이란 시집의 마지막 시다. 뒤에 5행이 더 붙어 있지만, 잘라먹어도 요지는 전달되는 듯싶다. 내란 재판이 아직 진행중이고 내란 수괴에 대한 구형조차 내일(13일)로 미뤄진 상태다(결과는 내일 자정을 넘겨 바르샤바 공항이나 프라하공항에서 알게 될 듯싶다). 그러니 아직도 ‘비상시국‘은 진행형이다.

<소설책>은 시인의 세번째 시집이다(교유서가에서 시집이 나오는 줄은 이번에 알았다). 김수영문학상 수상시집이었던 첫시집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기립박수>(2014)은 본 기억이 있다. 아마 서점에서 넘겨봤던 듯싶다(구입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소피아 로렌의 시간>(2018)이 사이에 있었는데 모르고 지나쳤다. 아,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2022)도 시집이군. 정정하면 <소설책>은 네번째 시집이다. 평론가로도 등단한 이력을 보아, ‘평론집‘도 시집 목록에 올라올 가능성이 있다. 1979년 경남 진주 출생. 허수경 시인이 진주 출신이었지...

꽃이 비상계엄을 내릴 수 있다면
웃음만을 지으시라 향기를 출동시켰을 것이다.
바람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면
눈보라를 내몰고 샛바람의 명분을 내세웠을 것이다.
그림자가 반역을 꾀할 수 있다면
햇살의 뒤편에서 웅크리지 않았을 것이다.
백두대간 거친 협곡이 불복종한다면
인위적인 모든 쇠붙이를 거부했을 것이다.
봄을 기다리던 소년의 눈동자가 내란을 일으킬 수 있다면
꽃과 바람과 그림자와 백두대간의 수괴가 되어
이 땅의 유일무이한 권력자들에게
완성된 혁명의 풍경을 되돌려주었을 것이다.
보이는가? 우리 모두는 비상시국이었다.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민주주의의 함성을 지키기 위해
한 번도 느슨한 풍경을 보인 적이 없다.
봄이 되돌아올 때마다 어떤 풍경에선 피가 흐르고
기쁨과 눈물이 겹쳐 보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결코 계엄을 푼 적이 없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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