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고 언제부턴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강의한다
언제던가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아무래도 간이 안 좋은 것 같다는 걸
처음 읽고 나는 만세를 불렀지
브라보 도스토예프스키
요즘은 도스토옙스키라고 적어
내가 읽은 건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이 에이치 카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지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보다 나중에
읽었지만 먼저 쓰인 지하생활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새로운 출발
내게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새로운 시작
인간은 심술궂고 변덕스럽다고
그는 말하지 왜냐면 자유롭기에
예측가능하지 않고 계산가능하지 않지
자유로우니까 맘대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맘대로 재단할 수 없고 맘대로 동정할 수 없어
나만의 치통은 나만의 고통이기에 고귀한
고통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테야
치과에 갈 때마다 시험에 드는 기분이야
이래도 바꾸지 않을 텐가 심문당하는 기분이야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고 이마에 써붙일까
고통의 형이상학을 들어줄 사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그냥 계산만 치렀어
지하생활자는 마흔이었으니 이젠 내가 더
나이가 많아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은 지
삼십 년이 되었군 행복 따위를 경멸한 지
삼십 년 내내였다고는 하지 않겠어
그래도 인간은 한갓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네
무슨 기계장치가 아니라네 그게
인간의 자존심 그걸
도스토옙스키에게 배웠지
그래서 이 모양이지
브라보 나의 도스토예프스키
브라보 나의 인생
이렇게 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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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8-05-0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만의 치통은 나만의 고통이기에 고귀한
고통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테야‘
브라보~^^

로쟈 2018-05-04 13:11   좋아요 0 | URL
^^
 

시와 철학을 주제로 플라톤을 얘기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서 소쉬르의 기호론을
말하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적 전회를 말하고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 사이
시의 향방을 말하고 방향을 거꾸로 말하고
미래파에 대해 험담하고
분석철학의 옆구리를 찌르고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 하이데거를 들먹이고
자연어를 서로 잡아당기는 시어와 인공어를 논하고
시와 철학에 대해서 예상치못한 강의를 하고
나로선 다르게도 할 수 없는 강의를 마치고
이제 시와 철학에서 놓여난다
너희도 이제 따로 가렴
시는 시대로 철학은
철학대로 나는
선릉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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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철학을 강의하러 가는 길
시와 철학도 지하철로 가야 한다
아침 출근길 만원은 아니어도
거의 만원
가장 철학적인 시가 무엇이었나
궁리하면서 전철을 기다리고
김춘수의 꽃이라고 할까
우리는 모두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할까
의미가 되고 싶다고 시인이 고쳤던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잠시 두리번거리고)
그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지
명명행위로서 언어가 갖는 존재변환의 힘
그런 걸 얘기할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깊이 있는 철학이고 발견인지
그런 걸 시로 표현했다는 것뿐이지
그렇잖아 혼자 설득하고
김춘수는 릴케를 노래하기도 했지만
누가 김춘수를 노래하는지
릴케처럼 노래하는지
그런데 꽃은 가장 난해한 한국시지
진달래꽃과 나그네와 서시 중에서
님의 침묵을 넣어도 그래
대중의 생각이 그래 가장 난해하기
어려운 시가 가장 난해하고
난해한 시는 쉽다고 해
김소월의 산유화가 얼마나 난해한지
갈봄여름없이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먼후일은 또 얼마나 난해한지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먼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이 난해한 시제를 보라
김수영의 풀은 또 얼마나 난해한가
풀이 울다 웃다 누웠다
일어났다만 반복하는 시
난해한 게 철학의 기준이면 가장
철학적인 시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려니
남구로 지난다 아직 더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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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5-03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원래 난해한 건가요?
아니라면 언제부터 난해해진 건가요?
이 난해한 시를 찢어보고 헤쳐보고 씹어보면 덜난해해지긴 하나요?
시 강의도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8-05-03 13:38   좋아요 0 | URL
김춘수 시 말씀인가요? 나중에 해독법 강의를 마련하겠습니다.~

모맘 2018-05-04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에서도 시강의 부탁드립니다~

로쟈 2018-05-04 10:47   좋아요 0 | URL
네 검토해보겠습니다.~
 

매일같이 시를 쓰는 건 트레이닝
트레이닝복을 입고 쓰는 건 아니지만
매일같이 단련시킨다 석달치
피트니스센터 이용권 끊고 하루도 안 다닌 내가
두 번인가 연장하고도 안 다닌 내가
작전하듯이 시를 쓴다 작전은
몰래 해야 작전이지만 무슨 작전인지는
나도 모르고 그래도
소총 들고 봉천고개 사수하던 예비군 자세로
뭔가 하는 듯한 자세로
시를 쓴다 쓰다 보면 어딘가에
투입될 것인지
(설마 투하될 것인지)
그런데 시는 무엇과 싸우나
시는 누구와 싸우나
커크 더글러스와 싸우나
그건 너무 오래 전이니
마이클 더글러스와 싸우나
월스트리트의 마이클
원초적 본능의 마이클
왠지 아는 것 같은 마이클
아, 장미의 전쟁에서는 캐서린 터너와 한판 붙었지
그러고는 캐서린 제타 존스와 재혼한 건가
아무튼 마이클 더글러스와 싸우는 것인가
마이클의 생각은 어떤가
생각 없이 싸우나
그래도 시인데
지금이야 트레이닝이지만
설마 일없이 쓰겠는가
설마 일없이 인상쓰겠는가
하면서 단련은 하는데
어디에 투입될지는 나도 모르고
(이건 어디에 물어보나?)
그냥 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아마 내일도
누가 읽는지도 모르면서
다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르면서
뭔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매일같이 쓴다
매일같이 나무에 물을 주면 죽은 나무도
살아난다고 믿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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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5-0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늙어가다 죽는 거지요~
요즘 틈틈이 이비에스 고교인강
보고 있어요. 학습부진인 아들
가르치기 위해 수학 과학을 필기하면서요... 그 옛날 정석과 씨름
하던 때가 생각나고... 지금은 여유와 재미가 있어요^^ 쌤의 시쓰기도 그러하길요~ 근데, 쌤! 죽은 나무는
살릴 수 없어요, ㅎㅎ

로쟈 2018-05-03 13:40   좋아요 0 | URL
죽은 나무 얘기는 영화 희생에 나옵니다.~

로제트50 2018-05-03 13:42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너는 봄비
라고 한 줄 썼는데
오후강의 저녁강의 마치니 비는
온데간데 없다 너는
비였나 비는 너의 과거인가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것인지
나는 무얼 쓰려고 한 것인지
비와의 관계?
(그 비를 말하는 게 아님)
따져보면 없는 관계도 아니다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니고
내외하는 사이도 아니다
어느 때고 너는 비였지
너는 내렸고 나는 맞았지
걸으면서 맞았고 뛰면서도
맞았어 우산으로도 맞고
우산이 뒤집어져서도 맞았어
돌아다니면서도 맞았어
서울 대구 부산
부산에선 바람도 맞았어
그래 어제는 대전에서 맞았지
지하철역 입구에서 택시를 내리지 않았으면
쫄딱 맞았을 비였어
(이거 시야?)
커피 한잔 같이 마셔본 적 없지만
불러보고 싶었지
너라고
너는 봄비
아는 사이도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게 우리는 지나가고
지나치고
얼굴도 모르면서 느낌으로만 중얼거려
비가 오는 것 같다고 중얼거려
네가 오지 않았을 때 섭섭하기도 했지
우산 들고 나왔을 때
너를 기다린 건가
우리는 만나도 일정이 없는 사이
어떨 땐 창밖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사이
그래도 기다린 건가
기다린 건가
그러다 한 방울 떨어지면
은근히 좋았어 비
비다
너는 비
지금은 온데간데 없는 너
혼자서 멋쩍게 불러본다
우리는 멋쩍은 사이
너는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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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3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듬이 들리는듯한 시~제 취향저격~~^^

로쟈 2018-05-04 17:03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