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만에 나온 김중식의 두번째 시집 <울지도 못했다>를 5분만에 읽었다(그렇게 읽다가 걸리는 시를 꼼꼼히 읽는다). 그러고는 떠올린 게 ‘웃지도 못했다‘란 제목. 첫 시집 <황금빛 모서리>에서 분명 맘에 들어한 시들이 몇편 있었는데 그 ‘김중식‘을 알아보지 못하겠다. 내가 잘못 봤던 것인지. 차라리 처음 기억만을 남겨두는 게 나았을지도.

먼 곳에도 다른 세상 없는데
새 대가리 일념으로 태평양을 종단하는 도요새
산다는 건 마지막이므로
살자,
살아보자,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니.
-‘도요새에 관한 명상‘에서

내가 아는 건
가을 숲 불꽃놀이가 끝나더라도
우리가 할 일은 봄에 꽃을 피우는 것
가장 깊은 상처의 도약
가장 뜨거웠던 입의 밎춤
할례당한 사막 고원에 핀 양귀비처럼

언제 파도가 왔다 갔는지
사막에서 바다냄새가 난다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할 때
우리는 다가가면서 멀어질지라도
봄에 할 일은
꽃을 피우는 것
-‘물결무늬 사막‘에서

기억의 착오가 아니라면 김중식은 이런 류보다 더 매력적인 시를, 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젊은 시인이었다. 이제는 젊지 않은 나이에 두번째 시집을 들고서 나타났지만 아쉽게도 내가 기대한 모습은 아니다. 시인의 말로는 ˝첫 시집이 고난받는 삶의 형식이있다면, 이번 시집은 인간의 위엄을 기록하는 영혼의 형식이다.˝ 그의 언어는 위엄보다 고난을 기록할 때 더 빛나는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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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사람 시인선‘의 세번째 시집으로 나온 송진권의 <거긴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를 펼쳤다가 ‘송홧가루 묻은 풍경‘에서 눈길이 멎었다. ‘화투시‘의 한 장면이다.

청단 홍단을 깨고
비약 풍약을 깨며
파투 난 화투 파투 난 인생을
착착 다시 손에 접어 치며
패를 돌리는 십 원짜리 민화투
다음 판엔 초단이라도 하겠다며
늙은이들 웃음소리도 송홧가루 묻어
뻐꾸기 울음소리에 뭉쳐들지요

시인선의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송진권 시인도 내게는 낯선 이름이다. 하기야 새로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 대다수가 내게는 그렇다(짐작에 우리는 최다 시인 보유국이다). 이 대목에 눈길이 멎은 건 오래 전에 가방에 넣고 다녔던 시가 생각나서다. ˝숙아, 인생은 그날이 꽃과 같아˝라는 구절은 포함한 시인데, 제목도 시인도 기억날 듯하면서 기억나지 않는다(문지시인선의 목록을 보면 떠올릴지도). 벌써 2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그렇게 시들은 복사해서 가방에 넣고 다니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던 것 같다. 그게 나였던가, 적잖이 놀란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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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7-1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들을 복사해서 가방에 넣고 다니는
국문학과 다니는 오빠
아니고 노문학과 다니는 오빠야~셨구요.
미대 다니는 오빠와 문학과 다니는 오빠중에
누가 더 인기가 많을까요?ㅋ

로쟈 2018-07-18 23:45   좋아요 0 | URL
미대 다니는 오빠는 제가 모르는 사정이라..

모맘 2018-07-19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아, 는 찾으셨는지요?
궁금한 시네요

모맘 2018-07-1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한 선배의 시들을 타이핑했던 기억이 나네요 선배의 친구가 감수를 했다고 복사집 표지에 적어둔것도 아! 하고 떠오릅니다 한 부를 갖고있었는데 찾아봐야겠네요ㅋ

로쟈 2018-07-19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성호의 ‘고향집, 폐허‘라는 시예요.~

모맘 2018-07-1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모맘 2018-07-20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8 7월 함성호의 시집을 검색하다가
로자쌤이 서른여덟에 올린 1998스물들에게 쓴 서른의 글을
읽었어요(복잡하지만 아시죠?)ㅎㅎ 로자쌤의 글속에는 그보다 10년전인 1987년도도 있고요 대한민국 땅 이곳저곳에서
살아야할 이유를 찾고 있었던 스물들을 떠올려봤습니다 참 따뜻한(?) 글이었습니다 1987
1998 2018 뭔가 있어보이네요ㅋ

로쟈 2018-07-20 17:57   좋아요 0 | URL
네 조교할때 쓴게 벌써 20년전이네요.^^
 

아침에 사과 반쪽을 먹었어
감자도 뽐므지만 사과가 뽐므
너의 얼굴 반쪽을 먹었네
반쪽이 된 네 얼굴
레이스를 뜨는 뽐므
너를 보았던 그해 여름
아직 주근깨가 남아있던 뽐므
울지 않았던 뽐므
나는 제대를 앞두고 있었네
자기 앞의 생과 함께
레이스 뜨는 여자를 읽었네
그녀의 이름은 잊었네
뽐므만 책장에 남았네
그렇게 지나간 일이 되었다는 걸
사과 반쪽을 먹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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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7-1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취향인 책-책 읽어주는 남자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내 취향아니어서 사지 않은 책
-책 읽어주는 여자
레이스 뜨는 여자

남들은 다 좋다는데 내 취향 아니어서
읽다 만 책-자기 앞의 생

사과는 뽐므
감자는 뽐므 드 떼르(땅의 사과)
여자는 팜므

로쟈 2018-07-17 23:14   좋아요 0 | URL
네 각자 취향이 있는 법이죠.
 

로나는 괜찮아
로나, 알로나, 알료나 모두
일로나도 괜찮겠어
로라, 슬픈 로라가 있었지
우리에겐 저마다 로라가 있었어
일로브나도 좋아
이리나와 같이 친구할까
하지만 로리타는 안돼
로리도 물론이야
그건 금지구역이야
로나로 가
로나가 가르쳐줄 거야
로나를 믿기로 해
로리는 안돼
왜 자꾸 로라가 생각날까
로라는 눈물나게 해
로라를 기억해
아니 로라는
이제 그만 놓아주자
로나로 가
로나를 사랑해야 해
로나는 괜찮아
로나 곁에 있어야 해
로나가
로라
자꾸 슬퍼지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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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다
장대비가 내렸고
옥수수가 키보다 높이 자랐다
세상이 잠시 슬펐다
누구를 기다렸는지 잊었다
기다리던 시간만 발자국처럼 남았다
빗물에 찍힌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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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7-16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약없는 아니고, 기약있는 기다림 중에 이런 시라니~
자신의 부재를 즐기라는 넘의 남자
빗물에 군화 발자국이라도 찍게
시원하게 한번 와주면 좋으련만~햇볕만 쨍쨍ㅜㅜ

로쟈 2018-07-16 21:58   좋아요 0 | URL
땡볕이라 고생을 좀 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