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바닷가
바닷가로 가는 길은 길고 홀쭉하여라

바닷가에는 바닷가의 풍경이 주인이지
바닷가의 선을 긋는 건 파도의 일
쓰고 지우고 반복하는 건 파도의 변덕이지

내가 적은 이름도 있었을 테지
파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 테지만
머나먼 바닷가의 머나먼 이름

바닷가의 무대에선 동선을 알려달라는 듯
갈매기가 끼룩댄다

갈매기의 대사는 누가 적는 것일까
머나먼 바닷가로 함께 가자던

개를 데리고 가자던
머나먼 바닷가에 가보면
다시금 멀어지는 머나먼 바닷가

언젠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었지
우리도 한때는 바닷가의 풍경이었지
바닷가의 그네와 바닷가의 벤치 사이로

얼마나 많은 변덕이 덮쳤던 것일까
지금은 갈매기마저 퇴장하고
나 혼자 쓰다 지우다 반복한다

머나먼 바닷가 이제는 텅빈
머나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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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4-2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덕이 바닷가만 덮쳤던 것은 아니었으니
한때 바닷가의 풍경이기도 했던 난
이젠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뿐이네요.
바닷가에게

로쟈 2019-04-27 00:00   좋아요 0 | URL
세월의 힘이죠.~

로제트50 2019-04-2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 바다는 놀이터.
커서는 그냥 바라만 보는 바다.
몇 해전 케이블카 타고 물결 위로
건너던 바다.
머나먼 바닷가 (표현이 맘에 들어요).
이렇게 바다는 점점
관념적으로 변해가네요...

로쟈 2019-04-28 09:18   좋아요 0 | URL
네, 청춘이 관념적으로 변해가는 것처럼요..
 

지방에서 <제인 에어>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귀가중이다. 2주만의 휴일이어서 일단 내일 오전까지는 쉴 작정이다(회복탄력성이 떨어져서 효과가 크지 않더라도 휴식이 필요하다). 그보다 먼저 저녁을 먹어야겠군(서울역에서 식사하는 일이 늘었다).

이번 학기에 영국문학강의를 기획하면서 브론테 자매의 작품을 대표작 <제인 에어>(1847)와 <폭풍의 언덕>(1847) 외에 두어 작품 추가하려고도 했는데, 후보가 되는 것은 앤 브론테의 <아그네스 그레이>(1847)를 제외하면 모두 살럿의 작품들이다. <폭풍의 언덕>이 에밀리의 유일한 작품인데 반해서 살럿은 <제인 에어> 외에도 세 편의 소설을 더 완성했다. 가장 먼저 썼지만 사후에 발표된 <교수>와 생전에 발표한 <셜리>(1849), <빌레트>(1853)가 그 목록인데, 이 가운데 <셜리>는 번역되지 않았기에 우리가 더읽어볼 수 있는 건 <교수>와 <빌레트>, 두 편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일정은 빼기가 어려워서(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넣으면서다) 한 작품도 추가하지 못했다. 후보군 가운데 우선순위를 꼽자면 <교수>, <빌레트>, 그리고 <아그네스 그레이> 순이다. 가을의 영국문학기행 전에는 시간을 낼 수 있을는지. 작품과는 별도로 살럿 브론테의 전기도 읽어보고 싶어서 검색하고 두 권을 장바구니에 넣어둔 상태. 동시대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전기는 예전에 구했고, 이번에 찾은 건 그에 비하면 최신 평전들이다. 이 역시도 브론테 자매의 목사관을 방문하기 전에 읽어야 할 책들이다. 내가 브론테 자매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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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4-26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자의 정체성이 없다 모델들에서 갖다 쓴다라는 쌤의 말씀 가지고 수업 뒤 차한잔에서 많이 웃었습니다^^역에서 드시는 식사지만 맛나게 드십시오
고생하셨습니다^^

로쟈 2019-04-26 20:24   좋아요 0 | URL
자소서가 대개 거기서 거기인 것과 같은 이치죠.~
 

강의 공지다. 어느 새 여름강의 공지인데, 롯데문화센터(본점)에서는 이번 여름에 현대미국작가로 핍릴 로스와 돈 드릴로, 코맥 매카시의 주요작을 읽는다. 강의는 6월 13일부터 8월 22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15:40-17:10)에 진행되며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1강 6월 13일_ 필립 로스, <에브리맨>



2강 6월 20일_ 필립 로스, <죽어가는 짐승>



3강 6월 27일_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4강 7월 04일_ 필립 로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5강 7월 11일_ 돈 드릴로, <제로 K>



6강 7월 18일_ 돈 드릴로, <마오 II>



7강 7월 25일_ 돈 드릴로, <화이트 노이즈>



8강 8월 01일_ 코맥 매카시, <로드>



9강 8월 08일_ 코맥 매카시, <모두 다 예쁜 말들>



10강 8월 22일_ 코맥 매카시, <핏빛 자오선>



19. 0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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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6 0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6 0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6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6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현대 영국문학 강의에서 요즘은 계속 줄리언 반스를 다루는데 오늘 읽은 건 2016년작 <시대의 소음>(다산책방)이다. 정확한 집필 배경은 알 수 없으나 주제상으로는 맨부커상 수상작인 전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2011)와 이어지는 것으로 읽었다. 둘다 시간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인데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내면을 다룬 전기소설로 이오시프 만델슈탐의 시집에서 제목을 따온 <시대의 소음>에도 시간/시대(time)는 핵심 화두다. 다만 전작과는 전혀 다르게 시간/시대에 맞서서 책임적 주체가 되는 것과는 다른 선택지를 탐색한다.

쇼스타코비치가 보여주는 건 그런 책임으로부터의 후퇴이고 주체성의 포기다(그는 스탈린 사후 최고 권력자가 된 흐루쇼프에 견주면 자신은 ‘벌레‘라고 말한다). 그는 작곡가로서 자존심은 유지하지만 부당한 권력의 간섭이나 탄압에 항거하지 않는다. 그에게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굴종적 주체다. 이 굴종적 주체라는 표현도 아이러니인데 내면과 외양 사이의 간극과 불일치를 표시하는 아이러니가 쇼스타코비치의 처세술이자 생존법이다. 그는 그를 통해서 ‘겁쟁이‘로서 스탈린시대의 숙청을 피해가며 노년까지 목숨을 부지한다. 반스가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에서 잘 보여주는 건 그런 겁쟁이의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내면이다(이 소설은 아이러니에 대한 탐구로서 훌륭하다).

반스가 참고한 책들 가운데 엘리자베스 윌슨이 쓴 쇼스타코비치의 평전은 강의가 끝나고 주문했다. 매강의가 끝날 때마다 그 보상으로 책을 구입하는데 주로 이런 류의 평전이거나 관련서다. 스탈린 시대 예술가 탄압을 다룬 책이라면 <시대의 소음>이 다른 책들에 비해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가령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상> 같은 책과 비교해보라). 대신 반스의 주안점은 다른 데 있고 나는 그것이 아이러니와 함께 예술(음악)의 존재 목적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음악은 인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음악 자체로 존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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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2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산책방)을 강의에서 다룬 김에 간단히 적었다(분량상 더 자세히 적지 못했다). 반스의 책은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 프랭크 커모드의 책과 원제가 같다. 지금은 절판된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문학과지성사)인데, 강의에서도 그와 관련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책으로는 반스의 에세이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다산책방)도 같이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주간경향(19. 04. 29) 시간의 파괴적인 힘 앞에 선 나약한 인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2011년에 ‘너무 늦었다’는 평을 들으며 줄리언 반스에게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안겨다준 작품이다. 앞서 세 차례나 최종심에 올랐으면서도 매번 고배를 마신 반스는 수상작 발표 전에 어떤 예감을 가졌을지 궁금하다. 물론 제목의 ‘예감’은 문학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원제를 그대로 옮기면 ‘종말의 예감’ 정도라서다.

종말은 시간이라는 지평에서의 사건이다. 곧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주어지는 불가피한 조건이다. 이 소설이 시간에 대한 성찰로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고 운을 뗀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의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는 문장을 향해 간다. 종말로 향하는 시간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무력화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시간 속에서 모든 인간은 늙어가며 삶의 성취는 마모되고 그 의미는 변질되어 간다. 세상을 ‘거대한 혼란’으로 몰고가는 시간의 파괴적인 힘 앞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패배자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반스가 제시하는 것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토니 웹스터의 사례다. 아직 본격적인 인생이 시작되기 전 학창시절에 토니의 패거리는 셋이었다. 그들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손목시계를 손목 안쪽으로 돌려서 차고 다녔다. 허세이긴 했지만 시간에 대한 저항의 상징성도 갖는다. 시간을 사적이면서 내밀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 사이에 전학생 에이드리언 핀이 끼어든다. 명민한 수재로 수업시간에 교사들과 당당하게 논쟁하는 능력자다. 카뮈와 니체를 읽은 에이드리언은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는 카뮈의 말을 복창하고 “역사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역사 허무주의적 견해를 제시한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회의주의적 견해는 얼마나 정당하며 어디까지 방어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재검토하게 만드는 것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다. 대학에 진학한 토니는 베로니카라는 여학생을 사귀다 헤어지는데, 베로니카는 다시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고 에이드리언은 토니에게 둘이 데이트를 해도 좋은지 묻는 편지를 보낸다. 토니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엽서와는 별개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악담과 저주를 담은 답장을 보내고 장기간의 미국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러고는 40년의 세월이 지난다. 

이제 60대가 된 토니는 그 사이에 결혼해 자녀를 두었지만 아내와 이혼했고 직장에서도 은퇴한 뒤 노후를 보내는 중이다. 그가 뜻밖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는 일이 이야기의 출발점인데, 그 유품은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500파운드의 돈과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다. 토니는 뒤늦게서야 에이드리언의 자살에 자신도 연관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건네받은 에이드리언의 일기 일부에서 에이드리언은 ‘축적’이란 용어를 써서 자신의 상황을 수학공식으로 표현하는데, 축적이란 토니의 표현으로는 ‘책임’에 해당한다. 자신의 과거를 잊거나 부인하던 토니는 비로소 충격적인 진실과 대면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자각한다. 기억의 서사로서 ‘종말의 예감’이 책임의 서사로 전화되는데, 이 책임이 파괴적 시간에 맞서는 인간적 대응이다. 


19. 0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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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5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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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5 18: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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