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선생의 1주기를 맏아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난다)이 재간되었다. 지난해에 적었던 것 같은데 저자는 그의 책들과 함께 사후의 삶을 살아가게 되고 선생도 마찬가지다. 이 사후의 삶이 진정한 불멸의 삶이다. 이미 갖고 있는 책이지만 쪽수만 보면 분량이 좀 늘어났다. 글이 추가된 것인지 편집상의 차이인지는 실물을 봐야 알 것 같다. 장서용으로 다시 주문.

강의에서 나는 곧잘 ‘잘 표현된 불행‘이란 말을 인용한다. 문학이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유력한 답변이라고 생각해서다. 오늘 강의에서 다룬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작품도 약간 응용하자면 ‘잘 표현된 절망‘의 사례다. ‘잘 표현된‘ 불행과 절망이 우리를 불행과 절망에서 구원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불행과 절망이건 간에 그것이 잘 표현된다면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학의 신앙이고 내기다. 비록 불행을 행복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놓을 수는 없더라도 잘 표현된 불행과 절망은 우리를 위로한다.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거지‘에서 적선을 하고자 주머니를 뒤져보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당황해하는 화자에게 그것만으로도 적선을 받은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는 거지를 떠올리게 된다. 문학과 독자는 그런 ‘빈 적선‘을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아닐는지.

이번에 <잘 표현된 불행>과 함께 나온 책은 파워 트위터리언이었던 선생의 트위터글 모음집이다.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난다). 이런 종류의 책이 처음은 아닌 듯하지만 분량으로는 기록이지 않을까 한다. 무려 668쪽. 얼마만큼 열정을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는데(중독?) 그 정도면 불문학 교수와 비평가라는 직함에다 트위터리언을 더 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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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8-0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읽자마자 기헝도가 떠오르는~

로쟈 2019-08-10 11:00   좋아요 1 | URL
좋은 사례죠.
 

광복절을 한주 앞두고 한일관계가 ‘경제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아베 정부의 오만과 오판이 사태를 불러일으키고 또 악화시키고 있는데 장기적으로 한일관계 재정립의 좋은 계기가 될 듯싶다. 역설적이지만 그렇다. 은닉해 있던 ‘친일파‘(매국세력)가 커밍아웃하고 있는 것도 이번 사태의 소득이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베는 ˝항상 악을 행하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선을 행하는 힘의 일부˝다. 후쿠시마 원전 폐기물의 꼼수 처리 시도만 빼고.

이번주에 나온 가장 묵직하면서 시의에 잘 맞는 역사서가 ‘걸작 넌픽션‘ 시리즈로 나온 존 톨런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글항아리)다. 거의 1400쪽 분량. 원제가 ‘더 라이징 선‘이니까 ‘떠오르는 태양‘(욱일)이어서 번역본 제목과 무관할 듯싶지만 부제가 ‘일본제국의 몰락과 패망1936-1945‘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 제국 패망사‘. 사실 우리보다도 아베와 그 무리들이 정독하고 교훈을 얻어야 하는 책이다.

저자 톨런드는 괴력의 전쟁사학자로 평전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페이퍼로드)의 저자이기도 하다. 독일과 일본 현대사에 두루 정통하다는 것인데 2차세계대전사를 중심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희소한 사례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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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목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작가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의 원제는 ‘Writers Between The Covers‘다. 번역은 까다롭다. 부제가 ‘작가의 밀애, 책 속의 밀어‘인데, 제목을 정하느라 편집부에서 고심을 했을 듯싶다.

˝헤밍웨이, 톨스토이, 피츠제럴드, 애거사 크리스티, 잭 케루악…… 세계문학의 거장 101명의 소설보다 강렬한 열애와 치정의 기록. 세계문학의 거장 101명과 그 연인들의 삶과 사랑을 조명한 책이다.˝

10명도 아니고 101명을 다루고 있다는 게 이 책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나처럼 문학강의를 상시적으로 하는 입장에서는 요긴한 책. 용도에 맞게 부르자면 ‘작가들의 연애사전‘이다. 제목은 ‘사자의 서‘ 종류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데, 작가가 아닌 철학자들을 다룬 책으로 사이먼 크리칠리의 <죽은 철학자들의 서>(이마고)가 있기도 했다. 이 책은 제목도 원제 그대로다. 무려 ˝탈레스에서 데리다까지 동서고금의 유명 철학자 190여 명의 죽음만을 모아놓았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제이슨 포웰의 <데리다 평전>(인간사랑)도 아직 읽지 않았다. 이러다 이런 평전들을 끝내 다 읽지 못할지도. 자크 데리다에 대해서도 어디까지 읽고 또 어디까지 강의에서 다룰 수 있을지 견적을 내봐야겠다. 제임스 조이스와 나보코프를 강의에서 다루면서 어느덧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문학강의의 끝(목표이자 한계)에 다다른 느낌인데 철학강의에서라면 데리다가 그렇다(가을이면 15주기가 된다).

그런 책들을 미친 듯이 사랑했고, 그리고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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괌에서의 짧은 휴가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그러고 보니 특별히 인상적인 식사는 없었다. 괌에서의 맛집 몇 곳을 가봤지만 음식을 기대하고 가볼 만한 관광지는 아니었다. 가격대비면 더더욱. 지난봄 이탈리아여행의 부작용인지도). 자주 가는 카페에서 익숙한 맛의 커피와 함께(날이 더워서 오늘은 아이스커피로).

일상을 구성하는 풍경도 있지만(변함없는 건물과 대로, 그리고 오가는 차량 행렬), 익숙한 소리도 있다. 해독할 수 없으니 소음이라고 할까. 윗층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드릴 소리, 아파트단지를 점령하고 있는 매미 소리, 그리고 카페에서 매번 반복해서 듣게 되는 노래들. 이 소리들이 괌의 파도소리와 바람소리와는 다른 질감의 느낌으로 현실이라는 배경을 구성한다. 내가 연기해야 할 무대가 달라진 것. 그래서 오늘 할일은, 이미 어젯밤부터였지만, 일련의 강의준비다.

여분의 책은 가방에 넣지도 않았는데 넣었다면 가볍다는 이유로 ‘인생학교‘ 중에 골랐을지도. 점검해보지 않아서 내가 몇 권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여하튼 안 읽은 건 확실해서 지난주에 몇 권 구입한 터이다. 가령 <나이 드는 법><지적으로 운동하는 법><정서적으로 건강해지는 법> 등.

더불어 샐린저나 코맥 매카시 같은 은둔형 작가들의 인생관이 궁금해졌다. 지금처럼 너무 과도하게 연결된 세계에서(그렇지만 그만큼 더 외로움을 느낀다는 게역설이다. 많은 사람과 알게 될수록 궁극적으로는 그 ‘무연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니까) 더 희소해보이는 선택이다. 은둔의 철칙이나 노하우도 있을까. 아, ‘인생학교‘에는 <혼자 있는 법>도 있다. 이걸 왜 빼놓았을까(확인해보니 구입한 책이다. ‘혼자 있는 책‘인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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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gles 2019-08-06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에서 돌아오면 익숙한 일상에서 느끼는 안도감이 있죠^^ 그나저나 호캉스를 왜 외국에서 보내야하는지에 대한 신의 섭리는 파악하셨는지..ㅋ

로쟈 2019-08-06 11:53   좋아요 0 | URL
신의 뜻은 모르겠지만 ‘거리‘가 필요한 거죠. 5시간의 거리. 현실에서 떨어지려고 하니 어디로든..
 

지난주 한겨레에 실은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지난달 말에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에 대해서 영화와 함께 강의를 진행했고 요지를 간추렸다(분량상 자세히 적지는 않았다). 내게는 법과 문학의 관계를 성찰하게끔 해주는 탁월한 사례로 읽히는 작품이다. 
















한겨레(19. 08. 02) 판사는 삶을 어디까지 인도할 수 있는가


‘법과 문학'은 대학의 교양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하는 주제다. 상징적 의미에서건 실제적 의미에서건 법은 우리 삶의 많은 일에 관여하며 개입한다. 동시에 우리는 법에 의해서 신분과 권리를 보장받는다. 당연하게도 법의 문제를 다룬 문학작품이 적지 않은데 최근에 읽은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 <칠드런 액트>다. 수년 전에 번역돼 나왔지만 에마 톰슨 주연의 영화가 개봉되면서 뒤늦게 손에 들었다.


소설은 제목부터 법의 문제를 작심하고 다루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읽게 한다. ‘칠드런 액트'가 ‘아동법'을 뜻하기 때문인데, 여기서 ‘아동'이란 말은 18살 미만의 미성년자를 가리키기에 우리식으로는 ‘아동청소년법'에 해당한다. 작가는 아동법의 핵심 조항을 제사(題詞)로 삼았다. “아동의 양육과 관련한 사안을 판단할 때 (…) 법정은 아동의 복지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핵심은 ‘아동의 복지'에 있다. 그 복지를 최우선적 가치로 보호해야 하는 것이 아동법의 목적이고 역할이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국 고등법원의 판사 피오나 메이는 아동법의 대역이고 화신이다. 법정에서 그녀의 판결은 곧바로 구속력을 갖는다. 그녀는 가정사의 온갖 법적 분쟁을 조정하는데, 이는 부모의 의사에 반해서 샴쌍둥이 분리수술을 명령하는 일도 포함한다. 독실한 신자인 부모는 두 아이 모두 죽게 놔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피오나는 비록 한 아이를 죽이는 것이 될지라도 자생능력이 있는 다른 아이를 살리는 것이 차악의 선택이라고 본다. 아동의 복지를 우선 고려한다는 아동법에 따른 판단이다.


공인으로서 피오나는 유능한 판사이고 그녀의 유려한 판결문에 대해서는 대법원장도 경탄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경력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피오나는 아이들을 갖지 않았고 오랜 기간 신뢰해온 남편과 관계도 소홀하게 된다. 급기야는 대학교수인 남편이 피오나의 무관심을 지적하며 공개적인 외도를 선언하고 집을 나간다. 가정이 위기에 봉착했지만 피오나는 또 다른 긴급한 재판에 내몰린다. 백혈병 환자인 한 청년이 종교적 신앙을 이유로 수혈을 거부해서, 병원이 강제치료를 허용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피오나는 이례적으로 직접 병원을 찾아가 청년과 대화를 나누고 갓 바이올린을 배운 그의 연주에 맞춰 노래까지 부른다(영화에서는 바이올린이 기타로 바뀌었다). 이후에 피오나는 청년이 부모와 교회는 물론 그 자신으로부터도 보호받아야 한다고 판결한다. 그의 존엄성보다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근거에서다.


판결에 따라 청년은 강제수혈을 받고서 생명을 건진다.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진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청년은 은인인 피오나를 마치 신처럼 숭배한다. 자신이 쓴 시와 일기를 편지로 보내고 애정을 고백한다. 예순의 문턱에 있는 피오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행동이다. 발단은 피오나가 이례적으로 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법원은 미성년자의 수혈거부에 대해서 병원 편에 선다. 피오나가 병원에 가보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같은 판결을 내렸을 것이다. 즉 피오나의 행동은 일시적으로 법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며 최소한 청년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결국 둘의 이야기는 슬픈 결말로 이어진다.


아동법이 아동의 복지를 고려한다지만 그 복지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청년에게 새 삶을 살도록 해주었지만 피오나는 그의 삶을 어디까지 더 인도할 수 있는가. 작가 매큐언이 문학의 이름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19.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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