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제목만 보고는 '흔한' 중국사 책인 줄 알았다. 어우양잉즈의 <용과 독수리의 제국>(살림). 중국 학자들의 책이 많이 나오고 있어서(인구 대비로 보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런 류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저자의 프로필이 예상밖이다. 미국 국적의 화교 과학자. 그것도 MIT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20년간 교수로 재직한 경력을 갖고 있다. 말 그대로 정통 과학자다. 복잡계이론과 과학철학 쪽의 저서도 갖고 있지만, 역사 쪽으로는 비전문가라고 해야 할 텐데, 놀랍게도 '전문서'를 펴냈다. 그것도 중국 진한제국과 로마제국을 비교하는 방대한 규모의 저작이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저자 어우양잉즈 교수는 1947년생으로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에 선친의 뜻을 좇아 역사 연구에 매진했고, 현재의 미중시대(G2)의 선례로 같은 시기에 동서양을 양분했던 진한제국과 로마제국을 비교해보는 작업을 첫 결과물로 내놓았다. 머리말을 보니 "그년ㄴ에 이 두 제국을 비교한 논문이 적지 않게 발표되고 있지만 이 책 이전에 전문적인 저서는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최초의 전문적인 저서다.(전문적이라는 것은 입담 좋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늘어놓은 대중서가 아니라 학술서의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양쪽에 있는 진(秦)·한(漢)제국과 로마제국의 발전 과정을 비교한 책. 두 제국의 흥망성쇠를 실마리로 삼아, 양대 제국의 정치·경제·군사·민족·사상·관습 등 다방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총체적으로 탐구했다. 특히 두 제국의 같고도 다른 유산이 제국 멸망 후 지금까지 동·서양 세계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강조하면서 그간의 역사적 교훈과 대국 통치의 방법을 총괄했다."


2014년에 미국에서 영어판을 먼저 펴냈고, 내용을 좀더 확장해서 중국어판을 2016년에 출간했다. 한국어판은 이 중국어판을 옮긴 것으로 분량이 919쪽에 이른다. 중국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영어판은 그다지 대중적일 것 같지 않다. 전문역사서 코너에 꽂혀 있을 것 같은 책이다. 하지만, 한국어판은 역사교양서로 출간되었다. 이런 종류의 책이 그래도 독자층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실제 그럴지는 두고봐야겠지만).
















아무튼 저작의 이력에서, 그리고 문제의식과 시도에서 놀라게 되는 대작이다. 최근에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의 첫 권(출간은 마지막이었지만) <진.한>(너머북스)가 나왔기에 자연스레 같이 참고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 일본에서 나온 책으로는 니시지마 사다오의 <중국의 역사: 진한사>(혜안)가 나와 있다. 기억에 일본의 권위있는 인문출판사 고단샤의 중국사 시리즈다. 그리고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에서도 <두 한나라와 두 로마>(글항아리)가 역시 참고할 만한 책. 
















로마사는 워낙에 많은 책이 나와있기에 따로 적을 필요가 없는데, 다만 국내 학자의 책으로 허승일 교수의 <로마사>(나녹)가 가장 최근 저작이어서 적어놓는다. 앞서 <로마 공화정 연구>와 <로마 제정사 연구> 등의 저작을, 단독/공저로 펴낸 바 있다. 그렇지만 국내에서도 로마사와 진한사를 비교한 저서는 아직 없다. <용과 독수리의 제국>은 독자뿐 아니라 전공 학자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지적 자극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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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이 삶아놓은 돼지머리 같은 놈아"

12년 전에 쓴 독서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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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낭비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

12년 전에 쓴 리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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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 간 신춘문예 당선시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원하의 첫 시집이 나왔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꽤 오랫동안 신춘문예 시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다가 <신춘문예당선시집>을 구해서 읽은 게 2018년이 아니었나 싶다(기억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혹은 그 이전에도 당선시집을 읽었다 하더라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화제의 당선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때문이었다. 


















시에 대한, 시집에 대한 글을 간간이 올리면서 대개 언어실험적인 무의미시 경향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달고는 했는데, 그와는 대비되는 시가 이원하의 시였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그 시의 전문이 이렇다.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_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 시의 희귀한(상대적으로 희귀해졌다) 미덕은 자연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시로 만들어낼 줄 안다는 데 있다(한국현대시의 기원이 되는 소월의 어법이 그러했다. 그렇지만 남성시인 소월이 여성적 어조로 만들어낸 '특이한' 시들이었다). 나는 이 시가 예외적인 성취인지, 아니면 이 시인의 탁월한 개성인지 궁금했는데, 시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반가움과 기대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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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20-04-10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바로 장바구니 담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로제트50 2020-04-10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은 거의 안 사는데.
이것은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전출처 : 로쟈 > 전체를 고민하는 힘

11년 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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