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76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버지니아 울프의 첫 장편소설 <출항>(솔)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적었다. 울프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절반 정도를 강의에서 읽은 듯싶은데, 전집이 나온 걸 계기로 전작 읽기로 나중에 기획해보려고 한다...
















주간경향(20. 05. 11) 버지니아 울프 문학 페미니즘의 출발점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작가이면서 페미니즘의 선구자다. 그의 문학은 모더니즘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에 중요한 실마리다. 그 궤적은 문학이 세계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으며 또 여성적 경험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모색하고 탐구해나간 여정이기도 하다. 오랜 집필과 개고(改稿) 과정을 거치면서 서른세 살에야 발표한 데뷔작 <출항>(1915)은 그 여정의 출발점이다. 울프 문학의 초기 문제의식과 핵심 주제를 가늠해보려는 독자라면 필히 ‘승선’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느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울프 역시 성장한 가정환경과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저명한 문인으로 우울증 기질을 가진 가부장적 남성이었고, 세 아이를 데리고 그와 재혼한 어머니 줄리아 덕워스는 남편과 자식들에게 헌신적인 여성이었다. 울프는 이들 재혼 부부가 낳은 네 자녀 가운데 셋째였다. 남편과 자식들을 돌보며 봉사활동도 적극적이었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울프는 충격을 받는다. 아버지 스티븐은 아내의 상실로 인한 빈자리를 딸들로 채우려고 했고, 그런 독단적 태도는 울프에게 가부장적 폭력성을 각인시켜 주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로부터 지적인 성실성과 작가적 재능을 물려받았기에 울프는 아버지에 대해서 애증의 감정을 갖게 된다.

190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글쓰기를 시작한 울프의 문학적 과제는 가부장적 가정의 구속에서 해방된 삶의 모색이었다. 울프는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어머니와 같은 ‘집안의 천사’가 되기를 거부했고,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아버지가 보여준 가부장적 권위와 남성 지배에 맞서고자 했다. <출항>의 주인공 레이첼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고모들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한 스물네 살의 여성이다. 그가 선주인 아버지의 배를 타고 외삼촌 부부와 함께 남미로 가는 여정이 소설의 골격이다. 이 여정은 자연스레 자기발견의 여정이 되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이성들과의 접촉이다.

항해 중 레이첼은 전직 의원인 리처드 댈러웨이와 클라리사 부부를 만난다. 대영제국의 시민이 되는 것보다 더 고귀한 목표는 없다고 믿는 중년의 리처드는 빅토리아시대의 전형적 남성 우월주의자이다. 그는 여성 참정권에 반대하며 아내와는 정치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위인이다. 리처드는 레이첼과의 대화에서 지적 우월감을 앞세워 가르치려 들지만 젊음과 아름다움에 이끌려 일방적으로 키스를 한다. “당신이 나를 유혹하오”라는 것이 그가 변명 대신 하는 말이다.

외삼촌 부부와 브라질에 잠시 체류하게 된 레이첼은 소설을 쓰려는 청년 테렌스 휴잇과 만나고 그의 구애를 받아 약혼까지 한다. 테렌스는 레이첼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테렌스 역시 레이첼과 같은 여성의 사고에 대해서는 위협감을 느끼며 그것을 신체적으로 제압하려고 한다. 사회적 관습상 결혼 적령기 레이첼의 선택지는 리처드나 테렌스 유형의 남성과 결혼하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식의 전형적인 소설 결말이기도 한데, 오스틴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레이첼 이야기의 결말답게 <출항>은 독자의 기대를 뒤집는다. 오지 여행에서 얻은 열병으로 레이첼이 세상을 떠나게 하면서 울프는 결혼소설의 흔한 결말을 거부한다. 레이첼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새로운 관습과 정의에 대한 요구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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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인문학 임파서블 시대의 인문학

13년 전에 참여한 좌담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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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두 권의 고뇌과 한 권의 고통

6년 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새 번역본들의 제목 번역에 관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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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공화주의 철학과 정치이론

10년 전에 스크랩해놓은 리뷰다. 요즘 관심사와 다시 맞아서 링크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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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된 프랑스문학 강의를 다시 진행하게 돼 이달에만 알퐁스 도데, 모파상, 앙드레 지드, 카뮈 등의 작품을 강의하고 더불어 16, 17세기 작가, 사상가들까지 둘러볼 참이다. 문학사의 퍼즐을 맞춰나가면서 미진했던 부분은 보완하고 과제도 체크해놓는 게 일이다(아마도 프랑스문학사를 전체적으로 다시 훑는 건 앞으로 한두 차례 더 가능할지 싶다. 세계문학강의의 로테이션 주기가 4-5년이라서 그렇다).

앙드레 지드의 책과 관련서들을 읽다가 모파상(1850-1893)의 소설론을 참고하려 <삐에르와 장>(1888)을 펼쳤는데(서문으로 그의 소설론 ‘소설‘이 실려 있다), 책갈피의 작가 프로필을 보고 눈을 비볐다. 생몰 연대가 1850-1889로 돼 있는 게 아닌가. 1889년은 모파상이 마지막 소설을 발표한 해이고 그와 함께 작가로서의 수명도 끝났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사망연도를 4년이나 당기다니! 고의인지 무심한 실수인지 아무튼 교정되어야 한다. 가령 1889년 토리노의 광장에서 쓰러진 뒤 지적인 활동이 중단된 니체(1844-1900)의 생몰연도를 1844-1889로 적을 수는 없겠기에.

단편집을 제외하고 모파상의 장편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히는 건 <여자의 일생>이고, 그 다음이 <벨아미>다. 세번째에 놓이는 것이 <삐에르와 장>. 마지막 장편 <죽음처럼 강한>(<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번역됐었다)도 재번역돼 나오면 좋겠다. 생몰연도의 오기를 빌미로 바람까지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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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6 08: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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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6 09: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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