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과 사유 - 김우창과의 대화
김우창 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품절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내 마음속에 늘 있었던 것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영문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영문학을 이 질문을 통해서 바라보아온 것이 나의 독특한 문제의식이라면 문제의식이 아닌가 합니다. 영문학은 한국의 전통과 관련이 없고, 우리의 삶의 급박성과도 관련이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제국주의적 질서 안에서의 힘의 불균형에서 생겨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영문학을 하는가 하는 질문이 다른 많은 걸 생각하게 하고 읽고 쓰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16-17쪽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 그리고 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명하게 의식하지는 아니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들은 철학적인 것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정치학에서) 문과나 철학으로 바꾸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에서는 외국문학이 국문학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래서 영문과를 택하게 되었지요.-18쪽

내가 서울대에 들어간 해에 서울대에 제일 많이 진학한 고등학교가 광주고등학교였어요. 왜 그랬느냐 하면, 서울 사람들, 경상도 사람들은 후퇴하고 전쟁하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광주는 그런 혼란과 고통은 없고 비교적 평화스러웠거든요. 그때 서정주 선생도 조선대학에 와 있었고, 우리 고등학교 선생 중에도 서울대 박홍규 교수가 와서 가르쳤는데, 우리 3학년 담임으로는 이후에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가 되신 나종일 선생이 계셨지요.-22쪽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나 대학에 다닐 때에는 책이 많았어요. 학교 공부는 적고 책은 많은 때였습니다.(...)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질문은 내가 흔히 받는 질문인데, 나한텐 독일 철학과 독문학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반드시 영향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고 또 그 무렵에 그것을 많이 공부했기 때문은 아니지만, 독일의 관념철학 또는 이상주의, 서양어로는 결국 같은 말이 되는데, 그것에 대하여 늘 친화감을 가져왔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3-24쪽

헌책방 얘기를 하였지만, 어떤 미국사람이 "아이들은 책 많은 환경에 두면 호기심 때문에 책을 보게 되는 것이니 학생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죠. 우리도 길바닥에 책이 많으니까 저절로 보게 된 거죠. 그리고 오늘날처럼 산업화, 능률화된 사회가 아니라서 책방 주인이 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책방 주인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죠. -24쪽

손창섭이나 장용학, 이범선의 소설을 대학교 다닐 때 보고 비참함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에 다시 보니까 그 시대가 '얼마나 인간적인 시대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직장에서 잘려 먹을 것도 없는데 의사인 친구의 치과 사무실에 나가 아침부터 앉아 있다가 의사가 점심 먹으러 가면 따라가서 먹는 얘기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능률화되고 경영 합리화가 되어 있는 치과에 가서 그러기 힘들죠. 대학 입학 시험에서도 가령 독일어 시험문제 같은 것은 등사된 것이었는데, 출제 교수가 직접 나와서 읽고 설명하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허술하다고 할까, 인간적이랄까 그런 면도 있었지요. -28-29쪽

가장 중요했던 건 자유로웠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대학에서도 그러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도 많지 않고 요구도 적으니까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40년째 가르치면서 출석 점검을 별로 하지 않았어요. -33쪽

대학 시절 그리고 그 후에도 사르트르, 키르케고르, 하이데거가 유행했는데, 김동리 선생까지 실존주의를 논했으니까 전쟁과 관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실존철학은 내게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건대, 단순화하여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이데거는 나에게 추상적 관념이나 체계 또는 이데올로기로써 단순화될 수 없는 세계의 현존에 대한 느낌을 심어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공리적인 조작, 과학기술적인 조작은 물론이고 관념으로 운산으로 조작되지 않는 신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그에게 있습니다. 사르트르하면 실존, 자유, 책임, 현실참여 등등을 그의 주된 개념들로 생각할 수 있지만, 되돌아보건대,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인간의 주체적 자유에 대한 독특한 이해, 독일의 관념철학에 연유하면서도 그가 살았던 현실 속에서 특히 강조하게 된 주제척 자유에 대한 이해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41-42쪽

전라도 사람이라고 해서 대학 입학하고 취직하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하는 데 문제가 있었으면 몰라도 인생에서 전라도 사람이냐 경삼도 사람이냐에 따른 중요한 고비나 계기에 부딪히지 않았기 대문에, 편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전라도 사람이라는 범주가 중요한 사회적-구조적 범주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민주적이고 평등한 질서의 확보라는 보다 일반적 과제의 수행으로써 해결되지 않을 문제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50-51쪽

모든 사람이 작은 개체에 불과하고 또 그 개체가 주어진 사회의 조건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또 지적으로 제한된다는 것을 반성하는 것은 바로 보다 큰 보편적 진리로 나아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이지만, 그러한 제한 조건이 모든 정당성의 기준에서의 사실 인식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비판 자체도 부정되는 것이죠.(...) 실존적 상황에 의하여 생각이 제한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사회 내의 의사소통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적인 작업은 자기 변명과 자기 이익의 옹호를 위한 수단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 기획 그리고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으로서의 마르크스의 관계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되지요.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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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21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4년에 이 책이 <사유의 공간>과 함께 출간되었을 때 바로 구입해 탐독하면서 김우창 선생의 학문 세계에 새삼스레 탄복하고 감복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랜만에 기억을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7-07-21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책으로채우리 2009-12-01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인터넷 기사를 읽다 알라딘 가입에 이어 이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예쓰모모 서점만 줄곧 이용하다 알라딘에 발을 붙이려니 낯설 달까요..여긴 방문객이 이렇게 많은 블로그도 있구나 싶고..암튼 책 선택에 편식증이 있는 저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행동과 사유가 눈에 띄어서 클릭했어요..왜인지 읽고 싶어집니다. 읽고 나면 유식해질 것 같은 느낌까지 드는데..ㅎ 품절이네요........ ㅡㅡ; 예쓰모모로 가야하나여.....ㅎ여하간 꼭 읽어보겠어요.그런데,로쟈님의 모습은 검정티 청바지 저 모습이신가요. 설마.......어떤 유명한 작가나 석학은 아니겠지요..전 모르게는게 많아요.아.궁금해.
 

최근 중국 소설들이 대거 번역/소개되고 있지만 중국 관련서들 또한 쏟아지고 있고, 그 중에는 눈독을 들일 만한 책들도 많다(내가 중국 전공자가 아닌 게 다행이다 싶다). 생소한 저자인 줄리아 로벨의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07) 또한 만만찮은 분량이긴 하나 탐나는 책이다. '문명과 야만으로 본 중국사 3천 년'이 부제인데, 원제는 말 그대로 '만리장성(The Great Wall)'이고 작년에 나온 책이다. 아래 리뷰기사를 읽다 보니 손에 집어들지 않고는 못배기겠다. 러시아사도 이런 책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문화일보(07. 07. 20) 신화의 덧칠 아래… 보라, 중국의 오만을

‘만리장성(萬里長城·the Great Wall)’. 흔히 2000년 전 진 시황 때 축조됐다고 알려진 성벽, 장성을 둘러싼 신화는 많고도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은 1893년 작가 로버트 리플리가 퍼뜨린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조물”이라는 말이리라. 여기서 한발 나아가 조지프 니덤은 중국의 과학·기술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술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화성의 천문학자들이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업적”이라고까지 호들갑을 떨었다.

작가와 학자들이 이렇게 나서니 허풍이 전문인 정치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장성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대장부가 아니다.” 1935년 장제스에게 쫓기던 마오쩌둥(毛澤東)이 공산혁명가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보낸 호소문 중 일부다. 이로부터 약 40년 뒤 죽의 장막을 헤치고, 중국의 만리장성을 찾은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화답했다. “장성은 위대한 성벽이며, 위대한 민족이라야 이런 것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만리장성을 둘러싼 이런 호들갑을 증폭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다. 장성을 둘러싼 신화의 지층을 벗겨내고, 장성이라는 거대한 메타포로 중국을 제대로 읽으려는 것이 목표다. 신화 벗겨내기는 여러 가지 방향에서 진행된다.

우선 과녁은 ‘위대한’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허세적 분위기다. 만리장성에 부여된 최초의 신화는 그것이 수천년 전부터 하나로 건설되었다는 것이나, 그것부터가 오해라는 것이다. 이르게는 기원전 1000년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왕조들이 여러 곳에 ‘하나로 이어지지 않은’ 성벽을 건설했으나 그 대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오늘날 수백만의 관광객이 찾는 베이징 북쪽의 말끔한 성벽은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노동력으로 복원되고 단장된 것일 뿐이다.

책의 더 큰 목표는 이런 물질로 된 장성의 허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표상으로서의 장성이다. 후대의 역사적 낭만주의자에 의해 은폐된 성벽을 제대로 살피며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읽어내자는 것이다. 장성을 뒤덮은 신화의 지층만 제대로 벗겨내면, 사실 그 성벽은 중국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완벽한 표지다.

책의 처음은 ‘왜 성벽을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전형적인 답은 흉노·몽골·만주·훈 족 등으로부터 변경을 지키기 위한 방어목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장성의 역사와 흔적을 살피며, 장성의 축조 목적이 방어가 아니라 영토 획득이라고 말한다. 방어가 목적이라면 자국의 거주지를 수천리나 벗어난 곳의 사막을 가로지르며, 장벽을 건설할 필요가 없었다.

저자가 성벽이란 창을 통해 읽으려는 보다 근원적인 것은 성벽 축조의 근저에 깔린 중국인의 정체성과 세계관이다. 기원전 2000~1000년대에 이르는 동안, 중국인들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잡고, 다른 민족을 벌레나 ‘날짐승이나 길짐승’(금수·禽獸)으로 보는 뻔뻔스러운 세계관을 완성한다. 중국인이 아닌 민족은 ‘외양은 인간이지만, 내면은 짐승인 종족’, 혹은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는 늑대’일 뿐이었다.

요컨대 성벽은 더불어 상종할 수 없는 이민족들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책은 춘추전국 시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왕조와 시기에 걸쳐 중국을 관통한 호전적인 외국인 혐오증과 문화적 우월주의와 패쇄성을, 장성이란 표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문제는 중국의 이런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목민이 강성할 때마다 장성은 유린됐고, 때로 유목민들은 중국의 한복판에 그들의 제국을 세웠다. 그럼에도 중국의 역대 왕조는 성벽 건설과 유지에 계속 매달렸다. 그때마다 죽어난 것은 성벽 건설에 동원된 민중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저자는 이를 단순히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어리석은 왕조의 탓으로만 돌리지는 않는다. 그 전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장성을 쑨원(孫文), 마오쩌둥 등의 지도자들이 되살려내는 것을 보며 이런 의구심은 더욱 깊어진다. 말하자면 장성으로 은유되는 중국의 호전적 외국인 혐오증과 우월주의, 패쇄성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인터넷 공간에 세우는 방화벽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앞으로의 중국을 어떻게 볼까.

‘중국이 설령 180도 변신해 서구식의 개방적 민주자유국가가 된다고 해도, 그들은 수천년 묵은 행동 양식을 포기하거나 정치적, 문화적 독자성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또는 밀물처럼 들어오는 방문객들을 감시하는 수단인 심리적·물리적 축출과 엄격한 국경 통제라는 노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역사와 역사 지식이 너무 많다.’



이렇게 정리하면 책의 문제제기와 결론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러나 책에서 저자가 드러내는 해박함과 이야기 솜씨는 눈을 비비게 하기에 충분하다. 책을 읽다 자주 저자 프로필에 눈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줄리아 로벨, 영국에서 태어난 저자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중국사로 학위를 받은 뒤 중국사와 중국문학을 가르쳤단다. 한동안 중국에 살다 케임브리지 퀸스칼리지의 연구원으로 있다는 젊고 가냘픈 미모의 여성이 이 정도의 책을 쓴 것은 정말 뜻밖이다.

번역도 재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공을 들였다. 책에 나오는 수많은 지명과 인명을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명으로 옮긴 것부터가 그렇다. 한시를 옮기며 영어 원서에서 중국어 원문과 맛이 달라진 부분도 일일이 원문을 기준으로 고쳤다. 책이 최근 쏟아지는 중국 관련 책 가운데 빼어난 봉우리가 된 것에는 저자의 역량 못지 않게 번역자의 공이 큰 것으로 보인다.(김종락기자)

07. 07. 20.

P.S. 최근에 나온 중국사 관련서로 두 권을 더 거명하고 싶다. 먼저 이중텐의 <제국의 슬픔>(에버리치홀딩스, 2007). 이중텐은 <삼국지 강의>(김영사, 2007)로 중국 관련서쪽으로는 올해 가장 유명해진 저자라 할 만한데(중국에서도 '역사 대중화'로 유명하다고), 이 책에서는 "전제주의 지배하의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알력 다툼과 음모, 비리들이 낱낱이 공개되는 한편, 정치 활동의 주체인 정치인, 지식인들의 이중적 삶과 애환, 갈등, 숙명 등을 지은이 특유의 필치로 드러낸다" 한다. 일독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두번째는 앞의 두 책에 비하면 좀 얄팍한데 국내 필자들이 쓴 <아틀라스 중국사>(사계절출판사, 2007). 경향신문의 간략한 소개에 따르면, "약 1만여년 전 고대 신석기 문명의 탄생부터 20세기말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를 다룬 책은 중국 시대사별 전문가 5명이 3년여 동안 매달려 만든 중국사 개설서다. 중국사를 시대별로 96개의 주제로 엮었으며, 저자들 각자의 역사관을 투영하면서도 통사적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양면에 걸쳐 한 주제씩이 펼쳐지는 책은 입체적인 역사지도를 중심으로 텍스트와 연표, 다이어그램, 사진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정리되고 압축된 텍스트와 도판은 사전의 역할도 가능할 듯하다." 그러니까 일종의 역사부도이다.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와 <제국의 슬픔>을 읽다가 그때그때 참조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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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교수의 신작 <자유와 인간적인 삶>(생각의나무)과 함께 내가 이번주에 장바구니에 넣은 책은 '21세기 새로운 담론코드'란 부제를 달고 나온 위잉스 교수의 <동양적 가치의 재발견>(동아시아, 2007)이다. 이 책 또한 200쪽이 안되는 분량이어서 만만하다는 장점이 있다. 타이틀 자체는 흥미를 끌지 않지만(이 또한 유행을 탔던 제목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는 눈길을 끈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 3개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2006년 인문학 분야에서 독보적 업적을 쌓은 사람에게 수여하는 인문학의 노벨상인 ‘클러지(Kluge)상’을 수상해 그 학문적 권위를 공인받았다. 동서고금을 망라하는 폭넓은 지적 식견으로 동양과 서양에서 고루 사랑을 받는 대석학"이라고 하니까 말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한번 들어볼 용의는 생기는 것이다(찾아보니 레이 황의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이산, 2001)의 서문을 위잉스가 썼다). 리뷰기사를 하나 미리 읽어둔다.

경향신문(07. 07. 21) 진보적 서양문명의 충격 흡수

동양적 가치’는 지난 세기부터 서구 문명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담론과 함께 언제나 돌파구로 얘기되어 온 다소 진부한 화두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동양적 가치가 무엇이라고 자신있게 규정하기는 쉽지 않으며 여전히 많은 논자들이 거론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중국 출신 역사학자로 현재 미국 프린스턴대 명예교수로 있는 이 책의 저자는 이 논의에 대한 권위자다. “5·4운동 이래 있었던 중국 내 모든 문화 논쟁은 서구 현대문화가 동양의 전통문화에 준 충격과 도전”이라고 보는 그는 1983년 강연을 바탕으로 쓴 이 책에서 중국 고전에 나타난 가치체계를 중심으로 동양적 가치의 현대적 의미를 풀어낸다. 우선 서양적 개념인 ‘진보’의 한계를 지적하며 ‘대학(大學)’ 1장의 구절을 인용하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그칠 곳을 알아야 마음이 정해지고, 마음이 정해져야 마음이 고요해지며, 마음이 고요해져야 편안해지며, 편안해진 뒤에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慮), 원하는 바를 얻기(得) 위해서는 ‘그침(止)’ ‘정함(定)’ ‘고요함(靜)’ ‘편안함(安)’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 과정들이 개인의 심리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긴 하지만 동양문화의 일반적 현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프랑스혁명 이래 서양 근대의 핵심 키워드가 된 ‘진보’ 개념에서 보자면 편안함, 정함, 고요함, 그침 등에서는 당연히 취할 것이 하나도 없다. 헤겔이 중국 문화를 무시한 중요한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이 예부터 진보한 적이 없다는 점이었고, 5·4운동 이후 중국 지식인들의 자아비판 역시 이런 생각에 바탕해 있었다.

이에 저자는 “오늘날 서양의 위기는 동적이면서 정적이지 못하고, 발전은 있지만 그침이 없고, 부유하지만 편안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안정됨이 없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럴 때 동양적 가치는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 같은 서양문명에 대한 ‘충격 흡수기’다.

그러면 동양적 가치는 그 자체로 완전한가. 저자는 동양인들의 현대생활은 이미 서양문화 없이 성립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일부 분야에서는 동양이 반드시 ‘서구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다만 “전반적으로 동양의 가치체계는 근대화 및 탈근대의 도전을 견뎌낼 수 있었으며 앞으로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실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그는 동양적 가치가 민주주의와 친연성이 없었다는 점을 아쉬워 한다. 하지만 박식한 중국 고전 지식 속에서 동양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모든 사람은 요순이 될 수 있다”(人皆可以爲堯舜)는 ‘맹자’의 내용이나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다”(滿街皆是聖人)는 평등의식, “자기 자신부터 인(仁)하게 되는”(爲仁由己)이라는 ‘논어’의 내용 등이 그것이다. 그는 동양 민주주의의 정신적 원천으로 현대적으로 법률제도화돼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봤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동양 민주주의를 위해 몇몇 요소를 제공하기에 족한 중요한 보증수표”라는 것이다.

그 실례를 그는 싱가포르에서 찾는다. 책의 곳곳에서 저자는 싱가포르를 이상적인 사례로 보고 있다. 싱가포르라는 나라를 이루는 주체들은 중국 본토에 사는 중국인들과 다를 바 없지만 이들은 영국법 체계를 들여와 성공적으로 정착시켰으며, 싱가포르에서 제창되고 있는 ‘유가 윤리’는 정치를 인륜질서에서 분리해낼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보았다.

저자는 서구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를 초월세계와 현상세계의 관계를 통해 규명한다. 초월세계, 신의 영역, 이데아의 세계, 이상과 현실세계, 인간의 세계, 경험세계가 분리되거나 끝없는 긴장관계에 있는 문화가 서구문화이며, 초월세계와 현상세계가 융합적이고 연결돼 있는 문화가 동양문화라고 보았다. 이는 각각 ‘외재 초월형 문화’ ‘내향 초월형 문화’로 개념화됐다. 이 책의 원제는 ‘가치체계로 본 중국문화의 현대적 의의’로 저자가 1983년 강연했던 것을 3년 뒤 증보하여 책으로 낸 것이다. 저자의 책이 한국에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손제민기자)

07. 07. 20.

P.S. 기사를 읽다 보니까 지난주에 나온 책 <진보의 역설>(에코리브르, 2007)이 떠오른다. 이건 부피가 좀 되는 책이지만 서구식 진보의 한계를 짚어본다는 의미에서 같이 읽어볼 수도 있겠다. 역시나 경향신문의 리뷰기사를 읽어본다.

경향신문(07. 07. 14) 100년 전보다 잘사는데 왜 우리는 우울할까요

‘진보의 역설’이란 제목만 보면 진보 비판서쯤으로 착각하기 쉽다. 실제로 총 415쪽 가운데 100쪽을 읽는 동안 한 보수주의자의 진보이데올로기 비판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실낙관론과 그 사례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여기에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자기 나라 때리기에 여념이 없는 미국과 유럽 지식인들이나 시민단체, 정치인들에 대한 공격이 이어지는 걸 보면 책을 잘못 집어든 게 아닐까 하는 염려가 잠시 밀려든다. 그렇지만 이는 반전(反轉)을 노리는 전술이다.

핵심은 ‘우리는 왜 더 잘 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라고 묻는 부제가 웅변한다. 그렇다고 단순 행복론이나 긍정 심리학 전도서라고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그걸 다루지만 다양한 식단이 함께 짜여 있기 때문이다. 언론인이자 학자인 저자 그레그 이스터브룩은 머리말의 들머리에서 400년 전에 살았던 우리의 고조부모가 오늘날 미국에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자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나간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평가하는 미국인의 비율이 1950년대 이후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제한다. 그 기간 동안 실질소득이 두 배 이상 증가했음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근본 원인은 번영과 행복 사이의 단절이다. 평균적인 미국인과 유럽인은 여태까지 살았던 인류의 99퍼센트보다 더 잘 살 뿐만 아니라 역사에 기록된 대부분의 왕족보다도 더 화려하게 사는 데도 그렇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서 단극성 우울증 환자가 50년 전보다 10배나 더 많아졌다는 통계적 사실에 저자는 먼저 우울해 한다. 그리고 나선 풍요와 자유가 넘쳐나는 데도 우울증과 회의주의가 만연하는 현실은 불평하기 좋아하는 인간 본성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서구 제도의 두 가지 심각한 결함으로 모든 사람이 지나치게 많이 사서 소비한다는 점과 부유층의 극단적인 탐욕을 든다.

그는 생활이 윤택해지는 데도 더 나빠진다고 느끼는 이유로 몇 가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다. 선택 불안, 풍요 부정, 붕괴 불안, 충족된 기대의 혁명 등이 그것이다. 선택 불안은 사회적 힘에 구속된 나머지 선택해야 할 것이 지나치게 많아 선택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되는 상황이다. 풍요 부정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교묘한 정신적 논리를 꾸며내고 그렇게 믿음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붕괴 불안은 경제 불황, 환경 오염, 자원 고갈, 테러리즘, 인구 증가 등으로 인해 세상이 붕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현재의 풍요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현상이다. 충족된 기대의 혁명은 꿈꾸고 간절히 원했던 것들을 실제로 얻게 된 현실에 동반되는 불안한 감정을 뜻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현재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주변환경과 소득이 얼마나 좋아질 것이냐를 근거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최근의 심리학 연구 주제인 긍정심리학 분야에 상당 분량을 할애한다. 특히 ‘용서’와 ‘감사’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적 폭넓고 밀도 있게 조명하고 있다. 용서하고 감사하며 낙천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상대방보다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게 요체다. 이타적인 행동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긴요하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예화로 든 ‘용서’는 올해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밀양’에서 다루는 바로 그 ‘용서’만큼이나 충격적인 구조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유학을 가 반(反)인종분리정책 운동을 돕던 딸을 죽인 두 흑인 청년들을 용서하는 미국 백인 부부의 얘기가 줄거리다. 자식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한 뒤 부부는 더욱 행복하고 큰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용서하고 감사하는 태도가 분노하는 것보다 훨씬 이롭다는 점을 증명하는 연구 결과는 살을 빼는 게 건강에 좋다는 논문처럼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용서가 말로는 쉽지만 실천으로 옮기기는 힘든 걸 부인할 수 없다. 용서를 잘하는 사람은 우울증에 덜 걸리고 더 훌륭한 사회후원자를 얻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도 소개하고 있다.

저자의 행복에 대한 관심 영역은 개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인류 전체의 행복론으로 이어진다. 한때 세계적으로 추앙받았던 잭 웰치 전 GE 회장을 비롯한 최고경영자(CEO)들의 탐욕과 부도덕을 생생하고 예리하게 파헤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무)’가 인류 전체의 행복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저개발국의 빈곤 참상의 해결책도 나름의 방식으로 제안한다.

유토피아에서조차 사람들은 행복을 말하기보다 여전히 불평하려들겠지만 그것이 유토피아로 더 가까이 가려는 노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결론 삼아 강조한다. 우리가 긍정적 자세를 갖더라도 빈곤, 온실가스 등 전지구적 문제를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나 그런 노력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읽고 나서 명실이 상부하지 않아 허탈감이 드는 책이 적지 않지만, 이 책은 돈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다. 다양한 이론과 예화, 오밀조밀한 지식이 짜임새 있게 교직돼 있어서다. 취향에 따라 다를 수야 있겠지만 웬만한 독자라면 ‘마음의 양식’으로 한번쯤 포만감을 느낄 듯하다.(김학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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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왜 더 잘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
    from Next Key 2009-08-04 18:24 
    진보의 역설 저자 그레그 이스터브룩 지음 | 박정숙 옮김 출판사 에코리브르 펴냄 | 2007.07.15 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진보의 역설』은 현대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원하는 행복을 얻...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몇 권 정도는 눈길을 끄는데, 그 중 하나는 김우창 교수의 신작 <자유와 인간적인 삶>(생각의나무, 2007)이다. 요즘 읽고 있는 <풍경과 마음>(생각의나무, 2006)에 바로 이어지는 책이다. 실물은 어제 구내서점에서 보았는데, 200쪽이 안되는 얇은 분량의 책을 굳이 하드카바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책이 고급한 장서용이라기보다는 보다 저렴한 보급용으로 읽힐 수는 없는 것일까? 한겨레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7. 21) "비판적 공동체 꾸려 살며 자기 자유 제대로 써야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인문학자인 김우창(사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새로 펴낸 책 <자유와 인간적인 삶>(생각의 나무)에서 ‘자유를 기초로 한 인간적인 삶’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가치를 결여한 신자유주의적 삶이나 가치를 강요하는 마르크시즘도 그에겐 대안이 아니다.

그는 생각하는 사회, 즉 ‘비판적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공동체가 비록 개인을 도덕 규범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비판이 허용된다면 보편적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인간성 실현을 위한 매개로서의 ‘심미적 체험’도 강조했다. 심미적 요소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공감 능력을 확대시키는 등 개체로서의 자기 내면의 개발로 이끈다. 김 교수는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글을 따, 심미적 요소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인간관계의 매체가 됨으로써 진정한 정치적 자유의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고 밝혔다. 김 교수를 18일 서울 평창동 자택 부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동안 자유가 확대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종류의 자유인지를 물어야 한다. 요즘 정신질환자나 알코올 중독자,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할 지를 모른다. 무엇이 자유인가? 서울대 가겠다고 아우성이지만 이유를 물어보면 ‘주변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라고 답한다. 미국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가서 주변 환경이나 건물 다 보여준다. 그리고 ‘좋으냐’라고 묻는다. 이건 자기 자유를 제대로 쓰는 것이다. 진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한번 생각해보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우리 사회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명품도 정말 좋아해서 산다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별 이해 없이 사는 것, 우리 사회에서 특히 심하다.

-신자유주의를 ‘목적이 없는 체제’라고 썼다. 그렇다면 ‘목적이 있는 체제’는 어떤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비판만 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할 것인지 연구해야 한다. 생각하는 사회, 비판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여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목적으로부터 삶이 해방된 사회이다. 사회는 수단을 마련하는 경기장이 되었다. 돈 벌어서 네가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를 ‘자기 욕심만 차리는 세상’이라고 비판하면서 ‘남에게 봉사하라’고 말한다. 남에게 봉사를 강요해도 괴로운 사회다. ‘나의 자유의사로써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가 과제의 하나다. 금욕적 혁명가인 레닌은 자기를 억제한 사람이다. 그래서 남을 억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래서 살벌해진다.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네루가 다스린 인도는 제3세계에서 가장 앞선 민주 체제였으나 특권계급의 권리가 많았다. (혁명가들에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억압을 주저하지 않고, 자신들이 스스로 특권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나 이념의 속박을 넘어 인간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상을 그려 달라.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힘든 사회가 나쁜 사회다. 작은 공동체에서 살아야 한다. 이런 곳에선 거짓말하면 못 배긴다. 세계화의 장점은 우리 생각이 넓어지는 것이다. 넓어지는 세계에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새도시도 자급자족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좋은 학교에 직장도 가급적 있고 가게도 있어야 한다. 도시계획이 굉장히 핵심적인 문제다. 하지만 우리 도시는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장사가 되지 않으니까.

(학교 내신도) ‘우리 동네에서 이 학생 우수하다’는 기준으로 해야 한다. 수십만 명 가운데 우수하다는 그런 의미를 넘어야 한다. (속한 집단의 크기는) 작은데 똑똑하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교육부 원칙이 맞다. 선생도 세계적인 1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학교가 (그 교사를) 존중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교사도 동네 속에 있어야 한다. 좋은 선생이라고 하는 (동네의) 막연한 평가가 중요하다.

-심미적 체험을 통한 인간적 삶의 형성에서 음악을 특히 강조했다. 하지만 요즘은 시각예술의 시대가 아닌가?

음악은 시간 속에 지속하는 것이다. 시각은 보고 지나는 것이다. 음악은 굉장히 엄격한 구조를 가졌다. 감각적이고 지속적이면서도 엄격한 규칙이 있다. 규칙 속의 자유로운 변조가 이뤄지는 것이다. 음악적 훈련은 학생들이 절제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미술 작품도 두고두고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위해 자기 노력을 들여야 한다. 물질적 세계와 자기 노력 그리고 감각이 섞여 들어가는 것이 인간 형성에 중요하다. 미술도 (휙 일람하는 것보다) 걸어놓고 보는 것이나 직접 그려보는 것이 더 좋다.

-심미적 체험은 특권적 체험이라고 썼다. 모두가 체험할 수 있는 길은?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은 하기 어렵다. 하지만 벗어난 사람도 있다. 금욕주의자나 스님들이 그런 예다. 영국에선 미술관을 가장 많이 가는 계층이 노동자들이다.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미술을 이곳저곳 옮겨 전시해야 한다. 자동차에 싣고 다니면서 보여줘야 한다. 가야금 연주나 서양 고전음악은 정신적 훈련을 시켜 준다. 시골 초등학교를 지을 때 연주가 가능한 강당을 지을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또 음악 전공 미취업자들이 시골에서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자연스런 인간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괴롭다. (우리 학생들은) 자연을 과학 공부를 위한 재료로 생각한다. 공부하는 데 도움 받기 위해 자연을 공부한다. 거꾸로 자연을 더 잘 알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자연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경이로운가 이걸 알기 위해 자연 공부를 시켜야 한다. 공부를 통해 인생의 경이로움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 반대로 인생을 희생해 공부한다.(강성만 기자)

07.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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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07. 07. 19) '개가 하는 인문학’

지난달 말 서강대에서 열린 제3회 ‘맑스코뮤날레’ 둘째날 행사를 보도한 참세상 기사의 제목은 <불붙은 한국학술진흥재단 기금활용>이다. 분명히 ‘계급혁명인가 분자혁명인가’라는 토론주제가 있는데, 이것은 부제처럼 밀려나 있다.

여기서 문제를 제기한 이는 조정환이었다. 그는 “발제문이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예산을 받았다고 한 점이 인상적이고 서먹서먹한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하면서 “맑스코뮤날레에서 정부 지원을 받은 논문들이 공공연한 석상에 오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숙고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다른 논문이라면 몰라도 마르크스에 관한 것을 정부 지원을 받아쓴다는 것에는 나도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령 내가 가끔 사서 보는 반년간지 ‘마르크스주의 연구’는 속표지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간행”한다는 알림글을 적어두고 있으며,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은 논문을 싣기도 한다.

2006년에 나온 제3권 제2호에는 곽노완의 ‘마르크스 사회(공산)주의론의 모순과 21세기 사회주의’라는 논문이 “2005년 정부(교육인적자원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KRF-2005-005-J00201)”임을 밝히고 있으며, 이정구의 ‘새로운 대안경제의 모색’ 역시 “2005년 정부(교육인적자원부)의 재원으로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KRF-2005-005-J00201)”라는 표시를 논문 하단에 덧붙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이들은 국가가 연구자에게 지원하는 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러한 재원을 가지고 연구를 수행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어디서 돈을 받든 연구 열심히 해서 학문 발전에 기여하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러한 논문 자체를 통해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적인 사람’으로 제시하는 이들은 정체성 문제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사실 정부에게서건 맘씨 좋은 자본가에게서건 돈을 받는다는 것은 돈을 받는 것 자체로 끝나질 않는다. 돈을 주고받는 거래관계로 인해, 마르크스도 지적했듯이 인간이 더 이상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유적 존재로서 인간으로부터의 소외’상태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돈을 주고받으니 돈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돈이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소외현상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12년 6개월 동안 이어져 오다가 최근 100회를 끝으로 정리된 부산대의 인문학담론모임에서 한문학과의 강명관 교수는 <다시 대학의 인문학을 생각한다: 공장의 침묵>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는 참혹한 현상들이 처절하게 거론돼 있다. 몇 가지를 들춰보자.

“생각해 보시라. 우리가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얼마나 타락했는지. 우리의 일상에서의 대화가 얼마나 처참해졌는지. 학문의 내용은 사라지고 오로지 연구비, 학술진흥재단이 대화의 화제의 중심이 되었고, 또 이따금 어떤 연구자가 거창한 연구비를 수주했다(거창한 연구가 아니라)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수치감도 버린 지 오래다.” “가증스러운 일은, 이런 연구비의 저주를 당연시하면서, 연구비로 연구를 통제하고 연구자를 노예화하는 외적 강제를 열렬히 찬양하는 주구(走狗)도 생겨난다는 것이다.”

강명관의 글을 읽고 나니 요즘 대학의 사정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으며, 왜 그리 돈을 쏟아부어도 인문학이 발전하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인문학을 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개(走狗)였던 것이다.(강유원/철학자)

참세상(07. 06. 29) 불붙은 한국학술진흥재단 기금 활용

둘째날 전체주제 '반자본주의적 대항지구화운동의 쟁점'과 '분자혁명론'이 오전10시 30분경 시작됐다. 토론 과정에서 윤수종 교수도 지적한 이야기지만, '대항지구화운동'이라는 주제가 직접적으로 다뤄지지는 않았다. 김창근 연구자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한국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발제에 대해 조정환 연구자가, 윤수종 연구자의 '분자혁명론' 발제에 대해 이득재 연구자가 각각 토론을 부쳤다.

발제와 토론을 한 김창근 연구자와 조정환 연구자는 각자의 생각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격론을 벌였다. 플로어에서도 토론에 적극 참여했다. 뜻밖에 학술진흥재단 기금 활용 문제가 큰 쟁점이 되었다. '국가'와 '자율'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예상되었으나 연구자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연동된 토론으로 이어져 흥미롭고 유의미한 토론으로 기록될 듯하다. (토론 내용을 그대로 싣되, 곳곳에 윤문을 했으며, 일부 누락과 의역이 있음을 밝혀둔다.)

조정환 : 우선 이 발제문이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예산을 받았다고 한 점(김창근 발제문 736쪽 : 이 논문은 2005년 정부(교육인적자원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KRF-2005-005-J00201))이 인상적이고 서먹서먹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원을 하는 주체가 정부로 되어 있고 그래서 정부 그 자체가 자율적 주체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엄밀하게 보면 정부라 불리는 괴물이 있어서 국민, 다중으로부터 세금을 빼앗아 마치 자기 자신이 남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사유 활동을 국가화 하는 방식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맑스코뮤날레에서 정부 지원을 받은 논문들이 공공연한 석상에 오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숙고했으면 좋겠다. 좌파 속으로 정부와 국가가 살금살금 기어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주제와 연관되어서 하는 이야기다.

발표자는 국가자율성이 절대적이냐 상대적이냐에 초점을 놓고 발전국가론이 말하는 상대적 자율성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은 절대적 자율성에 가깝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으로 기금을 바라볼 때 국가의 선명함이 확인될 것이다.

맑스코뮤날레 논문 발표되고 쟁점의 구조, 진폭을 나타나기 위해 배치할 때는 국가 자체 내부의 국가의 기능을 둘러싼 논쟁으로 좁혀져서 혁명적 대화로 발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본인이) 적절한 토론자일 수도 있겠다. 논의 출발점을 맑스에서 출발한다.

두 부분 이야기했는데 토대와 상부구조론에 입각해서 정치적인 상부구조에 속한 국가가 토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라는 이야기와 정부가 사회로부터 자율적이라고 하는 두 가지 주장인데, 왜 우리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에 초점을 맞추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확립 쪽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토대 상부구조론에서 맑스의 강조는 토대로부터 상부구조의 강한 규정성 문제였는데 (발제문에는) 토대의 상부구조 규정성이 누락되어 있는 것 같다. 구조라는 용어를 통해서 발표자가 염두에 둔 것은 국가에 대한 자본의 규정성이고 자본 중에서도 대자본 재벌의 규정성을 생각하고 있다. 맑스가 토대에서 강조한 경제적 생산관계는 생산영역에서의 사람들간의 투쟁이고 계급적 적대인데 프롤레타리아트를 강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이 문화나 정치에 미치는 강한 규정성, 거꾸로 국가의 노동에 대한 의존성을 빼먹고서 토대 상부구조론의 올바른 접근을 하고 있는가 의문스럽다.

보나빠르티즘 국가가 사회로부터 분리된 것은 사실이다. 맑스도 그렇게 논리 전개를 하고 있다. 하지만 맑스의 초점은 루이보나빠르트 브뤼메르 18일의 최후에 두더지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 48년 혁명적 상황에서 아래로부터의 투쟁들이 위에 구멍을 파내면서 통치 안정성에 빈틈을 드러낸 게 18일이다. 특 치면 무너지는 것이 국가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맑스에게 국가의 자율성이란 산노동에 대한 모든 상부적 형식들의 의존성을 이야기하는 방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 논문에서는 노동에 대한 관심 없이 초점으로 부상되고 있는데, 유럽으로 치면 유로코뮤니즘, 구조개혁주의 그래서 노동자계급정당들의 제도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20세기 후반을 나타낸다. 그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운동들이 기본적으로 혁명성을 상실하면서 부르주아 정치권의 야당으로 편입되어가는 과정에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 나타난다. 네오맑시즘도 그렇고.

그렇다면 발전국가론이 네오맑스주의로부터 무엇을 빌려오든 간에 기본적인 논점은 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인가 절대적인가 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절대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상황은 왜 나타나는가.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나타나는가를 푸는 것이어야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이야기하는 발표문의 주장은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국가가 갖고 있는 노동으로부터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을 신비한 형태로 옹호하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이론 전개이다.

오늘날의 자본이 착취하는 것은 일국의 경제(즉 국민경제) 내부의 노동력이 아니라 전지구화된 삶정치적 공동체 자체이다. 국가는 이제 자본가들의 공동위원회도, 자본이 사용하는 억압적 도구도, 일국 자본들의 집합적 대표자도, 사회적 자본가도 아니다. 그것은 일체의 대의기능을 외면할 정도로 사회로부터 분리된 상태 속에서 사회적 삶의 생산과 재생산 속에 깊이 침투하여 삶 자체를 흡혈하기 시작한 네트워크화된 제국적 삶권력의 기관들 중의 하나이다.

국가가 다중의 삶으로부터 크게 분리되어 있는 상황으로 보고 이 상황을 이론화하는 지배적인 것이 탈근대화론인데, 포스트모더니즘 국가이론의 경우에는 국가가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시뮬레이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어느 것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상대적 자율을 이야기한다.

국가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과 자율적 행위자로서 이야기하는 것 모두 유사성이 있다. 발전국가론이 제3세계 신흥공업국에서부터 국가의 자율성을 이끌어내는가 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유럽사회로부터 찾아내는 것이 다르지만 국가의 자율성이라는 점은 두 개 공히 강조하고 있다,

발제자가 이야기하는 상대적 자율성도 기본적으로는 이 논리 틀에서 진행되는데 사라져버린 기반을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떠받쳤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한 형태라고 본다. 발전국가론 비판 부분은 기본적인 논조에서는 동의하므로 건너뛰고, 상대적 자율성 부분을 문제 삼겠다. 거의 전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관계에 집중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국가는 노동으로부터 자율적인가 라는 문제가 진지하게 제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계급을 수동적으로 취급한다거나 할 때 이런 이야기가 나올법 한데, 그냥 지나가는 방식으로 서술되면서 역사 속에서 노동계급이 자율적인 행위를 하지 못했다 라고 하는 이미지를 남겨두고 있어 안타깝다.

국가가 정책 결정과 정책 집행에 자율적 주체로 나타날 때에도 그 정책의 주요한 관심사는 응당 노동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착취해서 이들로부터 효율적으로 이윤을 뜯어낼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산노동에 대한 착취 문제가 있는 한 노동에 대한 국가 정책의의존성은 벗어날 수 없는 지반이다.

국가의 자율성에 대한 모든 담론에 노동의 자율성, 삶의 자율성을 배치시켜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국가의 자율성 개념은 삶의 자율성이라 하겠는데, 삶 자체가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는 특정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반영으로 생각해야 한다.

김창근 : 정부 지원문제 관련해서는 그렇게 언급하는 것은 부당하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연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원을 받기 때문에 우리 사상에 문제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내 글에 자본주의적 요소가 슬금슬금 기어와서 사고를 마비시키지는 않았다. 그런 비평은 타당하지 않다. 나머지 비평은 본인이 자율주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르다고 본다.

국가와 자본 관계를 이야기했다. 물론 노동의 문제를 떼놓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자율주의 이론에 따르면 국가는 자본에 완전히 종속된 걸로 나타난다. 국가와 자본을 동일시한다고 본다. 우리가 정치와 경제를 구분하는 이유는 무어냐. 네그리 이야기룰 하는데 제국이 뭐냐, 국가와 결합된 주체다.

노동의 자율성 이야기를 하는데 노동이 자율적이라고 하고 스스로 떨쳐 일어난다고 하면 왜 고민하나,. 다중이 산발적인 투쟁을 하지만 다중 스스로 혼자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고민하는 것 아니냐. 민중들이 자율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을 직접 획득하지 못하므로 우리가 이렇게 토론하는 거 아닌다.

모든 걸 자본과 나머지로 나누는데, 그렇게 설정하면 문제는 굉장히 쉽다. 그러나 현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정치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여러 계급계층이 존재하므로 고려할 것이 많고 이데올로기 면에서 계속 처절히 깨지는 것 아닌가.

도요차 모델 이야기를 하는데 도요타 모델은 일본의 자동차가 노동자를 가장 강력하게 착취하는 체계이다. 일본에 중소기업들을 적기생산방식이라 해서 도요타 앞에 기다리게 하는 체계다. 노동자 자기가치화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노동자 자기 주체를 만들고 국가로부터 자본으로부터 자율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조정환 님은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는 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조정환 :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 문제는 사유 활동, 학문 활동에서 국기자원시스템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런 구조는 두뇌 활동 자체가 국가에 의해 장악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문제는 배경과 효과 등에 대해 토론해보는 것이 좋겠다.

다중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였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와 다중을 분리시켜버린다. 여기 모인 우리가 다중이고 저 역시 그런 한 사람으로서 지금 바로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 있다. 국가를 우리 중심에 놓고 국가를 내면화 하는 방향으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삶의 힘을 중심에 놓고 국가를 해체할 것인가가 우리의 쟁점이다.

정치는 간단하지 않고 복잡하다는 것 동의한다. 정치에 대한 사유에 있어 제도와 국가의 세밀한 권력관계에 대한 내부적 역학에 너무 관심을 빼앗겨서 정작 우리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고, 결집 조직될 수 있고,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 지에 대한 관심은 잃고 있다.

현실 반영이 얼마만큼 현실을 반영하는가 라고 했는데 현실은 생각하기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이 현실 문제라고 보는 것을 또 다른 사람은 무관하다고 본다. 돈을 버는 사람들은 우리 모임이 매우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고 볼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보느냐에 따라 현실은 결정된다.

정성진(플로어) : 조정환 님이 언급한 정부지원금 문제는 저도 연관되어 있다. 사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그랬는데 학진 연구비 지원시스템이 신자유주의 학문정책의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 공감하고 있다. 그것을 개혁해야 한다는 점도 공감한다. 하지만 개혁이라는 게 국가 정책 비판과 변혁적 개입 없이 단지 회피하는 것으로서의 교육, 학문정책에 대한 답이 나올까? 그렇지 않다.

본인의 학교 이야기해서 그렇지만 연구소를 하고 있다. 국립대학 연구소에서 지난 1999년부터 연구기관 자체를 진보적인, 맑스적인, 사회주의적인 연구자들의 관제고지로 장악해서 제도권 내에서 자본주의 자체를 변혁하고 지향하는 연구센터를 만들어보자는 상당한 동의를 구하고 여태 굴러왔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중점연구소지원사업에 몇 번 선정된 바 있다. 개량주의적이고 노무현정부의 정책 쪽으로 밀고 나가려는 측면이 있지만, 과감히 맞서며 활동해왔다. 심사 과정을 보면 알 것이다.

지금 밖(로비)에 보면 우리가 2004년부터 간행해온 연구물들이 있다. 조정환 님도 서너 차례 기고활동도 했고 원고료도 드렸다. 조정환 님도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에 있고, 오늘 맑스코뮤날레 장소 제공하는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도 중점 연구소로 선정된 바 있다. 맑스코뮤날레 돈 가치를 따지면 7백만 원인데 물론 다른 데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구자 재생산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사회실천연구소에서 우리 나름대로 진보적인 대학원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도 있고, 조직위에서는 맑스아키데미를 만들어보자는 이야기 나온다. 이 재원이 어디서 나와야 하나.

정부의 돈은 노동의 잉여가치를 착취한 거 아니냐. 그걸 이용해서 자본주의 변혁에 기여하자는 것이다. 정부 지원 받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자면 우리 호주머니 친구들 호주머니 털어서 한다는 건데 그것은 무엇이 될 건가. 따져보면 중소자본가로부터 지원받을 것 아닌가. 국가를 매개로 한 개념이 상당히 중요한데 조정환 님이 강조하는 자율주의에서는 그 부분이 배제되어 있다.

제국을 떠나서 코뮨이 자율적인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건 있을 수 없다. 국가와 자본에 포섭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므로 자본주의 국가 문제를 넘어가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변혁은 가능하지 않다. 한미FTA 대안 문제 관련, 발전주의 국가론 포함해서 개량적인 비판이 한국 사회 진보 구상에서 중요한 문제인데 그걸 피해간다. 국가를 떠나 회피하고 자본주의 극복하는 코뮨 건설된다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인데 고전맑스주의 모두 정정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와 전면 대결하고 국가권력을 분쇄하는 과정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플로어 : 조정환 님이 이야기한 김창근 님 재반론은 부당하다. 국가와 자본은 자율주의적인 개념이 현실의 반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자율주의적으로 국가를 본다면 국가를 젖혀두고 자본 관계만을 본다는 것인데 현실이 과연 그런가. 국가를 무시하고 산다면 국가는 우리를 가만히 두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주의자들이 국가를 바라보는 개념 자체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윤수종 : 저의 정체성 일부가 자율주의인데 완전한 자율주의는 아니고. 자율주의가 국가를 완전히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저는 국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글을 쓸 때마다 손끝에서 국가가 느껴진다. 추상적인 논의하면서 자율주의 한쪽으로 몰아부치는데 네그리 주장과 재해석을 두고 여러 생각은 있을 수 있다. 네그리가 국가를 도외시한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너무 단선적으로 이야기 되는 것 같다.

김창근 마무리 발언 : 학진 관련, 대학이 자본주의 속에 있으면서 지배적 엘리트 집단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대학에 자금 제공하는 학진 역시 그런 성격에서 자유롭지 않다. 학진 자금을 지속적으로 받기는 어렵다. 정성진 님이 이야기를 안 했는데 김대중 정권 때는 어찌보면 학진 자체가 자율성이 많았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좌파쪽 사업은 배제하는 상황이다. 국가의 자율성을 이야기하는데 노무현정권에 와서 그런 자율성이 약화되고 있다.

우리가 국가에 비어있는 부분에 침투하면서 연구자를 키우고 공동연구를 통해 좌파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장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교수 자리도 마찬가지다.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되어 있는 위치이다. 여러 교수들이 그런 걸 떠나서 좌파이론을 연구하고 만들고 하지 않느냐. 물론 한계가 있겠다. 하지만 끊임없는 비판을 가하면서도 활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국가에 대한 상대적 자율성을 논할 때 취해야 할 자세라고 본다.

두 번째 문제는 윤수종 님 이야기다. 윤수종 님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율주의 이야기하면서도 이론에 경직되지 않는다. 다중에서도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을놓치지 않고 국가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그래서 존경한다. 자율주의를 하려면 윤수종 교수와 같은 건전한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조정환 마무리 발언 : (사회자의 발언시간 확인에 대해) 내 발언에 제약을 하는 것 같다. 공포심이거나 적대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자율주의가 국가를 회피한다고 하는데 과연 제대로 짚고 있나. 정직한 접근방법인가 비판하고 싶다. 우선 국가에 영합하고 국가의 틀 속에서 그걸 접수해서 뭔가 내용적인 변화를 꾀한다는 벙법이 국가를 변형하고 해체시키는 방법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국가를 강화하고 국가를 보조하면서 마음속으로 비판한다는 건 국가개혁주의의 한 유형이다.

학진에 대한 정성진 님의 태도는 학진 시스템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고 해체시키는 것을 안 하는 것이다. 어떻게 좌파 색깔 가질 것인가 고민하며, 학진 재정 통한 학술 통제시스템에 문제제기 하지 않는 한 필연적이 될 수밖에 없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가 문제가 다시 나왔는데 전술을 결정할 때는 항상 단일한 것을 강조했다. 구체적 정세 구체적 행동방침 결정하는 것이고 당이 내리는 방침 앞에 객관적 현실은 하나였다. 당이 내리는 전술방침에 대한 현실 판단과 지침은 누구나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보편적 명령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권리가 누구에게 있나. 생태주의, 패미니즘, 맑스주의자가 보는 현실은 제각기 다르다. 현실은 처한 맥락에서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현실에 대한 각각의 대응들 속에서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다함께라든가 특정 지도적 개인이 생각하는 것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을 현실관으로 삼아야 한다. 어떤 사람도 현실을 올바로 본다고 자임하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고 본다.

플로어 : 학진, 재생산 이야기했는데 여기 대학원생들이 학진이나 교수 권력관계에 대해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석사과정에 있는데 학진으로 말미암아 학진과 교수와의 관계에서 문제의식이 상당히 기각되곤 한다. 학진 기금 활용해서 변혁적이고 진보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진실한 마음은 동의하지만, 우리 사유와 활동이 거기에 종속되어 기각되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전체토론 두 번째 '분자혁명론'은 윤수종 연구자가 발제하고 이득재 연구자가 토론을 부쳤다. 윤수종 연구자는 "분자혁명이 국지적인 미시혁명, 미시적인 국지적 해방 기획의 합계가 아니라, 사회적 영역 총체, 주체화양식 총체에서 무의식의 형성을 있는 그대로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레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두 '극단적인 모형'에 대해 이를 일방적으로 폐기처분하기보다는 이해관계에 근거한 기존의 계급투쟁을 다양한 사회투쟁과 결합하면서 장기적이고 복합적이며 누적적 혁명과정을 이루어 나가자는 가타리의 문제의식을 발표했다.

윤수종 연구자는 앞서 논란이 된 학진 문제와 관련, "최근 진보평론이 소수자투쟁을 인정투쟁으로 정리한 기고글을 싣지 않았는데 그 글이 학진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쾌감을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다. 윤수종 연구자의 발제에 대해 이득재 연구원은 토론에 부치는 열 개의 질문이 담긴 글을 제출했다.(코뮤날레 취재팀) 

07.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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