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베스트'로 미리 올려놓았지만 오늘까지도 손에 들고 있지 못한 책이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이다. '꼭두각시와 난쟁이'란 원제가 국역본의 제목으로 탈바꿈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최근 출간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과도 얼추 운이 맞는다. 해서 이 또한 겸사겸사 같이 읽으면 좋겠다(물론 지젝이 아무리 대중적인 철학자라 하더라도 도킨스와 나란한 가독성을 기대해서는 곤란하겠지만).

내용을 더 잘 드러내주는 부제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이다. 영어본(The Puppet and the Dwarf)을 옮겼을 텐데, 알라딘에 떠 있는 원서는 독어본(Die Puppe und der Zwerg)이다(책을 아직 펴들지 않아 모르겠지만 독어본 판권을 구해서 영어본을 옮긴 것인가?). 아무려나 지난봄 김용옥의 문제제기로 화제가 되었던 기독교/종교 문제가 도킨스/지젝을 연결고리 삼아 자연스레 가을까지 이어질 모양이다. 이 참에 '나의 종교'는 안녕하신가, 한번쯤 돌이켜봄 직하다. 서두에서 밝힌 사정상 신간에 대해서 내가 덧붙일 말은 없고 가장 먼저 뜬 언론 리뷰를 하나 대신 옮겨놓는다. 그다지 친절한 리뷰는 아니군(*해서 한겨레의 리뷰도 추가해놓는다)...

경향신문(07. 08. 11) 神과 인간, 유물론적 접근

오늘날 믿음은 “부인되거나 치환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부인이 갖는 거리가 종교를 문화로 치환하지만 문제는 냉소적 거리가 늘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에 대한 아이러니한 거리가 은밀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이율배반과 마주하여 슬라보이 지젝은 다시 칸트의 질문을 반복한다. ‘믿음이란 가능한가?’ “우리가 정말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실천하는 모든 것”이 문화라면, 그러나 이 문화가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에 자신의 믿음을 전가하고 있다면 믿음은 문화의 가능조건인 동시에 불가능조건이 아닐까?

지젝에게 믿음은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경험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핍 없는 초월적 실체로서의 신이 아닌 십자가 위의 예수,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는 “믿지 않는다고 가정된 주체”인 그리스도의 회의와 불신에 동참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결핍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이 불가능한 경험이 오직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바로 ‘죽은 신을 위하여’이다.

‘꼭두각시와 난쟁이’란 원제에서 보듯 지젝은 여기서 발터 벤야민(‘역사철학테제’)을 반복하고 있는데, 두 번 읽기로서의 반복은 정신분석학적 읽기의 주요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반복적 읽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대립구조 속에서 포착될 수 없는 ‘사이공간’이다. 유물론과 신학, 인간과 신의 사이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유물론도 신학도 아닌 “생성 중인 종교”, 인간도 신도 아닌 괴물로서의 예수이다. 자신의 고통이 의미없음을 고집하는 욥.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욥의 결핍이 아닌 신의 결핍이다. 초월적이고 예외적인 공간에 거주하던 실체로서의 신이 역사 속으로 타락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주체가 될 때 사랑이 시작된다. 타락이 구원과 같아질 때, 결코 다가설 수 없던 신이 이미 우리의 이웃일 때 유물론적 신학이 발생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생성 중인 기독교’는 사도 바울의 마치-아닌-듯한 태도(as if-not)로 반복된다. ‘마치 법을 지키지 않는 듯이 법을 지키라’는 바울의 명령은 법과 초자아의 악순환을 벗어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위반에의 욕망을 부추기는 초자아는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지배하는 권력 기제이기 때문이다. 위반하기 위해 금기를 필요로 하는, 구원을 위해 타락을 필요로 하는 법의 도착적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지젝에게 유물론적 신학은 곧 정신분석학이 된다. 정신분석학 역시 타자의 내부적 결핍을 지시하는 주체의 가능성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욥의 의미없는 고통처럼 의미로 구성된 우주 속에서 주체는 자신의 고유한 장소를 갖지 못한다. 기표 속에 있지만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빈 공간으로서의 주체는 그러나 기표 체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칸트의 추상적 보편성과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을 구분해주는 것은 바로 이 기표화할 수 없는 기원적 빈 공간의 포함 여부이다. 보편/특수의 대립구조로 설명할 수 없는 사이공간을 지젝은 특이성(singularity)이라 부르는데, 특이성을 포함한 보편성이 바로 구체적 보편성이다. 그러나 특이성의 포함은 보편성의 내재적 분열을 초래한다. 이제 보편성은 특수성 속으로 하강하여 특수한 요소들 속의 간극, 특수성도 보편성도 아닌 특이성이 된다.

기독교는 특이성으로서의 주체의 공간을 포함할 때 유대교의 추상적 보편성을 넘어선다. 타자의 결핍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감추고 있는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는 인간도 신도 아닌 예수라는 특이성의 주체를 드러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배설물과도 같은 주체로서 예수는 신의 결핍, 체스터톤의 말대로 “스스로에게 버림받은 신”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신교는 특수하고도 다양한 요소들을 폭력적으로 통합하는 일의성이 아니라 니체의 정오처럼 자신의 내재적 결핍을 보여주는 둘로서의 하나, 하나로서의 둘이다. 다신교는 내재적 분열을 외재적 차이로 환원시킴으로써, 다시 말해 불가능성을 다양성으로 치환함으로써 의미의 불가능성을 피해가는 방어기제이다.

일신교의 혁명은 다양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불가능성을 말하는 유대교에서 시작된다. ‘뿌리없음’, 상징질서로부터의 절대적 분리를 보여주는 유대교는 그러나 메시아를 여전히 ‘미래에 오는 자’로 상정하여 그와의 만남을 끊임없이 연기한다. 기독교는 ‘이미 항상 와있는’ 메시아를 이야기함으로써 신을 상징질서 속으로 끌어내린다. ‘아직 오지 않음’과 ‘이미 항상 와있음’의 간극 속에서 사랑의 윤리학, 곧 정신분석학이 시작된다.(민승기|경희대 겸임교수·영문학)

» 한스 홀바인 작 <죽은 그리스도>(1521)

한겨레(07. 08. 11) '신이 죽어버린 기독교’ 외설스러운 재해석

슬라보예 지젝은 옛 유고연방 출신의 철학자다. 슬로베니아 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최신 사상의 중심이자 태두가 지젝이다. 20세기 사상의 거목들이 쓰러진 자리에서 그의 사상적 지위는 거의 독보적으로 빛난다. 국내에서도 그는 소수이지만 맹렬한 지적 사도들을 거느리고 있다. 지난 10여 년 사이 그의 거의 모든 주요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그에게 쏠리는 관심의 강도를 보여준다.

지젝의 사상은 옛 유고연방이라는 지역적 특수성 속에서 영근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이 발칸의 다민족국가는 소련의 헤게모니가 무너지면서 급속한 ‘자유화’ 과정을 겪다가 민족주의의 광기 어린 폭발로 만신창이의 상처를 입었다. 한때 ‘서구식 민주화’에 기대를 걸었던 지젝은 그 민주화의 결과가 아무런 해방의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 채 파멸적 재앙으로 귀결하는 것을 보면서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애초에도 삐딱하고 반주류적이었던 그의 사상은 더욱 발본적이고 급진적이고 과격한 국면으로 나아갔다. 특이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체제 반란적 사상운동을 이끌었던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에 대립하는 지점에 그가 서 있다는 사실이다. 지젝은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정통 관념론을 이어받고 자크 라캉의 ‘정통적’ 정신분석학을 그 흐름에 접목해 매우 정통적인 방식으로 반역적 사상을 펼치고 있다. 이번에 번역된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도 그는 헤겔과 라캉을 위시한 유럽 정통 사상을 입론의 주춧돌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정통의 세례를 받은 그의 사상은 거의 외설스러울 정도로 반정통적이다.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라는 부제가 얼핏 보여주는 대로 기독교에 대한 오래된 해석체계를 전복하는 작업이다. 요약하자면, 기독교를 유물론적으로, 다시 말해 신이 없는 종교, 신이 죽어버린 종교로 재해석하자는 것이다. 더욱 불온한 것은 그리스도를 20세기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연결지어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요컨대, 예수를 종교상의 레닌으로, 유물론적 혁명가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젝의 기독교 해석의 관점을 지젝 자신의 목소리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나의 주장은, 내가 뼛속까지 유물론자라거나,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유물론적 방법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장은 훨씬 더 강도 높은 것이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지젝은 이 논의를 펼치기에 앞서 오늘날 서구에서 기독교의 대안으로 자주 거론되는 불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먼저 풀어놓는다. 그가 불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의 폭력적·독재적 전횡을 중화시키거나 치유할 방법이 불교에 있다는 생각이 널러 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서구에 이식돼 유통되는 ‘서양 불교’를 단호하게 부정한다. “서양 불교는 광란의 시장 경쟁 속도에 대하여 내적 거리를 두고 무관심할 것을 설교하는 대중문화의 한 현상이다. 이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 자본주의 역학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완벽하게 참여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는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 이데올로기다.”

‘서양 불교’의 원형인 ‘동양 불교’도 그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일본의 사례가 결정적 근거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와 선을 결합했던 일본 선사 스즈키 다이세쓰의 선사상을 사례로 끌어들인다. “군국주의적 선지도자들은 선의 기본적 메시지를 순진한 군사적 충성, 곧 명령에 즉각 복종하고 자아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임무를 다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무념무상이라는 불교의 내적 평화의 원리에 있다. ‘분별적 사고를 중지하고 무의 상태로 돌입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 자체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그런 무차별의 종교에서는 진정한 혁명도 사랑도 불가능하다고 지젝은 판단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즉각 기독교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목표는 ‘유신론적 기독교’를 해체하고 전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통 기독교의 원리를 뿌리부터 잘라 버리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는 신의 죽음 위에 성립된 종교다. <신약성서>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최후에 외치는 말,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구절이 결정적이다. 지젝은 이 말로써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가 범할 수 잇는 궁극의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바로 믿음을 부인하는 죄다. “그리스도가 죽을 때, 그와 함께 죽은 것은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소망이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이렇게 ‘신이 없다’는 확인에서 출발한 종교다.

이런 역설 혹은 도착은 예수의 행적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다의 배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수가 유다의 배반을 사전에 몰랐을까? 몰랐을 리 없다. 지젝은 여기서 유다의 배반이 기독교의 성립에 필수적임을 지적한다. 유다의 배반을 통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진정한 구원자로 등극한다. 유다는 배반 행위를 통해 예수의 혁명사업을 적극적으로 실행한 일종의 영웅이다. 왜 영웅인가. 유다는 영원히 예수의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을 알면서도 예수를 위해 배반을 저지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배신하는 것이다.

지젝은 예수가 유다에게 이렇게 은밀히 명령했다고 추정한다. “내가 너의 전부임을 보여라. 그러려면 우리 둘 다를 위한 혁명 과업을 위해 나를 배반하라.” 그런 사랑의 배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가 성립했다. 그 그리스도는 지젝이 보기에 혁명가다. ‘사랑의 과업’을 실현하려고 목숨을 던진 혁명가다. 그 혁명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초인이다. 그 초인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면 신이라는 관념에 입각해 구축된 기독교 제도를 버려야 한다. 그렇게 지젝은 말한다.(고명섭 기자)

07. 08. 10.

P.S. '유물론적 신학'은 기억에 지젝의 타르코프스키론에서도 키워드였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http://blog.aladin.co.kr/mramor/714863, http://blog.aladin.co.kr/mramor/715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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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8-1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8일, 매장에 아직 깔리지 않은 책을 직원을 통해 꺼내오도록 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머릿말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그리고 역시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만, <만들어진 신>과 같이 읽으면 재밌겠다 싶어요. 제목들이 좀 그렇네요..만들어진 신도 그렇고.
이 글과 아랫글을 옮겨갑니다.

로쟈 2007-08-10 20:26   좋아요 0 | URL
빠르삼.^^

philocinema 2007-08-1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들어진 신"에 "죽은 신을 위하여"까지 책상에 책은 쌓여 가는데,
시간이 허락될지가 걱정입니다. 그래도 목차는 훑어봐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로쟈 2007-08-12 01:16   좋아요 0 | URL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책사랑 2007-08-1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만든 출판사입니다. 책제목을 어떻게 결정할까로 고민을 많이 했으며, "만들어진 신"이 출간되기 이전에 이미 번역자 선생님과 "죽은 신을 위하여"로 하기로 했었습니다. 저희는 뭐 그리 책을 잘 팔지 못하는 출판사라서 어떤 시류에 잘 따라가지 못한 답니다. 저작권은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가 갖고 있어서 그쪽과 계약을 했고, 번역은 영어본으로 했습니다. 워낙 지젝이 독일어본과 영어본으로 자신의 책을 출간해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 영어본에 보면 역자 이름이 없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독일어본 역시 역자명이 없습니다.

로쟈 2007-08-12 10: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궁금증을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젝의 경우 독어, 영어, 불어는 따로 역자가 필요할 거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목 때문에 지젝의 책이 더 팔리거나 덜 팔리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소경 2007-09-0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삽입된 그림 중 <백치>에서 바보공작이 거론한 문제의 한스홀바인 그림을 이제 보는 군요...

로쟈 2007-09-01 20:2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경악을 했던 그림이기도 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환상 여행기'란 게 따로 있는 건 물론 아니다. 그가 쓴 <코메디아>, 즉 <신곡>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 종의 <신곡> 번역서가 새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인데, 올여름에는 어디 여행도 못갈 형편인지라 단테가 안내하는 '환상여행'이라도 떠나고픈 마음이 굴뚝 같지만(정말 '지옥'이라도 구경하고 싶다!) 이 또한 마음대로 될 성싶진 않다(밀린 책들만으로 파묻힐 판이다).

여하튼 재작년 가을 한형곤 번역의 <신곡>이 출간되었을 때 첫대목에 대한 나대로의 읽기를 시도한 바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758708, http://blog.aladin.co.kr/mramor/759358) 이번에 진도를 좀더 나가보는 게 내가 갖는 최소한의 희망이다. 일단은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매일경제(07. 08. 09) 시인이 여행한 천국과 지옥…`신곡` 완역본 발간

단테의 '신곡(神曲)'이 없었다면 이탈리아어도 없다.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을 쓸 무렵인 13세기 이탈리아어는 통일된 언어가 아니었다. 지역마다 각기 다른 방언 형태 언어를 사용했고 지식인들은 글을 쓸 때 주로 라틴어로 썼다. 하지만 단테는 '신곡'이라는 방대한 문학작품을 고집스럽게 이탈리아어로 썼다. 피렌체어로 쓰여진 '신곡' 이후 이탈리아어는 이 위대한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하나로 통일되기 시작했다.

'신곡'은 한 나라의 언어적 정체성을 만든 텍스트이자 전 세계인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 대작이다. 오죽했으면 독일인인 괴테가 '신곡'을 두고 "인간이 손으로 만든 최고의 것"이라는 헌사를 바쳤을까.단테의 '신곡'을 제대로 완역한 책 2권이 동시에 나왔다.

국내에서도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근대 초기부터 '신곡' 번역본이 무수히 쏟아졌다. 하지만 그중 상당수가 스페인어본이나 영역본을 중역한 것이었다. 이번에 발간된 2종류 '신곡'은 모두 이탈리아어 직역이다.

민음사가 펴내는 '세계문학전집' 제150권으로 출간된 '신곡-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는 박상진 부산외국어대 이탈리아어학과 교수가 움베르토 보스코와 조반니레조의 주해서 등 이탈리아어 판본과 영어판본을 참고해 펴냈다. 이 책은 일본어식 제목인 '신곡'에 원제목을 처음으로 병기해 놓았다. 일본어 중역본으로 처음 알려지면서 '신곡'이라는 제목이 익숙해졌지만 이 책 원제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다. '단테의 희극'이라는 뜻이다. 책에는 영국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 삽화 102장도 책 곳곳에 수록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신곡'은 김운찬 대구가톨릭대 이탈리아어학과 교수가 사페뇨의 주해서 등 다수 이탈리아어 원서를 바탕으로 10여 년에 걸친 번역작업 끝에 펴냈다. 김 교수는 원본 시행을 그대로 살리고 기존 번역서들이 저지른 왜곡을 꼼꼼히 바로잡았다. 또 창작 당시 시대적 상황, 중세 이탈리아어의 의미, 등장인물 성격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신곡'은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인간의 삶과 영성을 그리고 있는 중세문학의 백미다.
정치적 파동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단테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과 신의 가치를 묘사한다. 동시에 '신곡'은 지옥ㆍ연옥ㆍ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한 우화다.

논라운(*놀라운) 건 단테의 이 환상여행기는 역대 교황들, 플라톤, 마호메트,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토마스 아퀴나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스타티우스 등 실존했던 인물들과 아킬레우스, 제우스, 미노스 등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은 물론 솔로몬, 유다, 다윗 등 성서 속 인물까지 등장한다. 단테의 모든 것을 통해 서양문화의 모든 특질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대서사시다.(허연 기자)

07. 08.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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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8-09 13:40   좋아요 0 | URL
가슴 설레게 하는 소식이군요. 비교 분석 들어가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8-09 14:34   좋아요 0 | URL
<신곡>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나올 번역은 다 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차세대 번역이 나오더라도 십수 년 이후가 아닐까 싶어요...

urblue 2007-08-09 14:52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때 시도했다 그냥 덮은 기억이... -_-; 이 참에 다시 도전해볼까요?

로쟈 2007-08-09 22:55   좋아요 0 | URL
네, 다시 시도해보시길.^^

수유 2007-08-09 23:02   좋아요 0 | URL
동생 왈 **야 책이 쌓인다 쌓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책들은 자꾸 쏟아져 나오고 나는 주체할 수가 없네요...그래도 사놓기는 하여야, 정말 지옥편이라도 끝내길 저도 바랍니다.

로쟈 2007-08-10 10:51   좋아요 0 | URL
우리는 '책의 지옥'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죠...
 

국내 최대 시인단체인 시인협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시협회장을 맡고 있는 오세영 시인 같은 분은 여러 가지로 분주하겠다. 지난달말 읽은 문화일보의 기사까지 떠올라서 한국일보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8. 09) 오세영 한국시인협회장, 11일부터 기념행사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년)를 효시로 한 한국 현대시의 역사가 햇수로 100년을 맞았다. 올해는 회원 1,000여 명의 국내 최대 시인단체인 한국시인협회(이하 시협)가 창립된 지 50주년이기도 하다. 시협은 이번 주말부터 뜻 깊은 해를 기념하는 다양한 문학 행사를 개최한다(별도 기사 참조). 작년 3월부터 2년 임기의 회장을 맡아 행사 준비에 분주한 오세영(65) 시인을 만났다.

국내 순수시단의 중견이자 이달 정년을 맞는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인 시인은 월간 <문학사상> 이달 호에 “한국 문단을 양분한 ‘문학과 지성’ 파와 ‘창작과 비평’ 파 사이에서 나는 철저하게 외면 당해 왔다”는 요지의 회고록을 실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아래 문화일보 기사 참조).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등의 주도로 창립된 시협이 50돌을 맞았다.
“자유당 시절 대표적 문화단체인 문총(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약칭)이 어용 단체 노릇을 하는데 반발해 시협이 창립됐다. 독재에 맞서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취지였다. 신석초, 서정주, 김춘수, 조병화, 정한모, 김남조 등이 회장을 맡으며 한국 시단의 정통을 계승해왔다고 자부한다.”

-11~13일 동아시아 시인 포럼 주제가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동아시아 시의 역할’이다.
“세계화와 민족주의가 상충하는 시대다. 세계화의 실상은 미국화로, 서구적 가치와 표준이 일방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고유의 문화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세계화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동양적 가치관이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자는 취지다.”

-한국 현대시를 연구하며 19권의 학술서를 냈다. 시사(詩史) 100년을 평가한다면.
“한국 현대시 100년은 한마디로 정치사였다. 문학이 정치 권력에 기대고 시류를 쫓았다. 1920, 30년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만 존재했고, 해방 이후에도 참여, 민중이란 구획을 벗어난 시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순수시조차도 독재와 반공 이데올로기란 정치적 상황을 의식한 것이었다. 문학다운 문학, 문학으로서의 문학이란 의식을 가져보지 못했다는 점은 시단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다.”

-현실참여적 시풍은 시대적 요청 아니었을까.
“맞다. 나는 문학 지상주의자가 아니다. 80년대만 해도 민주화를 향한 열망에 문학이 복무한 것은 정치적으로 옳은 일이었다. 다만 정치적으로 훌륭한 시가 문학적으로도 그렇다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소설과 달리 전달적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젊은 시인들의 탈정치성은 어떻게 보나.
“크게 두 가지 경향성을 보인다. 영상 문화에 익숙한 세대답게 환상, 해체 등을 표방하는 감각적 작품과 천진난만한 감성을 앞세우는 서정적 작품.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어서 자유롭지만, 시 세계를 지탱해줄 철학이 부족해 보인다. 문태준, 김경주 등은 깊은 사유가 서정성을 뒷받침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문학사상>에 기고한 글이 화제가 됐는데.
“많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창비와 문지가 자기 경향이나 계열에 참여하지 않는 작가들을 고립시켜왔다는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등단 작가와 발표작이 크게 늘어난 요즘엔 평론가가 옥석을 가리는 역할을 잘해내야 할텐데, 이들이 특정 문학 권력에 편입돼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작품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23년 봉직한 대학 강단을 떠나게 됐다.
“다음달 중순에 마지막 강의가 예정돼 있다. 정년에 맞춰 42년 간 써온 시집 17권을 2권으로 묶은 책을 냈다. 창작을 계속할 테니까 ‘전집’은 아니고 ‘집합본’이랄까. 이달 중순엔 동창이나 문단 지인들이 나에 대해 쓴 글을 묶은 문집이 나온다. 서울을 벗어나 꽃, 나무를 기르며 창작에 전념하고 싶다.” (이훈성기자)

문화일보(07. 07. 31) "나는 좌파 문학의 왕따, 철저하게 소외 당했다”

“나는 좌파문학권력의 ‘왕따’였다.”

곧 서울대 국문과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는 오세영(65·한국시인협회장) 시인이 문학인생을 회고하며, 자신은 ‘순수문학’을 고집한다는 이유로 ‘창작과비평파’(창비파)와 ‘문학과지성파’(문지파) 등 소위 ‘민중 문학권력’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됐고, 대학 강단에서도 좌파문학에 경도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토로해 파장이 예상된다.

서울대 국문과 출신인 오 시인은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그동안 17권, 1100여 편의 시를 쓴 순수문학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1985년 이후 22년간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올 1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한다. 이처럼 손에 꼽는 강단문인이자 순수문학 시단의 ‘원로’가 주요 문예지는 물론 각종 문화단체를 장악한 ‘문학권력’을 겨냥해 이같이 발언함에 따라 논란이 뒤따를 것 같다.

오 시인은 30일 발간된 ‘문학사상’ 8월호에 실린 “문단의 외톨이 혹은 ‘왕따’”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2005년 발간된 영문 한국시인 인명사전에 자신의 이름이 빠진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민음사가 출판하고 한국문학번역원이 발행한 이 인명사전은 당시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했던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을 위해 만든 것. 이미 오 시인의 시집은 독일에서만 3권이 번역·출간되는 등 4개국어로 해외에 소개될 정도였으나 우리 시인의 인명사전에 정작 그의 이름은 오르지 않았다.

그에 앞선 수년전 당시 문예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 몇 개의 주요 외국어로 한국 현대 문단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발간할 때도 오 시인은 이름조차 제외됐다. 오 시인은 “프랑크푸르트 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도 그때(소책자 발간)의 위원들이 포함된 것을 보니 속칭 ‘왕따’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며 우연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이어 그는 “197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학권력을 양분했던 ‘창비파’와 ‘문지파’가 발행하는 문학지나 그들 세력이 접수한 그 어떤 문학지로부터 단 한번도 원고청탁을 받은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들 유파의 핵심 비평가나 시인들 역시 그 어떤 글에서도 내 이름을 올리지 않았으며, 시단의 어떤 경향을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시인들의 이름을 나열할 경우에도 내 이름만큼은 생략해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핍박받은 시인이라는 점에서 나는 일종의 민중 시인”이라고 자조했다.

그는 ‘왕따’의 이유로 자신의 ‘순수문학’ 지향을 꼽았다. 우선 민중문학 계열이 ‘어용’으로 몰아붙인 박목월 시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등단했고, 박 시인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지냈으며, 또 김수영과의 문학논쟁으로 민중문학으로부터 무차별 비판을 받은 이어령과 가깝게 지내는 등 “그(순수문학) 인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내가 그들에게 곱게 보일 리는 없을 터”라는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나는 문학이 원래 정치의 도구는 아니며 시대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나는 문학이란 원래 정치의 도구라고 주장하는 민중문학의 일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오 시인은 주장한다.



그는 20여년의 서울대 봉직 시절도 “고독했다”고 되돌아 보았다. 오 시인에 따르면, ‘순수학문이 소외되고 정치 우선주의가 전횡’했던 그 시절은 ‘교수의 가르침보다 운동권 선배의 말이 더 권위가 있었으며, 운동권·좌파·주사파가 선정한 독서목록 이외에 다른 어떤 책도 읽기를 거부’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현대문학 강의 역시 그 추세를 따라 서구에서는 오래 전에 한물간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마치 아카데믹하고 절대적인 방법론인양 활개를 쳤다. 그것들을 최상의 것처럼 옹호하는 교수들이 있었으며 그래야 인기도 얻고 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오 시인은 “그럼에도 나는 대세를 거부하며 고집스럽게 순수문학과 시의 본질을 옹호하고 신비평이나 형식주의, 구조주의를 강의했으니 학내외에서 얼마나 눈에 든 가시같이 보였으랴”라고 되물으며 “지금 생각하면 따돌림까지는 모르겠으나 어용으로 몰리지 않은 것만큼은 천만다행”이라고 회고, 그가 학생은 물론 교수진으로부터도 달갑지 않은 존재로 대접받았음을 짐작하게 했다.

오 시인은 “나는 순수문학파이다”라고 다시 분명히 밝히면서 “이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라고 강조하고 있다.(엄주엽기자)

07. 08. 09-10.

P.S. 문지와 창비쪽으로부터 왕따를 당했다고는 하지만 오 시인은 '문학사상' 같은 곳에서는 언제나 융숭한 대접을 받아왔다. 20년전 지난 1987년 문학사상사에서 제정한 소월시문학상의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된 이도 바로 오세영 시인이었다(나는 수상시집을 갖고 있다). 그때 수상작인 '그릇1'을 옮겨놓는다. 아마도 시인이 생각하는 '순수시'의 한 전형이겠다('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이란 구절이 인상적이군)...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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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9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09 22:56   좋아요 0 | URL
연유는 문학사상을 참조해시길.^^

philocinema 2007-08-0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시인의 “이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동감합니다.
모든 시인이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참여시든 순수시든 그 선택의 자유는 시인 내부로부터의 요청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사회적 상황에의해 참여시가 강요된다면 "자유"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닐까요?

로쟈 2007-08-09 23:04   좋아요 0 | URL
옳다/그르다와 무관하게 각기 다른 문학적 입장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선 순수문학론자들 역시 참여문학론자들 이상으로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지라(무관심은 관심을 배제하는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이니까요. '순수시단'이란 말부터도 그렇고). 오시인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순수/참여의 이분법이 서로에 대한 알리바이만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요컨대 결과적으론 둘이 공모적이라는 것이죠)...

philocinema 2007-08-10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시를 쓰는 시인 내부의 요청이 "정치적"이라는 로쟈님의 말씀이 제겐 신선하군요.
순수와 참여는 그러니까 "적대적 공범자" 관계라 볼 수 있겠군요!

로쟈 2007-08-10 10:34   좋아요 0 | URL
이 세상에 '옛애인'이란 없는 것처럼 '순수시'란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시들이 있는 것이죠...

philocinema 2007-08-1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바라보는 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로쟈 2007-08-10 14:58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기인 2007-08-1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엇; '옛애인'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요? ㅎㅎ 궁금하네요 ^^;;;

로쟈 2007-08-11 00:32   좋아요 0 | URL
따로 페이퍼를 만들었습니다.^^
 

현재로선 문단의 최연소 비평가 허윤진씨의 첫 비평집이 나왔다. 언젠가 한 모임에서 안면을 튼 적은 있지만 나는 이 작은 체구에 여려 보이는 비평가가 얼마나 큰 비평적 야심을 품고 있는지는 미처 몰랐었다. 야심? '5시 57분'이란 타이틀부터 시작해서 비평집의 목차를 그냥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독자적 존재양식으로서의 '비평'에 대한 열망을 그녀가 얼마나 강하게 품고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것이 근대적 비평의 말기증상인지 21세기 비평의 초기징후인지는 세월이 더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여하튼 나는 그녀를 한국 비평계의 '시한폭탄'으로 간주해도 좋으리라고 본다(째깍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그리하여 조만간 뭐라도 터질 것이다. 그녀의 비평이 폭발하든, 우리의 관행적 비평이 폭발하든 뭐라도 터질 거라는 예감... 3분 남은 건가?.. 

경향신문(07. 08. 09) 허윤진씨 첫 평론집 ‘5시57분’…21세기 문학 21세기 방식으로 읽기

‘소노그램(소리에 대한 기록) 아카이브에서 아키비스트로 일하게 된 지도 어느덧 24,327,850초가 지났다…얼마 전에 아카이브를 체크하다가 나는 흥미로운 소노그램을 들었다. 동아시아공동체 EAC에 살고 있는 모델넘버 C18662126이 익명의 다수에게 전송한 내용이었다.’

Serial Number(일련번호) 6002(2006년산)로 분류된 이 파일에서 흘러나온 내용은 한유주 소설집 ‘달로’와 김애란 소설집 ‘달려라 아비’의 인용문들이다. 문학평론가 허윤진씨(27)의 첫 평론집 ‘5시57분’(문학과지성사)은 이처럼 특이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한유주와 김애란의 소설에는 근대소설의 독법으로는 잡히지 않는 잉여가 존재하는데 눈으로 읽기보다 소리 내서 읽을 때 제대로 감상할 수 있고, 나아가 (음독하는)시와 (묵독하는)소설이라는 장르 구분은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평론집은 21세기 문학을 21세기적인 방식으로 읽어낸다. 조연호의 시를 분석한 ‘대화의 퍼즐, 흩어진’에서는 각각 번호를 단 조각글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0부터 23까지를 맞춰가며 읽어도 되지만 23, 11, 1, 3, 19의 순으로 읽어도 마지막에는 그림이 드러난다. 이는 시인 조연호의 방식이기도 하다. 사전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전유한 이준규의 시에 대해 말하면서 한 문단을 5페이지에 걸쳐 끊지 않고 쓴 부분(사전이란 기표의 끊임없는 미끄러짐이다), 김민정·유형진·이민하의 작품집에 대한 글은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장(chapter) 대신 차원이동이 가능한 지도(map)로 구성한 것도 특이하다.

“새로운 한국 문학에 대해 선조성(linearity)이 무화됐다, 중심이 없다, 주체가 분열됐다고 말하면서도 비평의 목소리는 여전히 선조적이고 근대적인 데 대해 모순을 느꼈어요. 똑같은 길을 갈 수는 없었습니다. 또 고전에서의 시서화(詩書화)처럼 장르가 통합된 방식이나 요즘 무용·연극·음악 등이 보여주는 장르 넘나들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허씨가 생각하는 비평은 작품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거기에 이르는 길로 독자를 안내하는 게 아니다. 텍스트를 인용하기는 하지만 비평 자체가 완결된 작품이다. 평론집의 한 부분에서 그는 “타자적인 요소들이 내합한 채로 발설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말을 더듬다가 결국 자기 파괴의 현장으로 가서 자기의 주검까지도 확인하고 돌아오는 과정이 비평이어야 한다”는 자의식을 드러낸다.

그가 좋아하는 작품은 아무래도 동시대 작가들의 것이다. 소설가 한유주·김애란·편혜영·김숨, 시인 황병승·이준규·조연호·김경주 등을 즐겨 다룬다. 김행숙·이장욱·김경인·김중일 등의 시인, 김미월·황정은 등의 소설가도 향후 분석하고 싶은 작가로 꼽았다. 이들과는 세대적 특성을 공유한다. ‘문자 메시지에 답을 안 해줄 때 상처 받는 세대’이자 싸울 대상은 없으나 제도적 억압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불안과 무력감에 시달리는 세대의 문학이다. 여성평론가라는 정체성 때문에 여성주의에도 관심이 많지만 굳이 여성작가의 작품보다는 황병승과 최하연의 시에서 성별을 거스르는 여성적 측면을 읽어낸다.

허씨의 글들은 감성도 번뜩이지만 문학이론, 매체이론, 영화·만화·음악 등 다른 장르에 대한 지식을 종횡무진 오간다. 그러나 비평적 권위는 사양한다. “평론가 역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방식으로 텍스트와 대화를 나눈다”며 “세상에는 문학작품을 읽는 수천가지 방식이 존재하고 그 한 방식으로서의 내 글 역시 모호한 다양성으로 독자들의 해석에 열려있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는 자기 평론의 전범을 작고한 평론가 김현에게서 발견했고, 그의 책을 읽은 대학신입생 시절부터 평론가를 꿈꾸었다.

우리 문단의 최연소 평론가인 그는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던 2003년 초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부문에 당선돼 등단했다. 현재 서강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복도훈·이수형·신형철·차미령씨 등 또래 평론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평론집을 묶었다. 조만간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소속 방문연구원으로 1년간 공부하기 위해 출국한다.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 그에게 향후 계획을 물었다. “이번 첫 평론집에서도 청탁을 받은 글은 빼고 제가 쓰고 싶었던 글만 넣었습니다. 그러나 전체가 이어진 글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정치·경제·사회·예술적으로 중요한 주제에 대해 제가 읽었던 텍스트를 인용해 쓰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책에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달아 완결성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제목의 의미에 대해 “고통스러운 꿈보다 현실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기 직전의 시간”이라고 설명했다.(글 한윤정기자)

07. 0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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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8-09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읽기 전까진 남잔 줄 알았어요.

로쟈 2007-08-10 10:50   좋아요 0 | URL
이름이 그런가요, 아님 인상이? 혹은 문체?

심술 2007-08-10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에 나온 얼굴이 남자같았어요.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 때문에 자연스레 떠올린 책은 토머스 소웰의 <비전의 충돌>(이카루스미디어, 2006)이다. 작년 3월초에 '최근에 나온 책들'의 하나로 <비전의 충돌>을 꼽으면서 내가 떠올린 책이 <본성과 양육>이었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830562). 서평거리가 될 만한 책으로 전부터 염두에 두고는 있었는데, 오늘에야 책을 손에 넣었다. 한 신간서적을 구하러 서점에 들렀다가 아직 입고가 안 되었다기에 잠시 두리번거리다 들고 나온 게 바로 소웰의 책이었던 것. 언론 리뷰들을 미리 훑어보다가 그 중 가장 긴 것을 옮겨놓는다.

프로메테우스(06. 02. 22) 인간과 세계를 보는 두 시각의 차이

최근 『비전의 충돌』이라는 새 책이 나왔다. 원제는 A Conflict of Visions고 부제는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다. Thomas Sowell이 2002년에 발표한 것으로 채계병이 번역했고 이카루스미디어에서 2월 15일 출간했다.

‘문명의 충돌’의 아류작인가, 비전이 함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는 궁금함을 유발시키는 책 제목이었다. 저자 토머스 소웰은 현재 스탠포드 대학 교수다. “그는 고전 경제 이론에서 사법적 행동주의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광범위한 분야의 주제에 대한 많은 논문과 에세이는 물론 9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책날개에는 40여권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느 게 사실인지 모르겠다. 그는 “미국의 학자 두뇌집단의 한 명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3기에 걸친 미국 행정부의 자문을 맡았었다. 「포천」, 「포브스」, 「월 스트리트 저널」 등 150개 이상의 신문사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고 한다.

책 표지의 광고로 “랜덤 하우스가 조사한 미국 독자가 뽑은 논픽션 부문 20세기 명저”, “소웰은 공정하고 분명한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뉴욕타임즈)”,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한 학자가 정치투쟁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에 대한 연구에 잊혀지지 않을 기념비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토머스 소웰은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도 환영받는 저자이다(Ingram)”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가 환영했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서문’으로 넘어간다.

인간 본성에 대한 두 개의 시각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책에서의 ‘비전’은 시각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시각에 따라 각 사상가들의 주장과 정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소웰이 제시하는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은 성악설(혹은 성오설)과 성선설로 이해할 수 있다. 소웰은 서양의 대표적 사상가들을 이러한 기준에 따라 분류한다.

소웰은 서문에서 “우리 모두는 비전을 갖고 있다. 비전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소리 없이 결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와 ‘비전’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이해관계의 갈등은 단기에만 영향을 미치지만 비전의 충돌은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제 비전이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제1부 '비전은 어떻게 드러나는가?'로 넘어간다.

제1장 제목은 '비전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이다. 소웰은 "비전은 논리나 사실에 기초한 검증에 활용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육감이나 '본능적 느낌'과 같은 것이다. 논리가 사실에 기초한 검증은 비전이 원료를 제공한 후에나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육감과 느낌이라, 다소 실망스럽지만 더 들어보기로 한다. “특정 비전- 혹은 특정 비전의 충돌 -은 결정이 내려지는 장소의 분위기를 지배할 수 있다. 역사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권력자들에게 조언을 속삭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사고의 흐름에 기여하는 것이다”고 한다.

‘스미스’파와 ‘고드윈’파로 나누다
제2장 제목은 '아담 스미스의 제약적 비전과 윌리엄 고드윈의 무제약적 비전'이다. 2장을 읽으면서 이 책이 생각보다 흥미로운 책이라고 느끼게 됐다. 학적 깊이나 구체적인 논증은 약하지만 수많은 사상가들의 생각을 넘나들며 크게 스미스파와 고드윈파로 나누어 사상가들의 집합을 제시하는 부분들이 재밌다.

“사회에 대한 비전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 개념에서 차이가 난다”로 시작한다. 루소와 홉스의 인간관의 차이를 거론한다. 소웰은 “서로 다른 관점에 기초해 자신들의 분명한 철학, 정치, 혹은 사회 이론들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인간의 도덕과 정신의 본질에 대해 아주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에 지식과 제도에 대한 그들 각각의 개념 또한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자로 유명해지기 거의 20년 전인 1759년, 철학자로서 스미스는 자신의 『도덕적 감정에 대한 이론』”에서 가정이지만 중국의 모든 주민이 지진으로 사라져버린 사건과 자기의 새끼손가락을 잃었을 때를 비교한다(*<도덕감정론>으로 번역돼 있다). “스미스는 도덕철학 교수였지만 그의 사고 과정은 이미 경제학자의 것이었다”고 한다. 소웰은 에드먼드 버크에 이어 알렉산더 해밀턴도 스미스와 같은 ‘제약적 비전’ 입장이라고 소개한다. 제도의 결점은 그 제도를 만든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도덕’적 문제로 해결하기보다 “일련의 ‘균형’적인 도덕적 인센티브 체계”를 중시한다. 그런 관점은 『국부론』으로 이어진다.

반면 ‘무제약적 비전’으로 윌리엄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고찰』을 거론한다. “아담 스미스의 인간관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 책이다. “아담 스미스가 인센티브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사회·도덕적으로 유익한 행동을 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윌리엄 고드윈은 인간의 오성과 기질로 인간은 의도적으로 사회에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본성’인가, ‘조장’된 것인가?
“인간의 이기심을 주어진 것으로 보는 스미스와 달리 고드윈은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되는 바로 그 보상 시스템에 의해 인간의 이기심이 조장되는 것으로 보았다”며 심리적 혹은 경제적 보상 때문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드윈의 비전은 “보상에 대한 기대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정신을 개선시키는 데 해가 된다”는 것이다. 당근과 채찍으로 통제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마르키 드 콩도르세도 무제약적 비전파다. 수학자로서 콩도르세는 “완벽해질 수 있는 능력을 수학적 극한에 대한 무한히 점근선적인 접근으로 인식했다.” 고드윈은 의도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것을 ‘미덕’, 의도적으로 해를 입히는 것을 ‘악’, 우연히 해를 입히는 것을 ‘태만’으로 불렀는데 우연하게 유익하게 하는 경우를 뺐다. “아담 스미스의 비전 전체에서 중심적인 것이 고드윈에게 빠져 있는 항목이다.”

스미스는 자본가들이 사회에 대해 산출하는 경제적 이익은 “자본가의 의도는 아니다”며 스미스는 자본가의 의도를 “비열한 탐욕”으로 특징지었다. 자본가들은 “즐거움이나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서조차 함께 만나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들의 “대화는 사회에 대한 음모나 가격을 올리기 위한 어떤 계략으로 끝을 맺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자본가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던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의 수호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밀의 절충, 마르크스의 복합, 제퍼슨의 전향
루소는 인간의 본성이 사회 제도 때문에 편협해지고 부패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현재의 비열한 교육과 비참한 사회 제도들이” 사람들이 일반적 행복을 누리는 데 “유일하게 진정한 방해물”이라고 한다. 소웰은 밀을 절충주의라고 보지만 이 부분만큼은 무제약적 비전이라고 한다. 그와 반대로 맬서스는 인간의 고통이 “인간 본성의 고유한 법칙 때문이며 인간이 만든 모든 규칙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소웰은 “제약적 비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들 중의 하나”로 맬서스를 꼽는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과거의 상당 부분에 대해 제약적인 비전을 적용하고 미래의 상당 부분에 대해 무제약적인 비전을 적용하고 있는 독특한 복합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소웰의 책에서 이 사상가들은 마치 한 자리에 모여 토론하듯이 상반되는 주장들을 마구 쏟아낸다. 어수선하지만 싸움 구경은 재밌다.

“제약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과 무제약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의 큰 악- 예를 들면 전쟁, 가난 그리고 범죄 -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며 무제약적 비전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들의 특별한 원인을 찾고 제약적 비전을 믿는 사람들은 평화, 부 혹은 법을 준수하는 사회의 특별한 원인들을 찾는다. 아담 스미스는 “사회의 평화와 질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한다.

18세기에 두 차례의 대혁명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일어났는데 전자는 무제약적이고 후자는 제약적인 다른 비전을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로베스피에르는 해결을 추구했고 해밀턴은 균형을 추구했다. 그런데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으나 희생이 늘어나자 반대하게 된다. 소웰이 밀과 마르크스를 복합파로 분류했는데 제퍼슨은 전향파다.

이백 년간 계속된 이데올로기 갈등
“어떤 사람들은 제약적 비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또 다른 사람들은 무제약적 비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 본성과 사회 인과율에 대한 어떤 분명한 핵심 가정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으로 모든 사회 이론가들을 구분할 수 없지만 이 같은 분류를 통해 중요한 많은 인물들과 지난 이백 년간 계속되어 온 이데올로기 갈등의 논점을 분명하게 부각시킬 수는 있다.”

무제약적 비전파는 18세기의 고드윈, 루소, 볼테르, 콩도르세, 토머스 페인, 홀바흐 그리고 19세기의 생 시몽, 로버트 오웬, 조지 버나드 쇼 이어 “20세기엔 정치학자인 해롤드 라스키, 경제학에서 솔스타인 베블렌과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그리고 법학에서 이론에선 로널드 드워킨, 실천에선 어를 워런으로 대표되는 사법적 행동주의 옹호자들과 같은 전 학파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약적 비전파는 “세계의 악을 개선하고 진보를 조장하기 위해 도덕적 전통, 시장 혹은 가족들과 같은 어떤 사회 과정의 시스템 특성들에 의존”한다. 제약적 비전파는 토머스 홉스, 스미스와 “에드먼드 버크와 『연방주의자의 보고서』 저자들, 법학의 올리버 웬델 홈즈, 경제학의 밀턴 프리드만, 그리고 일반 사회 이론에서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등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칼 마르크스는 어느 한쪽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중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전향하기도 한다. 5장에서 ‘복합적 비전들’로 마르크스주의와 공리주의를 설명한다. 소웰은 그들이 어떤 “말을 했는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바로 특정 이론의 구조와 작용에 제약들이 내재되어 있는가 혹은 어느 정도나 내재되어 있는가 여부”가 기준이라고 한다.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이라는 이분법은 인간의 고유한 한계가 비전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다루어지고 있느냐 여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현실이다. “비전의 차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들이 충돌하게 된다.”(오창엽 기자) 

07.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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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marx 2007-08-14 02:24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몹시 민망하군요. 당시 인터넷신문 기자로서 매일 기사를 작성하는데, 신문사로 책들이 왔습니다. 영어공부법과 처세술 등의 책들이 많지만 가끔 신간인문서적이 출간 한달쯤 전에 오곤 했습니다. [비전의 충돌]은 개인적으로는 그리 호감가는 책이 아니었으나 그 주제, 저자의 주장 또 그 안에 언급되는 무수한 인물들에 대한 논평과 정보를 볼 때 좀더 폭넓은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읽힐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압축하는 서평이 아니라 먼저 읽은 독자로서 그 내용을 음미했던 것이지요. 제 생각은 최소한으로만 포함해서요.
많은 언론사의 책담당기자들이 출판사의 보도자료를 요약해서 기사를 씁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기자가 보도자료 압축한 걸 베끼기도 합니다. 사실 다 읽고 쓰나 홍보글을 표절하나 비슷하지요. 반면 인터넷신문의 경우 분량을 길게 할 수 있으니 전문서평기자나 객원기자가 있다면 보다 성실한 책소개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출판사 쪽 분이 그러더군요. 책을 읽고 기사를 써서 고맙다고. 해당 책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든 안 하든 기사를 쓰려면 책을 읽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현실이 부박하니 당연한 게 특이한 게 되버리는 거겠지요.
훗날 이렇게 갈무리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잠을 줄여서라도 더 공을 들였어야 하는데 말이죠.

로쟈 2007-08-14 09:00   좋아요 0 | URL
찾아본 서평들 중에는 가장 길고, 그래서 가장 유익한 서평이었습니다. 민망해하진 마시길.^^

푸하 2007-08-14 02:46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읽고 이를 음미하고 또 음미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중요한 거 같아요.

로쟈 2007-08-14 09:00   좋아요 0 | URL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여건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