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퍼슨웹 주최의 북포럼에 패널로 참여해 작가 장정일씨와 흥미로운 만남을 가졌다. 화제는 <공부>(램덤하우스, 2006)와 <장정일의 독서일기7>(랜덤하우스, 2007) 두 권의 책이었고 나의 몫은 "단순한 작가 강연회나 독자와의 대화 수준이 아닌 독특한 지점의 논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는데, 어젯밤에 KBS에서 지난 1월에 방영된 'TV, 책을 말하다'란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 다시 보면서(이 방송분에서 작가의 답변은 <독서일기7> 말미에 수록돼 있다) <공부>에 대해 '재탕' 질문을 던지는 건 별로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작가 장정일의 지난 20년'에 대한 독자로서의 감회부터 먼저 적기 시작했는데, 토론문은 그걸로 그냥 분량이 다 차버렸다(하기야 오전에 쓴 것이니 더 쓸 시간도 없었다). 그걸 약간 간추려서 옮겨놓는다. 

 

먼저, 이 자리에 패널로 초대해주신 퍼슨웹과 북포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책’이나 ‘공부’라면 늘 접하는 것이고(“당신이 그거 말고 잘 아는/잘하는 게 뭐있어?”라는 게 자주 듣는 소리죠!) 특히 오늘 독서토론의 대상이 평소 제가 즐겨 읽고 좋아하는 작가 장정일 선생님이라고 해서 제 역량과는 무관하게 초대에 흔쾌히 응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가볍게 시작하겠습니다. 가볍게 시작하자면 개인사부터 들추게 되는데(^^), 사실 장정일의 첫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부터가 ‘파격’이 아니었나요?(게다가 이 시집은 ‘김수영문학상’ 수상 작품집입니다. 수상자의 면면을 보자면 장정일은 이성복, 황지우의 뒤를 잇는 ‘우리시대의 시인’이었던 것이죠). 그때가 저로선 대학 1학년 때인데 ‘근엄한’ 시들만 읽어오다가 이런 시를 맞닥뜨렸을 때의 ‘쾌감’은 요즘 다시 맛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시는 이런 식이었지요. 

 

오늘 내가 해 보일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나 손쉽게, 많은 재료를 들이지 않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명상
그러면서도 맛이 좋고 영양이 듬뿍 든 명상
어쩌자고 우리가 <햄버거를 만들어 먹는 족속> 가운데서
빠질 수 있겠는가?
자, 나와 함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행하자
먼저 필요한 재료를 가르쳐 주겠다. 준비물은


햄버거 빵 2
버터 1½큰 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1½
달걀 2
빵가루 2 컵
소금 2 작은 술
후춧가루 ¼작은 술
상추 4 잎
오이 1
마요네즈소스 약간
브라운소스 ¼컵

 


그렇게 해서 “이 얼마나 유익한 명상인가?”로 마무리되는데,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 이 보다 더 유익한 시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등장한 장정일은 제게 문학의 모든 아우라를 제거한 말 그대로 ‘포스트모던’ 시인이었습니다(제 생각에 장정일은 시작(詩作)의 패러다임을 ‘시쓰기’에서 ‘타이핑하기’로 바꾼 ‘혁명가’입니다). 앞에 적은 이성복, 황지우의 ‘모더니즘’과 비교해보아도 그 차이는 확연합니다(*작가의 흥미로운 전언에 따르면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 실린 몇몇 시편들 덕분에 북한에서 '장정일'은 '반미시인'으로 문학사에서 거명되고 있다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시인 장정일을 언제나 <무림일기>(1989)의 시인 유하와 나란히 떠올리게 됩니다(장정일 & 유하). 두 사람은 진작에 ‘시의 종언’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우연찮게도 두 사람은 모두 시를 떠나게 됩니다(한 사람의 소설은 자주 영화화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영화를 만드는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에서도 친연성은 없지 않네요). 


어쨌든 처음 두 권의 시집 이후로 저는 장정일의 책을 대부분 사들여서 읽은 것 같습니다. 그게 80년대말 90년대초인데 당시에 가장 인기 있었던 작가는 장정일도 좋아하는 밀란 쿤데라였죠. 개인적으로 매번 작품이 나올 때마다 사서 읽은 두 작가여서 언제나 두 사람을 짝으로 떠올리게 됩니다(장정일 & 쿤데라). 무라카미 하루키도 유행이었지만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서일기>를 통해서만 간접독서를 하게 됩니다. 해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쿤데라-하루키-장정일’이란 계열을 떠올리게 되는데 앞의 두 사람은 노벨문학상의 단골 후보 아닙니까?(장정일은 “내 소설을 쓰레기”라고 토로하지만, 개인의 기억속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좀 다른 것이죠.)

 

 

 

 

 

 

 

 

 

 

21세기가 시작하자 ‘행복한책읽기’란 출판사에서 ‘우리시대의 인물읽기’라는 기획서를 내는데, 그 첫권이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2001)였습니다(그 이전에 <작가세계> 1997년 봄호가 ‘장정일 특집’이었습니다). 장정일 문학에 관한 아주 유익한 자료가 되는 책이고 저는 바로 사서 읽은 책입니다(그 사이에 ‘거짓말 사건’, <내게 거짓말을 해봐> 때문에 빚어진 필화가 있었는데, 분량상/시간상 생략합니다. 이때의 프레임은 ‘장정일 & 마광수’입니다. 이른바 ‘사회적 공모에 의해 암살’된 ‘수난자 장정일’인 것이고, 그가 마광수에 비유한 표현을 빌면 “우리시대의 모차르트”였던 것이죠).  

 

그 책의 기획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그렇게 낯설었으면서도 또 그렇게나 빨리 새로운 세대에게 전파된 것이 장정일이었고 장정일의 문학이었다. 장정일 이후의 문학은 독자적으로 이미 상당히 세를 굳힌 듯하다. 그리고 어느새 그가 문학 논의의 중심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듯한 이즈음 우리가 그에 대한 책 한 권에 이르는 조명을 새삼 시도하는 것은 그가 일으킨 파장이 아직도 한때의 소동이 아니라 제대로 탐구되어야 할 사건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구광본_소설가)

요는 그가 세기말/세기초 한국사회의 ‘문제적 인물’이었다는 것이죠(‘우리시대의 인물’이었다는 것이고요). 그건 이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2002)이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아시다피시 그는 그해 겨울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리하여 ‘장정일 & 노무현’이 되는데(대단한 거 아닙니까?), 장정일이 노무현과 함께, 노무현보다 먼저 다루어졌다는 사실을 혹 <공부>로 장정일을 처음 만나는 (87학번이 아닌) 87년생 독자들은 실감할 수 있을까요?


아무려나 두 사람은 ‘비주류’의 코드를 공유하는 우리시대의 화두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아시다시피 이 비주류성은 ‘장정일 & 김기덕’이 공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작가가 <공부>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노무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런 책을 내게 된 것은 2002년 대선 때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집필실을 얻어 글을 쓰고 있었는데, 옆 사무실의 중년들이 ‘노무현 그거 빨갱이 아닌가?’라며 성토하는 대목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장정일의 ‘공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우리사회의 ‘상식 혹은 희망’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닐까요?(출판사 문구로는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라고 돼 있지만, 우리 사회에 언제 ‘인문학’이 만개하고, ‘상식 혹은 희망’이 만발했었는지는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그건 작가 자신에게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 게, 요즘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그의 문학이 아니라 그의 <공부>입니다!

 

 

 

 

 


 

 

 

 

<공부>로 아주 넘어가기 전에 ‘소설가 장정일’도 잠깐 언급해두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나 <보트하우스> 같은 작품을 좋아하고(<보트하우스>는 특히나 러시아문학과의 관련성이 많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 온 편지>를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는데(소위 장정일을 읽기 위한 코드를 다 ‘드러낸’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소설 대부분은 이젠 <선집>을 통해서만 읽어볼 수 있습니다(그래도 그는 ‘2만부 작가’였는데 말입니다!).



 

 

 

 

 

 

 

<중국에서 온 편지> 이후에 뜻밖에도(아주 뜻밖은 아니었지만) 작가는 <삼국지>로 나아갑니다(그는 “40세 때부터 <삼국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중년이라는 나이와 <삼국지>라는 역사 장르가 저의 독서 습관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라고 적는다). 문화일보에 연재되는 걸로만 가끔 읽었을 뿐 저는 그의 <삼국지>를 완독하지는 않았습니다만(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려 10권이고, 저로선 꽂아둘 만한 서재가 없습니다), 이게 기본적으로 80년대 주류 작가였던 이문열의 <삼국지>를 겨냥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장정일 vs 이문열).

 

이 구도에 황석영의 <삼국지>가 끼어드는 바람에 작가로서는 ‘물 먹은’ 경우가 된 게 아닌가 싶지만(판매가 상당히 저조합니다) 어쨌거나 우리시대의 삼국지 작가로서도 장정일은 앞 세대의 두 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이문열-황석영-장정일). 하지만, 다른 작가들이 가지 않은 장정일만의 길을 그는 개척했는데, 그건 바로 ‘의사pseudo 저자’로의 길입니다.

 

 

 

 

 

 

 

 

 

지난 1994년 <독서일기> 1권을 처음 내면서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린시절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 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 시인․소설가라는 꿈에도 원치 않았던 개똥 같은 광대짓과 함께 또 한권의 책을 출간하고자 머리말을 짜내고 있는 나는 ‘불행한 저자’이다.(...)

 

내가 한 권의 낯선 책을 읽는 행위는 곧 한권의 새로운 책을 쓰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읽는 모든 책의 양부가 되고 의사pseudo 저자가 된다. 막연하나마 어린 시절부터 지극한 마음으로 꿈꾼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누가 얼굴을 똑바로 하고 자기 자신을 쾌락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단어가 가진 엄밀한 의미를 좇는 쾌락주의자가 되고 싶다” (강조는 나의 것)

 

 

 

 

 

 

 

 

그러한 그의 독서관은, 하지만 변화하게 됩니다. 재즈에서 클래식으로 음악에 대한 그의 취향이 변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독서일기> 10년째인 2004년에 낸 6권의 서문은 이렇습니다. “보혁갈등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지난 몇 년간을 보내면서, 나의 독서관은 개인적으로 내밀한 쾌락을 좇아가는 독서에서 약간 다른 것으로 진화했다.(...)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愚衆)이 된다. 책과 멀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습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독서는 민주사회를 억견(臆見)과 독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대립쌍은 ‘시민 vs 우중’ 혹은 ‘좋은 시민 vs 나쁜 시민’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쾌락주의적 독서’에서 민주주의와 시민교육을 위한 ‘계몽(주의)적 독서’로 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의 질문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거 같습니다. <공부>와 <일기7>에서 읽을 수 있는 작가의 두 가지 집필계획은 두 가지입니다(저로선 가장 관심을 갖는 대목입니다). 

 

(1)선정해놓고 못 다 쓴(혹은 날려먹은) 30여 가지 주제로 <공부>를 한권 더 쓰기(하지만 그는 “공부는 저의 평생 친구입니다. 이 말은 무지가 평생 저를 따라다닐 것이란 뜻입니다”라고 적었다. 그는 <공부>의 길로 가는가, 다시 <일기>의 길로 가는가, 혹은 둘 다인가? 그는 또 "한 주제로 묶는 게 성실로 여겨졌다“라고 적었다. 가령 그가 “의식적으로 포기했던” 문학작품 읽기는 다시 시작되는가?) (2)2002년 대선 이후의 한국 ‘풍속’을 관찰한 소설(가제는 <서울 금병매>로 돼 있다. 그에게 2002년과 곧 있을 2007년의 대선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공부>의 마지막 마무리 또한 우연찮게도 2007년의 ‘아마겟돈’에 관한 것이다).

 

이른바 독서/공부론과 인문서평의 자리에 오게 되면 작가의 경쟁상대는 달라집니다(흔히 리뷰어로 통칭되지만, 여기엔 ‘서평가-서평자-서평꾼’의 급이 있다). 장정일과 유사한 포지션을 점유하는 이는 도서/출판평론가 ‘표정훈 & 이권우’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공부>(2005)의 강유원입니다(둘은 62년생 동갑내기이다). 요컨대, ‘장정일 & 강유원’. 작가도 읽어보았을 텐데, 먼저 포문을 연 건 강유원입니다. 그는 96년에 나온 <장정일의 독서일기2>에 대한 독후감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그의 비판은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작가에 대한 사전이해가 거의 백지상태라는 걸 보여준다).  

 

“두 번째 독서일기를 읽고 난 후 계속해서 독서일기를 사는 것은 책을 모으는 취미는 만족시켜 줄지언정 더 이상의 지식은 줄 수 없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 독서일기를 읽었을 때나 두 번째 독서일기를 읽은 지금이나 놀라운 것은 장정일이 참으로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하루 종일 책만 읽어도 먹고살기에 별로 어려운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장정일의 독서는 아주 폭넓은 듯하지만 사실은 별로 그렇진 않다. 자신이 소설가이므로 당연히 소설을 가장 많이 읽는다. 가끔 인문사회과학이 끼어 있다. 어쩌면 인문사회과학서적은 ‘젊은 시절’에 많이 읽었을 테니까 이제는 별로 안 읽는지도 모르겠다.(...) 장정일은 많은 분량의 책을 읽지만 그것이 지식으로 축적되는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서 구슬은 많지만 그것을 꿰어서 이론적 줄거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듯하다.(...) 또한 인문사회과학 서적에 대해서는 단순한 내용 요약만을 하고 있는 것도 그가 책읽기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장정일은 객관적인 데이터에 상당히 무관심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책>)

 

물론 우리는 <공부>와 <일기7>의 장정일이 더 이상 강유원이 비판하고 있는 장정일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그 변화의 분기점은 <삼국지>인가, 혹은 2002년 대선인가?)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넘어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 하지만 그 공부 때문에 부당하게 폄하되는 것은 없는 걸까요?

 

 

“내 무지의 근거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다는 결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한때 내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시인은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없는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저 시가 좋아서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 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의 열정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우표 수집가나 난을 치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존경할 수 없다.(<공부>, 머리말) 

그럼으로써 장정일은 지식인으로서 거듭나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리하여 그의 공부론과 지식인론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토론을 시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겨우...

07. 10. 06.

P.S. 곁가지 멘트들이 빠져서 토론문이 다소 싱겁게 읽힐 수는 있겠다. 작가에 따르면 시는 더 이상 쓸 수가 없고(그가 어느 책에선가도 적어놓은 것이지만, 그가 보기에 모든 시인에게 첫시집이 곧 '유고시집'이다. 이후엔 그보다 더 뛰어난 시집을 낼 수 없기 때문에. 고로, 두번째 시집을 내면서부터 시인은 '현역'이 아닌 '명예시인'이 된다. 전세계의 12마리쯤인가 있다는 시마(詩魔)가 빠져나간), 생계 때문에 쓰기 시작한 소설은 그나마 괜찮을 걸 쓰게 될 때쯤 문학판이 파장 분위기가 돼 버렸다. 그가 가장 욕심을 부리는 건 '정식'으로 데뷔한 부문이기도 한 희곡쪽(언젠가는 걸작을 써주길 기대한다).

나는 장정일의 이 세 가지 자기상이 모두 의미가 있고 우리문학에 기여한 바가 있으며 따라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나도 우표 수집가를 존경하지는 않지만 시인은 존경한다. 명함에 '시인'이라고 새겨서 다니는 시인들 말고 진짜 시인들). 포럼이 끝나고 잠시 나눈 사담에서 작가는 러시아 작가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희곡들에 대해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경우 러시아에서는 연극으로도 공연된다고 알려주자 놀라워하기도 했다(이 작품은 곧 새 번역본이 출간된다). 그가 한번쯤 러시아에서 불가코프의 작품들이 어떻게 무대화되는지 볼 수 있기를 기원하지만(사실은 나도 못본 거 아닌가!) 여행을 싫어한다고 하니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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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정일판 우익청년 탄생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05 00:30 
    문학 신간을 자주 검색해보지 않아서 미처 모르고 있었는데, 작가 장정일의 신간이 출간됐다. <구월의 이틀>(랜덤하우스, 2009). 제목만 봐서는 9월에 나왔어야 하는 책. 여하튼 오랜만이어서(10년만이란다!) 반갑다.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먼저 스크랍해놓는다.      연합뉴스(09. 11. 04) 10년 만에 새 소설 낸 장정일  '내게 거짓말을 해봐', '아담이 눈뜰 때'
 
 
변호사A 2007-10-07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차에,
아주.. 아주.. 아주 잘 읽었습니다 ^_^

로쟈 2007-10-0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참에 몇 권 읽어보시길...

2007-10-07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7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7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07 22:56   좋아요 0 | URL
같은 '애독자'네요.^^
 

아침신문에서 읽은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의 특집대담인데 김기봉, 박찬승 두 역사학 교수가 민족주의를 화두로 하여 나눈 것이다. 요 며칠 남북 정상회담이 국가적 이슈였는데, 남북 통일의 과제도 '민족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지역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인지 고민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경향신문(07. 10. 05) "脫민족 공화주의로 새로운 정체성 정립을”

민족주의는 20세기를 통틀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한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우파 쪽에서도 ‘민족주의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현실에서 민족주의는 여전히 막강하다. 외국인 거주자 100만명 시대에, 왜 우리는 아직도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것일까. 학계 쪽 얘기를 들어봤다. 탈민족주의 사관을 펴온 김기봉 경기대 교수(서양사)와 항일독립운동 및 정치사상을 전공한 박찬승 한양대 교수(한국사)가 27일 오후 경향신문사에서 대담을 가졌다. 이들은 “민족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공동체적 정체성이 필요하다”면서 ‘공화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김기봉 교수(왼쪽)과 박찬승 교수는 단일민족은 허구이며, 이제 민족의 틀을 넘어 다민족·다문화 사회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두 교수가 지난달 27일 대담을 갖고 경향신문사 별관 1층 경향갤러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재찬기자

박찬승 교수=지난 8월말로 한국 거주 외국인 인구가 100만명을 넘었습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도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 땅의 다양한 인종들 간의 이해와 관용, 우호 증진에 장애가 될 수 있다”며 한국사회의 다인종적 성격을 인정하고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김기봉 교수=유엔 권고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현실은 다민족이었는데, 말로는 단일민족을 주장해온 거죠. 족보들에 따르면 많은 성씨의 시조가 중국에서 왔지만 우리는 모두 단군 할아버지 자손이라고 가르칩니다. 공적 역사와 사적 역사가 불일치하는 모순이죠. 이는 민족이라는 ‘매트릭스’가 작동해왔기 때문입니다.

박찬승=학습의 효과이기도 합니다. 올해 발간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보면 “우리 민족은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단일민족 국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학생으로서 하등의 의심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죠. 역사책 가운데 단일민족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손진태 선생이 1948년에 쓴 ‘국사대요’입니다. 하지만 혈통은 씨족을 넘어가면 확인이 안됩니다. 고대의 부여, 삼한, 여진, 예맥 등 다양한 종족들이 모여 현재 민족을 형성했기 때문에 단일 민족이라는 표현은 사실로도 맞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제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다민족국가가 되는 상황이어서 교과서 표현은 시급히 시정해야 합니다.



김기봉=우리는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걸까요, 한국인으로 되어지는 걸까요. 민족 개념 속에는 문화적, 선천적, 객관적인 종족이라는 뜻의 에스노스(ethnos)와 정치적 의미공동체라는 뜻의 네이션(nation) 두 가지가 있어요. 특히 네이션은 근대의 산물입니다. 민족에서 민족주의가 나온 게 아니라, 민족주의가 발명한 게 민족입니다. 그 공식을 한국사회에 적용하면 단일민족이란 건 말이 안되죠.



박찬승=한국에도 민족과 비슷한 개념은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아족류(我族類)’인데요. 왜족류나 여진족류와 구분할 때 썼는데, 에스노스 개념에 가깝습니다. 갑오개혁 이후엔 ‘2000만동포’ ‘조선동포’ 등에서 ‘동포’가 등장합니다. 이후 일제강점하에서 국권을 지켜야 한다는 민족주의의 필요성이 제기됐죠. 여기서 그 주체로 민족이 등장했지요.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민족 내적인 통합이 필요했고 여기서 신분의식의 청산이 필요했어요. 서양 근대적 의미의 네이션이 등장한 거죠.

김기봉=민족에서 ‘족’은 족류에서 왔을 것이고, ‘민’은 평등에서 왔을 겁니다. 전통의 근대적 변형이 이뤄진 것 같은데, 그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게 아니라 일제시대를 통해 강박적으로 이뤄졌고, 또 한편으로 좌절됐습니다. 우리는 민족이라 하면 저항적으로 투쟁해야 된다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연결하는데, 이게 민족 개념이 굴절된 계기입니다. 이제 와서 자신감을 좀 갖게 되니까 그 불일치가 부각되는 거죠.

박찬승=한국 민족주의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식민지배에 저항해 국권을 지키고,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동원될 필요가 있었죠.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는 나름대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너무 강했기 때문에 남녀평등이나 소수자의 문제는 억압됐습니다.

김기봉=세계화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열린민족주의로 가야 한다고 하는데, 그 과정으로서 탈민족주의적인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반민족주의와는 다릅니다. 봉건적 신분질서의 위계적인 인간관계를 깨고 주권이 민에게 있다는 의식을 확립한 해방적 측면은 민족주의의 빛나는 기능입니다. 하지만 그게 악마적 속성을 갖게 된 것은 정치적 민족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기독교가 더 이상 제시하지 못하자 민족이 그것을 대신했죠. ‘나는 유한하지만 민족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민족 아닌 다른 민족은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종주의와 만나 나치즘이 되고 제국주의, 1·2차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서구사 경험에서 한국사는 면제될 수 있다고 봐왔는데, 지금 와서 보니 한국 민족주의도 그에 못지 않다는 얘기죠.



박찬승=1931년 만보산 사건 당시의 중국인 학살은 이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당시 조선의 중국인들 중 100여명의 중국인이 조선인에게 피살됐습니다. 총독부의 농간이 작용하긴 했지만 조선인들의 배타성이 잘 드러났습니다. 해방 후에도 정부 정책은 화교에 무척 배타적이었습니다.

김기봉=인종주의는 구별이 차별로 될 때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의식에 골상학, 비교해부학, 생물학 등 과학이 동원됐습니다. 우리는 과학까지 동원한 경험은 없었지만 인종주의가 분명 존재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처음 심어놓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박찬승=그 전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요.



김기봉=무리짓기의 원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니라 ‘한패가 되고 나서 비슷하다는 의식이 생긴다’는 겁니다. 정치·경제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같은 우리’라는 의식이 만들어지는 거죠.

박찬승=학계에서는 신라 통일 이후 한국의 원형민족이 형성됐다고 봅니다. ‘우리는 신라인’이라는 동질성 개념은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졌고, 아족류라는 개념이 조선초에 나오게 됩니다. 이 역시 하나의 무리가 되고 나서 ‘우리’라는 의식이 만들어진 셈이지요.

김기봉=해방 후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에 우리 민족 운명이 결정된다는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이 과제였습니다. 식민주의 사학과 비슷한 게 지금의 샌드위치 국가론입니다. 세계화 상황 속에서 식민주의가 변형된 거죠. 하지만 이제는 민족이라는 프레임으로 우리 현실을 사유할 수 없습니다. 탈민족적 관점에서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범주를 다시 고찰해야 합니다. 민족국가는 큰 문제 다루기에는 너무 작고, 작은 문제 다루기에는 너무나 큽니다. 환경 문제는 초국가적이지만 자꾸 민족국가 틀 안에 갇히고, 지방분권은 중앙집권적 민족국가 때문에 방해 받습니다. 우리 안의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들을 포용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 역시 조승희 같은 사람을 만들어낼 겁니다. 우리는 안으로도, 밖으로도 탈민족해야 할 상황입니다. 새로운 공동체적 정체성을 만들어야 합니다.



박찬승=유럽이나 미주를 여행할 때 그쪽 사람들은 우리를 중국인, 일본인과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 나의 정체성 중 하나가 ‘아, 아시아인이구나’ 깨닫습니다. 동아시아 교역량도 엄청나서 경제공동체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고 이미 문화적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그런 사회는 올 것이라면 교육 안에서도 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식인들 사이에는 통일될 때까지는 민족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고, 일반인들 사이엔 중국과 일본 틈에서 한국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족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은 듯합니다.



김기봉=독일은 1964년에 외국인 100만명을 맞았습니다. 100만번째 노동자가 포르투갈인이었는데, 당시 독일 고용주 협회장이 그 노동자에게 꽃다발을 주며 “진심으로 축하한다. 당신들 덕분에 우리 경제 성장이 가능했다”고 말하는 이벤트를 마련했습니다. ‘라인강의 기적’ 뒤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며 이게 부담이 됐습니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민족 정체성이 훼손됐다는 정서가 등장하며 네오나치가 기승을 부립니다. 우리도 틀림없이 이런 현상이 생길 겁니다. 고령화 속도가 빠르고, 출산율이 최저인 상황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결국 우리 연금을 부담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이럴 때 민족주의는 틀림없이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인스 워드가 왔을 때, ‘대한민국을 품고 세계로 나아간다’는 광고가 만들어졌죠. 하인스 워드를 언제 한국인으로 생각했습니까. 그의 정체성은 미국인입니다. 우리가 필요하면 환영하고, 필요없으면 내쫓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박찬승=왜 한국사회에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가 오게 됐을까요. 90년대 이후 소득 수준이 향상되고 학력이 인플레돼 대학 진학생이 80% 이상이 됐습니다. 자연스럽게 3D 업종 중심으로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졌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초청했습니다. 처음엔 산업연수생으로, 이제는 고용허가제로. 앞으로 3D 업종뿐 아니라 고급인력 시장에서도 부족 현상이 올 겁니다. 결혼이민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0~30년 전부터 태아감별이 시작됐고, 남아선호 사상과 결합되면서 남녀 출산 성비가 엄청나게 벌어졌습니다. 신부를 수입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우스개로 말했는데 그게 현실화됐습니다. 혈통을 잇는다고 남아를 선호한 탓에 결국 외국인 며느리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결국 한국사회의 책임입니다. 법무부에서는 향후 매년 10%씩 외국인 거주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 대책이 필요합니다.

김기봉=미국 모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민으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다문화의 전형입니다. 유럽은 우리와 다른 게 유럽인들끼리 공동체를 만들어가며 해소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여력이 없는 데다, 분단돼 있습니다. 미국은 토머스 제퍼슨이 헌법에 쓴 생명, 자유, 행복 추구 등의 원칙을 가지고 세운 공동체입니다. 헌법을 통해 미국이라는 민족을 만든 거죠. ‘용광로(melting pot)’로 미국 국민 만들기를 한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시민적 내셔널리즘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조승희는 용서를 받았지만 9·11 테러범들은 못받았어요. 그들은 시민이라는 카테고리로 우리와 타자를 나누는 겁니다. 그래서 용광로가 아니라 다른 문화를 그대로 존중해주는 ‘샐러드 접시(salad bowl)’ 얘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는 이 모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봅니다. 우리 모델은 바로 ‘비빔밥’이지 않을까요. 우리 전통은 유교 불교 기독교 모두 밖에서 온 걸 하나로 만들었죠. 서로 다른 문화도 비빔밥처럼 버무릴 수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 신라의 불상이든 뭐든, 우리가 나름대로 소화한 외국 문화를 찾아내는 식으로 민족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찬승=한국정부는 결혼이민자에게는 포섭과 동화정책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결혼이민 지원센터도 만들었죠. 결혼이민여성만 15만명 이상인 상황에서 이런 프로그램은 아직 부족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가져온 문화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도 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베트남 문화를 버리라고 할 것인가요. 베트남 출신 여성들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그걸 살려갈 수 있도록 돕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아시아인의 동등한 자격으로 당신들은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도 당신들 것을 이해하겠다는 자세를 가질 때 그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 교육, 방송 등이 많이 필요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상황이 더 안좋습니다. 고용허가제 하에서 이들은 3년이 지나 자진출국하지 않으면 불법체류자가 됩니다. 우리도 60~70년대 독일에 간호사나 광부로 가면 대부분 잔류했습니다. 아무리 제한조치를 만들어도 삶의 터전을 마련한 이상 다시 돌아가기는 힘듭니다. 그걸 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들을 불법체류자로 단속하며 코너로 몰면 집단거류지를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중소기업들은 숙련 노동자도 많이 필요한 상황인데, 이들이 일할 만하면 내보내야 하는 정책은 문제입니다.



김기봉=지난 여름 베트남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문화 역량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이 한국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땅은 한반도보다 넓고 인구 8800만의 사람들은 굉장히 젊고 우수합니다. 민족해방전쟁에도 승리해봤고, 손재주도 좋습니다. 그간 우리는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만 사고하느라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과 연대·소통 노력을 소홀히 했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이들과의 공존이 우선입니다. 출산 후 찬물에 샤워하고 싶은 베트남 산모가 한국인 시어머니와 갈등을 빚는다고 합니다.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교육하면 뭔가 새로운 가능성이 생길 것입니다.

박찬승=이주자들이 한국에서 문화제 같은 것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참여하는지 궁금해요. 우리도 적극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습니다. 신라 통일 이후 외국인들이 이와 같이 파도처럼 몰려온 적은 없었습니다. 최근 여론조사는 한국인들이 다인종사회의 불가피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필요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게 됐다는 시각은 아직 적습니다. 골치아픈 존재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들이 왜 와 있는지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김기봉=최근 혈통 민족주의에서 국가 민족주의로 코드 전환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단일민족주의에서 대한민국 국가주의로 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올해 말 대선에서 누가 되느냐에 따라 북한 문제에서부터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통일과 외국인 문제는 민족이라는 틀로 껴안을 수 없습니다. 건국 60년이 되는 내년 역사학대회의 주제를 ‘역사상의 공화정과 국가 만들기’로 정했습니다. 이 시점에 우리는 민족 정체성이 아니라 공화국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 후 남과 북에 두 개의 공화국이 존재해 왔지만 정작 공화주의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공화주의는 사적 소유가 아니라 공동체적 덕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공화주의는 남한사회 내 외국인 노동자를 포섭하면서 북한 주민도 담을 수 있습니다.

박찬승=한국사회는 전세계의 600만 해외 동포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잘 적응해주길 바라는 한편, 한국문화를 잊지 말기를 기대합니다. 역지사지로 한국 사회에 와 있는 외국인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도 한국사회를 함께 구성하는 공동체의 성원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또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문화는 우리 문화를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정리|손제민기자)

07. 10.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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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뜸하던 러시아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최근 러시아발 기사에는 푸틴이 내년 총선 이후 집권당의 총리로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포함돼 있다. 내년 대선과 총선의 향방은 아직 불확실하지만 점차 분명해지는 것은 그가 쉽게 권좌에서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해서 문제는 이 '불곰 파워' 러시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우리의 '푸틴 대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러시아가 구 소련시절만큼의 초강국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미국과 유럽으로서는 러시아의 이러한 팽창이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독재'와 '반민주'는 그것을 견제하는 '유일한' 명분이자 수단으로 보인다). 우리도 그러한가?..

한국일보(07. 10. 05) '불곰 파워' 유럽 흔든다

발트해에서 발칸까지’ 러시아의 부활로 국제질서가 요동치는 곳이다. 동유럽으로 경계를 확장하려는 서유럽은 구소련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러시아의 야심에 막혀 진땀을 흘리고 있다. ‘러시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유럽연합(EU)에서는 신구 회원국 간, 진보_보수 세력 간 논쟁을 넘어 분열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발칸의 코소보를 세르비아에서 분리, 독립하는 것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7년여에 걸쳐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돈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던 유엔과 EU 덕분에 세르비아 정부도 ‘독립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백기투항 직전까지 몰렸다. 중재를 맡은 마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총리는 노벨평화상 유력후보로 거론됐다. 그러나 러시아가 예상외로 강력히 반대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

러시아는 미국과 유럽이 유엔 바깥에서 코소보의 독립을 승인하는 실력 행사를 강행한다면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그루지야, 몰도바, 우크라이나 등 구소련권 국가 내 친러시아 세력을 독립시킨다는 강력한 대응책을 천명했다(*친러시아 성향의 동부 우크라이나를 말하겠다). 코소보 독립의 대가로 동유럽이 친서방_친러시아로 찢어지는 것은 서방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코소보 독립문제는 러시아가 일으키고 있는 파장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거침없이 진행되던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은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코카서스에서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2005년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EU의 동진과 나토의 동진을 명확히 구분했다. 나토는 군사적 위협이 될 수 있지만, 유럽의 확장은 러시아의 경제적 이익과 통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동진도 이제 러시아에는 매력적인 사과가 아니다.

유럽의 경제에 기대기보다는 러시아의 경제력을 주변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국익에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매장량이 각각 세계 1, 2위인 천연가스와 원유는 러시아 경제의 파워하우스이다. 미국이 폴란드와 체코에 설치하려는 미사일방어(MB) 기지 설치를 러시아가 완강히 반대하는 것도 유럽은 이해할 수 없다. 안보 위협을 내세우고 있지만 러시아 스스로 이는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란 것이 유럽의 생각이다.

프랑스의 싱크탱크인 국제관계연구소(IFRI)의 토머스 고마트는 “다음 10년간 러시아가 유럽의 최대 현안이 될 것이 분명하다”며 “러시아를 파트너로 볼 것인지, 위협으로 볼 것인지 대답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에스토니아에 대한 사이버 테러, 세계 최대 천연가스 회사인 가즈프럼의 유럽 가스시장 통제 야욕, 영국과의 스파이 논란, 러시아 폭격기의 노르웨이 영공 침범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최근의 유럽과의 갈등은 동유럽을 무대로 벌어질 러시아와 유럽의 다음 전쟁의 예고편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3일 “공식적으로 미국과 입장을 같이 하지만, 내부적으로 내 동료의 절반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지하다”고 말했다. 유럽의 분열을 상징하는 독일의 고민이다.(황유석기자)

뉴시스(07. 10. 05) "푸틴, 스탈린 능가하는 독재자 될 것"…前측근 푸틴 '맹비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전 러시아 고관이 "푸틴 대통령이 소비에트 시대가 무색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움켜쥐려 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푸틴 대통령의 경제 고문으로 활동하다 지난 2005년 가을 해고된 안드레이 일라리오노프는 4일 기자회견을 통해 최근 집권 통합러시아당의 후보로 총선에 출마, 총리로 집권할 의지를 시사한 푸틴 대통령이 막강한 국민 지지도를 이용해 총선을 국민투표로 전환시키는 '기현상'을 야기시킬 것이라며 이같이 경고했다.

일라리오노프는 "이는 결국 한 사람의 손에 절대 권력을 몰아넣는 새로운 정치체제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라리오노프는 이어 푸틴 대통령이 총선 출마 의지를 밝힌 지난 1일의 통합러시아당 당대회가 지난 1934년 공산당의 집회를 연상시킨다며 "당시 스탈린을 추대한 공산당의 당원들은 후에 하나 둘씩 독재자가 된 그의 숙청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헌법은 현재 대통령의 삼선 연임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에 푸틴 대통령은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연임을 추진할 생각이 없음을 거듭 밝혔었다. 푸틴 대통령은 그러나 올해 말 총선 출마와 함께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뜻을 표명함으로써 '허수아비 대통령'을 내세운 뒤 총리로 활동하며 실질적 통치를 계속한다는 야심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일라리오노프는 현재의 형태로 총선이 진행될 경우 "푸틴은 소비에트 사상 어떤 공산 지도자보다도 더 많은 권력을 쥐게 될 것"이라며 이는 소비에트 붕괴 이후의 지난 16년뿐 아니라 독재가 최고조에 올랐던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마지막 수십년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권력 집중은 결국 푸틴 대통령의 폭정으로 이어져 남아 있는 정치경제적 자유마저도 짓밟고 국가의 핵심 경제 자산을 독점하게 된 국영기업들은 부정부패로 나라의 경제를 병들게 할 것이라고 일라리오노프는 경고했다(*푸틴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

그는 또 크렘린 당파 간 내분으로 '궁정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을 제기하며 "외교적으로는 러시아 인권 문제에 대한 서방 세계의 개입에 대한 푸틴의 반발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크렘린궁은 이같은 전직 대통령 측근의 비판해 즉각적 논평을 내 놓지 않았다.(정진하기자)

서울경제신문(07. 10. 05) 푸틴 대제(월스트리트 저널 10월4일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 이후에 총리로서 러시아 정계에서 의욕적으로 활동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감스러운 것은 아무도 이 소식에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에 이어 권좌에 오른 지 8년째인 푸틴은 러시아에서 발생한 일련의 테러 폭발 사고를 구실로 체첸을 상대해 2번 전쟁을 일으키며 정치적 입지를 다져왔다. 하지만 한때 푸틴 정권의 스파이로 활동한 적이 있는 알렉산더 리트비넨코는 러시아에서 폭발 사고는 러시아의 비밀부대에 의해 기획된 것이라고 폭로했다.

하지만 서방 지도자들은 푸틴을 도리어 ‘결점 없는 민주주의자’ 혹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인물’로 칭송했다. 푸틴은 석유 가격 상승과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의 정책에 도움을 받아왔다. 석유로 벌어들인 돈은 러시아의 대외부채를 상환하고 보유 외환을 늘리는 데 원천이 됐다.

푸틴의 지지도가 70%에 이르는 것도 이 덕분이다. 특히 석유 수입은 코카서스 지역에서의 탄압, 독립적인 미디어ㆍ인권단체에 대한 공격 등과 같은 행위를 희석시키고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오랜 벗들을 권력 요직에 앉히는 데도 기여했다. 서방세계로서는 푸틴이 석유와 가스 등 자원의 공급을 조절하며 우크라이나 선거에 개입하는 것을 감시하기도 어렵다.

이런 러시아의 공격적인 외교정책 기조는 종종 미국의 이익을 침해할 수도 있다. 일례로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며 이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유엔 제재를 무력화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국제 사회에서 러시아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푸틴 비판에 미온적이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은 실정이다.

푸틴은 커리어에 흠집이 생길 것을 알면서도 헌법의 3연임 금지조항을 피해 계속 권좌에 머물기 위해 애쓰고 있다. 총리에 측근인 빅토르 주브코프를 임명한 것은 푸틴이 의회를 통해 권력을 휘두르거나 헌법의 빈틈을 이용해 다음 번에 대통령직에 도전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서방세계는 ‘체스왕’ 카스파로프 등이 출마할 것으로 보이는 러시아의 내년 대통령 선거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푸틴의 장기집권을 위한 조치들은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깨져버렸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푸틴은 러시아의 권위주의를 회복시켰지만 전세계는 그 결과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

07. 10. 05.

P.S. 가장 최근에 나온 러시아관련서는 연합신문의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매일경제 김병호 기자의 <푸틴을 위한 변명>(매일경제신문사, 2007)이다. 러시아 내부에서 들여다본 '푸틴시대'라 할 만하다. 러시아 정국 및 '푸틴 vs 카스파로프'와 관련된 페이퍼로는 '러시아 중산층의 정치 무관심'(http://blog.aladin.co.kr/mramor/1029678),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필요한가'(http://blog.aladin.co.kr/mramor/814509) 등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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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 푸틴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7-31 18:10 
       '러시아를 어떻게 할 것인가' 2007-10-05 09:01 로쟈님의 페이퍼 에 달린 로쟈님의  2007-10-05 09:57 댓글    그건 50% 이상의 지지를 얻고 있는 이명박의 경우도 마찬가지요. 경제적 토대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허상 아닐까요?..
 
 
자꾸때리다 2007-10-05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내 푸틴의 지지도가 높은 건 결국 경제 성장 때문인가요? 전두환 지지자 논리하고 비슷하네요.

로쟈 2007-10-05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50% 이상의 지지를 얻고 있는 이명박의 경우도 마찬가지요. 경제적 토대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허상 아닐까요?..

eEe 2007-10-05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우스울 정도의 양극화, 빈곤화가 러시아에서 심화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러시아 소외계층의 불만이 푸틴에 대한 막연한 기대-후분배 효과?-로 전도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이러한 굴곡이 언제까지 지속되리라고는 생각은 안듭니다. 러시아 민중의 사회주의적(?) 정치적 자산이 대안세력과 결합되어 급진적 정치가 재출현하리라는 믿음이 별 근거 없이 불어나네요.
희망과 예측의 뒤범벅이라는 오명은 피할 수 없겠지만...

로쟈 2007-10-05 22:44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믿음은 별 근거가 없는 듯합니다. 실상 소련 시절에도 지배계급(특권계급)은 있었고, 그건 제정 러시아때와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러시아에서 별로 대두되지 않는 건 역사상 한번도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qualia 2007-10-0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국민들이 경제, 경제 하는데요, 객관적으로 보자면 노무현 정권에 들어서 한국 경제의 나쁜 점들이 조금씩 개선된 것이 아닐까요? 최근 노무현 정권 끝에 들어서는 그러한 점진적 개선 효과가 경기 회복으로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지난 추석 대목 때 재래 시장에 가보았는데요, 노무현 정권 들어서고 나서 맨날 죽는 소리하던 재래 시장이 이번엔 완연하게 살아나 엄청난 활기를 띠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재래 시장이 손님들로 터져나 발 디딜 틈도 없더군요. 상인들은 싱글벙글하고요. 걸핏하면 조중동이 경제 위기니 파탄이니 나라가 거덜났느니 하면서 부화뇌동하는 대중을 들쑤셔대고, 한나라당은 그동안 나라가 금방이라도 거꾸러질 것처럼 얼마나 난리법석을 쳐댔습니까? 그렇게 현실 왜곡을 하고 대중을 오도하던 조중동은 실상은 노무현 정권 들어서 얼마나 세를 확장하고 호황을 구가했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경제나 정치적 실태, 한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역학 구도 실태는 그 실상이 가려진 채,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이 원하는 왜곡된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러한 잘못된 정보와 왜곡된 이미지들이 지금의 남한 땅에 일종의 시대적 분위기처럼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명박 씨는 제가 생각하기에, 완주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기엔 너무나 많은 결격 사항이 있고, 그 결격 사항들이 자잘한 것들이 아니라 너무나 치명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씨가 당원 투표에서 실질적으로 이겨 놓고, (현실 판단에 얼마쯤은 몽매할 수밖에 없는 대중들의 의사가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에서 간발의 차이로 밀려 대선 후보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한나라당 세력이 (일종의) 이명박 씨의 중도 낙마에 대한 공포를 얼마나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느냐 하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박근혜 씨는 사실상 합류를 거부한 채 의미심장하게 뭔가를 기다리고 있고, 한나라당 세력은 지금 속으로 엄청 떨고 있는 것이죠.

아무튼 이명박 씨의 50% 이상 지지는 허상에 가까운 것이라 봅니다. 그 허상조차 부풀려지고 왜곡된 노무현 정권의 경제 실정(이는 거의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데요) 이미지에 대한 반대급부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죠. 집요하디 집요한 조중동과 수구세력들의 난리법석이 그런 허상을 키운 측면이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2007-10-05 13:25)

로쟈 2007-10-05 22:42   좋아요 0 | URL
두 달쯤 뒤면 다 알게 되겠지요.^^

eEe 2007-10-06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련은 정말 미지의 시간-공간이네요.

똑같이 소련에 체제하다 왔어도 어떤 사람은 러시아인에게서 성숙한 문화적 역량을 느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환멸을 보고...
똑같이 소련을 연구하더라도 어떤 이는 위대했지만 빛바랜 초유의 실험을 보고, 어떤 이는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보고...
누구는 인류 역사 정점의 소비에트 직접 민주주의를 발굴하고, 누구는 최악의 전체주의를 폭로하고...

무엇에 의지해서 판단해야 될지 갈수록 혼란스러워 집니다.

로쟈 2007-10-07 00:12   좋아요 0 | URL
그 정도의 혼란이나 시차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현재의 남한 현실에 대한 평가를 질문하더라도 계층이나 세대별로 상당히 상이한 답변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게다가 러시아는 워낙에 덩치가 큰 나라에다가 내내 격변기였던지라...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비싼 공연'의 사회학을 다룬 경향신문의 '경향2' 커버스토리이다. '이 정도 공연은 봐줘야 수준이 맞다'라는 '문화귀족'들의 허위의식이 최근에 '비싼 공연'을 부추기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상징적 폭력(=구별짓기)의 수단으로서 예술감상과 향유가 남용되는 것은 유구한 일이긴 하나 꼴사나온 일이기도 하다. 꼴사나운 만큼 달라지면 좋겠지만 유구한 만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예술/공연 대신에 다른 것이 그 일을 대신할 테니까). 다만 나는 TV를 통해서 가급적 많은 공연들을 보여주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경향신문(07. 10. 04) '문화귀족'이십니까?

‘그 공연 보셨어요.’뉘집 개 이름도 아닌 ‘60만원짜리, 45만원짜리, 20만원짜리’의 고가(高價) 공연들이 불과 몇년 사이에 장삼이사의 밥상머리 화제가 됐다. 11월에 예정된 것만 봐도 귀빈석 기준 ‘크리스티안 틸레만&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초청공연’(24만원),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31만원), ‘로마극장 초청 오페라 아이다’(32만원) 등 고가 공연들이 즐비하다.

해외 유명 공연의 수입 붐과 뮤지컬의 급부상, 기업의 문화마케팅 등이 얽혀 빚어낸 ‘고가 공연’의 사회적 프리미엄은 갈수록 오를 기세다. 문제는 고가 공연을 둘러싼 사회의 분위기다. ‘어느 동네 사느냐’가 계층을 구별하는, 부정할 수 없는 기준이 됐듯 값비싼 공연의 관람여부가 신분이나 계층을 가늠하는 또 하나의 잣대가 돼가고 있다.

‘이 정도 공연은 봐줘야 수준이 맞다’는 인식이 넘쳐난다. 이벤트사를 운영하는 여성 사업가 손씨(36)는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 대화에서 기죽지 않으려고 LG아트센터나 예술의전당의 값비싼 공연을 찾아다닌다”면서 “‘넌 안봤냐’고 물으며 과시하는 그들도 공연 자체에 별 관심 없기는 매한가지”라고 고백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맞벌이 주부 김씨(40)는 몇달 전 초등학교 3학년 딸의 성화에 시달려야 했다. 해외팀이 공연한 ‘태양의 서커스 퀴담’을 보여달라는 재촉 때문이었다. 아이는 공연을 본 친구가 “잘난 척 한다”면서 “나도 보여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공연 티켓가격은 VIP패키지석 20만원, 등급이 가장 낮은 A석도 5만5000원에 이르렀다. 3인 가족 관람료를 계산하다 빤한 살림에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했다.

최근 이런 분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지난달 난생 처음 대형뮤지컬을 보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을 찾은 최씨(25). 그는 “공연만을 감상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불편했다”며 “객석에 들어선 순간 상류층의 냄새가 나는 듯해 위화감마저 느꼈다”고 털어놨다. ‘고가 공연족’들은 일명 ‘체육관 공연장’처럼 저가 좌석이 많은 공연은 ‘어중이떠중이가 많이 온다’며 관람을 꺼리기도 한다.

기업의 문화마케팅도 일조하고 있다. 국립극장 2층 귀빈용 로비에선 ‘그들만의 공연’을 즐기기 위한 풍경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금융사나 유명백화점이 초대한 고객들이 공연시작 전 다과를 즐기며 ‘럭셔리한’ 분위기를 맛본다. 한 기업의 문화마케팅 관계자는 “이 부류에 끼기 위해 수천만원이나 되는 구매 상한액을 일부러 채우는 고객도 있다”고 귀띔했다.



문화비평가들은 “고가 공연을 둘러싼 사회적 욕망에는 왜곡된 ‘허위의식’이 깔려있다”면서 “마치 명품을 사듯 공연을 소비하는 사람들, 또 이런 와중에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간의 갈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일찌감치 묘파했던 ‘(문화로) 구별짓기’가 공연장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김희연기자)

경향신문(07. 10. 04) ‘비싼 공연’ 소비하는 ‘껍데기 문화’

최근 무대공연을 둘러싸고 ‘티켓 가격’이 곧 ‘작품의 질’이고 ‘나의 문화수준’이란 기형적 공식이 생겨났다. 문화비평가 정윤수씨는 ‘고가 공연’을 부추기는 배경으로 문화적 허위의식을 꼽았다. “대형 공연장에서 화려한 공연을 ‘소비’하는 순간 자신이 마치 일류 문화 트렌트에 합류한 것으로 착각하는 허위의식이 팽배하고 있다”는 것. 그는 “공연작품에 대한 감동이나 이해와는 점점 멀어지고 소비만 하게 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비싼 공연’이 문화적 스타일의 완성?

문화 ‘향유’가 아닌 ‘소비’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올초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의 VIP석 가격은 25만원으로 뮤지컬 공연 중에서도 고가였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괜찮다” “기대에 못미친다” 등으로 엇갈렸지만 공연마다 기립박수가 터져나왔고 성황을 이뤘다. 공연 관계자들조차 “환호성 치는 관객들이 작품을 제대로 봤는지 모르겠다”며 “‘프랑스 뮤지컬’이란 간판에 뒤로 넘어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한달 공연 관람비로 150만~200만원을 쓰는 싱글족 이씨(37)는 VIP석이나 적어도 로열석을 고집한다. 그는 “공연보기는 사치스러운 취미생활”이라며 “비용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만큼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 자신은 “공연을 즐기는 축에라도 끼지만 명품을 휘감고 VIP석에 앉은 사람들 중에 제대로 공연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드물다”고 귀띔했다.



예술의전당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수십만원짜리 VIP석이 비어 있거나 그 날의 연주 수준과는 무관하게 유명세만으로 낯뜨거운 기립박수가 코미디처럼 벌어진다. 클래식 칼럼니스트 정준호씨는 “고가의 티켓가격이 터무니 없이 책정되는 것만은 아니다”라며 “생활수준도 높아졌고 해외 유명 단체의 공연이 늘어나면서 고가공연이 생겨난 일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고가 공연이 늘어난 만큼 과거에 비해 무대 위 연주자들과 공연을 완성하는 관객의 수준이 따라 오르지 않은 게 문제”라고 평했다.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연주회, 대형 뮤지컬 등의 ‘고가 공연’은 과거엔 일반인들과 별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연 물량이 늘어나고 TV광고, 기업문화마케팅 등이 계속되면서 대중의 관심사가 됐다. 하지만 증폭된 관심과 달리 이들 공연에 접근은 쉽지 않다.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과)는 “‘아날로그 공연’에서 벌어지는 양극화는 당장 경제적인 문제로 비춰질 수 있지만 이런 괴리감은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서구사회의 경우 다양한 문화적 스펙트럼이 존재해 갈등이 해소될 여지가 많지만 우린 ‘모 아니면 도’ 식의 쏠림현상이 강해 갈등의 골이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1000원짜리 공연에 14만명 몰린 이유

고가 공연 시장이 팽창할수록 제대로 된 무대 공연을 보고자 하는 잠재된 욕구 또한 만만치 않다. 세종문화회관이 올해 마련한 ‘천원의 행복’ 공연에 쏠린 관심이 말해준다. 대극장에서 매달 한차례씩 관람료 1000원으로 클래식, 뮤지컬, 국악, 무용 등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에 지난 9개월간 14만명의 신청자가 몰렸다. 세종문화회관 사이트가 다운되고 업무가 마비됐을 정도다. 공연을 기획한 이창기 팀장은 “공연장 마당에서 이벤트성으로 잠깐 펼치는 공연들로는 사람들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면서 “제대로 된 공연장에서 한편의 작품을 감상하며 문화를 맛보게 하는 공익적 프로그램과 시스템이 뒷받침될 때”라고 강조했다.

기업의 획일적인 문화마케팅도 앞으로는 다양화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동안 생색내기용으로 고가 공연을 선호하며 “비싸야 잘 팔린다”는 공연계 제작 메커니즘 형성에 일조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뮤지컬제작사 쇼팩의 송한샘 대표는 “문화 후원이란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 10만원 이하의 공연이나 국내 창작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며 “거품의 중심에 기업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9월부터 시행된 기업의 문화접대비 손비처리 수혜도 일부 고가 공연에나 해당되는 ‘그림의 떡’이란 얘기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시각도 있다. 지금은 과도기이기 때문에 공연시장 발전을 위해서는 기업이 후원금만큼 고가의 티켓을 되가져가는 규모라도 커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업 문화마케팅을 돕는 클립서비스 설도권 대표는 “기업 입장에서 이윤을 주는 VIP고객에게 문화마케팅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며 “그나마 아직까지도 활발하지 않아 더욱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이 충분히 커지면 다양한 형태의 문화마케팅이 개발된다”며 “중저가 공연이나 여성을 타깃으로 한 대학로 공연 등으로 관심이 옮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부천필하모닉의 지휘자 임헌정 교수(서울대음대 작곡과)는 “문화예술은 ‘정신적 영양소’로 인간의 몸이나 사회가 균형이 깨지면 말썽이 생기듯 문화 향유와 소통에도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평론가 이영미씨는 “과거 고급문화, 대중문화로 나뉘던 것이 요즘은 비싼 것과 비싸지 않은 공연으로 갈라지고 있다”며 “여기에서 벗어나 각자의 취향이 만들어지고 이를 드러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더이상 자기를 속이는 ‘껍데기 취향’에 좌우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희연기자)

경향신문(07. 10. 04) '수준높은 공연·저렴한 티켓’ 행복찾기

해외에는 공연문화의 격차와 갈등 해소를 위해 어떤 프로그램과 대안의 움직임이 있을까. 일본의 경우 극단 ‘시키’가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기업과 손잡고 초등학생을 위한 무료공연을 수년간 계속해오고 있다. 니혼생명이 1964년 도쿄에 ‘닛세이 명작극장’을 세우고 극단 시키의 어린이용 뮤지컬 무료공연을 후원하고 있다.

당시 니혼생명 사장 히로세 겐은 “젊은이나 어린이들에게 제대로 된 무대 공연을 볼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 감동은 반드시 앞날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극장 설립은 물론 공연비용까지 부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도쿄뿐 아니라 오사카, 나고야, 요코하마 등 10여개 도시에서 무료공연이 펼쳐지며 현재까지 공연횟수 4229회, 초대 어린이수 665만명을 기록하고 있다.

예술상품의 공공성을 국가가 정책적으로 내세우는 프랑스는 공연작품의 유통까지 세밀하게 관리하는 방식이다. 수준 높은 공연물을 1만원 미만의 티켓 값으로 누구나 볼 수 있게 시스템화했다.

문화관광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 국제교류팀 장현주 차장은 “프랑스 5개 국립극장에서는 대규모 국가 브랜드 공연 사업을 펼치는 반면 나머지 60여개 지역별 국립드라마센터에서는 각 지역민들을 위한 공연 서비스에 중점을 둔다”고 소개했다. 빈민지역이나 낙후된 위성도시에서도 국가가 수준을 보증하는 공연들이 서민 관객을 만난다. 또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의 경우 2005~2006년 시즌 동안 오페라 공연에 입석을 마련, 1인당 6500원 정도로 모두 1만2000 좌석을 판매하는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양건열 연구원은 “영국은 ‘영국예술위원회(Arts Council)’를 중심으로 방대한 사업을 펼치고 있는가 하면 미국은 상업적인 공연시장에 맡기는 등 각기 성격이 다양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특히 기업의 후원문화가 활발하다. 뉴욕필하모닉의 경우 2005~2006 시즌 동안 1만2000건의 개인 및 단체기부를 받았을 정도다. 기부금 수입만으로 175억원을 올렸다.

국내 대극장과 기업 등에서도 잠재된 문화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이 진행하고 있는 ‘천원의 행복’(사진) 프로그램 이후 KT 광화문 아트홀의 ‘천원의 나눔’, 울산현대예술관 ‘천원의 공연’ 등이 생겨났다.(김희연기자)

07. 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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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0-04 17:52   좋아요 0 | URL
로쟈님 오늘은 늦었는데요 .^^ 무화과나무님이 선수를 ㅋㅋ
오늘 잠깐 서점에 갔다가-일과 일 사이에 약간 뜨는 시간- 카라마조프형제들 3권 맨 마지막에서 로쟈님의 이름을 확인했지요.ㅋㅋ 본명 라스콜리니코프 ㅎㅎㅎ 앞으로도 신세질테니 감사의 말을 전한다는.. 후배였나봅니다 ㅋㅋㅋ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를 보고 있는데,아주 재미있네요.로쟈님께 탱스투를 했어야 하는데..담에는 꼭. 부산에는 비옵니다.영화제 개막식은 빗속에서 하려나

로쟈 2007-10-04 18:50   좋아요 0 | URL
아까 '문화귀족'을 검색할 때 아무런 페이퍼도 안 뜨던데, 부분적으로 옮겨놓으셨군요. 뭐, 아주 같지는 않으니까요.^^; <성스러운 테러>는 재미있게 읽은 책이지만 별로 읽는 사람이 없는 것 같더니 부산에 한분 계셨군요.^^ 땡스투는 담에 해주시길.^^

수유 2007-10-04 23:43   좋아요 0 | URL
아시아 순회 공연일지라도 우리나라 티켓 값이 높죠..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여튼..그러나 가고싶은 공연은 여기저기 뜨고 나는 가고싶어하고 사정은 안되고 그렇습니다... 10월의 바흐 페스티벌은 약간 고가이지만 한번쯤은 가야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7-10-05 22:46   좋아요 0 | URL
이럴 때 귀가 고급이지 않은 게 고민을 덜어주는군요.^^

자꾸때리다 2007-10-05 09:02   좋아요 0 | URL
바흐 페스티벌 저고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는데 도무지 가격 때문에 포기..ㅜ.ㅜ
근데 10월과 11월에 열리는 엘리야후 인발의 몬테카를로 필과 크리스티앙 텔레만의 뮌헨 필 공연은 거의 같은 수준의 A급 지휘자와 악단인데도 최저 가격으로 봤을 때 하나는 2만원이고 하나는 7만원 이더군요.

기인 2007-10-05 11:27   좋아요 0 | URL
헐.. 책도 파피루스로 만들어서 몇십만에 팔거나.. 전집류로 '쌔끈'하게 비싸게 팔아야 하겠네요.. 아니, 지금 그렇게 팔고 있군요;;;
흠.... 소극장 창작극들 좋은데요~ 가끔 배우보다 관람자가 적어서 민망하기도 하고. ^^;

로쟈 2007-10-05 22:47   좋아요 0 | URL
'고급 공연'을 가끔은 아주 저렴하게 볼 수 있는 여건만 마련된다면 '비싼 공연'의 문제점들도 상쇄되지 않을까 싶네요...

푸른신기루 2007-10-07 00:38   좋아요 0 | URL
10만원짜리 공연을 보면서도 공연예절은 10원짜리도 안 되는 분들 많아요
기사에 적힌 가격들을 보니 10만원은 껌값인가 싶기도..;;
아르바이트를 하다보면 공연의 가격과 공연 보는 예절이 비례하는 건 아님을 참 절실히 느끼곤 합니다

로쟈 2007-10-07 10:35   좋아요 0 | URL
티내기(구별짓기)에 아직 덜 숙달한 모양입니다...
 

내일자 조간신문 문학란의 가장 큰 기사는 이번에 한국어판 <끝없는 벌판>(아시아, 2007) 출간을 계기로 내한한 베트남의 젊은 작가 응웬옥뜨에 관한 것이다. 원작은 베트남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문제작'이라고 하는데, 분량은 의외로 단촐하다. 200쪽이 안되는 중편 정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가 구 소련사회에 던졌던 충격파 정도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관심을 갖게 되는 작가이고 작품이다. 관련기사들을 모아놓는다.

경향신문(07. 10. 04) 베트남 발칵 뒤집은 ‘용감한 소설’

'베트남 문학사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작가가 탄생했다.’(소설가 바오닌)

‘베트남 사회는 응웬옥뜨와 같은 ‘용감한’ 작가를 기다려왔다.’(시인 찜짱)

이런 찬사를 받은 젊은 여성 소설가 응웬옥뜨(31)가 지난 1일 한국에 왔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소설 ‘끝 없는 벌판’(하재홍 옮김·아시아)이 국내 출간되는 것을 계기로 ‘베트남을 생각하는 젊은 작가모임’에서 초청한 것. 베트남의 국민 시인 찜짱, 여성 시인 투응웨트, 그리고 SBS 드라마 ‘머나먼 쏭바강’(박영한 원작)의 미술감독을 맡았던 소설의 삽화가 쩐루언띤과 동행했다.



‘끝 없는 벌판’은 메콩강의 작은 거룻배에서 폭력적인 홀아버지와 함께 오리를 치며 살아가는 남매의 성장기를 18세 소녀의 눈으로 그렸다. 어머니의 가출 이후 우울하기만 하던 이들 가족 앞에 어느날 매춘생활을 하던 여자가 나타나고 아버지와 동거를 시작한다. 17세 소년 디엔은 그 여자에게 모성애와 이성애를 함께 느낀다. 그러나 조류독감이 강타하자 공무원들이 오리를 도살하러 온다. 여자는 성 상납을 해 오리를 지키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비아냥거린다. 환멸을 느낀 여자가 거룻배를 떠나자 디엔도 떠난다. 그러던 중 화자는 동네 사내아이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화자는 자신의 임신 가능성을 생각하며 아빠 없는 아이지만 잘 기르겠다고 다짐한다.

이 작품이 베트남작가협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문예’ 2005년 9월호에 발표되자 젊은 독자들은 거침 없는 묘사에 열광했다. 그러나 ‘미풍양속을 해친다’ ‘가난·매춘·부정부패 등으로 베트남을 그렸다’ ‘너무 절망적이다’라는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지난해 3월 작가의 고향인 까마우성 사상교육위원회가 ‘정치·도덕·작가덕목 교육’(자아비판)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지난해 베트남작가협회가 주는 최고 작품상을 받으면서 논란의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응웬옥뜨는 “처음 비난 받았을 때는 현기증을 느꼈으나 그것도 내 책에 대한 여러 반응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아무 반응도 없는 것보다 오히려 나았다”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의 사회 현실을 그리고자 한 건 아니고 원한과 용서에 대해 생각해본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가난 때문에 청소년기를 집안일과 농사, 채소장사 등으로 보내다가 10학년(고등학교 1학년) 때 중퇴했다. 그러나 자신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20살부터 글쓰기를 시작한 뒤 베트남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로 떠올랐다. 지난 7월 베트남어로 번역된 ‘한국근현대단편소설선’을 처음 접한 뒤 “아시아인으로서 내면세계가 비슷하다”고 느꼈으며, 특히 신경숙·은희경·김인숙 등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좋았다고 밝혔다.(한윤정기자)

한겨레(07. 10. 04)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들 이야기 쓰겠다”

젊은 여성 작가 응웬옥뜨(31·사진)는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베스트셀러’라는 말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다. 2005년에 나온 그의 소설집 <끝없는 벌판>은 이틀 만에 초판 5천 권이 매진되었으며, 지금까지 8만부 정도 팔렸다.

<끝없는 벌판>이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는 이 소설이 불러온 ‘스캔들’도 한몫을 했다. 이 중편소설이 2005년 9월 잡지에 발표되자 다수의 독자들은 열광했지만, 소수의 경직된 당 관료들은 이 소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베트남 농촌 사회의 궁핍상과 도덕적 타락, 그리고 공무원들의 부패를 노골적으로 그렸다는 점 때문이었다. 결국 이듬해 3월 작가의 고향이자 거주지인 남부 까마우성 사상교육위원회가 ‘자아비판’을 위해 작가를 소환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문인과 예술인들은 물론 언론과 일반 독자들까지 나서서 작가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 와중에 책은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논란은 2006년 말 베트남작가협회가 이 소설에 최고작품상을 주는 것으로 극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응웬옥뜨는 ‘불온한 젊은이’에서 일약 베트남 문학의 희망으로 처지가 바뀌었다.

“처음에 비판적인 평가를 들었을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현기증이 날 정도로 힘들었어요.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누구든 자기 방식으로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편하게 생각하게 되었지요. 아예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보다는 비판적인 반응이라도 있는 쪽이 나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끝없는 벌판>의 한국어판(하재홍 옮김, 아시아 펴냄) 출간에 즈음해 방한한 응웬옥뜨는 2일 저녁 기자들과 만나 자신의 소설과 베트남 문학에 대한 견해를 들려주었다. <전쟁의 슬픔>(바오닌)이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반레) 등 그동안 한국에 소개된 베트남 소설들은 대부분 베트남전쟁의 아픔을 다룬 것들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 태어난 응웬옥뜨의 <끝없는 벌판>에는 전쟁이 등장하지 않는다. 작은 거룻배를 거처 삼아 강을 떠돌며 오리를 치는 홀아버지와 두 남매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베트남 농촌 사회의 피폐한 현실이 사실적으로 그려질 뿐이다. “베트남 문학에서 전쟁에 관한 평가가 끝난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한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듯이 문학에서도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한 거죠.”

작가는 앞으로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들의 문제를 소설화할 계획이라고 밝혀 눈길을 모았다. “사랑이 없이, 돈을 매개로 이루어진 결혼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상당수의 베트남 여성들이 바로 돈 때문에 한국 남성들과 결혼하고 있어요. 가슴 아픈 일이죠. 소설가로서 저는 그 문제를 반드시 다루어 보고 싶습니다.”

응웬옥뜨는 이번에 한국어판 <끝없는 벌판>에 삽화를 그린 화가 쩐루언띤, 베트남 국민 시인 찜짱, 그리고 역시 시인인 투응과 함께 방한했다. 이들은 4일 오후 1시 서울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협회 강당에서 열리는 한·베 문학 세미나에 소설가 공선옥씨, 평론가 고명철·이명원씨 등과 함께 참석한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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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5 1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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