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페이퍼'로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예의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이다. 정작 내가 아직 손에 들지 않은 책들도 많은데, 특히 마지막에 거론한 <백낙청 회화집>이나 한창기 선생 문집 등은 나의 재력으론 감당할 수 없고 도서관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려야겠다. 그런 식으로 또 한 계절이 지나가누나... 

깊어가는 가을 독서의 여정은 ‘무시무시한 책’부터 시작해보자. 노엄 촘스키가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생생하고, 풍부하며, 명료하다.”며 격찬한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이 바로 이 ‘무시무시한 책’이다(실상 무시무시한 건 책이 아니라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사다리 걷어차기>(부키, 2004) 이후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치명적인 덫에 대해서 신랄하게 폭로해왔다. 하여 ‘우리시대의 경제학 멘토’에게서, 덩달아 ‘무시무시한 인간’이 되지 않고도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을 얻어 보도록 하자.

 

 

 

 

그리고 여차하면 아이비리그의 경제학 멘토 로버트 프랭크의 <이코노믹 씽킹>(웅진지식하우스, 2007)의 도움도 빌리자.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걸핏하면 ‘경제’를 말하는 이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부수적으론 “인문학 교수들은 왜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할까?” 간파하기 위해서도(사실 어려운 질문은 아닌데, 박식함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이 권위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경제문제가 ‘해결’이 되면, 보다 근원적이거나 거시적인 관심을 가져보자. 프랑스의 인문학자 질베르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문학동네, 2007)은 아마도 최근에 나온 가장 방대한 이론서일 텐데, 부피에 걸맞게 문학, 인류학, 사회이론, 심리학, 종교사를 모두 아우르는 상상력 연구의 고전이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626055). 곧바로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진형준 교수의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문학과지성사, 1992)이나 송태현 교수의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살림, 2005)을 미리 참조하는 게 좋겠다. 전자는 뒤랑의 신화방법론을 다루고 있는 연구서이고, 후자는 뒤랑의 상상력 이론을 융, 바슐라르의 이론과 함께 개관하고 있는 책이다.

 

 

 

 

거시적인 것으로 치자면 문명론을 빼놓을 수 없겠다. 임철규 교수의 <그리스 비극>(한길사, 2007)은 서양문명과 정신사의 한 기원이라 할 '그리스 비극' 전체를 깊이 조명하고 있는 연구서로서 이 분야의 국내서로는 가장 두툼하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617149). 천병희 교수의 <그리스 비극의 이해>(문예출판사, 2002)나 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한길사, 2003)를 읽고서 매혹과 함께 갈증을 느낀 독자라면 이 계절에 도전해볼 만한 책이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그리스문명학의 권위자 장 피에르 베르낭의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주저의 하나인 <그리스인의 신화와 사유>(아카넷, 2005) 외에도 <그리스 사유의 기원>(길, 2006), <베르낭의 그리스 신화>(성우, 2004) 등이 소개돼 있다. 이 경우에도 김재홍 교수의 <그리스 사유의 기원>(살림, 2003)을 길잡이삼아 먼저 읽어볼 수 있겠다.

 

 

 

 

 

 

 



 

기원으로서 그리스 문명론과 함께 읽어봄 직한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1875)과 그에 대한 자세한 읽기이다. 지난봄 마루야마 마사오의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 2007)에 이어서 고야스 노부쿠니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역사비평사, 2007)가 김석근 교수의 노고로 최근에 한국어본을 얻었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11057). 후쿠자와의 책은 일본 근대사뿐만 아니라 우리 근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독해둘 만한 책이니 두 권의 ‘참고서’는 아주 요긴하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정작 <문명론의 개략>(홍성사, 1986)이 절판된 지 오래되었다는 점(그의 자서전도 소개된 마당인지라 이런 ‘공백’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상상력과 문명에 대한 풍족한 독서의 여정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다시 우리가 내딛고 있는 현실적 지반이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책들도 그런 의미에서 챙겨둘 만하다. 한국 현대 지성사의 산 증인이자 사상계의 거목 백낙청 교수의 <회화록>(전5권, 창비사, 2007)은 말 그대로 ‘우리시대 지성사 40년의 집대성’이다. 더불어, 월간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의 발행인이자 편집이었던 고(故) 한창기 선생의 문집 <배움 나무의 생각>(휴머니스트, 2007) 외 두 권도 지난 시대의 소중한 발자취로 기억해둠 직하다.

 

 

 

 

그럼, 이제 챙길 건 다 챙기고 기억할 건 다 기억한 것인가? 앗, 유령들을 빼놓았다! 새 번역본이 나온 ‘무시무시한 책’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은 각자가 상대하시길!..

 

 

07. 10. 19.

 

 

 

 

 

 

 

 

 

 

P.S. 분량상 다루지 못한 책들 가운데 가장 흥미를 끄는 책은 타니아 모들스키의 <너무 많이 알았던 히치콕>(여이연, 2007)이다. 원제는 'Hitchcock & Feminist Theory'(히치콕과 페미니즘 이론)라고 뜨는데, 찾아보면 '너무 많이 알았던 여자들'이 타이틀이고 그건 부제로 돼 있다. 여하튼 페미니즘 이론으로 히치콕의 영화들을 독해하는 책인 듯하다.

 

 

문득 모스크바에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자세히 읽던 기억이 난다. 좀 으스스한 그의 영화세계로 떠나가보는 것도 계절을 나는 한 가지 방법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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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0-19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 아니라 이미 겨울입니다.. 가을 자켙은 하루이틀 걸치는 것으로 제 임무를 다하는군요. 가을이 가도 저 무시무시한 책들은 독서리스트에 올립니다. <그리스 비극>과 <나쁜 사마리아인>. 그리고 저 지젝도 최근에 다시 읽고 있어요.
건물의 창들이 좀 비현실적으로 보여요. 그 안에 것이 궁금해지지 않을 정도로^^

로쟈 2007-10-19 20:09   좋아요 0 | URL
그래도 아직 한달이 남았는데요.^^; 건물 사진은 아마 영화 스틸사진일 겁니다(자연스레 '비현실적'인)...

2007-10-20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20 12:21   좋아요 0 | URL
'참으로 열심히' 읽지는 마시길. 저도 가끔 사기를 당하니까요.^^;

Kitty 2007-10-20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페이퍼에서 무려 지금 읽는 책을 발견하다니 감동(?) ㅠㅠ
Economic naturalist(이코노믹 씽킹?;;) 읽고 있는데 재미있네요.
소개해주신 책들 언제나 감사히 잘 참고하고 있습니다 ^^

로쟈 2007-10-20 12:22   좋아요 0 | URL
사실 경제학 책 두 권은 따로 소개가 필요없는 책들이죠.^^ 이미 베스트셀러들이니까요...

lastmarx 2007-11-0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대 대학원신문을 보니 4면에 실렸더군요. 인터넷 서평꾼이라는 겸손한 소개와 함께. 로쟈님을 종이로 접하니 색다른 반가움이 또르륵.

로쟈 2007-11-04 09:52   좋아요 0 | URL
편집자가 제목을 더 그럴 듯하게 붙였더군요.^^;

lastmarx 2007-11-04 11:42   좋아요 0 | URL
6면의 제 글은 '가라타니'를 '가라타니 고진'으로 고쳤으니 고쳤다고 할 수도 없는데, '무시무시한 책과 가을나기'는 로쟈님이 붙인 게 아니었군요. 일교차도 심한데.

로쟈 2007-11-04 11:59   좋아요 0 | URL
대부분의 타이틀은 그냥 편집자가 알아서 붙입니다. 저도 쓰신 글은 봤습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10/021162000200710180681029.html)를 옮겨놓는다(목차에는 '로쟈의 인문학산책'으로 돼 있던데, 이런 가을날에 정말 '산책'쯤 떠나고 싶다! 허구한 날 '서재'가 웬말이냐!). 제목은 '공부란 무엇인가'로 나갔지만 결론적으로는 '인문학습'에 방점이 두어지기에 '문제는 인문학습이다'로 바꿔단다. 문제는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습이다, 란 뜻으로 읽히면 좋겠다(내 생각에 우리에겐 '인문학'이 모자라는 게 아니다. '인문학습'이 부족한 거다. '학문'은 학자들께서 다들 열심히 하지 않는가?).  

한겨레21(07. 10. 18) 공부란 무엇인가

지난주가 ‘인문주간’이었다.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참여를 끌어올려 인문학의 부흥을 꾀하자”는 취지로 지난해부터 정부기관에서 열고 있는 행사로 올해의 주제는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었다. 거꾸로 짚어보자면, 한국 사회가 닫힌 사회이고 소통이 차단된 사회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문학이 그동안 닫힌 학문이자 불통인 학문이었다는 것인가? 진의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인문학 공부와 관련된 책들을 몇 권 들추게 된다. 대저 학문이란 무엇이고 공부란 무엇인가를 되새겨보기 위해서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란 부제를 단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그린비 펴냄)부터이다. 호모 쿵푸스? ‘쿵후하는 인간’ 곧 ‘공부하는 인간’의 재기발랄한 명명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호모 쿵푸스의 또 다른 이름은 ‘호모 부커스’이니 이는 또한 ‘책 읽는 인간’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규정해주고 인간과 동물 간의 차이를 지정해주는 종차(種差)라는 것이다. 그러니 돈과 출세를 위한 공부가 아니다. 존재와 자존(自尊)을 위한 공부이다. 그래서 ‘인생역전’은 이 사태를 지시하는 문구로 부족해 보인다. 공부는 ‘그저 인간’인가, 곧 ‘제3의 원숭이’ 혹은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다운 인간’인가를 판별해주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은 없다.

중용이란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라는 문제의식으로 그러한 무지와 대중 기만에서 탈피하기 위해 책읽기에 나선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공부>(랜덤하우스 펴냄)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이탁오의 말. “나이 50 이전에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장정일은 이 글을 보고 핑, 눈물이 돌았다고 적었다. 당신 또한 영문도 모르고 앞사람을 따라 짖어댔다면 ‘한 마리 개’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저자의 고백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새삼 ‘호모 쿵푸스’로 진화하는 수밖에. 마흔이 넘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공부는 어떻게 하는가? 몸으로 한다. 강유원의 잡문집 <몸으로 하는 공부>(여름언덕 펴냄)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머리로 익힌 것을 몸으로 해봐서 할 줄 아는 단계로까지 가는” 것이다. 이 ‘지행합일’의 정신은 사실 저자의 지적대로 <논어>의 첫머리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에서 배우는 ‘학’은 정신의 일이고 익히는 ‘습’은 몸의 일이다. 즉,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익힌다. 이것이 이론(배움)과 실천(실습)의 합일이고 일치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습’이 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인문학습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신영복의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돌베개 펴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저자는 감옥에서 같은 감방지기인 노촌 이구영 선생에게서 동양고전과 한학을 배운다. <강의>는 경제학자인 저자가 그러한 인연으로 얻은 배움을 학생들에게 풀어서 나누어준 기록이다. 그의 풀이를 따르면, ‘習’(습)이란 글자는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을 나타낸다. 자신이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실습할 때, 곧 가르칠 때의 기쁨이 ‘학습’의 기쁨이다(어린 새들이 날갯짓하는 걸 바라보는 기쁨!). 이 때문에 ‘학습’은 혼자만의 ‘공부’로는 얻을 수 없는 ‘배움의 변증법’을 달성한다. 물어서(問) 배우고(學) 이를 실천하라(習)! 인간의 길이고 인문학습의 길이다.

07. 10. 19.

P.S. '강유원'을 검색하다가 유사한 컨셉의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짐작에는 한겨레21의 칼럼을 참조한 듯싶다.

문화일보(07. 11. 05) 고미숙·강유원씨의 ‘인문학 공부를 위한 조언’

‘나이들어’ 인문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우선 공부에 대한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활동중인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그린비), 철학자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여름언덕)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고씨는 우리들이 학교에서 해온 공부가 ‘수단으로서의 공부’였기에 즐겁지 않은 일이었으며 그것은 ‘근대’ 이후 뿌리박힌 공부에 대한 편견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공부는 인간의 본능이자 삶의 기쁨이기에, ‘앎의 즐거움’과 ‘배움의 열정’에서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먼저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선입견을 버리라고 말한다. 제도교육은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을 한 장소에 모아 놓고 제도에 적응하게 하는 ‘관리’와 ‘훈육’을 해왔다며, 거기에서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이 주입되고,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에서 ‘해방’돼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오히려 삶에 대해 시야가 넓어진 성인이 되었을 때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며 그때 배우는 기쁨도 더 크다는 것이다. ‘호모 쿵푸스’란 ‘공부(工夫)하는 인간’을 말한다. 또 ‘호모 부커스’라고도 하는데 이는 ‘책 읽는 인간’을 가리킨다. 이는 곧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장인 철학자’란 별명을 갖고 있는 강유원씨는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란 글로 유명하다. 여기에서 그가 강조하는 ‘비법’은 ‘베껴라’라는 것이다. 이는 표절을 하라는 뜻이 아니고, ‘초보자는 되풀이해야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강씨 자신이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를 50번 읽으면서 ‘눈이 트이는’ 과정을 겪었다.

그는 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를 막아주고,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 ‘몸으로 하는 공부’를 강조한다. 심화과정으로서 “머리로 익힌 것을 몸으로 해봐서 할 줄 아는 단계로까지 간다”는 것이다. ‘논어’의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배우는 ‘학(學)’은 정신의 일이고 익히는 ‘습(習)’은 몸의 일인데, 이는 곧 이론(배움)과 실천(실습)의 합일이고 일치라는 것이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공부가 아니더라도 두 저자의 지적은 인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직장인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엄주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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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0-19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좋은데 한겨례 21에 나오는 로쟈님글은 너무 짧습니다. 편집진의 요구인 것 같은데 읽다보면 갑자기 뚝 그치는 것이 꼭 무슨 X싸다가 만 것 같은 느낌. 이렇게 짧아서야 어디 "인문학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있나요?
한겨례 21은 로쟈님에게 무한대의 지면을 할애할 것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

로쟈 2007-10-19 14:30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이번엔 지면이 부족하다고 투덜거렸는데, 그렇다고 매번 길게 쓸 만한 기력이나 내공도 못 되지요.^^;

raipai 2007-10-1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족) 로쟈님의 글을 매일 훔쳐보고 있는 독자입니다. thanks to도 꽤 하고 있고요. 주간지 구독비용 정도를 지불하고라도 글을 보고 싶은 독자입니다.
/ 제목을 보고 <공부에 관한 로쟈의 생각>이 궁금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소개된 순서대로 다른 이들에게 소개해주면 적절하겠단 생각이 드는데, <네 명의 개소리^^:>말고 로쟈님의 외치는 소리,가 더 그립단 생각이..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한겨레에서 못다한 <로쟈의 공부론>을 이 곳에서 읽어보고 싶네요. ^^v
/(사족) 도움이 될 지 모르지만 한길그레이트북 거의 전질이 개포고등학교 옆 <서적백화점 567-9876>에 여러질 나왔습니다. 50% 가격에. 또 러시아 원서는 홍제동 대양서점http://cafe.naver.com/daeyangbook에 꽤 많이 나왔습니다. 쥔 형님이 러시아어를 다룰 줄 몰라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데, 꽤 많이 나왔답니다.

로쟈 2007-10-19 19:29   좋아요 0 | URL
분량상, 그리고 연재의 성격상 제 생각을 많이 드러내는 자리는 아니고요, 제 공부론은 '공부냐 학습이냐' 같은 페이퍼에 적어놓은 게 있습니다(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책에 관한 유익한 정보들은 감사합니다.^^

라주미힌 2007-10-2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7-10-22 17:03   좋아요 0 | URL
원래 로쟈하고 라주미힌은 잘 아는 사인데요...^^

뭉실이 2007-10-22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인문학습이다'에 한표 ^^


로쟈 2007-10-22 17:02   좋아요 0 | URL
학습당을 찍으신 건가요?^^
 

학술저널 담비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에 대한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6610). 주로 근작인 <장치란 무엇인가>를 '아감벤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때 기준점이 되는 건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호모 사케르>이다(국역본이 올해 안에 나오는가?). 이래저래 국내에 번역/소개가 늦어지고 있어서 '전설'로만 회자되고 있는데 조만간 한국어로도 실체가 드러나기를 기대한다(가장 최근에 아감벤을 다룬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77009 참조).

동국대학원신문(144호) 아감벤의 진화 혹은 새 출발 

"올해 최고의 책을 뽑으라면 단연 『호모사케르』죠.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나는 이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난 1997년 11월 27일 어느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건축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비릴리오는 이렇게 말했다. 비릴리오의 말이 단순한 허사가 아닌 것은 내노라하는 현대 사상가들, 가령 안토니오 네그리나 슬라보예 지젝 등도 이와 유사한 평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모사케르』가 출간된 지도 벌써 10여 년(이탈리아어 초판은 1995년, 프랑스어본은 1997년에 출간), 이 책의 지은이 아감벤도 꾸준히 진화 중이다.



작년에 출간된 『장치란 무엇인가?』는 약 40쪽 분량밖에 안 되는 팸플릿이지만, 아감벤의 진화를 보여주는 최근의 저서이다(『호모사케르』의 4부에 해당되는 『지배와 영광: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에 관하여』도 올해 초 출간됐다).



일부 사람들(가령 지젝이나 자크 랑시에르 등)은 아감벤의 사유가 염세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감벤은 짐짓 우리 시대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어떤 사회적 권리도 갖지 못한 채 삶과 죽음이 유예되는 ‘예외상태’의 최고 단계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삶(la nuda vita)을 살아가는 존재(다른 말로 호모사케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장치란 무엇인가?』에서의 아감벤은 이와 다른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래서 이 저서는 아감벤의 진화를 보여준다.

아감벤은 『호모사케르』에서 ‘생명정치’라는 개념에 대해 그랬듯이 이번에도 미셸 푸코의 논의에 기대서, 그러나 좀더 폭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장치’라는 개념을 분석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푸코는 ‘장치’라는 표현을 쓰기 이전에 ‘실증성’(positivit)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는 그의 스승인 장 이폴리트에게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이폴리트에게서 ‘실증성’이란 “청년 헤겔이 규칙, 의례, 제도의 무게와 더불어 외부의 권력에 의해 개인들에게 부과되었으며 …… 신앙과 감정체계 속에 내부화된 역사적 요소에 붙인 이름”이었는데, 푸코는 이를 “권력관계가 그 안에서 구체화되는 제도들, 주체화 과정들, 규칙들의 집합”으로 재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푸코는 이 용어 아래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포착하려고 했다는 것이 아감벤의 해석이다.

그 뒤 아감벤은 그 자신이 ‘장치’라는 개념의 “신학적 기원”이라고 부르고 있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라는 용어를 분석한다(또한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이다). 대략 2~6세기 사이인 교회사 초기에 기독교의 교부들은 삼위일체(왜 신은, 혹은 신의 형상은 하나가 아니고 셋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신의 경제’를 말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고, 이 때문에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를 도입했다는 것이다(아버지 신은 아들 예수에게 인간들에 대한 ‘경제’, 즉 관리와 통치를 부여한 것이다).

기독교 교부들이 ‘오이코노미아’라는 그리스어를 번역하기 위해 도입한 용어가 바로 ‘장치’(dispositif)라는 용어의 어원인 라틴어 Dispositio이다. 이 “신학적 기원”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장치란 용어는 존재 안에 최소한의 토대 없이도 순수 통치 활동이 그것으로, 그것에 의해 실현되는 것을 명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치들은 항상 주체화 과정을 함축해야 한다. 장치들은 그것들의 주체를 생산해야만 한다.”는 점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에 근거해 아감벤은 푸코의 ‘장치’ 개념에 더 큰 일반성을 부여한다. “나는 생명체들의 몸짓들, 행동들, 의견들, 담론들을 포획하고, 유도하고, 결정하고, 차단하고, 만들고, 통제하고,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을 장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감옥, 수용소, 판옵티콘, 학교, 고백, 공장, 규율, 법적 조치들뿐만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 컴퓨터, 핸드폰, 그리고 언어 자체도 장치이다.” 그리고 이에 근거해 아감벤은 “생명체(혹은 실체)-장치들-주체들”이라는 3항 도식을 도출한다.

『장치란 무엇인가?』의 이런 내용이 아감벤의 ‘진화’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추론을 통해서 아감벤은 비로소 주체생산의 이중성(주체화/예속화)에 천착하기 때문이다. 도처에 산재한 장치들은 권력의 요구에 순응하는 주체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예속화), 이 과정은 장치들(그리고 장치들의 네트워크 자체)과 주체의 맞대응 관계가 무한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주체화). 아감벤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것은 소멸이나 지양이라기보다는 모든 개인적 정체성에 끊임없이 수반되었던 가면극의 차원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산종(散種)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다른 현대 사상가들이 했던 말 아니냐고? 맞다. 그러나 답이 같더라도 그에 도달하는 과정이 다르다면 답 자체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아감벤은 자신의 새로운 풀이과정을 통해 ‘저항’이 아니라 ‘세속화’(profanare)를 주체화의 또 다른 방법으로 언급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또 다른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좌우간 아감벤은 계속 진화중이니, 그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의 진화를 계속 주시할 수밖에.(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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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2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사케르는 정말 나온다 나온다 하는 얘기만 한참 들은 것 같네요 허허.
관련해서 드는 생각인데, 들뢰즈가 죽기 전에 썼다고들 하는 "맑스의 위대성(Grandeur de Marx)"은 왜 아직 소식이 없는걸까요? 혹시 아시나 해서...^^a

로쟈 2007-10-24 23:28   좋아요 0 | URL
나온다던 책 나오지 않고, 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거 같습니다. 들리즈의 책 소식은 '빠리'에서 더 잘 아실 듯한데요. 저로선 그가 썼다는 것인지 쓰려고 했다는 것인지 헷갈리는군요...

비로그인 2007-10-25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는 '빠리'에 없고 서울에 있는데요. 혹시 닉네임 때문에 착각하신거라면 전 빠'라'바람 입니다^^;;

로쟈 2007-10-25 14:36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잘못 봤습니다...

비로그인 2007-10-25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시간 답글이네요^^;; 아무튼 제가 그 얘기를 들었던 건 "노마디즘"에서 였는데 이진경은 "네그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원고는 죽기 직전에 씌어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퇴고하지 않은 채 죽어서 아직 출간이 되지 않은 듯 합니다"라고 적고 있네요. 니콜라스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에도 언급이 나와있는데 (http://libcom.org/library/deleuze-marx-politics-nicholas-thoburn-introduction) 썼다는 건지 안썼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다시 관심 접으렵니다ㅋ

로쟈 2007-10-25 16:37   좋아요 0 | URL
미완의 책이라고 하니까 분량이 어느 정도 되면 출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단행본 형태가 아니더라도). 구상 정도였다면 물론 어렵겠고, 그가 따로 불가하다는 유언을 남겼다면 역시 어렵겠지만...
 

어제로써 대략 이번 대선 출마자들이 정해진 듯하다. 후보 통합 여부는 아직 미정이지만 현재 출마를 선언하거나 정당 후보로 선출된 이들끼리의 통합일 테니까 더이상의 '변수'는 없어 보인다. 자칭 '키보드 워리어' 한윤형군의 표현을 빌자면 "바야흐로 구렁이들의 전쟁이  도래했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1005161917&s_menu=정치). 이번 대선이 지난 97년때보다 덜 흥미를 끄는 것은 경선 구도가 너무 뻔하게 굴러가는 탓이기도 하다. 한 후보가 50%를 넘는 지지율을 계속 얻는다면 경선의 의미가 무색해질 것은 뻔한 이치이다(물론 최종적으로는 50만표 안팎의 승부가 될 거라고도 하지만). 거꾸로 흥미를 끄는 것은 바로 그 50% 지지율이다. 누가, 왜, 어떻게 그를 지지하는가? 그게 '반盧'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데, 박노자 교수가 그래도 설득력 있는 분석을 해놓았다. 그에 따르면, 문제는 자영업자들이다. 그리고 '1970년대 신화'이다.

한겨레21(07. 10. 09) 가난한 자는 왜 이명박을 지지하나

오슬로대학에서 ‘한국 사회·정치’ 수업을 할 때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 중의 하나는 극우적 색채가 강한 보수의 대표자 이명박의 지지율이 ‘고공 행진’을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미 근대적 노동계급이 다 형성된데다 비정규직화와 같은 최근의 사회 재편으로 근로 인구의 상대적 박탈감이 심화됐을 터인데, 어떻게 해서 ‘부자들의 대표’가 계속 50% 안팎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은 필자에게 배우는 노르웨이 학생들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산업화된 나라들 중에서는 미국 다음으로는 한국과 일본이 과연 가장 보수적인 곳이 아닌가라고 묻는 이들도 있다.

△박정희를 떠올리게 하는 ‘자수성가형 최고경영자’의 이미지, 박정희를 계승한 개발주의적 발상들은 이명박 대선후보의 주된 상징적·이념적 자산이다. 그가 선거에서 성공할 확률은 높지만, 그의 개발주의적 처방으로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민생 문제들을 어차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사진/ 연합 손대성)

독자적인 대중적 좌파 정당이 발달되지 못한 미국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 중심부 내지 준중심부 국가 중에서는 일본과 한국만큼 사회주의적 진보세력이 약하고 극우가 강한 데가 없다는 게 이 질문의 요지다. 일본에서는 지난 7월 총선에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함께 약 12%의 표를 얻었으며, 한국에서는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3%의 표를 얻었지만, 유럽에서는 좌파가 20∼30% 미만의 표를 얻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다 이명박이나 고이즈미 준이치로처럼 고정적으로 일부 노동자 사이에서까지 ‘선풍적 인기’를 누리는 극우 정치인을 찾기가 힘들다. 왜 하필이면 한국과 일본이 지구의 정치학적 지도에서 온건 좌파 지향의 유럽, 급속히 급진화돼가는 중·남미와 대조가 되는 상대적 ‘친미 보수 권역’을 이루게 됐는가?

노르웨이 5% 대 한국 34%

학계에서 자주 지적되는 한·일의 상대적 보수성의 원인 중 하나는, 자영업자 인구가 비교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북유럽 도시 풍경과 한국 도시 풍경의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한국의 무수한 식당과 가게, 상가 건물들이다. 노르웨이 같으면 정반대다. 한국에서 손님이 올 때마다 필자 입장이 난감해지는 이유는, 오슬로대학을 벗어나서 적어도 20분 정도 걸어야 비로소 괜찮은 식당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 소규모 가게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소매업 시장의 99.3%를 네 개의 큰 독점 기업(체인점)이 독차지하는 노르웨이에서는 ‘가게를 내서 장사에 성공했다’는 유의 이야기는 이미 ‘머나먼 과거의 동화’ 취급을 받는다. 전체 비농업 부문 피고용자에 대비해 비농업 자영업자가 5%도 안 되는 노르웨이에서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안정된 소득의 임금 근로자들이 맹목적 ‘성장’보다 차라리 재분배 위주의 정책에 더 쉽게 합의한다.

반면에 무급 가족까지 포함해서 자영업자들이 전체 취업자의 34%를 이루는 한국이나 16%를 이루는 일본에서는, 당장의 자금 흐름이 문제가 돼 ‘경기 회복’을 약속하는 극우파의 감언이설에 귀가 솔깃해지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생산 수단을 소유하면서도 착취 대상이란 자신과 가족, 몇 명의 아르바이트생 빼고 별로 없는 중간 규모 이하의 자영업자들은 대체로 사회·경제적으로 이중적 존재들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진정한 자본가’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자신들과 몇 명의 주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경기 변동에 따라 늘 도산 위기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들이 ‘변화가 없는 호경기’를 찾다 보니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주된 지지 기반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유럽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운하 건설’을 위해 예산을 대대적으로 풀어 경기 부양을 도모한다고 해도, 적자를 보거나 월 평균 100만원 이하의 소득밖에 못 올리는 285만 명의 영세 자영업자(전체 자영업 인구의 약 37%)들의 사정이 과연 획기적으로 나아질 수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당장 내일 도산해 생계 기반을 잃을지도 모르면서 사는 이들로서는- 베네수엘라나 볼리비아, 브라질 등 중남미 국가들의 많은 영세업자들처럼- 차라리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좌파를 지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대 체인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가게 문을 닫아야 할 형편에 이르는 지방 영세상인보다는 서울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면서 노조 활동을 하고 있는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민주노동당을 지지할 가능성이 더 크다. 민주노동당의 주된 지지 기반은 조직화된 숙련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지만, 일본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노동자의 지지까지도 부진해 거의 고학력자들의 표에 많이 의존한다. 늘 민중을 부르짖고 민중에 호소하는 좌파가, 민중의 많은 계층으로부터 고립돼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사회심리적 요인들이 크게 작용한다.

극단적 소극성 속에서도 ‘적하’된 것들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적 산업자본주의는, 영국에서는 거의 150∼160년 동안, 독일에서는 약 130∼140년 동안 발전돼왔지만 일본에서는 그 연륜이 90년에 불과하고 한국에서는 아예 30년밖에 안 된다. 후발 주자인 한·일에서 국가와 재벌 주도로 중화학공업 건설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노동자들과 중간계층 소득 사이에 학력과 부동산 보유에 따르는 격차가 벌어지기도 하고 도·농 격차, 재벌과 중소기업 고용자 사이의 격차 등 온갖 불균형과 불평등이 생기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배자들이 불가불 성장의 일부 과실들을 ‘밑’으로 전달시켜야만 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이는 노조들을 순치하고 자민당 장기 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이었으며, 한국에서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 상황에서 정통성이 취약한 군사 정권이 민생 문제 해결의 시늉이라도 보여주어야 했다.

일본의 경우에는 1959년부터 최저임금 제도를 도입하고, 1961년에 농민과 자영업자까지 가입할 수 있는 국민연금을 완비하고, 1970∼80년대 정부의 총지출에서 복지 지출 비율을 거의 3배(1970년대 초반의 6%부터 1989년의 18%까지) 올리는 등 유럽식 사민주의자 없이도 복지사회의 기본은 마련됐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도 일선 노동자에게 장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연공서열식의 임금 인상 제도와 ‘능력에 따르는 승진’을 모토로 내세운 고과제도, 그리고 약 150만 고용자 가구가 살고 있는 저렴한 임대료의 사택(社宅) 제도를 만드는 등 우파 조합주의적 ‘노사 협력’의 분위기를 부추겼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는 일본의 복지제도가 유럽 수준에 크게 못 미치고, ‘가족과 같은 기업’은 어디까지나 개별 노동자의 무력함과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을 호도하는 허위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의 빈곤과 불안의 악몽을 보수주의자들의 집권 밑에서 벗어난 경험을 가진 일본 민중의 상당 부분이 자민당 정객들을 ‘시혜자’로 인식하는 것은 현실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박정희가 일본을 모델로 삼으면서도 최저임금 제도 도입을 끝내 하지 않는 등 복지 부문에서 일본과 대조되는 극단적 소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그도 반독재운동의 대중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주도한 초고속 축적의 일부 과실이라도 ‘밑’으로 적하(滴下)해야 했다. 예컨대 1971∼84년 새마을운동에 정부가 투입한 예산은 약 4조원에 이르는 등 당시 경제 인구의 약 45%를 이루는 농민층에 대한 민심 무마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도·농 간의 소득 격차가 심했지만 정부가 쌀 수매가를 꾸준히 매년 10% 이상 올리고, 경제성장의 결과로 비농업 부문 일자리가 많이 생기는 상황에서 농촌에서 영세농가의 비율이 감소돼 ‘중농화’ 경향까지 나타났다. 물론 노동자의 실질임금 연례 증가의 폭(8%)은 중산계급 소득 증가율에 비해 부족했지만, 노동자의 평균 임금이 평균 한 달 식료품 비용을 넘어 공장에 다니는 사람에게 드디어 배불리 먹는 삶이라도 가능해진 것은 역시 초고속 개발 시절인 1970년이었다.

자기 땅 한 뼘이라도 갖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조롱하듯이 1960∼70년대 내내(1972년과 1973년만 제외하고) 연평균 지가상승률이 25∼50% 정도를 기록해 부동산 보유자들이 안정된 불로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의 통계에 의하면 부동산 보유자의 총수는 1100만 명 정도 됐다. 전 국민의 4분의 1은 건설 부문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화된 토건 경제의 수혜자가 됐으며, 수혜자 반열에 끼지 못하는 상당수 노동자와 영세민들이 죽기 전에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보기 위해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게 된 것이다. 가난뱅이들이 박정희가 설계한 사회 모델을 혐오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에는 그들은 박정희 대신에 ‘능력이 없어서 남처럼 잘살지 못한’ 자기 자신을 탓하기만 했다.

문제는 대권 쟁취 그 다음

‘부자의 후보’ 이명박은 수많은 가난뱅이들의 표를 동원할 만한 상징적 자원, 즉 ‘박정희를 떠올리는 1970년대 자수성가형 경영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단순히 기아를 면한 것부터 지가 상승으로 떼돈을 벌어 대학 교육·취직 기회 확충으로 출세에 성공한 것까지 ‘수혜’ 정도가 다양하지만, 다수의 한국인들은 1970년대에 빚졌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물질적 삶의 개선이 기반이 되어, 수많은 이들이 거기에다가 애국주의부터 ‘실패자는 무능력자다’ 등의 성공주의 이데올로기까지 박정희 시절의 온갖 국가주의적·자본주의적 관념에 그대로 포섭되고 말았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종교, 지역, 계급, 고용형태별로 분열돼 고질화된 갈등 속에 고착돼 있는 한국 사회에 ‘1970년대의 신화’는 거의 유일한 통합 기제로 작동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명박이 대권 쟁취에 성공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1970년대는 초고속 개발과 함께 극심한 불평등을 낳았으며, 4∼5% 이상의 성장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진 오늘날에 이 불평등은 계속 악화일로로 심화됐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든 여권이 기적적으로 정권 유지를 이루어내든 앞으로 5∼10년 안에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계급 갈등들이 폭발의 지점까지 확실히 갈 것이다. 그때에 가서 좌파 세력들이 노동계급과 영세민의 투쟁을 이끌어 이 사회에 믿을 만한 평등·복지적 대안을 제시해 국민적 신뢰를 받아야 우리가 비로소 죽은 독재자의 망령에서 벗어나 ‘세계에서 미국, 일본과 함께 가장 보수적 사회’의 불명예를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07. 10. 16.

P.S. 우연히도 아침에 읽은 강준만 교수의 칼럼 또한 같은 제목을 달고 있다. 박노자 교수의 칼럼은 '보완'하는 의미에서 같이 읽어둠 직하다.

한국일보(07. 10. 17) 가난한 자는 왜 이명박을 지지하나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가 최근 <한겨레 21>에 '가난한 자는 왜 이명박을 지지하나'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흥미롭고 유익하게 읽었다. 감사의 뜻으로 박 교수의 논지를 좀 보완해볼까 한다. 박 교수에게 배우는 노르웨이 학생들은 '극우적 색채가 강한 보수의 대표자 이명박'이 높은 지지를 받는 걸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며, 그래서 산업화된 나라들 중에서 미국 다음으로 한국과 일본이 가장 보수적인 곳이 아닌가 하고 묻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박 교수는 이 질문에 공감하면서,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전체 취업자 중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34%로 매우 높다는 점을 들었다. 자영업자는 경기변동에 따라 늘 도산 위기를 맞을 수 있기 때문에 호경기를 선호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갖기 쉽다는 것이다.

● 유권자에 자기 정치성향 있는가
박 교수는 자영업자 비율이 7%대인 미국은 '특별한 경우'로 보면서 일본도 자영업자 비율이 16%로 비교적 높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일본의 16%는 영국의 12%나 독일의 11%에 비해 높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니므로 한국의 높은 비율만 문제 삼는 게 좋을 것 같다. 자영업자들의 경기에 대한 민감성과 정치적 성향의 상관관계는 타당한 일면이 있지만, 이는 지난 대선 결과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 이전에 더욱 중요한 건 한국 유권자들이 과연 자기 이익 중심으로 정치적 성향을 갖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 유권자들은 서구에서 통용되는 '진보-보수'의 그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다. 한국적 특수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 직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치솟은 게 잘 말해주듯이, 남북분단은 꼭 보수의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논외로 하자.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높은 대외의존도다. 지난해 국민총소득(GNI)에 대한 수출ㆍ수입액의 비율이 88.6%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름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 운운하는 표현이 잘 말해주듯이, 한국인들은 높은 대외의존도에 대해 만성적인 불안감을 갖고 있다. 그 불안감을 보수적이라고 표현하기엔 처지가 너무 절박하고 상흔이 너무 깊다.

둘째, 반작용 쏠림현상이다. 한국인들은 정치 불신ㆍ냉소가 강해 '포지티브 투표'보다는 '네거티브 투표' 성향이 강하다. 지지보다는 반감 표현에 능하다는 뜻이다. 이명박 지지율은 꼭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노 정권과 더불어 '3년짜리'를 '100년짜리'라고 사기친 세력을 처벌하는 성격이 강하다. 여기에 '서울공화국 체제'로 대변되는 1극 집중 구조가 자주 유발하는 쏠림이 일어난 것이다.

셋째, 높은 감성 의존도다. 감성이 이익 계산보다 앞선다. 위선을 필요 이상으로 혐오한다. 보수파가 하면 괜찮을 일도 개혁파나 진보파가 하면 펄펄 뛴다. 영세 자영업자들은 한국 진보세력의 주요 구성원인 대기업 노조를 어떻게 생각할까? 김헌동 경실련 국책사업감시단장의 다음과 같은 고언에 공감하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많다면, 과연 누구의 보수성을 탓해야 할까?

● 대외의존도와 쏠림 현상 때문
"민노당이나 민노총을 보자. 대한민국 1,500만 노동자의 10%도 안 되는 귀족형이다. 그 10%도 다 재벌기업, 보수기업, 공기업, 언론, 교사, 병원 등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의 종사자들이다. 1,000만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단체가 없다. 1,000만 명에 육박한 비정규직을 위한 조직도 사실상 없다. 민노당, 민노총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주장하지만, 자기 것을 내놓으려고는 안 한다. 내 건 빼앗지 말고 소수에게, 권력자에게, 자본가에게 저들(비정규직)을 위해 더 내놓으라는 식이다. 유럽을 봐라. 자기 근무 시간 줄이고 하면서 같이 하지 않는가."(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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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om 텅 빈 세상에 2007-10-19 13:15 
    위선을 필요 이상으로 혐오한다
 
 
biosculp 2007-10-17 12:29   좋아요 0 | URL
동의하기 힘든점이 초고속개발로 인해 극심한 불평등이라지만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부 이전이 상하 격차가 다른 어느 선진국보다 적은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격차가 민주정부들어 더 심해졌고. 선진국의 경우 공무원이 비율로 우리보다 10% 높습니다. 자영업자 비율이 줄어든면 그비율 그대로 공무원으로(복지파트로)흡수 되는 꼴이죠.
지금 연금, 보험료 등등 따지면 세금으로 30%정도 내고 있고. 여기에 중산층들 자녀교육에 소득의 20%이상 들어가고 주거비 이자까지 합치면 선진국에 내는 세금 이상의 비용을 지불하면서 한국에 살고 있는데요.
좌파우파애기 이전에 나라 운영 잘(이게 힘들지만)만 하면 극우인 명박이 아래에서도 잘 살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박노자 애기. 명료한것 같기는 한데 현실과 유리된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로쟈 2007-10-17 15:55   좋아요 0 | URL
강준만 교수의 칼럼도 옮겨놓았습니다. 한국적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말씀하신 '현실과 유리'에서 그 현실은 '한국적 현실'일 테니까요...

마립간 2007-10-19 11:17   좋아요 0 | URL
일부의 글을 저의 서재로 옮깁니다.
 

<황금 노트북>도 다시 출간되는 김에 이 노벨상 수상 할머니 작가의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풀잎은 노래한다>도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그렇게 될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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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의 회고록
도리스 레싱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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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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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10-16 23:52   좋아요 0 | URL
어물쩍 거리더니, 노벨문학상을 받으니 빨리도 재간되네요.
그런데 생존자의 회고록은 역자가 전과 같네요. 아무래도 번역은 몰라도 오탈자나 고친 수준이겠죠?.

리뷰에 번역자가 올린 글도 있긴 하지만, 아쉬운 느낌이 드는 번역이였는데... 뭐 원서와 대조해서 꼼꼼히 읽고 판단한 능력이 안되니 번역에 대해서는 별말 하면 안되는지도 모르겠군요.;;

로쟈 2007-10-16 22:44   좋아요 0 | URL
오탈자라도 바로 잡고 나오면 다행일 성싶은데요. 수상 발표가 나자 마자 바로 찍어낸 책이니 그럴 여유도 없었을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