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로 소설가 편혜영씨가 선정되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수상소식이라 덩달아 반갑다. 작가와 사소한 안면이라도 터둔 것이 반가움의 크기를 조금 더 키워주는지도 모르겠다(딱 한번 만나본 인연이지만, 자랑하자면 나는 작가가 보내준 사인본을 갖고 있다). 몇 차례 관련 페이퍼를 올려두었기에 따로 군말은 적지 않고 관련 인터뷰기사와 선정이유서를 옮겨둔다.

한국일보(07. 11. 16)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편혜영'

#엽기적 소설을 썼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야. 계산적이고 치밀하고 정확해. 자기 몸 하나가 있고 그 반(半)만 갖고 소설을 쓰는 것 같아. 그 반으로 자기를 넘어서려는 거야.(김윤식 본심위원)

12일 오후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 모인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위원(김윤식 임철우 황종연)들은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에서 소설가 김애란씨가 편혜영씨에 대해 쓴 글을 화제에 올렸다. 글엔 이런 전언이 있었다. 편씨가 스무살 때 모친상을 치른 직후 밥을 지으려 쌀통을 열었는데 기다랗고 하얀 애벌레가 꿈틀대고 있었단다. 겨우 쌀을 씻어 아버지께 상을 차려 드렸지만 자기는 며칠간 집 밥을 먹지 못했다고.

황종연 위원이 말을 이었다. “첫 소설집 <아오이가든> 때 편혜영 소설은 잔혹동화 같은 느낌이었다. <사육장 쪽으로>에선 사무원의 세계가 등장한다. 실제 작가 자신이 애써 진입한 세계이자 공인된 세계다. 그런 세계를 금 가게 하고, 연신 독자를 허방짚게 만든다. 사무원인 동시에 소시민인 자로서의 양가감정이 독하다. 이 사람, 작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잔혹의 미학이 영롱한 편혜영의 ‘하드고어 원더 랜드’(평론가 이광호)가 구별짓기의 제스처가 아닌, 진정성 있는 한국문학의 신천지임을 확인한 이상 본심위원들에게 수상작 결정을 늦출 이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고 나지막히, 알아보았다는 듯이, 그러나 들킨 것은 아니니 안심하라는 듯이, 자기도 함부로는 질색이라는 듯이,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더랬다.(소설가 이신조)

13일 오후 수상자 인터뷰를 위해 편씨를 만났다. 그가 6년째 근무 중인 서울 광화문의 직장 맞은편 커피숍에서였다. 단정한 검은색 정장 차림에 ‘파버카스텔’ 브랜드의 샤프펜슬을 가늘고 긴 손가락에 쥐고 마주앉은 편씨와의 대화는 편안하면서도 낭비가 없었다. 그는 듣고 이해하는 일에 능숙했고, 간결하고 요령있게 답할 줄 알았다. 그의 소설에서 감지한, 오감을 집요하게 자극하는 예민함과 밀도 있는 건조체 문장을 고집하는 단단함에 비춰 자연인 편혜영을 예단한 일은 (앞의) 반은 틀리고, (뒤의) 반은 얼추 맞았다. 스스로는 “약간의 무대 공포가 있고, 좌중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편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어떤 형태로든 계속 노동을 해왔다”고 말했다. 2년간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소설이든 뭐든 쓰고 싶다’는 욕구를 좇아 뒤늦게 서울예대, 한양대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도 꾸준히 부업을 했다. 석사학위를 받은 해 현재의 직장에 입사, 이젠 팀원 여럿을 거느린 팀장이다. 4남매의 막내임에도 ‘막내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일하시느라 늘 바빴다. 어리광을 피우는 걸 잘 못한다. 부탁했다간 거절 당할 것 같다는 심리가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턴 출가한 언니들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편씨는 문학을 일상으로 여기는 듯 보였다. 쓰는 일을 밥 먹고, 출퇴근하고, 청소하고, 잠자는 것과 공평하게 대하는 느낌이랄까. 그는 “주로 집에서 쓰지만 도서관, 카페 등 장소 안 가리고 어디서나 잘 쓴다”고 했고, “계간지 청탁을 받아 3개월에 단편 1편씩 쓰는 일은 직장 생활을 하지만 아주 벅차진 않다”고도 했다. 여기엔 문학에 자신의 전부를 투입해야 한다는 강박적 자세가 묻어나지 않았다. 대신 생활에 단련된 자의 여유와 기품이 있었고, 그래서 신뢰감이 들었다. 어떤 난관에도 일상은 계속되듯, 편혜영 소설도 앞으로 오랫동안 성실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호흡하리란 믿음.

#한국일보문학상 하면 젊은 작가가 내지르는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맞장구쳐주는 상이란 느낌이 들어요. 바로 그 상을 젊은 시절에 받게 되다니, 너무 기뻐요.(편혜영)

등단 7년 만에 받는 첫 상이다. 수상작에 실린 개별 단편들은 작년부터 유수의 문학상에 유력 후보로 자주 거론돼 왔다. 한국일보문학상엔 2005년부터 이미 이름을 올려왔다. 그해엔 단편 ‘시체들’, 작년엔 단편 ‘사육장 쪽으로’가 본심 후보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편씨는 소위 ‘2000년대 작가’로 분류되고, 스스로도 그 점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동세대 작가들의 문학적 경향을 ‘개성’이라고 말했다. “선배 작가들에겐 전쟁, 이념, 부정해야 할 아버지와 같은 명확한 시대적 명령이 있었다. 요즘 젊은 작가에겐 그런 게 없다. 오직 세계를 보는 개성적인 눈으로 존재 증명을 해야 한다. 창작자로선 흥미로운 환경이다.”

편씨는 현재 장편을 구상하고 있다. 내년에 낼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등단 이후 줄곧 단편을 써왔던 그에겐 만만찮은 도전이다. 그는 “장편은 단편과 호흡이 다르다. 날마다 쓰지 않으면 쓸 수 없을 것 같다”며 긴장의 일단을 내비쳤다. 그 말을 들으면서 미안하게도, 전혀 걱정스럽지 않았다. 이러구러 생활에 충실하다보면 내년이 가기 전 서점 한복판에 놓인 편혜영의 멋진 첫 장편을 보게 되리란 생각만 들었다. 일상의 기시감은 강렬하고 그녀는 재능있고 성실하다.(이훈성기자)

■ 왜 편혜영인가(선정이유)

올해 한국일보문학상에는 예년과 달리 장편이나 단편 작품이 아니라 한 권의 장편소설을 포함한 여섯 권의 소설이 후보작으로 뽑혔다. 장편과 단편을 대등하게 간주하는 것은 무리이니 단편의 경우에는 한 편이 아니라 단편집을 후보작으로 내는 것이 좋겠다는 예심위원들의 합의에 따른 결과라는 해명이 있었다.

이렇게 단편집을 심사 대상으로 삼게 되면 저자의 전반적인 창작 기량의 수월성 또는 '문학 세계'가 특정 작품의 우수성 못지않게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된다. 따라서 본심의 부담은 상당히 커진 셈이지만 예심위원들의 안목 덕분에 우리는 후보작으로서 손색없는 소설들을 대상으로 검토를 시작할 수 있었다.

김훈의 <남한산성>, 윤성희의 <감기>,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 천명관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 이상 여섯 권의 후보작은 각자 개성이 뚜렷하고 그 나름의 특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우열을 가늠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만 우리는 한국일보문학상이 경력, 연고, 평판 등 이런저런 이유에서 응분의 평가를 받지 못한 작가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왔으며 그것은 앞으로도 계승할 가치가 있는 전통이라는 점에 유념하기로 했다. 또한 단편집의 경우 수록된 작품들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균일하고 '문학적인 것'을 둘러싼 의식의 고투가 치열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에 주목하기로 했다.

본심은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에 대해 각자 소견을 밝히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각자 의견을 내놓고 나니 어느 소설로 하자는 말은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다. 편혜영 씨의 단편집 <사육장 쪽으로>가 논란 없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편혜영 씨의 단편들은 경제적으로 제어된 서술, 정교한 디테일을 통한 암시, 통일된 인상의 창출 등과 같은 단편소설의 고전적 규범을 정확하게 습득한 바탕 위에 씌어진 것이다.

작년 한국일보문학상의 유력한 후보작이었던 표제작은 물론 그 밖의 단편 모두 현대의 삶에 대한 은유를 이루는 여러 가지 상황을 박진감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 상황의 핵심은 겉으로는 정연한 듯한 인간 세계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어느 순간 인간 현실을 현실이 아니게 만드는 불확실성의 출현에 있다.

편혜영 씨는 한 작품에서 잡초와 들쥐가 침입하지 못하는 단단한 집을 원하던 부부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습지에 빠져죽게 만들었듯이 일상생활의 조건을 이루는 현실의 범주들이 어떤 원초적인 미혹에 먹혀버리는 광경을 기괴한 방식으로 포착한다. 그리고 모든 의미와 상징의 질서를 헛것으로 만드는 집합적 무의식의 심층을 냉혹하게 파고든다. 인간의 내부, 그 암흑의 핵심을 향해 이토록 깊이 시추를 내린 작가는 우리 문단에 흔치 않다. 한국일보문학상이 편혜영 씨의 외로운 탐구에 격려가 되길 바란다.(본심위원 김윤식 임철우 황종연)

07. 11. 15.

P.S. 작년 겨울인가 문단의 한 송년회 자리에서 편혜영, 김애란 두 작가와 잠시 합석을 한 적이 있다(김애란씨는 이미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터이므로 안 그래도 절친한 두 작가는 이제 한국일보문학상 '가족'이 되었다). 마침 하반기에 두 작가가 쓴 작품들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터라 나대로의 상찬을 늘어놓았던 듯하다. 올해 두 사람은 나란히 작품집을 냈고 또 내게도 나란한 책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사육장쪽으로>(문학동네, 2007)와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를 나는 두 권씩 갖고 있다(딸아이에게 가보로 물려주어야겠다). 따로 인사를 전하지 않았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 두 작가의 후의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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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1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혜영의 작품은 이효석 문학상 수상집에서 읽어본 '분실물'이 전부인데, 참 촘촘하면서도 깊숙히 파고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인상적인 작품이었답니다. 사육장쪽으로,에도 관심이 가네요- 근데 편혜영작가, 예쁜데요? ㅎㅎ

로쟈 2007-11-16 08:58   좋아요 0 | URL
실물이 더 낫습니다.^^

송연 2007-11-1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분실물을 읽고는, 다시한번 책에서 그녀의 이름을 확인케 되더군요.
문체는 단순하지만, 그러한 필치가 내용을 이끌어가는데 더 이점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한 작가마다 여러 글쓰기의 방식들이 있겠지만 편혜영씨는 상황에 따른 내면의 정확하고 세심한 묘사를 통해 독자를 흡입할줄 아는 스킬을 지닌 작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뜻 카프카의 느낌도 들었었구요.
그런데 로쟈님, 궁금한것이 한가지가 있어요,
많은 이들이 김애란을 칭송하더군요, 하지만 그의 대표작 두권을 읽고난 후에 들은 저의 생각은, 작가로서의 상상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그녀의 사적 경험들을 글 속에 많이 투입시켰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네요, 물론 그러지 말란 법도 없고 개인적 경험이 작품을 쓰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녀같은 경우는 너무 티가 나는 것 같았네요... <침이 고인다>는 특히 더욱요.
그리고 <달려라 아비> 같은 경우는 신문 사설들을 꼼꼼히 읽은 작가지망생이 자신의 문장력을 어법에 맞게 잘 구성하려고 분투한 듯한 느낌을 주었구요, 제가 '나이'에 대한 선입견같은것은 없지만,(게다가 그정도의 나이면 먹을만큼 먹은 나이이구요) 그녀의 작품들을 읽으면 왠지 설익은 단감을 먹고 있는듯한 착각이 듭니다. 저만 잘못 생각하고 있는걸까요?;;

로쟈 2007-11-19 12:27   좋아요 0 | URL
'잘못 생각'하실 리는 없지요. 저마다의 취향과 판단의 기준이 있는 것이니까요. 김애란 작가의 경우 많은 독자들에게 어필한다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가난'에 대한 그녀의 감각입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시 한편을 올려놓는다. 이 또한 십수년 전쯤에 쓴 것 같다. '車에 실려가는 車'는 김영승 시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극한

1  
극한이란 어떤 양이 일정한 법칙 밑에서 점차 값이 변하여 달하려고 하는 일정한 양을 말한다. 

2
삶의 극한. 으아, 삶의 맨끝! 끝자리가 틀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정말 이런 편견들은 끝장내야 한다. 

3
'극’은 車에 실려가는 車를 닮았다. 말하자면 車의 끝장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 車를 끌어내려 보자. 그그그그 ‘그’(덜컹!) 

4
이제 그걸 맨앞에 갖다 놓으면 ‘그-ㄱ’이 되겠지. 아무래도 이건 발음이 곤란하다. 이때는 대개 ‘ㅇ’을 붙여 읽는 것이 요령이다. 트림하는 기분으로 ‘그-윽’(좋군!) 

5
고물차 한 대 때문에 더 나빠질 교통체증도 이미 아니므로 우리는 ‘극’한 상황을 ‘그윽’한 상황으로 바꾸겠다. 

6
그윽한이란 어떤 양(♂)이 일정한 법칙 밑에서 점차 값이 변하여 일정한 음(♀)에 달하려고 할 때의 은근한 느낌을 말한다.(이 부분은 자유로운 상상에 맡긴다.)

07. 11. 14.

P.S. 흠, 주말엔 <색, 계>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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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7-11-15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물리학적인 시라 잘 이해는 안 가지만.. 그윽한 트림은 참 좋군요.
저렇게 감질나게 코 끝이 맞닿은 자세에서는 아무래도 덜 그윽하겠지만요.

사족이지만, 오늘의 로쟈님은 어제의 로쟈님과 달라 보입니다.^^

로쟈 2007-11-15 00:34   좋아요 0 | URL
그래서 애써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닉네임을 바꿔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마늘빵 2007-11-15 09:12   좋아요 0 | URL
글 보면 금방 티 납니다. ㅋㅋ 그냥 쭉 가세요. :)

로쟈 2007-11-1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수사대까지 동원한다시니까 쭉 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대신 분가할 궁리는 하고 있습니다.^^;
 

발레리의 <말라르메를 만나다>가 나온 김에 말라르메의 시집과 관련자료들을 들추게 됐다. 보들레르와 말라르메의 시인관에 대한 짤막한 에세이도 시간이 나면 써보고 싶다. 몇 권 안되는 관련서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프랑스 현대시사- 보들레르에서 초현실주의까지
마르셀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2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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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스테판 말라르메 지음, 황현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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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신의 오후
말라르메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1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07년 11월 14일에 저장
품절

말라르메를 만나다
폴 발레리 지음, 김진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6,000원 → 5,400원(10%할인) / 마일리지 3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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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15 12:37   좋아요 0 | URL
<신체의 미학>은 저도 갖고 있지 않은데, 기억엔 발레리의 책이 아니라 그의 글이 한두 편 들어가 있는 정도의 책입니다...
 

이번주 시사IN 북섹션에 알라딘 특집기사('독후감 쓰는 사람들')가 실렸고(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8) 지난주 월요일에 가졌던 인터뷰 기사도 함께 게재되었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4). 기사는 어제 아침에 읽었지만 온라인에는 주말께나 올라올 걸로 예상했는데, 웬걸, 이미 올라와 있고 시비돌이님이 옮겨놓으시기까지 했다. 쑥쓰러운 일이지만 부랴부랴 나도 옮겨놓고 몇 가지 '해명성' 발언을 덧붙인다. 기억에 인터뷰 요청은 그 전 주말쯤에 받았고 월요일에 바로 시간약속을 잡았었다. 기사는 두 시간 남짓 이루어진 인터뷰에 근거한 것인데 약간 와전된 내용도 포함돼 있다. 그건 구어로 이루어진 인터뷰의 '번역'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겠다. 게다가 실제 지면에 실린 것과 온라인 기사는 약간 차이가 있다(여기서는 지면기사에 준하도록 하겠다). 사진은 가급적 찍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죽어도 못찍겠다고 고집을 부리진 않은 까닭에 멋쩍은 흔적을 남기게 됐다...

 

시사인(07. 11. 12) "각종 1위 기록 영광 아니다"

‘알라딘 좀 그만해.’ 초등학교 1학년인 딸 아이가 자신의 등에 그런 메모를 써서 붙여놨더란다. 하루 평균 한두 시간 서재를 관리하는데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도 한다.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인 이현우씨는 필명 ‘로쟈’로 더 유명하다. ‘알라디너’라면 모두 그를 안다고 했지만 그의 명성은 이미 알라딘 공간을 훌쩍 넘어섰다. 최근 시사 잡지에 인터넷 서평꾼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출판사에서도 책을 내자고 찾아와 공을 들이고 있다.  

알라딘 서재가 아닌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대학교에 마련된 그의 공간에는, 책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수납이 난감한 수준으로 책이 많아서이다(*모두 민폐이다). 집에는 약 8000권의 장서가 있고, 대학 공동 연구실 서가에 책을 꽂아놓았는데 그마저도 더 이상 여유 공간이 없다.(*8,000권의 장서라고 했지만 어림짐작일 뿐이고 정확한 건 아니다. 그 중 3000권 가량은 박스보관도서이니 장서로서는 유명무실하다.) 

얼핏 보기에도 전공과 무관한 책이 태반이다(*얼핏 보아서 그런 것이고 연구실에 있는 책들의 상당수는 사실 전공 관련서이다). 며칠 전에는 정가 13만원짜리 <백낙청 회화록>이 도착했는데 누가 보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더란다(*이 책을 받은 날 인터뷰를 해서 잠시 화제에 올린 것이다. 며칠 뒤에 알고보니 지인이 선물로 보낸 것이다. 물론 그 인연의 시작은 이 서재였으니 알라딘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처럼 얼굴을 모르는 기부자가 꽤 된다(*'아주 드물게'라고 강조했건만, 기자는 '꽤 된다'고 옮겼다).

알라딘에는 자신의 적립금으로 고마운 이에게 책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데 가끔 로쟈의 글을 보고 좋았다는 이들이 책을 보내오는 것이다(*'땡스투' 시스템과 독지가들의 '기부'사례가 혼합/혼동돼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땡스투'로 '블로그 수익'을 얻기도 하는데 수익이라고 하기엔 곤란한 수준이라는 것과 일부 독지가나 출판사가 책을 보내주는 경우도 아주 가끔 있다, 는 정도가 내가 한 말이다). 그의 평판을 듣고 책을 보내는 출판사도 생겼다. 어느 출판사는 ‘책을 보낼 테니 포털 등에 책 리뷰를 노출해달라’고 했다. 물론 거절했다. “뭐, 책이 좋으면 쓰고 아니면 마는 것이지 보내기도 전에 뭘 써달라고 하다니, 참 영업 마인드 없더라고요”라며 그는 웃었다.(*사실 나는 서평단모집에 신청해서 받은 몇 권의 서평도서들에 대해서 한편의 리뷰도 쓰지 않았다. 처음 두어 권은 실망해서였는데, 나중엔 그냥 '떼먹고' 이후엔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 이건 '오프더레코드'다.) 

그러니 책값의 대부분은 자기 수입에서 충당한다. 인기 없는 학과의 시간 강사인 그는 요즘도 한 달 평균 50만원, 많을 때는 100만원어치쯤 책을 구매한다(*오해를 살 수도 있는데, 나는 '인기 없는 학과'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인문학 동네의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다 보니 그런 인상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아내는 ‘책과 결혼하지 그랬느냐’고 볼멘소리를 하기 일쑤이고, 참다 못해 인터넷 서비스를 끊어버리기도 했다(*몇 차례 쫓겨날 뻔도 했는데, 이러한 가정분란의 상당한 책임은 알라딘에 있다).

그는 어떤 책을 읽을까? 본인 표현에 따르면 ‘어린이 처세 만화 실용서를 제외한’ 책들이다. 인문학 지형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책이 그의 그물망에 걸리는 셈이다(*이런 그물이야 누구나 칠 수 있다. 당신도 매일 30분 이상씩 도서검색을 해보면 된다). 책 소개뿐 아니라 저자에 대한 단상, 문체에 대한 단상, 그리고 인문학 논쟁까지 망라하는 그의 서재는, 말 그대로 ‘인문학 살롱’으로 불릴 만하다(*얼핏 보면 그렇다). 

하루 방문자는 500여 명(*최근 추세로는 600명 안팎이다). ‘로쟈의 저공비행’을 즐겨 찾는 서재로 등록해놓은 이는 줄잡아 1500명쯤 된다(*반올림해서 그렇다. 오늘 날짜로 치면 1385명이다). 그는 “어떨 때는 꽤 오래 각종 순위 집계에서 1위를 하곤 하는데, 결코 영광이 아니다. 나 혼자 이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라고 말했다. 자조는 아니다. 다만 ‘부담을 나누어 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각종 순위집계에서 1위'라는 건 와전된 것이고, 내가 말한 건 '페이퍼의 달인' 같은 데서 1위를 하면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좌절감 혹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즐찾수에 있어서는 1,2위를 다툴지 모른다고 덧붙이긴 했다. 알라딘이 낳은 '최고 스타' 가운데 한명이라지 않은가).  

얼굴 모르는 이들이 책 보내오기도

그의 글은 부드럽지만(*아내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른바 주례사 리뷰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는 철학 서적이나 미학 책을 재미나게 읽는 편이다. 특히 남들이 어렵다는 슬라예보(*슬라보예) 지젝은, 왜 그의 글이 어렵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좋아한다(*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한 건 아니고 다만 안타깝게는 생각한다). 그에 얽힌 일화도 있다. 지젝이 유행이 되다시피하자 번역자가(*'번역서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터무니없는 오역이 눈에 띄더란다. 몇 번 오류를 지적하는 글을 올리고 나자, 어느 순간부터 지젝에 관련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아시다시피 내가 즐겨쓰는 서재 이미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슬라예보(*슬라보예) 지젝은 그가 특히 사랑하는 미학자(*철학자)이다(*지젝은 아직도 대중적인 철학자는 아닌 듯하다. 사랑하는?). 그는 “하나의 유령이 우리의 인문학 동네를 떠돌고 있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그 유령의 이름이다. 그 유령은 이미 지난 2003년 가을에 우리 곁을 다녀가기도 했는바 어느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로 시작되는 리뷰를 쓰기도 했다.

인문학 책을 많이 섭렵하는 그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번역의 질이다(*나는 알라디너로서 유명세를 타게 된 게 주로 최근에 나온 책들 소개와 번역비평 때문일 거라고 했다). “막말로 소설은 빨간 꽃을 파란 꽃으로 번역하면 조금 이상할 뿐 전체 얼개를 흐트러뜨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문서는 개념이나 용어를 부정확하게 번역해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먹을 수 없게 된다.”(*'빨간꽃/파란꽃'도 '번역'된 것이다. 취지야 같지만 내가 보통 쓰는 비유는 '파란눈/까만눈'이다.) 인문학 번역의 경우 인세 계약을 하면 권당 200만원이 고작인데, 번역에 들여야 하는 품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라는 것. 번역에 대한 처우가 워낙 열악하다 보니 질 낮은 번역이 판치고, 그러다보니 독자의 저변을 넓히지 못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재가 널리 알려지면서 공유의 기쁨만큼이나 제약도 늘었다. 학계의 선배나 과거 지도 교수가 그의 서재를 알고 들어오기도 하는데(*'지도교수'는 아니고 예전에 강의를 들은 '교수님들'을 가리킨다), 막상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전공 분야의 책에 대해 까칠한 얘기를 쓰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유명세라면 유명세이다.(노순동기자) 

07. 11. 14.

P.S. 인터뷰와 함께 실린 박스인용도 지면기사와 온라인기사는 차이가 있다. 지면에서는 더 간결하게 처리됐는데, 분량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는 지면기사에 준해서 옮겨놓는다(요약은 마음에 든다). 대표적인 글을 자천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추천수가 많았던 글들을 떠올려봤는데, 오역에 대한 비판이나 최근에 나온 책들 소개 이외에 가장 많은 추천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래의 글이었다. 본문에서 '재작년 6월'은 2004년 6월을 가리킨다. 문득 그 계절의 모스크바가 생각나는군...

김훈, 김규항, 고종석의 문체에 대하여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로쟈의 글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제목으로 재작년 6월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대로 문체가 ‘양파 껍질’ 같은 것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김훈·김규항·고종석이라는 세 종류의 양파이다. 문체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적고자 한다.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얼굴’ 혹은 ‘손가락’을 가진 작가로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훈이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스트이기 전에 언론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표정을 그렇게 바꿔가고 있지만,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김훈은 좀 낯설다. 문학판의 각광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질적으로 ‘소설가의 손가락’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중략).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최근 <남한산성>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평했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이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 바 일상적 디테일, 저자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 장수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중략).

비유컨대,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패장(敗將)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이다. 백전백패를 ‘자랑하는’ ‘패장의 문체’와는 달리, ‘자객의 문체’는 ‘무엇을’에 ‘어떻게’가 복무하는 문체이다. 마치 자토이치의 검술처럼, 그는 짧게 끊어서 군더더기 없이 급소들만을 공격한다(중략).

나에게 ‘덜 나쁜 사회’의 의의를 가르쳐준 이는 기자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소설가인 고종석이다. 그 또한 ‘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문체는 화려하지도 간결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백하다. 그리고 상식적이다. 전라도 사람으로서 ‘서얼의식’은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특별한 트라우마나 결벽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논리적이지만, 모나지 않고 둥글다. 따라서 그런 그의 문체가 소설이란 장르와 잘 어울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김훈이 소설을 못 쓰고, 김규항이 소설을 안 쓰는 데 반해 고종석은 소설을 잘 쓴다. 이 세 ‘글쟁이’를 내 식대로 분류하자면, 김훈은 ‘예술가’이고, 자칭 ‘출판인’이어서 ‘출판운동’을 하는 김규항은 ‘운동가’이며, 고종석은 ‘지식인’이다.

(원 글은 이 분량의 열 배가 넘는다. 그의 문체를 희생할 수 없어 군데군데 덜어내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반드시 원문 전체를 보기를 권한다. 원제: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 출전: 로쟈의 저공비행 http://blog.aladin.co.kr/mramor/84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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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from 2007-11-14 20:39 
    시사 IN을 읽다가 들렀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분들이 참 부러웠는데 고수를 만난 느낌입니다. 좋은 책 많이 읽고 좋은 글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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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15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사인을 읽으며..알라디너 모두,우리식구들처럼 살갑게 느껴지던데요.^^ 로쟈님은 알라딘의 삼촌?,어떤가요.ㅎ 알라딘에서 오래 뵐 수 있기를..기대합니다.로쟈님,파이팅!

로쟈 2007-11-15 12:38   좋아요 0 | URL
어디 가려고 해도 알라딘이 데려다줘야 말이죠.^^;

이네파벨 2007-11-15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왓 오랜만에 서재에 들어왔더니 이렇게 실한 정보를!!! 인터뷰 추카드리고요~ 사진도 멋지고요~ 앞으로도 계속 멋진 서재 가꿔나가시기를........부탁드려요^^

로쟈 2007-11-15 12:38   좋아요 0 | URL
이네파벨님도 좋은 책 많이 내시길.^^

몽당연필 2007-11-15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본색...인가요??
알라딘 외 다른 인터넷서점에서도 로쟈님 글 보니까 무지 반갑던데...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셨군요.
멋집니다!!
그나저나 로쟈님은 따님을 두셨네요. 전 초등1학년 머슴애인데...요즘들어 말을 안들어서 미워죽겠어요. ㅠㅠ

로쟈 2007-11-15 22:10   좋아요 0 | URL
제가 다른 인터넷서점에서도 '활동'하나요?? 제 딸은 저를 미워한답니다.^^;

20donald 2007-11-1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시사 IN을 읽다가 들어왔습니다..저랑 비슷한 분이 있네요..^^
좋은 글 계속 많이 남겨주세요.. 즐겨찾기로 해놓고 자주 들르겠습니다..

로쟈 2007-11-15 22:09   좋아요 0 | URL
책을 좋아하시나보군요.^^ 종종 들르시고 유익한 조언도 남겨주시길...

ryu8737 2007-11-16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일주일동안 여행을 갔다왔더니 이런 일이~ 로쟈님이 궁금해서 소문(스토커는 아닙니다. 단순히 궁금해서 ^^)을 사서 보았던 기억이 있었는데... 사진까지 올라왔네요.
비평고원에서 로쟈님을 글을 보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7-11-16 19:46   좋아요 0 | URL
제가 <소문>을 몇 권 팔긴 했네요.^^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aisms 2008-01-29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블로그에 올라있는 사진만 보고 제가 알고 있는 로쟈가 외국인이었나 하고 잠시 놀랐더랬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한번은 뵙게 되겠지요. 그러려면 미리미리 지젝의 책 한 권이라도 읽어 둬야 겠지요. 고도를 더 높여 서평 문화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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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몇 차례 다룬 것이지만, 영국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저작이 일년 사이에 지난 일년 사이에 3권이나 번역돼 나왔다. <우리시대의 비극론>(경성대출판부, 2006), <성자와 학자>(한울, 2004),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이 그 세 권의 책이다(<성스러운 테러>에 대해서는 두어 차례 페이퍼를 쓴 바 있다). 마침 연세대 대학원신문의 기획서평으로 '테리 이글턴 새롭게 읽기'가 다루어졌기에 자료삼아 옮겨놓는다(출처는 담비이다 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7135). 개인적으론 지난 겨울에 읽지 못하고 미뤄놓은 <우리시대의 비극론>을 이번 겨울에 읽을 계획이다(사실 원서를 찾지 못해서 미뤄놓았었다). 관심있으신 분들도 서평을 빌미 삼아서 독서계획을 꾸려보는 게 좋겠다.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6호) '세련된’ 변증법이 아닌, 현실에 밀착된 변증법을 향하여

아일랜드 출신인 테리 이글턴의 첫 저서는 『망명자들과 이민자들: 근대 문학 연구』(1970)이다. 이 책은 제대로 된 20세기 영국문학은 영국 본토 출신 보다는 아일랜드 출신(제임스 조이스, 예이츠), 폴란드 출신(콘래드) 등 제3세계 출신이거나 영국 내의 제3세계라고 할 수 있는 빈한한 탄광출신 (D. H. 로런스)이거나, 미국에서 영국으로 귀화하거나(T. S. 엘리어트) 영국에서 미국으로 귀화 (W. H. 오든) 했던 작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문화주의가 횡행할 때에도 이글턴은 어디까지나 ‘우선적으로 계급과 민족을 거쳐서만’ 문학과 예술을 논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것이 이글턴적 맑스주의의 특이성을 구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노동계급 출신과 아일랜드 출신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70년대 중반은 이글턴이 한참 알튀세를 받아들여서 매우 ‘영국적인’ F. R. 리비스의 이른바 휴머니즘적 문학이론 및 비평을 비판하고 나서던 때였다. 『비평과 이데올로기』(1976), 『맑스주의 문학이론』(1976) 등이 이 시기의 저서이다. 그 후 『발터 벤야민, 혹은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1981)와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 이론 등을 소개하는 『문학이론입문』(1983)을 쓰면서는 이전의 이른바 ‘과학주의적’ 비평에서 탈피하여 정치적 비평, 수사학적 비평을 주창하고 나섰다. 물론 이전의 작업에서 이미 ‘문학’과 ‘작가’의 아우라는 ‘생산’이라는 이름하에 탈신비화된 것이지만, 더 나아가 문학교육 및 연구제도 자체의 정치성을 전면화하면서 특히 ‘영문학’, ‘정전’ 등이 푸코적인 ‘권력’ 관계에 의하여 ‘구성’된 것임을 드러내었고, 그 파급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치적’ 비평을 표방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푸코 이래로 모든 것이 ‘이미’ 정치적임이 밝혀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정치적’ 비평은 ‘더’ 정치적이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질적으로 다른 ‘정치’를 말하는 것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정치적임을 계속적으로 주장해야 하는 것인지 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글턴이 이론적으로 명쾌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른바 헤겔주의적 혹은 아도르노적인 ‘정치성’(프레드릭 제임슨을 포함하여)은 ‘변증법’이라는 밤에 모든 대립을 해소해버린다고 비판하는 점에서,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저 계급적이고 민족적인 거친 현실, 그것을 직시하는 바로 그것이 정치라고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저 세련된 변증법이 밥 먹여주냐’라는 것이다. 이는 브레히트의 거친 진실, 혹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세속적’ 비평과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가장 생존과 직결되는 이 너무나 ‘자명한’ 것들이 ‘이론’과 ‘언어’라는 이름으로 증발되기 일쑤라는 점 또한 이 후기 자본주의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

『성자와 학자』(1987)라는 소설은 풍자와 위트라는 수사학을 동원하여 아일랜드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하는 한편, 그 참상이 참상임을 전달하는 데 있어 언어가 갖는 한계의 문제를 다루고, 1916년 부활절 봉기의 현실과 그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이 과연 헛된 죽음인지 아닌지를 논구하고 있다. 미하일 바흐친의 형인 니콜라이 바흐친은 먹고 마시는 데 탐닉하는 그야말로 바흐친적(카니발적) 인물인가 하면, 동성애적 욕망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내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여기에 아일랜드 시민군 총사령관 제임스 코널리가 총살당하기 직전에 이들과 잠시 합류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코널리의 행위도 하나의 ‘언어 게임’이라고 주장한다. “그건 아마도 육체의 언어, 다시 말해서 죽음, 순교, 부활의 언어라고 부를 수 있겠죠. 다른 모든 언어를 번역해낼 수 있는 한 개의 순수한 언어요.” 이글턴의 결말에 의하면 코널리는 총살당함으로써 결국 하나의 언어로만 남지만, 그것은 “새 공화국의 탄생을 알리는 첫 울음소리”가 되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앞에서 통렬한 패배감에 사로잡힌다.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면 나는 끝장이다. 만약에 저 작자가 성공한다면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글턴은 실재 앞에서 언어는 무력하지만, 그 무력하다는 사실 또한 언어를 통해서 말해진다는 역설에 주목한다. 결국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 그의 노력의 상당 부분은 부르주아 혹은 우파가 전유물로 사용하는 언어를 해체하고 탈환하는 작업에 쏟아진다. 이는 단순히 미학적, 혹은 문학적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학 및 문학을 적극적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은, 문학 및 문학제도를 탈신비화시키고 정전논쟁과 ‘문학에서 문화로’라는 슬로건을 촉발시킨 장본인이 어째서 과거의 미학이나 문학에 ‘집착’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셰익스피어나 콘래드를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구현되어 있다고 비판한 다음 내치기보다는 역사와 정치의 장으로 끌어내어 수사학적 설득의 자료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가 넘나드는 영역은 광범위하다. 철학, 미학, 역사, 소설, 시, 희곡 등 그가 ‘정치적’ 수사를 위하여 동원하는 언어와 텍스트의 집적체는 방대하고, 특유의 신랄함과 위트로 무거운 주제들을 적절하게 요리하여 전달하는 재능은 놀라운 바가 있다.



비극을 낳는 실재로서의 자본주의

『우리 시대의 비극론(원제:달콤한 폭력?비극의 사상)』(2003)은 비극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비극론에 대하여 반기를 든다. 비극의 핵심이 죽음, 순교, 속죄양, 정화, 부활 등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신화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고통당하고 죽음을 당하며 내쳐지는 사람들이 있는 한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하나같이 그 안에 역설을 포함한다. 죽음과 순교는 각자의 몫으로 일어나지만, 공동체의 생존과 재생에 관여하고, 그것은 다시 말해 그러한 죽음을 필요로 할 만큼 공동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포는 개개의 폭력적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죽음이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전지구적 체계 즉 실재 자체가 공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이글턴은 비극이란 치명적인 하마르티아를 가진 영웅적 인물이 운명적으로 몰락하되 실재에 대한 비전을 얻는 것이라는 식의 비극론에 내재한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비극을 지금 이 시대에 전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핵심을 지구적 자본주의의 작동에 없어서는 안 될 희생양들, 박탈당한 다수의 계급현실에 두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글턴의 수사적 전략을 읽어 본다면, 비극이라는 고급화되어 있는 장르의 핵심을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부여함으로써 그 숭고함을 이 계급에게 돌리는 한편, 이 비극을 낳는 ‘실재’로서의 자본주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헤겔적인, 더 변증법적인

『성스러운 테러』(2005)는 이 비극론의 연장선상에서 종교와 윤리의 문제를 좀더 적극적으로 다룬다.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하고 있듯이 윤리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한다는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해결이 가로막혀 있다는 징후일 수 있다. 이를테면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부르주아가 완전히 패권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기대가 전무하던 시대에 박애주의에 기초한 종교분파들이 극성을 부리던 것을 상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윤리의 언어를 먼저 장악하는 쪽은 지배계층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유와 정의와 평등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글턴은, 이 말들을 그냥 저들이 가져가 마음대로 쓰게 내버려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치 니체가 선악의 계보를 따라가서 그 계급적 성격을 밝혀내듯이 계보학적으로 추적하고 해체하여, 탈환해야 것은 탈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테러라는 말은 지배계급이 그 타자에 대하여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런데 계보학적으로 따져 올라가보면 (이글턴은 아감벤의 작업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것은 희생양이 가진 ‘성스러움’의 이면이다. 이 양면성이 서로 분리가 되면 희생을 위한 희생이 되어버리거나, 폭력을 위한 폭력이 되어버려 단지 죽음충동의 먹이가 되고 만다. 아니면 희생과 폭력이 도구화되어 버려 그 성스러운 성격을 잃고, 목적과 수단이라는 이원론의 끝나지 않는 지리한 갈등 속에서 ‘테러리즘’이 된다.

이글턴은 데리다처럼 죽음 자체에 뭔가 불가해한 신비적인 측면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이 갖는 성스러움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삶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개인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접근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알랭 바디우와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른바 인간성 내지 ‘인권’을 본질화하게 되면 또다시 근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고 이것은 다시 다른 것을 수단화하는 테러리즘으로 갈 수 있음도 경계한다. 어쩌면 이글턴의 작업은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헤겔적인 것과 변증법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젝을 경유한 (지젝은 다시 라캉을 경유한다) 것이기는 하지만 헤겔이 이전보다는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보다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이경덕 연세대 영문과 강사)

07. 11. 13.

After TheoryFigures Of Dissent

P.S. 적어도 이글턴의 책 두 권 정도가 앞으로 국내에 더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내년에는 나올까?). <이론 이후>와 <반대자의 초상>이 그 두 권의 책이다. 하니 올해 나온 책들은 미뤄두지 말고 미리미리 다 읽어두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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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1-13 21:08   좋아요 0 | URL
<우리 시대의 비극론> 정도는 저도 읽어보려 합니다..

로쟈 2007-11-14 08:28   좋아요 0 | URL
확인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