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1670896)의 한권으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책세상, 2007)을 올려놓았었는데, 잠시 인사치레의 자료를 옮겨놓는다. <모나드론>은 지난봄 한겨레의 '고전 다시읽기'에서 다루어졌고 이 글은 단행본 <고전의 향연>(한겨레출판, 2007)에 재수록되었다.

한겨레(07. 03. 03) 내 안에 너 있고 네 안에 나 있다

현대의 철학은 근대 철학이 남긴 유산을 잇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직시하고 또 그 ‘말류’가 남긴 문제점들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과 탈근대 사이에는 미묘한 연계선이 형성되고 있다. 우리는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거기에서 어떤 유산들을 길어 올릴 수 있다. 근대의 사유들은 전통을 뿌리 채 부정하곤 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근대와의 대결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는 현대 사유는 근대가 버렸던 전통을 새롭게 음미하고 거기에서 결코 버릴 수 없는 요소들을 새롭게 발굴하는데 일정한 노력을 바치고 있다.

‘전근대’와 ‘첨단’ 동시에 갖춘 철학
서구 철학사에 눈길을 맞출 경우, 우리는 그 ‘전통’의 마지막에서 라이프니츠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서구 전통 철학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형이상학자이다. 서구 형이상학은 헬라스(그리스)에서 꽃피었고 중세로 이어졌으며, 17세기에 이르러 다시 한번 꽃피게 된다. 그 후 ‘계몽사상’에 의해 매도되지만, 독일 관념론을 거쳐 니체, 베르그송을 시발점으로 다시 세 번째 아름답게 개화하기에 이른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라이프니츠는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철학자라는 위상을 가진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시대를 분열의 시대로 보았다. 30년 전쟁으로 대변되는 종교전쟁이 전 유럽을 휩쓸었고, 갖가지의 분열상들이 팽배했다. 라이프니츠가 ‘종합’과 ‘조화’의 사유를 펼친 데에는 이런 유럽의 상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채로운 존재들을 포용할 수 있는 철학, 이질적인 존재들을 조화 속에 화해시킬 수 있는 철학을 모색했다. 그의 사유에는 논리학, 자연철학, 인식론, 정치철학 등등 여러 계기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모든 요소들이 종합과 조화/화해의 존재론으로 귀결된다.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그의 <모나드론>에 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주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소략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라이프니츠는 거대한 종합을 추구한 그의 사유 내용과는 상반되게 글 자체는 간략하게 쓰기를 즐겨했다. 그 자신이 너무나도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저작들을 쓸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그 누구의 글들보다 논리적으로 정치하며 압축적이다. <모나드론>은 짧지만 그의 사유 전체를 조망해 주는 저작으로 손색이 없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한 개체를 규정해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개체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전통 철학은 ‘제작’을 모델로 한 경우가 많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고, 중세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7세기 철학 역시 세계를 제작 모델로 보는 사유를 벗어나지 못했다. 제작 모델이란 어떤 조물주가 있어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사상을 말한다. 라이프니츠 역시 이런 신학적 구도 아래에서 사유했으며, 모나드가 일종의 ‘설계도’로 이해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이프니츠는 낡아빠진 형이상학의 대명사이기도 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황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생각들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낡아빠진 그 만큼이나 또한 참신한 철학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들은 ‘전근대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맥락을 달리 해서 읽으면 바로 그 만큼이나 ‘첨단의’ 얼굴을 띠기도 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설정한 관계를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로 이전함으로써 가능하다. 생명체들이 ‘설계되었다’는 신학적 구도에서 기계들이 ‘설계되었다’는 보다 설득력 있는 구도로 옮겨감으로써, 우리는 현대 문명을 읽어낼 수 있는 참신한 존재론으로서 라이프니츠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한 개체“의” 본질이다. 이 말은 서구의 전통 철학의 도식에 비추어볼 때 놀라운 면이 있다. 왜일까? ‘본질’이란 개체성을 넘어서는 보편자의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인간의 본질, 나무의 본질이라는 말은 써도 철수의 본질, “저” 나무의 본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철수의 곱슬머리, 거무스름한 피부, 유난히 명랑한 성격 등등은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본질’이라는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한 모든 개인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성격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철수의 본질, “저” 나무의 본질 등을 말한다. 본질을 나타내는 영어 표현인 “~ity”(우리 말의 ‘~성’에 해당)는 개체에는 붙지 않는다. “humanity”는 가능해도 “Jackity”라는 말은 불가능하다. 인간‘성’은 가능해도 철수‘성’은 이상한 표현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사유 구도에서는 바로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이 대목이 라이프니츠 철학의 가장 독창적인 측면들 중 하나이다.

관우 ‘모나드’, 유비·장비 전제로 가능
‘모나드’는 한 개체의 설계도이다. 이 설계도에는 한 개체의 성질들 및 사건들이 내장되어 있다. ‘제갈량’이라는 모나드는 몸을 갖기 이전의 제갈량의 설계도이다. 그것은 제갈량의 성질들(머리카락 색깔, 코 높이, 목소리, 눈빛, 성격 등등) 및 그의 사건들(“유비를 만나다”, “적벽에서 조조를 물리치다”, “오장원에서 죽다” 등등)을 내장하고 있다. 제갈량의 모나드는 이런 성질들과 사건들의 총 집합이다. 그리고 이 모나드가 바로 제갈량이라는 개인의 본질인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조물주가 세계를 설계할 때 단 한 장의 설계도만 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축가가 한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여러 도면들을 그려보듯이, 조물주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무수한 설계도들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설계도를 실현시킴으로써 지금 이 세계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관우의 모나드는 원래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은 다 같은데 청룡언월도가 아닌 방천화극을 쓰는 관우, 다 같은데 수염이 짧은 관우, 다 같은데 적토마가 아닌 다른 말을 타는 관우 등등 현실의 관우와 조금씩 다른 관우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라이프니츠는 이런 관우들을 ‘모호한 관우’들이라고 부른다) 그 중 조물주는 가장 관우다운 관우를 창조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이것은 기독교의 조물주가 세계를 만든 후 “좋았더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의 철학적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대적으로 번역하고픈 충동 느껴
그런데 이런 모나드들은 하나하나 별도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모두 고려해서 만들 수밖에 없다. 예컨대 관우의 모나드만 만들고 유비나 장비의 모나드를 만들지 않는다면 ‘삼고초려’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 사람의 어느 한 모나드는 당연히 다른 두 사람을 전제한다. 또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사람의 모나드가 있다면 필수적으로 패한 사람의 모나드도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매우 세밀하게 내려갈 수 있다. 누군가가 칼로 베었다면 당연히 베인 사람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각 모나드들의 관계는 모두 맞물려 있어야만 성립한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관계를 ‘공가능성(compossibility)’이라고 부른다. 관우의 모나드 안에 “유비를 만나다”가 있어야 하고 유비의 모나드 안에 “관우를 만나다”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두 사건이(사실상 하나의 사건)이 “함께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가능성 개념은 라이프니츠 사유의 심장부에 있는 개념이다. 흔히 라이프니츠 철학을 ‘예정조화’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다소 피상적인 설명이다. ‘예정조화’란 공가능성 개념의 결과로서 성립하는 것뿐이다.

라이프니츠의 사유를 읽다 보면 그의 사유를 컴퓨터, 로봇, 가상현실, 분자생물학 등등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맥락으로 번역하고 싶은 철학적 충동을 느끼게 된다. 모나드는 정보체계로, 그 성질들, 사건들 하나하나는 ‘비트’들로, 설계도들은 가상세계로… 번역할 수 없을까? 현대문명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라이프니츠는 가장 전근대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철학자로서 다가온다.(이정우_철학자)

07. 11. 22.

 

 

 

 

P.S. 그러한 '철학적 충동'의 산물이 서평자 자신이 쓴 <주름, 갈래, 울림>(거름, 2001)과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문학과지성사, 2004) 등일 테다. <모나드론>이 새로 번역된 김에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라고 <주름, 갈래, 울림>을 책장에서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하긴 책들이 하도 쌓여 있어서 무얼 찾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현대적 번역'을 음미하는 일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고, 다만 <모나드론>을 들춰보다가 새삼스레 생각난 번역어 문제에 대해 잠시 적는다. 그건 '우유'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의 모나드가 어떤 다른 피조물에 의해 질적으로 혹은 내적으로 변경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지 또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모나드 내부에서는 위치를 변경하거나 생산, 증가, 감소하는 운동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합적인 것에는 부분과 부분의 변화가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나드에는 만물이 들락날락거릴 창(窓)이 없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감각 종(種)을 그렇게 취급했던 것처럼, 우유는 실체와 분리할 수도 없고, 실체와 별도로 외부에서 배회할 수도 없다. 따라서 실체나 우유는 모나드의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7항, 34쪽)

여기서 '우유'는 '창'이나 '종'과는 달리 한자가 따로 병기돼 있지 않은데, 그만큼 '친숙한' 용어라고 역자가 판단한 것인지 신기하다(그렇다고 앞부분에 미리 나왔던 용어도 아니다). 내가 이해하기에 '우유'는 '우연히 있음'이란 뜻으로 '우유(遇有)'라고 병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는 단어가 아니다. 순전히 철학용어이며 어떤 출처를 갖는지는 모르겠다. 이 7항 후반부의 영역은 이렇다.

The Monads have no windows, through which anything could come in or go out. Accidents cannot separate themselves from substances nor go about outside of them, as the ‘sensible species’ of the Scholastics used to do. Thus neither substance nor accident can come into a Monad from outside. 

대응시켜 보자면 '우유'는 'accident'와 같은 말이다. 문제는 그걸 꼭 우리말로, 아니 우리말이 아닌 '우유'라고 옮기는 것이 우리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거나 혹은 증진시켜주느냐 하는 것이다. 일종의 '학술적 은어'로서 자주 입에 올리다보면 그 나름대로 익숙해지는지 모르겠지만(아마도 역자나 다른 전공자들처럼) 나로선 기껍지 않은 선택이다('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이런 용어들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우유'와 짝이 될 만한 용어로 '분유'(!)가 있다.

 

 

 

 

'분유'는 중세 스콜라철학의 용어로 한 후배가 읽던 코플스턴의 <중세철학사>(서광사, 1989)에서 처음 본 듯하다. 라틴어 'participatio'의 번역인데 'ens'를 '유(有)'라고, 'ens contigence'를 '우연유'(이게 '우유'로도 옮겨지나?)라고 옮기는 식이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아니라는 얘기다. 비록 '분유(分有)'는 '나누어 가짐'이란 뜻으로 등재돼 있지만 나는 이게 일본어의 잔재가 아닌가 한다. 아무려나 '우유'건 '분유'건 너무도 고색창연한 중세틱한 번역어들이며 내게는 별로 연상시켜주는 바가 없는 용어들이다. 나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oonta 2007-11-23 16:10   좋아요 0 | URL
그렇지않아도 요즘 플라톤책좀 뒤적이고 있는데 "분유"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분유는 그정도면 타먹을만하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우유"는 제가 생각해도 좀 배탈날수있을것 같습니다..^^ 우유accidents와 관련된 책들을 뒤적여보니 두개 다 중세철학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기긴 합니다만..그리스철학에서 먼저 사용된것으로 보이더군요..그런데 이러한 철학용어번역과 관련된 적절한 역자주는 찾기 힘들더요. 이런게 늘 아쉽게 느껴집니다. 한국어로 철학 공부할때마다 느끼는..

로쟈 2007-11-23 18:11   좋아요 0 | URL
문제는 '우유'보다 'accidents'라고 해야 더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죠. '번역'의 효용에 대해서 의문을 갖습니다...
 

페이퍼를 적다가 문득 서재가 너무 조용하다는 느낌이 들어서(방문자수는 적은 편이 아니지만 다들 뒤꿈치를 들고 다니는 듯하다) 떠올린 시를 옮겨놓는다. '물위의 암스테르담'이란 제목인데, 시구절을 인용하면 '물위의 도시를 사랑했던 어느 암담한 물고기' 얘기다(나대로의 말장난에 좀 익숙한 분이라면 '암담-암스테르담'의 유운 효과가 지겨울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눈을 뜨면 간장에 물 탄 듯이 아침은 온다" 같은 구절이 마음에 든다.   

물위의 암스테르담


태엽이 풀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눈이 감긴다 눈을
뜬다, 눈을 뜨면 간장에 물 탄 듯이 아침은 온다 

2  
나는 점점 더 나빠져 가는 그이들의 예절을 얘기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런 얘기나 반나절 동안 주절거리고 있는 거야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제대로 듣고 있냐고?
나는 한 나무의 변두리에 주저앉아 눈에 익은 그림자들을 보고 있어
나는 이때쯤 살갗에 모이는 소금들을 부끄러워하지 
나는 이젠 더 참을 수 없는 그이들의 예절을 얘기하고 싶어
나는 등나무 꽃 그늘 아래로 옮겨갈 테야

눈물보다도 맑은 물위에 눈꽃들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가려무나, 날아가려무나, 공손한 비둘기들이여 앉은뱅이 비둘기들이여
날개의 페달을 밟으며 긴 아치를 그리며 이 물위의 도시를 떠나가려무나 
아침이면 그대 햇살 아래 예언처럼 떠오르는 도시를……  

4
나는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어느 물고기의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러니까 물위의 도시를 사랑했던 어느 암담한 물고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러니까 그런 얘기나 태엽 풀린 소리로 주절거리고 있는 거야 
지금 그러니까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제대로 듣고 있는 거냐고? 

07. 11. 22.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07-11-23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 위의 암스테르담이라는 영화도 있는데...

로쟈 2007-11-23 08:49   좋아요 0 | URL
원제도 그런가요? <암스테르담>을 타이틀로 한 영화는 여러 편 되는군요. 얼마전 '물위의 암스테르담'이란 기타연주곡으로 유명한 끌로드 치아리도 내한공연을 가졌군요...

섬나무 2007-11-2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시는 아닌듯한데 누구의 신가요.

로쟈 2007-11-23 15:38   좋아요 0 | URL
흠, 제가 쓴 건데요.^^;

섬나무 2007-11-2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위기는 로쟈님인데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싯구절 운운에서 그럼 다른 이 건가? 했습니다.
로쟈님 그거 아십니까? 로쟈님 시는 가을 볕 아래 좌판에 놓인 열매들 같습니다.

로쟈 2007-11-24 12:38   좋아요 0 | URL
게다가 공짜입니다.^^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사이언스북스, 2007)에 대해서는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과 함께 읽어볼 작정이란 얘기를 지난주에 적었다. 일간지 서평을 근거로 '와인 감식가로서의 지식인'(http://blog.aladin.co.kr/mramor/1703093)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막상 읽어보니 '와인 감식' 같은 풍미와는 거리가 먼 책이다. 기자에 따르면 '색다른 지식인론'이고 역자에 따르면 '지식인을 위한 기묘한 변명'에 해당하는 책은 학계와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조롱도 포함하고 있어서 와인보다는 도수를 많이 높여야 할 듯싶다('꼬냑'이라고 할까?).

기자의 서평에 따르면 "문장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구성 역시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준다고 하는데, 문장이야 더 까다로운 책들이 많기에 이 책만의 흠이랄 수는 없겠지만 다소 산만하다는 점은 이 책의 새로운 독자라면 고려해야 할 듯싶다. 군데군데 재치있는 비판과 번뜩이는 발상전환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계속 읽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2장인 '지식인과 철학자의 대화'에서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저자의 독설과 비아냥은 일리가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하다는 인상을 준다).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은 결코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부피는 얇지만 아주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한 야심적인 저작"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 점은 저자가 서문에서 주장하는 바와 다소 모순되기에 흥미롭다. "나는 생각할 가치가 있는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어떤 청중에게든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결코 엘리트 지식인들의 게으름이나 조급성을 사상의 깊이와 혼동하지 마라."(11쪽) 적어도 저자 스스로는 학자연하는 현학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으므로 이 책을 읽는 어려움은 내용상의 어려움이 아니라 문체상의 어려움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그 문체의 낯설음은 저자가 '독자'가 아닌 '청중'을 고려하고 있기에 빚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군데군데 역자의 실수도 가독성 떨어뜨리기에 동참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대체적으론 무난한 번역이지만).  

가령 "어느 분야든 지식인에게 이상적인 학문적 훈련을 제공하는 것은 연구와 교육이다."(9쪽)은 내가 보기에 오역이다. 원문은 "Research and teaching across different disciplines provides ideal academic training for the intellectual."이고 'across different disciplines'은 '어느 분야든'이 아니라 '각기 다른 학문을 가로지르는', 즉 '학제적(interdisciplinary)'이란 뜻이어야 이어지는 내용과 호응이 된다. 단순히 '연구와 교육'이 지식인에게 이상적인 학문적 훈련이 된다고 하면 싱거운 노릇이다. 다방면에 걸친 '학제적 연구와 교육'이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가 개척의 공로자 중 하나인 '사회인식론(sociial epistemology)'은 바로 그런 학제적 연구와 교육을 근간으로 한 프로그램이 아닌가.

'사회인식론'이란 무엇인가? "사회인식론은 지금까지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를 인식하고 그런 인식에 비추어서 앞으로는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실제로 그것은 일종의 추상적인 사회 정책론(social policy)'이다."(9-10쪽) 나름대로는 사회인식론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므로 원문을 따라 적으면 "Social epistemology is concerned with how knowledge should be produced, in light of what is known about how it has been produced. In effect, it is a kind of abstract science policy."

기이한 것은 원문의 'science policy(과학/학문 정책론)'이 번역문에서 '사회 정책론(social policy)'으로 엉뚱하게 탈바꿈한 것이다(아무래도 '사회인식론'에서의 '사회'란 말의 연상작용 때문에 빚어진 착오인 듯하다. 덕분에 이후에 잘 읽히지 않는 대목은 모두 원문을 확인하게 된다). 이 문장의 '추상적인(abstract)'을 나대로는 그냥 '이론적인'이란 뜻으로 이해하는데, 사회인식론은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어 왔는가(->지식의 고고학)를 검토해서 앞으로는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가(->학문 정책론) 하는 그림을 제시하는 학제적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왜 그냥 인식론이 아니라 사회인식론인가? 그것은 인식/지식이 그 사회적 발생조건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 때문이겠다. 저자가 마키아벨리의 '권력에의 진리(truth to power)'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조건'을 '권력관계'와 나란히 놓는다면 그런 조건/관계와 무관하게 생산되는 지식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풀러는 이 책의 모델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라고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대단히 성공한 지식인이며 그런 영예로운 칭호를 얻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공공연하게 말한 사람이었다. 그는 권력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시대에 '권력에의 진리'를 설파했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며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에 관한 책이다."(6쪽)

책은 다양한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지만 내가 읽은 범위내에서 가장 유익한 대목은 지식인과 총제적 진리의 관계를 다룬 절이다(68-78쪽). 바쁘신 분들은 이 대목만 챙겨두어도 책값의 1/3은 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더불어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지식인을 표방하는 풀러이지만 그를 '포퍼리언'으로 이해할 때 사회인식론의 기본적인 관점과 입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국내에 소개된 그의 전작 <쿤/포퍼 논쟁>이 이미 시사해주는 것이지만). 내가 그렇게 읽은 경우이다. 그 '읽기'는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다루기로 한다...

07. 11. 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 나온 책들이 없나 뒤적거려보다가 '어렵게' 발견한 책이 토머스 크로의 <60년대 미술>(현실문화연구, 2007)이다(국역본의 부제가 '순수미술에서 문화정치학으로'이다).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이론 세미나를 하다가 좀 읽어본 책이 그의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아트북스, 2005)이어서 저자와는 구면이다. 특히 '시각예술의 모더니즘과 대중문화'란 그의 글은 내가 찾은 것만 국내에 3종의 번역본이 소개돼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헌이다(아트북스판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60년대 미술>은 크로의 1996년작이니까 원서로는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과 나란히 출간되었던 책이겠다(그러니 같이 읽어보아야 할까?).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1960년대 미술은, 오늘날의 보수적인 비평가들에 의해서는 모든 동시대적 스캔들의 분수령이라고 언급되고, 좌파의 비평가들에 의해서는 미학적 급진주의가 성공을 거둔 드문 사례라고 언급된다. 그러나 미국의 비평가 토머스 크로는 1960년대 미술이 미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형성했다고 본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소개는 이렇다: "1960년대의 새로운 정치학 안에서 빚어진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양면적이다. 미술가들은 새롭고 공격적인 세계 시장 속에서 그들의 활동에 대한 지지가 점차 증가하자 이러한 시장의 지지와 시장을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은 1955년부터 1969년까지의 시기가 낳은 하나의 산물이자 이 시기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올 이 책의 중심 주제이다."

해서 관심은 '60년대'로 다시 회귀한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 얼른 떠오르는 것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를 다룬 로도윅의 <현대 영화이론의 궤적>(한나래, 1999)과 1960년대초 김승옥의 시사만화를 다룬 <혁명과 웃음>(앨피, 2005)이다. 영화와 만화라는 각기 다른 장르와 유럽과 한국이라는 각기 다른 지리적 공간에서의 '1960년대'를 일별해볼 수 있겠다. 문화정치학의 관점에서. 흠, 내년의 한 가지 연구테마로 잡아도 좋을 듯하다...

07. 11. 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이 레프 톨스토이의 서거일이라 한다. 구력으로는 1910년 10얼 28일에 가출해서 11월 7일 6시 5분에 간이역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역)에서 숨을 거두었고 11월 9일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에 묻혔다(http://www.youtube.com/watch?v=E8_Th7UdsBw). 요즘 쓰는 달력으로 환산하여 오늘이 이 대문호의 기일이 되는 것이다.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고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을 보니 그렇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전공자인 나도 읽어보지 않은 책이지만(하긴 전집 90권을 어찌 읽는단 말인가? 그의 소설들만 읽기에도 인생은 짧다), 이번 학기가 가기 전에 조금은 들춰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11. 20) [오늘의 책<11월 20일>] 인생이란 무엇인가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82세로 사망했다. 구소련에서 1958년 완간된 톨스토이 저작전집은 모두 90권. <전쟁과 평화>나 <부활>을 ‘오늘의 책’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톨스토이의 마지막 저작이다. 1884년 ‘1년 365일을 위한 세계 모든 민족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의 빛나는 지혜’를 한 권의 책에 담을 구상을 한 그는 사망하던 해에도 이 책의 개정3판을 내는 등 만년의 열정을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쏟았다.

매일 일기 쓰듯 한 가지 주제에 관한 자신의 단상을 적고, 노자 부처 파스칼 칸트 등 동서고금의 사상가와, 성서에서 당대 무명 저널리스트의 글까지 인용한 다음, 자신의 생각으로 마무리한 형식이다. 톨스토이가 고른 인류의 지혜라 할 만한데, 솔제니친은 “세상에서 단 한 권의 책만 가지라 하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월 1일, 톨스토이는 무엇을 주제로 인생론을 시작했을까? ‘책’이다. “그리 중요치 않은 평범한 것을 많이 알기보다는 참으로 좋고 필요한 것을 조금 아는 것이 더 낫다”고 쓴 그는 책에 대한 에머슨, 로크, 세네카, 소로의 글을 소개한 뒤 쇼펜하우어를 마지막으로 인용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자가 언제나 가장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는 법이다. 악서는 아무리 적게 읽어도 지나치지 않고, 양서는 아무리 많이 읽어도 과하다고 할 수 없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은? 톨스토이는 ‘시간’을 묵상했다. “현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무한한 접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 그 시간이 없는 한 점에서, 인간의 진정한 생활이 영위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정신력을 그 현재에 집중시켜야 한다.”(하종오기자)

07. 11. 20.

P.S. 톨스토이에 대해서도 할 얘기들이 쌓여가고 있지만 털어낼 짬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번주에는 최소한 페이퍼 하나라도 적어내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털세곰 2008-01-05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톨스토이 생애에 관한 유투브 영상 따라간 주소에 없어요 ㅠ.ㅠ

로쟈 2008-01-05 09:48   좋아요 0 | URL
유용한 자료였는데, 삭제된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