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우울한 열정>(이후, 2005)에서 벤야민에 관한 장을 다시 읽어보려고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는다(참고로, 나는 이 책에 관해서 몇 차례 페이퍼를 쓴 바 있다). 원저인 <토성의 영향 아래>를 내가 안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도서관에서 주로 빌려 읽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책을 찾아보려는 열정 역시 이럴 땐 '우울한 열정'이다(손택은 벤야민이 우울증적 기질의 비평가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곁다리로 고유명사 표기에 대해 지적하자면, 처음에 '수잔 손탁'으로 소개돼던 'Susan Sontag'을 '수전 손택'으로 읽는 건 현지음을 고려한 탓인 듯하나 그런 식으로라면 우리가 표기만으로 읽을 수 있는 이름은 거의 없다(가령 영국식과 미국식 영어의 차이는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마샬 맥루한(Marshal Mcluhan)'의 경우는 점입가경인데, '마셜 맥루언'으로 바뀌더니 최근엔 아예 '마셜 매클루언'이란 표기까지 등장했다. 이유는 역시나 '현지음'인가? 하지만 관행 파괴적인 '동인이명'이 이런 식으로 점차 늘어난다면 소통가능성은 그와 반비례하여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하긴 유식의 과시는 애당초 소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울하게도 말이다.

그런 우울 모드는 오전부터 간간이 붙들고 있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도 빚지고 있다. 야심차게 출간되기 시작한 이 선집이 적어도 한국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내가 읽기에 독어본이나 영어본 등 다른 판본의 도움 없이 국역본만으로 벤야민을 읽고 이해하기는 여전히 지난해 보인다. 비록 가독성을 경계해 마지 않았던 아도르노만큼은 아니더라도 벤야민 읽기 역시 팍팍한 여정이다.   

 

 

 

 

걸음을 지체시키는 원인은 번역자들이 원칙으로 삼은 듯이 보이는 '직역주의'에 있다. 원저에 대한 '충실성'이 이유인 듯한데, 덕분에 한국어 독자는 들러리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한국어까지 정당화하느냐는 것이다(벤야민 자신이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독일어 문장을 구사한다면 물론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던 벤야민이 과연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한 것인지?).

아직 이번에 나온 국역본들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안을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벤야민의 가장 대표적인 '논문'의 경우는 사실 지난 1983년에 나온 반성완 교수의 번역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다(내가 읽을 수 있었던 대여섯 종의 우리말 번역본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물론 반성완본의 여러 오역들에 대해서는 여러 후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말 문장력에서만큼은 반성완본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그래서 차라리 반성완 교수가 개역판을 내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한다). 예컨대, 벤야민의 에피그라프격으로 인용하고 발레리의 첫문장은 이렇다.

"제반 예술이 정초되고 그것들의 여러 유형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에서 시작되었고, 사물과 상황에 대한 그 권력이 우리 시대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최성만, 99쪽)

"예술이라는 개념과 예술의 여러 상이한 형식은 오늘날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시대, 즉 사물과 상황을 제어하는 힘이 우리들의 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시대에 생겨났다."(반성완, 197쪽)

여기서 무엇이 맞는 번역이냐는 부수적이다. 다만 나의 관심은 문장이고 문체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대목의 원문은 불어이기에 두 판본 모두 '중역'이다(벤야민이 불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발레리에 대한 충실성이며 불문학쪽에서도 뛰어난 문장가로 꼽히는 발레리라면 보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인용문의 끝문장을 읽어본다.

"우리는 엄청난 혁신들이 예술의 테크닉 전체를 변모시키고, 그로써 발명 자체에 영향을 끼치며, 결국에는 예술의 개념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를지 모른다는 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최성만)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신발명들이 예술형식의 기술 전체를 변화시키고 또 이를 통해 예술적 발상에도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서는 예술개념 자체에까지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반성완)

발레리가 말하는 '엄청난 혁신들' 혹은 '위대한 신발명들'(영역으로는 'great innovations')이 벤야민의 문맥에서는 '기술복제'나 '영화'를 가리키게 된다. 이러한 혁신/발명이 초래하게 된 '놀라운 변화'가 사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한데, 인용문의 '발명 자체'는 무엇인가? 반성완본에서 '예술적 발상'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지만 '발명 자체'만으로는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기 어렵다. 이걸 영역본에서는 'artistic invention'으로 옮겼고,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는 '창작 과정 자체'라고 옮겼다. 모두 '발명 자체'보다는 뜻이 통한다. 이어서 마르크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머리말.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기도하려고 했을 때 자본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연구를 착수할 때 그 결과가 진단적 가치를 지닐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의 근본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그 상황을 그로부터 추후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점점 더 심화되는 무산계급의 착취를 예상할 수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케 할 조건들이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최성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했을 때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아직도 그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분석이 예언적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기본관계에까지 소급하면서, 이 기본관계로부터 자본주의의 미래적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서술하였다. 마르크스의 결론은, 자본주의하에서는 앞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가 점점 더 날카롭게 심화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하게 할 제(諸)조건이 마련될 것이라는 것이었다."(반성완)

일단 "기도하려고 했을 때"보다는 "기도했을 때"가 우리말로 자연스럽다(벤야민이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하는가?) 물론 반성완본의 '생산방식'보다는 '생산양식'(영역으로는 'mode of production')이 더 적합한 역어인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진단적 가치'라는 건 문맥에 맞지 않다(다음 쪽에 나오는 '진단적 요구'도 마찬가지다). 독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말에서 '진단'은 보통 'diagnosis'에 상응하는데, 여기서 쓰인 단어는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prognosis'이고 이건 의학용어로 '예후'라고 번역되는 용어다('pro'라는 접두사가 이미 암시해주듯이 '예측' '조짐' 등을 가리킨다). 마르크스가 한 일은 자본주의 초기단계를 분석하면서 향후 자본주의의 종말까지를 예측한 것이니 '진단'이라고만 하는 건 부족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미래가 이미 초기의 맹아에 새겨져 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동일한 것인지? 영역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수동태 구문이다: "Going back to the basic conditions of capitalist production, he presented them in a way which showed what could be expected of capitalism in the future." 다른 번역들을 둘러봐도 '생겨나도록'의 출처는 찾기 어렵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이라고 이어지는 걸 보면 역자는 '생겨난 것'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머리말에 이어지는 1절의 첫문장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정확하게 말하면 '오역'이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다."(100쪽) 왜 '가능했다'가 아니라 '가능했었다'인가? 우리말에서 '가능했었다'라고 하면 '현재는 가능하지 않지만'이란 뜻을 함축한다. 물론 벤야민이 뜻하는 바는 아니다. 2절에서도 첫문장은 좀 어색하다.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최성만, 103쪽)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그 요소는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반성완, 200쪽)      

완벽한 복제에서도 빠져 있는 한가지는 '현존재'가 아니라 '현존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현존재'라는 말을 고집하더라도 '현존재성'이라고 해야 타당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존재가 갖는 어떤 '속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완벽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제와 마찬가지로 원저가 갖고 있는 현존성, 곧 아우라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근접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번역에 대한 불만은 그런 근접에의 욕망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난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에 대해 괜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처럼 끝간 데를 알지 못하는 법. 해서 "사람들이 번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번역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를 때까지 이런 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07. 12. 30.

P.S. 내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처음 읽은 건 20년쯤 전이다. 도서관에서 노트에 정리해가며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텍스트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당시에 가장 어려워한 텍스트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었고, 우연찮게도 내가 읽은 루카치와 벤야민의 번역자는 똑같이 반성완 교수였다. 하지만 20년이 지나서 세 가지 언어의 번역본들을 펼쳐놓고 읽는 벤야민은 어찌된 영문인지 예전보다 더디 읽힌다. 반성완본이나 최성만본이나 채플린의 영화 <황금광시대(The Gold Rush)>(1925)를 <골드러시>로 표기한 것도 이젠 불만스러워 하는 것이니 달라진 건 나의 지성이 아니라 감성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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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ine 2007-12-3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자하니 초현실주의는...정말 글이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하던데...그걸 읽으신 후의 감상이 기대되네요...^^;

로쟈 2007-12-31 01:11   좋아요 0 | URL
어느 책을 말씀하시는지요?..

caline 2007-12-3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벤야민이 쓴 '초현실주의' 글 말이죠....5권인가 수록 예정이니 아직 발간되지는 않았지만...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번역이 장난 아니라는 소리가 있어서...^^;

로쟈 2007-12-31 01:25   좋아요 0 | URL
네, 설마 아직 안 나온 책을 말씀하시나 했습니다.^^;

2007-12-31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31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31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다음카페 비평고원에도 올려놓았는데, 어느 분이 역자의 답글을 댓글로 달아놓으셨다. 여기에도 옮겨놓는다.

* 다음은 로쟈 님의 글에 대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의 역자 최성만 선생님의 답글입니다.파란색 글자가 역자의 답변입니다(*여기서는 색깔처리가 되지 않았지만 식별은 가능하다). 역자를 대신하여 글을 올립니다.

그런 우울 모드는 오전부터 간간이 붙들고 있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도 빚지고 있다. 야심차게 출간되기 시작한 이 선집이 적어도 한국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내가 읽기에 독어본이나 영어본 등 다른 판본의 도움 없이 국역본만으로 벤야민을 읽고 이해하기는 여전히 지난해 보인다. 비록 가독성을 경계해 마지 않았던 아도르노만큼은 아니더라도 벤야민 읽기 역시 팍팍한 여정이다.

-> 당연히 번역은 원본을 대체하지 않는다. 더구나 고도의 사유작업을 요하는 이론에서는 원본이 훨씬 더 잘 읽히는 게 상식이다. 그렇지만 번역은 원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충분히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엉뚱한 길잡이(오역)는 잘못된 것이고 애매한 길잡이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은 끊임없는 개선 작업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명백한 오역 내지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비문과 매끄럽지 못하고 애매한 부분이 섞여 있는 번역은 구별해야 할 것이다. 모든 걸 한 통속으로 만들면 결국 오역이나 중역이나 다 정당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팍팍한 여정’은 원어민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난해한 이론의 번역본은 원문을 옆에 두고 참고로 읽는 데 그 본래의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걸음을 지체시키는 원인은 번역자들이 원칙으로 삼은 듯이 보이는 '직역주의'에 있다. 원저에 대한 '충실성'이 이유인 듯한데, 덕분에 한국어 독자는 들러리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한국어까지 정당화하느냐는 것이다(벤야민 자신이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독일어 문장을 구사한다면 물론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던 벤야민이 과연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한 것인지?).

아직 이번에 나온 국역본들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안을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벤야민의 가장 대표적인 '논문'의 경우는 사실 지난 1983년에 나온 반성완 교수의 번역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다(내가 읽을 수 있었던 대여섯 종의 우리말 번역본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물론 반성완본의 여러 오역들에 대해서는 여러 후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말 문장력에서만큼은 반성완본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그래서 차라리 반성완 교수가 개역판을 내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한다). 예컨대, 벤야민의 에피그라프격으로 인용하고 발레리의 첫문장은 이렇다.

->직역이냐 의역이냐는 번역의 이론과 실제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두 대립적 원칙이다. 둘 다 수렴하는 게 최선일 것이지만 그것은 이상(理想)으로 남는다. 역자로서 해명을 하자면 이 번역에서 직역(주의?) 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최선은 아니지만 역자들이 선택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 새 번역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반성완 교수의 번역본을 계속 고수하기를 권한다.

"제반 예술이 정초되고 그것들의 여러 유형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에서 시작되었고, 사물과 상황에 대한 그 권력이 우리 시대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최성만, 99쪽)

"예술이라는 개념과 예술의 여러 상이한 형식은 오늘날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시대, 즉 사물과 상황을 제어하는 힘이 우리들의 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시대에 생겨났다."(반성완, 197쪽)

여기서 무엇이 맞는 번역이냐는 부수적이다. 다만 나의 관심은 문장이고 문체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대목의 원문은 불어이기에 두 판본 모두 '중역'이다(벤야민이 불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발레리에 대한 충실성이며 불문학쪽에서도 뛰어난 문장가로 꼽히는 발레리라면 보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인용문의 끝문장을 읽어본다.

->‘유려한’ 번역이 그리우면 원본을 읽으시거나 직접 번역해 보시기 권한다. 위에 인용한 문장의 프랑스어 원본을 가지고서. 문체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건 좀 유치한 투정 같이 보인다. 그것도 원 작자와 비교하다니. 참고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원문에 나오기에 새 번역에서는 그 부분을 분명하게 번역했다. 위 인용문이 왜 이해가 안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엄청난 혁신들이 예술의 테크닉 전체를 변모시키고, 그로써 발명 자체에 영향을 끼치며, 결국에는 예술의 개념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를지 모른다는 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최성만)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신발명들이 예술형식의 기술 전체를 변화시키고 또 이를 통해 예술적 발상에도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서는 예술개념 자체에까지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반성완)

발레리가 말하는 '엄청난 혁신들' 혹은 '위대한 신발명들'(영역으로는 'great innovations')이 벤야민의 문맥에서는 '기술복제'나 '영화'를 가리키게 된다. 이러한 혁신/발명이 초래하게 된 '놀라운 변화'가 사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한데, 인용문의 '발명 자체'는 무엇인가? 반성완본에서 '예술적 발상'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지만 '발명 자체'만으로는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기 어렵다. 이걸 영역본에서는 'artistic invention'으로 옮겼고,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는 '창작 과정 자체'라고 옮겼다. 모두 '발명 자체'보다는 뜻이 통한다. 이어서 마르크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머리말.

->이 부분의 지적은 직역이 어색한 번역을 낳은 예로서 수용한다. 다음 기회에 좀 더 바로 잡을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 즉 영역이나 러시아역에서처럼 (예술의) 창작(과정) 자체라고 의역했으면 의미가 더 분명하게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굳이 해명을 하자면, 벤야민의 원본에 Invention selbst(발명, 구상 자체)라고 되어 있다. 예술이나 창작이라는 말은 없다. 문맥상 그렇게 읽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창작’이라는 표현도 우리말식이다. 만일 굳이 창작이라고 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또 다른 원어가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기도하려고 했을 때 자본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연구를 착수할 때 그 결과가 진단적 가치를 지닐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의 근본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그 상황을 그로부터 추후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점점 더 심화되는 무산계급의 착취를 예상할 수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케 할 조건들이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최성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했을 때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아직도 그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분석이 예언적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기본관계에까지 소급하면서, 이 기본관계로부터 자본주의의 미래적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서술하였다. 마르크스의 결론은, 자본주의하에서는 앞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가 점점 더 날카롭게 심화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하게 할 제(諸)조건이 마련될 것이라는 것이었다."(반성완)

일단 "기도하려고 했을 때"보다는 "기도했을 때"가 우리말로 자연스럽다(벤야민이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하는가?) 물론 반성완본의 '생산방식'보다는 '생산양식'(영역으로는 'mode of production')이 더 적합한 역어인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진단적 가치'라는 건 문맥에 맞지 않는다(다음 쪽에 나오는 '진단적 요구'도 마찬가지다). 독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말에서 '진단'은 보통 'diagnosis'에 상응하는데, 여기서 쓰인 단어는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prognosis'이고 이건 의학용어로 '예후'라고 번역되는 용어다('pro'라는 접두사가 이미 암시해주듯이 '예측' '조짐' 등을 가리킨다). 마르크스가 한 일은 자본주의 초기단계를 분석하면서 향후 자본주의의 종말까지를 예측한 것이니 '진단'이라고만 하는 건 부족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미래가 이미 초기의 맹아에 새겨져 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동일한 것인지? 영역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수동태 구문이다: "Going back to the basic conditions of capitalist production, he presented them in a way which showed what could be expected of capitalism in the future." 다른 번역들을 둘러봐도 '생겨나도록'의 출처는 찾기 어렵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이라고 이어지는 걸 보면 역자는 '생겨난 것'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도..’ 부분의 지적은 너무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뜻은 통하니까. 그 다음의 지적: diagnose와 prognose는 원어에서는 현재의 진단과 미래의 진단으로 차이가 있지만, prognose를 예측적, 예후적 가치라고 번역해도 어색해 보이고, 진단이라는 말에 미래의 진단이라는 의미, 즉 예측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 같아 그렇게 번역했다. 원어를 병기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의 지적: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장차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나오도록(생겨나도록) 서술했다는 뜻인데,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면 유감이다.

머리말에 이어지는 1절의 첫문장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정확하게 말하면 '오역'이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었다."(100쪽) 왜 '가능했다'가 아니라 '가능했었다'인가? 우리말에서 '가능했었다'라고 하면 '현재는 가능하지 않지만'이란 뜻을 함축한다. 물론 벤야민이 뜻하는 바는 아니다. 2절에서도 첫문장은 좀 어색하다.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최성만, 103쪽)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그 요소는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반성완, 200쪽)

완벽한 복제에서도 빠져 있는 한가지는 '현존재'가 아니라 '현존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현존재'라는 말을 고집하더라도 '현존재성'이라고 해야 타당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존재가 갖는 어떤 '속성'이기 때문이다.

->‘가능했(었)다..’는 지적은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가능했었다고 하면 지금은 가능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오버한 것 같다.

'현존재’냐 ‘현존성’이냐는 물음은 역자도 고민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원문에 Dasein이라고 되어 있고 그것에 충실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원작의 (지금 여기서의) 존재(=현존재) 자체는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현존성’이라는 말은 Daseinshaftigkeit 정도가 될 텐데, 내가 알기로 철학 개념이 아니고 만든 말 같다. 역자가 보기에는 ‘현존성’이라는 말이 이미 번역으로 통용되어 우리 귀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나 추측해 본다.

물론 가장 완벽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제와 마찬가지로 원저가 갖고 있는 현존성, 곧 아우라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근접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번역에 대한 불만은 그런 근접에의 욕망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난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에 대해 괜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처럼 끝간 데를 알지 못하는 법. 해서 "사람들이 번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번역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를 때까지 이런 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번역비평에서 투정을 하는 건 언제나 좋다. 역자들은 반성하고, 독자들은 차이에 대해 날카로운 감각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번역비평이 번역에서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사태가 되면 이 또한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한두 가지 디테일 상의 지적 때문에 독자들은 번역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고 사상이나 이론 전반에 진력이 나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행여 이 말을 불충분한 번역에 대한 변명으로 읽지 않기를 바란다.) 좀 더 묵직하고 결정적인 오역이나 비문을 지적해 주면 좋겠다. (한 가지 역자로서 이 번역비평에 대한 메타비평을 하자면, 벤야민이라면, 발레리라면 그렇게 썼겠는가 라는 표현은 좀 오버한 것 같다.)

허리우스 2007-12-3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복 마니 받으십시요. 복을 받을 자격이 마니 있으십니다. 그리고 요번 한겨레에 쓰신 글 마지막에 아직도 우리에게는 타는 목마름과 치떠리는 노여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읽고 안구에 습기가 찼습니다. 안습입죠. 벤야민에 관심이 많지만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하고 있는데 찜해 둡니다. 감사....

로쟈 2007-12-31 17:07   좋아요 0 | URL
네, 허리우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공부는 무엇보다도 시간과의 싸움 같습니다.^^;

주니다 2007-12-3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7년 한해가 벌써 후딱 지나갔네요. 여긴 눈이 엄청 많이 왔어요. 내년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내년에 뵈요~~

로쟈 2007-12-31 20:10   좋아요 0 | URL
서울은 눈구경 좀 했으면 싶습니다.^^; 한해한해 후딱 지나가는 건 이젠 일도 아닌 듯싶어요. 그러니 어여(아시죠?!).^^ 네, 내년에 한번 뵙지요...

lefebvre 2007-12-3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최성만 교수님의 답변은 상당히 징후적(!?)이군요...... 예의 인터뷰에서 느꼈던 그런 포스가...... ㅋㅋㅋ 그나저나 발레리 인용에 관하여 "굳이 해명을 하자면, 벤야민의 원본에 Invention selbst(발명, 구상 자체)라고 되어 있다"라는 말은 좀...... 본문에서는 그렇게 번역하시더라도 각주 같은 걸 달아 확인된 원문과의 차이를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지적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 이거이거 이번에는 발레리 원문을 찾아봐야 하는 건가요? 아놔~ ㅋㅋㅋ

로쟈 2007-12-31 22:01   좋아요 0 | URL
발레리는 그래도 국내에서 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Octopus 2007-12-31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갑합니다. 에휴... 번역자를 붙들고 한국어 생 기초부터 하나하나 가르칠 수도 없고. 그야말로 '번역이론'만 있고 번역실행력'이 없는 경우네요. 게다가 왜 그렇게 잔뜩 몰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시를 세워서 글을 쓰시는지.

로쟈 2007-12-31 22:02   좋아요 0 | URL
'번역비평'이란 게 어디 가서도 좋은 소리 못 듣는 분야죠...

퍼그 2007-12-3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직하고 결정적인" 오역이 아니더라도,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쌓이게 되면 책을 계속 읽어나가기가 힘들다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에휴.

새해가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남았네요.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로쟈 2007-12-31 23:14   좋아요 0 | URL
네, 새해 복많이 받아요.^^

tubbath 2022-10-3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의 번역은 자꾸 원문이 궁금해지더군요. 번역물로만 봐도 그렇기, 영문이라도 찾아보니 반의 역이 훨씬 좋아서 저도 그걸로 택했습니다. 역자가 표현한 사소하다는 것은 실은 엄청난 거죠. 나무가 모여 숲이 되지 서로 다른 게 아닌데... 역자의 해명? 변명!이 아쉽습니다. 실력보다는 변명으로 오점을 가리려해서ㅠㅠ
 

연말이면 으레 조금 들뜬 기분과 감상적인 우울증에 얼마간 젖어 지내야 마땅해 보이지만 최근 몇년 동안 그랬던 기억이 없다(물론 믿을 수 없는 기억력이긴 하지만). 마지막날까지 뭔가 일을 해야 한다는 게, 그간의 게으름 탓이더라도, 조금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잠시라도 우울증 모드를 좀 만들어보고자 리스트라도 뽑아둔다(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주제가 http://www.youtube.com/watch?v=N2fGWQKbX68 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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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사람 2007-12-29 23:49   좋아요 0 | URL
'보이는 어둠'과 '우울증에 반대한다'를 읽고 그 덕인지 관계서적을 더 구입하려했던 생각이 사라지고 우울증이 나아버렸다는~~ 믿고나 말고나^^

로쟈 2007-12-30 00:01   좋아요 0 | URL
네, 효과 만점이라는 평들이 있습니다.^^

깐따삐야 2007-12-29 23:52   좋아요 0 | URL
정말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는 못 배길만한 리스트네요.ㅋㅋㅋㅋ

로쟈 2007-12-30 00:01   좋아요 0 | URL
보통은 '꿀꿀하다'고들 하지요...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학술출판 트렌드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필자는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이다. 네댓 가지 경향을 짚어보고 있는데, 2007년만의 도드라진 트렌드라고 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학술적으로 중요한 업적에 속하면서도 '2007년의 책'이라고 할 만한 건 드물지 않나 싶다.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기사는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07. 12. 24) 2007년 학술출판 트렌드 회고

학술출판이 학술 동향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학술출판과 학술 동향이 조응하는 모습은 대략 3년 정도의 시간을 전체적으로 살필 때 비교적 온전하게 조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어떤 학술 도서가 각별히 주목을 끌거나 논쟁을 촉발시키는 경우는 전체 학술 도서나 분야에서 극히 일부다.

바꿔 말하면 주목이나 논쟁 촉발과 상관없이 어떤 학술 분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책들도 적지 않다(이 글은 아무래도 주목도가 높거나 일반 독자들에게도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졌거나, 논쟁과 상관있는 도서 위주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필자의 개인적인 성향 또는 독서 범위의 한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여러 한계들을 염두에 두고, 올 한 해(2006년 12월 이후 출간) 학술출판에서 주목할 만한 동향이나 개별 저서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식민지) 근대성과 민족주의 등의 주제를 천착하는 책이다.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의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휴머니스트)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박선미 츠쿠바대 전임강사의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창비), 정여울이 번역한 토론토대 앙드레 슈미드의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휴머니스트) 등이 주목 받았고, 장문석 한양대 연구교수의 『민족주의 길들이기』(지식의 풍경)와 이용일이 옮긴 한스 울리히벨러의 『허구의 민족주의』(푸른역사) 등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주제에서 『동아시아 영화의 근대성과 탈식민성』(이현하 외, 연세대학교출판부), 김려실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의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1901-1945년의 한국영화사를 되짚다』(삼인), 김병희 서원대 교수(광고홍보학과), 신인섭 한림대 객원교수(언론정보학부)의 『한국 근대 광고 걸작선 100: 1876-1945』(커뮤니케이션북스) 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제로서의 매체와 방법으로서의 매체를 포괄하는 문화와 매체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연구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일종의 ‘문화적 전환’이 이 주제에서도 두드러지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둘째, 현재 우리 사회, 경제, 정치 현실을 진단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성격의 책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 시스템을 모색하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박상훈·박찬표·최장집, 후마니타스)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특히 정당 정치 문제, 현실 민주주의의 과제 문제 등에서 정확한 쟁점을 제기해주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길), 당대비평 편집위원회가 엮은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웅진지식하우스) 등이 이 주제에서 주목할 만한 책들이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이런 주제에 관한 논쟁이나 연구는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이른바 ‘87년 체제’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와 새로운 체제 모델에 대한 모색이, 새 정권 출범과 함께 현실 정치권의 소용돌이와 맞물려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이념적 지형도의 재편과도 상관있기 때문에, 특히 2008년 한 해에 관련 학계가 더욱 바빠질 가능성이 높다.



셋째, 동아시아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다. 물론 동아시아를 주제 범위로 잡는다고 해도 책마다 색깔은 가지각색이다. 예컨대 강상규의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논형)이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의 연구 프로젝트 성과물인 『충돌과 착종의 동아시아를 넘어서: 근대전환기 동아시아의 자기인식과 대외인식』(성균관대학교출판부) 같은 책이 있는가 하면, 송기호 서울대 교수(국사학과)의 『동아시아의 역사분쟁』(솔) 같은 책도 있으며, 일본 이와나미(岩波)에서 나온 『아시아 신세기』 8권을 번역한 책(한울)도 있다.

지금까지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의 상당 부분은 동아시아 공동체, 즉 일종의 지역적 실체 구성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사회과학적 담론이거나(시민운동 연계 차원에서부터 정부의 정책적 고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를 보인다),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 구축이라는(‘역사 전쟁’으로도 일컬어지는 갈등 요인을 안고 있으면서도) 일종의 문화 담론이었다. 요컨대 그것은 실체성과 정체성 구축을 지향하는 목적 지향적 담론이었다.

그러나 목적이라는 큰 숲에 가려진 세부적인 나무들이 그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과)의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 동아시아 이미지의 계보학』(문학동네)이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목적을 지향하기에 앞서 다양한 주제와 분야에 걸친 동아시아의 계보학이 치밀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넷째, 고전 번역서다. 이제이북스에서 펴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고전 번역서들, 학진 학술명저번역총서로 한길사에서 펴낸 김창성 번역의 키케로 『국가론』, 성염 번역의 키케로 『법률론』, 권중달 중앙대 명예교수가 번역한 사마광 『자치통감』(삼화),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아이네이스』와 『일리아스』(숲) 개역판, 김난주가 번역하고 김유천이 감수한 『겐지 이야기』(한길사), 김필수 외 3인이 옮긴 『관자』(소나무) 등이 올 한해 주목할 만한 고전 번역서였다.

마지막으로, 학술 번역에서는 두 책만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길 출판사에서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게오르그 짐멜 선집이다. 지금까지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근대세계관의 역사』, 『예술가들이 주조한 근대와 현대』 등이 나온 이 선집 시리즈는, 우리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반에서 볼 수 있는 ‘문화적 전환’의 흐름에서 하나의 자양분으로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여성이 번역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루만의 후기 저작들이 단편적, 간헐적으로 번역 출간됐지만 그의 사회학 이론의 핵심을 담은 이 책이 번역됨으로써 루만 연구 및 그에 바탕을 둔 이론적 모색을 위한 중요한 레퍼런스를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사회학 이외 분야에서 루만의 이론을 원용하거나 참고로 삼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기에서나 학문적 성찰의 초점이 일종의 확장된 ‘나’에 대한 체계적이고 반성적인 성찰에 있었다 하겠지만, 2007년을 돌이켜 보면 그러한 성찰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의 근대성, 우리의 민족주의, 우리의 오늘날 현실, 우리가 속해 있는 동아시아 등이 학문적 성찰의 중심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리’가 결코 고립돼 닫혀 있는 ‘우리’가 아님은 물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학술서이기보다는 교양서에 가깝지만, 이옥순 외 6인이 쓴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삼인)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가 ‘그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태도와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 책은, 세계 각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 온 학자들이 각자의 학문적 전문성을 폭넓은 대중과 유효적절하게 소통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하되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이해에서 다시 ‘우리’에 대한 성찰로 한 단계 高揚해 되돌아오는, 학문적 성찰의 되먹임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2008년에는 바로 그런 성찰이 더욱 넓고 깊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변명하자면 문화예술이나 과학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학술 도서 동향에 관해서, 필자의 무지와 게으름 탓에 사실상 생략하고 말았다. 이 점 양해를 부탁드린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12. 29.

P.S. 얼핏 어림에도 기사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건 강명관 교수의 저작들이다. 올해 한꺼번에 네 권의 연구서를 출간함으로써 동료 학자들의 경탄과 원성(?)을 사기도 했는데, 최근에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소명출판, 2007)이 시사IN 선정 '올해의 책'에 꼽히기도 했고(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1),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소명출판, 2007)은 한국일보가 주관하는 한국출판문화상의 학술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의 학자'로 기억해둘 만하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12. 24) [48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부문

"조선후기 문학에서 자생적인 근대문학의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연암이 그것을 정당화 시켜준다는 기존의 문학사를 부정하는 일은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괴롭더라도 이제는 그것을 돌파해야할 시점입니다.”

강명관 (48)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에서 철저하게 20세기적 기준인 ‘민족’과 ‘근대’로 수렴하는 한국문학사의 구성논리를 해체한다. 그가 씨름한 것은 다름 아닌 조선후기 문학의 큰 봉우리로 꼽히는 박지원, 이덕무, 이옥, 이용휴 등의 비평론과 창작론들이다. 자생적 근대문학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돼온 이들의 문학이론들이 실은 양명학적 사유, 구체적으로 명대 중국 공안파 사유의 자장 안에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편다.

강 교수가 책의 서문에서 “일종의 모험”이라고 실토했을 정도로 그것은 도발적인 작업이었다. 책은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태도, 개성의 강조 등 근대성의 코드로 해독돼온 이들 조선후기 문학가들의 사유가 실상 ‘우리 바깥’의 것을 토대로 구축돼왔음을 입증한다. 즉 우리가 떠받드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사유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을 내세우는 의고파에 대한 반작용으로 17세기초 등장한 명대의 문예이론가들인 원종도, 원굉도, 원중도 등 공안파의 사유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연암이론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연암의 문학사상과 공안파의 사상과의 유사성에 주목한 이론은 있었지만 그는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며 “연암비평이 공안파의 논리를 절취하고 있음은 비밀이 아니다” 라고까지 주장한다. 이 책과 함께 펴낸 <농암잡지평석>,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안쪽과 바깥쪽> 역시 이 같은 궁리의 결과물들이다.

그가 이같은 문제의식을 품게 된 것은 1992년께다. 박사학위논문을 쓰던 중 홍신유와 이언진의 문집에서 공안파의 흔적을 발견했고, 이후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조선후기 문인들의 창작과 비평이 대부분 공안파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관련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해 책으로 나오기까지 무려 16년이 걸린 셈이다.

강 교수의 책이 발표된 후 학계에서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지만, 그의 작업들은 결과적으로 국문학사에까지 완고하게 영향을 끼쳐왔던 내재적 근대화론이 빚어낸 모순을 돌파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강 교수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서구 부르주아적 근대를 더 이상 우리 근대의 모델로 삼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등 근대성의 단초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돼왔던 조선후기의 소설들이 사실은 중세적 논리를 보급하는 매체로 쓰였음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도발’은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다.(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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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뉴스에서 발터 벤야민 선집에 관한 리뷰기사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836). 주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아벨 강스의 인용문 번역과 관련하여 '로쟈'도 언급돼 있기에 눈길을 끈다.

컬처뉴스(07. 12. 28)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빠'가 왔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중 하나이다. 벤야민의 비평 대상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었다. 그래서 벤야민은 그에게 “주요 비평 분야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될 만한 몇 안 되는 사상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내 생각으로는 좀 거슬러 올라가면 롤랑 바르트, 보다 최근에는 움베르토 에코, 근래에는 슬라보예 지젝 정도가 이 정도 ‘급수’에 근접해 있다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국내에서 벤야민은 “저주 받은 작가” 군(群)에 속해 있었다. 그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지난 2005년까지 국내 독자들이 접할 수 있는 벤야민의 책으로는 차봉희 교수가 편역한 『현대사회의 예술』(문학과지성사/1980), 이태동 교수가 옮긴 『문예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1987), 반성완 교수의 편역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1992), 그리고 박설호 교수가 옮긴 『베를린의 유년 시절』(솔/1992)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02년부터 벤야민을 괴롭히던 저주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2002년 이래로 적어도 5권의 벤야민 관련서가 국역되더니 2005년부터는 벤야민 자신이 직접 쓴 『모스크바 일기』(1926), 『일방통행로』(1928), 『파사젠베르크』(1927~40)가 국역됐고, 급기야는 『해시시에 관하여』(1927~34) 일부까지 소개됐다.

총 10권으로 출간이 예고된 ‘발터 벤야민 선집’은 이렇게 서서히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된 벤야민의 사유 전체를 일괄할 수 있도록 해줄 ‘사건’에 해당하는 기획물이다. 도서출판 길에서 나올 이 선집의 완간과 더불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올 것으로 알려져 있는 벤야민의 초기 주저 『독일 비애극의 원천』(1928)까지 우리에게 도착한다면, 우리는 본격적으로 벤야민에 대해 ‘한국어’로 얘기를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 사후 약 70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빠’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오빠’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벤야민이 비평가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했듯이, 우리는 독자로서의 우리 역할을 다하면 될 것이다. 독자로서의 역할? 그건 어느 사상가를 범접하지 못할 스타로 대접하는 게 아니라 스스럼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로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호칭은 ‘형’이나 ‘누나’가 아니라 ‘오빠’나 ‘언니’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벤야민에게 말을 걸기 위한 첫 번째 수다이다. 두 번째, 세 번째 … 그 이상의 수다는 다른 독자들에게 맡기고 그럼 이제부터 내 역할을 수행해 보도록 하겠다. 벤야민 선집 1차분에 수록된 수십 편의 논문과 아포리즘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들춰본 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논문은 벤야민의 논문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논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었는데, 이번 선집에는 이 논문의 제2판(1936년)이 국내 처음으로 소개됐기 때문이다(이 논문은 총 세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동안 국내에는 제3판만이 소개됐다. 이 세 판본의 구구절절한 역사에 대해서는 옮긴이 해제를 참조하라).

그러나 특히 내가 이 논문을 먼저 들춰본 이유는 몇몇 지인들과 인터넷 카페/블로그에서 이 논문의 국내 번역본에 대해 한참 떠들어댔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골자는 기존 번역본들의 군데군데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 논문이 재번역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그때 당시 문제가 됐던 부분이 어떻게 번역됐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이 또한 여기에서 반복하기에는 구구절절 기나긴 얘기이니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은 유명한 알라디너 로쟈님의 블로그를 참조하거나 다음카페 ‘비평고원’ 혹은 ‘발터 벤야민과 현대’의 관련 포스트들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지인들과의 수다 중에 가장 많이 논란이 된 것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1939) 두 번째 단락에서 벤야민이 인용한 프랑스 영화감독 아벨 강스(Abel Gance, 1889~1981)의 말이었다. 그 구절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 …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까지도 … 필름을 통해 부활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였는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맨 앞의 문장을 한국어본과 일본어본 옮긴이들과는 달리 영어본, 이탈리아어본, 러시아어본 옮긴이들이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찍을 것이다”로 옮겼다는 것. “영화화될 것”과 “영화를 찍을 것”이라는 두 표현은 전혀 상이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논란이 될 수밖에.

벤야민의 원문은 “Shakespeare, Rembrandt, Beethoven werden filmen”인데, 이 구절은 인용이어서 그런지 세 가지 판본이 모두 똑같다. 당시에는 독일어 동사 “werden filmen”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원문의 표현인 “feront du cinéma”에도 “영화를 찍을 것이다”와 “영화배우로 활동할 것이다”(즉, “영화화될 것이다”)라는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들어 있었던 관계로, 한국어본-일본어본 옮긴이들 대 영어본-이탈리아어본-러시아본 옮긴이들의 기이한 대결 구도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기존의 한국어본-일본어본과 똑같이 옮긴 새로운 판본을 읽다가, 문득 우리는 강스의 텍스트 자체를 보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요컨대 우리는 벤야민이 인용한 ‘부분’만을 프랑스어 원문으로 확인했을 뿐, 벤야민이 말줄임표로 생략한 강스 텍스트의 ‘전후 맥락’은 전혀 읽지 않았던 셈이었다. 그래서 마침 프랑스에 유학 중인 지인에게 부탁해 벤야민이 인용한 강스의 텍스트, 「이미지의 시대가 왔다」(1927) 원문 전체를 받아봤고, 흥미로운 결론을 얻게 됐다. 먼저 벤야민의 강스 인용문 전후 맥락을 모두 옮기면 이렇다(굵게 칠한 부분은 벤야민이 인용한 부분으로서, 지면관계상 원문은 생략한다. 역시 관심 있는 분들은 내 개인 블로그를 참조해 주시길 바란다. http://blog.naver.com/virilio73).

영화는 인간에게 새로운 감각을 선사할 것이다. … 인간은 운율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빛을 가지고 시를 지어낼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오페라] 가수를 보지 않고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오! 기쁘도다. 「발퀴레의 기행(騎行)」도 [그렇게 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를 찍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왕국은 같으면서도 더 광대해질 것이니까. 예술적 가치들의 엄청나고 격렬한 전복, 그 어떤 것보다 더 커다란 꿈들의 급작스럽고, 화려한 개화. … 진실로 이미지의 시대가 왔노라! 모든 전설들, 모든 신화와 모든 이야기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 및 종교 자체들, 역사의 모든 위대한 형상들, 수 천 년 이래 대중들의 상상의 객관적 반영들, 이 모든 것들은 빛나는[빛을 통해 영화화되는] 부활을 기다리고 있으며, 영웅들은 우리의 문으로 들어오려고 쇄도할 것이다. 모든 꿈 같은 삶과 모든 삶의 꿈이 [필름의] 감지띠 위로 달려올 준비가 되어 있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 아니 어쩌면 더 『오뒷세이아』를 그 감지띠에 인쇄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위고식의 농담만은 아니다.
 
이렇게 텍스트 전체를 보면 확실히 강스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찍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볼 때에도 이미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으로서는 영화에 출연한다거나 영화화되기보다는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 어울릴 뿐만 아니라 각자의 “왕국”을 키울 가능성도 더 높을 테니. 게다가 서구 예술의 시조격인 호메로스마저 자신의 작품을 영화로 찍을 태세인데 말이다!

아마도 한국어본-일본어본 옮긴이들은 두 번째 인용 부분에서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 등이 영화화될 것이니 인용문 내의 대구(對句)를 살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 역시 “영화화될 것”이라고 읽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도 아니면(혹은 바로 이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는데) 전문가로서의 지식이 자충수가 된 격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논문의 최초 판본이라고 할 만한 제1판(1935년)에서 벤야민은 문제가 되고 있는 인용 부분 앞에 “이러한 현상은 『클레오파트라』와 『벤허』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역사영화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제2판과 제3판에서 삭제된 “『클레오파트라』와 『벤허』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라는 구절은 (비록 인용문 상에서이긴 하나) 확실히 뒤이어 언급되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 등도 클레오파트라, 벤허,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처럼 영화화될 것이라고 읽도록 유도한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모든 판본에서 강스의 말을 인용한 뒤에 이렇게도 말한다. “물론 그[강스]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궁금증. 왜 벤야민은 자신이 염두에 둔 “그런 뜻”이 아닌 강스의 말을 (스스로 밝히면서까지) 굳이 인용했을까? 그건 단순한 수사였을까, 아니면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매혹적인 표현이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벤야민의 고의적인 해석? 

여기에서 나의 결론, 혹은/그리고 가설 하나. 혹시 벤야민은 이 시기에 제정신이 아닌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자신의 인용을 마지막으로 확인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을 만큼? 아마도 벤야민은 자살 시도(1932년) 뒤의 침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얻은 말라리아(1934년)에서 완치되지 않았던 것을 수도 있으리라. 그도 아니면 메모를 잘못해놨을 수도 있다(벤야민은 자타가 공인하는 메모광이었으며, 그의 미완의 대작 『파사젠베르크』 역시 일종의 메모모음집이다). 요컨대 벤야민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었던 건 아닐까? 그 때문으로라도 ‘오빠’라고 불려야 할 만한?

(마지막으로) 아마도 언젠가는 벤야민 선집 2권의 부록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관련 노트들」에서 누락된 또 다른 노트들이 발견될 지도 모를 일이다. 『파사젠베르크』의 원고뭉치가 벤야민 사후 40여 년이 흐른 1981년 7월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되어 햇빛을 보게 됐듯이 말이다. 일단은 베를린예술아카데미가 2007년부터 매년 두 권씩 총 20권으로 발간할 계획을 밝힌 새로운 벤야민 전집을 기다려볼 일이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2. 29.

P.S. 참고로, 본문과 관련있는 페이퍼는 '벤야민을 좋아하세요?'(http://blog.aladin.co.kr/mramor/706506)와 '벤야민과 아벨 강스'(http://blog.aladin.co.kr/mramor/1257584)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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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벨 강스는 이렇게 말했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24 18:08 
    서점 두 곳에 들러 이주의 관심도서 두 권을 사들고 왔다. 둘다 이론서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윤영 교수가 엮은 <사유 속의영화>(문학과지성사, 2011)은 영화이론 선집이고, 호미 바바가 엮은 <국민과 서사>는 '네이션'에 관한 탈식민주의적 성찰들을 묶은 것이다.두 책을 모두 갖다놓은 서점이 없어서 한권씩 구하면서 발품을 팔아야 했다(알라딘에는 <국민과 서사>가 아직도 입고돼 있지 않다).그중 <사유 속의 영화&g
 
 
 
1월, 당신의 추천도서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http://www.kpec.or.kr/)에서 매달 발표하는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이 이달에는 며칠 일찍 발표되었다(연말이어서인가 보다). 그걸 빌미로 나도 따라서 '이달의 읽을 만한 책'들을 골라본다. 1월부터는 분야별로 한권씩 고르는 걸 따라해보기로 한다(10개 분야이다). 어느새 2008년 '1월의 읽을 만한 책'이다!

1. 문학

 

 

 

 

지난 11월의 읽은 만한 책으로 골랐던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2007)가 뒤늦게 올라왔다. 추천자인 작가 신경숙씨는 "어린 시절의 폭력이 한 인간의 내면에 어떻게 각인되는지, 그 상처가 주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채식주의자>는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의 미세한 지형도"라고 평해놓았다. 사실 나도 사놓고 아직 읽어보진 못했기에 1월에는 읽어봐도 좋겠다. 그래도 나대로 고르자면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창비, 2007)을 꼽아본다.

몇 편 읽지 않았으면서도 평소 공선옥의 소설이 '촌스럽다'고 생각해왔지만 이번에 나온 소설집은 평도 좋고 또 '명랑' 모드인지라 연초에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알라딘의 소개는 이렇다: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삶을 긍정적으로 포용하는 자세는 공선옥 소설의 개성을 한층 돋보이게 만든다. 그가 <멋진 한세상>(2002) 이후 5년 만에 신작 단편집을 펴냈다. 낯익지만 일관된 주제의식을 견지하며 냉엄한 현실을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는 공선옥 소설의 활력은 여전히 놀랍다."

2. 역사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추천한 역사 분야의 책은 김호웅 등이 쓴 <김학철 평전>(실천문학사, 2007)이다. 나도 출간시 리뷰들를 읽으면서 찡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말 그대로 격정의 시대를 산 '최후의 분대장'의 파란만장한 삶을 반추해볼 수 있겠다. "의열단으로 시작해 중국 홍군(紅軍)의 우군(友軍)이었던 조선의용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한쪽 다리를 잃고 8·15광복 후 출옥한다. 월북 후에는 김일성 신격화에 회의를 느끼다 중국으로 망명하지만 모택동을 비판한 <20세기의 신화>를 썼다는 이유로 10년간이나 투옥"되고 했던 삶이다.

거기에 보태 내가 고른 책은 독일의 철학자 바이츠제커의 <역사 속의 인간>(에코리브르, 2007)이다. 소개에 따르면,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사유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현대 인간의 삶에서 제기하는 실천적 과제들에 대한 대답을 담은 책이다. 지은이 바이츠제커는 사유방법론으로 인간의 역사를 고리로 하여 이어진 두 개의 반원으로 형성된 하나의 ‘원환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고 단언한다." 바이츠제커의 책으론 <과학의 한계>(민음사, 1996) 이후에 오랜만에 소개되는 듯하다(에른스트 울리히 폰 바이츠제커가 아니라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다).

3. 철학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과)가 추천한 철학 분야의 책은 이영남의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푸른역사, 2007)이다. 추천의 이유는 "독창적인 역사철학자로서의 푸코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 더불어 "저자가 철학 전공자가 아니라 역사 전문가라는 것이 이채롭다"고 했다(출판사도 '푸른역사'다. 내가 갖는 불만은 이 출판사의 책들이 페이지당 여백을 너무 많이 준다는 것이다).

푸코를 읽는 김에 내가 고른 책은 콜브룩의 <들뢰즈 이해하기>(그린비, 2007)이다. '들뢰즈와 함께 보는 현대 영화'란 부제를 달고 있는 파트리샤 피스터르스의 <시각문화의 매트릭스>(철학과현실사, 2007)도 이번에 출간되었기에 같이 읽어볼 만하다(콜브룩의 책을 조금 읽으면서 나는 들뢰즈의 철학이 '예술가 철학'이라는 심증을 더 굳히게 되었다). 물론 일반독자가 가볍게 읽을 만한 책들은 아니지만 들뢰즈를 이해하기에 가장 쉬운 책이란 점은 인정할 수 있다(<들뢰즈 이해하기>의 경우 일부 오역과 편집상의 실수들은 교정되면 좋겠다).

4. 정치


 

 

 

손호철 교수(서강대 정치외교학과)의 정치 분야 추천도서는 뜻밖에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프랑스 작가 10인이 쓴 <세상의 아이야, 너희가 희망이야>(푸른나무, 2007)이다. 추천사는 이렇다: "11월 20일이 어떤 날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날은 국제연합(UN)이 정한 '아동권리의 날'이다. 아동도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1년이면 거의 1천만 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 등으로 목숨을 잃고 가난 때문에 1억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학교를 가지 못하고, 2억 명 이상이 노동을 한다. <세상의 아이야, 너희가 희망이야>는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10명의 프랑스 최고 작가들이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을 위해 건강할 권리, 가족을 가질 권리, 먹을 권리, 보호받을 권리, 교육받을 권리 등 어린이들의 핵심적인 10가지 권리를 짧은 소설형식으로 그려서 헌정한 탁월한 교양서이다." 듣고 보니 의미있어 보이는 책이기도 하다.

비슷한 취지에서 내가 고른 책은 데루오카 이츠코의 <부자나라, 가난한 시민>(궁리, 2007)이다. 제목 그대로 '돈 많은 가난한 나라'(일본)를 돌아보면서 '진정한 풍요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는 책이다. '선진화 담론'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도 좀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출판사측의 소개를 인용하면, "지금 한국은 ‘돈 많은 못 사는 나라’이며, 분명히 ‘기형국가’이다. 개발과 투기 문제, 저열한 사회자본 문제, 위험한 연금개악 문제, 그리고 이기적이고 무능력한 노동운동 문제에 대한 데루오카 이츠코 교수의 설명은 우리에게 훌륭한 반면교사 역할을 할 것이다." 역자인 홍성태 교수의 <대한민국, 위험사회>(당대, 2007)와 함께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5. 경제/경영

 

 

 

 

정운찬 교수(서울대 경제학과)가 추천하는 경제분야의 책은 윤수영의 <세속 경제학>(삼양미디어, 2007)이다. 모처럼 국내 필자가 쓴 경제학 입문서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듯한데, 추천의 변 또한 뜨겁다: "세계의 중심 맨해튼을 24달러에 팔기로 선택한 인디언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이자의 당·부당성,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일자리와 임금, 황금제국의 부활, 유럽의 투기와 버블,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세계적인 시사주간지와 경제·경영 잡지, 세계유명 경제지와 일간지, 투자와 투기의 쌍쌍파티, 부자가 되는 꿈 등 무궁무진한 주제로 꽉 차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눈을 책으로부터 떼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대학이나 연구소에 있는 경제학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복잡한 수식이나 그래프를 통하지 않고도 현실 경제의 모습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으로 나는 믿는다."

내가 고른 책은 영국의 비평가이자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느린걸음, 2007)이다. 오늘자 한겨레의 북리뷰를 참조하면, "산업혁명으로 최성기를 구가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비평가요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에서 애덤 스미스에서 토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진 자본주의 정통 경제학의 전제조건들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는 고용주와 노동자를 포함한 경제 주체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정의와 애정”이라고 주장한다." 러스킨의 책으론 건축론 <베네치아의 돌>(예경, 2006)이 소개된 바 있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고려대 사회학과)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다카하라 모토아키의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삼인, 2007)이다. 몇 주전에 리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김교수에 따르면 "한류 열풍 속에 확산 중인 혐한증이나 탈식민화 시대의 반일운동 등에 관한 근본적 이유를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인력이동에 따른 고용경쟁이나 실업위협에서 찾는다. 경제의 세계화로 사회적 유동성이나 위험성이 증대되고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과거의 고도성장형 내셔날리즘이 개인형 내셔날리즘로 대체되어 젊은이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동시적으로 출현하는 청년실업과 같은 국가 차원의 사회문제가 안톤 오노의 금메달 강탈 항의사건 등에서 식별할 수 있는 “명랑한 애국심”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걸 '불안한 내셔널리즘'이라고 이름붙인다. 일본의 76년생 젊은 학자의 패기만만한 주장을 담고 있는 책.

사실 '사회'분야란 카테고리는 좀 막연해서 나로선 책을 고르기가 애매한데(정치 분야와 중복되고 하고), 그냥 구해놓고 아직 읽지 않은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공화국>(후마니타스, 2007)이나 <도시의 창, 고급호텔>(후마니타스, 2007)을 뒤적거려보기로 했다. 관련 페이퍼는 '아파트공화국의 고급호텔'(http://blog.aladin.co.kr/mramor/1636910) 참조.

7.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편집장이 추천한 과학분야 도서는 외르크 치들라우의 <다윈, 당신 실수한 거야!>(뜨인돌, 2007)이다. 소개글에 따르면 "과학저널리스트인 외르크 치틀라우가 다윈진화론의 핵심인 적자생존, 자연선택 등에‘위배되는’ 실제 사례들을 동물의 세계에서 뽑아내 진화론이 과연 생물계에 통용될 수 있는 진리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고, 추천사에 따르면 "진화론의 핵심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인 셈이다. 생물학 교과서에 진리처럼 서술된 이러한 진화론의 핵심 개념을 비웃는 책이 있다. 바로 <다윈, 당신 실수한 거야!>다. 이 책에서는 진화하면서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믿음에 의구심을 보이며 한없이 열등한 모습으로도 잘 살고 있는 개체들을 소개한다." 나로선 좀 싱겁다는 생각이 드는데, '강자'의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은 것 아닌가 싶어서이다(장자가 말하는 '무용의 용'도 있고).

차라리 내가 더 관심을 갖는 책은 <살아있는 지구의 역사>(까치글방, 2005), <생명 - 40억년의 비밀>(까치글방, 2007)이 소개된 바 있는 리처드 포티의 <삼엽충>(뿌리와이파리, 2007)이다(포티의 책들은 이한음씨가 번역을 전담하고 있다). 옛날도, 아주 오랜 옛날 생물 수업시간에만 들어보던 삼엽충. '고생대 3억 년을 누빈 진화의 산증인'에 대한 아마도 가장 자세한 책이지 않을까 싶다.

8. 예술

 

 

 

 

김춘미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김경의 <이야기가 있는 종이 박물관>(김영사, 2007)이다. 사진작가 김중만과의 합작인데, 소개에 따르면 "종이 물건에 담긴 우리 삶의 다양한 표정을 읽어내려 한 책"으로 "종이에 스며든 옛사람의 소박한 삶. 적게는 100년에서 많게는 300년을 훌쩍 넘은 오래되고 진귀한 종이 소품과 세간을 모았다. 따라서 이 책은 종이에 관한 박물학적 지식의 산물임과 동시에, 한국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인류학적 접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로선 쉽게 손이 가지 않을 책이다.

대신에 나라면 아무 주저없이 최근에 나온 러시아 미술/예술 관련서들을 집어들 것이다. 이병훈의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한길사, 2007)과 이진숙의 <러시아 미술사>(민음인, 2007)가 그 책들이다. 관련 페이퍼로는 '러시아 예술로의 초대'(http://blog.aladin.co.kr/mramor/1790172)를 참조하시길.

9. 교양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이 고른 교양분야의 책은 한스 귄터 가센 등이 쓴 <인간, 아담을 창조하다>(프로네시스, 2007)이다. 주목하지 못했던 책인데, 부제가 '생명 복제 시대에 돌아보는 인간 만들기의 역사'이다. 바로 떠오르는 책은 알렉산더 키슬러의 <복제인간, 망상기계들의 유토피아>(뿌리와이파리, 2007)이다. "호프만의 괴기소설 <모래 사나이>에서 시작해 데이비드 오스본의 <머리들>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상과학 소설에서 나타나는 인간 만들기의 꿈을 추적한다"는 전자와 짝을 지어 읽을 만하다. 그러는 참에 이번에 새로 번역돼 나온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도 다시 읽어볼 수 있겠다. 이젠 '생명복제시대의 예술작품'도 씌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10. 아동->전기

 

 

 

 

두 분의 아동도서연구가/아동문학가가 추천한 아동도서는 <예쁜 우리말사전>(파란자전거, 2007)이다. 나로선 과문하기 짝이 없는 분야인지라 그냥 좋은 책인가 보다고 기록해놓은 따름이다.

약간 변칙이긴 하지만, 아이도 자는 김에 '아동' 분야를 '전기'로 바꾼다. 그리고는 세 사람의 책을 고른다. 찰리 채플린의 <나의 자서전>(김영사, 2007)과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 그리고 자서전은 아니지만 수전 손택의 유고평론집으로 마지막 에세이들과 강연들을 모은 <문학은 자유다>(시울, 2007)가 탐나는 책들이며 새해에 읽어볼 만한 책들이다.  

 

 

 

 

이상 10개 분야의 책들 외에 가외로 고른 책은 '1월의 고전' <한비자>이다. 물론 예전에 나온 번역본들이 없지 않지만 최근에 이상수의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출간되어 바람을 넣는 탓에 기획하게 된 것이다. 편역서인 <이야기의 숲에서 한비자를 만나다>(웅진지식하우스, 2007)와 윤찬원의 <한비자>(살림, 2005)를 기존의 번역서들에 덧붙여서 읽어볼 수 있겠다. 새 정부도 들어서고 하는 김에 '제왕학'도 좀 알아두는 것이 신민의 자유와 권익을 챙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07.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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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촌스러운 사람이지만 로쟈님처럼 공선옥 소설은 촌스러워서 잘 안 읽었다죠. 근데 쓰신 글을 보니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누가 머라해도 소신있게 한 가지만 밀고 나간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 면에서 대단하단 생각도 들구요.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도 독특하고 재미있을 듯 싶네요.^^

로쟈 2007-12-29 13:20   좋아요 0 | URL
한가지만 밀고 나가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대로 '달인'의 경지가 되는 거겠죠.^^

수유 2007-12-2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탁과 나보코프, 그리고 러시아 미술.
그리고 흥미를 안끌래야 안끌수 없는- 말이 요상하다요.
다윈 당신 실수한거야. 정도.

로쟈 2007-12-29 18:48   좋아요 0 | URL
<러시아미술사>는 저도 오늘 샀습니다...

Mephistopheles 2007-12-2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을 열심히 채우고 있습니다..꾸역꾸역..^^

로쟈 2007-12-29 23:06   좋아요 0 | URL
이제 돈벼락 맞을 때까지 기다리시면 되겠습니다.^^;

이리스 2008-01-08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러시아 미술사 샀는데ㅇㅅ. ㅎㅎ 공선옥 소설은 촌스러워서 안 읽구요.. 으흠..

로쟈 2008-02-03 23:29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