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건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와의 인터뷰 기사이다. 그걸 옮겨놓으려고 하다가 최근 문제가 된 '영어 몰입 교육'에 관한 기고 기사를 대신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078000/2008/02/021078000200802180698012.html). 두어 주 넘게 화제가 되고 있으니 '이달의 토픽'이라고 부름직하다(물론 '이달의 과일'은 '오렌지'인 것이고). 더불어 아침에 읽은 박노자 칼럼도 덧붙여놓는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70368.html).

한겨레21(08. 02. 18) 지적 식민지, 잿더미가 된 우리 말

예나 지금이나 약소국이란 강대국의 말을 열심히 배워야 살 수 있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힘든 법이다. 이 운명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완강해서, 때로 우리는 이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자주 의식의 산물에까지 이 힘이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놀라는 경우가 있다. 조선말과 조선글자를 일치시키겠다며 만든 훈민정음이, 오히려 중국 발음을 이상적인 발음으로 상정하고 이를 실현시키려는 표기원칙을 제시하는 일이 이런 예 중 하나라 하겠다(‘중국’을 ‘듕귁’으로 발음하라는 동국정운식 표기원칙이 이것이다).

이는 우리 문자의 어떤 면을 폄하하려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약소국의 운명과 이것이 배태하는 순응적 삶의 관성은 문화적 무의식의 뿌리를 점령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대개 이런 상황에서 강대국의 말은 ‘외국어’가 아니라 사실상 ‘모어’(母語)의 지위를 대체한다. 그리고 이런 언어의 식민화 상황은 삶의 식민화와 다를 바 없는 사태를 낳곤 한다. 여기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언어와 사유 간의 소외 상황이 심화된다는 점일 것이다. 자기 사유를 담는 모어의 지위는 지극히 격하되는 반면, 자기 사유와 무관하게 힘을 가진 강대국의 언어는 물신화돼, 남의 나라 말이 아무런 내용도 없이 ‘신성한 기호’로 현성해 현실에서 전능한 힘을 얻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민족대학’도 ‘글로벌’하게 영어 강의
한국사의 주요 지배세력들의 일단의 출세 사례는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원나라가 위세를 떨치던 13세기 고려 권문세족에는 몽고어 역관 출신이 많았고, 조선의 주요 개국세력인 조준이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 말을 잘하던 유명한 역관 집안 출신이었으며, 17세기 명청 교체기에 조선 부호들 중에는 다시 변한 세상에서 만주어 통역을 하며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역관들이 많았다.

1900년대 초반까지 조선사 어디에도 특별한 자료가 없는 별 볼일 없던 이인직이 한일병합을 사실상 주도하고, <만세보>와 같은 친일 신문의 주필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도, 이완용조차 잘할 줄 모르던 일본어를 그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광용의 <꺼삐딴 리>에는 ‘일본어-소련어-영어’로의 변신을 통해, 일제시대-인공 시절-1950년대 이후를 초인적으로 살아나오는 카멜레온적 인물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들은 더 이상 ‘반역사적’ 풍자 대상이 아닌 것 같다. 대통령조차 우리말로 대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글로벌’ 시대에, 철저히 강대국의 언어만으로 자신의 생존전략을 극대화한 그들은 오히려 ‘글로벌 선구자’들로 재평가돼야 하는 게 아닌가? 이미 세상은 ‘민족대학’을 전통적 상징으로 외치던 국내의 한 유명 대학조차 ‘글로벌 프라이드’로 모토를 변경한 지 오래된 시대가 되었다. 이 ‘글로벌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으로 자리잡아 가는 것이 이른바 ‘영어 강의’다. 단지 영문과에서의 영어 강의가 아니라, 전공을 불문하고 모든 강의에 의무적으로 영어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했으며, 신임교수는 영어 강의를 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야만 교수 임용 자격이 주어지는 학교들이 늘어가고 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간강사를 하며 사는 나 역시 앞으로 전임교수가 되려면 이 서약서를 써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난 도무지 내 전공을 영어로 강의할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난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를 어떻게 글로벌하게 발음해야 할지를 모르겠으며, 이 민요조의 율격을 어떻게 글로벌하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대 한국어로도 번역이 쉽지 않은 <관동별곡>의 수많은 고전어들을 어떻게 영어로 번역해서 수업해야 할지 모르겠으며, <춘향전>에 나오는 수많은 사투리나 해학과 풍자로 넘쳐나는 민중적 어법들, 자진모리·중모리·휘모리로 이어지는 그 숨가쁘며 때로는 유장한 우리말의 호흡을 어떻게 글로벌하게 낭독하고 번역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륀지’ 요구하는 반지성적 흐름

뜻글자(표의문자)로 이루어진 한문학을 어떻게 소리글자(표음문자)인 영어로 번역할 수 있는지도 난감하다. 예컨대 ‘道’는 ‘road’(길)인가 ‘law’(법)인가, ‘logic’(논리)인가 ‘principle’(원리)인가, 그도 아니면 그냥 ‘do’로 번역해야 하는가? 한국어의 어법 체계를 흔들며 다의성을 증폭시키는 김수영 시의 그 모호하고 격렬한 언어의 정치성을 도대체 어떻게 영어로 번역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촌스러운 나는 한국말로는 쉽게 떠오르는 서정주 시의 마술적 이미지와 토착적 방언의 세계가 도무지 글로벌 스탠더드화돼서는 이미지로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이 능력에 관한 한 현재에도 앞으로도 전혀 가망이 없다.

바야흐로 ‘최고경영자(CEO) 총장’ 시대다. 대학은 이제 학문이나 교육과는 전혀 무관한 장사꾼들의 천박한 시장논리가 대단한 선진 정책인 양 거짓 선전되고 또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먹히는 시장통이 돼가고 있다. 평생 토목건축업에 종사하며 부동산과 주식으로 부를 축적한 대통령 당선자가, 새 건물 짓기와 대학기금 마련 같은 것을 학문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신과 비슷한 CEO 총장을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그 인수위원장이 주도가 된 얼치기 글로벌리즘이 과목 불문의 ‘영어 몰입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대학뿐만 아니라 초·중등 교육현장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려던 찰나에 간신히 ‘유보’됐다. 말의 식민화가 삶의 식민화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 우리 역사의 뼈아픈 사례이긴 하지만, 21세기에 이러한 사례의 극복이 아니라 오히려 노골적인 심화의 모습을 보는 심정은 비통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무슨 민족주의적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이러한 말의 식민화가 말과 사유의 괴리를 부추기며, 내용 없는 껍데기 언어의 물신성을 더욱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정책은 사고의 심도를 높이고 지적 시야를 넓히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적 관심이 아니라, ‘오렌지’를 ‘아륀지’로 발음할 줄 아는 기업형 인간이 필요하다는 ‘글로벌 장사꾼들’의 요구 이상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그리고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대한민국은 사물에 대한 복합적 사고와 세계에 대해 성찰적 시야를 열어주는 깊이 있는 독서가 아니라, 토익·텝스 시험을 위해 자신들보다도 훨씬 일천한 교양 수준을 지닌 원어민 영어 강사들에게 쩔쩔매고 매달리면서 소모되고 있다. 이 현상이 참으로 위태로운 것은, 이것이 사회 전체의 지적 깊이를 현저히 ‘얇고 평평하게’ 하는 반지성적 흐름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숭례문이 불타는 것만 보이는가
그리스어와 계보가 연결돼 있지 않은 독일어는 원래 유럽어 중에 가장 ‘미개한’ 궁벽한 언어였다. 그러나 그 ‘시골말’을 통해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사유 능력을 보여준 것이 괴테나 칸트, 헤겔이나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같은 지적 거인들이었다. 그들 때문에 독일어는 세계적인 언어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진정으로 야심 있는 지도자라면, 자기 언어로 말하고 사고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강대국의 언어를 맹종할 것이 아니라, 우리 언어로 이루어진 지적 문화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우리말로 된 책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번역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말의 지위를 세계적인 것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지적 식민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여, 숭례문이 불타는 것만 보이시는가? 이미 오래전에 잿더미가 된 것은 당신들의 사고요, 우리의 말이다.(함돈균 문학평론가)

한겨레(08. 02. 19) [박노자칼럼] ‘영어 제국’, 종말이 온다

1792년 가을, 혁명의 화염에 휩싸인 프랑스의 국민 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했다. 영국은 동아시아로의 경제적 침투 기반을 다지고자 정객 조지 매카트니(1737∼1806)를 대사로 위촉하여 중국행을 명했다. 러시아의 통상 요구에 부닥친 일본의 에도 막부는 영주들에게 연안 방어 강화를 명하여 유럽인들의 도전에 대한 대응책을 모색했다.

세계가 요동쳤던 바로 그때, 조선의 통치자들은 무엇에 몰두하고 있었을까? 1792년 10월19일, 국왕 정조는 신하들을 불러 과거 답안지에 패관소품(稗官小品-중국 소설의 문체)을 이용하면서 경전류의 우아한 문체를 멀리하는 일부 지식인들을 지탄하고 중국 소설 수입 금지를 명했다. 이옥(1760∼1815) 등 문단의 이단아들의 벼슬길을 막을 ‘문체 반정’은 그렇게 예고됐다. 세계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와 있었던 시점에 중국 소설 문체의 ‘악영향’을 국정의 핵심 문제로 삼은 정조에게 조선의 공용어로서의 한문의 수명이 100여년밖에 남지 않았음을 누군가 알려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뛰어난 국왕이었던 그도 ‘성현의 어문’인 한문이 영원토록 세계의 중심적 위치를 유지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전국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어 몰입교육과 ‘오렌지’ 발음을 갖고 열변을 토하는 대한민국 국정 책임자들을 보면서 필자는 패관소품 문체의 퇴치에 올인했던 200여년 전의 국왕을 떠올려본다. 특정 제국이 영원하리라는 맹신과 어리석음으로 나라를 그르친 적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또다시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려 한다. 몰입교육을 논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볼 것이 있다. 과연 영어가 ‘공부의 중심’이 돼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문제다. 일부 특수 직종(학자·기자·외교관 등)을 제외한 다수에게 외국어가 필요한 것은 교역 등 회사에서의 대외 업무 수행과 외국여행 때일 것이다.

무역부터 보자. 2007년에 한국은 영어가 통하는 미국(12.3%), 영국(1.8%), 독일(3.1%)보다는 중화권인 중국(22.1%), 대만(3.5%), 홍콩(5.0%)에 약 2배 더 많은 물건을 팔았다. 외국여행도,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중국과 일본 여행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미국으로 간 이들은 7.2%에 그쳤다. 작년 입국자 통계를 봐도 중국·대만(21%)과 일본(35%)은 미국(9%)과 비교해서 한국 관광산업에서 훨씬 더 중요한 존재다. ‘실용주의적’ 시각으로 외국어 수요를 파악하면 학교에서는 앞으로 제1외국어를 중국어로 바꿀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학술·기술·국제정보망의 주요 언어로서의 영어의 영향력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이나, 중국어 구사 인구(12억여명)가 영어 구사 인구(약 3억4천만명)에 비해 거의 4배 가까이 된다는 점이나, 구매력 기준으로 계산되는 중국의 국내총생산이 2026년쯤에는 미국을 능가할 전망이어서 결국 이 우위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특히 동아시아권에서는 중국어가 공용어로 통할 상황이 그보다 훨씬 이른 약 15∼20년 안에 올 것에 대비하면서 영어 몰입교육보다는 영어와 중국어 교육 사이의 균형과 효율성을 논해야 한다.

한문을 절대 신성시하고 고전 문체를 벗어나는 일까지도 일탈로 간주해 앞을 보지 못했던 조선 사대부 못지않게 지금 한국 사회 귀족들은 자신들의 문화자본인 영어를 국가적 물신으로까지 만들려 하고 있다. 실사구시 정신이 결여된 그들의 언어관은 자연스레 도래할 동아시아 시대에 역행하고 우리의 미래를 그르칠 뿐이다.(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08. 02. 19.

P.S. 애당초 옮겨놓으려고 했던 인터뷰 기사(http://h21.hani.co.kr/section-021067000/2008/02/021067000200802130697013.html)에서 흥미를 끌었던 대목. '노회한 이데올로그'도 간혹 입바른 소리와 예리한 통찰을 내놓는다는 걸 알게 해준다.

이명박 당선자가 내놓고 있는 대기업 중심의 성장 위주 정책 등을 보면 지나치게 보수층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이명박 당선자가 하는 것을 너무 보수적이다, 성장 위주적이다, 효율만 추구한다, 이렇게 말할 만한 게 별로 많지 않다. 인수위에서 내놓은 몇 가지 정책을 미국의 기준으로 보면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보다도 훨씬 왼쪽이다. 좌파정권 안에서 좌우 대결을 하다 보니, 자연히 왼쪽으로 끌려간 면이 있다. 다만 영어교육을 너무 중시하는 것이 지나치게 효율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영어를 잘해야 국가 경쟁력이 있다는 허상을 하나 만들어놓고 영어수업 말고도 영어로 수업을 하겠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명박 교육정책이라는 것은 방법론만 이야기하면서 교육의 목표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가장 중요한 국어, 국사 교육을 소홀히 하고 그 시간에 영어교육을 하겠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무국적 교육이다. 인수위 안은 학원강사들이 모여서 아이디어 짜낸 것처럼 아주 지엽적이다.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도 그렇고 한반도 대운하 계획도 그렇지만, 이명박 당선자가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한다는 비판도 있다.
=문제는 내용이 정확한가인데, 그렇다고 대운하 같은 것을 논란에 붙이면 영원히 논란으로 끝날 것이다. 서울시장 재직 시절에도 보면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던데 이게 이명박 스타일이다. 이게 효과가 있을 때가 있다. 동시다발적으로 하다 보면 반대 세력도 전선이 여러 개니까 분산이 될 것이고, 그렇다 보면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갖게 돼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귀가길에 지승호 인터뷰집 <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시대의창, 2008)을 손에 들었다. 책이 나온 건 낮에 알았다. 올 출판계의 최대 기대주 중의 한 사람이 우석훈씨인데,이 책은 에피타이저로 미리 나온 것처럼도 보인다. 책 뒷갈피에 시대의 창에서 나온 책들이 몇 권 소개돼 있길래 리스트로 만들어둔다. 오다가다 몇 권 읽게 될지도 모르기에...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 '88만원 세대'를 넘어 한국사회의 희망 찾기
우석훈.지승호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2월
13,500원 → 12,150원(10%할인) / 마일리지 67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3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2월 18일에 저장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 정인교 VS 이해영 맞짱토론
이해영.정인교.정남구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3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2월 18일에 저장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
장하준 지음, 지승호 인터뷰 / 시대의창 / 2007년 11월
13,500원 → 12,150원(10%할인) / 마일리지 67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3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2월 18일에 저장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13,500원 → 12,150원(10%할인) / 마일리지 67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3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2월 18일에 저장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이번주 <씨네21>을 읽었다. 가판에서 '코언 형제에게 찬사를!'이란 문구를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코언 형제(내겐 '코엔 형제'가 더 익숙한다)는 곧 개봉될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코언 형제이다. 더불어 홍상수의 신작 <밤과 낮>에 대한 기사도 들어 있었으니 손이 안 갈 수 없었다(그리고 든 생각. 좋은 영화들이 나와야 영화잡지도 때깔이 난다!). 기억엔 작년인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칸느영화제에 출품됐었는데 나는 그때서야 코맥 매카시란 생소한 거장이 원작자란 걸 알게 됐고 그의 책 몇 권에 대한 판권을 간접적으로 문의한 바 있었다. 그때 이미 국내의 한 무명 출판사로 넘어갔다고 전해 들었는데, 최근에 나온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사피엔스21, 2008)를 보니 그게 '사피엔스21'이었던 모양이다(특이하게도 주로 입시문제집들을 내는 곳이다. <크리티카> 같은 무크 비평지와 함께). 올해 들어 가장 기대할 만한 원작과 영화에 대한 소개기사들을 옮겨놓는다.

매거진t(08. 02. 18) [이다혜의 BOOK]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1. 그는 어떤 사람이오, 궁극의 악당?
그런 식으로 부를 사람은 아니지.
당신이라면 어떻게 부르겠소.
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이지.
그건 범죄가 아닌데.
요점은 그게 아냐. 하나 말해 줄까.
말해 보쇼.
자넨 그와 거래를 할 수 없어. 다시 말하지. 설령 자네가 그에게 돈을 돌려준다 해도 그는 자넬 죽일 거야. 그와 얽혀들고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으니까. 다 죽었지. 살 확률이 거의 없어. 아주 특이한 인간이거든. 원칙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돈이든 마약이든 뭐든 그런 것 따위를 다 초월하는 원칙.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맥카시

2.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줄거리는 이렇다. 모스는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만이 남아 있는 사막의 살육 현장에서 거액이 담긴 돈가방을 발견해 집으로 가져온다. 그 가방을 발견한 순간부터 모스는, 이 일의 끝이 단 하나 뿐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모스는 시거라는 추격자에게 쫓기며 도주를 시작한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보안관 벨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음울하게 바라본다.

3. 코맥 맥카시는 서부의 작가다. 현대 서부, 멕시코와의 국경 지대에 존재하는 삶과 죽음의 방식이 그의 책에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외에 <피의 자오선>을 관통해 국경 삼부작을 지나 <길>에 이르는 그의 서부에는 처연함만이 핏빛으로 빛난다. 소년들은 길 위에서 너무 많은 죽음을 맞는다. 간결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암시하는 문장들은 책을 덮고 난 뒤 오랫동안, 입 속에서 모래의 칼칼함을, 뜨겁고 건조한 대기의 텁텁함을 느끼게 만든다.

4. 코맥 맥카시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건 잘해봐야 본전이다(라고 쓰고 멍청한 짓이다, 라고 읽는다). 코엔 형제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영화화한다는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이 그랬다. 당시 나는 맥카시의 소설 5권을 한 달 내내 연달아 읽은 직후였고, 눈만 감으면 소설 속 장면이 꿈 특유의 과장된 필터를 거쳐 꿈으로 형상화되곤 했다. 아무래도 코엔 형제와 맥카시의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이 미친 게 <분노의 저격자>였다. 영화는 책을 그대로 한 땀 한 땀 옮기듯 만들어졌고(몇 부분은 생략되었지만 이 정도면 고스란히 옮겼다는 말에 준한다), 영화는 책과 또 다른 방식으로 살육의 시를, 처연한 묵시록을 써내려갔다.

5. 한동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던 소설을 읽는 이유, 영화를 보는 이유가 이 한 작품의 소설 원작과 영화 버전으로 수렴되었다. 만일 책을 다 읽고도 영화를 다 보고도 이게 그저 서부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6. 이 나라는 사람들에게 관대하질 않아. 하지만 끝까지 책임을 묻는 경우도 없는 것 같아. 참 묘한 일이지. 끝까지 추궁을 안 하니 말야. 이 하나의 가족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봐. 내가 아직 여기서 무슨 영화를 보려고 얼쩡거리고 있는지 모르겠어. 다들 젊었었지. 그 중 반은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몰라. 여기에 뭐 좋은 점이 있을까? 그래서 내가 한 번 생각해 봤지.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 나라에는 해결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못 느끼게 됐을까? 그런 걸 느끼질 못하지. 나라는 그저 나라일 뿐이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296~297)

필름2.0(08. 02. 14) 진정한 웰메이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사막에서 사냥을 하던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이상한 학살 현장을 발견한다. 시체들이 널려 있고, 망가진 트럭 뒤엔 마약 더미가 가득하다. 또 다른 트럭 운전석에는 유일한 생존자가, 조금 떨어진 그늘엔 200만 달러가 든 돈 가방이 있다. 생존자 대신 돈 가방을 챙긴 모스는 한밤중 현장을 다시 찾지만, 마약 딜러들에게 쫓기게 된다. 그러나 더 끔찍한 추격자는 따로 있으니, 마약 조직의 의뢰를 받은 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다. 마침 지역 보안관 에디 톰 벨(토미 리 존스)이 쉬거의 독특한 살인 기법을 알아보고, 필사의 탈주를 감행하는 모스와 유령 같은 사내 쉬거, 보안관 벨 사이의 괴이한 추격전이 시작된다.

‘서부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미국 작가 코맥 맥커시의 2005년 동명 소설을 코엔 형제가 직접 각색한 스릴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위대한 서스펜스를 소유한 영화다.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과 무너져가는 세계, 자기 자리를 잃어가는 사람들을 고요히 성찰하며 씁쓸한 어른의 시선을 보여준다. 거의 모든 시퀀스에 냉정한 유머와 조여드는 서스펜스, 소름 끼치는 추격전을 뒤섞는 노련함은 코엔의 영화 중 최고다.

1980년대 황폐한 서부 텍사스 국경 지역의 풍광을 훑는 오프닝부터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를 비집는 카메라와 이미지는 <분노의 저격자>(1984)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많다(*원제는 <블러드 심플>. 코엔 형제의 데뷔작이자 내가 제일 처음 본 그들의 영화). 하지만 긴장의 밀도는 훨씬 높다. 손에 땀을 쥐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을 얼얼하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쉬거가 산소탱크에 연결된 호스로 단숨에 사람을 죽여버릴 때부터 등장하는 기묘한 웃음과 살벌한 긴장은 내내 이어진다. 쉬거가 동전 하나로 식료품점 주인의 목숨을 농락하는 순간, 모스가 마약 딜러들이 푼 맹견에게 쫓기는 순간, 코엔 형제의 괴이한 리듬감과 유머감각은 탄복스럽다. 쉬거가 돈 가방 속 추적기의 신호를 따라 모스가 묵고 있는 모텔 방문 앞으로 다가가는 순간, 영화 후반 살육이 벌어진 이후 방 안에 숨은 쉬거와 문 밖에 선 보안관 벨의 모습이 뚫린 자물쇠 구멍 사이로 비치는 순간 등등 곳곳에 심어진 ‘침묵의 서스펜스’는 전율의 체험을 안겨준다.

살인적 서스펜스의 진수는 악의 결정체 쉬거로부터 온다.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과 유령 같은 표정으로 희대의 살인마 쉬거를 소화한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는 엄청난 충격으로 남는다. 늙은 보안관 벨 역의 토미 리 존스, 인간 욕망의 표상 모스 역의 조쉬 브롤린 등 주변 모두를 압도하는 귀신같은 연기력이다. 영화음악가 카터 버웰의 미니멀한 사운드와 정교한 편집, 빽빽한 침묵 속을 가르는 절묘한 산탄총 사운드 디자인, 야만적이면서도 신화적인 텍사스의 풍광 속에 절망적인 인간들의 대결을 잡아낸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까지 모든 요소들이 최상급이다. 웰메이드에도 어떤 경지가 있음을 정말 실감하게 된다.

08. 02. 18.

P.S. 영화에 대해서는 예고편(http://www.youtube.com/watch?v=YOohAwZOSGo)과 자세한 리뷰 '오, 형제여! 여기까지 왔는가'(http://www.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5081)를 더 참조할 수 있다. 생각해보니 그의 소설들도 작년에 구입했다! 어디에 두었더라...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2-18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8 22:35   좋아요 0 | URL
보셨군요.^^ <추격자>와 함께 평론가들이 요즘 열심히 강추하고 있는 영화더군요...

2008-02-18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8 23:35   좋아요 0 | URL
저는 리뷰 읽는 걸로 때우는 영화들이 많아져서요.--; 그래도 두 영화는 볼 계획입니다...

드팀전 2008-02-18 23:12   좋아요 0 | URL
하비에르 바르뎀은 아카데미에서 조연상 받을 성 싶은데..과연 어떨지 두고 봐야지요.^^

로쟈 2008-02-18 23:34   좋아요 0 | URL
주연이 아니고 조연인가요??

twoshot 2008-02-19 01:12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다니엘 데이-루이스한테 갈거 같고 하비에르 바르뎀에겐 조연상이 가지 않나 싶네요. 그나저나 저에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소설보다 영화가 더 강했습니다.

로쟈 2008-02-19 06:58   좋아요 0 | URL
저는 당연히 주연상 후보인 줄 알았더니 조연상 후보로군요. 주연은 따로 있단 얘긴데, 의외입니다.^^;

소경 2008-02-19 20:17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구미가 땡기는 영화네요. 그냥 심상치 않다고만 생각했는데 에피소드들도 읽을거리가 많겠네요. 정말 21일이 기다려져요

로쟈 2008-02-19 20:45   좋아요 0 | URL
네, 끝나가는 방학의 아쉬움을 좀 달래줄 것 같습니다...

turk182s 2008-02-22 00:48   좋아요 0 | URL
이거 초긴장 영화 입니다.. 안볼려다가 본건데 정말 솔직히 그냥 누가보라길래봤는데 예전에 본 "파고"하고 웬지 냄새가 비슷하길래,,, 알아보았더니 역시나 코엔감독이더군요...특히나 사이코패스의 엽기적행각과 각인물들의 조용한 갈등과 개성들이 스토리를 흥미롭게합니다. 다보고 너무긴장했는지 나중에 맥이빠지더군요,정말 강추합니다.
 

며칠 전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요즘은 '소설가' '시인' 혹은 '에세이스트'로서의 전력보다는 '보수 이데올로그'로 더 자주 '호명'되는 작가 복거일씨와의 인터뷰 기사이다.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 1998) 이후에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그 책도 사실 고종석의 '권유'로 읽었다), 따져보니 그가 말 많았던 '영어 공용화론'을 제기한 지 어느새 10년이다. 그 '잃어버린 10년' 이후에 다시금 영어가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이다. 복거일의 생각은 일견 나이브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가령 자신이 '주변부 지식인'이라고, '기지촌 지식인'이라고 내놓고 말하는 지식인은 많지 않다. 주로 그런 일들을 하면서도). 시간을 아껴준다는 얘기이다. 시간은 돈이잖은가...

경향신문(08. 02. 14) “지식인은 자기의사 펴야 한다”

보수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차기 보수정권은 그 첫번째 정책으로 영어 교육 강화를 내세웠다. 두 사안을 한 묶음으로 놓으면 뇌리를 스치는 인물이 있다. 작가 복거일씨(62)다. 10년 전 홀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고 외쳤던 복씨. “독도 문제에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등 우파 지식인들이 드러내놓고 찬성하기 어려운 견해를 공론의 장에 던져온 그다. 그래서 최근엔 작가보다는 보수 이데올로그로 불린다.

영어 몰입교육이 한창 논란을 일으키는 와중에 그를 만났다. 보수 이데올로그들이 말을 아끼는 상황이지만 그는 선뜻 나섰다. “지면이 있으면 자기 의사를 펴야 한다”는 게 그의 변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토의와 설득이 부족했지만 방향은 옳다”면서 영어 공용화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밝혔다. 독설에 가까운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중심 문화를 인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뭘 하겠다고 나오면 의기는 가상하지만 현실적으론 열악한 형태의 문화를 재발명하는 것밖에 안된다”고도 했다. ‘아메리카 제국’이 중심이 된 지구촌의 외곽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주변부 지식인’이라는 인식이 문제 의식의 출발점이라고 부연했다.

인터뷰 중간에 “우리나라 역사 교과사는 국제적인 기준에 따라 객관적으로 성립된 것이 하나도 없다. 주변부의 빈약한 역사, 열등감을 감추려고 사회가 공모한 것”이라거나 “사회적으로 문학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환상”이라는 등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말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의 문학 생활에 대한 아쉬움도 비쳤다. 그는 “시와 소설만 쓰려고 했는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옹호할 지식인이 없어서 나섰다”면서 “한창 생산적일 때 혁명적인 작품 하나 못 쓰고 정력과 시간의 대부분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데 바친 것이 아쉽다”고 했다. 데뷔 소설 ‘비명을 찾아서’ 이후 이를 넘어서는 작품을 내놓지 못한 아쉬움으로 들렸다.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연극을 하나 올리려고 희곡을 준비 중입니다. 한·미 동맹이 우리 사회 안보와 번영의 기본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인데 그동안 그것을 너무 훼손했습니다. 이명박 당선인께서 한·미 동맹의 회복을 외교의 핵심으로 삼는 것에 부응해서 여기에 맞는 연극을 해보려고 해요. 지금 주한미군들이 (반미 감정에 대해) 섭섭해합니다. 미군이 6·25 때 엄청난 희생을 치렀고, 외지에 와서 고생하고 있는데, 2002년 대선 때 성조기가 찢어지는 것을 보고 심정이 어땠겠어요. 그분들에게 (성조기가 찢어진 게) 우리 국민 다수의 뜻은 아니었고,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서 나온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6·25 전쟁을 미군 병사의 시각에서 본 연극을 올리려고 해요. 미군부대에 찾아가서 공연할 겁니다. 우리 배우들은 (한국어) 대사를 할 거고 청중은 미국인이니까 (영어) 자막을 무대에 투사해야 합니다. 우리말 대본과 영어 대본을 같이 쓰고 있는데, 영어 대본이 생각보다 어려워요. 제목이 ‘잊혀지지 않는 전쟁’입니다.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잊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요.”

-영어 말씀을 하셨으니, 여쭙겠습니다. 1998년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서 ‘국제화 시대에 영어를 배우는 건 필수고, 영어를 결국 영어를 배워야 할 수밖에 없다’는 영어공용화론을 제기하셨습니다. 영어몰입 논란까지 부른 현 정부 영어정책을 어떻게 보십니까.

방향은 옳고 의욕도 참 좋아요.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영어를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데,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현재의 영어교육은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훨씬 늘려야 합니다. 그런데 인수위가 앞질러 나갔다가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거든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 과감하게 의견을 내놓고 시민들이 원하지 않으면 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실수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지금이 선거철이라서 더욱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초·중등 교사들이잖아요. 그분들이 바꿀 수 있는 능력이나 의향에 한계가 있잖아요. 그걸 고려해서 충분한 토의와 설득을 선행했어야 하는데, 불쑥 목표를 내세운 셈이 됐지요. 인수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걱정하고 거기에 대해 저항하게 됩니다. 정권이 들어서서 집행하면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정책이 나오겠죠.”

-중심부인 미국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주변부 지식인‘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폈습니다.

“현재 지구에선 미국이란 나라가 수도가 됐고, 중심지가 돼 버렸습니다. 동아시아 자체가 주변부가 됐습니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 환경을 이해해야 효율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어요. 중심부와 우리 사이의 문화적 격차를 줄이는 것이 합리적인 방안이죠. 그게 주변부 지식인이 할 일이에요. 주변부에 있기 때무에 우리의 전략은 주변부의 전략이어야 합니다.”

-주변부니까, 지식인의 환경은 더 나빠지는 것 아닙니까.

외국에서 직수입한 게 싸고 자연스러우니까, 우리가 허브가 되기는 힘들겠죠. 창조적인 작업은 중심부에서 하고 우리는 그것과 연계돼 부차적인 역할을 하겠죠. 중심부로 통합되니까, 창조적인 작업은 나오기 어렵습니다. (비관적인 전망을 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지식인으로서 저 혼자 작업하는 거보다 (세계인들과) 같이 공동으로 작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계화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개인들에게 활동무대를 넓혀주는 겁니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문제는 그것을 이용해서 국내에서 정치적인 자산을 쉽게 얻으려는 정치가들”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등 금기에 가까운 발언을 하셨습니다.

“독도 문제는 그냥 놔두는 게 제일 좋습니다. 풀 길이 없어요.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조금만 양보해도 그 정권은 그날로 무너집니다. 다만 일본은 여유가 있어서 지식인 중에 ‘한국이 옳다’는 사람이 나와요. 우리나라는 실수로 잘못 표현하면 그날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가 있잖아요. 이런 게 지적 풍토를 척박하게 만듭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이 공과가 있지만 시대에 주어진 핵심 과업을 잘 수행했다면서 긍정 평가를 하신 바 있습니다. 우파 진영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시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데 동의합니까.

잃어버린 10년, 저도 자주 씁니다만 어떤 면에서 보면 치러야 될 과정이었어요. 길었죠. 김대중 정권으로 끝냈으면 좋을 건데…. 역사적인 정황을 생각하면 호남 대통령이 언젠가 한번 나왔어야 했어요. 그거는 밟아야 할 수순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신 것은 아쉽죠. 좌파정권이 두 번 들어설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분명히 나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좌파이념은 청사진일 때는 멋진데, 막상 적용해보면 많은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 판명됐거든요. 값진 경험으로 남을 겁니다.”

-같은 보수논객으로서 이문열씨와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문열씨가 ‘유교적인 보수주의자’라면 ‘복거일은 글로벌한 보수주의자’로 분류하곤 하는데.

이문열씨와 비교적 친한 사이입니다. 자주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도 비슷합니다. 우파라고 할 때는 같은 편에 섭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극단적인 자유주의자일 거예요. 개인의 자유를 한 껏 늘리고 사회적인 간섭은 되도록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죠. 예컨대 매춘이라든가 인공수정 등 사회적인 간섭이 심한 것에 대해서도 당사자의 판단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소수죠. 이문열씨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이지만, 자유주의자는 아닌 것 같아요. 아마 영어공용화론 같은 것도 다를 거예요. 저는 ‘개인들이 한국어도 쓰고 영어도 써서, 자기에게 편리하고 좋은 언어를 쓰고 자식에게도 가르치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문열씨는 아예 거기에는 동조하지 않을 겁니다. 이야기는 안해봤지만, 그분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서 우리 말이 차지하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볼 겁니다.”

-논쟁적인 화두를 던지셨지만 이문열씨처럼 ‘시대와의 불화’를 심하게 겪지는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이문열씨는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저는 비교적 무명이잖아요. 그 차이 같아요. 이문열씨 주장은 과격하지 않고 저같이 이론을 세워서 주장한 것도 아니거든요. 제가 핍박을 받으면 더 많이 받아야 하는데 이문열씨가 좌파의 표적이 된 것은 유명세를 치른 면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비판을 받으면 대개 응수를 안합니다. 지식인의 책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지, 자기의 주장이나 아이디어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보호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저는 인터넷에도 안 들어가요. 주위에서 시끄럽다고 하면 ‘그러냐. 반응이 있어서 좋다’고 하고 끝냅니다. (요즘도 인터넷에 안들어 가시나요) 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어떤 글에서 ‘나는 복거일은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이며,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니 보수주의니 하는 건 편의적으로 동원되는 것일 뿐이라고 본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대쪽에 계신 지식인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나는 선배들의 글을 읽으면서 공부했으니까 뒤에 나오는 사람들의 글은 잘 못 읽어요. 강준만씨 같은 사람들의 글은 신문 같은 데서 보는 정도지 그 사람의 책을 사서 읽어본 적은 없기 때문에 잘 몰라요. 저에게 비판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죠. 그 사람들은 비판을 하더라도 저 때문에 좌표를 어느 정도 수정할 겁니다. 본인들은 못 느끼겠지만 저 자신은 그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굉장히 거세게 비판한다는 것은 무언가 영향을 줬다는 뜻이거든요.”

-내시는 책들은 많이 팔립니까.

“많이 팔릴 리가 있나요. 돈은 못 벌고 출판사에 미안하지 않을 정도로 나갑니다. 그게 지식인에게 건강해요. 돈을 많이 벌면 장당 만원을 받고 원고지를 메우지 못합니다. 맥이 풀리잖아요. 나한테 글 청탁오면 고맙게 여기고 자판 두드리는 게 고맙죠. ‘이 원고를 쓰면 안식구가 시장에 나가서 시장 볼 돈은 된다’고 생각하면 쓸 맛이 나죠. 그게 맞는 거예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무슨 공부를 하시는지.

진화론을 경제학에 도입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진화론 시각에서 경제학 이론을 보고, 사회철학을 진화론에 맞추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 방향으로 책을 썼고, 좀더 다듬어서 정교하고 발전된 사회철학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사회철학들을 재검토하고 제 나름으로 공헌해서 독창적인 무엇을 하려고 해요. 제가 볼 때 이거는 가능성이 보여서 여기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까.

잊혀질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쓴 작품들 몇은 남을 거 같습니다. ‘비명을 찾아서’ 외에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이란 작품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한국어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기 때문에 5세대 뒤에는 독자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영어공용시대가 되면) 최인훈 선생은 번역이 되겠지만, 복거일은 번역이 안될 거 같아요. 말할 수 없이 섭섭하죠.”

-본업이 소설 쓰기인데,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고 싶습니까.

“소설로 걸작을 쓴다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작품은 사회적인 환경과 어우러지는 것이거든요. 제가 그런 작품을 쓸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보죠. 어차피 우리는 1950~60년대, 박정희 정권까지 사회상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고 벗어날 수 없어요. 그 한계를 인식해야죠.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면 ‘나는 왜 좋은 작품을 썼는데 사회는 알아주지 못하느냐’는 불만이 나와요. 그것이 작가들로 하여금 작품 속에 교훈을 넣게 하고 장광설을 늘어놓게 하지요. 그런 작가들은 늙은 거예요. (소설은 자주 안 쓰실 겁니까) 쓰긴 써야죠. 기대를 않다가 특별히 뭐가 잘 맞을 때 좋은 작품이 나오잖아요. 그런 기대를 갖고 사는 겁니다.”

-영상매체의 등장으로 소설이 위기를 맞았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소설의 미래는 어떻게 보십니까.

15년 전인가, 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에 대본을 주는 장르로 바뀔 거 같다’고 했다가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고전적인 형태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지금의 판소리 명창처럼 틈새시장에서 살아남겠죠.” (이용욱기자)

08. 02. 17.

P.S. 인터뷰에서 눈에 띄는 건 문학에 대한 복거일의 양가적 감정. 문학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고 믿고 한국어의 미래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작가가 자기 작품에 나름대로 애착을 보인다는 건 좀 특이한 일 아닌가(그는 왜 아예 영어로 글을 쓰지 않는 것일까?). 또 한가지는 진화론을 경제학에 도입하고자 하는 그의 구상. 21세기판 사회진화론자를 자임하고자 하는 듯하다. 경제학자 우석훈 또한 생물학과 경제학을 결합해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접한 듯하다. 두 사람의 '작업'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8-02-17 22:35   좋아요 0 | URL
재미있고 뇌구조가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저런 사상이 주류가 되는 세상을 생각하니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로쟈 2008-02-17 23:01   좋아요 0 | URL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건 '주변부 작가'라는 콤플렉스입니다. 흥미롭게도...

kimdan 2008-02-19 22:18   좋아요 0 | URL
(이미 아실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경제학 분야와 진화론 분야가 결합된 '진화경제학' 분야는 많은 연구가 되어 있습니다. 진화경제학 분야는 사회진화론에 가깝다기 보다는, 전화론에서 쓰이는 메커니즘을 도구적으로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회진화론과 진화경제학은 많이 다른 분야죠. 우석훈씨는 생태경제학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쪽 분야는 저도 잘 몰라서... (제가 진화론 관련 생물공부를 하거든요..)

로쟈 2008-02-19 23:1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기억엔 진화경제학 관련서라 할 만한 책으로 작년에 <부의 기원>이란 책이 나왔었지요. 그런데 경제학과 진화론을 결합하는 방식에 우파적인 방식과 좌파적인 방식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 복거일은 전자를, 우석훈은 후자를 대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정확하게 그런 포지션을 자임하는 건 아니더라도요.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은 저도 언제나 흥미를 갖고 있는 분야입니다.^^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손길이 가는 건 <우디 앨런: 뉴요커의 페이소스>(마음산책, 2008)이다. 막간을 이용해 겸사겸사 그의 책과 영화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2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우디 앨런- 뉴요커의 페이소스
우디 앨런 외 지음, 로버트 E. 카프시스.캐시 코블렌츠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2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08년 02월 16일에 저장
품절
우디가 말하는 앨런
스티그 비에르크만 지음, 이남 옮김 / 한나래 / 2006년 5월
12,000원 → 12,000원(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8년 02월 16일에 저장
절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같은 세상
우디 앨런 지음, 김연 옮김 / 황금가지 / 2000년 12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08년 02월 16일에 저장
절판
The Insanity Defense: The Complete Prose (Paperback)
Allen, Woody / Random House Inc / 2007년 6월
32,850원 → 26,930원(18%할인) / 마일리지 1,3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2월 16일에 저장



2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2-16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6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