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 2006)을 잠깐 읽었다(이하에서는 그냥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적는다).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와 <주기율표>(돌베개, 2007)가 한달쯤 후에 나오니까 레비에 관한 책으로는 최초였을 테다. <이것이 인간인가>의 말미에도 서경식의 '작품해설'이 포함돼 있다. 그의 개인사의 곡절까지 포함해서 이래저래 두 사람의 이름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아무려나 <이것이 인간인가>와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같이 읽게 된 셈인데, 잠깐 읽으면서 받은 인상을 몇 자 적는다. 먼저 판권 표시로 보아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의 일본어판은 1999년에 출간됐는데, 국역본 책갈피에는 이 책으로 "2002년에 일본 이딸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로꼬뽈로상을 받았다"고 돼 있다. 몇 년이 지나서 상을 주는 법도 있나 싶었지만, 역시나 그건 아닌 듯하다. <시대를 건너는 법>(한겨레출판, 2007)의 책갈피에는 "2000년에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으로 이탈리아문학원이 주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고 돼 있는 걸 보면(이탈리아문학원?).

'마르꼬뽈로상'이나 '마르코폴로상'이나 어차피 같은 상일 테니까 서로 다른 연도에 다른 곳에서 상을 받았다는 건 말이 안된다. 짐작컨대, 2000년이탈리아 문화원이 주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을 것이다. 참고로 얼마전에 나온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그 해의 '마르코 폴로 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책이다(일어본 초판은 2002년에 나왔다).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은 1996년 1월 1일 밀라노에서 토리노로 향하는 보통열차 안에서 시작된다. 그리고는 예의 미술관 이야기다. "이딸리아에 도착하고 10일이 지났다. 피렌쩨는 따뜻했지만 밀라노에는 눈이 내렸다. 그저께에는, 여행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서둘러 미술관을 돌아보았다. 밀라노에는 이번이 세번째지만, 근대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마리노 마리니의 컬렉션이 충실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예상 밖의 수확이었다."(14쪽)

사실 서경식이란 이름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도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2002)였다. 그래서 내게도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이라기보다는 '미술 에세이스트'로서 먼저 각인되었다. 이게 보통의 미술평론들과는 좀 다른 종류의 에세이들이긴 하지만. 그런 사정과 무관하게 인용한 대목에 눈길이 간 것은 '마리노 마리니'라는 이탈리아 조각가의 이름 때문이다. 기마상 조각으로 유명한 조각가 말이다. 

현대조각에 조예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마리노 마리니'란 이름을 기억하는 건  바로 작년 이맘때 국내에서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비록 초대권까지 받아놓고 가보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서경식은 밀라노의 '브레라(Brera) 미술관'에도 찾아가 마리니의 작품들을 관람한다. 그곳에도 "머리와 네 다리를 쭉 편 말의 등에서 기수가 극한까지 뒤로 몸을 젖히고 있"는 마리니의 대작이 있다고 한다(마리니의 기마상은 말년으로 갈수록 기수가 말을 제어할 수 없어서 점점 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만큼 '고뇌'가 깊어간 것을 뜻한다고).

"하지만 그날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기마상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지나칠 뻔한 작은 남성 조각상이었다. 'Il miracolo'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기적이라는 의미일까. 삐에로인 듯하지만 가슴에 십자가를 건 것을 보면 성직자일지도 모른다. 작은 머리. 비스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 가냘프고 기다란 목선. 조금 익살맞은 그 모습은 애달프고 간절한 평화 그 자체였다. 나는 이제까지 여러 곳에서 마리니의 작품을 봤지만, 이 작품에 담긴 것과 같은 고요함과 깊은 정신성을 발견한 적은 없다."(14-15쪽)

호기심에 마리니의 작품을 찾아봤지만 'Il miracolo'란 제목이 붙은 그림만이 눈에 띈다. '애달프고 간절한 평화 그 자체'를 보기 위해선 밀라노에 가야 할 모양이다. 한편 저자가 그 밀라노에서 토리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은 건 순전히 "만난 적이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인물의 무덤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물론 독자가 곧 알게 되지만 그 무덤의 주인이 바로 프리모 레비이다(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서경식은 2002년 봄에도 토리노와 아유슈비츠를 재차 방문한다. '프리모 레비의 자살'을 다룬 일본 NHK의 특집 다큐멘터리가 그의 책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근거로 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간주곡으로 들어가 있는 이야기는 '무덤'과 관련한 저자의 기억들인데, "이 기억은 1992년 여름 중국 동북지방의 옌뻰(*연변) 조선족자치주를 여행하며 윤동주의 묘를 방문했던 때로도 이어진다."(17쪽) 이어지는 윤동주(1917-1945)의 삶과 죽음은 적어도 (일본 독자가 아닌) 한국 독자들에겐 익숙한 것이다. 1943년에 일경에 체포된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옥사했는데 알다시피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까지는 '상식'이지만 이어지는 사실은 내가 새롭게 안 것이다. 

 

 

 

 

예전에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세계사, 1998/ 푸른역사, 2004) 등을 들춰보긴 했지만 다루어지지 않았거나 내가 주의하지 않았던 듯한데, 그 새로운 사실이란 이런 것이다.

"후꾸오까 형무소로부터 '사체'를 가져가라'는 전보를 받은 윤동주의 늙은 아버지는 간도에서 한반도를 종단하고 현해탄을 건너가 유골을 가지고 돌아갔다. 유골을 묻을 때, 늙은 아버지는 생전 한 권의 시집도 간행할 수 없었던 아들을 위해 '시인 윤동주의 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묘비를 세워주었다."(20쪽)

<시대를 건너는 법>으로 묶인 '서경식의 심야통신'에서도 한번 다루어진 적이 있는데, 나는 윤동주의 유골을 간도의 '늙은 아버지'가 수습했는지도, 또 직접 묘비까지 세워주었는지도 몰랐다(묘비는 막연히 후대에 세워진 걸로 알았다). 그제서야 조금 떠오르는 사실은 이 묘비를 일본 학자가 발견했다는 점.

"사실 그의 묘를 ‘재발견’한 것은 와세다대학 오무라 마스오 교수다. 1980년대 연변대학에 체류했던 그는 윤동주의 묘를 찾아내 그곳을 일본의 독자에게 알리는 글을 썼다."(<시대를 건너는 법>, 319쪽)

이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책이 <윤동주와 한국문학>(소명출판, 2001)이다. 이왕이면 '조선 학자'들에게 발견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역사는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은 듯싶다(모처럼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이상섭 교수의 <윤동주 자세히 읽기>(한국문화사, 2007)가 작년에 나왔다. 언제 읽어봐야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시 '별헤는 밤'에서 시인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이런 시구절을 적어내려가던 시인의 손길을 떠올리면 애달프고 먹먹하다...

이제 프리모 레비(1919-1987)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자 문학자이며 화학자"('174517'은 아우슈비츠에서 왼팔에 새겨진 그의 수인번호다). "그는 1919년 또리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또리노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복이딸리아가 독일군에 점령되자 반파시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싸웠지만, 1943년 12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유대계였기 때문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송치되었다. 그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로 끌려가는 것은 모면했지만, 해방될 때까지 대략 1년의 세월을 노예보다 못한 생활을 하며 보내야 했다."(22쪽)

여기까지는 프리모 레비에 관한 '상식'이라 할 만하다. 한데 내가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아우슈비츠 체험 이후에 레비가 토리노의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이것이 인간인가>를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점. 26살에 생환한 그가 자신의 체험기를 처음 출간한 게 1947년, 그러니까 28살 때이다. 나는 막연히 중년에, 적어도 30대에 쓴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인간인가> 국역본에 자세하게 실린 연보를 참조하면, "프랑코 안토니첼리의 소개로 책은 데실바 출판사에서 2,500부만 출판된다. 훌륭한 평가를 받았지만 판매 면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레비는 작가-증언자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화학자로서의 일에 몰두한다."(314쪽) 그러나 초판 출판을 거절했던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1958년 재판을 간행하고 되고 이것이 초판때와는 달리 일약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고 "이 책은 <안네의 일기>, 빅토르 프랭클(Victor Frankle)의 <밤과 안개>, 엘리 비젤(Elle Wiesel)의 3부작 <밤> <새벽> <낮>과 함께 나찌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진상을 전하는 증언문학의 대표작으로서 지금도 널리 읽힌다. 일본에서는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 한 이딸리아인 생존자의 고찰'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에 번역/간행되었다."(22-23쪽) 물론 우리는 작년에야 이 책을 접하게 됐지만 일역판도 생각보다는 늦게 출간됐다.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가 <이것이 인간인가> 국역본보다 먼저 출간됐고 일역본을 참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은 그에 따라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로 표기되고 있다. 영어본의 제목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하지만 '생존자' 레비는 1987년에 자살했다.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은 그 이유를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것이 인간인가>에 붙인 서경식의 해설에 따르면, "프리모 레비는 생애 총 14권의 소설, 시집, 평론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서경식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책은 차례대로 다음의 다섯 권이다. <이것이 인간인가>(1947/1958), <휴전>(1963), <주기율표>(1975), <지금이 아니면 언제?>(1982),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1986). 아래는 그 영역본들의 표지인데, 나머지 세 권도 모두 국역되었으면 싶다.

영역본의 표지들을 보다 보니 프리모 레비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도 않는데, 지난 2004년 모스크바 체류시에 모스크바대학 본관건물 구내서점에서(서너 평 될까 말까한 공간이다) 나는 처음 '프리모 레비'란 이름과 접했다. 러시아어본이 아니라 영어 중고본들이 서가에 꽂혀 있었고(가장 확실히 기억나는 표지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이다), 나는 여러 차례 망설이다가 구입하진 않았다(언제 읽으랴 싶었던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저명한 '아우슈비츠 작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가 이탈리아인이란 것도 당시엔 알지 못했다(북부 이탈리아에서 아우슈비츠까지 잡혀왔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검색해보니 러시아도 사정은 우리와 비슷해서 <이것이 인간인가>가 2001년에, 그리고 <주기율표>가 바로 올해 신간으로 출간됐다. 

Примо Леви Периодическая система Il sistema periodico

프리모 레비와 함께 서경식이 아우슈비츠 증언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더 꼽고 있는 '빅토르 프랭클(Victor Frankle)'과 '엘리 비젤(Elle Wiesel)'은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저자들이다. 한데, '빅토르 프랭클'은 표기가 잘못됐다.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이 맞다(적어도 국내에서 그렇게 소개됐고, 영어 병기도 잘못됐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말이다(국내에는 여러 종의 번역본이 출간돼 있고 가장 많이 읽히는 건 청아출판사본이다).

 

 

 

 

내가 빅터 프랭클(1905-1997)이란 이름을 접한 건 책에서보다 신문의 칼럼들에서였다.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요법을 제창한 것으로도 유명한 프랭클 박사의 지론은 국역된 책들의 제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의미를 찾는 인간'(<죽음의 수용소에서> 영어본의 원제. 독어본 제목은 <밤과 안개>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등이 말해주듯이 그것은 '의미의 발견'으로 수렴된다. 최악의 생존조건 속에서도 삶의 의미라는 끈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우슈비츠 체험을 통해서 얻어낸 그의 통찰이다.

그런데, 그의 가장 유명한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서경식의 책에서는 <밤과 안개>라고 거명돼 있어서 잠시 알랭 레네의 원작이 혹 프랭클의 책인가 헷갈렸는데 찾아보니 그건 아니다. <밤과 안개>는 그냥 일역본의 제목인 모양이다. 그럼에도 물론 레네의 영화 <밤과 안개>(1955)와 무관하진 않겠다. 이 역시 아우슈비츠를 고통스럽게 증언하고 있는 영화이니까.   

사실 30분 정도 분량의 이 영화를 나는 아주 오래전 프랑스문화원에서 얼떨결에 봤다(내 기억에 남아있는 제목은 <밤 그리고 안개>이다. 국내에는 <밤안개>로 출시됐고, 보통은 <밤과 안개>로 표기되는 듯하다). 몇 번 드나든 문화원 프로그램에 '알랭 레네'라는 아는 이름이 눈에 띄었고 나는 제목에서 <히로시마 내 사랑> 같은 영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웬걸! 영화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나레이션과 다큐멘터리 형식을 통해서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끔찍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참상 속에서 살아 남은 또 다른 증언자, '엘리 비젤'은 국내에 '엘리 위젤'(1928- )로 소개돼 있다. 루마니아 태생의 위젤은 작가이지만 특이하게도 1986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맘때 그의 대표작들이 번역돼 나왔다(<엘리제르의 고백>이란 제목으로 3부작이 번역되었다).

 

 

 

 

물론 균형있는 독서를 위해서는 몇 권의 책을 이 모든 증언들과 같이 읽어두어야겠다. 유대인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다룬 빅토르 퀘페르맹크의 <유대인>(웅진지식하우스, 2008), 볼프강 벤츠의 <홀로코스트>(지식의풍경, 2002), 러버트 위스트리치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을유문화사, 2004), 그리고 노르만 핀겔슈타인의 <홀로코스트 산업>(한겨레출판, 2004) 등이 그 책들이다.

다시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의 첫장은 '여행'이다. 아우슈비츠로의 여행. 열두 량의 기차에 나눠타고 레비와 함께 수송된 유대인들은 650명(혹은 615명)인데 살아돌아온 사람은 그를 포함해 단 세 명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 살바기 에밀리아가 죽었다. 독일인들에게는 유대인 아이들을 죽이는 일의 역사적 필연성이 아주 자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밀라노 출신 엔지니어 알도 레비의 딸 에밀리아는 호기심이 많고 대담하며 활발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여행하는 동안 그 애의 엄마와 아빠는 사람이 꽉 찬 객차 안에서도 함석통에 담긴 미지근한 물로 그 애를 목욕시킬 수 있었다.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 그 기관차의 엔진에서 물을 받아쓰도록 어느 부패한 독일인 기관사가 허락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우리의 여인들, 부모들, 자식들이 사라져버렸다. 아무도 작별인사를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다른 쪽 플랫폼 끝에 있는 거무스름한 덩어리 같은 그들을 잠깐 보았다. 그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23-24쪽)

곧장 가스실과 소각장에서 '절멸'될 대다수의 다른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노인들과 달리 '튼튼한 남자들'로 분류된 레비는 다른 서른 명과 함께 트럭을 타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노동을 통한 절멸'이었다. 곧 지옥이었다("이 저주받을 망령들아, 비통할지어다!")...

08. 03. 02.

P.S. 새학기의 시작은 '바닥에서'부터이다('바닥에서'는 <이것이 인간인가>의 두번째 장제목이기도 하다). 다른 할일들을 잠시 제쳐놓고 따로 몇 자 적어놓은 것은 그래야만 먹먹한 마음의 숨통이 좀 트일 듯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읽다가 눈물이 돌았던 대목은 이런 것이다. 임시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 전날밤의 풍경.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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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3-03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페이퍼 보고, 오전 내내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읽었어요. 읽으며 레비의 다른 책들이 몹시 궁금해졌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같이 보고싶은 다른 책들이 많아졌어요! 읽는 속도는 따라주지 않는데 늘 이렇게 욕심만 앞서니 ^^

로쟈 2008-03-03 17:46   좋아요 0 | URL
다른 책들이라고 해야 현재로선 세 권이 전부인데요.^^;

소경 2008-03-04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수강한 과목의 계획표에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추천 되어 있어 읽어 볼 명분이 생겼네요. 물론 로쟈님의 페이퍼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가 주 동기지만. 새학기 긴 방학을 끝에 맞이한 붕뜬 개학의 기분을 내어버리기에 아쉽지만 페이퍼를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드는게 꼭 읽어 보아야 할 책 같네요. 서경식씨의 책과 함께.

로쟈 2008-03-05 22:25   좋아요 0 | URL
새학기라지만 저는 목소리도 가라앉았습니다.^^;
 

대책없이 봄이고 3월이다. 3월이라고 또 '3월의 읽을 만한 책'이 발표되었다. 간식 시간에 잠시 틈을 내서 어젯밤에 스크랩해놓은 기사에 살을 붙이도록 한다. 선정도서 및 추천사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웹진(www.kpec.or.kr/webzine)을 참조한 것이다. 


 

 

 


1. 문학

작가 신경숙씨가 문학분야에 추천한 책은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문학동네, 2008)이다. 알라딘에서는 이미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인데 저자는 생소하다. 그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마커스 주삭이라는 <책도둑> 의 저자 이름이 낯설어 다시 살펴보니 그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소설가'라는 평을 받는 작가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 그의 명성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책도둑> 이 처음 번역되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지만 아름다우면서도 철학적인 소설이다."라고 추천자도 적어놓았다. 줄거리는 스포일러가 될 듯하여 생략한다.

내가 보태자면 미국의 중국계 작가 하진의 단편집 <카우보이 치킨>(현대문학, 2008)은 어떨까? 이스마일 카다레의 신작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문학동네, 2008)와 견주어보다가 내가 손을 들어준 쪽이 하진인데, 그건 아직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하진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761943 참조). 여차하면 대표작인 <기다림>(시공사, 2007)에까지 손을 뻗칠 수도 있겠다. 

 

 

 



2. 역사

역사분야의 책으로 추천된 것은 타이먼 스크리치의 <에도의 몸을 열다>(그린비, 2008)이다. 내가 지난달에 과학분야의 책으로 올려놓은 것이어서 따로 설명은 필요 없겠다(http://blog.aladin.co.kr/mramor/1885413). "<에도의 문을 열다> 는 난학(蘭學)이 에도 시대의 일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탐구한 책"이라는 게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간명한 소개다.

나는 에도시대보다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고대 그리스에 관심을 두고 싶다. 이번에 새로 번역돼 나온 키토 교수의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갈라파고스, 2008)에 눈길이 가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로 평해지는 책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934173 참조). 원제('The Greek')대로 그냥 깔끔하게 <그리스인들>이란 제목이 붙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키토의 책과 함께 나란히 읽어볼 만한 것은 데브라 하멜의 <네아이라 재판소동>(북북서, 2008)이다. 고전학자 인 저자가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 사회에서 일어난 네아이라 재판 사건을 설명함으로써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네아이라라는 고급 창녀를 두고 일어난 재판 과정을 새심히 다루면서, 그와 연관된 역사적 사실들이 자연스레 드러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하므로 그리스 '입문'에 이은 '실습'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저자 자신의 직접적인 책소개는 http://www.youtube.com/watch?v=blwjt0aAvgY 참조).

 

 

 

 

3. 철학

철학분야의 책으로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책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이학사, 2008)이다. 물론 잘 알려진 책이고 이번에 새로 번역됐다. 추천사에 따르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는 왕년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강연문이다. 강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0월 파리에서 열기로 가득한 청중들 앞에서 열렸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자신의 철학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이하고 자신의 사상에 던져진 이런 저런 비판에 맞서 반박하는 가운데 자신의 실존주의가 휴머니즘임을 천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저자의 주저이자 난해한 철학 작품 <존재와 무> 의 입문서라 불린다."

하지만 추천자가 밝히고 있는 이 책의 의의는 따로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사르트르의 철학이 새로운 주기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지독한 개인주의라는 인상을 주던 실존주의가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공동체에 대한 이론으로, 실천의 무기로 탈바꿈되는 시발점이 이 강연문이다. 골방의 철학이 광장의 철학으로 전환되는 장면이라 할 수도 있다. 역사상 유례없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완전히 다시 태어난 철학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역력하다. 의도와 내용, 그리고 문체부터 대중과 만나는 데 성공한 첫 번째 사례로 꼽을 만한 책이다. 점점 전문화되고 어려워지는 요즘의 철학책들이 다시 회복해야 할 목표지점을 표시하고 있는 책이라 할까. 독자는 여기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외치는 가장 드높은 찬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사르트르의 육성은 http://www.youtube.com/watch?v=85vEXo7Wntk 등을 참조.)



이 '드높은 찬가'는 하지만 적잖은 상처와 고통을 뒤로 한 것이다. 때문에 내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소설가이기도 한 어빈 얄롬의 <실존주의 심리치료>(학지사, 2007)와 함께 1945년 이전의 몇 년간이다(얄롬의 책은 '교재'다). 가장 대표적으로 그 시대를 증언하고 있는 책으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를 들 수 있겠다. 이것은 두번째 장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바닥'에 관한 책이다. 인간성의 바닥이면서 인간에 대한 기대의 바닥.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새물결, 2008)도 이 '바닥'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아감벤 또한 레비와 함께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숙고하고 있는 이탈리아인이로군.  



 

 

 

4. 정치, 5. 경제/경영

정치와 경제/경영분야의 책은 묶어서 다루기로 한다. 손호철 교수가 추천한 정치분야의 책은 전대원의 <나의 권리를 말한다>(뜨인돌, 2008)이다. 저자는 현직 교사라고 하며 "힘없는 일반 국민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자신의 권리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권리에 대한 이해는 곧 그 사회에 대한 이해에 다름 아니며 억압이나 부조리와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권리를 아는 것이 문제의식에서 씌어진 이 책은 현직 사회과목 교사가 쓴 책답게 어려운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평범한 언어로 중요한 우리 사회의 권리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그리고 정운찬 교수가 경제분야의 책으로 추천한 것은 이해영/정인교의 <한미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시대의창, 2008)이다. 알다시피 양국 국회/의회의 비준이 남은 상태인데, "이 책은 FTA를 지지하는 인하대의 정인교 교수와 반대하는 한신대의 이해영 교수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논점을 하나도 빼지 않고 토론한 결과를 한겨레신문 정남구 기자가 정리한 것이다." 해서 한미FTA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으로 추천되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미국의 좌파 도시사회학자 마이크 데이비스의 신간 <엘리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이후, 2008)와 작년에 나온 <슬럼, 지구를 뒤덮다>(돌베개, 2007) 등도 눈여겨볼 책들이다(<빈곤의 역사>에 대해서는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2291745565&code=900308 참조). 사실 한미FTA가 낳을 최악의 결과는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와 고착이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정말로 소수의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사악한 천국'인 것인지 미리미리 따져볼 필요가 있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토마스 휴즈의 <테크놀로지, 창조와 욕망의 역사>(플래닛미디어, 2008)이다. 소개에 따르면, "저명한 기술사학자 토마스 휴즈가 십여 년 전 버지니아 대학에서 행한 과학과 예술에 관한 특강 내용을 정리해 2004년도에 발간한 이 책의 원명은 'Human-Built World: How to Think about Technology and Culture'이다. 즉, 기술 자체를 논의한 책이 아니라 기술을 사회문화적 변동과의 연관성 하에서 고찰한 것이다."

거기에 보태진 추천사에 따르면 "기술 문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지금까지 자크 엘루나 루이스 멈포드와 같은 사회비판론자들에 의해 촉발되어 레이첼 카슨과 같은 기술비판론자들로 계승되어 왔다. 따라서 기술의 사회적 파장을 그 혜택과 해악을 망라한 균형적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 이 책이 과거의 외눈박이 기술관을 시정하는 보정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풍성한 인문학적 속살을 지닌 이 책은 과학기술계와 인문사회계의 인식적 간극을 해소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고.

찾아보니 휴즈 교수가 공저한 책으로 <과학기술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새물결, 1999)에 거의 10년 전에 소개된 바 있다. 분야로 치자면 '과학/기술의 사회학'에 속할 듯한데, 추천사 덕분에 생각난 책은 루이스 멈포드의 <예술과 기술>(민음사, 1999)이다(을유문화사의 문고본으로도 나왔던 책이다). 레이첼 카슨의 물론 <침묵의 봄>(에코리브르, 2002)의 저자를 말하는 것일 텐데, 찾아보니 '시인의 마음으로 자연의 경이를 증언한 과학자'란 부제를 달고 있는 <레이첼 카슨 평전>(샨티, 2004)이 출간돼 있다(내가 인지하고 있지 않은 책의 80%는 2004년에, 그러니까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온 책들이다). 774쪽이니까 3월 한달로는 부족하겠다. 세 달 동안 내리, 그리고 틈틈이 입다물고 읽을 만한 책.





 



7.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편집장이 추천한 과학분야의 책은 린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사이언스북스, 2007)이다. 추천사에 따르면, "세포생물학과 미생물의 진화, 지구시스템 과학에 기여한 린 마굴리스. 칼 세이건의 첫 번째 부인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사실 그는 공생진화론으로 학계에 충격을 던져 준 생물학자다. 책에서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공생이란 고리로 연결하며 생물의 다양성을 공생과 공생진화로 설명하고 있지만 어린 나이에 세이건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 학자로서 어떤 길을 걸었는지 등 개인적인 이야기도 들어있다. 세포핵 유전과 다윈주의 대신 세포질 유전과 신라마르크주의를 택하게 된 배경과 주류 학계에서 비주류로 살지만 자부심을 갖고 연구하는 학자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나도 소개한 적이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1894262 참조). 이 참에 마굴리스의 다른 책들인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 1999), <섹스란 무엇인가>(지호, 1999)도 같이 챙겨볼 수 있겠다. 두 권 모두 아들 도리언 세이건과 같이 쓴 책이다. 찾아보니 마굴리스도 참여한 신간은 <마음, 생명, 우주>(2007)이다. 저명 과학자들과의 대담집이므로 교양서로 소개됨 직하다.

 

 

 

 

8. 예술

예술분야의 책은 마크 스트랜드의 <빈방의 빛>(한길사, 2007)이다. 미국 화가(어쩌면 가장 미국적인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다룬 책인데, 추천자인 김춘미 교수에 따르면 "에드워드 호퍼(1882-1967)는 1930, 40년대 미국 도시의 평범한 일상을 유화로 담아내어 이름을 낸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이다. <이른 일요일 아침 1930> , <펜실베이나 탄광촌> , <주유소> 등의 그림들이 이야기 해주듯 집, 길, 자동차, 기차, 호텔, 어디나 있는 방과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린 사람이 호퍼이다."

그리고 "호퍼의 대표작 30점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아마 그의 작품을 감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이 모처럼 제공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의 특별함은 이러한 호퍼의 작품이 마크 스트랜드라는 시인의 글로 새롭게 조망되고 있다는 것이다. 마크 스트랜드는 <눈보라 한 조각> 이라는 작품으로 1999년 퓰리처상을 탄 바 있는 시인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시인의 논평을 담은 그림책들이 더러 출간된 바 있는데, <빈방의 빛>도 그런 종류이겠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분야의 책은 박종인의 <한국의 고집쟁이들>(나무생각, 2008)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23명 한국인의 범상치 않은 삶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한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신체상의 장애라는 역풍을 맞은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역풍이 있건 없건 그들은 앞을 향해 항해를 계속 해온 사람들이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머리 속으로가 아니라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우리 삶의 범상함 때문일 것이다."라는 게 추천의 변이다.  

그런 '범상치 않은 삶'의 또 다른 주인공은 지명관 한림대 석좌교수다. "1970-1980년대 일본의 진보 성향 월간지 '세카이(世界)'에는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칼럼이 'TㆍK生'이라는 필명으로 연재됐다. 10월 유신 이듬해인 1973년부터 6월 항쟁 이듬해인 1988년까지 15년간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연재된 이 칼럼은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에 한국의 정치 상황과 한국인의 민주화 열망을 알리는 통로 역할을 했다. 당시 국내 정보기관의 끈질긴 추적에도 드러나지 않았던 'TㆍK生'의 정체는 연재가 끝난지 15년 뒤인 2003년에야 세카이지를 통해 지명관(84) 한림대 석좌교수인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에 나온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창비, 2008)은 "지 교수가 'TㆍK生'으로서 연재한 칼럼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중심으로 유신 선포와 80년 광주사건, 87년 민중항쟁 등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1970-19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짚어본 책이다." 이미 재작년에 자서전 <경계를 넘는 여행자>(다섯수레, 2006)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한국으로부터의 통신>과 겹쳐 읽으면 되겠다(리뷰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72964.html 참조).

지명관 교수의 이야기가 너무 '노티' 난다 싶은 독자라면 동시대 사람들을 만난 또 다른 이야기로 영화기자 김혜리의 인터뷰집 <그녀에게 말하다>(씨네21, 2008)도 챙겨둘 만하다. "배우, 감독, 촬영감독 등 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뿐 아니라, 소설가, 만화가, 미학자, 사진작가, 북디자이너, DJ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해온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기록이다.


 

 

 


10. 전기

끝으로 이제 내 맘대로 고르는 전기/평전류이다. 내가 고른 건 마크 에드문슨의 <광기의 해석>(추수밭, 2008). 저자는 예전에 <문학과 철학의 논쟁>(문예출판사, 2000)의 저자 '에드먼드슨'으로 소개된 적이 있는데, 조악한 번역으로 빛이 바랜 책이었다(저자는 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제자다). 이번에 '개명'하고 다시 소개된 셈. 책은 '프로이트 최후의 2년'을 다루고 있는데, 흥미로운 건 히틀러의 삶과 대조하고 있다는 것.

"책은 1909년 오스트리아 빈을 무대로 가난한 고학생 히틀러와 정신분석학의 권위자 프로이트를 대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 30년 후에 주목한다. 약 30년이 흐른 뒤 세상에 막 등장해서 대중의 열광을 한 몸에 받은 히틀러와, 인생의 막바지에 들어서 암으로 투병한 프로이트가 이 책의 주인공인 것이다. 지은이 마크 에드문슨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기이하게 수렴되는 두 사람의 인생을 되짚어 보고, 프로이트가 나치 통치하의 빈에서 탈출해 런던으로 망명한 최후의 2년을 따라가면서 파시즘과 근본주의를 열망하는 대중의 심리를 분석한 프로이트 말년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원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죽음>이다(<광기의 해석>이란 타이틀은 물론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살인의 해석>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프로이트의 전모를 일람해보는 건 물론 한두 달 읽기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견적이 아니다. 나로선 그의 생애와 저작의 흥미로운 지점들을 염탐해보는 것 정도로 만족하려고 한다. 거기에 도구상자가 되어줄 만한 책은 마르트 로베르의 책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문예출판사, 2007)과 조시 코언의 <HOW TO READ 프로이트>(웅진지식하우스, 2007) 등이다...

08. 03. 01.

 

 

 

 

P.S. 이달의 고전은 베르그송의 두번째 주저인 <물질과 기억>(아카넷, 2005)이다. 최근에 해설서로 김재희의 <물질과 기억: 반복과 차이의 운동>(살림, 2008)이 출간되었기에 떠올린 것인데(알라딘에 아직 이미지가 뜨지 않고 있다), 황수영의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그린비, 2006)까지 '장비'로 챙겨둘 수 있겠다(나는 영어본과 러시아본도 갖고 있다. 준비야 그럴 듯하지만 기동성은 장담 못하겠다). 들뢰즈의 <시네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독해야 하는 책인데, 음.. 예전에 '물질'까지 읽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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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3-02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 책들도 추천을 해주세요..휘동이가 읽을 책들..

로쟈 2008-03-02 18:53   좋아요 0 | URL
제가 '감'이 전혀 없어서요. 그쪽으론 전문가들이 따로 있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을 읽고 있다. 작년 벽두에 나왔으니 일년을 미뤄둔 책이다(사실 무슨 내용인지 알기에 미뤄둔 것이기도 하다.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니까). 일부러 이 책을 강의목록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자발적 강제'에 따른 읽기인데, 읽다 보니 같이 읽어야 할 책들도 여러 권 된다(가령 빅터 프랭클이나 엘리 위젤 같은). 몇 권만 추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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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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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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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1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01 08:50   좋아요 0 | URL
리스트야 별거 없지요. 레비의 책이 더 소개되어야 풍족해질텐데요...
 

컬처뉴스에서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지만 이 번역본은 (한국어임에도!) '읽을 수 없는 책'이다. 그걸 지적하는 게 명예훼손과 무슨 관련이 있나 싶지만 여하튼 역자는 집요하게 자신의 명예를 챙기고 있다(리뷰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나의 페이퍼는 알라딘의 책소개 페이지에서 블라인드 처리돼 있다). 한번 더 이야기하지만, 출판사나 역자나 책을 전량 폐기하고 전면 개역판을 내는 게 그나마 '명예'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싶다.  

컬처뉴스(08. 02. 29) 랑시에르, 데뷔전에서 곤욕을 치르다

“맑스주의라는 단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단적인 사유에 대한 가장 위대한 표현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가장 이단적으로 맑스주의를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통적인 맑스주의이다.”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이 말을 살짝 비틀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라는 이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단적인 맑스주의자에 대한 가장 위대한 이름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가장 이단적으로 알튀세르를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통적인 알튀세르주의자이다.”

올해 초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감성의 분할』(2000)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자크 랑시에르(1940~  )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정통적인 알튀세르주의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랑시에르는 알튀세르가 『«자본»을 읽자』(1965)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시킨 제자 4인방, 즉 피에르 마슈레(1938~  ), 로제 에스타블레(1938~  ), 에티엔 발리바르(1942~  ) 중 ‘셋째’로서 알튀세르가 그랬듯이 그 누구보다 자신의 분야에서 ‘파격적인’ 사유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공식 데뷔작 『알튀세르의 교훈』(1974)을 통해 스승과 떠들썩하게 결별한 랑시에르가 이 말을 들으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말이다.

랑시에르의 사유가 파격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신의 분야, 즉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파격적인’ 정의에서 기원하지 않을까 싶다. 랑시에르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북유럽판에 수록된 인터뷰(2006년 8월 11일자)에서 철학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저는 철학이 그 자체에게 뭔가 독특한 임무를 부여해 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철학에는 독특한 대상이 없는 셈이죠. 따라서 저는 차라리 철학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위치/자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정의에 부합하게 랑시에르는 문학, 정치학, 미학, 역사학, 사회학, 영화학, 교육학 같은 분과학문의 주제/대상뿐만 아니라 스테픈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 마르셀 브로타에스의 설치미술,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등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끊임없이 움직였고, 그 여정을 통해 미학과 정치를 조우시킬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주조해냈다. ‘감각적인 것의 배분/나눔’(le partage du sensible)이 바로 그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는 ‘치안’(la police)이다. 즉, 한 사회를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통치하는 구조 일체가 바로 치안인 것이다. 그렇지만 치안이 단순히 어떤 구조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권력, 예컨대 곤봉을 든 경찰력으로 상징되는 어떤 억압의 구조이기 이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즉, 감각적인 것)을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는 상징적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la politique)는 치안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게 만든 존재들,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보편적 평등이라는 개념(“우리도 우리의 몫을 가지기에 합당한 존재이다”)에 근거해 각자의 몫을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다. 즉, 치안이 만들어놓은 질서(특정한 분할선에 의거해 감각적인 것을 배분하고 나눠놓은 질서)를 거슬러 감각될 수 있는 것을 다시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려는 행위가 정치이다.

이런 점에서 랑시에르의 정치는 곧 민주주의와 동의어이며, 민주주의는 또 하나의 정치체제라기보다는 치안이 자신의 지배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일체의 아르케(근본 원리)에 대한 부정이고, 아르케에 대한 이런 부정은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라는 평등의 공리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랑시에르에게는 정치=민주주의=평등의 공리인 셈이다.

또한 정치든 치안이든 감각적인 것의 나눔/배분을 둘러싸고 형성되기에 랑시에르에게는 정치=미학이다. 단 이때의 미학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미학이 아니라 그 어원에 충실한 미학이다. 즉, ‘감각적인 것’ 혹은 ‘감각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to aisthêton’에 충실한 미학(‘감각학’으로서의 미학) 말이다. 이렇듯 랑시에르에게 미학과 정치의 조우는 그 상동성(相同性)의 발견으로 가능해진다.

랑시에르의 저작으로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2005)는 정치=민주주의=평등의 공리, 그리고 감각학으로서의 미학=정치학이라는 자신의 두 가지 테제에 근거해 랑시에르가 당대의 프랑스 정치현실에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작품이다.

그 정치현실이란 길게는 실업자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난 1995년 이후부터, 짧게는 2001~05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정치현실로서, 프랑스 내에서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프랑스 공화주의가 자랑스러워하는 “자유, 평등, 박애”를 자신들에게도 적용하라고 외치면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민주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 “그런 건 민주주의가 아니야”, “민주주의는 원래 이런 거야”라고 말하며 민주주의의 요구(즉, 평등의 요구)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찬물을 끼얹고 있는 세태를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국역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전혀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건드리기에 따라 ‘엔(사타구니/aine)만큼 후끈 달아오를 ‘엔’(증오/haine)을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책의 날카로움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만큼 무디게 만든 번역 탓이다. 흔히 『국가』와 『정치가』로 옮겨지는 플라톤의 저서를 『공화주의』와 『정치』로 옮겨놔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그냥 그렇다고 쳐도,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낳은 정세 자체에 대한 무지는 조금 참기 어렵다.

가령 랑시에르가 이 책의 목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는 서론의 첫 번째 문단부터 문제가 심각하다. “가상의 침략 이야기를 꾸며내서 프랑스를 조마조마하게 하는 젊은 여인, 학교에서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 …… 초등학교는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창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렇게 옮겨져야 한다.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프랑스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어느 여인, 학교에서 히잡을 벗지 않으려는 여학생들 …… 대안적 입시제도를 도입한 그랑제콜.”

『민주주의 대한 증오』의 옮긴이가 “가상의 침략 이야기”로 옮긴 사건은 지난 2001년 7월 11일, 어느 23세의 여성이 파리의 지하철에서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보이는 6명의 흑인들에게 유태계라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자신의 13개월된 아기가 폭행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해 프랑스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을 말한다(*영역본 주석에는 2004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소개됐다). 이로 인해 정치권에서는 국내 치안의 문제는 이주민들 때문이라는 극우적 주장들이 빗발쳐 나오곤 했는데, 며칠 뒤 CCTV에 당시 사건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경찰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이 여성의 진술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이 발생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옮긴이가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이라고 옮긴 에피소드는 지난 2004년 3월 14일 프랑스 의회가 공립학교에서 모든 종교적 상징물의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압도적인 찬성 표결로 통과시켜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이슬람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 문제를 말한다. 히잡은 이슬람 여성들이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이기 때문에 “가면”이라고 옮기면 안 된다. 가면이라고 부를 만한 다른 이슬람 상징물은 부르카(안면 가리개)이다. 또한 이슬람 남자들은 히잡을 착용하지 않기 때문에 두루뭉수리하게 “청소년들”이라고 옮기면 원래의 맥락을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옮긴이가 “초등학교”로 옮긴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은 프랑스의 소수 엘리트 양성기관이다. 그랑제콜에 입학하려면 그랑제콜 준비과정에 입학해야 하는데, 이 준비과정에 들어가려면 바칼로레아(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성적이 상위 5% 이내에 들어야 한다. 그러고도 준비과정에서 2~3년을 더 준비해 과목별로 한 달간에 걸친 엄격한 경쟁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 그랑제콜의 하나인 파리고등정치학교가 지난 2001년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 출신의 학생들을 필기시험 없이 면접과 서류전형만으로 뽑는다는 새로운 입시계획안을 발표했고, 이는 극심한 찬반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얼핏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에 대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내놓은 단 한 가지 답변, 즉 “이 모든 증상은 동일한 질병의 발로인데, 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고 말하며 포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역시 안타깝게도, 우리는 공공연히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자들에게 랑시에르가 뿜어대는 그 십자포화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지면의 한계로 더 쓸 수 없으니 자세한 것은 알라디너 로쟈님의 페이퍼(“반목의 철학, 불화의 번역” http://blog.aladin.co.kr/mramor/1911702)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관심 있는 분들은 좀 귀찮더라도 영어본이나 불어본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것마저 여의치 않은 분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요약본이라고 할 만한 랑시에르의 논문 「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를 읽으시면 되겠다. 이 논문은 『아듀 데리다』(맥밀란/2007)라는 데리다 사망 추모 강연회 논문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다(문제는 이 책이 비싸다는 것이다. 74.95달러. 정치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지식의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것도 돈이다!).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이 하자 많은 국역본이 꽤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현상’은 이 국역본의 완성도보다 랑시에르의 사유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그만큼 높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텐데, 마지막으로 책을 사놓고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몰라 자신을 책망할 몇몇 독자들을 위로하며, 그리고 한국어를 읽을 수 없는 랑시에르를 축하하며 한마디. “랑시에르 선생님, 욕보십니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8. 02. 29.

P.S. 이미 관련기사들을 옮겨놓기도 했는데, 랑시에르는 아감벤과 함께 올 한해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가 될 것이다. 그럴 만한 것이 그의 책들이 한꺼번에 앞다투어 소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적인' 철학자의 새로운 사유가 우리말로 번역/소개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리뷰의 제목대로 그의 '데뷔전' 성적은 별로 좋지 못하다(이 점은 <호모 사케르>가 깔끔하게 번역돼 나온 아감벤과 대조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감성의 분할> 또한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 '분할'이란 제목부터 '분배'나 '배분'으로 옮겨지는 게 더 적절했을 것이다(영어로는 'distribution'). 이 책 또한 불어본이나 영어본과의 대조없이 읽어나가는 건 고난도의 독해력을 요구한다. 앞으로 나올 다른 책들의 사정은 좀 나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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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 2008-02-29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하신 부분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참 희한한 현상인데 올해 자크 랑시에르 책이 쏟아져나올 듯 합니다. "정치의 가장자리에서" "불화" "무지의 스승" "역사의 이름들" "프롤레타리아의 밤들" "이미지의 미래"...
지젝 책이 거의 모두 우리에게 소개되었지만 랑시에르처럼 한 해에 이렇게 많이 쏟아져나오는 현상은 무엇일까요? 하여간...기대해봅니다.

로쟈 2008-02-29 22:50   좋아요 0 | URL
희한한 '한국적' 현상이겠죠. 우리에게 자극을 줄 만한 철학서들이 쏟아져나오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읽을 수 있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베토벤 2008-03-0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일 이 책이 파리 몇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에 의해서 번역이 되었는데도 이 정도라면 개인적인 수준을 넘어서 뭔가 제도적으로
한국 출신의 학생들의 스칼라쉽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를 가질 뻔했기때문입니다. 다행히 증권가출신이면서 프리랜서로 활동셨더군요. 그래서인지 '그럴만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프리랜서 번역가 분들을 무시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 분 개인에 국한하자면 말이지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문선 책들중에는 박사급 번역자가 번역한 책들중에도 만만찮은 책들이 있었으니 다시 우울해지려고 합니다.

로쟈 2008-03-01 09:02   좋아요 0 | URL
'파리 몇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의 이상한 번역서도 드물진 않은데요.^^;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고, 좋은 역자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변화시키는 게 중요해보입니다...

람혼 2008-03-0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감성의 분할>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매우 반가운 마음에 들면서도 구입이 망설여졌던 것은, 일차적으로 바로 그 제목의 번역 때문이었습니다. 이 국역본이 출간되기 전에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를 소개하면서 저도 잠시 언급했던 바이지만(http://blog.aladdin.co.kr/sinthome/1840783), 'partage'의 번역어가'분배'나 '배분'이 되어야 한다는ㅡ즉, 단순한 '분할'이 아닌 '할당'의 뉘앙스까지를 포함해야 한다는ㅡ말씀에 적극 동감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역자가 단순히 '감성'이라고 옮긴 'le sensible'의 번역 역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데요, 이는 '감각적인 것'이라고 '적확히' 번역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가장 일차적으로는, '감각적인 것'을 단순히 '감성'으로 옮기는 '번역적 센스' 안에는 '미학'이라는 분과를 가장 '근대적인' 사유의 소산이자 '역사적' 구성물로 바라보려는 '초월적' 시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곧 제목의 번역을 볼 때부터, 미학이 지닌 '감각학/감성학'으로서의 기원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가 과연 번역에 반영되었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었죠. 그나저나 로쟈님의 글이 '명예훼손'이라면 이재원 선생의 이 글도 그렇겠군요? 조금 바쁜 일들이 지나가고 시간이 좀 날 때, 저 역시 국역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감성의 분할>을 함께 묶어 글 하나 써서 저 '명예훼손'의 대열에 동참해볼까 합니다.^^

로쟈 2008-03-01 11:45   좋아요 0 | URL
'법정'에서 심심하진 않겠습니다.^^ '감각적인 것'이 보다 정확한 번역이라는 데는 저도 동감합니다. 문제는 우리말로 익숙하지 않은 용례라는 것이죠(본문에선 또 너무 자주 나오는 용어이고). 비슷한 예로 '정치적인 것'이란 용어가 최근 들어 조금씩 쓰이고 있지만 어차피 그 말 자체로는 의미가 소통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직은...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8/02/021162000200802280699046.html). 일명 '실용정부'의 출범에 맞춰 읽은 제임스의 <실용주의>에 대한 간략한 독후감이다. 역시나 마감이 지나서 쓴 글이어서 따로 더 손을 볼 여유는 없었지만 생각해둔 내용을 다 적으려면 최소한 20매 정도의 분량으로 더 늘려 썼어야 했다. 마저 적지 못한 내용과 <실용주의> 번역에 대한 이야기들은 따로 다루는 수밖에 없겠다.

한겨레21(08. 02. 28) 무엇을 위해 전봇대를 뽑는가

실용주의가 대세다. 너도나도 실용을 말하고 실용주의를 외친다.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는 대신에 ‘전봇대’를 뽑는다. 그리고 이게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의 첫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말 많았던 대통령 대신에 등장한 ‘일하는 대통령’의 새로운 정책기조, 그것이 실용주의다. 거꾸로 되짚으면 어즈버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실용’인 모양이다. 그런 생각에 눈길이 간 책이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펴냄)다. 대세를 좇아가려는 공무원들이 앞다투어 읽어봄직한 책이지만 이건 또 ‘인문서’라 사정이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실용주의적 독서법은 아무래도 핵심을 먼저 파악하는 것 같아서 특히 ‘실용주의가 의미하는 것’이란 글을 먼저 읽었다. 그런데 이 문학적 필치의 철학자는 핵심만을 간추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에둘러 말한다. “철학적 문학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표현이 풍부하고 암시적”이라는 게 역자가 미리 일러준 것인데, 서두부터가 이런 식이다. “몇 년 전 산악지대에서 캠핑을 하던 중, 혼자 어슬렁거리다 돌아와보니 모두들 열띤 형이상학적 논쟁에 빠져 있었다. 논쟁의 실체는 나무둥치의 한쪽에 들러붙어 있는 다람쥐였다.”

어떤 상황인가? 나무둥치 한쪽에 다람쥐가 붙어 있고 반대편에는 사람이 서 있는데, 이 사람이 다람쥐를 보기 위해 나무를 돌면 다람쥐도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바람에 다람쥐를 볼 수 없었다는 것. 여기서 논쟁이 된 형이상학적 문제는 이런 것이다. 과연 그 사람은 다람쥐를 도는 것인가 아니면 돌지 않는 것인가? 어느 쪽이 옳은지 판결을 요청받은 제임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돈다’고 할 때 실제로 우리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실용주의의 방법은 애당초 그것 없이는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형이상학적 논쟁들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어떻게 해결하는가? 개념들에 대한 논쟁이 일어날 경우에 실용주의는 그 각각의 실제 결과들을 추적하고 그 개념이 누군가에게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가를 따짐으로써 해결한다. 가령 두 가지 개념이 산출하는 결과들 사이에 아무런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면 두 개념은 실제로 같은 것이고 모든 논쟁은 쓸데없는 것이 된다. 그 ‘개념’이란 말을 ‘이념’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가령 다람쥐 대신에 덩샤오핑의 고양이를 떠올려보자. 그의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것 아닌가. ‘쥐를 잘 잡는다’는 결과가 동일하다면 그 고양이가 ‘희다’거나 ‘검다’거나 하는 개념상의, 혹은 이념상의 차이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실용주의 철학이다(중국 사상계의 덩샤오핑이라 불리는 리쩌허우는 ‘실용이성’의 철학을 ‘밥 먹는 철학’이라고 부른다).

제임스는 덩샤오핑보다도 훨씬 노골적인 비유를 든다. 그가 보기에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현금가치’를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현금가치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치를 말한다. 혹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가치다. 배고픈 이들이 밥을 먹게 해주거나 배 나온 이들이 살을 뺄 수 있게 해주는 아이디어 말이다.

이러한 실용주의를 제임스는 개인적으로 과학과 종교를 통합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용주의적 종교론은 형이상학적 유신론이나 자연주의적 무신론과 대별된다. “신학적인 관념들이 구체적인 삶에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다면, 유익하다는 의미에서 실용주의에게도 참이 될 것이다”라는 게 제임스의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신앙을 통해서 사람들이 절망을 극복하거나 소망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런 실제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신앙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다 맞는 말 아닌가? 단지 전봇대를 뽑고 쥐를 잡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가란 형이상학적 질문에 덜미만 잡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08.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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