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출간된 이안 파커의 <지젝>(도서출판b, 2008)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77316.html). 접해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영국의 라캉주의 분석가의 이 '비판적 입문'에서 방점은 '비판'에 더 많이 가 있다. '지젝을 읽기 위하여 알아야 할 것들'이라고 소개된 책이지만 동시에 '지젝을 안 읽기 위하여 알아야 할 것들'도 된다. 가령 아래 기사의 주장대로 "지젝에 홀린" '지젝 애호증자'들이 한편에 있다면, 그 반대편에 있을 '지젝 혐오증자'들의 '복음서' 같은 책인 것이다. 이 책에 대해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의 저자 야니스 스타브라카키스는 "지젝에 대한 유일한 비판적 소개서"라고 환영했는데, 파커와 스타브라카키스의 공통점은 모두 라캉에 대한 지젝의 해석(전유)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어디서나 다툼은 '상속자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아직 완독하지 않은 상태라 파커의 시시비비가 얼마만큼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지젝에 대한 '비판'으로서뿐만 아니라 '입문'으로서도 유익하기를 기대한다.  

한겨레(08. 03. 22) 지젝은 배우다, 혁명을 연기하는

철학을 농담처럼 하는 사람, 농담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그 농담 같은 철학 또는 철학적 농담으로 세계 지식계를 들쑤시고 어지럽히고 열광시키고 노하게 하는 사람은 슬라보예 지젝(1949~)밖에 없을 것이다. 지젝은 세계 철학계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는 난데없이 출몰하고 도발하고 불지른다. 말하자면 그는 철학적 게릴라, 철학적 빨치산이다. 그의 글들은 건드리면 터지는 이론적 지뢰밭이다.

국내에서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지젝에게 홀린 사람들의 노력으로 그의 책들은 1년이면 두세 권씩 한국어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까다로운 주체’다. 논리의 그물에 잘 걸리지 않는다. 미꾸라지처럼 하염없이 이리저리 빠져나간다. 지젝의 책을 읽고 이해했다 싶으면 다음 책에서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지젝이라는 이 모순적인 인간의 전모를 살필 방법은 없을까?

영국의 정신분석학 연구자 이안 파커가 쓴 〈지젝〉은 이 잡히지 않는 인물을 포획해 보려는 책이다. 지젝이 딛고 있는 핵심 거점을 중심으로 하여 그가 무엇을 노리는지 해설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젝이라는 미로로 들어가는 데 도움을 주는 안내서다. 동시에 이 책은 지젝의 모순적 지점을 대놓고 지적하는 비판서이기도 하다. 요컨대 지젝에 관한 비판적 안내서가 이 책이다.

지젝이라는 철학적 난제를 이해하려면 이 문제적 인간의 출신 배경에 관한 지도를 그려보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 알려진 대로 지젝은 옛 유고슬라비아연방에 속했던 슬로베니아 출신이다. 옛 유고연방은 자본주의 서구와 공산주의 소련 사이의 완충지대였다. 소련의 완전한 종속국도, 서구에 가까운 나라도 아니었다. 아니, 실상은 이 두 지역의 혼합체였다. 요시프 티토가 지배하던 시기에 이 나라는 경제적으로는 ‘자주관리’라는 이름의 자본주의 체제였고, 정치적으로는 스탈린주의적 관료지배 체제였다. 티토는 스탈린과 싸우면서 반스탈린적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얻었지만, 그를 둘러싼 개인숭배는 스탈린 개인숭배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티토가 사망하고 소련이 무력화한 뒤 유고연방은 여러 민족단위로 해체됐고, 1990년대에 유고내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

지젝이 철학을 공부한 곳은 슬로베니아 수도의 류블랴나대학이다. 정치적·지리적 중간지대였던 이곳은 소련의 공식철학보다는 서유럽의 철학에 더 친숙한 곳이었다. 지젝은 이곳에서 독일의 비판철학과 프랑스 현대철학을 연구했다. 80년대에 지젝은 프랑스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85년 파리8대학에서 그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기서 익힌 라캉 정신분석학은 이후 그의 이론의 초석 가운데 하나가 됐다. 90년 지젝은 독립 슬로베니아의 첫 자유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네 명의 대통령으로 이루어진 집단지도체제에 자유당 후보로 나갔던 것인데, 5등으로 낙선했다. 자유당 후보라는 이력은 그의 모순적 삶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급진좌익에 가까운 인물이 자본주의화를 지지하는 자유당 후보로 나섰던 것이다. 지젝은 자신의 이런 선택이 전술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전술적 필요에 따른 선택이 그의 저술 작업에서도 그대로 관철된다는 사실이다. 그의 주장이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또는 주제의 성격에 따라 논리 구성이 바뀌기 때문이다. 반스탈린주의자인 듯 보였다가 어느 순간에는 스탈린을 찬양하는 듯이 비치기도 하는 것이 한 가지 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의 이론에는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이론적 벼리가 있다고 〈지젝〉의 지은이는 말한다. 그 벼리가 바로 헤겔과 라캉과 마르크스다. 지젝은 이 세 지적 거인의 주장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그 묵직한 이론 안에 화장실 낙서 수준의 저급한 농담에서부터 싸구려 탐정소설과 할리우드 상업영화까지 온갖 사례를 끌어들인다. 그런 뒤섞기를 통해 매력적이면서 거북살스럽고, 도발적이면서 유희적인 철학적 진술이 흘러나온다.

이 책은 지젝의 지적 토대인 헤겔과 라캉과 마르크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헤겔을 지목한다. 그러나 그때의 헤겔은 우리의 상식으로 굳어진 헤겔, 다시 말해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하나의 닫힌 체계를 완성한 국가주의 철학자 헤겔과는 정반대편에 있는 헤겔이다. 지은이는 지젝의 헤겔이 30년대 프랑스에서 부활한 헤겔이라고 알려준다. 소련에서 망명한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그려 보여줬던 헤겔은 부정과 거부와 분열의 헤겔이었다. 지젝이 자기 것으로 삼은 헤겔이 바로 이 헤겔, ‘끝없는 부정의 헤겔’이다. 이 부정의 정신으로 지젝이 행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그 어떤 이론이든 체계든 그것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 그것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깨부수는 비판 작업의 도구로 헤겔을 이용하는 것이다.

지젝이 기대고 있는 라캉도 이 코제브적 헤겔로 주조된 라캉이다. 라캉은 젊은 시절에 코제브의 헤겔 강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는데, 여기서 자신의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을 익혔다. 헤겔의 부정 개념은 주체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영원한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란 언제나 ‘분열된 주체’, 분열된 채로 자기정체성을 구성해 나가는 주체다. 그 주체가 바로 라캉이 말하는 주체다. 이와 함께 지젝은 마르크스를 자신의 사유의 토대로 삼고 있는데, 그때의 마르크스도 헤겔과 라캉의 색깔이 배어든 마르크스다. 특히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분석’은 지젝이 자주 참조하는 지점이다.

특이한 것은 이렇게 거부와 부정과 반대로 일관하는 듯 보이는 지젝이 해체주의 철학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이다. 지젝이 목표로 삼는 것은 해체주의의 대책 없는 해체가 아니라 ‘긍정을 모색하는 부정’이라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지젝은 보편적 혁명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레닌으로 돌아가 레닌의 혁명전략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의 지은이가 보기에 지젝의 그런 모습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할 뿐 세계를 바꾼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실천적 무기력 증상을 내장한 자의 자기방어일 뿐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지젝에게 주체의 근원적 위치는 히스테리적이다.” 이때의 히스테리는 모든 곳에서 문제를 적발하고 그 문제를 불평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지젝 자신이 그런 히스테리적 주체라고 이 책은 말한다. 그런 히스테리 주체로서 지젝은 일종의 ‘연기’를 한다. 비난하고 거부하는 지젝의 모습은 정작 혁명은 하지 못하고 혁명적 연기만 하는 자의 모습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그렇게 대신 연기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지젝을 좋아한다”고 지은이는 덧붙인다. 이런 비판에 대해 지젝은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이안 파커의 원고를 읽고서 나는 근저에서의 연대감을 경험했다. 명백한 차이들이 있지만 우리는 동일한 정치적 관심사와 전망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비판적 언급들은 언제나 적실하다.” 이 발언도 ‘연기’일까.(고명섭 기자)


08. 03. 21.

P.S. 국내 출간 도서 목록에서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는 지난 2003년 내한강연의 원고들을 묶은 것이다. 해서 현재까지 최신간은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6)이며 그 이후의 책들도 여러 권이 조만간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한편 '왜 지젝과 싸울 가치가 있는가?'란 타이틀은 'Why is the Christian legacy worth fighting?'(영어본 54쪽)이란 절제목에서 따왔다. 국역본에서는 '왜 기독교적 유산과 싸울 가치가 있는가?'로 옮겨졌다. "기독교에 관한 지젝의 저술(<무너지기 쉬운 절대성>과 <믿음에 대하여>)의 상당 부분이 독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복음의 소책자 같기도 하지만, 지젝은 또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 뒤섞인 축복임을 힘들여 강조한다."(111쪽)이 절의 서두는 시작되는데,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의 부제가 원래 'Why is the Christian legacy worth fighting for?'이다(국역본은 '왜 그리스도적 유산은 싸울 가치가 있는가?'로 옮겼다).

전치사 'for'가 빠지면 의미가 달라지는 건지, 혹은 중의성을 갖게 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30쪽에서 'THE PERFECTION OF THE STATE'이란 절제목을 '국가에 대한 지각'이라고 잘못 옮긴 걸로 보아 다른 사례들 역시 역자의 착오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 의미는 기독교적 유산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기독교적 유산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젝은 어느 쪽인가?..

참고로 스타브라카키스의 지젝론은 <라캉주의 좌파>(2007)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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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3-2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지첵과 함께 하는 기묘한 영화여행" 이라는 영화라고 해야하나 다큐라고 해야하나 조금은 햇갈리는 영상물을 보셨는지요?

로쟈 2008-03-22 14:10   좋아요 0 | URL
다 보진 않았습니다.^^;

소경 2008-03-24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변기에 앉아 있는 지젝의 사진이 상당히 전략적으로 보입니다. ^^;

로쟈 2008-03-24 12:51   좋아요 0 | URL
제 계산이기도 하구요.^^;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1908-1961)의 <행동의 구조>(동문선, 2008)가 번역됐다.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 2002)과 함께 주저로 꼽히는 책이다. <기호들>을 포함해서 몇 권이 더 번역되어야 하지만 현재 소개된 책들만으로도 읽을 거리는 충분히 꾸려볼 수 있다. 올해는 레비스트로스와 동갑내기인 메를로퐁티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고... 덧붙여, <눈과 마음>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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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마음- 메를로-퐁티의 회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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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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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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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꾼 2008-03-21 21:15   좋아요 0 | URL
제발 누군가가 김모교수님 좀 말려줬음 좋겠군요 메를로 퐁티, 데리다, 알튀세르, 롤랑
바르트....... 안 건드리는 게 없군요...........열정은 인정하지만 독자도 좀 생각해 주셨음.............-_-;

로쟈 2008-03-21 21:22   좋아요 0 | URL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역마살꾼 2008-03-21 21:21   좋아요 0 | URL
도대체 얼마나 했나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바슐라르, 리쾨르, 부르디외, 셰르, 뒤비까지
있네요 9년동안 30권~~!!!

로쟈 2008-03-21 21:28   좋아요 0 | URL
사실 그런 고전들은 10권만 옮겼어도 번역사에 남을 만한 업적인데요...
 

어제 일부러 대형서점에 가서 구입한 책은 김철의 <복화술사들>(문학과지성사, 2008). 문지스펙트럼으로 나온 책인데(이 시리즈는 정말 뜸하게 나온다!) 어지간한 서점엔 들어오지도 않기에 제발로 찾아갔던 것. 사실 출간 소식을 처음 접한 건 지난주 한겨레21 기사를 통해서였다. 생각난 김에 그 기사와 저자 인터뷰를 옮겨놓는다. 


 

 

 

 

 

 

 

 

 

한겨레21(08. 03. 14) 일본어로 쓰인 조선문학의 정체

“(전선으로 물건을 왕복한다는 이야기를 죽을 때까지 믿은 어머니는) 내가 경성에 가 있던 5년 동안 수도 없이 전선을 바라보며… 아들 물건이 전선에 매달려 있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1942년 한설야의 <피>라는 소설은 전선을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나를 잘 보여준다. 염상섭의 소설 <전화>에서는 ‘덕률풍’(telephone)이 갈등을 조장하고 해결하는 중요한 물품으로 등장한다. “네모반듯한 나무 갑 위에 나란히 얹힌 백통 빛 쇠종 두 개”는 웬 건지 삼백원이나 하더니 기생이 전화해 남편을 불러내는 “난장 맞을” 것이다가 나중에 뜻밖의 횡재의 물건이 된다. 소설에서 식민지 시대의 풍경을 찾아 읽은 <복화술사들-소설로 읽는 식민지 조선>(문학과지성사 펴냄, 문지스펙트럼 5-019)이 건져올린 이야기들이다.

책에는 국문학자이면서 ‘국어의 순수성과 단일성’을 공격해온 저자의 주장이 알기 쉽게 녹아 있다. 골치 아픈 역사 해석 문제는 거둬두고(저자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편집진이다), 저자가 국문학에서 던지는 질문들은 솔깃하다. 일제시대에 식민지 작가에 의해 일본어로 쓰인 소설은 한국 문학인가 일본 문학인가. 그 어떤 문학도 아닌가. 지금도 ‘성역’으로 지켜지고 있는, 한국문학이 한국인에 의해 한글로 쓰인 문학이라는 상식은 1936년에도 있었다. 잡지 <삼천리>는 ‘조선 문학의 정의’라는 특집 기사에서 ‘조선 문학은 조선글로 조선 사람에게 읽히기 위하여 쓴 것’이라는 일반적인 정의를 대표 문인 12명에게 묻는다.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는다.

(암흑기에 꿋꿋이 지켜진 신념이 아니라 통념과 달리 이 시기 ‘제국’의 필요에 의한 ‘위계화’ 덕에 조선어 착취가 심하지 않았다는 논의와 함께) 그는 위의 이 질문에 뭐라고 정확히 답할 수는 없지만, 이런 정의에 따르면 “일본어로 쓴 수많은 작품들은 암흑 속으로 잠기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로 연구하는 자의 ‘순박함’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그는 더불어 이 시기가 ‘암흑기’ ‘공백기’가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 문학의 다른 가능성들이 모색되는 역동적인 시기라고 말한다. “오늘날 그것들은 민족과 모국어에 대한 비겁한 배신 행위로밖에는 기억되지 않지만, 그 기록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뜻밖에도 전혀 다른 모습들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글의 맨 앞에 인용한 한설야의 <피> 역시 일본어로 쓰인 작품이다.

장혁주가 있다. 그는 식민지 시기 최초로 일본어로 소설을 써서 일본 문단에 데뷔한 작가다. 데뷔작은 좌익 문예지 <가이조> 현상 공모에 당선된 <아귀도>. 그의 등장은 일본 프롤레타리아트 문단에서 ‘지주 계급과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에 시달리는 조선 농민의 비참한 삶을 고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후의 문제작은 양쪽 문단에서 외면당하고 지금은 ‘친일문학론’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저자는 “제국의 지배 아래서 제국의 언어로 발언하는 피식민지인은 일종의 복화술사(複話術師)”라고 말한다. (장혁주에 뒤이어 일본 문단에 데뷔한) 김사량이 쓴 <향수>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이 소설들의 상황을 은유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현’은 (망명한) 누이의 안내로 북경의 북해공원을 관광하던 중이었는데 누이는 저쪽 일본 군인이 나타나자 공포에 사로잡힌다. 가까이 가보니 일본 군인은 현의 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군인과 일본어로 이야기하다가 놀라 도망가는 누이를 발견하고는 ‘기다려’라고 말한다. 일본어였고 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일본어로 창작한 동기를 “민중의 비참한 생활을 널리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장혁주)라고 한 작가들의 비극적인 운명인 셈이다.

“구상은 일본말로 하니 문제 안 되지만, 쓰기를 조선글로” 하려니 조선말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고 한 김동인, 최초의 한글소설 <혈의 누>를 연재하기 전 한자에 조선말 음을 단 기이한 소설을 쓴 이인직. 이런 고뇌를 거쳐 근대 한국어가 만들어졌다. 한국어는 낯설고 ‘외래적’인 것이었다. 한국말이 수용한 근대화가 아니라 한국말이 근대화의 산물이었다.(구둘래기자)

부산일보(08. 03. 15) '복화술사들' 김철 연세대 국문과 교수

나는 '국어의 순수성' '국어의 단일성' 따위의 말을 결코 믿지 않으며, 더구나 '국어의 우수성' 따위를 주장하는 사람들 보기를 '돌같이' 합니다."

'복화술사들-소설로 읽는 식민지 조선'(문학과 지성사/6천원)을 쓴 연세대 국문과 김철 교수의 말은 거침이 없다. 그의 책을 읽어내려가면 초창기 근대소설에서 한글이 차지한 위상이 너무도 초라했음에 놀랄 수밖에 없다. 한글이 세종대왕 이래로 쭈욱~ 지금과 같은 독점적 지위를 유지해왔음을 믿는 사람들이나, '모든 사람이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한다는 세종대왕의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왔던 백성들에겐 상실감마저 안겨준다. 그의 언변은 상대방이 입게 될 마음의 상처는 고려하지 않은 듯 매몰차다.

"한국어가 뭔데요?"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되레 머쓱했다. '구상은 일본말로 하되 쓰기는 조선글로 썼다'는 김동인의 고백과 순한문에서 순한글을 거쳐 영어로 일기를 쓴 윤치호의 고백이 도대체 이해가 안된다는 기자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다(여기서 설명이 조금 필요하겠다. 윤치호는 4년 남짓 순한글 문체로 일기를 쓰다 1889년 12월 돌연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한글이 어휘가 풍부하지 않아 말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더랬다).

이어지는 그의 말. "한문이 제1 언어였던 윤치호 같은 조선 사대부에게 한글은 되레 어려웠을 겁니다. 윤치호는 한문으로 표기하는 게 더 쉬웠을 거고, 일본어를 통해서 소설을 접했을 김동인도 일본어로 구상하는 게 더 쉬웠겠죠. 근대 한국어와 한글은, 근대와 처음 대면했던 모든 한국인들에게 근대가 그러했듯이 낯설고 외래적인 것이었죠. 근대문학초창기 작가들의 한국어 글쓰기는 실상 외국어로 글쓰기와 다를바 없었지요."

그래도 한글이 어려운 외국어처럼 다가왔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모든 언어는 배우기 어렵습니다. 쉽다 어렵다의 문제를 떠나서 구한말에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한문의 언어적 지배력이 붕괴됐고, 그 틈에 새로운 언어들이 그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경합했다는 게 중요하죠. 어떤 표기체계들이 우위권을 잡느냐의 문젭니다."

한글도 영어 일본어 등과 함께 한자의 독점적 지위가 붕괴된 틈에 경쟁하는 '새로운' 여러 언어 중의 하나였다는 말로 들렸다. 허망하긴 하지만 결국 권력과 언어의 문제였다. "언어가 권력입니다. 언어 자체의 내적인 원리가 아니라 권력 자체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거죠. 서울말이 표준어인 것은 서울이 가진 권력 때문이고, 영어가 세계공용어인 것도 권력 때문입니다."

이광수의 소설 '재생'에서 여주인공 순영이 백만장자인 백윤희의 초대를 받고 별장에 간 날 거기 모인 남자들을 보고 혼자 속으로 하는 품평이 그랬다. '윤은 못난 듯하고 음흉해 보이고, 최는 남자다우나 더퍼리다. 그런데 백은 라운드(둥글고) 스무우스(미끈하다). 진실로 애리스토크래틱(귀족적)이다.' 부정적인 부분은 한국어 단어로, 긍정적인 부분은 영어 단어로 사용한 이광수의 작품에서 영어의 우월적 지위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가.

도대체 그는 뭘 말하려고 한 걸까? "'한국어는 순수하지 않은데, 다른 언어는 순수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만의 순수함과 단일함에 대한 집착이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낳고 남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과도한 자기동일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진보적인 바탕입니다."

책 제목이 '복화술사(複話術師)'다. 일본어로 글을 쓴 조선 작가들에게 그가 붙여준 이름이다. 조선어와 일본어, 두 개의 혀를 가진 자들이다. 국어와 국문학의 정체가 실로 의심스럽다는 그의 일관된 주장과 국어국문학과 교수라는 그의 위치도 아마 복화술사의 비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지 모른다. '아슬아슬한 게임에서는 그들 스스로도 분열되고 파멸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존재 자체가 모어의 자연성, 국어의 정체성, 국민 문학의 경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수가 된다.' 그런 칼날이 되고 싶었던 걸까? (이상헌기자)

08.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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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03-22 01:03   좋아요 0 | URL
그런데 요즘 "'국어의 순수성' '국어의 단일성' ... '국어의 우수성' 따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며, 또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질까요? "국어와 국문학의 정체가 실로 의심스럽다"는 문제의식이야 한국문학 전공자가 아니라도 많이들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고요. 오히려 낯설지 않은 이야기를 새로운 발견이라도 되는 양 목소리 톤만 높여서 되풀이하는 모양새가 수상해 보입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필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자들도 조금 유난을 떤다는 느낌.-_-;

로쟈 2008-03-22 01:08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건 책에 묶인 글들이 국립국어원이 발행하는 <새국어생활>에 연재됐었다는 사실인데요, 저자도 좀 의외였던 것 같습니다. 책은 주장보다는 '팩트'들이 나열돼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언젠가 고종석의 책에 발문을 쓰기도 했는데, <감염된 언어>와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량 2008-03-22 01:18   좋아요 0 | URL
고종석의 [제망매]에 발문을 썼을 겁니다. 지금의 김철 교수와는 어울리지 않게 말랑말랑하고 센치한 글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로쟈 2008-03-22 21:4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옮겨놓는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를 읽은 소감을 간략하게 적은 것이다.

한겨레21(08. 03. 20) 이 사회에도 이분법만 존재하는가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은 ‘나’는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자 나는 나 자신이 미워졌다.” 한때 유행처럼 읽히기도 했던 브레히트의 짤막한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얘기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펴냄)를 읽다가 자연스레 떠올린 시. 하지만 레비는 자기가 미워졌다는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운 좋게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가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가지고.

이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에 대한 레비식 명명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이다. 그것이 애초에 그가 책 제목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이면서 실제로 그가 쓴 마지막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른바 ‘절멸수용소’에서 누가 익사하고 누가 구조되는가. 레비가 보기에 수용소의 철조망 안에 감금되는 순간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되며,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인간을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범주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이다. 물론 대다수는 수용소에 적응하기도 전에 학살당했던 ‘무슬림’들이다. 무슬림이란 죽음을 이해하기에도 너무 지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고 곧 ‘선발’되어 가스실로 향하게 될 수감자들을 부르는 수용소의 은어다. 대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한 채 곧 쓰러질 듯한 상태다.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들이 대부분 ‘익사한 자’들이다.

그럼 ‘구조된 자’들은 어떠한가? 레비는 여러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중에서 앙리는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까지 갖추고 있는 경우. 그에 따르면, 조직을 꾸리는 것과 동정을 얻는 것, 그리고 도둑질, 이 세 가지가 학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엘리아스는 아예 수용소 체질인 경우. 나이가 스무 살에서 마흔 살 사이일 것 같은 그는 죽을 6리터, 8리터, 10리터나 먹고도 토하거나 설사하지 않고 소화시킨다. 심지어 그러고 나서 즉시 다시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런 엘리아스의 모습에서 레비가 끌어내는 결론은 이런 것이다. “엘리아스는 육체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살아남는다.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내부로부터 절멸에 저항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존자가 된다. 그는 이런 식의 생존 방식에 가장 적합하고 표본적인 인간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갇혀 살았을 법하지만 수용소에는 범죄자도 정신병자도 없기에 엘리아스는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 된다. “수용소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변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인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수용소야말로 근대적 정치 공간의 숨겨진 모형(母型)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통찰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란 이분법적 존재 방식만이 허락되는 사회라면 ‘수용소’와의 구별이 불가능하다. 곧 수용소다. 우리 또한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우리 사회를 가르는 이분법이 ‘낙오된 자’와 ‘성공한 자’밖에 없다면 이 또한 ‘절멸수용소’와 다를 바 없다. 우리 시대의 ‘앙리’와 ‘엘리아스’가 득세하는 수용소 말이다. 과연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가? 아주 운 좋게 살아남은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떠올린 <신곡>의 한 구절이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08. 03. 20.



P.S. 얼마전에 적은 관련 페이퍼로는 '윤동주-프리모 레비-빅터 프랭클'(http://blog.aladin.co.kr/mramor/1949436)을 참조. 관련서들 가운데서 레비의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츠베탕 토도로프의 <극한에 직면하기>, 레비와 같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면서 레비보다 10년 먼저 자살한) 장 아메리의 <자살에 대하여>, 그리고 레비의 전기(가령 이안 톰슨의 <프리모 레비>) 등이 번역/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연작은 소개될 예정이라고 하니까 제외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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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8-03-2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필 오늘 읽은 부분인데. 이 대목은 제목부터 눈에 끌더군요. 그리고는 '진지','흥미'하게 읽었다는. 간혹 나오는 익살에 섬뜩 놀래면서요.

로쟈 2008-03-21 13:10   좋아요 0 | URL
책의 정중앙이기도 하지요. 서경식 선생도 지적한 거지만 <이것이 인간인가>는 상당히 치밀한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강의준비를 위해 강대진의 <고전은 서사시다>(안티쿠스, 2007)의 몇 장을 읽었다. 희랍(저자는 '그리스'란 말을 싫어한다) 고전 전공자의 유익할 길잡이.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신들의 계보>, <일들과 날들>, <아르고호 이야기>, <아이네이스>, <변신이야기> 등 일곱 편의 고전들을 다루고 있다(소개는 읽기 전후에 한번씩 참조하면 좋겠다). 내친 김에 번역본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대부분은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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