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에 관한 자료들을 읽다가 잠시 눈을 돌린 사이트에서 바디우의 <사도 바울>(새물결, 2008)에 관한 리뷰기사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9090). 필자는 출판기획자 이재원씨이고 그의 리뷰 연재를 즐겨 옮겨오던바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컬처뉴스(08. 03. 25) 사도 바울, '다시' 논쟁의 가운데 서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그러나 이렇게 말한 맑스 역시 잊은 것이 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에는 그 반복이 꼭 비극-소극 짝일 필요는 없다”는 말을.

그 예외적인 경우 중 하나가 사도 바울(10?~67?)과 철학자들의 조우이다. 이들 간의 첫 번째 조우는 대략 51년경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언덕 한복판에서 이뤄졌다. 이때 사도 바울이 만난 철학자들은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등의 철학자들이었는데, 이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하자 배꼽을 움켜잡은 채 파안대소하며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희극적이라고 할 만한 이 조우 이후 거의 20세기 뒤에 이뤄진 두 번째 조우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때 사도 바울이 만난 철학자들은 현대 유럽 철학자들이었는데, 이 조우는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1937~  )에 의해 촉발되어 지난 2005년 미국 뉴욕 주의 시러큐스 대학에서 제법 ‘진지하게’ 이뤄졌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바디우인가? 바디우 이전에도 사도 바울을 언급한 철학자들은 부지기수이다(바디우 본인이 작성한 명단만 봐도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리오타르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왜 바디우만이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의 두 번째 조우를 실제로 현실화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디우의 바울은 ‘사도’ 바울이기 전에 ‘투사’ 바울이기 때문이다. ‘투사’ 바울의 형상을 찾는 것 역시 바디우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로 그려진 바디우의 사도 바울은 새로운 투사였고, 이 새로운 투사로서의 바울이 갖는 동시대적인 의미는 동료 철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번에 국역되어 나온 바디우의 1997년 저서 『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원래 제목은 “성 바울: 보편성의 정초”이다)는 바로 이 두 번째 조우의 발단이자 초대장 같은 책이다. 이 초대에 응할지 안 할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겠지만, 이 초대는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다. 바디우가 사도 바울을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보편성’의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기 때문이다. 흔히 보편성이란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모든 사람/사물에 적용되는 어떤 성질/원칙이다. 그런데 바디우의 설명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정초한 보편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에게는 기존의 모든 차이와 분리를 무화시키는 무엇인가가 보편성이다.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자와 후자의 보편성은 매우 다르다. 전자가 실제 대상들에서 뭔가 공통적인 것을 ‘추출’해낸 것이라면(이런 보편성은 “……이지만 ……이다”의 논리를 따른다. 예컨대 “그들은 성별이 다르지만 인간이다”), 후자는 공통적인 것을 ‘창출’해냄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보편성은 “……이고 ……이다”의 논리를 따른다. 예컨대 “그들은 성별이 다르고 그리스도교인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적 주체’라는 새로운 주체를 창안함으로써 바로 이 새로운 보편성의 윤곽을 정초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인이 되기 위해서 그/그녀가 반드시 어떤 특정한 귀속 조건(민족, 성별, 신분 등)을 미리 갖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봤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28)라는 사도 바울의 선언은 이렇게 가능해진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는 묘한 ‘도약’이 있다. 통상의 보편성에서 실제 대상들의 차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공통적인 것 안에서 통합된다. 가령 성별의 범주로 보면 그/그녀는 남성/여성이지만, 종(種)의 범주로 보면 인간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그녀의 정체성이 지닌 차이(성별)는 좀 더 높은 차원에서의 공통적인 것(종)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그녀의 정체성은 연속적이다, 혹은 말 그대로 동일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서는 이런 연속성(동일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범주는 그/그녀의 정체성이 지닌 차이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지 않다. 즉,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서 실제 대상들의 차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공통적인 안에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무화’된다. 그러므로 이때의 공통적인 것은 기존의 차이와 분리를 뛰어넘는(여기서 “뛰어넘는다”는 “극복한다”보다는 “초월한다”에 가깝다. 즉, 사도 바울의 보편성은 차이에 ‘무관심’하다) 제3항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은 ‘창안’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가 창안되려면 그 이전의 주체에게서 미리 일종의 단절이 일어나야만 한다. 열정적으로 그리스도교 박해에 가담하던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을 사도 바울로 뒤바꿔놓은 것과 같은 단절 말이다. 바디우는 이 단절을 ‘사건의 도래’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바로 이와 같은 단절이었다. 바디우가 그 안에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레닌에게는 1914년 8월에 발생한 제2인터내셔널의 배신, 혹은 1917년 2월 혁명이 그런 사건이겠다(흥미롭게도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 시기를 레닌의 ‘철학적 계기’라고 부른 바 있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사실이 아니다. 사건은 “한 시대의 열림,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관계들의 변화”, 즉 가능성의 열림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죽음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음”) 때문이다. ‘사도’(ἀπόστολος)란 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열린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사건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건은 단절이기에 “……이 아니라 ……임”의 논리를 갖는다. 바디우에 따르면 여기에서 “……이 아니라”는 폐쇄적인 특수성들을 해체하는 과정이고, “……임”은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에 주체들이 동역자(즉, 사도)로서 임해야 하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사건은 주체(화)와 하나의 구성적 짜임이 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사건이 있다. 그리고 이 이 사건을 사건으로서 볼 수 있는 주체(사도)가 있다. 이 주체는 이 사건을 사건이라고, 혹은 이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을 진리라고 선언함으로써 새로운 보편성을 창안한다. 그에 따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바디우에게 있어 “사건의 사상가”가 “시인”인 동시에 “투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건의 사상가는 늘 새로운 보편성을 창안하기에 시인(시인의 어원이 그리스어 ‘만들다’[ποιέω]인 점을 염두에 둬라)이며, 그 보편성에 근거해 새로운 세계를 열기 때문에 투사이다.  

그리고 두 가지 공식이 있다. “……이 아니라 ……임”이라는 사건의 논리. “……이고 ……이다”라는 주체화의 논리. 이 두 가지 공식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주체는 사건의 논리에 따라 이미 도래한 사건을 저지하려는(또는 보지 못하는) 힘을 해체하고, 주체화의 논리에 따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의 동료들을 사건에 충실한 주체로 만듦으로써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걷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진리의 사건=주체화 과정(le processus de subjectivation)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건, 주체성, 보편성. 바로 이것이 바디우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가 왜 첫 번째 조우 때와는 달리 희극적이지 않았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세 가지 키워드들이다(따라서 이 두 번째 조우에 “철학자들 한가운데의 성 바울: 주체성, 보편성, 그리고 사건”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건, 주체성, 보편성. 인류의 위대한 실험이었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일체의 진리가 상대화되고, 인류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원칙이 의심받으면서 국가에 맞서는 정치가 정체성의 정치로 축소되어버린 오늘날, 우리가 혁명을 다시 사유하려 한다면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의 의미를 몸소 보여준 ‘우리의 동시대인’인 사도 바울을 외면할 수 있을까? 바디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소 뒤처진 감이 있지만, 우리는 뛰어난 국역자의 도움으로 비로소 바디우가 내놓은 ‘미래를 위한 내기’에 동참할까 말까를 고민할 수 있게 됐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이 내기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철학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있다. 아감벤은 “……이고 ……이다”라는 주체화의 논리를 “……이지만 ……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기”(『남겨진 시간: 로마서에 대한 주해』, 2000)의 논리로 다시 읽는데, 이는 사도 바울을 “보편성의 정초자”가 아니라 “급진적인 분리의 주창자”로 읽는 방법으로서 바디우의 주체화 논리와 첨예한 쟁점을 형성 중이다.

그리고 『까다로운 주체』(1999)에서 『꼭두각시와 난장이: 그리스도교의 도착적 핵심』(2003)[이 책의 국역본 제목은 『죽은 신을 위하여』이다)에 이르는 일련의 저서들을 발표한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의 결과 역시 곧 책으로 발간될 예정이며, 그리고 또……. 아무튼 우리에게는 더 많은 판단 자료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바디우의 말마따나 많은 사건들, 심지어 멀리 떨어진 사건들조차 여전히 우리가 그것들에 충실하기를 요구하고 있는데?(이재원_출판기획자)

08. 03. 25.

P.S. 리뷰에서 언급된 아감벤의 책 <남겨진 시간>에 대해서는 '아감벤과 사도 바울'(http://blog.aladin.co.kr/mramor/101025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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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관련기사 두 편을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옮겨놓으려고 한 것이 며칠 미뤄졌다. 최근 첫 산문집과 함께 장편소설을 펴낸 작가 김원우씨와의 인터뷰기사, 그리고 문단의 '칙릿' 바람에 관한 동향기사이다. '젊은 여성'이 아닌지라 내가 더 공감하게 되는 쪽은 물론 중년 작가의 '줏대'이다.

경향신문(08. 03. 19) 김원우 “중산층도 크게 보니 떠도는 난민의 삶이더라”

작가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면 도시락을 싸들고 연구실로 향한다. 샐러리맨처럼 꼬박 12시간을 앉아 글을 쓴다. 안식년을 맞은 지난해에도 1년 내내 하루 10장 이상 글을 썼다. 효율과 능률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첨단의 시대에, 그는 볼펜을 꾹꾹 눌러 400자 원고지에 글을 쓴다. 오후 6시가 되면 가방을 꾸려 연구실을 나와 맥주를 한 잔 하거나, 집에 돌아와 음악을 듣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휴대폰도 없고 컴퓨터도 사용할 줄 모르는 작가 김원우(61). 그러나 정치하고도 핍진한 언어로 가득 찬 그의 문학은 한국문학사에서 누구도 흉내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자리에 서 있다. 지난 수년간 궁구하듯 써내려간 장편소설과 산문집을 들고 그가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젊은 천사’ 이후 3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모서리에서의 인생독법’(강)은 1990년대 이후 그의 문학의 핵심을 이루는 ‘난민의식’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지방 국립대 의대교수이자 외과의로 평생을 보낸 뒤 미수를 넘기고 세상을 뜬 삼팔따라지, 박성득의 생애를 복원해나가는 이야기다. 추모집을 준비하던 제자 여박사와 최원장은 박교수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마치 일부러 없애기라도 한 듯 그의 경력을 증빙하는 자료가 일절 남아있지 않고, 유족과 후학의 증언을 모아도 생애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자 망연자실한다. 겨우 그러모은 정보로 망자의 실루엣을 그려보지만, 해방 전후와 6·25 동란 당시의 행적은 오리무중이다. 자기 보신에 철두철미하고 믿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칼 실력뿐이었으며, 매우 과묵했고 반찬은 장아찌와 고추장이 다였고 빨랫감도 만들지 않을 정도로 온갖 것을 아껴 썼으며 외부에 대한 의존도가 지극히 낮은 인물.

생애를 온전히 복원할 수 없는 이 독특한 인물은 동시에 ‘어떤 세대의 슬픈 초상’의 보편적 실체이기도 하다. 월남 2세인 최원장이 복원해낸 박성득의 면면은 마찬가지로 삼팔따라지였던 부모와 외삼촌 등 기억이 숭덩숭덩 잘려나간 그 세대 일반의 모습이었던 것. 박성득은 근대 이후 전쟁을 비롯한 갖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나 부박하게 세상을 떠돈 한국 내 ‘이산자’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인생이라는 게 난민의 삶이고, 부평초 같은 것 아닌가요? 객지에서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삶도 난민의식의 또 다른 행태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인생을 더 큰 눈으로 조명하게 됩디다. 그런 면에서 주제가 다른 쪽으로 전화되었다고나 할까. 10여 년 전에는 중산층 부르주아에 대한 자아비판, 자기투영 등을 다뤘지만 10년 전부터는 난민 쪽으로 기울었지요.”

박성득의 생애를 독자들이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세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소설은 이중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다 각각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가 다르다. 독자에게 인내를 요하는 작가의 문장도 여전하다. 참을성 없는 젊은 독자라면 진저리내며 팽개칠 만큼 뜻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단어들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등장한다. 과거부터 사전을 뒤적이는 취미를 갖고 있는 작가는 고르고 고른 단어들로 문장을 채웠다.

요즘 독자들에게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요즘의 문학이 너무 뒤틀려있고 왜곡돼 있는 게 분명하다”며 “전세계적으로 문학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강렬한 자극을 주는 극단적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문학은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게끔 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이 비록 시대와 불화하고 있을지라도 별로 화해할 생각이 없다는 단호한 말투는 어쩐지 그의 문장과 닮았다.

횡보 염상섭의 문체와 닮았다는 세간의 지적에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횡보의 문체하고는 많이 다를 겁니다. 횡보는 전통적인 서울 말씨를 발굴해내고 사전에 등재돼 있지만 사어화 돼가는 단어를 살려내 정확하게 썼는데, 그에 비해 나는 경상도 출신인 데다 횡보의 자연주의적 경향과는 차이가 나거든요. 만연체를 조립하는 데 성의를 다한다는 점은 비슷하겠지. 종결어미를 바꾸고 절대 똑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 등 문장 축조력에서는 많이 따르려 하다보니 영향을 받았다면 받았을 겝니다. 언어라는 게, 문장이라는 게, 결국 유동성과 세속성이거든요. 당대 세속에 질펀하게 깔려 있는 걸 안 받아들이면 생동감이 없어지니까 진부해지지. 이건 어떤 작가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일까? 등단 30여 년 만에 처음 펴낸 산문집으로 이번에 함께 출간된 ‘산책자의 눈길’(강)은 염상섭의 문학 연구를 다룬 글을 꽤 묵직한 분량으로 싣고 있다. 총 3부로 구성된 책에서 그는 ‘문단의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처럼 문장론과 문학상, 문예지와 원고료 등 오늘날 한국 문단의 현실에 대해 가감 없이 비판한다. 2부는 횡보 소설의 근대성과 함께 횡보를 중심으로 한국 소설의 성립 과정을 조명한 글들을 모았다. 3부는 각각 문학평론가 신수정씨와 시인 김정환씨의 대담 형식으로 자신의 문학뿐 아니라 결혼제도와 정치의식 등 당대 문학의 화두를 함께 다뤘다.

“서문에도 썼지만 처음으로 내 전공인 소설이 아닌 것을 내게 됐어요. 오히려 책을 내서 세상을 더 흐트러뜨리는 일이 아닌가 했는데 막상 나온 책을 보니 나름대로 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소설? 당분간 못 쓰지요. 하루 12시간 이상 집중력을 요하는 건데. 방학이나 돼야 쓸까?”(윤민용기자)

경향신문(08. 03. 11) 소설, 젊은 여성에 눈돌리다…‘칙릿’ 잇따라 공모 당선

문단에 칙릿(chick-lit) 바람이 거세다. 거액의 고료를 내걸고 출판사와 문예계간지들이 공모한 장편소설상을 칙릿풍의 장편소설이 휩쓸었다. 최근 출간된 서유미씨의 ‘쿨하게 한 걸음’(창비)과 이달 안에 출간될 우영창씨의 ‘하늘다리’, 백영옥씨의 ‘스타일’이 바로 화제의 소설들이다. '쿨하게 한 걸음’은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이고, ‘하늘다리’는 계간 ‘문학의 문학’이 5000만원을 내걸고 공모한 제1회 장편소설 공모당선작이다. ‘스타일’은 세계일보가 1억원 고료를 내걸고 공모하는 ‘세계문학상’ 제4회 수상작이다.

이들 소설은 모두 30대 초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들의 일과 사랑, 삶을 그려가고 있다. ‘쿨하게 한 걸음’은 요즘 30대 여성의 관심과 고민을 따라간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남자친구와 헤어진 30대 초반의 직장인 연수는 구조조정에 인수설까지 나돌자 회사를 그만둔다. 소설은 자신의 길을 고민하면서 새로이 영화공부를 시작한 연수와 은퇴 후 새 일자리를 찾는 아버지, 갱년기를 맞은 엄마, 30대가 돼서야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촌, 직장과 결혼 사이에서 고민하는 친구들 등 주변인물과의 소통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고민을 담담히 그려낸다.

'하늘다리’와 ‘스타일’은 좀더 감각적이고 트렌디하다. ‘하늘다리’는 31세의 증권사 대리 맹소해를 주인공으로, 숨가쁘게 돌아가는 증권사의 일상과 재테크 세태, 동성애와 유부남과의 사랑 등 좀더 자극적인 소재를 등장시킨다. 패션잡지에서 일하는 30대 초반 여기자의 좌충우돌 일상을 그린 ‘스타일’은 유행에 민감하고 가벼움과 재미를 쫓는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이다. 유명 배우의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골몰하고, 까다로운 음식비평가 ‘닥터 레스토랑’의 정체를 탐색한다는 얼개에 일과 사랑, 패션계의 치열한 경쟁, 사내 권력관계, 명품과 음식이야기 등을 감각적인 문체로 엮었다.

작가 서유미씨와 백영옥씨가 30대 초반의 여성으로 자기세대의 이야기를 다룬 것과 달리 그간 시인으로 활동해온 우영창씨가 50대 남성작가라는 점도 이색적이다. 이처럼 장르문학의 일종인 칙릿이 ‘문학상’이라는 이름을 달고 좀더 공격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고 있다. 칙릿이 대중성과 문학성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세간의 시선을 의식한 듯 백영옥씨는 당선 인터뷰에서 칙릿을 옹호했다. “내가 쓰고 싶은 건 번드르르한 트렌드가 아니라 현대 도시인들의 삶”이며 “칙릿이란 게 ‘된장녀’ 부류들만 나오는 가벼운 장르가 아니다.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도 당대 여성의 삶을 솔직하게 그렸다”고 설명했다.

우영창씨도 “사랑과 일, 이 두 가지는 도시의 미혼 여성에겐 현실의 굴레이자 삶의 추진력이기도 하다”며 “작금의 도시 직장 여성들의 삶은 칙릿 소설이 함부로 예단할 만큼 가볍지가 않고 그 내부엔 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회의,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지속적인 불안 등이 자리잡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심진경씨는 최근 문단의 이 같은 칙릿바람의 원인을 “자본에 의한 문학의 지배”로 요약했다. 외국 칙릿 소설이나 영화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20~30대 여성들이 일정한 독서소비층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이들을 겨냥해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이 있는 출판사, 언론사들이 고액의 상금을 내걸고 상을 만든 것도 아직까지는 소설 독자들이 있고, 문학이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상업적 이유가 가장 크다고 지적했다.

심씨는 또 문학의 영향력 감소를 중요한 요인으로 들었다. 젊은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소비문화를 잘 드러내주는 칙릿은 문학 내부에서 시작된 장르가 아니라 영화, 드라마, 광고 등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새로운 장르문학이라는 점에서 문학이 다른 예술장르의 영향을 받아 생성되는 현대의 경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자를 잃은 한국문학이 계속 추구할 방향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칙릿
젊은 여성을 뜻하는 속어 ‘chick’에 문학을 뜻하는 ‘literature’를 결합한 신조어. 젊은 도시여성들의 일과 연애, 취향 등을 다루는 소설들을 일컫는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영미권 문학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으며, 국내에 본격 소개된 것은 소피 킨셀라의 소설 ‘쇼퍼홀릭’ 시리즈를 통해서다. 여기에 20~30대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와 미국 드라마가 함께 인기를 얻으면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칙릿이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윤민용기자)

08. 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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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3-2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다리]는 검색했는데 책이 안떠요. 혹시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품인건가요?

다락방 2008-03-27 15:29   좋아요 0 | URL
아, 다시 자세히 읽어보니 이달안에 '출간될' 이라고 써있었군요 --

로쟈 2008-03-28 00:11   좋아요 0 | URL
자문자답이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자의 눈길 153쪽에 버나드 쇼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 김원우 씨의 말은 오류.카알라일의 영웅 숭배론에 나오는 말인데요.그리고 또 하나.토마스 만의 펠릭스 크룰의 고백을 읽었다면서(물론 고교시절에 읽었다니 오래되어 그럴수도 있지만)토마스 만의 섹스 묘사가 너무 간접적이라고 했는데 제가 읽은 바로는 엄청나게 노골적입니다.주인공 크룰도 난봉군이요,여자등장인물 들도 유럽의 옹녀들입니다.재밌긴 재밌어요.호텔 종업원인 청년의 연애 난봉기라고나 할까요.군대 면제받으려고 용을 쓰면서 끝내 성공하는 과정은 압권입니다.

로쟈 2008-04-07 21:37   좋아요 0 | URL
벌써 읽으셨군요! 오류는 저자에게 전달해야겠습니다.^^
 

강의준비 때문에 읽게 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작년 경향신문에 연재됐던 '헤르메스의 빛으로'의 한 꼭지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관한 것이다. 일견 졸렬해 보이는 아이네아스의 형상에서 새로운 영웅상을 읽어내고 있는데, 필자의 예시대로 <일리아스>의 영웅들과 대조해봄 직하다. 그리고 '비르투스(virtus)'와 '피에타스(pietas)'도.  

↑ 로마의 가부장 전통(pater familias)을 표현한 조각상. 가운데 중심 인물이 아이네아스이고, 어깨 위에는 아이네아스 가문의 신주(神主)를 든 아버지 앙키세스, 뒤에는 아들 아스카니우스다. 로렌초 베르니니가 1618년부터 2년에 걸쳐 완성했다(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경향신문(07. 02. 09) [헤르메스의 빛으로](6) 새로운 영웅 아이네아스의 탄생

"기억하라! 로마인이여, (굳건한 기강 위에 세워진) 국권의 힘으로 인민들을 다스리는 것, (이것은 너희들만의 기술일진저!), 평화의 법도를 수립하는 것, 곧 순종하는 자에겐 관용을, 오만한 자에겐 징벌을 내리는 것을('아이네이스' 제6권 851~53장)." 이는 제우스가 아버지 앙키세스의 입을 통해서 로마의 건국 원조인 아이네아스에게 내린 천명이다. 로마식 '평천하(平天下)'선언이다. 이 '평천하'를 수행할 인물에 대해서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년)는 작품 '아이네이스'에서 그의 첫 등장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중략)온 바다가 심연의 밑바닥으로부터 뒤집히면서 일으킨 거대한 파도를 바람들이 해안으로 거세게 몰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비명을 내지르고, (돛을 지키는) 밧줄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일순간에 먹구름이 덮쳐 트로이인들의 눈에서 하늘과 낮을 강탈해 가고, 암흑이 바다를 뒤덮는다. 하늘을 찢을 듯한 천둥과 창공을 불태울 듯한 번개가 번쩍이면서 눈앞에서 일렁이는 죽음을 선원들에게 몰아대는데, 순간 아이네아스는 공포에 질려 사지가 풀려버리고, 절망의 통성(痛聲)과 함께 하늘의 별들을 향해 두 팔을 뻗어 올린다('아이네이스' 1권 84~94장)."

데뷔 무대치곤 너무 초라하다. 울고 있는 아이네아스의 모습은 영웅으로 보기에는 너무 졸렬하다. 유사한 상황에서 하늘에 대고 포효를 내지르는 그리스의 영웅 아이아스를 보라! 죽는 것은 무섭지 않으니 암흑이 아니라 광명천지에서 장렬하게 전사토록 해달라고 제우스에게 대드는 아이아스를! ('일리아스' 17권 645~47행). 이에 반해 아이네아스는 여느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울면서 징징거리고 있다. 용기와 평정심을 가지고 상황을 진두지휘해야 할 사람이 말이다. 이런 그를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 영웅답지 못한 그의 모습은 이것만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 크레우사도 지키지 못했고, 자신을 가장 사랑했던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내였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pietas erga parentem)' 때문이라 하지만, 어쩐지 궁색해 보인다. 어쨌든 파파보이(papa-boy)였다.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와 비교해보라! 소위 자신의 '왕의 남자'인 파트로클로스가 전사하자,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전투에 나선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불멸의 영웅이다. 이렇게 영웅이란 지켜주어야 할 것을 지켜주고 소중한 것을 위해선 모든 것을 걸 줄 알아야 한다. 이 기준에서 볼 때 로마의 아이네아스는 자격이 한참 모자라 보인다.

↑ 가슴에 꽂은 비수를 아래로 떨구고 있는 여왕 디도와 이를 애절하게 지켜보고 있는 카르타고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과 글로 실은 필사본.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어쩌면 그리스식, 더 정확히 호메로스식 영웅의 기준에서 보면, '아이네이스'에서 진정한 영웅은 아이네아스가 아니라 오히려 여왕 디도일 것이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으며 자신의 생명도 내던졌던 여인이었기에.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여왕 디도의 사랑이 과연 영웅적인지를. 그녀는 한 나라의 책임자다. 그녀 안에는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카르타고 인민과 카르타고가 그녀의 일부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존재가 아니고, 만인의 존재이다. 자신의 운명이 곧 국가의 운명인 인물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여왕으로서 그녀의 사랑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광기(furor)는 아닐까? 이 광기는 사랑의 감정만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 속였고, 자기 안의 다른 존재들도 자신의 일부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결국 그녀를 사로잡은 광기는 절제와 품위로 넘쳤던 한 여왕을 죽음으로, 조국을 파멸로 이끌게 된다.

반면, 아이네아스의 태도는 딱 파파보이의 그것이다. 그는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을 따른다. 아이네아스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이라 한다. 나름대로 인간적인 번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종국엔 사랑을 배신한다. 아무래도 쏟아지는 비난을 모면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이를 염두에 두었는지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아스의 효심은 파파보이의 그것이 아니라 한다. 이 마음은 단지 생부 앙키세스만을 향하는 혈연적 사랑이 아니기에. 오히려 이 효심 안에는 멸망한 조국의 재건이라는 역사적 사명과 세계에 평화의 법도를 수립해야 하는 천명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이네아스 안에는 아이네아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 인민과 로마도 함께 있다. 이런 운명(fatum)의 인물이기에, 아이네아스는 자신에겐 황홀하지만 다른 만인에겐 참혹한 사랑의 달콤함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그들도 결코 남이 아니므로. 자식, 아버지, 아내, 형제, 친척, 친구, 로마의 인민으로서 자신들의 몫을 아이네아스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저울질이었으리라. 아이네아스의 선택은 자신만을 위한 사랑의 달콤함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의 몫에 대한 존중이었다. 이 존중을 로마인들은 피에타스(pietas)라 부른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에 대해서 자식이 부모에게 가져야 하는 마음, 효(孝)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나라가 인민에게, 인민이 나라에 대해서 가져야 할 마음, 곧 충(忠)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로마식 충효지심(忠孝之心)인 피에타스가 연인에 대한 사랑을 희생시킬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사회의 기본 원리인 남녀의 사랑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르길리우스가 피에타스의 확립을 위해 사랑을 희생시킨 데에는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러 답변이 가능하겠으나, 이런 해명도 가능하리라. "이곳은 사는 동안 형제를 증오하는 놈, 아버지를 두들겨 팬 패륜아,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피호민을 속인 귀족 떨거지들, 평생 돈만 알고 (행여 새지나 않나 두려워) 혼자서만 꿰차고 친척들에게 베풀지 않은 수전노(이런 족속이 제일 많은데)들, 간통 중에 걸려 맞아 죽은 (연)놈들, 칼과 창을 들고서 들어와선 안 되는 땅을 군홧발로 짓밟은 놈들, 주인을 속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놈들이 갇혀서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라오('아이네이스' 6권 608~613행)."

이 대목은 지옥의 한 장면이지만, 실은 지상 로마의 현실이기도 하다. 온갖 잡범들과 법을 어기고서 군대를 로마로 끌어 들이고 있는 악한들로 가득한 지상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으로, 오늘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을 어떤 사람이 바로 잡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품성을 가져야 할까? 온갖 범죄로 가득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하는 책무를 지닌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이는 분명하다. 그것은 청춘남녀간 사랑의 정념이 아니라, 타인의 몫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할 줄 아는 법과 사람 사이의 관계(人間)를 정립해주고, 사람이 사람답게 처신하도록 해주며, 곧 예의를 회복시켜주는 복례(復禮)의 덕인 피에타스이다. 그것은 전쟁과 내전으로 사람이 짐승으로 떨어지고, 가족도 무너지고, 법의 강제력으로도 나라가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 그곳을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고자 할 때 요청되는 내심(內心)의 명령이다.

칼을 외부의 적으로 향하게 할 때에 필요한 것은 용기(virtus)이다. 그러나 그 칼이 내부의 세계로 향하게 될 때, 그것은 광기(furor)로 변한다. 아무리 내부 세계가 지옥이라 할지라도 저 칼을 내부로 돌려선 안 된다. 복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폭력이 아니라 정신의 무기이기에. 베르길리우스는 그 무기로 인내와 관용이 결합된 피에타스를 제시한다. 보기에 지저분하고, 하는 일이 일사천리로 시원스럽게 진행되지 않는다 해서 한 판에 싹쓸이해야 한다는, 한 번에 다 씻어내야 한다는 조급증은 이럴 때에 가장 위험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조급증의 소유자는 이런 상황에서 칼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이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그 사회는 내전(bellum civile)이 시작된다. 기원전 80년 술라 독재의 로마를 봐라! 정신의 무기는 그 효과가 당장 드러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정신의 무기, 곧 인문 교양이 필요한 단계로 접어든 사회는 따라서 더딤과 답답함을 견딜 줄 아는 법을 요구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적어도 속전속결을 요구하는 전쟁터의 영웅에게는 더욱 그러하리라.

이런 이유에서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아스를 호메로스식 전쟁 영웅에서 인내와 관용의 인물로 탈바꿈시킨다. 더디고 답답해 보이는 지도자로 말이다. "'오 동료들이여, (중략)자네들은 이보다 더 험한 것도 겪지 않았소. (중략)자! 그러니 탄식과 두려움일랑 떨쳐 버리고 용기를 냅시다! 이 고생도 언젠가는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오. 비록 다양한 고난에 부딪히면서 숱한 험로를 지나고 있지만 우리는 라틴 땅으로 향하고 있소. 운명이 우리에게 보장한 안녕(安寧)의 땅으로 말이오. 그곳에 트로이를 재건하는 것이 우리의 천명이오. 견디시오. 장성하게 뻗어 나갈 나라를 위해서 당신 스스로를 지키시오.'

아이네아스는 이렇게 말했다. 산더미 같은 걱정에 짓눌려 견디기 힘들었지만 얼굴로는 거짓 희망을 지어 보이면서, 가슴 저 깊은 곳으로는 고통을 억누르면서 말이다('아이네이스' 1권 198~206장)." 자기도 견디기 힘든 것을 남에게 견디라고 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영웅이 아니다. 뭐 하나 해결해 주지도 못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고초를 통해서 형성된,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법이 그의 내면에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된다. 이 법은 인고의 세월을 통해 언젠가는 얻게 될 결실(로마의 '평천하')을 위한 기본 원리로 작동한다.

이 점에서 그는 새로운 영웅(heros novus)이다. 그는 자기를 견딜 줄 아는 극기(克己)의 영웅이다. 극기의 힘은, 그것이 힘이라는 점에서 외면의 용기와 다르지 않다. 같은 힘이다. 외부로 향한 용기가 내면으로 승화된 힘이 극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화는 쉽지 않다. 여기엔 저 숱한 견딤의 세월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견딤을 통해서 마침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법, 곧 예의를 회복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 길을 열어 준 사람이 아이네아스이다. 즉, 그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영웅이고, 이를 통해서 로마의 '평천하(平天下)'를 가능케 했다. 물론 로마의 '평천하'가 군대의 힘과 외면적 용기에 의지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근본에 자리 잡고 있는 힘은 로마인의 내심에서 작동하고 있는 '극기복례'의 원리인 피에타스일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도 않았고,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08. 03. 24.

 

 

 

 

P.S. 어제 도서관에서 <아이네이스>(도서출판숲, 2004)를 대출했다. 지금은 절판된 소프프카바인고, 작년에 하드카바로 새로운 판이 나왔다. <일리아스>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네이스>의 경우에도 몇 개의 번역본이 있는데, 라틴어 원전 번역은 천병희 선생의 <아이네이스>(도서출판숲, 2004/2007)가 유일하다(이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15514 참조). 김명복 교수가 영어본을 중역한 <아이네이드>(문학과의식사, 1998)가 10년전에 나왔었고, 오스트리아 작가 아우구스테 레히너의 각색본을 옮긴 것이 <아에네이스>(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영역본이나 러시아어본 등은 인터넷에서 쉽게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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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5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25 08:26   좋아요 0 | URL
네, 고쳤습니다.^^;
 

하이데거의 <숲길>(나남, 2008)이 번역돼 나왔다. 아직 '전집'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독어본도 아직 완간되지 않은 거 아닌가?) 그간에 나온 번역본만으로도 어지간한 철학자의 전집 규모는 된다. 2차문헌은 제외하고 하이데거의 저작으로만 독서목록을 만들어둔다. 실제 독서는 미뤄지겠지만(<숲길>의 몇몇 텍스트 읽기는 기획하고 있다). 아래는 하이데거의 오두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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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Dasein'을 통용되는 '현존재' 대신에 '터있음'으로 옮긴 건 역자의 고집이겠지만 적합해보이진 않다('존재자' '존재론' 등의 용어를 어차피 써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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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3-23 12:34   좋아요 0 | URL
<숲길>의 국역본이 나왔군요. 오늘도 로쟈님 덕분에 좋은 소식 하나 얻고 갑니다.^^ 오랜만에 원전과 함께 꼼꼼히 비교/일독해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로쟈님도 앞에서 'Dasein'의 번역어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셨지만, 하이데거의 번역과 관련하여 저 개인적으로 항상 '흥미롭게' 생각해오고 있는 것은, 국내의 '주도적인' 하이데거 학자들ㅡ예를 들어, 이기상 선생이나 신상희 선생ㅡ이 하이데거의 개념과 용어들의 번역에 있어서 고집스럽게ㅡ또는 '쉽게도'(!)ㅡ'순수'한국어화를 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순수-국어'에 대한 태도가 제게는 하이데거가 독일어에 대해 품고 있던 기본적인 태도와 '상동적'이면서 또한 동시에 그와 '평행하는' 어떤 경향으로 여겨지기에, 이는 실로 세심한 이론적 주목을 요하는 일종의 '번역-병리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개념의 '순수한' 번역에 대한 이러한 '욕망'이 어쩌면 하이데거 학자들의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로쟈 2008-03-23 13:00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국내 하이데거 번역이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최근의 플라톤 번역들이 이에 견줄 만하지 않을까 싶고) 거기엔 '우리말로 철학하기'에 대한 의식도 한몫했다고 봅니다. 일장일단이 있기에 부정적으로만 보진 않고요, 다만 '터있음' 같은 (과도해보이는) 역어들에 대해선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람혼님의 '번역병리학적' 분석은 고대해봐야겠습니다.^^

L.SHIN 2008-03-24 11:22   좋아요 0 | URL
서재 배경사진이 바뀌었군요. 아름답습니다.^^

로쟈 2008-03-24 12:51   좋아요 0 | URL
네, 어제 봄비가 내리길래...
 

매주는 아니고 가끔 눈에 띄는 기획기사들이 있을 때 '씨네21'을 사서 본다. 보통은 전철에서 읽는다. 지난주에는 '미국영화는 지금 다시 태어났다'는 특집좌담 때문에 사보게 됐는데(세 주 연속특집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이 좌담 외에 특별히 재미있게 읽은 건 김소희 기자의 '오마이이슈'. 매주의 시사 이슈를 정리해주는 꼭지인데(원고지 6매짜리다), 나는 가끔씩 읽어보지만 그 입담에 경탄하곤 한다(한겨레21의 '오마이섹스'보다도 더 섹시하다!). 급기야는 이번주의 '진짜 유별난 DNA'를 며칠 전에 읽고서 몇 편을 모아놓기로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한달치의 '이슈' 총정리이다.    

씨네21(08. 03. 17) [오마이이슈] 진짜 유별난 DNA

아침 8시에 일어나기도 힘든 나에겐 아침 8시 전 회의는 경이로울 뿐이다. 세상에 월화수목금금금이라니, 월화수목일일일도 아니고. 남편이 공무원인 우리 옆집 언니 얼굴이 반쪽이 됐던데, 머슴처럼 봉사하겠다며 새벽 별보기, 노 홀리데이를 하면 진짜 머슴처럼 뒷수발 드는 이들의 노동환경은 더 가혹해진다. 운전기사, 경비아저씨, 수행비서, 기타 등등. 설마 한푼이라도 더 시간외수당을 챙기려는 심보는 아니겠지? 워낙 실용적인 분들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공무원들이 바삐 일한다면 고소한 면은 있다. 문제는 그게 진짜 일을 하는 건지 하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 종일 졸리고 멍하다는 ‘얼리 버드 증후군’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통령이 닦달하니 청와대, 정부부처, 공공기관, 지자체까지 일사불란하게 회의시간을 당기고 휴일에도 나와 일한다. 그동안 다 널널하게 놀았다는 말씀인가. 기업지원과를 기업사랑과로 바꾼 지자체, 직원들에게 영어학원 등록을 의무화한 기관도 있다. 프렌들리가 지나치면 스캔들-리가 된다.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공기업·공공기관의 임원들을 “알아서 떠나라”고 한 데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멀쩡한 절차를 거쳐 뽑힌, 임기도 한참 남은 이들을 겨냥해 “이전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이라며 역시 물러나라고 하고, 한나라당 대변인은 “좌파이념에 매몰된, 유별난 DNA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딱지를 붙였다. 이렇게 색칠을 하는 이유는 당 공천에서 탈락했거나 자기 사람에게 한 자리 주려는 것이라는 걸 아침잠 많은 국민들도 다 안다.

정작 ‘유별난 DNA’가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교육계다.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이 회장으로 있는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는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애들에게 일제고사를 치르게 하더니, 지역 등수, 전교 등수를 매겨 공개할 작정이다. 다른 지역, 다른 학교보다 높은 점수를 받게 하려고 예상문제집을 나눠줘 달달 외우게 하거나(서울시교육청), 운동부 학생 및 장애 학생을 시험에서 제외하는(경기지역 한 학교) 작당을 하기도 했다. 학생 수준을 진단해 그에 맞게 가르치고 학력을 높이는 게 목적이라더니, 알고 보니 애들을 ‘대리인’으로 교육감들과 학교장들이 경쟁하는 꼴이 아닌가. 내 일찍이 당부한 바 있듯이, 그렇게 겨뤄보고 싶으면 깔끔하게 자기들끼리 국어·사회·수학·과학·영어 시험 보란 말이다. 영어 시험에 말하기랑 듣기는 꼭 넣고.(김소희_한겨레21 기자)

씨네21(08. 03. 10) [오마이이슈] 식량 주권

식당들이 메뉴판을 다 바꿨다. 500원, 심하면 1천원씩 올렸다. 아니, 밀과 옥수수값이 폭등했는데, 비빔밥 값은 왜? 밥집 아줌마의 싸늘한 일갈. “국제 곡물값 상승이랑 유가 급등 몰라? 미국이 콱 쥐고 비싸게 파니깐… 뭐든 덩달아 올랐어.” 그럼 왜 200원이나 700원도 아니고. 덧붙인 일갈. “잔돈 거슬러주기 귀찮아서.” 더 오를지 모르니까 미리 올려놓고 보자는 ‘확보주의’ 심리도 작동한 것일 게다.

십수년 전 우르과이 라운드 때부터 익히 들어온 ‘식량 주권’이 이러다 진짜 위협받는 건 아닐까 싶다. 내 주변에서 두 번째로 똑똑한 우리 사무실 조계완 선배에 따르면 위협받는단다. 허걱. 그럼 앞으로 밥 많이 못 먹나? 다행히 우리가 쌀은 거의 자급자족한다. 그러나 다른 곡물 자급률은 5%. 그리하여 전세계 5위의 곡물 수입국이다.

국제 곡물값은 지난해 이미 전년도에 견줘 두배로 폭등했다. 기상이변으로 곡물 작황이 부진한 터에, 중국·인도 등 급격히 소비수준이 높아진 큰 나라 사람들이 육류 소비를 많이 하면서 사료곡물 수요도 크게 증가했다. 이들 나라에서 도시화가 가속되면서 경작면적이 줄어든 것도 한 원인이다. 그래 결국 고기 많이 먹는 게 문제야(이다혜 우리 이 참에 끊을까?). 바이오연료도 ‘곡물 먹는 하마’로 급부상했다. 기름값이 치솟으면서 대체에너지인 바이오연료 산업은 더욱 커졌다. 이런 얽히고설킨 상황에 따라 곡물 재고량은 바닥을 내보이고 있다. 조만간 소비량이 생산량을 넘어서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가격 급등에 확보문제까지 겹치니, 바야흐로 식량이 무기가 된 시대라고 조계완 선배는 설명했다.

대규모 곡물 생산국은 미국·중국·러시아·오스트레일리아·브라질 등 큰 나라들이다. 그중 미국의 생산집중도가 제일 높다. 세계 곡물 수출시장을 쥐고 흔드는 주요 메이저 기업들도 대체로 미국 회사다. 이들이 결정적일 때 가격에 영향을 끼친다. 개방 압력을 넣어 작은 나라들이 농업을 포기하게 만든 것도 이들이다. 그럼 유가 급등은 무슨 상관일까? 우리의 곡물 수입 의존도는 2000년 중국(50.2%), 미국(29.1%) 순이었으나, 2006년 미국(55%), 중국(19.6%)로 뒤바뀌었다. 운임 비용이 그만큼 늘었다는 얘기이다.

결국 우리 밥상을 지배하는 ‘보이는 손’은 미국인 거네. 아줌마 말이 맞네. 무섭다. 내 삶의 유일한 밑천, 밥이나 먹어야겠다. 쌀만은 지키겠다며 아스팔트 농사 짓던 농민들의 은덕을 이렇게 입는구나. 모두들 라면, 빵 대신 밥 드세요. 밥힘으로 견딥시다.(김소희_한겨레21 기자)


씨네21(08. 03. 03) [오마이이슈] 왜 언니들은 하나같이 문제지?

장관 후보자 세명이 사퇴했지만, 남은 사람들도 가히 의혹 종합선물세트다. 집·땅·아파트·오피스텔에 이어 국경까지 넘나드는 버라이어티한 투기, 탈세, 표절, 군사정권 부역, 허위 경력, 공금횡령, 외국적 자녀의 건강보험 무임승차, 부동산 실명제 위반…. 위법 내용도 어찌나 다양한지, 운전 중 속도위반을 일삼은 이도 있다. 이러다 정부 구성 못하겠다, 대사면시키자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들이 청문회를 통과한다고 해도 제대로 일을 할까 의심스럽다. 노동·복지장관 후보자는 자기 분야의 현안에도 구체적인 답을 못하거나 의원들의 다그침에 말을 바꿨다. 한나라당 의원으로부터 “공부 더 해야겠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였다. 개인의 ‘굴욕’을 넘어 부처의 ‘굴욕’, 나아가 그들에게 행정적인 권한을 위임한 국민의 ‘굴욕’이다. 날이 바뀔 때마다 ‘더 큰 의혹’이 터져나와 정신이 없다만, 간추려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사퇴한 세 후보 중 두명은 여성이었고, 논문 표절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 청와대 수석도 여성이다. 하나같이 다 이상하다. 왜? 여자들이 공직을 맡을 준비가 안 돼 있어서? 아니다. 구색 맞추기로 여성을 등용하다 보니 공들여 찾지 않고 가까운 데서 아무나 데려다 앉힌 결과다.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술, 용인술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녀국적·부인투기·정신세계 삼박자로 욕을 먹다 사퇴한 다른 한 남성후보는 통일부, 걸어다니는 ‘의혹 백화점’인 후보와 허위경력 기재 같은 바보 같은 짓을 한 또 다른 후보는 각각 보건복지가족부와 노동부 장관 내정자이다. 모두 대통령이 없애려 했거나 노골적으로 홀대하는 부처다. 참,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도 복지 담당이지.

돈 되는 부서만 챙기고 나머지 부서는 잘나가는 부서의 지원부서로 여기는 ‘사장님 마인드’가 정부 구성에도 적용된 것이다. 거기에 부처 수장을 자기 수족 정도로 여기고, 여성은 말 잘 듣는 만만한 이로 고르면 된다는 생각이 더해진 게 아니라면 이런 식의 인사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투기 의혹에 “남편 선물”이라느니 “땅을 사랑한다”느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최소한의 공적 훈련도 안 된 여성들이 여론에 밀려 사퇴하자 “여성 인재 풀이 워낙 적어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하루아침에 여성의 지위와 권익을 퇴행시켜버렸다. 한나라당의 여성의원과 당직자, 전문위원들은 그럼 뭔가. 여성 등용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일천하고 위험한 이가 그려나갈 ‘실용’이 대체 어떤 것인지, 심히 우려된다.(김소희_한겨레21 기자)

씨네21(08. 02. 25) [오마이이슈] 단병호와 부자 정부

회사 동료 길사마가 최근 한나라당에 공천 신청을 한 한 인사를 놓고 기염을 토했다. 일찍이 조기 유학을 떠나 미국 주류사회에 진입하려다, 잘 안 됐는지 한국에 돌아와 한국의 캐네디가 되려고 하는데, 혼자 잘나 잘벌고 잘먹고 잘사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 아무런 책임도 애정도 없어 보이는 성장 배경을 갖고 공공의 영역인 정치에까지 진출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모욕적이라는 주장이었다(헉헉 옮기기도 숨차다).

나는 솔직히 조금 무서워진다. 우리 사회의 ‘주류’는 언제부턴가 조기 유학을 떠나 내내 나라 밖에서 살아온(살고 있는) 이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선한 이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책임과 애정이 많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의 경험이다. 고급 세단 타고 비싼 사립학교 다니다 미국의 고급 주택가에서 역시 비싸게 공부해 고급 일자리 얻은 다음 비슷한 배경의 배우자를 만나 자기 자식도 비슷한 코스로 키우는 사람이 볼 수 있는 세상은 제한돼 있다. 그들의 선의가 경험의 폭에 갇혀, “어머,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하지만 저 사람들 길바닥에서 저러고 있으니 정말 불쌍해” 식으로 발휘된다면?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대한민국 1%’의 1%에 의한, 1%를 위한 사고와 판단을 먼저 하기 쉽다. 자기를 버리는 수준의,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막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와 내각 인선을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이라고 한다.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같이 땅땅땅 억억억 부자들이다. 집이 서너채에 전국 산지사방에 땅을 보유한 이들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부동산 투기는 대체 누가 한 것일까. 장관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 요청 사유서’에 실린 재산내역을 분석한 기사를 보면, 이들은 대체로 ‘우연히도’ 부동산 개발 바람을 타고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배불린 10년이다. 그런 이들이 정책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까.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이 탈당과 불출마를 선언한 다음날, 부동산 부자 내각의 면면을 접했다. 단 의원의 부인 이선애씨는 경기 성남의 집 근처 상가에서 채소가게를 하고 있다. 남편이 노동운동을 할 때나 감옥에 있을 때나 국회의원을 할 때나 변함없다. 살고 있는 아파트도 이씨가 일찍이 분양받아 새벽일 해가며 대금을 부어 마련한 것이다. 단 의원 같은 이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평균 재산 40억원의 불로소득을 누려온 이들은 하루아침에 국정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뭔가 아주 크게 잘못되고 있는 게 아닐까.(김소희_한겨레21 기자)

08. 0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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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3-22 22:30   좋아요 0 | URL
저도 김소희 기자의 글 너무 좋아요.^^

로쟈 2008-03-23 11:37   좋아요 0 | URL
챙겨두시나 보군요.^^

섬나무 2008-03-23 12:21   좋아요 0 | URL
우리 사회의 1%들은 이런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일 겁니다.

로쟈 2008-03-23 13:01   좋아요 0 | URL
이런 글이 '비지니스'에 도움이 안되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1:13   좋아요 0 | URL
마지막 사진은 하지원 누나? 이쁜 여자는 무조건 누나라고 하는 버릇이 있어서요.

로쟈 2008-04-07 21:34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