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의 전집이 출간됐다. 이미 지난주부터 소식은 접하고 있었는데, 리뷰기사들은 이번주에 올라오고 있다. 예전에 고려원에서 한번 선집이 출간된 바 있지만(나도 두세 권 갖고 있다) 30권 규모로까지 새로 나올 줄은 몰랐다. 여하튼 그의 독자들에겐 반갑고 즐거운 일이겠다. 한 소개기사에 인용된 영국 소설가 콜린 윌슨에 따르면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그의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이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당장은 그의 <러시아기행>부터 읽고 싶어진다!). 한겨레의 기사가 가장 자세하기에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4. 12)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나는 평생 위대한 영웅적 인물들의 영향을 받았다. 어쩌다가 영웅성과 성스러움을 겸비한 인물이 나타난다면, 그는 인간의 본보기였다. 영웅이나 성자가 될 능력이 없었던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내 무능함에 대한 위안을 조금이나마 얻으려고 시도했다.”

이 고백 그대로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는 영웅이 되기에는 너무 문학적이었고, 성자가 되기에는 너무 세속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글을 씀으로써 성자의 형상을 창조했고, 우리 시대의 영웅을 그려냈다. 그의 글쓰기는 말하자면, 우리를 성스러움 가까운 곳으로 이끌려는 영웅적인 투쟁이었고, 영웅을 살아 있는 존재로 빚어내려는 성스러운 분투였다.

<그리스인 조르바> <영혼의 자서전>의 작가 카잔차키스의 전집이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대학생 시절에 쓴 소설에서부터 최후에 쓴 작품까지 소설ㆍ희곡ㆍ서사시ㆍ여행기ㆍ편지가 모두 30권으로 묶였다. 전집 가운데 상당수는 과거에 낱권으로 번역된 바 있지만, 그의 모든 작품을 번역해 모은 전집 출간은 이번이 처음이다. 20세기 세계 문학사의 거인이자 현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작가의 문학적 성취를 통째로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1883년 그리스 남부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자신이 아랍계 아버지의 ‘불’과 그리스계 어머니의 ‘흙’을 동시에 이어받았다고 만년의 자서전에 썼다. 해적의 후예였던 아버지는 남성성ㆍ투쟁성ㆍ에너지의 화신이었고, 농부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온화함ㆍ선량함ㆍ내향성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아버지의 불과 어머니의 흙은 그의 피 속에 섞여 평생을 두고 불화하고 적대했다. “나는 타협이 불가능한 요소를 타협시키는 것이 하나뿐인 내 의무라고 느꼈다. (…) 그것은 벅차고 끝없는 의무다.”

터키의 지배 아래 있던 크레타의 정치적 상황은 카잔차키스의 삶에 또 하나의 의무, 정치적 자유를 향한 투쟁의 의무를 얹어주었다. “내 영혼을 처음으로 뒤흔든 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다.” 크레타인들의 해방 투쟁의 기억은 뒷날 소설 <미할리스 대장>으로 열매를 맺었다. 벌써 어린 나이에 자유의 소중함을 느꼈던 카잔차키스는 청소년기에 좀더 넓은 세상과 만나게 되면서 크레타의 경계를 넘어선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크레타만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영원한 특징이었다.”

카잔차키스의 자유의지가 지닌 유별난 성격은 정치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가 언제나 이원적으로 공존하고 길항한다는 데 있다. ‘영혼의 작가’라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카잔차키스는 정치적 행동주의자로서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으며, 러시아 혁명 지도자 레닌을 찬양하는 글을 썼고, 후년에는 그리스 사회당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정치 상황이 불리해지자 국외로 망명하기도 했다. 자유를 향한 그의 목마름은 끝없는 여행으로도 나타났는데, 지중해에서부터 극동의 일본까지 세계 거의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그 결과가 <스페인 기행> <러시아 기행> <영국 기행> <일본ㆍ중국 기행> 같은 여러 권의 여행기로 남았다.

동시에 그는 일찍부터 성자의 삶에 이끌려 성지를 순례하고 금욕적 고행에 몸을 내맡기기도 했다. 성자는 그에게 곧 정신의 영웅이었는데, 붓다와 예수, 그리고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이 그런 존재였다. 희곡 <붓다>와 소설 <성자 프란체스코>는 성자의 삶과 하나가 되려는 내면의 열망이 낳은 작품이다. 뒷날 그는 예수를 살과 피를 지닌 존재로 형상화한 <최후의 유혹>을 썼는데, 두 아내를 거느린, 번뇌하고 갈등하는 인간으로 그렸다는 점 때문에 교회의 격렬한 비난을 샀고 바티칸의 금서 목록에 올랐다.


요컨대, 카잔차키스는 끝없는 모험 속에 자신을 풀어놓은 사람이었다. 자유의 땅을 향한 위태로운 항해가 그의 삶이었다. 그 삶을 신화에 빗댄다면 오디세우스의 방랑이 될 터인데, 그런 삶의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서사시 <오디세이아>다. <오디세이아>는 “모두 3만3333행으로 이루어진 웅대한 대서사시이자 카잔차키스 일생에 걸친 가장 장엄한 문학적 업적”이라 할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자유의 투사가 가장 생생하고도 도전적인 문체로 그려낸 <그리스인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모순적 열정이 만개한 작품이다. 1917년 만나 한동안 같이 생활했던 실존 인물 조르바에 대해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썼다. “내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면 나는 아마 호메로스와 붓다와 니체와 베르그송과 조르바를 꼽으리라.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삶의 길잡이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주어졌다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으리라. 그 까닭은 글쓰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그가 갖추었으니, 화살처럼 허공에서 힘을 포착하는 원시적인 관찰력과, 아침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과,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지닌 듯 자신의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결정적 순간마다 인간의 배 속보다도 더 깊고 깊은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야수적인 웃음을 그가 지녔기 때문이었다.”

조르바에 대한 서술에는 젊은 시절 그가 광포하게 빠져들었던 니체의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그는 니체를 처음 읽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처음에 그는 나를 완전히 공포로 몰아넣었다. 나는 그의 격렬함과 자부심에 비틀거렸고, 위기에 도취했으며, 마치 굶주린 맹수와 어지러운 난초들이 가득 찬 시끄러운 밀림으로 들어가듯, 두려움과 열망을 느끼며 그의 작품에 탐닉했다.”


그는 삶의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았고, 그 심연과 싸웠다. 그 싸움을 영혼과 육체의 싸움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내면에는 인간 존재 이전의 ‘악한 자’가 지닌 어두운 태곳적 힘이 존재했고, 또한 인간 존재 이전의 신이 지닌 밝은 힘도 존재했는데, 내 영혼은 이 두 군대가 만나 싸우는 격전장이었다. 고뇌는 격렬했다. 나는 내 육체를 사랑해서 그것이 사멸하지 않기를 바랐고, 영혼을 사랑해서 그것이 썩지 않기를 바랐다.” 그 힘겨운 싸움이 삶을, 문학을 살찌웠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영혼과 육체가 강할수록 투쟁은 그만큼 수확이 많고, 최후의 조화는 더욱 풍요롭다. 신은 나약한 영혼이나 흐물흐물한 육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정신은 힘차고 저항력이 넘치는 육체와 씨름하기를 바란다.”

1957년 사회주의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카잔차키스는 쇠약해진 몸에 독감의 습격을 받고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생전에 써 놓은 그의 묘비명은 이랬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고명섭기자)

08. 04. 11.

P.S.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1964)에 나오는 유명한 댄스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ndPJRh_K2yc 에서 볼 수 있다. 아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러시아어판이다.

Никос Казандзакис Грек Зорба Zorba the Gr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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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2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4-12 11:15   좋아요 0 | URL
대우가 썩 좋지는 않다고 들었는데요.^^;

stella.K 2008-04-12 11:01   좋아요 0 | URL
이 사람은 우리나라에선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이름에 가리워져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군요.
희랍인 조르바는 영화로 봤는데 지금 생각해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안소니 홉킨스(맞나? 갑자기 자신없어짐>.<;;)연기는 참 훌륭했죠.
하드카바 같은데 낱권이 비교적 저렴하게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8-04-12 11:16   좋아요 0 | URL
안소니 퀸이죠.^^

stella.K 2008-04-12 12:35   좋아요 0 | URL
앗, 맞다! 순간 헷갈렸다는...>.<;;

로쟈 2008-04-12 23:07   좋아요 0 | URL
안소니 퀸은 자서전도 번역돼 있습니다. <원 맨 탱고>라고...

노이에자이트 2008-04-12 22:41   좋아요 0 | URL
저는 조르바는 그다지 감명 깊지 않았고...'전쟁과 신부'가 좋더라구요.2차대전 후 좌우익이 나뉘어 내전이 치열했던 당시의 그리스. 형은 신부,동생은 좌익 빨치산으로...어쩐지 우리나라와 비슷하여 이름이나 지명만 우리나라 것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약간 세련된 반공드라마 같은 느낌도...되게 재밌었어요.미니 시리즈로 번안해도 될 듯...

로쟈 2008-04-12 22:55   좋아요 0 | URL
강추하시는군요. 참고하겠습니다.^^

털세곰 2008-04-12 22:48   좋아요 0 | URL
<그리스인 조르바>... 고등학교때 겉멋에 쩔어 읽고 유난히 폼 쟀던 기억이^^
고등학교적 감수성을 마구 때렸던 것으로, "희고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가 일품인" 등으로 여인을 묘사하며 종종 "러시아 여인"으로 비유하곤 했는데 그것이 '러시아 기행' 덕분인지...?^^ 카잔차키스에 대한 기억의 되살림으로 러시아 기행은 읽어보고 싶네요. 지옥같은 다음 월요일의 마감만 지나가면...

로쟈 2008-04-12 22:55   좋아요 0 | URL
음, 월요일...

노이에자이트 2008-04-13 00:22   좋아요 0 | URL
실제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은 사람보다는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읽은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요.앞의 두 작가는 이름만 유명하지 작품은 많이 안 읽히는 것 같아요.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우리나라에 조르바를 읽은 이들의 동호회가 꽤 크다고 하던데요.

로쟈 2008-04-13 00:32   좋아요 0 | URL
설마요.^^ 대표작이라곤 할 수 없지만 <톨스토이 단편선>까지 고려하면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들에 속할 텐데요? 한 10년쯤 전인가, 한국이 가장 많이 읽은 외국소설이 <죄와 벌>과 <부활>이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13 22:38   좋아요 0 | URL
그건 방송용?이고 사실은 시드니 셸던 작품이 제일 많이 읽힌다던데요.도스토에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작품 특히 장편을 읽었다면 뭔가 있어보이니까 <죄와 벌>,<부활>을 거론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중소설 순수소설 그런 거 되게 따지잖아요.시드니 셸던 좋아하면 뭔가 지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근데 30여년 전 독서신문 조사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가 한국인이 애독하는 작가 1위던데 요즘도 그러나 봐요.여하튼 저는 톨스토이면 몰라도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보단 카잔차키스의 <전쟁과 신부>가 더 문학성도 뛰어나고 재미도 있더라구요.

로쟈 2008-04-13 22:47   좋아요 0 | URL
셀던이나 베르베르가 베스트셀러 1위였던 적이 있지만 장기적인 것은 아니었고요, 출간 종수로 보더라도 단연 톨스토이가 많이 읽힌 걸로 돼 있습니다(실상 일제때부터인지라). 도스토예프스키도 스테디셀러는 되는 거지요. 카잔차키스에 대한 선호는 대단하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3 23:33   좋아요 0 | URL
작가의 지명도와는 무관하게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 좋아서요.하하하...작가의 성향 따라 반혁명주의자나 반동주의자면 뭐 어쩔 수 없다고 해도...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뭔가 칙칙하고 병적인 느낌이 들어서요.저는 반혁명주의자 중에는 아르쯔이바셰프가 좋더군요.<싸닌>...뭔가 상쾌해요.근데 카잔차키스 것 중에서 <조르바>는 별로고 그냥 <전쟁과 신부>가 좋습니다.

로쟈 2008-04-14 23:56   좋아요 0 | URL
작가에 대한 선호라기보다는 작품에 대한 선호라고 해야겠네요.^^
 

이번주 한겨레21의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옮겨놓는다. <슈바니츠의 햄릿>에 대해 적으려고 했으나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가를 쪽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헨리4세>와 관련한 슈바니츠의 에피소드가 재미있어서 소개했다. 어차피 책이야 읽을 사람은 알아서들 읽을 테니...

한겨레21(08. 04. 10) 욕, 셰익스피어 정도는 돼야지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란 책으로 우리 독서계에 ‘교양’ 열풍을 선사해주었던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유작이 출간됐다. <슈바니츠의 햄릿>(들녘 펴냄)이 제목이다. 원래는 ‘셰익스피어, 그리고 그를 문화적 기념비로 만든 모든 것’이란 제목을 붙이려고 했으나 집필 단계에서 저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모든 것’ 대신에 ‘햄릿’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라고 하기엔 분량이 <교양>처럼 두툼하지 않고 단출하다. 책의 원제목은 조금 다른 ‘셰익스피어의 햄릿, 그리고 이 작품을 문화적 기념비로 만든 모든 것’인데, 이걸 보면서 저자가 영문학자였다는 것에 주의를 두게 됐다. 때맞춰 나온 원로 영문학자 여석기 교수의 <나의 ‘햄릿’ 강의>(생각의나무 펴냄)와 같이 느긋하게 읽어봄 직하다.

단, 전제는 “번역을 통해서라도 이 작품을 한 번 이상을 통독하였고, 가능하다면 영문 텍스트를 대강이나마 훑어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 <나의 ‘햄릿’ 강의>에 나오는 말이지만, <슈바니츠의 햄릿>도 다르지 않다. 그건 두 책 모두 단순한 입문서가 아니라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교양서를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햄릿> 자체가 고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이 공연된 극작품은 <햄릿>일 것이다. 하지만 한 연구자의 말대로 “이 극의 의미에 대한 영원하고도 깊게 자리잡은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햄릿>이다. 때문에 고전은 한 번 읽고 마는 작품이 아니라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여러 해설과 강의들은 이러한 ‘다시 읽기’의 길잡이이자 자극제가 되어준다.

가령, 셰익스피어를 ‘세계문학의 천재들’ 가운데 단연 가장 앞자리에 놓고 있는 미국의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해석은 어떤가. 그는 <세계문학의 천재들>에서 이 작품을 햄릿이 자신의 두 ‘아버지’가 남긴 유물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걸로 이해한다. 그 두 유물이란 1막에 등장하는 부왕 햄릿의 유령과 5막에 나오는, 부왕의 어릿광대 요릭의 해골이다. 블룸의 주목에 따르면, 요릭은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어린 햄릿의 실질적인 아버지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어린 햄릿이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돌려줄 유일한 대상은 바로 요릭이었다”고까지 그는 말한다. 우리가 부왕의 ‘유령’에만 너무 주목하지 말고 광대의 ‘해골’에도 신경을 좀 쓸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가? 슈바니츠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서 우리가 고전 읽기를 통해 단지 교양 획득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존경’까지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셰익스피어에게 진 빚’이라고 털어놓는 대목인데, 어릴 적 스위스 산골에서 독일로 이사와 처음 들어간 학교에서 겪은 일이다. 거기선 아이들 사이에서 ‘욕 경연대회’가 자주 벌어졌고 쌍스러운 욕을 누가 더 잘하느냐에 따라 서열이 매겨졌다고. ‘임마’ ‘짜식’ 수준으로는 웃음거리나 될 뿐이었는데, 어느 날 펼쳐든 셰익스피어의 사극 <헨리 4세>에서 그는 ‘화약고’를 발견한다. 그러고는 결투에 나가 뚱보 녀석에게 수준 높은 교양의 욕을 퍼붓는다.

“이 삶아놓은 돼지머리 같은 놈아, 헛바람만 들어찬 똥자루, 지 다리도 못 보는 한심한 배불뚝이, 물 먹인 비계, 물러터진 희멀건 두부살, 푸줏간에 통째로 내걸린 고깃덩이, 푸딩으로 속을 채운 출렁거리는 왕만두, 버터를 접시째 퍼먹는 게걸딱지….” 그리고 옆에 끼어든 빼빼 마른 녀석에게는 “꺼져버려, 이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몰골아, 뱀장어 껍데기, 말린 소 혓바닥, 북어 대가리 같은 놈, 수수깡, 뜨개바늘보다 더 가늘어서 치즈 구멍으로 술술 빠지는 놈아, 갑자기 성난 비둘기라도 된 거냐? 아니면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생쥐?”

당연한 일이지만 슈바니츠는 욕 경연대회의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본 이후 그는 평생 셰익스피어를 존경하게 된다. 생각건대, 욕도 이 정도는 돼야 ‘교양’으로 쳐줄 수 있겠다. 요즘 아침저녁으로 확성기에서 쏟아지는 고리타분한 수사와 막말들을 귓전으로 접하고 있다. 고역이다. ‘고전 읽는 정치’ ‘교양 있는 정치’가 그립다.

08. 04. 10.

 

 

 

 

P.S. <헨리 4세>에 나오는 욕 가운데, "버터를 접시 퍼먹는 게걸딱지"는 <슈바니츠의 햄릿>에 "버터를 접시 퍼먹는 게걸딱지"(20쪽)라고 돼 있고, 나는 그대로 옮겼었다. '접시째'라고 교정한 건 편집자이다. 잡지에 기고한 원고는 그런 손길을 한단계 거쳐서 기사화된다. 참고로, <헨리4세>는 시중에 두 가지 번역본이 있다. 형설출판사판(2004)으로 1, 2부가 번역돼 나온 건 대역본이고, 이전에 나온 건 이태주 교수가 옮긴 <셰익스피어 4대 사극>(범우사)에 실려 있다.

<슈바니츠의 햄릿>은 비교적 잘 읽히지만 간혹 미심쩍은 대목들도 있다. 가령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들 중 하나에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하이데거는 실존을 '죽음으로 가는 예선경기'로 규정했다."(90-1쪽)에서 '죽음으로 가는 예선경기'란 말은 생경하다. '실존'에 대한 정의라면 낯설지가 않을 텐데 '예선경기'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이다. 원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더불어, 죽음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으로 슈바니츠가 소개하고 있는 책이 하나 있다. "필립 아리스(Philipp Aries)의 <죽음에 대한 서양의 태도>"이다. 슈바니츠는 영역본(1974)으로 거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필립 아리스(Philipp Aries)'는 '필립 아리스(Philippe Aries)'라고 표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서양의 태도>는 <죽음의 역사>(동문선, 1998)로 국역돼 있다.

해럴드 블룸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도 본문에서 언급했는데, 900쪽이 넘는 분량의 이 국역본은 소장가치가 충분한 가히 기념비적인 책이 될 뻔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로선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보는 데 만족할 작정이다. 그건 역자도 후기에서 적은 놓은 '아쉬운 점'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애초에 원문 814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을 출판해야 하는 사정 때문에 출판사와의 협의에 따라 부득이 일부 내용을 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 혹은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 등은 일부 생략한다.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896쪽)

하지만 그게 양해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가 읽어본 몇몇 작가의 경우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 혹은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가 아님에도 임의로 누락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일부 오역이야 이만한 번역서라면 불가피하다손 치더라도 임의로 발췌 번역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다. 다른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제대로 완역한 책이 다시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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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햄릿」을 읽으면...
    from 혼잣말 2008-04-10 22:49 
    - 들라크루아, 햄릿, 29 x 22 cm (1839) “이 삶아놓은 돼지머리 같은 놈아, 헛바람만 들어찬 똥자루, 지 다리도 못 보는 한심한 배불뚝이, 물 먹인 비계, 물러터진 희멀건 두부살, 푸줏간에 통째로 내걸린 고깃덩이, 푸딩으로 속을 채운 출렁거리는 왕만두, 버터를 접시째 퍼먹는 게걸딱지….” 그리고 옆에 끼어든 빼빼 마른
 
 
털세곰 2008-04-1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세미인도 결국 똥만 들어찬 가죽자루(!)에 불과하다"는 부처의 말도 있었습니다만, 슈바니츠도 한 몫 단단히 하네요^^

로쟈 2008-04-12 23:30   좋아요 0 | URL
뭐 맥락은 좀 다르지만 그런 말도 있지요. 굳이 부처님 말씀이 아니어도.^^;

노이에자이트 2008-04-12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미인들이 책도 많이 보더군요.미인이 아니더라도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책을 더 많이 보구요.우리나라 사람들 책 안 읽는다는 결과는 남자에게 더 책임이 많지요.

로쟈 2008-04-13 00:35   좋아요 0 | URL
직장 남성들은 워낙에 서류들을 많이 보지 않을까요?..
 

이번주 시사IN에 실은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60#). 석영중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예담, 2008)에 대한 것이다.

시사IN(08. 04. 08) 돈이 필요했지만 돈을 원하진 않았다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속물적인 돈 이야기?’ 표지의 문구가 그렇다. 사실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전기나 소설을 몇 권 읽어본 독자라면 ‘도스토예프스키와 돈’이라는 주제가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입문서로도 제 값을 할 만한 석영중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예담 펴냄)는 이 주제에 관한 종합 보고서이자 흥미로운 뒷담화이다. 

사실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뷔작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부터가 이 ‘잔인한 천재’의 앞날을 예고해주는 듯한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읽히는 <죄와 벌>은 가난한 대학생 주인공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돈에 죽고, 돈에 또 죽고’ 하는 이야기였다. 또 만년의 걸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호색한 아버지와 불한당 아들 사이의 주된 갈등이 3000루블이란 돈을 놓고 빚어진다. 아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3000루블에 관한, 3000루블에 의한, 3000루블을 토대로 하는 소설”이라고 말해질 정도다.  

그렇다면 이 러시아 작가는 왜 그토록 돈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가? 저자가 작가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여주는 것은 ‘낭비가’의 초상이다. 빈민구제 병원의 의사인 아버지가 근면과 성실을 삶의 보증으로 삼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간이었다면 아들 도스토예프스키는 책읽기를 좋아한 조숙한 소년이면서 동시에 부잣집 동급생들의 눈에 혹여라도 가난하게 보일까 봐 ‘과시용 소비’를 일삼은 미숙한 속물이었다. 공병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그는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울먹이는 문체’에 담아서 아버지에게 보내며 그렇게 받은 돈은 들어오기가 무섭게 다 써버렸다. 한술 더 떠서 앞으로 들어올 돈을 상상해가며 당겨 썼다. 이런 식의 턱없는 지출 때문에 그는 항상 쪼들렸고 언제나 주변 사람에게 돈을 꾸어달라고 간청해야 했다.

신문·잡지 열심히 읽어 ‘팔리는 소설’ 쓰다

그런 낭비벽의 소유자가 작가가 됐다. 자기 기질을 숨겨놓을 방도는 없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고 ‘모욕당한 사람들’이며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 같은 귀족 출신의 동시대 작가와는 창작의 명분이 달랐다. 그는 돈을 위해 썼고 생존을 위해 써야 했다. ‘문학은 돈이 아닐지 모르지만 원고는 확실히 돈’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고 언제나 의식했다. 때문에 그는 ‘팔리는’ 소설을 쓰고 싶어했고 써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신문을 읽었다. 그는 ‘광적인 신문 애독가’로서 당대의 신문과 잡지를 게걸스럽게 읽었다. 대작 장편소설의 아이디어를 대부분 신문의 사회면에서 얻었을 정도다. 그런 탓에 살인과 자살 같은 자극적인 사건과 통속적인 요소가 그의 작품에 많이 포함돼 있다. 그의 궁여지책이 어떤 의미에서는 활로였던 셈이다.   

평생 돈에 쪼들리면서 돈을 위해 펜을 들기는 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에 모든 걸 걸지는 않았다. <백치>의 여주인공 나스타샤가 구애자금으로 받은 거금 10만 루블을 벽난로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장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인물들은 돈보다 우선해 자기가 자존심을 가진 인간임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저자가 마지막 장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룬 장의 제목을 ‘돈을 넘어서’라고 붙인 것은 그래서 시사적이다. 저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을 잘 이해했고, 돈을 읽었고, 절실히 아주 절실히 돈을 필요로 했지만, 돈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오로지 돈을 필요로만 했지, 원하지도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않았다.’

왜 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사람이란 배가 부르면 배고팠던 시절은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미성년>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란 족속은 ‘자, 이제는 배가 부릅니다. 이번에는 무엇을 해야 하지요?’라고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돈은 그러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해줄 뿐이지 그 질문에 해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돈’에 대해 배부르게 읽고 나니 이런 질문이 생겨난다. 이번에는 무엇을 읽어야 하지요?

08. 04. 10.

P.S. 기본적인 소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돈'(http://blog.aladin.co.kr/mramor/1990550)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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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1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보다 전기들이 더 재미있더라구요.문제는 전기를 읽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성이 되게 싫어져서 작품을 읽고 싶은 마음이 안나기까지 한다는 겁니다.특히 구제불능의 도박병...

로쟈 2008-04-11 22:23   좋아요 0 | URL
작가들의 전기가 모범생 전기일 수는 없지 않을까요?^^

군자란 2008-04-1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히려 돈에 집착하는 도스도에프스키가 더 좋은것 같습니다. 아마 인간중에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돈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저는 작년에 츠바이크가 쓴 발자크 평전을 읽으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말이 나온김에 츠바이크의 평전은 정말 일품이라고 생각듭니다.
마치 그시대에 저도 같이 있는 느낌이 들정도 이니까요......

로쟈 2008-04-11 22:24   좋아요 0 | URL
도스토예프스키가 바로 '발자크'과지요. 그를 벤치마킹하고자 했던...


stella.K 2008-04-11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저도 이제부터라도 신문이라도 좀 게걸스럽게 읽어야겠습니다.^^

로쟈 2008-04-11 22:24   좋아요 0 | URL
여차하면 '팔리는' 소설도 쓰시겠는데요.^^

stella.K 2008-04-12 11:02   좋아요 0 | URL
ㅎㅎㅎ 로쟈님! 그게 제 소원인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ㅜ.ㅜ

로쟈 2008-04-12 11:17   좋아요 0 | URL
빚독촉을 받으면 가능하실지도.^^;

stella.K 2008-04-12 18:35   좋아요 0 | URL
오~로쟈님! 입심이 만만치 않으시군요. ㅎㅎㅎ
맞아요. 그 방법이 있었네요.ㅋㅋ

로쟈 2008-04-12 18:47   좋아요 0 | URL
하긴 말로 빚을 갚는다고도 하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전기도 외국처럼 어두운 면도 그렸으면 좋겠어요.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 인물의 문중후손들이 난리를 친다고 하더라구요.

로쟈 2008-04-12 22:59   좋아요 0 | URL
영화나 드라마도 못 찍으니까요.--;

털세곰 2008-04-12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 로쟈님 도-끼가 왜 똘스또이에겐 돈 빌려달라는 말이 없었는지 이유 아세요?
똘스또이가 무게는 좀 잡았지만 그래도 나이도 도-끼가 예닐곱살 더 많고 해서는 그냥 누를 수도 있었을텐데... 뚜르게녜프보다 똘스또이를 도-끼가 어려워했서 그랬을까요?

로쟈 2008-04-12 22:58   좋아요 0 | URL
글쎄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톨스토이가 워낙 비사교적이어서 말붙일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네요...

털세곰 2008-04-13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문현답이십니다^^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이자 네오콘의 핵심이론가라는 하비 맨스필드의 <마키아벨리의 덕목>(말글빛냄, 2008)이 출간됐다. 연초에 레오 스트라우스의 마키아벨리론을 <한비자>와 같이 읽어보려고 했는데, 맨스필드의 책을 대신 끼워넣어도 되겠다. 몇 권의 마키아벨리 독서 목록을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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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덕목
Mansfield, Harvey C. 지음, 조혜진 외 옮김 / 말글빛냄 / 2008년 4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2008년 04월 09일에 저장
절판

체사레 보르자- 마키아벨리를 사로잡은 『군주론』의 모델
세러 브래드퍼드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 / 2008년 4월
26,000원 → 23,400원(10%할인) / 마일리지 1,300원(5% 적립)
2008년 04월 09일에 저장
품절
마키아벨리 평전- 시인을 닮은 한 정치가의 초상
로베르토 리돌피 지음, 곽차섭 옮김 / 아카넷 / 2000년 7월
30,000원 → 28,500원(5%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2008년 04월 09일에 저장
절판
평전 마키아벨리
마이클 화이트 지음, 김우열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6년 4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8년 04월 09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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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8-04-11 00:48   좋아요 0 | URL
체사레 보르지아에 대한 새책이 나왔군요.그러나 많이 비싸네요.흑흑흑
읽다만 평전 마키아벨리라도 읽고 새책 살 궁리를 해야겠지요.
어쨌든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로쟈 2008-04-11 22:25   좋아요 0 | URL
체사레 보르자가 그렇게 젊은 줄은 이번에 알았습니다.^^;
 

러시아의 세계적인 문화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의 선집 <기호계>(문학과지성사, 2008)가 출간됐다. 모스크바-타르투학파의 리더였던 로트만은 "미하일 바흐친과 더불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현대 러시아 지성계의 대표적 학자이자, 문화를 본격적인 기호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문화기호학이라는 학제의 가능성과 자리를 예견하고 예비했던 최초의 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다."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고 있지만 모처럼 묵직한 이론적 저작이 출간돼 반갑다. 개인적으론 교정에도 참여한 책이기에 더더욱.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아서 일단은 출판사의 소개를 잠시 옮겨놓는다(나도 따로 서평을 쓸 계획이지만). 로트만의 경력과 번역서의 서지에 관한 것이다.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을 졸업한 뒤 에스투니아의 타르투 대학에 자리를 잡은 로트만은 이후 우스펜스키, 퍄티고르스키, 이바노프, 졸콥스키 등의 동료들과 함께 러시아 형식주의와 프라하학파의 유산을 구조주의 언어학과 결합시킨 독특한 구조-기호학적 문화론을 주창한다. 1964년 이들은 ‘타르투 여름학교’를 개최하는데, 이 학술 대회는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관심사와 전공 분야가 전혀 다른 각양각색의 연구자들이 로트만의 초대장과 ‘2차 모델링 체계’라는 하나의 공통 개념만을 갖고 몰려들면서 큰 성황을 이루면서, 이후 1970년까지 2년마다 개최되었다. 여름학교는, 1966년 2회 대회 때는 미국에서 로만 야콥슨이 찾아오고, 1968년에는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그 성과물을 모은 논문집 『기호체계 문집』을 번역하여 서방에 소개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등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런 성과로 로트만은 당시 출국 금지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69년 창립된 세계기호학협회의 초대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학파의 핵심 멤버들 대부분이 미국과 영국 등으로 망명하면서 학파의 공동 작업이 사실상 종결된다. 또한 질서와 코드, 구조와 대립을 강조하던 구조주의가 거부되고, 새롭게 등장한 포스트구조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유럽의 지적 담론의 전개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끝내 망명을 거부하고 홀로 타르투에 남은 로트만은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 아래서도 문화연구의 이론적 기초가 되는 ‘기호학적 체계’의 관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문화기호학을 정련해나갔다. 로트만에게 1970년대는 의미를 단일하게 규정하거나(구조주의) 혹은 유희적으로 비워버리는(포스트구조주의) 대신에 의미를 담는 갖가지 ‘다른 방식들’을 찾아내는 방법을 모색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색은 철저하게 문화 속에서, 문화를 통해 추구되었다."

"문화의 공시적·통시적 평면을 넓고 깊게 아우르는 로트만의 이 모색은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이 짧지 않은 여정이 바로 ‘문화기호학’이라는 이름 아래 수행되었다. 그 길은 물론 문화를 끝없이 살아 숨 쉬는 정보로 만들기 위한 길이었지만, 동시에 기호학을 여전히 ‘기능하는’ 담론으로 유지하기 위한 힘겹고 지난한 여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1993년 10월 로트만이 사망한 뒤, 이듬해 발행된 『PMLA』지 로트만 추모 특집호 서문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렇게 썼다. '1960년대라는 특별했던 그 시절, 로트만의 신중한 연구에서 미래의 전조를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세대의 ‘사무라이들’은 끈기와 열정으로 주변 문화들이 발신하는 새로운 기호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타르투 학파, 그중에서도 로트만의 작업은 우리의 선례, 최소한 동류로 여겨졌다.'”

Ю. М. Лотман Семиосфера

"이 책은 지난 2000년 러시아의 ‘이스쿠스트보-에스페베’ 출판사에서 출간된 로트만 선집 『기호계Семиосфера』에 실린 논문 중에서 문화기호학과 관련된 논문 12편을 번역한 것이다. 첫 논문이 1968년에, 마지막 논문이 1992년에 발표된 것으로, 이 논문들에는 ‘공간적 모델링’을 비롯해 ‘비문화/반문화’ ‘경계’ ‘문화적 기억’ ‘복수 언어주의’ ‘대화’ 등 로트만 문화기호학의 대표적인 이론적 개념들이 빠짐없이 논의되고 있다."

원저인 <기호계>는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번역본은 '로트만 기호계'의 아직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어서 앞으로 '로트만 기호계'의 더 많은 대목들이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참고로, 로트만에 대한 소개는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http://blog.aladin.co.kr/mramor/802010), '유리 로트만의 영화기호학'(http://blog.aladin.co.kr/mramor/802116), '바슐라르-예고로프-로트만'(http://blog.aladin.co.kr/mramor/154152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08.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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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8-04-09 09:22   좋아요 0 | URL
역자에게 <문화연구 방법론>이라는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로트만'을 처음 접했었는데 그의 이론은 확실히 프랑스의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적 흐름과는 다른 맛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쟈 2008-04-09 15:20   좋아요 0 | URL
그런 인연이 있으시군요. '기호계'라고까지 하니까 스케일이 좀 다르죠.^^

털세곰 2008-04-11 01:05   좋아요 0 | URL
오고... 김수환 선생의 "역작"이 드디어 나왔군요. 판권 문제만 아니라면 딴 책들도 좀 손 봐줬으면 좋겠는데... 하여튼 반갑네요

로쟈 2008-04-11 22:26   좋아요 0 | URL
'딴 책들'의 양들이 너무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