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읽어보려고 했던 기사를 시간을 내 옮겨놓는다. 안톤 체홉의 희곡 <세자매> 공연에 대한 리뷰인데, 이번 작품은 특히 이윤택 연출이어서 눈길을 끈다. 공연을 직접 관람할 여유는 없지만 리뷰만으로도 감은 잡아볼 수 있겠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4&title_down_code=002&article_num=9160).

컬처뉴스(08. 04. 16) 희망과 절망을 담아낸 통속성

19세기 사실주의 연극의 거장 안톤 체홉은 반복되는 일상에 무기력하게 매몰되어가는 인생의 모습을 특유의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다. 일면 비극적인 작품으로 ‘오독’되곤 하는 그의 희곡들은, 사소한 것들에 집착해 결국 생의 진수를 놓쳐 버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블랙코미디와 같은 강한 희극성을 지니고 있다. 오는 4월20일까지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세자매>는 선이 굵은 중견 연출가로 이름난 이윤택 씨가, 이러한 원작의 희극성을 증폭시켜 ‘대중통속극’의 맥락으로 재해석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어린 시절을 모스크바에서 보낸 올가, 마샤, 이리나는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변방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로 내려왔다.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었던 이들 자매는, 원치 않은 현실을 견디며 늘 아름다웠던 도시 ‘모스크바’를 꿈꾸며 살아간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직장 때문에 늘 갈등하는 맏딸 올가, 결혼하면서 처음 품었던 기대와 너무나 다른 남편의 모습으로 인해 불행해 하는 마샤, 그리고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꿈꾸기를 단념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막내 이리나의 모습은 실상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청춘의 모습이다. 사방이 가로 막혀 있는 갑갑한 현실의 벽 앞에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세 자매는 그녀들의 구원으로서 ‘모스크바’를 외친다. 하지만 꿈꾸는 것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꾼다. 견디기 힘든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혹은 정말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꿈으로 그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비루할지언정 너무나 안정되어 버린 일상을 걷어차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불안한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지의 시간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선택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심한 시간은 흐르고, 1막에서 ‘모스크바’를 외치던 세 자매는 2막과 3막 그리고 4막에서도 여전히 그 곳에 머물러 있다. 교사직을 그만두려고 하던 올가는 교장이 되고, 마샤는 마찬가지로 불행한 결혼 생활로 고통스러워하는 ‘베르시닌’ 중령과 동병상련의 힘겨운 사랑에 빠지며, 이리나는 무의미한 직장 생활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세 자매에게 희망과 같았던 남동생 ‘안드레이’는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나타샤’의 유혹에 빠져, 너무 쉽게 교수가 되려던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만다.

그렇게 멈추어 서 있는 세 자매의 삶은 점점 더 감당할 길 없는 가혹한 현실에 질식당해 간다. 오직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안녕 밖에는 관심이 없는 나타샤에 의해 자신의 방을 빼앗기는 순간, 이리나는 깨닫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모스크바’를 꿈꿀 수 없다. 정말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듯 체홉은 그저 멈추어 서 있었기에 좌절된 꿈을 읊조릴 수밖에 없었던 세 자매의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말한다. 갔어야 했다. 떠났어야 했다. 더 늦기 전에 결단했어야 했다. 하지만 늘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오고, 일과 기회 그리고 사랑은 어느 덧 희미한 자취만을 남긴 채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꿈이 사라져 버린 공간에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군대의 이동과 함께 텅 비어버린 도시에 남겨진 세 자매 곁에는 속물스런 시의회 의원이 된 안드레이와 이기적인 욕망의 화신으로 변해 버린 그의 아내 나타샤 만 남아있을 뿐이다. 생존 본능을 위한 이해타산에 밝은 나타샤의 세계는 점차 꿈의 흔적을 부여잡고 위태롭게 서 있는 세 자매의 세계를 거침없이 침식해 들어온다. 이런 이유로 서로를 힘겹게 의지한 채 삶의 의미와 미래의 희망을 애써 부르짖는 세 자매의 마지막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안쓰럽게 만든다. 

간다, 간다 하면서도 결국에는 가지 못하고 현실을 맴돌고 주저앉고 마는 허다한 인생의 모습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 그린 체홉의 <세자매>에서, 이윤택 연출은 그 이면에서 꿈틀대고 있는 격렬한 욕망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는 원작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방식으로서 은유와 절제의 방식을 파하고, 도리어 노골적인 표현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본심을 폭로한다.

당시 사회 통념상 은밀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던 나타샤의 유혹은 안드레이를 거의 덮치는 식의 본능에 충실한 모습으로 형상화 되고, 원작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고통스러워하는 마샤와 베르시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격렬한 키스와 포옹을 주저하지 않는다. 군의 이동으로 인해 무기력하게 떠나는 베르시닌의 등에 뛰어 올라 머리채를 움켜쥐는 마샤의 파격적인 모습은 이전의 어떠한 <세자매> 공연에서도 볼 수 없는 ‘통속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정한의 표현 방식이었다.

사실 이전의 전통적인 방식의 공연들에서 <세자매>의 등장인물들은 비록 내면에는 인생의 고뇌와 욕망이 꿈틀대고 있을지언정, 겉으로는 세련되고 예의바른 태도로 각자의 진심을 감추곤 했다. 하지만 이윤택 연출은 이런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지극히 ‘속물적인’ 보통 사람들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고 해석한다. 베르시닌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감추기 위해 늘 인류나 조국의 미래에 관한 멋진 장광설을 늘어놓는 한심한 사람이며, 그런 베르시닌의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빠진 마샤는 그와 헤어지는 마당에도 자신의 신발을 챙기는, 말 그대로 ‘아줌마’다.

안드레이는 점차 몰락해 가는 집안의 현실은 물론, 아내 나타샤의 공공연한 외도를 애써 외면한 채 다만 안정만을 추구할 뿐이며, 그의 아내 나타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위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해 성공하려는 탐욕스런 신자유주의 시대의 화신과 같은 존재이다. 이윤택 씨는 이번 작품을 통해 체홉의 매력이란 지극히 속물적인, 그런 까닭에 우리와 같이 평범한 보통 사람의 희망과 절망, 욕망과 좌절을 담아낼 수 있는 특유의 통속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체홉 작품 특유의 침묵과 절제의 미학을 포기하고, 통속극 방식의 자극과 도발의 독법을 선택한 이윤택 연출의 <세자매>는 분명 쉽고 재미있는 대중적인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만큼 원작이 지닌 정서, 곧 가고 싶고, 말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었지만, 결국 끊임없는 망설임 속에 인생을 놓쳐버린 세 자매의 회한어린 정서는 느끼기 힘들어졌다. 어떤 방식의 해석이 원작 또는 관객의 취향에 보다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제 관객의 몫으로 남아있다. 다만 과거 전통적인 방식의 해석과 차별화 된 방식의 새로운 <세자매>가 체홉의 작품 보는 즐거움을 더하게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듯 보인다.(박준용_연극평론가)

08. 04. 18.

P.S.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한 영화 버전의 <세자매>(1970)는 http://www.youtube.com/watch?v=saiH6HJH2Zw 참조. 도입 장면에서 암시되지만 세자매는 세월에 흐름에 맞서고자 하는 운명의 세 여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윤택 버전에서는 너무 '속물'로만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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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2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홉의 소설은 재밌는데 희곡은 아직...왜 희곡은 읽기가 싫은지 모르겠어요.그래서 셰익스피어 전집도 사놓은지 5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안보고 있어요.

로쟈 2008-04-20 00:25   좋아요 0 | URL
독서일기를 내려면 읽어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주중에 서점에 몇 차례 들러본 탓인지 주말 북리뷰에 올라온 책들 가운데 낯선 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실물을 만져보지 못한 책이 하나 있는데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대작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그린비, 2008)가 그것이다. 제목부터 사실 학위논문 타입인데, 실제로도 그런 것으로 안다(원저는 1969년에 나왔다). 마치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가 그렇듯이(이 책도 박사학위 부논문으로 제출되었던가 그렇다). 

저자인 마트롱은 평생을 스피노자만 파고 들어간 소위 '전문가'이다. 당연히 이 책 또한 '교양서'라기보다는 '전문서'로 분류되어야겠지만 '스피노자 붐'에 고무되어 서가에 꽂아놓을 수는 있겠다. 역시 최근에 나온 피에르 프랑수아 모로의 <스피노자>(다른세상, 2008) 같이 얇은 책으로 먼저 워밍업을 한 다음에 내처 몇 장 들춰볼 수도 있겠고(모로는 마트롱의 제자인 듯하다). 개인적으론 저자가 획기적인 스피노자 연구서를 썼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런 학술서가 전격적으로 번역돼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다(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라면 부럽기도 하고 좀 뜨끔한 일이기도 하겠다). 이런 기세라면 <신학 정치학 논고>도 조만간 번역돼 나올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82743.html).   

한겨레(08. 04. 19) '윤리학’ 스피노자에서 ‘정치학’ 스피노자로

‘스피노자 부흥’은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지적 사건 가운데 하나다. 그 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프랑스이고, 발생 시점은 1960년대 말이다. 1969년을 전후해 마르시알 게루의 <스피노자>, 질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그리고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거의 동시에 출간됐다. 스피노자가 헤겔-마르크스의 지위를 위협·대체하며, 인간·사회·정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철학적 준거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 사건을 일으킨 저작 중에서도 특히 마트롱의 저작은 철학 전문 연구자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은 긴 잠복기를 거쳐 1990년대 이후 대중적 파급 효과를 낳았다. 현대 스피노자주의의 탄생을 알린 이 책이 스피노자 전공자들의 번역 작업을 통해 우리말로 나왔다.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1632~1677·사진)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기 전까지는 ‘생계를 위해 안경알을 깎은 은둔의 현자’ 아니면 ‘범신론을 주창한 신비주의자’라는 이미지로 통용됐다. 종교에 대한 도전적 해석으로 일찍이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하고, 또 <신학-정치학 논고>가 17~18세기 정치적 지배세력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을 정도로 당대 현실과 깊이 연루돼 있었는데도, 그는 오랫동안, 탈속세적 은자로 묘사됐다. 그의 사상에 관한 연구도 주저인 <윤리학>(에티카)에 집중됐고, 정치철학 저술인 <신학-정치학 논고> <정치론>은 논외로 밀려나거나 <윤리학>과 무관한 부차적 저술로 간주됐다. 그러나 마트롱에 이르러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스피노자를 넘어 ‘정치학’의 스피노자로 재탄생했다. 특히 마트롱의 저서는 윤리학에서 정치론까지 스피노자 사상을 수미일관한 통일적 전체로 다시 세움으로써 스피노자 연구에 관한 한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현저한 특성은 ‘방법론적 엄밀성’이다. 스피노자 <윤리학>이 수학적 추론과 논증의 방식을 따르듯이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도 하나의 명제에서 이후의 명제가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빈틈없는 논리적 방식으로 서술된다. <윤리학>에서부터 <정치론>까지 스피노자의 모든 텍스트가 그 내적 논리를 따라 배치되면서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져 논리의 건축물로 일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또다른 특성은 ‘정치 문제’야말로 스피노자의 진정한 철학적 문제였음을 입증한다는 데 있다. 옮긴이들은 말한다. “스피노자와 정치라는 문제는 이후 네그리나 발리바르에 의해 한층 급진적으로 제시되지만, 그럼에도 처음으로 정치의 문제를 스피노자의 ‘진정한 K제기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책의 의의라 할 수 있다.”

번역본으로 900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저작의 첫 문장은 스피노자 <윤리학>의 유명한 명제로 시작한다. “각 사물은 자신의 존재역량에 따라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코나투스 테제’로 불리는 이 명제에 대해 마트롱은 “스피노자의 정념론·정치학·도덕론 전체를 아우르는 단일한 출발점”이라고 단언한다. 스피노자 철학의 모든 것이 이 명제를 뿌리로 삼아 거대한 수목으로 자라오른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코나투스’(conatus)란 ‘어떤 개체 안에 존재하는 자기 보존의 무의식적 의지 또는 욕망’이라고 풀어쓸 수 있는 개념이다. 어떤 개체든,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이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다고 스피노자는 본다.

이 코나투스에서 ‘정념’의 문제가 뒤따른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념은 기쁨·슬픔, 사랑·미움과 같은 정서적 양태들을 가리킨다. 기쁨이란 “정신이 자기 코나투스와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외적 원인의 영향 하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느끼는 정념”이다. 반면에 슬픔이란 “정신이 자기 코나투스와 대립하는 외적 원인의 영향 하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느끼는 정념”이다. 풀어쓰면, 기쁨이란 자기보존 욕망이 실현돼 자기가 더 커질 때 느끼는 감정이며, 반대로 슬픔이란 자기보존 욕망이 방해받아 자기가 더 작아질 때 느끼는 감정이다. 또 사랑이란 기쁨의 정서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 집중이며, 반대로 미움은 슬픔의 정서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부정적 집중이다.

그런 정념적 존재로서 ‘개체’는 ‘개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공동체’도 하나의 집합적 개체를 이룬다. 그렇다면 그 집합적 개체로서 공동체 안에도 코나투스와 거기에 뒤따르는 기쁨·슬픔, 사랑·미움의 정념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기쁨과 사랑이 커진다면 그 공동체는 완전에 더 가까워진다. 마트롱은 바로 이 지점에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적 중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스피노자 철학은 ‘해로운 정념’을 줄이고 ‘유용한 정념’을 키울 정치체제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지를 논구하고 있다는 것이다.(고명섭기자)

08. 04. 18.

P.S. 마트롱이란 이름이 아주 낯설지는 않은데, 알고 보니 알튀세르 저작들을 주로 편집한 이가 프랑수와 마트롱이기 때문이다. 서로 인척 관계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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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8-04-19 01:51   좋아요 0 | URL
번역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우리말 제목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부사격 조사 “~에서”를 위와 같은 명사구에서처럼 쓰는 것은 오류입니다. 관형격 조사 “~에서의”로 고쳐야 합니다. 혹은 그냥 『스피노자 철학의 개인과 공동체』로 하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예컨대, 〈번역에서 오독과 오역〉, 〈한국어에서 조사의 문법적 성격〉, 〈이명박 정부에서 대운하 건설 계획의 시대착오적 성격 고찰〉, 〈한국 대학원생들에서 우리말 문장 구사 실태 연구〉 따위의 논문 제목이나 책 제목이 있다고 칩시다. 모두 얼마나 어색하고 이상합니까? 관형격 조사를 쓸 자리에 부사격 조사 “~에서”를 잘못 갖다 붙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제목도 이런 사례와 똑같이 어색하고 잘못된 오류를 저지른 사례입니다. 요즘 한국의 대학원생들이나 젊은 교수들 사이에 “~에서 뭐뭐” 식의 제목 붙이가 성행하고 있는데요, 올바른 우리말 구사에 대한 개념을 결여한, 말 그대로 개념 없는 대학원생들이나 교수들의 오류에 지나지 않습니다.


qualia 2008-04-21 13:04   좋아요 0 | URL

juin 님, 토론 감사합니다.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답변드립니다.

① juin 님 : 기존의 용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의미를 혼동하게 할 위험이 크지 않다면 기존의 문법적 분류에 의해서 '완전하지 않은' 문장이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콸리아qualia 답변 : 저도 기본적으로는 juin 님의 위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경우에도 몇 가지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첫째, 위와 같은 허용 사항을 둔다고 해도, 무엇보다도 먼저 문법적으로 올바른지 아닌지 따지는 분석 작업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말글 유형들을 현재 폭넓게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적법성 검토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 그에 대한 최종적 허용 · 수용은 일종의 제도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언중의 일상적 · 탈문법적 · 시류적인 언어 사용이나 글쓰기에 대한 그와 같은 정리 작업 혹은 길잡이 작업이 없다면, 우리의 말글 생활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올 것입니다.

㉡ 둘째, 고급 교양서나 학술서나 논문 따위에서 ‘완전하지 않은’ 문장을 (그것이 언중에서 통용된다고 해서) 갖다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적어도 출판계의 편집자, 번역가, 저술가 분들은 가능하다면(!) 단 하나의 오류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하고 주의해야 할 줄로 압니다.

㉢ 셋째, 제가 아래의 댓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부사격 조사 “~에서”를 관형격 조사처럼 사용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적법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사격 조사 “~에서”를 관형격 조사로 변칙 전용해도 된다는 법칙이나 규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말의 미묘한 어감(말느낌)에 비춰볼 때도 그런 오용은 매우 어색합니다. 따라서 문법적으로 오류임이 분명한 것을 대중서도 아닌 학술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② juin 님 : 이 경우, '에서의'가 '에서'에 비해 더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주는 것 같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 콸리아qualia 답변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말에서 조사는 의미의 미묘한 차이와 분화를 아주 다양하게, 따라서 아주 세밀하게, 따라서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기능을 합니다. 한 문장에서 똑같은 조사 하나 가지고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180도 다른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는 게 우리말입니다. 또 그 똑같은 조사를 문장 성분의 어디에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한 문장의 의미가 변화무쌍하게 바뀝니다. 바로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과도 상통하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에서”와 “~에서의”가 함축해줄 수 있는 의미의 차이는 매우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하나는 부사격, 다른 하나는 관형격이므로 기능도 다르고요. 기능이 다르면 당연히 함축하는 의미도 다르잖습니까? (이에 관한 내용은 너무나 평범하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구체적 용례는 생략하겠습니다).

③ juin 님 : '에서'로 멈춤으로써 겪는 미완의 느낌, 불안한 느낌은 적응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데, 혹자가 '에서의'에서 느낄 껄끄러움도 그에 못지 않게 강한 감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콸리아qualia 답변 : 비문법적이지만, 어감으로는 오히려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말글이 분명 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문법적으로는 올바르지만, 어감으로는 껄끄럽고 덜컹대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말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은 말글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에 말느낌 혹은 어감의 문제는 본질적이기보다는 이차적 · 부차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봅니다. (물론 어감의 문제가 이차적 · 부차적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따라서 ‘~에서의’가 껄끄러운 느낌을 준다고 해서 쓰지 못할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껄끄러움이나 어색함을 그다지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서'로 멈춤으로써 겪는 미완의 느낌, 불안한 느낌은 적응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 말씀하셨는데요,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같은 사용례는 분명 잘못이므로 적응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관형격 조사로서 그 적법한 역할을 적법한 위치에서 제대로 하는 “~에서의”나 “~의”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굳이 잘못된 조사를 일부러 사용해가면서까지 적응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qualia 2008-04-26 17:02   좋아요 0 | URL

juin 님, 재반론 감사합니다. 답변이 늦어 매우 죄송합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답변 드리겠습니다.

① juin 님 → 그러나 qualia님의 답변으로도 아직 회의가 해소되지 않습니다. '에서의'라는 형태가 확신하시는 것처럼 정말 문법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즉 '에 있어서(의)'와 대동소이한 유래가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만약, 제 회의가 정당하다면, 문법적으로 바르지 않은 혹은 정통적이지 않은 '에서의'를 사용하는 것과 '에서'를 부사격에서 관형사격으로 확장적용하는 것, 두 대안이 생깁니다(이견이 없는 '(스피노자 철학)의' 를 제외할 때).

⇒ 콸리아qualia 답변 : 문법적으로 옳은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말은 “교착어”라고 하지 않습니까. 즉,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또는 어간에 문법적인 기능을 가진 요소가 차례로 결합함으로써 문장 속에서의 문법적인 역할이나 관계의 차이를 나타내는 언어”라는 것이죠(네이버 사전 인용). 여기서 문법적 기능을 가진 요소란 바로 어미, 조사, 혹은 조사 상당 어구 따위를 가리킵니다.

우리말에서는 이 조사가 단독으로 쓰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조사 여러 개가 결합하여 하나의 복합 조사처럼 쓰일 수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3중, 4중, 5중, 혹은 그 이상의 결합 조사가 쓰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실제로는 대체로 3중 조사까지만 쓰이지만).

아시다시피 “~에서의”는 〈에서 + 의〉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말 문법에서 완전히 정당한 조어법입니다. 사전을 살펴보면, “~에서”는 장소 · 출발점 · 기준점 따위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로 나와 있고, “~의”는 소유 · 소속 · 귀속 · 인과 따위의 관계를 나타내는 관형격 조사로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에서의”는 두 개의 조사가 결합된 이중 조사인 것이죠.

사전을 보면 이와 같은 이중 조사가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예컨대, “~에서라야”, “~에서부터”, “~에서야말로”, “~에서처럼”, “~에서조차” 따위는 모두 두 개의 조사가 결합된 이중 조사들입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3중 조사도 흔히 쓰이는 것이 많죠. “한국에서조차도”, “한국에서부터도”, “한국에서까지도”와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조사들끼리 서로 결합해서 아주 다양한 의미의 분화를 산출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미묘한 의미 생성 능력 혹은 기능이 우리말 조사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말의 뛰어난 장점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우리말 조사의 기능 · 속성을 놓고 볼 때, “~에서의”의 기원은 바로 우리말 조사 자체의 조어 능력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사들끼리 자유롭게 결합해 세밀한 의미의 차이를 생성하는 원초적인 능력 말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할 논거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 있어서”는 우리말 기원 자체가 없습니다. 이수열 선생님께서는 “~에 있어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일본어 ‘~いお(於)て’를 직역한 것으로 우리말에는 전혀 필요없는 기형인데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굳이 써서 공연히 시간과 공간, 노력을 낭비하고 우리말의 위상을 훼손한다. [이수열 (1999).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 현암사. 325쪽.]

예문을 들어서 설명해보죠. 〈번역에 있어서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를 봅시다. 〈번역에 있어서(는)〉 부분을 억지로라도 분석한다면 다음처럼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즉, “번역을 하는 상황에 있을 때는” → (축약해서) → “번역에 있어서는”으로 분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억지 분석이죠. “번역에 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말이 되지 않으므로 분석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우리말에서 그 기원을 처음부터 아예 찾을 수 없는, 일본말투를 흉내낸 기형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런 우리말답게 〈번역에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면 얼마나 깔끔한가요. 혹은 〈번역을 할 때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므로 “~에서의”와 “에 있어서”를 같은 범주로 다룰 수는 없는 것이죠. 하나는 완전한 우리말이고, 하나는 본디 우리말법에는 없는 일본식 말투를 무분별하게 흉내낸 기형어이니까요. 이것으로써 어느 정도 충분한 답변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② juin 님 → 그리고 오해를 무릅쓰고 약간 군말을 달아야 될 것 같습니다. '에 있어서(의)'나 '에서'의 확장에 대한 qualia님의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보여서요. 예컨대 아래 로쟈님에 대한 답글에서 '직역 개념 아래에서'라고 쓰셨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뭐뭐 '아래에서' 혹은 뭐뭐 '위에서'라는 표현도 '에 있어서'만큼이나 정체가 모호한 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면서 저도 불가피하게 쓰곤 합니다만). '아래에서' '위에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신지요?

⇒ 콸리아qualia 답변 : “~아래에서”라는 말은 그 정체가 결코 모호한 말이 아닙니다. 아주 흔히 쓰는 말이고, 우리말법에도 전혀 어긋날 것이 없는 완전한 우리말 관용어입니다. 주인(juin) 님의 위와 같은 오해는 명사 “아래”의 표면적 의미만을 생각하시고 그 비유적 · 은유적 ·상징적 의미 따위를 고려하지 않은 까닭인 듯합니다.

아시다시피 “아래”는 본래의 공간적 · 수량적 의미말고도 (예컨대 “한 지붕 아래에서”, “서른 살 아래” 따위) 상황 · 조건 · 환경이라는 의미로 쓰일 수도 있는 낱말입니다. 예컨대, 〈한국과 같은 지적 풍토 아래에서 비판 행위는 자살 행위와 마찬가지다〉, 〈엄하신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왔다〉 따위가 그런 사례이죠.

따라서 “직역 개념 아래에서”라는 표현은 전혀 모호한 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말법에도 전혀 어긋나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으로써 제 답변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토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qualia 2008-04-19 05:20   좋아요 0 | URL

번역서 제목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 부사격 조사 “~에서”의 적용이 왜 잘못인지 간단하게 제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① 본디 “~에서”는 주로 장소, 영역, 분야, 출발점, 기준점 따위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로 쓰거나, 주어 구실을 하는 단체명에 붙여 주격 조사로도 쓰는 형태소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이명박이라는 인간에서 위선, 기만, 비양심의 극치를 발견한다〉거나, 〈경제개혁연대와 참여연대에서 삼성 특검의 기만적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와 같은 예가 그렇습니다.

이때, 부사격 조사 “~에서”가 붙은 부사어는 서술어와 호응하여 하나의 완전한 문장(즉 구가 아닌 절)을 구성해야 자연스럽습니다. 이와 달리,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같이 서술어가 없는 명사구에서처럼 쓰게 되면, 문장이 완결되지 않아 불완전한 표현이 되고 맙니다. 코도 풀다가 중간에 그만둔 것처럼, 느낌이 영 개운치 않은 불완전한 구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개인과 공동체” 혹은 그냥 “스피노자 철학의 개인과 공동체”와 같은 완전한 명사구로 표현해야 올바를 것입니다.

② 이수열 선생님께서는 저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1999, 현암사, 182-200쪽 참조)에서 “~에서의”, “~에로의”, “~로부터의”, “~에의”, “~으로서의” 따위와 같은 이중 삼중 조사가 일본어 직역투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올바른 우리말을 좀먹는 오류라고 비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말본에는 맞지 않으므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이수열 선생님의 기본적인 비판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합니다만, 위와 같은 이중 삼중의 조사들이 순전히 일본어 (번역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말의 매우 뛰어난 특징이자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사들이 지닌 유연하고 무궁무진한 활용성과 결합성과 적응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말에서 조사는 문장의 어떤 성분, 어떤 품사, 어떤 형태에라도 자유롭게 가서 붙어, 다양하게 기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미묘하고 변화무쌍한 의미의 분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즉 위와 같은 이중 삼중의 조사들은 원초적으로 한국어가 지니고 있는(있었던) 무궁무진한 활용성, 결합성, 적응성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위와 같은 이중 삼중의 조사들을 일본어 번역투라 규정하고 우리말에서 모조리 제거한다면, 그것은 가장 우리말다운 우리말의 장점이자 특징을 거세해버리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수열 선생님께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에서 주장하신 다른 내용들은 대부분 타당하다고 봅니다. 몇몇 가지 논란점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저는 우리말 바로 쓰기에 힘쓰시는 이수열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따라서 위 번역서의 제목을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개인과 공동체”로 고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③ 이미 다 드러난 사실이지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라는 제목에서 “철학에서”는 부사어입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이 부사어에 호응하는 단어는 제목 안에 없습니다. 즉 부사어는 관형어나 서술어를 수식하는 성분인데, 제목 안에 그와 호응하는 관형어나 서술어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위 제목은 완결되지 못한 채 어정쩡한 구문에 머문, 불완전한 표현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부사어 “철학에서”는 “개인과 공동체”라는 명사구를 꾸며주는 관형어 “철학에서의”나 “철학의”로 고쳐야 올바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완전한 명사구의 제목이 됩니다.

④ 이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오류들이 너무나 많이 난무하기에 뻔한 내용을 중언부언했던 것입니다. 예컨대, 영어나 프랑스어를 가르치거나 배울 때 문법적으로 얼마나 자잘하게 따집니까? 그런 자잘한 사항들 가지고 토익이니 토플이니 하는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따려고 그렇게들 맹렬히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말은 그냥 슬슬 대충 넘어간다? 바로 이런 태도들이 개념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로쟈 2008-04-20 10:02   좋아요 0 | URL
"우리말의 매우 뛰어난 특징이자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사들이 지닌 유연하고 무궁무진한 활용성과 결합성과 적응성"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에서'를 '-에서의'로 대체하는 게 어감상 더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둘다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기본적으론 chez/in Spinoza 같은 표현을 번역하려다 보니 만들어진 것이고, 말씀대로 '스피노자의 개인과 공동체' 같은 우리말로는 가장 자연스럽다는 생각입니다. 자연스러움이 척도가 되어야 한다면...

qualia 2008-04-21 13:25   좋아요 0 | URL
제가 위에서 juin 님께 답변드렸듯이, 로쟈 님의 어감 문제에 관한 언급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답변드릴 수 있습니다. 즉 문제의 핵심은 문법적인 옳고 그름이라는 것입니다. 어감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고요.

(직역 개념 아래에서) “chez/in Spinoza”와 같은 원문에 너무 얽매여 우리말 문법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저도 “스피노자 철학의 개인과 공동체”로 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승주나무 2008-04-19 16:13   좋아요 0 | URL
한때는 세상에 철학자가 스피노자만 존재하는 것처럼 빠져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다소 정적인 나의 인식은 경험론보다는 대륙의 합리론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들뢰즈의 <표현의 문제>는 사실 소화하기 너무 어렵더군요. 로쟈 님이 올리신 글을 보니 <표현의 문제>에 못지 않은 심도 있는 책이 것 같은데~
찜했다가 스피노자를 떠올릴 때 다시 꺼내 읽어야겠습니다.
좋은 안내글 잘 봤습니다^^

로쟈 2008-04-20 10:05   좋아요 0 | URL
국내 '스피노자 붐'은 좀 과장된 면이 있는데, 전공자들이 불만스러워하는 <에티카> 번역만이 하나 있었을 뿐이니까요. 학계 최고수준의 고급 학술서들이 '교양서'처럼 번역되고 읽히는 건(누가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좀 특이한 현상입니다. 다른 분야와의 형평성을 고려한다면 말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4-19 23:50   좋아요 0 | URL
이오덕 선생도 에서의,에 있어서의...이런 표현 되게 싫어하더라구요.음...어떻게 해야 하나...
저는 스피노자에 대해 잘 몰랐는데 요즘 스피노자 르네상스로군요.음...

로쟈 2008-04-20 10:07   좋아요 0 | URL
번역투이긴 한데, 말이란 게 유기체 같은 것이서 일률적으로 '단죄'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입니다. 어법에 맞지 않는 인터넷 언어들도 그렇구요...

qualia 2008-04-21 14:15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 님, 좋은 사례를 지적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에 있어서” 혹은 “~에 있어서의” 하는 투는 전형적인 일본어 직역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용례에 관해서는 이수열 선생님께서도 일본어 직역투라고 강하게 비판하셨죠.

저는 글을 읽다가 이런 표현과 마주치면 읽는 글 전체가 보통 천박 · 조잡해 보이는 게 아닙니다. 친일파 계통의 닳고 닳은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이 걸핏하면 “~에, 또” 하는 어투와 함께 즐겨쓰던/쓰는 일본어식 말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에 있어서” 혹은 “~에 있어서의”, “~에 있어서는” 하는 투는 우리말 문법으로는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기형이라고 봅니다. 이 말투들은 아예 우리말 기원부터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뭐가 있기는 있다는 것인지 툭하면 갖다 붙이는 “~에 있어서”라는 이상한 말투, 정말 읽기도 듣기도 싫더군요.

예컨대, 〈번역에 있어서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는 사례를 봅시다. 이것은 그냥 〈번역에서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 혹은 〈번역을 할 때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면 아주 우리말답게 되죠. 번역에 있어서는??? 이런 기형적 표현이 전혀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죠. 이제 이런 따위 일제의 찌꺼기 같은 말들은 우리말글에서 모두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22 00:20   좋아요 0 | URL
이오덕 책은 구수한데 이수열 책은 학습 참고서 같았어요.여하튼 우리글 우리말 공부할 땐 필독서죠.물론 다 받아들이진 않죠.
예전 박영문고에 에티카 번역본이 있던 기억이 나네요.요즘은 절판...싸고 좋았는데...책세상 것은 문고판 치곤 좀 비싸고요.

로쟈 2008-04-22 19:43   좋아요 0 | URL
<에티카>도 추천 번역본이 없는 고전 중의 하나죠...

누굴까 2008-04-22 12:30   좋아요 0 | URL
서광사에서 나온 에티카 개정판은 개정판이 아니라 오자,탈자 정도만 수정한 거라는 댓글이 달려있던데 .... 로자님.. 번역이 믿을만 한 것인지 조언 부탁드려도 될까요 ?

로쟈 2008-04-22 19:44   좋아요 0 | URL
개정판은 제가 안 갖고 있습니다. 번역에 대한 건 스피노자 전문가들에게 문의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우리 밥상과 먹거리에 관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물론 갑작스러운 건 아니지만 두툼한 저작들이 연이어 출간되면서 뭔가 '트렌드'가 되어 가는 듯도 하다. 최근 출간된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산책자, 2008)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들을 꼽아본다...


1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죽음의 밥상-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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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해방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인간사랑 / 1999년 11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430원(3% 적립)
2008년 04월 16일에 저장
구판절판
사육과 육식- 사육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리처드 W. 불리엣 지음, 임옥희 옮김 / 알마 / 2008년 4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8년 04월 16일에 저장
절판
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8년 04월 16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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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4-17 14:03   좋아요 0 | URL
피터싱어의 책밖에 읽은 게 없네요. (긁적) 트렌드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곡물 값이 올라서 지구 저 편에서는 살인도 일어나고 있으니깐요.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렵네요. ㅠ_ㅠ

로쟈 2008-04-17 23:06   좋아요 0 | URL
저도 직접 읽은 건 별로 없습니다. 리뷰들만 열심히 읽었죠.^^;

Joule 2008-04-17 23:20   좋아요 0 | URL
존 로빈스의 '육식 혁명'이 빠졌어요. 괜찮은 책인데.

로쟈 2008-04-17 23:39   좋아요 0 | URL
추가했습니다. 다이어트에 관한 책으로 알았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8-04-18 08:38   좋아요 0 | URL
요즘 웰빙이다 하며 무지 비싼 유기농 음식을 먹으며 운동하는게 유행이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동물과 식물이 살만하면 사람도 잘 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기름 잔뜩 들여 기계로 생산하고 비행기로 운반해온 수입산 농산물을 먹으며, 주변 자연 다 죽이고 세운 골프장에서 운동한다고 사람이 잘 살 수 있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긴해요.. 전 고기가 너무 좋아서 채식을 할 수 없을거 같아요 ㅠ.ㅠ 사실 몇번 시도는 해봤습니다만 ㅎㅎ 표지가 마음에 드는데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
존로빈스는 베스킨라빈스31의 상속자라지요?

로쟈 2008-04-18 13:56   좋아요 0 | URL
먹거리와 관련해서 딜레마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moonrise 2008-05-10 11:00   좋아요 0 | URL
<육식의 성정치>와 <프랑켄슈타인>은 같은 책인데, 이후에 나온 걸 구입하시는 게 가격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나을 듯합니다. 참, <로컬 푸드>와 <희망의 경계>를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나저나, 저는 <죽음의 밥상>이라는 제목이 왜 이렇게 싫을까요?

로쟈 2008-05-10 11:1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 <죽음의 밥상>은 아마도 원제에 '윤리학'이 들어가 있어서 출판사에서 바꾼 것 같고요, '자극적'이긴 하나 요즘 '광우병' 파문과는 잘 맞아떨어지는 듯합니다. 덕분에 많이 읽힌다면 묻히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싶어요...
 

출판 동향에 조금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독서와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최근 몇 년간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문학동네, 2008)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알라딘에서만 그런가?). 그밖에도 '독서법'과 관련된 책들을 여럿 더 떠올려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리뷰기사가 있기에 챙겨둔다. 교수신문의 기획서평이며 필자는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이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926).

교수신문(08. 04. 14) '방법으로서의 독서’가 유행하는 시대

책에 관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이런 규칙을 누구나 지켜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읽지 않은 책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말아야 하고, 글 한 줄도 써서는 안 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묵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고교 시절 『죄와 벌』을 읽다가, 쏟아져 나오는 러시아 사람들 이름에 기가 질려 책을 덮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죄와 벌』을 읽지 않은 필자 같은 사람은 『죄와 벌』에 관해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파리 8대학교 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에서, 반드시 어떤 책을 읽어야만 그 책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잘 알지 못하거나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한 책에 대해서도 견해를 제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다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을 할 수밖에 없으며, 중요한 것은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요컨대 특정의 책 한 권 한 권이 아니라 책들 사이의 소통과 연결선이 중요하다는 것.

사실 책과 독서에서 ‘소통과 연결선’이란 한 권의 책을 읽는 가운데에서도 매우 중요하며, 이미 모든 독서인이 어느 정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책 속 단 한 줄의 문장이라도 그 문장은 무수히 다른 책들 및 문장들과 差延하며 交織돼 있는 게 아니던가. 이러한 책과 독서의 진실은 이른바 하이퍼링크에서 더욱 분명하게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피에르 바야르의 독서론은 이른바 정보 리터러시(information literacy)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예컨대 노우웨어(know-where), 즉 유의미한 지식과 정보를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아는 것이 곧 ‘아는 것’이기도 하다는 정보사회의 새로운 지식론과 바야르의 독서론은 일맥상통한다.



한편 독일 작가 마틴 발저는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미래의 창)에서 “글이 남긴 인상을 기억하는 것이 그 글의 의미를 해석하고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욱 값지다”고 말한다. 예컨대 발저는 젊은 시절 바이런을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가 떠올리는 것은 당시 읽었던 바이런의 詩句가 아니다. 오히려 시를 읽을 때, 그늘을 드리워주었던 마당의 나무, 머리 위의 하늘, 마음에 차 있던 생각, 요컨대 시를 읽는 한 순간을 둘러 싼 모든 것들이다.

그러한 발저가 자신의 작품을 읽고 그 의미를 묻거나 나름의 해석이 맞는지 물어오는 학생들의 편지에 이렇게 답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나는 특별한 뜻을 두지 않았다. 독자 개개인이 스스로 느끼고 독서를 경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권리이다.” 발저는 선생님들에게도 이렇게 부탁했다. “선생님이 두고 있는 의미에 얼마나 근접했는가에 따라 점수를 주지 말고, 학생 자신의 독서 경험을 전달하는 능력을 점수에 포함시켜 주십시오.”

발저는 계속해서 독서의 주관성 혹은 주체성을 강조한다. “책읽기는 음악을 듣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 거기에서 악기는 우리 자신이다. 우린 연주한다.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횔덜린의 악보에 맞춰 연주하는 것이다.” “책이 우리의 내면에서 활동할 때 우리는 조금도 수동적이지 않다. 책에서 아픔과 불안이 나타날 경우, 그것이 우리가 경험했던 아픔과 불안과 더불어 인생에 자극을 주지 못하면 책은 단지 종이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피에르 바야르의 독서론을 ‘사이와 연결의 독서론’, 마틴 발저의 독서론을 ‘주체성의 독서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두 입장은 서로 배척하기보다는 오히려 깊이 상통한다. 역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면 독서에서 사이를 연결하는 주체는 독서인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야르와 발저의 독서론이 각각 프랑스와 독일의 지적 풍토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점이다. 요컨대 두 입장이 깊은 지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상통하면서도, 바야르의 입장이 이른바 상호텍스트성에 보다 주안점을 두는 데 비해, 발저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주체성을 보다 강조한다.



다음으로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문학동네)이다. 이 책은 앞의 두 책에 비해 훨씬 더 실용적이다. 작가 자신의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이른바 슬로 리딩, 즉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책 속에 숨겨진 수수께끼와 비밀을 속속들이 발견하고 즐기기 위한 방법을 안내한다. 히라노의 슬로 리딩이 추구하는 바는 저자의 의도 그 이상의 흥미 깊은 내용을 독자 스스로 자유롭게 발견해내는 誤讀力을 기르는 것이다. 독자 나름의 이른바 창조적 오독이야말로 독자의 내면을 진정으로 성장시킨다는 것.

그렇다면 히라노가 말하는 슬로 리딩이란 단순히 책을 천천히 읽는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책을 읽는 속도, 즉 시간 요소에 구애받지 않는 독서라고 하는 편이 낫다. 구체적인 방법을 보면, 책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 주저 없이 이미 읽은 앞부분으로 되돌아가는 것, 밑줄을 긋고 표시를 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슬로 리딩은 작자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언제나 오독력에만 의지하는 것과도 다르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도 늘 독선적인 결론만 이끌어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독선적인 책읽기는 창조적 오독과 거리가 멀며, 독자로서의 가능성을 스스로 편협하게 만들 뿐이다.



한편 책 읽기와 책 쓰기에서 공히 달인이라 할 만한 사람, 바꿔 말하면 지식정보의 입력과 산출에서 공히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으로 다치바나 다카시가 있다. 그는 이른바 논픽션 분야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머리와 발로 함께 쓰는 책, 다시 말해서 현실 문제에 착안해 직접 발로 뛰며 취재와 인터뷰를 하고 관련 도서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해 쓰는 책에서 뛰어난 저자다. 그런 다치바나가 논픽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계기를 그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청어람미디어)에서 엿볼 수 있다.

“문춘(문예춘추)에 입사하자 한 선배로부터 ‘자네는 어떤 책을 읽나’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이것저것 답변을 하고 보니 그게 온통 소설뿐이지 뭡니까. 그러자 그 선배가 ‘그런 것만 읽어선 안 되지. 논픽션도 읽게’라고 했어요. 엄청난 양의 문학서를 읽음으로써 남 못지않은 문화인입네 하고 있었지만, 실상 나 같은 문학 편식자는 이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가치 있는 책의 태반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지요.”

저널리스트로서의 직업적 필요성과 광범위한 지식에 대한 호기심 및 지식욕이 결합된 결과가 바로 다치바나의 지금까지의 지적 행로였다. 그런 다치바나의 독서 편력이 기록된 이 책을 읽어보면, 문필가적 상상력이나 창조성이라는 게 결코 골방에서 홀로 피워 문 담배 개피 수효에 비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다치바나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영 같은 창작물의 세계는 시시하고 밑바닥이 너무 얕다.’ 물론 다치바나의 이러한 입장을 문학적 상상력 일반에 대한 질타라고 보기는 힘들며, 오히려 진정한 상상력이란 딱딱한 현실과 광범위한 지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바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저자인 히라노와 다치바나의 독서론은 매우 실용적이어서 ‘방법으로서의 독서’에 보다 충실한 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견강부회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면, 유달리 다양한 실용서가 발달한 일본의 출판 및 독서 풍토를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히라노와 다치바나의 독서론에서도 우리는 일종의 독서인간학 같은 걸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다치바나의 경우, 독서하는 인간은 결국 좀 더 많이 좀 더 정확하게 인간과 세계를 알고 싶다는 지적 호기심을 지닌 인간이다. 책의 우주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호기심을 동력으로 삼는 우주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정확하게 독서론으로 보기는 힘들 것 같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매우 진지한 독서론의 범주에 드는 책이 있다. 미국 문학비평계의 거장 헤럴드 블룸의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루비박스)다. 2003년 9월 스티븐 킹이 전미도서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블룸은 이렇게 말했다. “싸구려 모험 소설이나 쓰는 작가가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우리 문화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 말에서 블룸이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 그는 서양 ‘주류 정통’ 문학 및 사상 전통의 가치와 의미를 매우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책을 읽고 가르치는 이유에 관해 단지 세 가지 기준만을 설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미학적 훌륭함, 지적 능력, 그리고 지혜다. 사회적 압박이나 저널리스트 사이의 유행 때문에 한동안 이런 기준이 별로 주목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단순한 시대물들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아름다움과 진리와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블룸의 책 차림표가 플라톤과 호메로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 몽테뉴와 프랜시스 베이컨, 새뮤얼 존슨과 괴테, 에머슨과 니체, 프로이드와 프루스트, 토마스 복음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성경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고전과 철학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지혜를 천착하는 것이 블룸의 독서 목표인 것이다. 浮薄한 대중문화의 시대에 이러한 전통적인 正典의 가치와 의미를 재확인하고자 하는 불룸의 태도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독서라는 행위가 지녔던 진정성과 어떤 숭고함 같은 것을 회복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블룸의 진지함은 시대착오적이기보다는 고전 르네상스라는 차원에서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최근 들어와 독서에 관한 책들이 전에 없이 자주 출간되는 현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독서의 목적과 방법이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해지고, 책이라는 오래된 매체의 의미와 위상이 흔들리는 현실과 상관있는 게 아닐까. 요컨대,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셈이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8.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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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17 23:49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가 고전문학을 폄하하는 건 수용하기 힘듭니다.더군다나 로망 롤랑이 19세기 작가라니..아무리 중학교 이후 문학서적 소홀히 했다해도 무슨 그런 실수를...히라노의 독서론은 새겨들을 만합니다.특히 외국 소설 읽다가 지명이나 인명이 생각 안나서 다시 앞에 돌아가 확인한다는 경험담은 저도 겪어봐서 친근감이 가더군요.
저는 한국인이 쓴 이런 류의 책으로는 장정일 <공부>를 추천합니다.특히 독일사 논쟁에 관한 책들의 해설은 발군입니다.안인희가 우익사관으로 히틀러를 해석한 시각을 맹공한 대목은 최고입니다.

로쟈 2008-04-18 00:11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의 문학에 대한 폄하는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 때문이란 설도 있더군요.^^ <공부>는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직접 대담을 나눌 기회도 있었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8 00:22   좋아요 0 | URL
아하...히라노는 오에를 지지하던데...으흠...그런 사연이...히라노의 독서법은 다치바나를 의식한 곳이 있더군요.
다치바나도 일종의 전향자...<일본공산당 연구>로 우익에 눈도장 찍었죠 뭐...일본 혁신계에서 나온 책을 보니까 다치바나의 일본공산당 연구를 엄청나게 비난했더라구요.다치바나가 박학다식한 건 이해하겠지만요.
저도 50세가 되면 그동안 쓴 독서일기를 다듬어 <공부>같은 책을 내볼까요...

로쟈 2008-04-18 00:26   좋아요 0 | URL
지금 내셔도 될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8 00:40   좋아요 0 | URL
너무 바람 넣으신다...하하하...

로쟈 2008-04-18 22:36   좋아요 0 | URL
내년까지 기한을 드리겠습니다.^^

marine 2008-04-18 15:23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 다카시가 문학을 폄하한다기 보다는, 문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낮게 평가되는 논픽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쓴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문학, 특히 고전을 폄하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논픽션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너무 무시하기 때문에, 그의 그런 강조가 의미있게 다가오더군요. 일종의 충격 요법이라고 할까요?

로쟈 2008-04-18 22:38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 자신이 문학에 경도됐던 시기도 분명 있었죠. 하지만 '과거형'으로만 말하지 않는지요. 제가 읽은 대목들에선 과학서적이 오늘날의 '고전'으로 읽혀야 한다고 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0 00:11   좋아요 0 | URL
미국이나 일본은 논픽션 작가에게 주는 상이 있을 정도로 이 분야의 독자층이 상당히 두꺼워요.부럽더라구요.재미도 있고...
저도 논픽션물이 재밌더라구요.그렇지만 명작 소설도 괜찮던데...다치바나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부터 이번의 <피가 되고...>까지 고전으로 알려진 문학에 대해서 읽을 필요가 없다고 계속 강조하더라구요.상당히 직설적으로...
 

오늘이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기일이라 한다. 1980년 4월 15일 몰. 언젠가 적어놓은 적이 있는데, 어린시절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죽음은 한 권력자와 한 철학자의 죽음이었다. 권력자는 1979년 10월 26일에 암살당했고 철학자는 그 이듬해 봄에 죽었다(곧이어 벌어진 5월의 학살은 언론 통제 탓에 당시로선 실상을 알 수 없었다). 기억에 모두 신문의 한면을 크게 장식한 죽음이었다. 아래 기사를 접하니 문득 그때 생각이 잠시 난다. 사진과 함께 부고 기사를 싣고 있던 신문지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연초에 새 번역본이 나왔다. 책에 대해서는 여러 장소에서 '강의'를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지난주에도 강의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었다!).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 봄밤인 탓이겠다...

한국일보(08. 04. 15) [오늘의 책<4월 15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1980년 4월 15일 사르트르가 75세로 사망했다. 문학비평가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가 곧잘 인용하는 사르트르의 비유가 있다. “비평가는 묘지기”라는 것이다. “… 묘지가 평화로운지 어떤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서재보다 더 기분 좋은 곳은 없다. 서재 속에는 죽은 사람들이 있다. 그 죽은 사람들은 밤낮 쓰기만 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납골당의 항아리 같이 벽을 따라 판자 위에 늘어놓은 조그만 관밖에는 없다.”(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비평가는 묘지(서재)에서 죽은 사람(저자)들의 관(책)을 더듬으며(독서), 거기에 숨결을 불어넣는(비평) 시체지기에 다름아니라는 비유다. 얼마 전 김 교수를 만났을 때는,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들었다. “‘20세기는 사르트르의 세기’가 아니라, ‘사르트르가 곧 20세기’였다는 거야.”

그 말대로 사르트르는 ‘그 자신 안에 20세기가 다 들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묘지기이자, 거리에서 앙가주망을 실천한 행동가였으며,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 가장 떠들썩한 화제를 만든 지적인 스캔들 메이커였고, 노벨문학상을 부르주아의 상이라며 거절한 악동이기도 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지옥, 그것은 곧 타인”이라는 그의 명제들을 빼고 20세기 후반 인류의 정신사조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1950년대 이후 문학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고,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논증한 그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1980년대까지 대학가의 필독서였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10월 29일 사르트르가 파리에서 한 강연을 담은 책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강연문이라는 특성상 이 자그마한 책은 그의 여느 글보다 더 명료하게 실존주의를 집약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실존주의자는 인간은 그 어떤 뒷받침도, 그 어떤 도움도 없이 매 순간 인간을 발명하도록 선고받았다고 생각한다…” 사르트르가 폭포수 같이 내뿜는 언어의 성찬이다.(하종오기자)

08. 04. 15.

P.S. 사르트르에 관해 예전에 쓴 페이퍼로는 '사르트르의 죽음과 철학'(http://blog.aladin.co.kr/mramor/7763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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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4-1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은 로쟈님의 서재를 열면서 새로운 페이퍼가 없다면 정체도 흔적도 없는 것같은 이 무기력을 추스릴 데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오늘 로쟈님의 페이퍼는 문자적인 정보와 앎을 넘어서 정말 실존적인 힘이 됩니다. 누군가의 봄밤 탓이 누군가에겐 힘이 되는 이런 일도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깃털처럼 가볍기 일쑤지만 묵묵한 한 걸음들의 가치들이 절감됩니다.

로쟈 2008-04-16 23:29   좋아요 0 | URL
봄에는 꽃들이 더 힘이 되어야 할 거 같은데요.^^;

수유 2008-04-1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묘지가 아름다워서... 저 군중들이 부러워서 가져갑니다.
봄밤엔 베토벤을 들으세요...책 읽으면서 ..
올 봄은 지 혼자서 피네요.ㅠㅠ

로쟈 2008-04-16 23:30   좋아요 0 | URL
단지 앞 목련은 벌써 다 졌습니다.^^;